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도운은 노교수를 노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하늘같은 교수님을 감히 노려보거나 할 수 없겠지만 이번만큼은 교수님의 죄과가 너무나 컸다. 노교수 본인도 같은 생각인지 얌전히 손 모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도운이 이를 갈았다. 노교수가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도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알고 하셨으면 저 정말로 가만있지 않았을 겁니다!”
도운이 소리쳤다.
“대체 누굽니까,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만든 게!”
“그러니까 내 친구 김박사의 친구인 오교수의 후배가 되는 박주임네 팀의 연구실 옆방의....”
“그걸 왜 노교수님이 가져다가 그것도 또봇기지에 갖다 놓으신 건데요!”
노교수는 또 다시 죄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러나 도운은 그 모습을 찍어뒀다 평생 놀려먹겠다는 계획도 못 세울 만큼 자기가 패닉에 빠져있었다.
평소에 그런 발상을 먼저 해내던 친구는 도운 곁에 없었다.
“찍?”
책상을 돌아보고 도운이 이마를 짚었다.
리모가, 햄스터가 되어버렸다.
하나 두리 세모 오공 딩요는 모두 둘러앉아 햄스터가 되어버린 리모를 보고 있었다.
두리가 손을 내밀었다.
“안 돼.”
세모가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보기엔 이래도 우리 아빠라고. 함부로 만지지 마.”
“함부로 만지긴 내가 뭘 함부로 만졌다고 그래, 그냥 좀 살짝 쓰다듬어보려고 그런 건데 뭐.”
두리가 볼멘소리를 했다.
“쓰다듬지 마. 넌 내가 도운아저씨 쓰다듬으면 좋겠냐?”
두리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그럼 넌 가서 우리 아빠 쓰다듬어. 난 리모 아저씨 쓰다듬을 테니까. 공평하지?”
하나가 말하며 리모 햄스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모가 기겁해서 하나의 손을 막았다.
“안 공평해, 도운 아저씨 털은 이렇게 부드럽고 폭신폭신하지 않을 거잖아!”
“뭐야 넌 이미 만져본 거냐!”
두리가 항의했다.
“.....난 도운아저씨 털이 부드럽고 폭신폭신하다고 해도 쓰다듬고 싶지는 않은데...”
오공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사람은 털이 아니라 머리카락 아니야?”
딩요도 함께 중얼거렸다.
“찍?”
리모가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서 애들을 둘레둘레 바라보았다.
“찍?”
“귀엽다아....”
딩요가 녹아내린 표정을 했다.
“세모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져보자.”
두리가 졸랐다.
“응? 타이어 수사대 다음 권 빌려줄게.”
“아빠를 팔 수는 없어.”
세모가 리모를 양손으로 감쌌다. 리모가 그의 손가락을 앞발로 붙들고 기어올라 고개를 내밀었다.
“찍?”
“와, 치사해 비겁해 권셈 너는 만지냐!”
두리가 소리쳤다.
“만진 게 아니고 이건 아빠가 내 손에 올라오신 거라고!”
세모도 마주 소리쳤다.
“우리 아빠 두고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치만 햄스터는 원래 쓰다듬으라고 있는 거잖아.”
하나가 말했다.
“그러니 리모 아저씨도 지금은 햄스터인 만큼 쓰다듬 받고 싶을 거라고. 우리가 쓰다듬어드리는 게 옳잖아?”
“아니, 원래 쓰다듬으라고 있는 건 아니거든.”
오공이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고양이라던가 강아지라던가 다 쓰다듬으면 좋아하잖아.”
하나는 계속 주장했다.
“고양이는 자기가 쓰다듬어지고 싶을 때만 좋아해. 그리고 저.... 햄스터는 아무튼 리모 아저씨잖아. 애들이 쓰다듬는 게 정말로 좋을까?”
오공이 반론했다. 하나가 주춤했다.
“그럼 물어보면 되지 뭐.”
두리가 신나서 말했다.
“리모 아저씨. 쓰다듬는 거 좋죠? 그렇죠?”
그러면서 두리가 손을 내밀었다. 리모는 두리를 올려다봤다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세모 손에 고개를 묻고 몸을 부비적 했다.
“......리모 아저씨도 치사해!”
두리가 소리쳤다.
“뭐하는 거니, 얘들아!”
도운이 서둘러 달려왔다.
“햄스터는 작으니까 옆에서 막 소리 지르고 그러면 안 된다. 함부로 만지지도 말고.”
“못 만져요.”
두리가 입을 댓발은 내밀었다.
“세모가 저만 만지고 우린 손끝도 못 대게.”
“나만 만진 거 아니라니까, 아빠가 나한테 오는 거잖아.”
세모가 항의했다.
“도운 아저씨도 햄스터가 되면 나보단 니들 손에 갈걸?”
‘아니, 깔려 죽을까 무서워서 두리한테선 멀리 떨어질 것 같은데.....’
말했다간 두리가 완전 배신당했단 눈으로 쳐다볼 게 너무나 확실해서 도운은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하나 두리 오공은 세모가 공공의 적이라도 되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쓰다듬게 해줘.”
“안 돼.”
“너는 만지면서!”
“아빠가 쓰다듬어달라고 명확하게 의사표현을 하기 전에는 안 돼.”
“리모 아저씨, 쓰다듬게 해줘요. 네?”
그러나 리모는 못들은 척 세모의 손에만 부비작대고 있었다. 세모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풀어지는 걸 보니 도운도 조금 심통이 났다. 리모한테는 세모가 제일인 거 알긴 알지만 자기가 알고지낸 세월도 더 오래되었고 또 어른이라 애들처럼 경솔하게 만지작거리지도 않을 텐데 이쪽으로도 좀 와주면 안 되나.
그렇다고 지금 여기에서 애들처럼 나한테 오라고 손 내밀고 있기도 좀 그래서 도운은 어째야 좋을지 주저했다.
그러고 있는데 언제 없어졌는지 모를 딩요가 뛰어왔다. 그리곤 ‘짜잔!’이라고 외칠 기세로 햄스터 리모의 눈앞에 뭔가를 들이댔다.
“뭐야?”
세모가 물었다.
“말린 고구마. 엄마가 건강 간식이라고 상자로 샀는데...”
리모가 코를 킁킁 하더니 앞발로 답삭 고구마 조각을 잡았다. 그리고 입을 오물거리며 갉기 시작했다.
“히야아.....”
누구 입에서인지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작은 분홍빛 코가 달싹였다. 입이 오물거리고 고구마를 쥔 앞발이 움직였다. 모인 사람들 모두 넋 놓고 리모가 먹는 걸 바라보았다.
“저, 근데 저거 거의 몸만 한데, 다 먹는 거야?”
오공이 지적했다. 사람들이 당황했다.
“어, 그러게? 뺏어야 하나? 그, 그래도 얇으니까 부피로 따지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거 아닐까?”
하나도 허둥댔다.
누가 뭘 어쩌기도 전에 고구마 조각의 끄트머리가 리모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작은 분홍빛 혀가 날름 나왔다 들어갔다.
“찍.”
볼이 불룩해져서는 리모가 만족스러운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가 세모의 손에서 뛰어내렸다. 딩요에게 달려가 앞발로 딩요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찍. 찍.”
“아, 아빠......”
세모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젠 딩요에게 부비대는 리모를 바라보았다.
“먹을 걸로 꼬시다니 그런 좋은 방법이!”
두리가 벌떡 일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잠깐만, 두리야! 사람 과자는 염분이나 지방이 많아서 애완동물한테는 해로워!”
뒤늦게 정신 차리고 도운이 소리쳤다.
“찍!”
리모가 달려가 도운의 손을 뒷발로 콕 밟았다. 도운이 당황했다.
“아..... 그래. 애완동물이 아니고....... 음, 리모, 그치만 지금 몸은 햄스터니까 역시 사람 먹는 건 안 먹는 게.....”
“찍!”
리모가 거세게 항의했다. 도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열심히 사과했다. 옆에서 애들이 키득거렸다.
그러고 있는데 두리가 양팔 가득 과자를 안고 달려왔다. 그가 리모 앞에 와르르 과자 산을 쏟아놓았다.
“좋았어, 이제 리모 아저씨는 내꺼다!”
“어째서 우리 아빠가 네껀데!”
세모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두리 너어 그 버터꿀 감자칩! 다 먹었다더니 몰래 숨겨놨냐!”
하나도 항의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리는 의기양양하게 바로 그 버터꿀 감자칩을 뜯어 리모에게 한 조각 내밀었다.
리모는 먼저 받아들고 냄새를 맡더니 입을 벌려 답삭 물었다. 바삭하는 소리가 나고 리모가 입을 오물거리더니 갑자기 갉는 속도가 빨라졌다. 보고 있는 사이 감자칩은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리모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걸 보고 두리는 서둘러 한 조각을 더 꺼냈다.
“안돼.”
도운이 리모를 집어 들었다.
“찍!”
“이성적으로 생각해, 리모. 지금 몸은 햄스터라고. 아무거나 먹고 탈나면 동물병원에 가야 할 텐데, 그래도 먹고 싶은 거야?”
무시무시한 협박에 햄스터 리모가 빳빳이 굳었다.
“찌익.”
리모가 도운의 손 가장자리로 가서 세모 쪽으로 앞발을 내밀었다.
“찌이익.”
세모가 냉큼 도운에게서 리모를 뺏어들었다.
“자, 괜찮아요 아빠. 동물병원 같은 덴 절대 안 갈 거니까, 괜찮아요.”
그가 리모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얼렀다.
“세모야.”
“안 아프면 되잖아요.”
세모가 방어적으로 말했다.
“하루 종일 과자만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조각 정도는.”
“몸무게 비율로 생각하면 그거 한 조각이 너희들 기준으로 대여섯 봉지 이상이 될 거다. 네가 그렇게 과자를 많이 먹으면 리모가 걱정하겠지?”
세모는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어디까지나 리모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야. 갑자기 햄스터가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매우 걱정스러운데 거기에 위험요소를 더할 필요는 없지 않니. 우선 햄스터에게 안전한 먹을 걸 찾아보자. 분명 햄스터가 먹기에도 좋고 리모 입맛에도 거부감 없는 음식이 있을 거야.”
“네에.....”
세모는 수긍했다. 그렇지만 리모를 놓지는 않았다.
“흐음, 이거 맛있긴 한데 너무 달고 좀 가짜 꿀맛 나지 않아? 그 난리 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으앗, 딩요 너 그새 뭘 먹고 있는 거야!”
두리가 과자 봉지를 뺏으려고 했다. 딩요는 두리에게 혀를 내밀며 남은 과자를 오공에게 넘겼고 오공은 하나에게, 하나는 세모에게 넘기고 나니 과자 봉지는 텅텅 비어버렸다.
“너무해..... 어렵게 구한 건데.”
두리가 좌절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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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용 케이지는 리모가 발을 구르며 분연히 거부했기 때문에 리모의 새 거처는 그의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그 위에 햄스터 집과 ‘운동용’ 쳇바퀴, 그리고 물을 담은 작은 찻잔과 먹을 걸 담은 접시를 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화장실은 햄스터용으로 나온 게 모래 그릇 수준이기 때문에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집을 하나 더 사서 그 안에 들여놓는 것으로 해결했다.
해결이 되기는 했어도 리모는 심기가 불편했다. 매우 불편했다. 그 증거로 노교수가 귀엽다며 쓰다듬으려 했을 땐 말린 사과를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고 말았다.
사과는 먹은 뒤에.
“여기 보면 햄스터에게 생과일도 먹여도 된다고 되어 있어.”
딩요가 타블렛 화면을 짚어가며 말했다.
“다만 생채소나 과일을 많이 먹이면 설사할 수 있으니 변상태를 자주 확인해주라고....”
세모가 푹 좌절하는 걸 보고 딩요가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냥 애완동물도 아니고 ‘아빠’다보니 이것저것 민감해지는 건 이해가 가지만.
“힘들면 도운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어때?”
딩요가 말했다.
“꼭 돌보기 귀찮거나 한 게 아니라도 아빠라고 생각하면 민망한 일 정도는 있을 테고 도운 아저씨도 이해해주실 테니까..”
“아냐, 내가 해야 해.”
