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Day 1. SJPdP to Roncesvalles
시작부터 죽을 것 같았다.
하인리히는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오르막길을 바라보며 허탈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몇 시간을 기어올라왔는데도 아직 지옥같은 오르막이다. 줄지어 오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소똥이 굴러다니는 산길은 안개에 가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테오는 이미 먼저 간다며 저 앞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빌어먹을 새끼."
하인리히는 터져 나오려는 욕을 삼키고는 다시 욱신거리는 발을 움직였다.
애초에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행길에 올 생각도 없었다.
"성공적인 이혼을 축하하며!"
테오가 환한 얼굴로 잔을 들어올렸다. 아들 맞은편에 앉은 올가는 약간 민망하지만 행복한 얼굴로 잔을 부딪히고 하인리히에게로 잔을 올렸다. 하인리히는 코르크 따개를 옆으로 치우며 잔을 맞부딪혔다.
막 무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한 8월 중순이었다. 올가는 성공적으로 이혼 소송을 마무리지은 참이었다. 감자처럼 줄줄이 끌려나온 내연녀들과 지저분한 서류들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들은 감사했고, 지긋지긋한 아버지라는 작자가 사업을 정리하고 동유럽 구석 어딘가로 사라진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조촐하게 상을 차렸다.
그러니까, 테오 기준으로 조촐하게 라는 뜻이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났네요."
"그러게. 너희 둘도 고생 많았다. 특히 하인리히 너."
"아니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했지. 많이."
하인리히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올가는 그를 보고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사실 쉽지는 않았다. 하인리히는 테오가 건넨 샐러드를 그릇에 덜며 만약 친모가 그를 다시 받아들였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모를 떠나 독일로 온 지 십 오년이었다. 올가가 이혼을 결심한 직후 항상 위태로운 살얼음판이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고, 매일같이 오가는 고성과 날아다니는 가구들 사이에서 그는 짐을 챙겨 일본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연락 한 번 없던 사람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그곳은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준비는 다 했어?"
식사 도중 테오가 물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하인리히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다 말고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준비? 무슨 준비?"
"기념으로 여행 가기로 했잖아. 까미노 데 산티아고!"
"뭐?"
어안이 벙벙해진 하인리히가 반문하는 사이 테오는 밝은 얼굴로 올가에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도 일정 괜찮죠?"
"그럼, 미리 빼 놨지. 안 그래도 머리 좀 식혀야겠다 싶던 참이다. 표는 예약해놨고?"
하인리히가 끼어 들 틈도 없었다. 어느샌가 그들은 올가의 이혼 기념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는 800킬로미터의 대장정을 떠나기로 결정이 나 버렸고, 하인리히는 아니 나도 간다고? 한 마디 할 새도 없이 정신을 차려보니 배낭을 메고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생 장 피 드 포르드의 순례자 사무실에 서 있었다.
출발 이틀 전 급하게 장기 출장을 가야만 했던 올가 없이, 테오와 둘만.
"야! 왜 올가 이혼 기념 여행에 올가만 없냐고!"
"그야 어쩔 수 없잖아, 엄마 예전부터 거기 가서 일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그런데 왜 난!"
"나 혼자 오면 심심할 거 같아서."
심심하긴 개뿔이!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생면부지 남하고도 한 십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다섯시간 내내 수다를 떨어대는 자식이! 하인리히는 차마 힘에 부쳐 화를 내지는 못하고 등산스틱에 몸을 의지해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리고 그가 숨을 고르는 사이 테오는 먼저 가서 숙소를 잡아놓겠다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죽을 것 같았다. 최대한 작게 꾸려 온 배낭도 돌덩이처럼 무거웠고, 다리는 미칠듯 쑤셔오고 있었고 발은 마치 쇠구두에 구겨신은마냥 고통에 타오르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이제라도 그만 둘까, 이 빌어먹을 이복형제를 버려두고, 사람이 사는 문명을 발견하는 즉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또 어디선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그를 우르르 지나쳤다.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경주를 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또 혼자 남았다. 하인리히는 이미 비어버린 물통을 괜히 꺼내 들었다가 짜증이 벌컥 일어나 근처 나무등걸에 주저앉았다.
