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언젠가 쿤은 귀걸이를 빼내어 밤에게 보여줬다. 오른쪽 귓바퀴에 있던 두 개의 작은 귀걸이와 귓불에서 달랑거리던 파란색 돌로 이뤄진 귀걸이를 말이다.
"이 귀걸이는 이렇게 떠 다닐 수 있어.” 쿤은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돼. 너랑 나만 알고 있는 거야."
나중에 밤은 귀걸이를 달고 있는 피부가 유난히 예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가운 금속 위를 어루만지면 어찌할 수 없는 기분 좋은 소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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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 씨, 그 귀걸이 빼기는 해요?" 밤은 물어보는 한편, 쿤이 귀걸이를 하지 않고 온 날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분명 몇 번은 있었을 텐데.
"밤에는 빼지?”
밤은 가까이 다가갔다. 쿤이 뒤로 물러나지 않자 용기를 얻은 밤은 쿤의 귓불에 손을 대었다.
엄지 아래로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 따듯하고 요란한 것이 쿤의 표정과는 달랐다. 밤이 쿤의 반응을 살피자, 역시나 핀잔을 주는 듯한 단조로운 파란 눈이 있었다.
"뭐해?"
여느 때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밤은 쿤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어떻게 자랐기에 이리도 차갑게 말하는지, 어떻게 자랐기에 항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따위가. 밤은 어쩌다 한 번씩 침착함을 잃은 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밤의 손끝이 닿을 때면 쿤의 턱에는 힘이 들어갔고, 숨소리에 긴장이 감돌면서 피부가 햇빛에 탄 것마냥 붉어졌다.
"밤?"
밤은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멍해진 정신으로는 무언가를 제대로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검지와 엄지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공간으로 쏠렸고, 밤은 차마 손을 뗄 수 없었다.
귓불이 눌리자 쿤은 고개를 돌렸다. 밤은 쿤의 귀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쿤의 눈처럼 빠져들어 갈 것 같은 짙은 파란색을 한참 바라보던 밤은 뒤늦게 질문을 떠올렸다
"귀에 계속 달고 있으면 안 아파요?"
"안 아파." 귀에 잡힌 맥박은 처음부터 빨라서 밤은 쿤의 말이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고 있었거든."
"그렇군요."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밤은 쿤이 얼마나 오래 자신을 내버려 둘지 알고 싶었다. 언제 자신의 손을 쳐낼지. 몇 초 만에 쳐낼 수도 있고, 혹은 심박수를 셀 만큼 몇 분이 지난 뒤에 쳐낼지도 몰랐다.
밤은 어디서부터 단순히 호기심이 많은 것에서 무례한 것으로 변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밤은 이제껏 허락을 구한 적이 없었고, 쿤 또한 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선을 넘지 않았나 보다 하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서 밤은 계속 만지작거렸다. 무례함의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쿤은 밤이 자신의 은청색 머리카락을 넘기고 심해를 닮은 파란 귀걸이를 만지게 놔두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다면 쿤은 그 즉시 내쳤을 것이다. 밤은 쿤이 자신을 특별취급하는 것이 좋았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선택받기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방에서, 단둘이. 밤은 쿤의 화를 돋우지 않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또 밤은 쿤이 마음만 먹으면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실 쿤은 밤의 멍청한 실수를 조목조목 따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밤은 언젠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러서 둘 사이의 관계가 깨지게 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예쁘네요." 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가만가만 말했다.
그리고 쿤이 말하길 기다렸으나, 방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체념한 표정으로 떼쓰는 아이를 다루듯이 밤을 내버려 두었다. 밤은 제 생각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순 없었다.
쿤이 한숨지을 때마다 왜 이렇게 심장이 쿵 내려앉는지 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점차 요란하던 밤의 심장이 차분해졌다. 영원 같던 순간이 지났고, 밤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손을 천천히 뒤로 뺐다.