세모가 결연하게 주먹을 쥐고 다시 일어났다.
“우리 아빠라고. 도운 아저씨가 아니라 내가 가족이야. 당연히 내가 돌봐드려야지.”
“그래, 그럼.”
딩요는 고개를 끄덕이고 햄스터 먹이를 계속 찾아 읽었다.
“양은 몸무게의 5%~10%를 주라는데. 리모 아저씨 몇 g이야?”
“118.”
“저체중인 거 아냐? 130은 되야 정상이라는데. 과자 좀 먹... 드시게 해도 괜찮겠는걸.”
“그래도 건강에 해로울지 모르니까.... 햄스터용 보양식 같은 거 있어?”
“보양식이라. 영양 공급용 간식이라면....”
화면을 넘기던 딩요가 말을 잃었다. 세모가 넘겨다 보았다.
“뭔데 그래?”
“그....... 밀웜.”
“그게 뭔데?”
“애벌레.”
세모와 딩요는 한참을 침묵했다.
“버터꿀 감자칩을 구해오겠어.”
“응, 그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딩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햄스터를 키우게 된 것 만으로 힘든데 그 햄스터가 사람, 그것도 아빠라니 세모에게 동정심이 절로 들 지경이었다.
세모는 아빠방 문을 쳐다보았다.
리모는 지금은 자고 있었다. 햄스터는 야행성이고 하루에 12시간은 잔다고 한다. 세모는 그럼 아빠를 돌보려면 밤에 일어나야 하는 건가 걱정했다. 도운은 낮이라고 해서 햄스터를 깨우면 안 되는 건 아니고 원래 햄스터는 완전히 야행성인 게 아니라 아침과 저녁에 주로 활동하는 거고 더구나 리모는 인간이었던 가늠이 있으니까 밤에 자고 낮에 깰 거라고 안심시켰다.
어쨌거나 잠을 많이 자는 건 사실이고 세모는 아빠가 자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꼭 아빠를 깨울까 걱정하는 것 말고도 ‘햄스터를 키우는 요령’ 같은 걸 아빠 듣는데서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빠는 혼자 주무시게 놔두고 거실서 딩요랑 햄스터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해바라기씨 좋아한다니까 그것도 살까?”
딩요가 물었다.
“응.... 근데 아빠가 까서 드실 수 있을까?”
세모와 딩요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구마를 갉갉갉해서 볼주머니에 저장하던 거 생각하면 햄스터의 본능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곤 해도 양손으로 쥐어야 할 만큼 커다란 씨앗을 이로 깨물어 껍질을 벗겨낸다고 생각하면....
“아빠 정말 저대로 괜찮으실까.”
세모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인간하고 햄스터는 생긴 것도 사는 방식도 너무 다르다고. 별 생각 없이 인간일 때처럼 움직이다 다치기라도 하면? 물만 해도 크기 보면 욕조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일 텐데....”
세모가 양 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았다.
“안 그래도 작은 동물은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지거나 그런다던데, 이렇게 잠시 떼어놓고 나온 틈에 뭔가 잘못될 수 있다는 거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딩요가 세모의 어깨를 토닥였다.
“분명 잘 있다가 금방 인간으로 돌아오실 테니까. 음, 햄스터일 땐 인간일 때 보다 운동도 많이 하고 평소 안 하던 동작도 하고 그럴 테니까 더 건강해지는 거 아닐까?”
“그런가?”
세모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지금도 분명 아무 문제 없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편안히 자고 있을....”
말하니 상상되었다. 상상하니 보고 싶었다.
“걱정되면 보고 오자. 조용히 갔다오면 되잖아.”
딩요가 리모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귀엽게 자는 걸 보고 싶어서 그런다는 눈치는 챘지만 세모도 별 말 없이 일어섰다. 세모도 아빠를 보고 싶고, 또 아빠가 매우 귀여운 건 그도 좀 좋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책상 위를 보니 리모는 집 안에 깔아둔 솜 위에서 자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손발을 모은 채 웅크리고 자고 있는 모습은 과연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귀여워서, 딩요는 소리지르지 않으려고 입을 꽉 막았다.
리모가 옴칠했다. 코를 쳐들고 킁킁거렸다.
그가 발딱 일어나 세모에게 달려왔다.
“찍.”
그리곤 세모의 손가락을 꽉 끌어안고 매달렸다.
“찍.”
딩요는 눈에 카메라가 달렸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했다. 찍자니 조금 무례한 것 같고 그치만 이런 귀여운 광경은 동영상으로 촬영해 길이길이 남겨야 할 것 같고.
“아빠?”
세모가 양 손으로 리모를 조심스레 받쳐들었다.
“괜찮으세요?”
“찌익.”
리모가 세모의 팔을 타고 기어올라 어깨로 갔다. 세모가 그에게 고개를 돌리자 혀를 내밀어 세모의 볼을 할짝 했다.
사생활이고 예의고 뭐고 이건 찍어야겠다고 딩요가 카메라 어플을 켰다.
“혹시... 악몽 꿨어요?”
세모의 말에 딩요의 손이 멎었다.
“괜찮아요, 아빠. 저 여기 있고 무사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세모가 리모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안고 토닥였다. 그가 어깨에 앉은 아빠에게 얼굴을 부볐다.
“정말이지, 무서운 일을 겪은 건 아빠인데 왜 저를 걱정하나요.”
“찍.”
“예, 예.”
세모가 리모를 쓰다듬었다. 리모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딩요는 부끄러워졌다. 단지 귀여운 광경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악몽을 꾼 리모아저씨가 세모를 찾아 달려와 그를 꼭 끌어안고 부비대고 볼에 뽀뽀하는..........
‘.....여전히 귀엽잖아?’
인간 모습으로 상상해 봐도 귀여웠다. 친구네 아빠인데 이런 생각 해도 되나 딩요가 고뇌에 빠져있는 동안 세모는 리모를 들고 얼굴을 마주했다.
“아빠 제 침대에서 같이 자요.”
“찍?”
“그럼 악몽 꿔도 금방...”
“아니, 그건 안 돼.”
정신을 차린 딩요가 황급히 말했다.
“코끼리 옆에서 자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너 뒤척이기라도 하다 깔아뭉개면 안되잖아.”
세모가 헉 소리를 내었다.
“그치만..... 어쩌지? 그래도 아빠 혼자 악몽 꾸시게 놔둘 수도 없어.”
햄스터 상태인데도 어떻게 악몽인지 안건지 것부터 딩요는 몹시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걸 묻기에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악몽 이전에 혼자 놔두기 싫은 거지?”
“응.”
세모는 대번에 인정했다.
“그렇다고 24시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잖아. 너 학교도 가야 하고 숙제하거나 놀거나 해야 하고.”
학교도 안 가고 숙제도 안 하고 놀지도 않을 것 같은 세모의 표정을 보며 딩요가 머리를 굴렸다.
“아, 좋은 방법이 있어.”
딩요가 손뼉을 쳤다.
“뭔데?”
“아저씨는 다시 주무시게 두고 우리 오공한테 가보자.”
“아, 그거 웹캠을 설치하면 방법은 간단해.”
‘더블유 키울 때 했던 그거’라는 말에 오공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런데 괜찮을까? 더블유 때랑은 다른 게, 리모 아저씨는 사람이잖아. 계속 감시당하는 기분일지도 몰라.”
“그래도...”
“게다가 너 24시간 또키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없잖아.”
오공이 지적하자 세모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리모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너한테 알림이 오게 하면 어때? 스위치를 만들어서 밟을 수 있게 하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데.”
“신호도 못 보낼 만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세모가 말했다. 오공이 잠깐 고민했다.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건데?”
이번엔 세모가 고민했다. 아빠가 악몽을 꾼다거나, 갑자기 어디가 아프다던가,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다거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스위치를 밟지도 못할 만큼 위급한 상황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 있다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해도 세모가 보고 달려가는 동안 뭔가 사달이 날 게 틀림 없었다.
“우선 둘 다 갖고 가서, 리모 아저씨랑 상의하자.”
오공이 말했다.
“뭐든 싫다는 데 억지로 설치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래.”
세모가 수긍했다. 그는 아빠를 보호하고 싶은 거지 감시하고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니까.
그래서 잠시 후 세모 딩요 오공은 전자 장비를 한아름 들고 세모의 집으로 갔다.
아빠 방으로 가서 세모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노크 정도 했겠지만 지금은 아빠가 햄스터니까...
“찌익-!”
“아, 아빠?”
햄스터의 비명소리에 놀라 세모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 위에 리모의 모습이 없었다.
“찍....”
세모가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분명 문 쪽에서 났다.
“잠깐만, 들어오지 마.”
딩요와 오공에게 말하고 세모가 살그머니 문을 닫았다. 문 뒤쪽에 리모가 굴러있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찌익....”
“문 앞에 있다 밀려나 뒹군 거에요? 다치지 않았어요?”
“찍.”
리모가 발딱 일어나 세모 쪽으로 뽈뽈 기어왔다. 세모가 리모를 주워들었다.
“책상에서 내려오신 거야?”
딩요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응, 그랬나봐.”
“위험했다.”
오공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밟을 뻔 한 거잖아.”
세모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아빠.”
“찍?”
“책상에서 내려오지 마세요.”
“찍!”
“그래도 안 돼요, 위험하다고요!”
“찍....”
“지금은 다행히 밀려났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거잖아요. 다리가 문에 낄 수도 있고....”
“...대화가 되는 건가?”
오공이 중얼거렸다.
“보면 대충 의미 알 거 같지 않아?”
딩요는 즐거워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사람의 말이 아닌데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는 것 같아서...”
“찍?”
“아, 그래. 니들도 들어와.”
세모가 말하며 문에서 비켜섰다. 딩요랑 오공이 들어와 의자에 가져온 장비를 내려놓았다.
“아무튼 앞으론 책상에서 내려오지 말아요. 아니면 가장자리에 울타리를 쳐버릴 거에요.”
“찌익....”
리모가 푹 엎어졌다. 세모가 책상 위에 내려주자 리모는 바닥에 붙은 그대로 굼실굼실 기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곧 바닥에 깔아뒀던 솜이 올라와 입구를 막았다.
“삐졌네, 리모 아저씨.”
딩요가 말했다.
“그래도 아빠의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어.”
세모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건 좋은데 우리 긴급 신호 설치하기 전에 리모 아저씨랑 상의하려고 온 거잖아.”
오공이 말했다.
“아저씨가 우리랑 말도 안 하면 어떻게 해?”
세모가 고민했다.
“우선 먼저 설치하자. 사용법은 말로 하면 들으실 수.”
“찍!”
“응, 들리긴 아주 잘 들리시는 것 같아.”
딩요가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설치하면 위급한 일이 ‘생겨도’ 절대 안 쓰실 것도 꽤 분명해 보여.”
“찍.”
“거봐.”
“딩요야, 너까지 햄스터어를 알아듣지 말아줘....”
오공이 사정했다.
“하지만 방바닥을 함부로 돌아다니다 잘못 밟히기라도 하면? 아니 지금은 방안이기나 했지, 거실이나 부엌을 돌아다니다 의자 다리에라도 찍혔다간....”
세모가 부르르 떨었다.
“세모 너 내가 취재 다닐 때 엄마가 위험하게 어딜 싸돌아다니냐고 할 때랑 똑같아.”
딩요가 말했다.
“실제로 위험하잖아!”
세모가 항의했다.
“분명 저 크기로 아무데나 돌아다니면 위험해.”
오공이 말했다.
“그렇다고 리모 아저씨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멋대로 했다간 리모 아저씨를 사람이 아니라 햄스터 취급하는 게 될 거고, 또 아저씨가 화가 나서 멋대로 나가버렸다간 더욱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하잔 거야?”
세모가 물었다.
“이건 도운 아저씨하고도 이야기 해 보는 게 좋겠어. 아니 우리 모두 생각해 볼 문제야.”
“맞아. 우리끼리만 결정해봤자, 두리가 몰래 과자 갖고 들어오거나 하면 안되니까.”
딩요도 말했다.
“찍.”
“물론 리모아저씨도 같이.”
Chapter Text
그래서 얼마 뒤 도운, 리모, 하나, 두리, 세모, 딩요, 네옹, 노교수, 오혜라는 도운네 거실에 모두 모였다.