앉으니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온갖 욕을 뱉어내며 욱신거리는 발에 바람이나 쐬여주자 싶어 신발을 벗었다.
"...어?"
그리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새끼발가락 쪽 양말이 시뻘건 피로 푹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리히는 멍하니 피에 젖은 발을 보다가 허겁지겁 양말을 벗었다.
"망했다..."
새끼발가락 발톱이 빠지기 직전이었다. 게다가 물집이 잡힌 뒤 터져 거기서 흘러나온 체액이 피에 섞여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모습에 하인리히는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발이 미친 듯이 쑤시더니.
하인리히는 허겁지겁 신발을 뒤집었다. 분명히 한 사이즈 큰 신발을 샀는데. 하지만 이런 상태로 다시 발을 신발에 쑤셔넣을 수는 없었고, 또 들어가지도 않을 게 뻔했다. 하인리히는 한쪽 발에만 신발을 신은 채 배낭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산길에 주저앉아 피가 나는 발만 들여다보았다.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참는 거야 문제도 아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생은 그의 입에 담즙을 물렸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입 안 가득 들어찬 고통을 삼켰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뭐 하냐?"
테오가 문을 빠끔히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고, 침대에 걸어앉아있던 하인리히는 그가 볼세라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허겁지겁 등 뒤로 숨겼다.
"별 거 아냐."
"너 설마 또 학사경고 받았-"
"아니라고."
테오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얼른 나와, 공항 가야 하니까. 짐 빠진 거 없나 확인하고."
위, 마망, 빈정거리듯 말한 하인리히가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외투 주머니에 쑤셔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지만, 하인리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파서나 기력이 없어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엊그제 쑤셔넣은 채로 구겨져 버석이는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테오를 따라잡아야 한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했다.
"저기, 괜찮습니까?"
낯선 목소리가 불쑥 나타났다. 하인리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챙이 큰 모자 목에 건 그 또래의 남자였다. 동양인. 새까만 머리 한쪽에만 드문드문 새치가 나 있고, 눈은 새파랬다. 동양인이 맞나? 혼혈? 홍콩 사람인가? 일본인? 하인리히는 오랜만에 보는 생김새에 이질감부터 느꼈고, 순간 마음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소용돌이치는 기분을 알 리가 없는 남자는 하인리히의 피범벅이 된 발과 그의 낭패감 서린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다쳤어요? 걸을 수 있습니까?"
억양으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인리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저었다.
"별 거 아닙니다. 괜찮아요."
"피가 많이 나는데요."
"신발 사이즈가 생각보다 작아서..."
"큰일이네. 론세스바예스까지는 아직도 한 십오키로 남았는데. 여기까진 택시를 불러도 안 올 거예요."
"오리손까지만 갑니다."
"아, 그거 다행이네. 응급키트는 있어요?"
"그건 일행 가방에-"
"일행하고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으니까 하나 사서 가지고 다녀요. 지금은 이거 쓰시고. 그리고 이거 나한테 큰 건데 신발 못 신겠으면 이거 신어요."
남자는 배낭을 내려놓고 짐을 뒤져 개별포장된 아이오딘 소독약과 도톰한 반창고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배낭에 매달려 있던 큼지막한 크록스까지.
"어, 이럴 필요는..."
"내 짐을 줄여 준다고 생각해요. 혼자 못 가겠으면 같이 갈래요?"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먼저 가세요."
하인리히가 머쓱하게 손을 내젓자 남자는 나타났을 때와 같이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일어나 배낭을 멨다.
"Buen Camino."
그리고 하이킹 스틱을 짚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하인리히는 손에 들린 반창고와 제 앞에 가지런히 놓인 크록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그 날 사람들은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피레네 산맥을 절뚝거리며 오른 집채만한 독일인을 보며 한 번쯤은 저런... 하고 딱한 얼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인리히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번 피가 나는 걸 보니 발은 정말 미친듯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꽉 끼는 등산화보다는 낫다고 해도 크록스를 신고 피레네 산맥을 넘는 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리손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내리막길이 벌써부터 걱정이었지만 오늘은 적어도 쉴 수 있겠지 하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이 다 찼다니!"