쿤의 무표정에 밤은 문득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제 모습이 끔찍하게 부끄러워졌다. 그는 자신도 쿤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는 게 쉬웠으면, 하고 바랐다.
쿤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자신의 오른쪽 귀를 문질렀다. 머리카락이 내려와 귀걸이를 덮었다.
"그렇게 좋으면 너도 귀 뚫어."
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쿤 씨 귀걸이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비싸지도 않은데."
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쿤은 한 쪽 어깨를 으쓱이더니 한숨 쉬었다. 밤이 또 이상한데 집착한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쿤은 다시 한번 귀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뒤 그는 말했다. "정 가지고 싶으면 줄게. 난 한 세트 더 있으니까."
밤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요?"
“응.” 쿤이 손을 내밀자 손바닥에는 파란색의 후프형 귀걸이가 두 개 있었다. 밤은 고민도 하지 않고 가져갔다.
“진짜 저 주는 거죠?”
쿤은 약간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네가 하루 종일 내 귀만 바라보는 것보단 낫잖아?"
밤은 말속에 담긴 비난을 무시하고 손에 있는 귀걸이를 들여다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단순한 금속 귀걸이가 아니었다. 어떤 돌을 깎아 만든 것으로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갈고리에 걸린 물고기가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파란 링 모양이어서 초승달을 연상시켰다.
"이건 뭐예요?" 밤은 엄지로 세공된 문양을 문지르며 물었다. 자신이 귀걸이를 깨뜨리거나, 손톱으로 상처를 내는 건 아닌지 수도 없이 떠오르는 걱정을 숨기면서 말이다.
쿤은 흘긋 보더니 말했다. "가문 문양이네."
밤은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파란 액세서리를 차고 있던 사람들을 주루룩 떠올리더니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거 쿤 가문 사람들만 차고 있는 거 아니에요?"
"뭐라고?" 쿤은 웃었다. "이걸 차면 네가 쿤 가문이 되냐고? 글쎄.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너는 FUG 슬레이어잖아. 아무도 너한테 뭐라 못해."
밤은 귀걸이를 조심스레 쥐었다.
"그렇지만 저는 귀를 뚫지도 않았는걸요." 그는 말하면서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가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 지도 알지 못했다. 밤은 귀걸이에서 기묘한 따듯함을 느꼈다. 자신은 원래 주인이 돌려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계속 갖고 있을 것이다.
쿤은 다시 으쓱였다. 이건 그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제 말은-" 밤은 이미 다 끝났지만,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곤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귀걸이가 예뻐서 바라본 게 아니었다. 희미한 빛 아래에 반짝이는 귀걸이가 비싸고 특별해 보인 건 새파랗고 단단한 금속이 창백하고 연약한 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손끝으로 만지작대도록 허락한 쿤이 있었기에 귀걸이는 그토록 순결해 보인 것이었다.
"나도 알아. "이건 둘을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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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귀걸이를 한데 모아 실로 묶었다. 직접 끼고 다니는 건 부끄러워서 꽤 오랫동안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다른 사람의 반응이 걱정되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들의 조롱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쿤의 반응은 마음에 걸렸다. 귀걸이를 보고 다시 돌려달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회의 시간에 쿤은 새로운 귀걸이를 차고 나타났다. 쿤에게 다른 세트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색깔은 이전보다 조금 진했지만, 모양새는 같았다. 밤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귀걸이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고, 밤은 그 사실을 짚고 넘어가지 않아 이는 둘만의 비밀로 남았다.
밤은 회의 내내 엉뚱한 것에 정신이 팔렸었다. 모두가 내탑 안에 머무르고 밖으로 나돌아다니거나 싸움을 걸지 않으면 86층 시험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밤에겐 들리지 않았다.
“특히 너희 둘 말이야.” 쿤이 아낙과 란을 흘기면서 말했다. 아낙과 란은 정반대편에 자리를 잡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찬 바람만 씽씽 불었다.
“아낙 먼저 안 하면 안 해.” 란은 이를 갈며 말했다.