햄스터가 된 리모를 처음 보는 네옹과 혜라는 정신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장난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봤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이 햄스터의 의사표시가 매우 분명했기 때문에 그가 사람이라는 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정말 리모 박사님 맞아요?”
혜라가 물었다.
“그런 것 치곤 어째 세모에게 안 가고...”
“찍.”
리모가 한마디 하자 혜라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한 건지는 몰라도.
“둘 잠시 냉전이에요.”
손으론 리모를 쓰다듬으며 딩요가 설명해주었다.
“세모가 아빠를 과보호하려고 해서.”
“과보호가 아니라 위험했다고.”
“나도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데 찬성이야, 리모.”
도운이 말했다.
“햄스터가 아니라 개나 고양이가 되었더라면 나도 이러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그 크기로는 아무데나 돌아다녀선 매우 위험해.”
“찍.”
“안 밟히게 피해 다니면 될 것 같아? 쉽게 피하기도 어려울 거고 위험이라면 밟히는 것 말고도 많이 있어. 떨어지거나 진창이나 바닥에 흘러있는 오일에 빠지거나 미끄러지거나, 굴러다니는 깡통에도 깔리거나 다칠 수 있다고.”
“찌익.”
리모가 도운에게서 등을 돌리고 딩요의 손에 고개를 묻었다. 두리가 그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내밀었다.
“고집부리지 마, 리모. 또봇들이 로봇 형태로 애들 곁에 있을 때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는지 알잖아? 그 정도 일을 아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이야?”
리모가 귀를 눕혔다.
“찍....”
그의 코 앞에 두리가 땅콩을 내밀었다. 리모는 덥석 집어 들고 갉았다.
“찍!”
그가 땅콩을 서둘러 입에 우겨넣더니 폴짝 뛰어 두리한테 갔다. 두리가 땅콩을 하나 더 꺼냈다.
“두리야, 땅콩은 지방이 많아서 많이 먹으면 해로워.”
도운이 말했다.
“하나 정도 많지도 않잖아요, 리모 아저씨는 가볍고.”
“그래. 그래도 더는 주지 말렴. 그리고 리모.”
막 두 개째 땅콩을 입에 넣다 리모가 깜짝 놀라 슬그머니 도운을 돌아보았다. 그가 다시 정색을 하고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리모 박사님인 것도 맞지만 햄스터인 것도 맞네 그려.”
네옹이 말했다.
“찍!”
“아 지가 뭐 틀린 말 혔소.”
네옹이 리모를 덥석 집어 들었다.
“찍!”
리모가 버둥거렸다. 네옹은 그 무섭고 얄밉던 아저씨가 쥐가 되어 이렇게 손 안에 쏙 들어오는 게 너무나 신기해서 이리 저리 돌려가며 쳐다보았다.
“찌익-!”
리모가 마구 버둥거렸다.
“아따 지가 뭐 떨어트릴까봐...”
“네옹형.”
세모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내려줘. 우리 아빠께서 싫어하시잖아.”
소름이 쫘아악 돋아서 네옹이 세모를 돌아보았다. 세모가 살기를 피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하하, 세, 세모야, 내가 너희 아빠를 어떻게 할.”
“찌익.”
네옹은 즉시 리모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떨어뜨리거나 기타 다칠 위험은 없도록 조심해서.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리모는 세모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세모가 안아 올리자 세모의 품에 고개를 묻고 찍찍 울었다.
“햄스터는 맹금류가 천적이기 때문에 위에서 잡아 들어 올리는 걸 아주 싫어한대.”
딩요가 말했다.
“네옹 오빠 말대로 햄스터의 본능도 있는 거라면 방금 엄청 무서웠던 거 아닐까.”
“디, 딩요야, 나 너 뭐한테 죄진 거 있냐....”
세모가 눈에서 힘이 빠지지 않은 채 네옹을 노려보았다.
“근데 너 덕분에 리모 아저씨랑 화해 한 거 아냐?”
하나가 지적했다.
“방금 전까진 등 돌리고 있었잖아.”
“어...”
세모 품안의 리모도 뒤늦게 화내던 걸 기억한 것 같았다. 그가 울다 말고 진지하게 고뇌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아빠.”
세모가 리모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아빠가 위험할 것 같아 걱정이 되서 그랬어요. 아빠 싫은 건 억지로 강요하려던 건 아니에요. 죄송해요.”
리모는 갈등을 그만두고 못이긴 척 세모에게 다시 기댔다.
“그래. 좋은 목적이라고 해도 싫은 걸 억지로 시키면 문제가 생기지.”
도운이 말했다.
“아빠는 숙제 억지로...”
“두리야, 아빠는 널 괴롭히려고 숙제를 시키는 게 아니라 네가 최소한의 할일은 했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 내가 학원을 가랬니 문제집을 풀랬니. 숙제 정도는 성실한 학교 생활의...”
“도운, 아직 리모 이야기가 안 끝났어요~”
노교수가 지적했다.
“아, 예. 그렇죠.”
도운이 머리를 긁었다.
“리모, 방금 맹금류 해서 생각났는데 우리 사람 상대로 위험한 것만 생각해선 안 될 것 같다. 기지내 방역은 되어있다고 해도 근처는 숲도 있고 부엉이나 족제비 같은 게 살지도 몰라.”
‘어, 아빠 부풀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리모를 세모가 열심히 다시 토닥였다.
“그러니 행동 반경 제한은 반드시 필요해. 책상 위에서 내려오지 말란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실내에서, 애들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조심할 수 있도록....”
“저, 도운 박사님 아까 또봇들이 아이들 곁에선 특히 더 조심한다고 하셨죠?”
혜라가 물었다.
“예, 물론입니다. 또봇의 크기와 질량으로는 손 한 번만 잘못 흔들어도 아이들은 날아가버리니까요.”
“그럼 애들이 몰래 뒤에서 접근하거나 하지 못하게 하는 감지 장치 같은 게 있겠네요?”
“당연히 있지요.”
말하고 도운은 혜라가 말하려는 바를 깨달았다.
“리모가 가까이 오면 아이들에게 알람이 가게 하자고요?”
“어른들도 해야죠, 어른이라도 깜빡 실수하면 걷다가 옆 사람을 걷어차거나....”
누군가의 경험이 담뿍 들어있는 것 같은 제안에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접근시 알람이 울리고 상대를 포착하면 알람이 꺼지도록 설정해서...”
“또키랑 연동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오공이 손을 들었다.
“그럼 또봇들 시스템에도 뜰 테니까 알고 주의할 수 있을 거고...... 어, 근데 또봇들이 지금 리모 아저씨 상태를 아나요?”
“아니.”
도운이 말했다.
“경황이 없어서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구나. 리모가 기지에 갈 일은 없겠지만...”
“찍!”
“와서 뭐하게.”
“찍, 찍.”
“그 상태로는 정비는 고사하고 자판도 칠 수 없고 마우스도 움직일 수 없어. 네가 마우스만 하다고.”
“찍.....”
“햄스터용 키보드 만들 수 없어요?”
하나가 물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지금은 리모에게 달 송신기와 새 경보 시스템도 짜야 하는데...”
“노교수님도 같이 하실 거잖아요.”
두리가 말했다.
“교수님도 작은 송신기나 경보 시스템이나 또키 업그레이드 같은 거 만드실 수 있죠, 그렇죠?”
“그, 그야 만들 수 있지요...”
노교수가 어쩐지 자신 없게 말했다. 그런 것들을 만드는 게 자신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럼 빨리 미니 키보드 만들어요.”
하나가 도운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얼마나 작아야 할까요?”
“그, 글쎄다, 우선은 리모의 손... 아니 햄스터 발가락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예비 공돌이 뿐 이나라 하나나 오공 외의 아이들까지 눈을 빛냈다.
“작게 만드는 키보드도 마우스도 리모의 작업용 도구지 너희들 장난감이 아니란다. 알고 있지?”
“예, 물론이에요.”
전혀 잘 알고 있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들이 말했다.
“근데 햄스터는 눈 나쁘다는데, 안경 같은 거 필요하지 않을까요?”
딩요가 물었다.
“안경 쓴 햄스터!”
하나가 탄성을 질렀다.
“아, 안 돼, 아빠 여기서 더 귀여워지면!”
세모가 소리를 질렀다.
“세상 모두가 아빠를 노리고 말거야, 그건 안 돼!”
“찍?”
리모가 고개를 들었다.
“세모야, 그건 좀 과하구나.”
도운이 지적했다.
“리모가, 음,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세상 모두가 노리지는 않을 거야.”
“노린대도 꼭 나쁜 짓 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두리가 말했다.
“그냥 귀여우니까 한 번 쓰다듬어보고 싶은 것뿐이라고.”
“다들 본심이 나오는구나.”
딩요가 즐겁게 말했다.
“또봇들에게 리모 아저씨 소개하는 거 잊으면 안돼요.”
오공이 지적했다.
“특히 제로는 오늘은 왜 리모 아저씨가 안 오나 걱정이 태산 같을 거라고요.”
“그래, 오공이 말이 맞다.”
도운이 말했다.
“지금 기지로 가보자. 그럼 교수님, 경보 시스템 업그레이드 부탁드립니다.”
“예, 물론이지요...”
대놓고 일이 떠넘겨졌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할 말도 없었다. 처량하게 혼자 일하는 신세가 된데다 리모도 쓰다듬게 해주지 않아서 노교수는 매우 서러워졌다.
세모가 손으로 받쳐든 노르스름하고 어른 주먹만 한 햄스터를 또봇들은 모두 카메라나 인식 시스템을 통째로 디버깅 하고 싶은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햄스터라니 리모 박사님이 햄스터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사람이 햄스터로 변하지? 정말 리모 박사님 맞아요? 확실해요?”
“찍!”
리모가 소리치자 와이가 한 걸음 물러났다.
“으악, 대답했다아!”
“당연히 대답하신다 그러더라구, 햄스터가 되었어도 리모 박사님은 리모 박사님이라 그러더라구.”
“와이는 너무 촐싹대지 말기 바람. 작아진 리모 박사님이 놀라실지 모름.”
“신기. 굉장.”
디가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리모를 조사했다.
“그럼, 리모 박사님은 앞으로 계속 이 상태이신 겁니까, 이상 칙.”
“아니 그럴 리가 있니.”
도운이 세모 비명지르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노교수님의 친구의 후배의.... 어쩌고가 작용을 되돌릴 방법을 서둘러 찾고 있다고 하니 곧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곧’은 희망사항이었지만 도운은 그렇게 말했다. 곧 돌아온다고, 도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햄스터가 된 리모가 귀엽기는 해도 언제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고 또 리모가 햄스터인 동안은 자기 혼자 이 아이들을 다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암담했다. 예전과는 달리 엉뚱한 말썽 같은 것도 별로 부리지 않고 철도 꽤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들이고 보호자가 돌봐줘야 했다. 게다가 아이들 말고도.
“리모 박사님이 햄스터가 되어버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인데요. 저 크기로는 또키를 들 수도 또봇에 탈 수도 없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리모 박사님이 파일럿을 못하는 동안 그럼 제로는.....”
“경악. 리모박사님이 저의 파일럿이 아니게 됩니까!”
제로가 드물게 큰 소리를 내었다.
“예상. 그, 그럼 리모 박사님은 새로운 크기에 맞는 새 또봇을 만드실 거고 저는........”
“잠깐만, 제로, 미니 또봇이라니 그런 걸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니.”
도운이 말리려고 제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제로는 휙 뒤로 물러났다.
“선언. 도운 박사님이 싫은 건 아니지만 제 파일럿은 리모 박사님뿐입니다. 이제 와서 바꾸지 않을 겁니다!”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진정하고 내 말을 들으라고!”
도운이 소리치거나 말거나 제로는 돌아서서 밖으로 달렸다.
“제로, 멈춰!”
“제트! 제로를 잡아!”
“찍!”
제로가 멈춰 섰다. 제트가 그를 붙들었다. 엑스도 그를 붙들었다. 알이 격납고 문 앞을 막아섰다.
“......리모 박사님?”
“찍. 찍.”
리모가 세모를 재촉했다. 세모가 그를 들고 제로에게 달려갔다.