그러니까 알베르게 주인이 뻔뻔한 얼굴로 Full 사인을 가리키기 전까지는.
하인리히는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내가 분명히 예약을-"
"예약을 받긴 해도 열두 시 전에 오지 않으면 무통보 취소요."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기서 소란 피워도 방 없으니까 힘 빼지 마쇼. 정 못 걷겠으면 택시 불러줄테니까 론세스바예스까지 내려가시던가."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인리히는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테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Hallo."
"야, 너 대체 어디야? 너 오리손 아니야?"
"아, 미안. 연락한다는 걸 깜빡했네. 오리손에 방이 없대서 지금 론세스바예스에 알베르게 예약해놨어. 네 침대도 잡아놨으니까 빨리 와라."
"뭐? 야 그게 무슨- 십오키로를 더 걸으라고?"
"네 시까지야. 고작 팔키로 걷고 엄살은. 정 못 걷겠으면 택시 불러서 타고 와. 론세스바예스 오면 무니시팔 알베르게로 가지 말고 나한테 전화해. 나 배터리 없어서 이제 끊는다."
"야, 테오도르! 야!"
전화는 불친절하게도 뚝 끊겼다. 하인리히는 이를 꽉 깨물고, 이 새끼 만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 그 샌님 테오가 걸어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갈 수 있다면 그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야 있었다, 사실. 하인리히는 근력운동 위주로 몸을 조져왔던 터라 근육부자였지만 유산소엔 쥐약이었고, 또지구력은 개나 준 기적의 몸뚱이의 주인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나올때마다 테오는 하인리히의 몸을 아래위로 훑으며, 가슴은 이따만하고 누가 보면 몸 깨나 쓸 것처럼 보이는 주제에 오 킬로미터도 제대로 못 뛰는 약골이라면 누가 믿겠냐며 그를 놀리곤 했다.
"그러게 내가 훈련하자고 했을 때 좀 따라왔으면 좀 좋아?"
기진맥진해서 오후 늦게야 도착한 하인리히를 보며 테오는 혀를 찼다. 하인리히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워킹스틱 두개에 몸을 의지해 겨우겨우 걸어와 성벽 아래 풀밭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테오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시끄러워."
"너 신발이 왜 그래?"
"내 거 아냐."
"그건 알겠는데. 네 신발은?"
"작아서 못 신겠다."
"작다고? 한 사이즈 크게 샀잖아?"
"양말을 계산에 못 넣었어. 두 사이즈는 크게 신어야겠어."
"그런 사이즈가 나오긴 하겠냐."
"알게 뭐야. 여기 신발가게-"
"이런 동네에 그런 데가 있을 거 같아? 있다고 해도 우리 사이즈 없어. 팜플로나까지 가야 해."
이 상황이 그저 웃기다는 듯 테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인리히는 말다툼을 할 기력도 없었다.
"누구 신발을 신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나. 숙소 가야지."
"침대가 남았어?"
"아니. 내가 예약한 데는 이미 다른 사람한테 줬어. 시간 좀 봐라."
시계는 벌써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여섯시 반에 출발했으니 열한시간이나 걸었다. 기진맥진해진 하인리히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서서 앞서 걷기 시작하는 테오를 따라갔다.
"그럼 어딜 가라고? 무니시팔은 다 찼을텐데."
"거기 어제부터 한달동안 폐관이래. 증축한다고. 그래서 지금 이 동네 난리도 아니야. 사람들 잘 데 없어서 다 택시타고 다음 동네로 갔어."
"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인리히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그렇잖아도 올 9월 기록적인 순례객 숫자에 알베르게가 터져나가리라는 것은 예상하긴 했지만, 폐관? 사전공지도 없이?
"걱정 마, 여기 체육관 열려 있어서 다들 지금 거기로 자러 갔으니까. 샤워시설도 있고, 날씨도 안 추우니까 잘 만 할거야."
"너는?"
"나는 사설 알베르게 마지막 침대를 잡았지."
"치사한 새끼."
"그러니까 평소에 유산소 운동을 열심히 하셨어야죠, 하인리히 씨. 근육 많으면 무릎 나간다."
"바이크가 있는데 내가 왜 걸어다녀?"