“쟤 먼저 하면 할거야.” 아낙은 쏘아붙였다.
이 둘 사이에 용감하게 자리 잡은 십이수는 둘에게 경고의 눈빛을 쏴주었다. 아낙은 째려보면서 의자에 몸을 파묻었고, 란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최대한 불량한 자세로 앉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관심이 없는데. 이건 알아둬.” 쿤이 말했다. “둘 중 누구라도 시험장에 다친 채로 오면 난 너희를 단검으로 찌른 다음 절벽으로 밀어 버릴 거야.”
쿤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자기 앞에 있는 종이 뭉치를 보는 순간, 밤은 귀걸이를 보았고, 이후부터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쿤의 왼쪽 귀에는 새로운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한없이 투명한 파란 돌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밤은 전에 저 귀걸이를 본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분명 보았을 것이다. 또 실제로 만진다면 보이는 것처럼 가벼운지도 알고 싶었다. 밤은 자신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탐욕스러웠는지 궁금했다.
쿤은 회의가 끝난 후 밤에게 다가와 투명한 파란 귀걸이를 떨구었다. 귀걸이는 손바닥에 닿지 않았고, 몇 센티미터 위에 부드럽게 멈추었다.
“부유석으로 만든 거야.” 쿤은 밤이 놀라기도 전에 앞질러 말했다. “떠 있을 수 있지.”
밤은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가 있어 보였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거 왜 주는 거예요?”
“부탁 좀 들어줬으면 해서.”
“좋아요.” 밤은 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쿤은 벌써 일 모드로 들어가서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아낙이 또 란이랑 싸우러 가면 좀 말려줄 수 있어? 나 혼자서는 둘 다 감시 못해.”
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왜 만날 때마다 싸우는 걸까요?”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고 생사를 오가는 싸움을 벌였다. 밤이 봤을 때 그 둘은 서열을 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예전에 둘이 언제까지 싸우나 앉아서 관찰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뚜렷한 승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밤은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상황이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라 보았다.
“걔네 속을 누가 알겠어?” 쿤은 투덜댔다. “미치겠네.”
“사춘기인 건 아닐까요?” 밤은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쿤은 놀랍다는 듯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가렸으나,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쿤은 오늘 처음으로 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낙은 제가 계속 지켜볼게요.” 밤은 란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끼며 말했다. 사악한 미소를 보니 쿤은 5가지의 악랄한 계획을 동시에 세우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몸을 돌려 나갈 때에도 계획 짜느라 바빠 머리카락으로 귀걸이를 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훈련에 방해되는 정도로는 하지 마.” 쿤이 어깨 너머로 말했다.
“안 그래요.”
밤은 쿤이 떠나자 부유석이 떠다니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귀걸이는 공중에서 천천히 돌다가 되돌아왔고, 더는 반짝이지 않았다. 쿤의 귀에 달려있을 때만큼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밤은 귀걸이가 보기 싫어졌다. 가슴을 저미는 실망을 삼키며, 귀걸이를 낚아채 주머니 안에 다른 귀걸이 옆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이제 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말하긴 했으나, 그건 거절을 뜻했다. 너무 부드러워서 처음에는 그 거절이 와닿지 않았다. 그 점조차도 너무 쿤다워서 밤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모든 걸 다주는 쿤. 초승달을 닮은 귀걸이부터 가문의 문양, 탑에서 가장 비싼 물건까지 주었으나, 그게 다였다.
그리고 여기 밤이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생물이며, 어느 정도까지 원하는지 막 깨우친 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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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귀걸이를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시험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밤은 아낙이 란을 죽이려는 것을 벌써 두 번이나 막았다. 란은 쿤의 계략에 정신이 팔려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십이수는 제 딴에는 도와준다고 안 하느니만 못한 작전회의를 자주 열었다. 방을 5개 다루거나 공간이동을 할 수 없는 나머지는 논쟁을 벌이다 탈진했고, 쿤이 올 때마다 아낙과 란의 멍 자국을 감추곤 했다.