제로의 바로 앞에 멈춰서 리모가 세모의 손 위에 발딱 섰다. 그리곤 제로를 향해서 한참을 찍찍거렸다.
“반문. 정말입니까?”
“찍!”
“사과.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감격. 죄송합니다.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틀렸어, 햄스터어를 알아듣는 사람.... 아니지만 아무튼 늘어버렸어.”
오공이 좌절했다.
“심지어 로봇인데. 이러다 또봇 기지의 제 2 공용어가 햄스터어가 되고 말거야.”
“찍.”
리모가 말했다. 제로가 아주아주 천천히 리모 앞으로 왔다.
차량 전면부가 열리고 마인드 코어가 밀려나왔다. 세모가 가까이 대주자 리모가 앞발로 코어 표면을 짚었다. 손댄 부분으로부터 퍼지듯이 코어가 환하게 빛났다.
“찍.”
리모가 코어에 고개를 기대고 얼굴을 부볐다. 코어에서 밝은 빛이 물결쳤다.
“코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도운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리모의 진심이 전해지는 거야.”
“통했는데요, 어딜 봐도 확실히 통했는데요......”
그러는 동안 제로는 다시 마인드코어를 넣고 정신을 차렸다.
“제안. 리모 박사님. 저랑 드라이브라도 가시지 않겠습니까.”
“찍.”
제로가 차문을 열었다. 리모를 든 채 세모가 운전석에 올랐다.
“찍?”
“아빠 지금은 작고 가벼워서 제로가 정차라도 하면 운전대까지 날아갈 거에요. 제가 잘 잡고 탈게요.”
“반대. 걱정할 것 없습니다. 리모 박사님께 위험하지 않도록 시속 5km이하로 달리면 됩니다.”
“찍!”
“불가. 그보다 빠르면 세모의 말대로 리모 박사님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위험은 그렇다 치고 시속 5km면 시동 안 꺼지냐....?”
도운이 물었다.
“무관. 꺼진다고 해도 리모 박사님이 뒹굴 걱정은 없습니다.”
“아니 리모 말고 네 걱정도 좀 하라고.”
도운이 이마를 짚었다.
“햄스터용 카시트를 만들어줄게. 햄스터는 털도 길고 몸도 인간보다 유연하니까 그렇게만 해도 시속 10 이상은 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 기지 내를 천천히 도는 정도는 되겠지.”
“수긍. 알겠습니다.”
햄스터용 미니어처를 만들어야 할 품목이 늘어버렸다. 약속된 밤샘 작업에 도운은 머리를 짚었다.
하나도 두리도 그 눈치를 채었다.
““노교수님.””
둘이 동시에 노교수를 호출했다.
“리모 아저씨 안전 대첵에 햄스터용 카시트도 필요하대요.”
“제로에게 설치할 거요. 파일럿하고 드라이브 하고 싶다는데 안 만들어 줄 수 없잖아요?”
“..............리모만 효자 아들을 둔 게 아닌 것 같구나.”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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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용 키보드 마우스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몹시 지루했다.
초반에 딩요와 두리가 떨어져 나갔고 하나와 오공도 곧 흥미를 잃었다. 세모만이 아빠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일념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리모가 나랑 있는 것도 위험하게 생각되는 거니?’
도운은 세모가 조금 야속했다. 이번 일로 어른 전반을 불신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건지, 세모는 아빠를 꼭 자기가 돌봐야한다고 고집 부렸다. 노교수야 위험한 물건을 가져다 또봇 기지에 들인 죄가 있다지만 자기는 억울하다고 도운은 생각했다.
‘나도 리모 잘 돌볼 수 있는데. 내가 리모를 해롭게 할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걸 하면서 리모를 실컷 만져볼 수 있는 건 좋았다. 발과 발가락 사이 간격을 재고 발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선 리모를 받쳐들고 앞발을 조물조물 만져보는 방법밖에 없었고 리모도 반대하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도운은 떳떳했다.
“역시, 원하는 만큼 발가락 하나하나가 원활하게 따로 움직이지는 않지?”
“찍....”
“괜찮아. 햄스터의 생태인데 네가 어쩔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도운은 리모의 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화면에 떠서 돌아가는 키보드 겨냥도를 바라보았다.
“인간용으로 줄이는 것 만으론 안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만 이래서는 키배치부터 다시 디자인해도 어렵겠는데. 난 인체공학 쪽은 너만큼 모르기도 하고...”
“찌익.”
“그래, 지금은 인체가 아니고 햄스터....체? 아무튼 키보드는 상체를 버틸 수 있어야 원활히 쓸 수 있으니 앞발가락이 뜻대로 움직인다고 해도 햄스터 체형으로는 어려웠을 거야.”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끄덕해 동의를 표시했다.
“그럼 키보드 쪽은 포기하고 문자 입력은 가상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하는 게 낫겠어. 시간은 걸려도 그게 네게도 피로가 덜할 거고 인간으로 되돌아왔을 때 재적응 문제도 적을 거야.”
“찍.”
“마우스만이라면 간단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찍.”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마우스를 만들어야 하는 거니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키보드에 비하면 한없이 간단했다. 도운은 설계를 시작했다.
부품 생산 준비를 해놓고 돌아와보니 리모는 책상 위에서 움츠리고 자고 있었다.
옆에 놓여있는 마우스와 크기랑 모양이 똑같아서 도운은 과연 저래서 마우스가 마우스라고 이름 붙여진 거구나, 라고 감탄했다.
작은 몸통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며 도운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리모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찍?”
“미안, 깨웠어?”
리모가 눈을 깜빡이며 코를 쳐들고 킁킁거렸다. 경계심 없는 모습에 장난기가 든 도운은 그를 감싸 들어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앙.”
“찍?!”
입술로 등을 지그시 물자 쭉 늘어난 털가죽이 입술 사이에 잡혔다. 털 때문에 코가 간지러웠다.
“찌익!”
리모가 앞발로 도운의 턱을 톡톡 쳤다. 도운이 리모를 놓아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장....”
난이야, 아픈 건 아니었지? 라고 물으려던 말이 손 안의 리모와 함께 사라졌다. 도운은 놀라서 매보다 빠르게 리모를 낚아채간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세모야!”
뒤늦게 불러보았지만 세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건 장난이야, 실제로 물거나 먹으려던 게 아니었다고!”
세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도운이 허탈해져서 중얼거렸다.
“.........나 거기까지 신용 없는 거니?”
“찍.”
세모가 고개를 휙 돌렸다.
“찌익.”
“아빠한테 화내는 거 아니에요.”
“찍.”
세모는 아예 책상에 등돌리고 앉아버렸다. 아빠가 뭔가 말씀하고 싶어하신다는 건 알겠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엔 알 수 있었는데, 그런데 아주 잠깐 도운 아저씨랑 둘만 뒀을 뿐인데......
“찌익....”
“시끄러워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찍찍 소리!”
세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리모가 얼어붙었다. 세모는 실수를 깨달았지만 리모는 입만 작게 달싹 하더니 축 쳐저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빠......”
집 안을 들여다보니 리모가 벽을 보고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꼭 울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세모는 죄책감에 안절부절 못했다.
“죄송해요. 아빠가 시끄럽다거나 귀찮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리모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세모는 추측으로밖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순 찍 소리라도 하는 것과 않는 건 대화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걸 깨달았다.
세모는 난감했다. 사과를 해야겠는데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소리질러버렸다고 하자니 제대로 변명이 안 되는 것 같고, 또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짜증이 난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빠가 찍찍거린 건 오늘 하루 종일 그랬는데.
이 직전까진 조금도 싫지 않았는데.
‘도운 아저씨 때문이야.’
세모가 남탓을 했다.
‘도운아저씨가 아빠한테 그런 장난을 치니까.......’
도운 아저씨가 정말로 아빠를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치만 본 순간 화가 났다. 아빠가 도운 아저씨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건 싫었다. 아빠가 도운 아저씨를 꽉 물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화나진 않았을텐데.....
딩동.
세모가 깜짝 놀랐다. 리모도 놀라 집에서 나왔다.
딩동 딩동.
세모는 현관으로 가는 대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휠체어 끄트머리가 보였다.
‘열어주지 말까.’
탁.
세모가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리모가 쳇바퀴를 쳐서 소리를 내었다.
“저 아빠, 저 정말로 찍찍소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리모가 앞발을 뻗어 문을 가리켰다. 그가 애처로운 눈으로 세모를 바라보았다.
“누가 온 건지 아는 거에요?”
리모가 고개를 끄덕했다.
“열어줫음 좋겠어요?”
그가 또 끄덕였다. 세모는 허탈해졌다.
“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계세요.”
세모가 나가서 현관물을 열었다. 밖에서 도운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햄스터용 마우스, 완성해서 말이다...”
“들어오세요.”
세모가 현관에서 비켜섰다.
“아니 이 정도는 너도 설치할 수.”
“아빠께서 보고 싶대요.”
도운은 잠시 세모를 쳐다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운이 방에 들어가자 리모는 팔짝팔짝 뛰며 컴퓨터를 가리켰다. 도운은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에 실행 프로그램을 깔고 마우스를 연결하고 가상 키보드를 켜주었다. 리모가 부지런히 글자를 찍었다.
“바....보....도....운, 왜...... 그 따...ㄴ짓....을 해서?”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고쳐 써 가며 리모가 문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뒷발로 서서 도운한테 막 팔을 휘둘렀다.
“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도운이 두 손을 들었다.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도운이 빌었다. 리모는 당당하게 흥, 하고 돌아섰다. 그리곤 세모에게 앞발을 내밀었다.
“찍.”
이건 매우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세모는 냉큼 손을 뻗어 아빠를 안아올렸다.
“그럼 난 가볼게.”
도운이 어색하게 말했다.
“세모 너도 어서 자고. 리모도 자게 하렴.”
“그럴게요.”
세모는 아까보다 훨씬 덜 적대적인 태도로 도운을 배웅했다. 리모를 소중하게 꼭 품은 채.
[알겠지만, 어제 정말 화냈던 건 아니었어.]
도운은 모니터에 뜬 글자를 보았다.
다음날 아이들은 학고에 가고 아빠들만 남아 기지에 있었다. 도운이 고개를 돌리자 옆 컴에서 리모도 도운을 보았다.
“이거 쓰려고 아까부터 낑낑대고 있었던 거야?”
리모가 발을 좀 구르더니 열심히 마우스를 조작했다.
[아무래도 세모가... 널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더 화난 척 했어.]
메신저에 문장 한 줄이 더 떴다. 도운은 슬쩍 옆으로 이동해 리모가 쓰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찍!”
“미리 할 말을 다 적어놨다면 굳이 한 문장씩 끊어서 메신저로 보낼 필요가 없잖아.”
“찍.....”
“문장 만드는 게 너무 오래 걸려서 조급해진다 이거지? 그래그래.”
도운이 리모를 받쳐 들고 머리며 귀 뒤를 문질러주었다.
‘아니, 귀 뒤는 개던가? 턱은 고양이? 뭐 리모가 안 싫어하니 상관없겠지.’
“찍.”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알아.”
도운이 말했다.
“하나두리도 다섯살 때 분리불안장애가 장난 아니었다고. 겨우 유치원에 보낼 수 있게 된 뒤에도, 다른 애들하고 안 놀고 자기들끼리만 뭉쳐있곤 해서... 딩요 아니었더라면 걔들 지금보다 훨씬 폐쇄적인 성격이 되었을 지도 몰라.”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아빠한테 집착하고, 과도하게 보호하려고 들고, 아빠 친구를 질투하는 상황 이해하고말고.”
“찍.”
“제로도 말이야, 알은 자기가 임시 파일럿과 있어봤으니 그 점을 지적한 것일 텐데 그걸 대번에 버려진다고 확대 해석을 하고.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고. 일단 코어의 크기부터가 햄스터 크기에 맞는 또봇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잖아. 설령 만든대도 제로를 이식하겠지, 새 또봇을 키우기 보다는. 왜 그 정도 믿음도 없는 거야?”
“찍.....”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도운이 리모를 토닥였다.
“그냥, 세모도 제로도 너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너도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버티고 서야 한다고.”
“찍?”
