Chapter Text
무심코 바라본 녀석은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웃는 얼굴은커녕 무표정한 맨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녀석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즐겁게 웃는 모습은, 하필 그 순간에 그 방향을 바라본 내 눈을 원망하게 했다. 포스니 뭐니 하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다크사이드니 라이트사이드니 하는 것들이 없었더라면 그 때의 너도 그토록 자신을 좀먹지 않고 저렇게 평범한 청년으로 자랐겠지. 지금처럼 사람들의 혼잡한 소음에 둘러싸여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겠지. 우리는 세계의 마지막을 그렇게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찰나에 스쳐간 생각들이 너무나 깊게 가슴을 쑤셔파서, 기어이 행사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며 나도 모르게 가던 걸음을 멈추었던가. 네가 인파를 뚫고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내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너는 이미 무안해진 오른손을 조금 움츠리고 있었다.
"어, 음, 글리슨 씨...?"
"어... 예, 반가워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과 달리 두 손은 덥썩 너의 손을 감싸쥐어 상황은 더욱 어색해졌다. 젠장, 너는 아직도 나를 골치아프게 하는구나. 자연스럽게 속으로 네 탓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네가 유쾌하게 웃으며 나머지 왼손도 들어올려 내 손을 마주 감싸쥐고 흔들었다.
"두 배로 반갑다는 뜻이죠?"
과거에는 온통 굳은살이 박혔던 손바닥이 이제는 마냥 부드러웠다. 키에 비해 골격이 작은 나와 달리 너는 뼈대도 덩치도 모두 나보다 커서, 네 두 손에 붙잡힌 건 마찬가지로 내 두 손 뿐임에도 나는 온몸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내가 또 다시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하기까지는 어색할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지나가던 기자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몇몇 배우들이 웃으며 지나가고, 그의 퍼블리시스트는 연신 시계를 보며 슬쩍 팔을 두드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 그럼요! 미안해요. 이렇게 멍청할 데가. 정말 미안해요."
나는 허둥대며 황급히 손을 뗐고, 그는 그런 말 말라며 손을 내젓다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옆에서 내 퍼블리시스트가 몰래 등을 꼬집으며 대신 변명을 했다. 요즘 도널이 어찌나 정신을 팔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미안하다고. 상투적인 말에도 눈앞의 그는 순식간에 걱정어린 눈을 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많죠? 저도 정신이 없네요."
그 뒤로 대화를 어떻게 이어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를 행사장에 들여보내야 해서 초조해하는 퍼블리시스트와 눈이 마주친 데다, 그를 더 이상 대면하기가 힘들었던 내가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했고, 그는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사실 왠지 내가 할 말이 있어 보여서 왔다며. 그제야 내가 어지간히 뚫어져라 쳐다봤다는 걸 깨닫고 미안한 마음에 애써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등을 돌린 그가 다섯 걸음쯤 멀어졌을까,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퍼블리시스트에게 순순히 끌려가던 그가 별안간 몸을 돌리더니 사람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한 손을 높이 들고 나를 불렀다.
"이따 애프터파티 오실 거죠?"
잘해줄 걸 그랬다. 눈 앞의 다정한 너를, 아니, 너와 꼭 닮은 이를 보며 생각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다정이란 곧 치명적인 약점이었기에, 내가 얼마나 잘해주건 네가 마음을 여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음에도 나는 과거를 돌이켜 후회했다. 그는 넋을 놓고 있던 내가 얼떨결에 손을 마주 흔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등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퍼블리시스트가 내 이름을 꽥 부를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내내 퍼블리시스트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애초에 뚫어져라 쳐다보질 않나, 기껏 만나서는 말 못하는 사람처럼 버벅대고, 평소답지 않게 그게 무슨 예의냐, 드라이버 씨가 너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도 할 말이 없을 거다, 기타 등등. 그러다 내가 잔소리를 흘려듣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아채고는 물었다.
"그나저나, 진짜 드라이버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였어?"
글쎄, 그 순간에 굳이 말을 걸고 싶었던 건 당연히 아니었다.
"아니, 뭐. 그냥 평소에 작품 잘 봤다고. 인사나 하고 싶어서."
그는 네가 아니니까. 다만 스크린에, TV에 나오는 그를 보며 혹 실제로 만난다면 그냥 미친 척하고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밤마다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잠이 들면 광활한 우주가 펼쳐지고, 온통 서늘한 금속으로 둘러진 함선 내에서 작게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뿐이었다고. 우주 한가운데서 대화를 나누고, 다쳐서 들어오는 날이면 치료를 도맡아 하고, 원수같은 형제처럼 지냈던 지난 날들을 낱낱이 되새겨 보았다고. 너는 혹시 기억하느냐고. 냉혹한 우주를, 그 처절했던 시간들을, 나를.
애프터파티에는 가지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칠 수밖에 없었던 머나먼 우주가 아니라 단단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지금, 아마도 본연의 모습일 너는 내 전생과 평생을 통틀어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따스해서. 그토록 찾아헤맨 한 줄기 햇살을 만난 풀잎처럼 네게만 매달릴 것이 분명해서. 대신 집에 일찍 들어와 혼자 술을 진탕 퍼마시고 잠에 들었다. 오늘만큼은 네가 꿈에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내 바람을 듣기라도 한 건지 정말 너를 꿈에서 볼 수 없었지만 나는 네가 그리워 더욱 서러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