“불 은어로 고쳐주면 되잖아.” 아낙은 말로는 투덜댔지만, 손으로는 슬그머니 소매를 끌어당겨 팔꿈치에 있는 멍을 가렸다.
“중요한 순간에 쓰고 싶어서요.” 밤이 간단명료하게 말하자 아낙은 더는 투덜대지 않았다.
밤은 옷장 밑바닥에 귀걸이를 두고 다녔지만, 시간이 나면 꺼내서 들여다봐서 놓고 다니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녀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밤은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계속해서 금속이 주는 서늘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서늘한 감각은 그에게 맡겨진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이미 받은 모든 것들. 그 순간의 만족감은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얻을 수 없었고, 심지어 밤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외로울 때에도 이 자그마한 물건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제 건물들을 손짓 하나로 부술 수 있었고, 신수로 검이나 활을 만들어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는 여전히, 그를 믿고 귀 아래의 연약한 살을 만지도록 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정도면 만족해야 했다.
밤은 귀걸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따듯해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된 거야.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해.
나중에 쿤은 아낙의 멍 자국을 발견하긴 했다. 밤이 책임을 지려하자, 쿤은 단검 대신 불 은어를 꺼냈다.
“밤한테만 무르다니까.” 아낙이 불평했다. 번역하면 고맙다는 의미였다.
밤은 주머니에 있는 귀걸이를 만지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밤은 아직 특별했다. 밤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시험날이 다가왔고, 밤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시험은 옮기기 게임이었다. 팀원을 한쪽에서 반대편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도시 하나를 지나야 했는데, 그 곳에는 각종 바다괴물이 우글거렸다. 괴물은 움직이는 건 모조리 공격했다.
쿤의 계획에 따라 밤은 공간이동을 하기로 했다. 아주 많이. 등대도 필요했다. 먼 거리를 이동하려면 정확성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쿤과 밤은 필드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밤은 사람을 나르고, 쿤은 어두컴컴한 등대 안에서 몸을 숨긴채 밤을 보조했다.
시험 막바지가 되자 재빠르게 공간이동을 하던 밤은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다가 등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밤의 머릿속에는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다.
등대는 비어있었다. 함정이었다. 밤은 지저분한 수작에 걸려 어깨가 물렸고, 벗어나기 위해 도시 절반을 파괴했다. 그래도 괴물이 떨어지지 않자 영혼을 사용했다.
자신이 속아 넘어가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밤은 괴로워 했다.
이미 손에 넣은 능력이지만,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얻은 뒤부터 무언가를 잃기만 했으니.
그들은 간신히 시험을 통과했다. 쿤은 밤의 어깨에 있는 깊은 상처를 보더니 치료해주었다. 그 자신도 피범벅이면서 말이다. 곧이어 밤은 쿤이 일부러 반대편에 있었고, 가는 길에 여분의 등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밤은 등대를 돌려주었다. 세 군데에 금이 갔으나, 여전히 문제없이 작동했다. 그는 등대를 어떻게 얻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동료들이 하나둘씩 밤의 방에 와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실 그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 밤은 벌써 익숙해졌다. 친구들이 무사하기만 하면 영혼을 태우는 것은 괜찮았다. 자신에게는 워낙 많은 힘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힘은 써도 티가 나지 않았다. 도시 하나를 파괴해도 피곤하지 않았다. 단지 어지러울 뿐이었다.
그는 이제 숨 쉬는 것만큼 쉽게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예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밤은 왜 자신이 점점 욕심꾸러기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쿤 씨, 제가 다 죽일 테니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밤을 아프게 하는 말은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남아 울려 퍼졌다.
라헬이 밤을 버린 건 당연했다. 쿤이 밤이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도 당연했다. 여태껏 많이 배웠지만, 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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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고민을 반복하며 아파하던 밤은 결국 쿤을 찾아갔다.