리모가 뒷발로 서서 가슴을 쑥 내밀었다. 리모는 당당할 셈이었겠지만 도운 보기엔 귀여운 햄스터가 으스대는 것으로 밖에 안 보여서 그는 그만 폭소하고 말았다.
“찍!”
“그래그래.”
도운이 리모를 볼에 부비댔다. 리모가 그 중 긴 수염을 잡고 당겼다.
“지금은 네 쪽이 수염 길면서!”
도운이 웃으며 항의했다.
“또다시 앙 물어버릴 테다!”
“찍!”
학교 끝나고 평소보다 더 서둘러 집으로 왔다. 우선 세모네 집으로 갔다가 리모가 없는 걸 보고 이들은 맞은편 집으로 달려갔다.
도운네 집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화악 풍겨왔다. 두리가 신이 나서 가방도 맨 채로 부엌으로 달려갔다.
식탁위엔 채반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엔 얇게 썰어 말린 바나나며 삶은 고구마, 단호박 당근 파인애플 등이 놓여 있었다.
“와, 간식?”
두리가 신나서 얇은 파인애플 조각을 집어 덥석 물었다.
“어, 그거 리모 간식.....”
두리의 표정을 보고 도운이 서둘러 말을 고쳤다.
“으로 만든 거긴 하지만 많으니까 조금 먹어도 괜찮아. 리모 아저씨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란다.”
“찍.”
말하고 리모가 단호박 조각을 하나 들고 애들에게 달려... 오려다가 두 다리로 걷는 건 몹시 힘들다는 걸 깨닫고 잠시 고뇌한 뒤 입에 물고 식탁 끄트머리까지 와서 애들에게 내밀었다.
“...잘 먹을게요.”
세모가 받아들었다.
“찍.”
그러고 있는 리모가 너무나 즐겁고 뿌듯해보였으므로 하나와 오공은 자기들도 뭐 하나씩 받아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저, 전 바나나가...”
“전 고구마로 주세요.”
리모는 신나게 먹을 걸 물어 날랐다. 그걸 보며 도운은 햄스터 부모는 새끼에게 저러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딩요야, 넌....”
옆에서 열심히 동영상을 촬영 중이던 딩요가 헤헤 웃었다.
“기지 내부망에만 올릴 거에요.”
“...그러렴.”
외부로 유출되어도 어차피 ‘애완 햄스터의 귀여운 재롱 자랑’ 이상 뭔가로 보일 리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했다. 햄스터에게는 있을 수 없는 지나치게 인간 같은 행동을 하는 장면 같은 걸 보고 사람들이 몰려오거나....
‘아니 이거 나도 세모랑 생각하는 게 똑같잖아.’
도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햄스터가 되기라도 한 듯 먹을 걸로 볼을 부풀린 두리가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해서 다 먹지는 마라. 학교 갔다 왔으면 우선 손 씻고 세수하고 가방을 방에.”
도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리뿐 아니라 애들 모두가 쌩하니 사라졌다. 잔소리가 듣기 싫은 건지 빨리 씻고 와서 계속 리모랑 놀고 싶은 건지는 잘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더 없어지기 전에 도운은 서둘러 말려서 식힌 음식을 비닐팩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아무리 리모가 쪼잔하지 않아도 자기 간식이 모두 없어지면 그땐 화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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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 전기세..... 또봇 기지는 솔라 에너지 시스템(그게 뭐건 간에)을 쓰니까 전기료 걱정 없이 전열기 돌리고 살겠죠?
Chapter Text
차도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착각하곤 하지만, 사실 도운은 음흉하고 수단을 부릴 줄 알았다.
리모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20년지기 친구이니까. 그러나 그도 도운이 자기 계획을 말해주었을 때는 놀라 뒷걸음질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야.”
도운이 한손으로 리모의 몸 전체를 가볍게 쥐고 속삭였다.
“협조해줄 거지, 그렇지?”
협조하지 않으면 도운은 어떻게 하려는 걸까 리모는 생각했다. 자기는 지금 햄스터 신세였다, 아들하고 말도 수월히 통하지 않는. 리모가 협조하지 않아도 도운은 충분히 계획을 강행할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별로 나쁜 일인 것도 아니니까...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도운이 웃으며 리모에게 아몬드를 한 알 쥐어주었다.
“분명 계획대로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도운이 장담했다. 리모는 아몬드를 갉느라 바빠 듣지 못했다.
“.....먹을 때는 영락없이 햄스터로구나.”
“찍?”
“너 귀엽다고.”
“찍!”
책가방 방에 갖다 놓고 세수하고 다시 모인 아이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적어도 두리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숙제를 끝내지 않은 사람은 리모를 쓰다듬을 수 없어.”
도운이 말했다.
“뭐에요, 그런 치사한!”
두리가 소리쳤다.
“치사하지 않아. 세상 어느 아빠가 숙제도 안 하는 애들이랑 놀아주겠니?”
“찍.”
리모는 팔짱을 끼려고 노력한 것처럼 팔을 포개고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너희들, 리모 아저씨가 싫다는 데도 막 만지고 그럴 거니?”
“아, 아뇨, 그런 짓은 안 하죠.”
하나가 서둘러 말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도운에게 혼나기 전에 세모의 왼주먹에 저 하늘의 별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 그럼 숙제 해 오렴. 아니 모두 모여서 할래? 간식 만들어 줄게.”
“네!”
두리에게 다시 생기가 돌았다. 기왕 숙제를 해야만 한다면 간식을 먹어가며 하는 게 나았다.
“그럼 떡볶이로 할까.”
“근데 우리 아빠는 떡볶이 못 드시잖아요?”
세모가 말했다.
“그....렇겠지. 햄스터 이로 떡이 잘 씹힐 것 같지도 않고, 맵고 뜨겁고 국물 있으니까.”
저 햄스터가 앞발과 입가에 고추장 양념을 묻혀가며 떡을 뜯어먹는 것도 귀엽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도 몇 있었으나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아빠도 같이 드실 수 있는 게 좋은데.....”
“응, 세모야. 그렇지만 리모는 방금 간식을 많이 먹어서 더 먹을 필요가 없.”
“찍!”
리모가 소리 질렀다. 그가 두발로 서서 도운의 소매를 잡고 잡아당겼다.
“찌익....”
“방금도 아몬드 먹어놓고 또 먹고 싶은 거야?”
“찍.”
“아빠 나한테는 땅콩 주지 말라고.”
“하루에 한 알 정도는 괜찮아. 아니 네가 또 주는 게 괜찮다는 게 아니고.”
“떡볶이 말고 다른 햄스터 먹을 수 있는 건 안 되요?”
두리와 리모와 세모가 동시에 심통 내자 도운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나도 리모 아저씨 간식 먹이고 싶은데!”
“떡볶이도 식혀서 드리고 먹고 나서 손하고 입을 잘 닦으면 괜찮지 않을까?”
“찍!”
“근데 고구마랑 땅콩만으로 괜찮아요?”
오공이 물었다. 모두들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니?”
도운이 대표로 물었다.
“그, 영양균형이라거나 그런 거요? 단백질이라던가 무기질이라던가 골고루 먹어야 하잖아요, 리모 아저씨가 환자는 아니지만.”
“아...”
도운이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분명 그렇지. 탄수화물은 간단한데 단백질은.”
“윽.”
세모와 딩요가 동시에 표정을 찌푸렸다.
“왜들 그러니?”
도운이 물었다.
“그...... 햄스터용 단백질 추천 먹이가......”
“먹이가?”
둘 다 입을 다물고 먼 산만 보고 있는 걸 보고 도운이 직접 검색을 했다.
“............”
“찍?”
리모가 궁금한 듯 도운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운은 말없이 리모를 토닥일 뿐 검색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찍?”
“뭐, 뭔가 다른 게 있을 거에요.”
세모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쥐잖아요. 뭐든 잘 먹을 거잖아요. 차라리 그냥 고기를 구워 먹인다거나 달걀을 삶아서.”
“치즈가 좋대.”
하나의 말에 세모가 목뼈가 걱정될 기세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응?”
“햄스터의 단백질 공급. 발효 별로 안 시킨 연한 치즈를 주는 게 좋대.”
“고마워, 하나야!”
세모가 눈물 나도록 기쁜 표정으로 하나의 양 손을 꼬옥 잡았다.
“덕분에 아빠를 밀.... 아무튼 고마워. 정말로.”
“어....응.”
하나의 손을 놓고 세모는 서둘러 문간을 향했다.
“잠깐만, 어디 가니 세모야?”
도운이 불렀다.
“그야 당연히 치즈 사러 가죠.”
“잠깐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않니?”
도운이 슬금슬금 세모를 따라가려는 두리를 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숙제보다 리모 아저씨 건강이 중요.”
“찍.”
리모가 다시 한 번 팔찡 끼듯 앞다리를 포갠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리모 말이 맞아. 지금 리모 아저씨가 다치거나 그런 위급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숙제보다 우선해야 옳겠지만 이건 그저 치즈를 사러 가는 것 뿐이잖니.”
“찍.”
식탁 위에서 리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숙제는 먼저 끝내고 장을 보러 가려무나. 알겠니?”
“네에.....”
세모와 두리 뿐 아니라 하나 딩요 오공도 어깨가 축 늘어졌다.
“찍.”
리모가 도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찍. 찍.”
“알았어. 잠깐 기다려.”
도운이 주머니에서 리모용 마우스를 꺼내주었다. 리모가 타블렛에 메모장을 띄우곤 가상 키보드로 열심히 글자를 찍기 시작했다.
“같.....이..... 가.... 면..... 어....떠..... 애들 장보는 데 따라가겠다고?”
아이들 눈이 번쩍 빛났다.
“찍.”
“하지만 넌 지금 햄스터라고, 보호자 노릇은 커녕.”
“남들 눈에 안 띄게 하면 되요.”
하나가 서둘러 말했다.
“주머니에라도 넣어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
하나가 리모를 들어 올려 자기 가슴 주머니에 쏙 넣었다. 안에서 리모가 잠시 꿈틀거리더니 가장자리를 잡고 고개를 쏙 내밀었다.
“뀍?”
“꺄아아아악!”
딩요가 비명을 지르며 마구 셔터를 눌렀다.
“안 돼 우리 아빠야, 넣는다면 내 주머니라고!”
세모가 덤볐다. 하나가 도운 뒤로 도망갔다.
“넌 윗주머니 없잖아!”
“갈아입으면 되지 뭐!”
“얘들아!”
도운이 소리쳤다. 애들이 일시정지했다.
“리모는 지금이 아니라 너희들이 숙제를 열심히 해서 끝내면 그 때 너희와 같이 나가줄 거다.”
도운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자 할 일을 다 하기 전까진 허락할 수 없다. 특히 리모 데리고는.”
“숙제랑 리모 아저씨랑 쇼핑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두리가 항의했다.
“지금 리모는 작고 연약하니까...”
“찍!”
“..너희가 보호하고 돌봐줘야 해. 그러기 위해선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데, 숙제도 안 해가는 책임감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맡겠다고?”
두리 뿐 아니라 누구도 반론하지 못했다.
“찍.”
하나의 주머니 안에서 리모가 버둥거렸다.
“찌익.”
하나가 그를 잡고 꺼내주었다. 리모가 하나 손바닥에 섰다.
“찍.”
리모가 앞발로 하나의 손을 토닥였다.
“찌익.”
“어.... 감사합니다.”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숙제 하자.”
세모가 말했다.
“빨리 시작해야 빨리 끝내지.”
“응, 그래.”
애들은 각자 숙제할 거리를 가지러 흩어졌다. 그 전에 리모는 도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도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 키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찍하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도운이 식탁을 보니 리모는 도운에게 등 돌리고 있었다.
“왜, 작고 연약하다고 해서 삐졌어?”
리모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은 것도 약한 것도 사실이잖아. 그리고 널 얕보려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어. 저 나잇대가 귀엽다고 병아리 사와서는 놀다가 방치해 죽이잖아. 너야 사람이고 아는 아저씨니까 그렇게는 않겠지만 책임감을 강조해두는 것이......”
까득.
도운은 리모를 보았다. 그가 도운에게 등 돌리고 있는 게 아니라, 나무로 된 수저통을 마주하고 있는 걸 뒤늦게 알았다.