"아, 그러셔요."
오래 된 골목길을 지나 마을 뒷편으로 돌아가니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체육관이 나타났다. 문은 열려 있었고, 지칠 대로 지친 순례객들이 나와서 맥주를 마시고 있거나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치려다 뒤따라오는 테오를 의식하고 멈춰섰다.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닌데. 하인리히는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편지를 의식하고는 속이 불편해졌다.
"저녁은?"
"난 좀 전에 먹었어. 저기다 짐 풀고 내 숙소 와서 밥 먹고 가라."
"아니 넌 신경쓰지 말고 가서 쉬어.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뭐, 그러든가. 그럼 난 간다. 내일 아침 여섯시에 출발할 거고 수비리까지 갈 거야."
그래, 그래. 건성으로 손을 흔든 하인리히를 뒤로하고 테오는 숙소로 돌아갔다.
체육관은 거의 만실이었다. 바닥은 침낭과 배낭으로 거의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하인리히는 피곤한 얼굴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침낭을 풀었다.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잠자리보다는 씻는 게 급선무였다. 무더위가 완전히 꺾이지 않은 날씨에 하루종일 걸어 온 몸이 땀과 먼지 투성이였고, 발은 아직 피가 엉겨있어서 감염되기 싫으면 씻어내야 했다.
"어? 오리손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들어 본 목소리가 불쑥 다가왔다. 샤워용품과 수건을 들고 일어난 하인리히는 몇 시간 전 봤던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그는 이미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가 조금 젖어 있었고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하얗게 밝아진 듯한 얼굴과, 박하향 비누 냄새. 저도 모르게 그를 훑어보고 있던 하인리히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갔더니 방이 없어서."
"아. 고생하셨네요."
대화가 끊겼다. 하인리히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저 멀리 입구에 벗어뒀던 크록스가 눈에 들어와서 급히 화제를 틀었다.
"신발 감사합니다. 오늘 씻어서-"
"아, 신경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한테 안 맞으니까 신을 수도 없어서... 당분간 신을 거 없으실텐데 그냥 가지세요."
"그럼 돈을,"
"아니, 아니 정말 괜찮습니다."
손을 내저은 남자는 하인리히의 손에 들린 수건과 샴푸를 본 남자는 머쓱하게 웃었다.
"피곤하실텐데 샤워하세요. 뜨거운 물 안 나올 수도 있지만."
그리곤 나가 보겠다며 몸을 돌려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먼저 온 사람들이 더운물을 모조리 끌어다 썼는지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하인리히는 씻는 둥 마는 둥 샤워를 끝내고 얼른 뛰쳐나와 나머지 한 벌의 옷으로 갈아입고 오늘 입은 옷과 세탁비누를 들고 수돗가로 향했다.
아직 해가 지기엔 멀었다. 여름의 꼬리 끝이었다. 그는 아직도 물이 조금씩 떨어지는 머리를 털고, 다시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발에 한쪽씩 번갈아 체중을 실으며 묵묵히 손빨래를 했다. 아까 테오를 만났을 때 반창고와 약 따위를 나눠받을 걸 그랬다. 빨래를 급조된 빨랫줄에 널어놓고 그는 절뚝거리며 약국을 찾으러 나갔다.
동네라고 할 것도 없었다. 건물 몇 채가 전부였고, 겨우 그 틈바구니에서 찾아낸 작은 약국은 다섯 시에 이미 문을 닫아 껌껌했다. 하인리히는 짜증이 치밀어 욕을 지껄이고는 다시 체육관으로 발을 돌렸다.
체육관 앞 피크닉 벤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인리히는 그들을 지나쳐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들 중 하나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쪽으로 갔다. 아까 그에게 크록스를 준 남자가, 낯선 얼굴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 잔 할래요?"
낯선 이가 권하는 맥주. 평소같으면 거절했겠지만, 하인리히는 지쳐 있었고 목이 말랐다. 배도 고프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죠, 하고 답하고 그가 만들어 준 자리에 앉아 잔을 받았다.
"그나저나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그가 말했다. 하인리히는 잔 가득 든 맥주를 들며 잠시 뜸을 들였다.
외투 주머니에서 편지가 바스락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