귀걸이를 돌려주려고 온 거라고 말하려던 밤은 쿤이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준비한 말이 거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쿤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마자 밤은 소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같이 있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졌고, 밤은 그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왜 그런지 몰랐으나, 정말 그랬다.
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복도로 나와 밤을 껴안아 주었다. 밤은 마주 안으면서 속으로는 이보다 더 많은 걸 바랐고, 또 그런 자신을 미워했다.
“미안해요.” 밤의 말은 쿤의 어깨 위에서 뭉개졌다.
저번부터 계속 피해 다녀서 미안해요. 귀걸이 가지고 이상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밤은 미안한 것도 많았다. 그런데 왜일까? 이 모든 걸 고백한다 해도 쿤은 다 용서해줄 것 같았다.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데.
“사과할 사람은 나야. 밤.” 쿤이 말했다.
손바닥에 나 있는 초승달 같은 손톱자국으로 보아 쿤은 밤새 자책한 듯싶었고, 쿤의 목소리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 절망과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쿤이 평정심을 잃은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밤은 너무 놀라 자기연민에서 벗어났다.
“무슨 말이에요?"
“내가 망친 거야. 내가 너무 약해서 할 일을 너한테 떠넘겼어.”
“네? 뭐라고요? 쿤 씨가 잘못한 거 아녜요. 함정에 빠진 건 저잖아요. 생각하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제가 망친 거예요.”
“밤. 네가 있으면 우리 팀은 절대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아. 문제는 나지.” 쿤이 말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는데 소용이 없었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작게 흘렸다. “이런 것조차 제대로 못 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팀에 남아 있겠어?”
밤은 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한번, 혼란스럽다는 듯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네가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을 팀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나도 여기 있을 수 없었겠지.” 쿤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넌 사실 우리 없어도 되잖아.” 쿤이 말했다.
밤은 마음 한구석이 짜르르 저렸고, 머릿속으로 수많던 구원의 순간을 헤아려 보았다.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꺼내어 엄지로 문지르곤 했던 많고 많은 순간들. 작은 금속 조각은 벌써 밤을 여러 번 구해주었고,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닻이 되어주었다.
“아니에요.” 밤은 말했다. “쿤 씨가 있어야 돼요.”
감정에 사로잡힌 밤은 무심결에 쿤의 부드러운 머리를 쓸어내리다 새로운 귀걸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하도 하다 보니 지금쯤은 거의 습관이 된 행동이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귀걸이 아래 살을 매만졌다. 밤은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떨면서도 가만히 있는 이런 쿤이 그동안 너무 그리웠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집중력은 산산이 흩어졌다. 미미한 숨소리를 듣고, 손끝으로 요동치는 맥을 느끼기 위해 온 감각을 동원했다.
잠자코 있던 쿤은 입을 벌렸다. 수많은 것들을 반박하려고 벌어지는 입을 밤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쿤이 말을 하게 두면 안 되었다. 쿤은 언제나 말을 잘했고, 하는 말은 다 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은 자신이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쿤을 당해내지 못하니까.
그래서 밤은 선을 넘기로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 할지라도 밤은 입술로 말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쿤의 떨림이 남김없이 전해졌다. 그동안 밤이 절박하게 바랬던 것이었다. 심장이 이리저리 벌떡벌떡 뛰었고, 밤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들릴 듯 말 듯 가냘픈 숨소리를 빠짐없이 들으면서 밤의 피는 끓었고, 기쁘다 못해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밤은 숨을 어떻게 쉬는지 잊었다. 그는 숨 쉬는 것보다는 키스에 정신을 쏟았다.
쿤은 밤을 밀쳐내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그만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밤은 쿤이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이 행동이 잘못되었거나 경솔하거나 나쁘든, 뭐든 상관이 없었다. 밤이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지금 뭐든 바라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데-
“밤.”
쿤의 말은 번개가 되어 낚싯줄을 던지듯이 밤의 심장에 내려 꽂혔다. 밤은 경악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갈고리에 걸린 은어처럼 심장이 바르작거렸다.