갘갘갘갘갘
“.....리모?”
수저통을 갉다 말고 리모가 흠칫 놀랐다. 그가 슬며시 도운을 돌아보았다.
“혹시 이 근지러워?”
“......뀨이........”
리모가 움츠러들었다. 도운은 당황했지만 곧 할 말을 찾았다.
“이갈이용 미네랄 스톤이란 게 있대. 사줄게.”
도운이 리모를 들어올렸다.
“그래, 장보러 가긴 가야겠다. 필요한 건 대충 다 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도운이 리모를 쓰다듬었다.
“햄스터 같은 행동을 했다고 좌절하지 마. 지금은 햄스터 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도 있고.”
리모는 기운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쇼핑 목록 작성하자.”
이아들이 숙제를 가지고 다시 모여들었다. 리모가 아까보다 눈에 띄게 기운이 없는 걸 보고 세모가 도운에게 눈부릅하기는 했으나 리모가 세모에게 가서 손가락을 끌어안자 싹 잊어버렸다.
아이들은 상에 둘러앉고 도운은 부엌으로 갔다. 리모는 상 위를 돌아다니며 애들 공책이며 참고서를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만들기 없어서 다행이야.”
오공이 말했다.
“그거 시간 많이 걸리잖아.”
“숙제가 너무 많아. 우리 겨우 초등 3학년인데.”
두리가 불평했다.
“찌익.”
리모가 두리의 손을 짚고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리가 웃었다.
“위로해주시는 거에요?”
리모가 고개를 젓더니 연필을 굴려서 두리의 손 가까이 가져다 놓았다. 하나가 폭소했다.
“리모 아저씨 말씀이, 불평할 시간에 숙제나 빨리 하라시는데.”
두리가 입이 댓발은 나와서 연필을 집어 들었다.
“너무해요, 아저씨. 내가 버터꿀감자칩도 줬는데.”
“찍.”
리모가 두리의 손을 앞발로 토닥토닥하더니 머리를 대고 문질렀다. 두리의 표정이 풀어졌다.
“쓰다듬어도 돼요?”
리모가 숙제를 가리켰다.
“찍.”
“숙제 끝내면 쓰다듬게 해주신대.”
“통역 필요 없어, 차하나! 너나 잘해!”
“난 잘하고 있어.”
하나는 정말 하고 있었다. 두리는 하나에 대한 미움까지 전부 담아 숙제를 노려보았다.
“좋아 내가 이딴 거 어디 하고 만다. 못할 줄 알고!”
“화이팅.”
“그래, 두리야 화이팅.”
“빨리 끝내줘, 그래야 장보러 갈 수 있으니까.”
“못하면 떼놓고 가야 하나?”
“찍.”
“아 진짜로 한다니까!”
Chapter Text
두리는 정말로 해냈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낸 숙제를 받아든 도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세요. 숙제 끝냈죠?”
두리가 뻐겼다.
“그래. 정말 다 했구나.”
도운이 미소 지었다.
“잘했다.”
“그럼 이제 장보러 갔다 와도 되죠?”
세모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렇게 조급해 할 필요 없단다. 식물성 식품에도 단백질이 어느정도는 존재하고 리모가 당장 결핍인 것도 아니니까.”
“네. 그래도 아빠 일이라면 걱정이 되어서.”
“나도 아빠니까 그 기분은 알지.”
도운이 웃으며 세모의 머리를 문질렀다.
“가족 간에 서로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다만 너무 과보호를 하지는 말렴. 리모도 아빠 자존심이 있잖니.”
“찍!”
리모가 도운의 손끝을 가볍게 물었다.
“그래그래. 작고 연악하다고 한 게 아직도 원한이 남았어?”
“찍.”
“자, 그럼 가자.”
도운이 앞장섰다.
“어, 아빠도요?”
하나가 물었다.
“그래. 너희들만 보내놓고 나는 걱정이 안 될 것 같니.”
“그야.....”
“왜, 아빠가 가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
“아뇨.....”
말은 그렇게 해도 아이들은 명백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얘들아? 뭐가 문제니?”
“리모 아저씨요. 우리끼린 10분씩 주머니에 넣고 있기로 했는데.....”
“그럼 나도 그렇게 하마. 마지막 차례에 들어가면 되겠지?”
도운이 말하자 아이들이 모두 안도했다.
“누가 처음이니?”
“저요.”
두리가 자랑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숙제 끝났으니 쓰다듬어도 된다고 허락도 받았어요.”
“그래, 그거 잘 되었구나.”
도운이 두리에게 리모를 건네주었다. 두리는 신이 나서 리모를 윗주머니에 넣었다.
“너희들 리모를 들거나 주머니에 넣은 상태로 뛰어선 안 된다. 넘어지면 너희도 다치지만 리모는 큰일 나. 알았지?”
“예!”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했다. 이제는 정말 아이들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 같아 도운은 주의 점은 이쯤 해두기로 했다.
“좋아. 그럼 가자.”
평소 같으면 아이들이 외출할 때는 각자 자기 또봇에 타지만 지금은 모두 한 차에 모아 타야 했다. 중간에 시간이 되면 리모를 넘겨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요 저요! 여섯 명이 전부 타려면 제가 좋다 그러더라구요.”
제트가 신나서 나섰다. 4인승인 엑스와 와이, 디는 6인승 모델인 제트를 부러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공, 오공, 오공. 혹시 리모 박사님은 하늘을 날고 싶어 하시지는 않는가, 는가, 는가.”
“지금은 햄스터 크기니까, 우리가 들고 있기만 해도 나는 거나 마찬가지 높이일걸.”
오공이 말했다.
“나중에 따로 말씀드려볼게. 지금은 다 같이 가야 해서 안 돼.”
더블유는 그럼 오공만이라도 따로 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공이 두 번째 주자고 아까 두리가 리모를 건네받은 뒤로 벌써 4분 가까이 지났다. 차 안에서 넘겨받을 게 틀림없는데 혼자 하늘을 날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부탁. 제트, 리모 박사님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써주길 바랍니다.”
제로가 말했다.
“보충. 제트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리모 박사님은 작고 연약하십...”
“찍!”
리모가 항의했다. 제로는 무시했다.
“..니다.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옳을 겁니다.”
“물론이라 그러더라구. 리모 박사님이 절대로 위험하지 않도록 천천히 주행하고 교통 법규도 잘 지키고 주위 차들의 움직임에도 매우 신경을 쓸 거라 그러더라구.”
“....시속 10km?”
“마트까지 가는 데만 두 시간은 걸릴 거야!”
“그 전에 도로 교통 방해 아냐, 그거?”
“리모는 애들이 품고 있을 거고 애들은 안전벨트를 할 테니까 안전해. 급정거 급출발 안 하고 사고 안 나는 정도면 충분한데 그렇게는 지금도 하고 있잖니.”
도운이 서둘러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차가 움직이고 있을 땐 리모를 꺼내 손에 쥐고 있으면 안 된다. 자칫 놓치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주머니에 넣은 상태에선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네~.”
“반론. 필요가 없다고 해서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로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회한. 지금 몸체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밴이었다면 저도 모두를 태울 수 있었을 겁니다...”
“찍..”
“부정. 리모 박사님은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제로가 서둘러 말했다.
“설명. 리모 박사님은 절 새로 만들어 주시고 위험을 무릅써 가며 보호해주셨습니다. 다른 또봇들을 수리할 수 있는 것도 좋습니다. 박사님께서 죄책감 느끼실 일은 없습니다.”
“찍.”
“방법. 인간으로 돌아오신 뒤에 저를 운전해주시면 됩니다.”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리가 리모의 머리에 가만히 손가락을 올렸다.
“자, 이제 가자.”
도운이 제트에 올랐다. 아이들도 모두 제트에 탔다.
“다녀오겠다 그러더라구.”
“무사히 다녀오기 바람.”
“부탁. 딩요.”
“빨리 와야 돼!”
또봇들의 배웅을 받으며 제트가 기지를 나섰다.
그리고 얼마 뒤 도운은 제로는 배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통신을 켰다.
“그렇다고 쫓아오냐?”
-긍정. 제 목표는 주인의 안전입니다.
“그러니까 멋대로 따라와도 된다고?”
-부정. 리모 박사님께선 따라와선 안 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찌익.”
-의문. 리모 박사님? 지금 말씀은 뜻을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두리가 리모를 스피커 쪽으로 내밀어주었다.
“찍!”
-가설. 지금은 마인드 코어와 직접 교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스피커로 소리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어서 의미가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따 주차장에서 다시 대면한 다음에 대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찍!!”
리모가 온 힘을 다해 항의했으나 제로는 못 들은 척 통신을 끊어버리고 계속 제트의 뒤를 따라왔다.
“...거리가 문제라면 제트가 듣고 제로에게 뜻을 전해주면 되는 거 아냐?”
하나가 물었다. 제트가 흠칫했다.
“제, 제로 형님이 리모 박사님의 또봇이니까 둘이 쉽게 통하는 걸거라 그러더라구, 난 자신 없다 그러더라구....”
제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찍.”
리모가 불만스런 소리를 내었다. 제트는 찔끔해서 운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파일럿이 햄스터가 되어버린 이런 상황에서 되도록 파일럿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야.”
도운이 변명했다.
“그러니 제로에게 너무 화내지 마.”
리모는 여전히 심통난 듯 두리의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서 꼼지락거렸다.
“시간 됐어.”
오공이 말했다.
“이제 내 차례야. 리모 아저씨 줘.”
“엑, 벌써?”
두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실제로 10분이 지나있었다.
“......쳇.”
두리가 리모를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아까 아빠는 달리는 차 안에선 리모 아저씨를 꺼내 손에 쥐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게 왜?”
하나가 물었다.
“두리 너, 리모 아저씨를 주머니에서 꺼낼 수 없으니까 오공한테 넘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거야?”
딩요가 물었다.
“그렇잖아, 넘기는 순간 사고라도 나면...”
“두리 너 정말!”
오공이 화를 내었다.
“이렇게 치사하게 굴래? 우리 모두 10분씩으로 정했고 시간 지났잖아! 어서 이리 줘!”
두리가 놀라 뒤로 몸을 빼었다. 오공은 그걸 주기 싫어 그러는 것으로 오해했다.
오공이 두리를 붙잡으려다 안전벨트 때문에 맘대로 움직일 수 없자 벨트를 풀었다. 제트가 비명을 질렀다.
“운행 중에 안전벨트를 풀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구!”
“싸우지 마라, 얘들아!”
도운이 소리쳤다.
“모두 자리에 앉아라. 안전벨트도 다시 하고. 그리고 두리 넌 핑계대지 말고 리모를 오공에게 넘겨주도록 해.”
“...네에...”
오공도 두리도 시키는 대로 했다. 겨우 차 안이 조용해지자 하나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10분 뒤면 나야.”
“두리가 괜히 시간 끌어서 우리까지 밀렸어.”
딩요가 불평했다.
“너희들 또 싸우니?”
“아, 아뇨.”
애들 서둘러 자세를 바르게 했다.
“리모 넌 괜찮아?”
“찍.”
“그래. 너희들 마트 가서도 얌전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장난치고 싸우면 안 돼. 알겠니?”
“네에.”
마트에 도착하고 곧 리모는 하나에게 넘어갔다.
제로는 제트 옆에 얌전히 주차했다. 도운도 아이들도 이제 리모가 제로 앞으로 가서 한참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리모는 그러지 않았다. 제로는 본체만체하고 하나의 주머니 속에서 꼬물거리며 코만 내밀어 열심히 킁킁거렸다.
제로가 정말로 낙담한 것 같아 도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런 지시도 없이 멋대로 따라오고 돌아가라고 말해도 못들은 척 한 건 물론 괘씸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완전히 무시당하면 제로는 꽤나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러나 도운은 곧 제로를 걱정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졌다. 꼭 소리 지르며 자기들 멋대로 뛰어다니지 않아도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으면 정신 사나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 우선 애완동물 코너로 가자.”
도운이 말했다.
“치즈 먼저 사는 거 아니었어요? 애완용품은 왜요? 아빠 별로 새삼 필요하신 건..”
“햄스터는 이가 계속 길어나니까, 이갈이용으로 미네랄 스톤 같은 게 필요해. 그리고 맨바닥보다는 깔짚이 있는 편이 좋다고 하니까 그런 것도 시험 삼아 깔아볼까 하고.”
처음에만 해도 너무 애완동물스러운 건 리모도 싫어하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수저통을 갉아버린 지금 현실 도피를 할 수는 없었다. 싫든 좋든 리모는 현재 햄스터이고 햄스터에게 걸맞은 환경이 필요했다.
“치즈는 냉장식품이니까 맨 마지막에 사는 게 좋지. 안 그러니?”
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공과 하나가 카트를 애완용품 쪽으로 밀었다.
애완동물 코너에는 이들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들도 햄스터나 토끼가 든 칸막이 앞에 붙어서 귀여운 털짐승들을 쳐다보았겠지만 작고 귀여운데다 말도 통하고 반응도 다양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한 리모에 비하면 그저 여럿이 모여 잠을 자고 있을 뿐인 그냥 햄스터는 너무 단조로워보였다.
애들이 햄스터 우리 앞에서 실망하고 있는 동안 도운은 이갈이 스톤을 골랐다.
“하나야, 이리 와볼래?”
“네.”
하나가 오자 도운이 주머니에 든 리모에게 스톤 두 개를 내밀었다.
“어떤 게 더 좋아 보여?”
리모가 한참 코를 킁킁거리더니 보라색 해면같이 생긴 걸 골랐다. 도운은 당근 모양이 더 좋아보였지만 쓸 사람이 좋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보라색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잠깐, 설마 이게 좋은 이유가 보라색이고 얼룩덜룩해서는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입에 들어갈 거잖아?’
도운은 불안한 심정으로 햄스터용 사료나 간식으로 나온 상품들도 살펴보았다. 사다 먹일 생각은 안 들었지만 재료나 영양 구성 등을 봐두면 참고가 될까 싶어서였다.
“햄스터도 산책줄이 있네.”
옆에서 딩요가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거 어때요? 리모 아저씨는 싫어하실 지도 모르지만 외출할 때 안 잃어버리는 효과 정도는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리모를 ‘외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도운은 그것도 받아 카트에 넣었다. 리모의 외출 의지를 효과적으로 꺾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리모가 줄을 매고 뽈뽈 달려 다니는 모습은 좀 보고 싶기도 했다.
도운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도 모르고 리모는 속편하게 애들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구경했다.
“자, 이제 슬슬 먹을 거 사러 갈까?”
아이들은 매우 기대하는 눈빛으로 따라왔다. 도운이 유제품 있는데 가기에 앞서 신선 식품 쪽으로 가서 채소를 고를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리모가 먹을 것 뿐 아니라 사람 찬거리 할 것도 이것저것 산 다음에 드디어 이 일행은 유제품 코너로 갔다.
그리고 리모는 세모 주머니로 옮겨갔다.
Chapter Text
냉장칸으로 가자마자 두리는 ‘어린이용 맛있는 치즈’라고 써 있는 흰색 슬라이스 치즈를 집어들었다.
“이거 맞지?”
“잠깐만, 우선 성분 살펴보고.”
세모가 치즈를 들고 뒷면의 작은 글자를 유심히 읽었다. 옆에서 하나가 ‘햄스터에게 필요한/과잉되기 쉬운 영양소’ 목록을 찾아보았다.
세모가 치즈를 내려놓았다.
“안 돼, 이건 염분이 너무 많아.”
“저염치즈라고 되어있는데?”
“그래봐야 인간 기준이잖아. 인간하고 햄스터는 몸무게가, 에...”
“600~800배 차이야.”
하나가 말해주었다.
“응. 그렇게 많이 차이나니까 우리한텐 조금이어도 햄스터에게는 너무 많게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파는 음식은 아무것도 안 먹을 수도 없는 것 아니겠니?”
도운이 말했다.
“햄스터는 몸무게가 적은 만큼 먹는 양도 적지. 저염 치즈 정도 되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야.”
“그래도, 기왕이면 좀 더 좋은 걸 드시게 하고 싶은데....”
“만들까?”
오공이 말했다.
“응? 뭘?”
“치즈 말이야. 우유랑 레몬즙만 있으면 간단히 만들 수 있다던데. 지금 필요한 건 발효 안 시킨 흰 치즈 맞지.”
“맞아.”
세모가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하면 돼?”
“잠깐만, 찾아볼게.”
오공이 폰을 조작했다.
“치즈 안 사?”
두리가 물었다.
“안 사. 만들 거야.”
세모가 말했다. 하나가 도운을 쳐다보았다.
“리모한테는 안 먹이더라도 너희들 치즈 떡볶이 하려면 필요할 테니까 사긴 사야지.”
두리는 안도하며 집어 들었던 치즈를 카트에 넣었다.
“만드는 건 괜찮아요?”
하나가 물었다.
“음, 산에 의한 카제인 응고를 관찰하는 화학 실험이기도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윽.”
두리가 표정을 찌푸렸다.
“공부가 아니라 먹을 걸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봐.”
딩요가 말했다.
“어때, 이제 훨씬 할 만 할 것 같지?”
“그, 만든 치즈 맛있을까?”
“그렇다던데.”
오공이 말했다.
“그럼, 나도 만드는 거 찬성.”
“우유 사자.”
하나가 카트를 몰고 우유를 찾아 반대편으로 갔다. 진열대 끝에 시식 코너가 있었다.
세모가 걸음을 멈췄다. 시식중인 냉동식품은 만두도 동그랑땡도 아닌 용꼬리 치킨이었다.
“어.....”
“맛보고 가세요, 지금 40% 세일 중이에요.”
세모가 구워지고 있는 용꼬리 치킨 조각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망설임 없이 샀을 텐데, 용꼬리 치킨을 좋아하는 아빠는 지금.
“자.”
세모가 치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먹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직원이 이쑤시개에 꽂은 용꼬리 치킨 조각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든 세모는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리모를 내려다보았다.
리모가 세모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느라 입이 벌어져서 앞니 한쌍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무척 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작은 조각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안 된다, 세모야.”
도운의 목소리에 세모가 흠칫 놀랐다.
“아, 아까는 가공 식품은 아무것도 안 먹을 수도 없는 거라고...”
“아까 그 저염 치즈보다 그게 염분이 더 많이 들어있을 거다. 게다가 튀긴 거니 기름은 또 얼마나 많겠니.”
세모가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좋아하는 건데......”
“아프면 어디에 가야 한다고?”
리모가 휙 몸을 돌려 주머니 깊숙이 들어갔다.
세모가 도운을 째려보았다.
“위협하지 말아요.”
“위협이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는 건 당연하지.”
세모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쑤시개를 도운에게 건넸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리모를 꺼내 살살 쓰다듬었다.
리모가 세모의 손을 안고 볼을 부볐다. 세모가 그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어, 세모야,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시간이 됐어.”
딩요가 말했다.
“찍.”
리모가 앞발을 파닥거렸다. 잠깐 기다리라는 것 같아 딩요는 가만히 있었다.
리모가 양 손으로 세모의 얼굴을 짚고 세모의 입가를 핥았다. 분홍색 혀가 나왔다 들어가고 리모가 세모의 얼굴을 톡톡 쳤다.
“찍.”
“다음에 꼭 맛있는 거 잔뜩 해드릴게요.”
세모가 말하고 매우 아쉬운 표정으로 딩요에게 리모를 건넸다. 딩요는 조심스레 받아들고 쓰다듬은 뒤 자기 주머니에 리모를 넣었다.
세모랑 딩요는 나란히 우유 있는 데로 갔다.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몸을 돌리던 도운은 시식 직원이 자길 쳐다보다 고개를 휙 돌리는 걸 보고 뜨끔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운이 세모더러 치킨 너겟을 먹지 못하게 한 것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얼마나 극성 잔소리쟁이로 보였을까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햄스터에게 주지 말란 소리였다고 변명하기도 그렇고.
“아빠, 우유 두 통이면 되겠죠?”
하나가 우유병을 들고 나타났다.
“치즈 만들 거 하나 그냥 마실 거 하나.”
“그래. 우유까지 다 골랐으면 이제 가자.”
도운이 서둘러 말했다.
“저, 과자는 안 사요?”
두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안 산다.”
“.....하나도?”
두리가 처량한 표정을 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까 세모에게 엄하게 대한 반동인지 도운은 그럼 하나만 사라고 할까 마음이 흔들렸다.
“너 그래서 하나만 사라고 하면 커다란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거 들고 올 거지.”
하나가 찔렀다.
“야 차하나 너 치사하게!”
“됐다, 얘들아. 싸우지 마.”
도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한 개씩만 골라오렴. 여러 개 든 큰 상자 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하나씩이야.”
“네~”
애들이 신나서 흩어졌다. 도운은 카트를 끌고 그들 뒤를 따랐다.
‘근데 딩요 다음이 내 차례인 거 맞지?’
잊을뻔 한 레몬도 마저 산 뒤 일행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동안 리모는 도운, 그리고 두리를 거쳐 오공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도운은 이 리모 돌리기가 언제 끝나는 걸까 궁금해졌다.
오자마자 아이들은 리모네 집 부엌으로 달려갔다. 도운도 따라갔다. 아이들끼리만 렌지니 칼이니 손대다 다치면 큰일이니까.
리모네 부엌에는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소화기와 구급상자가 있었다. 좀 떨어진 구석에는 소방 도끼와 방호복과 산소마스크까지 갖춰져 있었다. 도운은 리모가 소방 활동에 관심이 있다던 말을 떠올렸다.
‘이정도로 진심이었던 건가?’
세모는 익숙한 태도로 냄비를 꺼내 우유를 붓고 가스렌지에 올렸다. 그러는 동안 옆에서 오공이 레몬즙을 짰다. 도운은 리모가 어째서 레몬즙 짜는 도구를 갖고 있는지와 오공은 또 그걸 어떻게 알고 꺼내서 쓰는지 중 어느 쪽이 더 이상한가 고민했다.
“끓지 않을 만큼만 데우고 불 꺼.”
“응.”
우유를 젓다가 세모가 불을 껐다. 거기에 오공이 레몬즙을 넣고 소금은 손끝으로 조금만 집어서 넣었다.
“이대로 놔두면 돼.”
“이걸로 끝?”
두리가 주걱으로 우유를 쿡쿡 찔러보았다. 우유가 뭉글뭉글하게 굳어가는 걸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저대로 다 엉기면 물 짜내면 끝이야.”
오공이 말했다.
“우와.”
“충분히 짜내려면 시간은 좀 걸릴게다.”
도운이 말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두리가 물었다.
“찾아본 레시피로는 네 시간 쯤이라고.”
“그럼 오늘 못 드시는 거에요?”
세모는 낭패했다.
“아니, 그 정도야 방법이 있지.”
도운이 찻숟가락으로 엉긴 우유 덩어리를 떠서 냄비 벽에 대고 꾹 눌렀다. 어느 정도 물기를 짜내고 그가 리모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먹어볼래?”
리모는 고개를 내밀어 아직 물기가 많은 치즈 덩어리를 덥석 물었다. 도운이 숟가락을 기울여주자 흰 덩어리는 술술 리모 입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어때?”
“찍~”
리모가 볼을 부풀린 채 헤벌쭉 웃었다. 도운도 마주 웃었다.
“마음에 들어?”
“찍.”
“그거 다행이네요.”
세모가 휙 리모를 집어 들었다.
“이만 아빠 방에 모셔다드릴게요.”
“어, 나 시간 아직 안 됐어!”
오공이 항의했다.
“다음엔 내 차롄데.”
하나도 불만스러워보였다.
“애초에 마트 갔다 오는 동안 주머니에 넣고 있는 거였고 이미 한 바퀴 돌았잖아. 이제 집에 왔으니 아빠도 쉬셔야지.”
세모가 리모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애들이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운은 어깨만 으쓱했다.
“자, 치즈 거르자.”
리모는 깔짚에 푹 파묻혀 졸고 있었다.
세모 말이 옳긴 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리모는 몹시 피곤했다. 마트는 햄스터에게는 너무 밝고 온갖 냄새로 흘러넘쳤다. 인간하고는 다른 감각이 처음엔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럴 땐 골치 아팠다. 팔다리가 짧은 것도 금방 금방 배가 고파지는 것도 짜증나고 근질근질한 앞니도 신경 쓰이고 또.....