최악이었다. 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사과는 감히 할 생각도 못 했다. 손가락이 아직 쿤의 머리에 걸려있었으나, 빼내고 싶지는 않았다. 여전히 키스를 하면 어떤지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가볍게 입을 대었을 뿐인데 입술에 감각이 없었고, 찌릿했고, 벌써 온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잠깐만.” 쿤이 헐떡이며 말했다. “기다려.”
이전에 쿤은 그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밤이 아는 한 단 한 번도. 그런 그가 금방이라도 녹아내려 주저앉을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몇 년 만에 단단한 껍질 안에 싸여있던 속살이 드러났다. 쿤은 몽롱하니 눈에 초점이 없었다. 숨을 들이마시느라 살짝 벌려진 쿤의 입에 홀려버린 밤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붙었다.
“왜요?” 밤은 물었다.
“잠시 시간 좀.”
“좋아요.” 밤은 말했다.
몇 초를 참는가 싶더니 다시 꾸욱 누르는 바람에 쿤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밤은 제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단 하나, 쿤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은-
“기다려봐.”
쿤은 한 손으로 입을 덮으며 말했다. 밤은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떨리는 몸을 주체 못하고, 헐떡이는 숨을 주고받으며 서 있었다.
밤은 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적어도 핵심은. 위험해. 이건 좋지 않아. 수많은 팀들이 이것보다 심각하지 않은 문제로 해체되었고, 그들의 삶은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엉망진창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멈춰있는 상태가 계속되자 밤은 초조해졌다.
“저는 쿤 씨가 저와 함께 탑을 올라가 줬으면 해요.” 밤은 말했다. “도움이 되든 말든 상관 없어요. 쿤 씨를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쿤은 말했다. 그리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런 문제에서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밤은 쿤이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고, 쿤이 확신을 가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저는 정말 신경 안 써요.” 밤이 말하며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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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 씨. 줄 게 있어요.”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밤은 귀걸이 한 쌍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귀걸이는 찰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금색 후프형 귀걸이였다. 묵직하지만 세공되어 있지 않아 단순한 귀걸이. 부유석으로 만든 것만큼 비싸지는 않았지만, 귀중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건 밤이 예전부터 이유도 모른 채 사둔 것이었다.
쿤은 귀걸이를 미동 없이 오래 바라보았다.
“난-” 쿤은 그 뒤를 잇지 못했다. 밤을 돌아보는 파란 눈은 혼란한지 크게 뜨여있었다.
“선물이에요.” 밤은 말했다.
“받을 수 없어.”
“왜요?”
“받을 수 없다고.”
“쿤 씨도 저한테 귀걸이 줬잖아요.” 밤이 사실을 짚었다. “반대는 왜 안 되는데요?”
“아니…” 쿤이 짧게 말했다. “그거랑 이거랑 같아? 다르다고.”
“아니에요. 같아요.”
쿤은 답답하다는 듯이 예의 단조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밤은 가까이 가서 앉더니 쿤의 얼굴에 손을 댔다. 쿤은 굳었지만, 밤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밤은 쿤의 입가를 쓸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쿤은 숨을 멈추고, 몇 번 더 쓸면 어지러움을 못 견뎌서 자신의 요청을 다 들어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받아요.” 밤이 다정하게 말했다.
“쿤 씨 주려고 산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는 줄 수 없어요.”
쿤은 괴상한 표정으로 귀걸이를 내려보았다.
“대신 안 낄 거야.” 쿤이 말을 꺼냈다.
“낀 모습 보고 싶어요.”
쿤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마지못해 항복했다. 쿤은 차고 있던 귀걸이를 빼서 밤의 무릎 위에 두고, 금색으로 된 귀걸이로 바꿔 끼었다. 밤은 쿤이 조심스레 귀걸이를 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딸깍하고 채워지자, 귀걸이는 달랑거리지 않고 묵직하게 귀에 달라붙었다. 쿤은 두렵고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밤을 바라보았다.
“잘 맞네.” 쿤이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