이렇게 푹 잠들 수 없는 것도 기분 나빴다. 리모는 원래도 잠을 깊게 자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햄스터는 더했다. 옆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혹시 포식자는 아닐까 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리모는 야생 햄스터들이 이런 식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도 새 깔짚은 푹신하고 따뜻해서 좋았다. 일반적으로 파는 물건엔 먼지가 많아서 해롭다며 세모가 일일이 체로 쳐서 나무 가루를 제거해주었다. 잠결에 리모는 좀 더 깔짚 안으로 파고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불안했다. 빨리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세모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하던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요리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리모는 깜짝 놀랐지만 곧 진정했다. 여기는 기지 내, 그의 집이고 방이었다. 위험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빠.”
세모가 들어왔다. 리모가 깔짚을 헤치며 나왔다. 폭신폭신한 게 확실히 맨바닥보다 걷기 편했다.
“치즈가 다 돼서요.”
리모가 눈을 빛내며 세모의 손으로 달려갔다. 리모가 손바닥 위에 올라오자 세모가 그를 들어올렸다.
“그거 많이 맛있어요?”
세모가 물었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이유를 짐작하고 리모가 컴퓨터 쪽을 가리켰다.
세모가 컴퓨터를 켰다. 리모가 마우스로 천천히 글자를 찍었다.
[우리 아들이 만들어줬으니까.]
세모가 갑자기 부둥켜안아 리모는 마우스를 놓칠 뻔 했다.
“미안해요, 아빠. 전....”
“찌익....”
세모가 다시 리모를 받쳐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그냥, 안 그래도 된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괜히 불안하고 그러네요.”
“찍.”
리모가 세모의 손바닥을 토닥였다. 그가 또 열심히 문장을 만들었다.
[걱정 시켜서 미안.]
“아니에요, 아빠 잘못이 아닌 걸요.”
“세모야 뭐해?”
두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모 아저씨 모셔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곧 갈게.”
세모가 리모를 든 채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방을 나왔다.
Chapter Text
부엌에 가 보니 도운이 면보를 펼쳐놓고 치즈 덩어리를 긁어내고 있었다. 끓인 우유 같은 고소한 냄새가 공중에 가득했다.
“애걔.”
만들어진 치즈를 보고 두리가 실망했다.
“한통 다 끓였는데 고작 이만큼밖에.”
“그나마 코티지 치즈는 다른 치즈에 비해선 수율이 높은 편이라더구나.”
도운이 말했다. 하나가 저울을 찾아내 치즈의 무게를 달았다.
“160g이 조금 안 되네요.”
“사람도 먹으려면 좀 더 대량으로 만들어야겠는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이들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할 수는 없어 도운은 크래커에 치즈를 잘라 얹었다. 입이 많긴 해도 모두가 한 번 간식으로 먹을 양은 되었다.
리모도 크래커째 치즈를 받았다. 침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 리모는 받자마자 잽싸게 갉기 시작했다.
“응, 맛있다. 정말.”
“고소해.”
“근데 좀 싱겁지 않아?”
맛보면서 다들 한마디 씩 했다. 그러고 있는데 치즈와 크래커로 볼이 불룩해진 리모를 딩요가 감싸 들어서는 저울에 올려놓았다.
“125g이야.”
“늘었네. 정상 체중 가까워진 건가?”
세모도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그 정도는 방금 먹... 드신 치즈 무게 아냐?”
두리가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늘 리가 없잖아.”
“그래. 게다가 중요한 건 몸무게가 아니라 체성분이지.”
도운이 말했다.
“생각난 김에, 기왕 햄스터인 동안 건강 개선을 할 거라면... 어때, 리모. 운동 좀 하지 않을래?”
“찍!”
“인간일 때 보다는 할 만할 것 같은데. 쳇바퀴에서 달리는 것 만으로 전신운동....”
리모가 도운에게 덤볐다. 물려고 날뛰는 햄스터를 피해 도운은 식탁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아빠는 지금도 운동 많이 해요.”
세모가 말했다.
“책상을 타고 내려가는 것만 해도 암벽 등반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식탁 달려 다니는 것도 지금 크기로 생각하면 꽤 넓고. 여기서 쳇바퀴까지 돌리게 할 필요는 없어요.”
“인간이 러닝머신 뛰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도 아빠가 싫어하면 안 돼요.”
세모가 계속 주장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도운이 너무 쉽게 물러나서 세모는 맥이 빠져버렸다.
“쳇바퀴가 싫은 거면 산책은 어때요? 공원이라던가 아니면 기지 주변만 한 바퀴 돌아도 꽤 운동이 될 텐데.”
딩요가 손을 들고 말했다.
“어때요, 리모 아저씨?”
“찌...”
“리모.”
도운이 끼어들었다.
“산책을 나갈 거면 이걸 써야 해.”
도운이 산책줄을 내밀었다.
상자 겉면엔 친절하게도 골든 햄스터가 산책줄을 착용한 모습이 사진으로 있었다.
“찍-!!!”
“그럼 쳇바퀴로 결정.”
도운은 즐거워보였다.
“아이들 학교 가 있으면 심심할 텐데 마침 잘됐네. 혼자 있을 때 실컷 운동해.”
그리고 다시 리모가 날뛰기 전에 재빨리 아몬드를 한 알 꺼내서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때, 리모. 비만 걱정 없이 견과류를 먹고 싶지 않아?”
“......찍.”
그래서, 그날 밤 세모가 자기 전에 아빠 보러 갔을 때 리모는 쳇바퀴에서 분노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쳇바퀴 옆에는 회전수를 세어서 일정 수에 다다르면 걸쇠가 풀려 문이 열리는 장치가 붙어있고 그 안엔 호두 알맹이가 들어있었다.
세모가 호두를 꺼냈다.
“찍?”
리모가 달리기를 멈췄다. 관성에 의해 쳇바퀴 안에서 뒤로 쭉 밀렸다가 그가 바닥에 뛰어내렸다.
세모가 리모에게 호두를 내밀었다.
“도운 아저씨한테는 비밀이에요.”
리모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호두를 받아들었다. 그가 호두를 잘게 잘라 볼주머니로 위치이동 시키는데 골몰하는 동안 세모는 책상에 팔을 괴고 턱을 올려놓은 채 리모를 지켜보았다.
“아빠.”
리모가 호두를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세모를 보았다.
“오늘 밤에 저랑 같이 잘래요?”
“찍?”
“그 깔아뭉개는 문제 말인데요, 다른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세모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안에는 푹신하게 솜이며 천이 겹겹이 깔려있고 아마도 인형용으로 보이는 이불도 있었다. 세모가 얼굴을 붉혔다.
“딩요가 준 거에요. 싫으면 안 쓰셔도 돼요.”
“찍.”
“그러니까, 아빠는 여기서 주무시고 이 바구니는 제 머리맡에 놓으면 같이 자는 것도 되면서 제가 뒤척이거나 구르거나 하다 깔아뭉개도 아빠보다 먼저 바구니에 부딪힐 테니까 안전....”
“찍.”
“안 부딪히려고 머리맡에 두는 거에요.”
세모가 서둘러 말했다.
“어때요?”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이고 바구니 위로 올라갔다. 세모는 기쁘게 바구니를 들고 자기 방으로 갔다. 그리고 머리맡에 바구니를 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불을 안 껐다는 걸 깨닫고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찍.”
리모는 새벽에 잠이 깨었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 햄스터는 새벽녘과 해질녘에 주로 활동하는 생물이니까. 리모가 바구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세모가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햄스터 시력으로는 인간일 때처럼 선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리모가 폴짝 뛰어내려 세모에게 가까이 갔다.
베게에 올라 머리카락에 폭 파묻혔다가 옆으로 돌아서 어깨를 타고 세모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사방에서 세모 냄새가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세모의 몸을 가로질러 달렸다. 왼팔 위로 올라가자 냄새가 약간 달라졌다. 리모는 멈춰 서서 의수 연결부를 냄새 맡았다.
나쁜 냄새나 아파하는 기색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 자기 아니었더라면 멀쩡하게 살았을 애를 이렇게 자기 몸이 아닌 걸 달고 다니게 만들고.
리모가 세모의 팔을 끌어안듯이 몸을 꼭 붙였다.
그는 세모를 행복하게 해야 했다. 팔다리 멀쩡하게 사는 것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고 즐겁고 삶이 보람 있도록. 세모를 보호하되 방해하거나 구속하지 않으며 이 애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했다. 그게 그의 의무였다.
그 모든 걸 매우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진다, 세모를 보고 있으면.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랑에 빠져 버린 걸까 리모는 스스로도 신기했다.
두 번 다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했건만.......
예고도 징조도 없이 몸이 휙 날았다. 리모는 거의 반사적으로 세모의 팔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움직임이 멈췄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리모는 지금 상황을 파악했다.
위험한 일은 없었다. 세모가 뒤척이며 왼팔을 몸 위로 올린 것뿐이었다. 털 때문에 간지러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리모는 슬금슬금 세모의 몸 위에서 기어 내려왔다. 리모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반성했다. 자칫 이대로 리모를 깔아뭉개기라도 했으면 세모는 죄책감에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었다.
세모가 깨거나 다시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바구니로 돌아가려다 리모는 세모 얼굴 옆에 멈춰 섰다.
지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세모의 모습이라면 언제라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 세모는 참 잘생기기도 했지. 키도 클 거고. 이런 멋진 아들을 얻다니 난 참 행운아라니까.’
아까 있었던 일도 잊고 리모가 세모 얼굴로 가서 몸을 기댔다. 코끝은 찰 것 같아 볼을 대었다.
“찍.”
‘세모야, 사랑해.’
그리고 이제는 정말 바구니로 돌아가려고 리모가 물러났다.
그리고 세모와 눈이 마주쳤다.
리모도, 세모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
소리 지르려다 그러면 작은 아빠가 매우 놀랄 거라는 점을 생각해 세모가 목소리를 억눌렀다.
“나와 계시면 안 되잖아요, 위험하게.”
리모가 고개를 떨구고 움츠렸다.
“찍.....”
“아, 아니 아빠가 뭘 엄청나게 위험에 뛰어들었다는 건 아니고 그냥 주의를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리모가 세모의 얼굴로 가서 할짝 핥았다. 세모가 고개를 뒤로 빼었다.
“저 세수도 안 했는데....”
“찍.”
“제가 안 괜찮아요!”
세모는 소근소근 소리 지르느라 고생했다.
“찍.”
“어휴.”
세모가 리모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모가 세모의 손바닥에 쏙 들어왔다. 세모가 두 손으로 그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놀랐던 것도 잊고 세모는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방이 밝아졌다.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기지개를 켜려다 세모는 자기가 손에 뭔가 보드라운 걸 쥐고 있는 걸 알았다.
‘아, 아, 아빠?!’
놀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야 뭔가 꿈을 꾼 것 같기는 했다. 아빠가 바구니에서 나와 같이 자는 꿈이었던 것 같다.
꿈이 아니었다.
‘위험하게..... 내가 옆으로 구르기라도 했으면 어쩌시려고.’
세모는 쥐고 있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소리는 안 질렀어도 조금쯤 움직였으니 깰 만도 한데 잘 자고 있었다.
‘귀여워라아......’
아빠가 햄스터가 된 뒤 하루에도 수십 번은 했던 것 같은 감탄을 세모는 다시 한 번 했다. 아빠한테 귀엽다고 하면 기분나빠하실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늘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냥 햄스터여도 귀여울 텐데 이건 아빠고, 세모를 아주 좋아하고, 세모도 아빠를 아주 좋아하고...
전화가 울렸다. 세모도 리모도 깜짝 놀라 일어났다. 세모는 놀란 리모를 다독이며 휴대폰을 받았다.
“예, 도운 아저씨?”
-잘 잤니, 세모야?
도운이 말했다.
-아침 먹으러 오렴.
“아..... 네, 곧 갈게요.”
세모는 서둘러 일어나 리모를 침대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갔다. 세수하고 와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리모는 침대에서 세모 하는 양을 구경했다.
“도운 아저씨네 갔다올게요.”
말하고 세모는 잠깐 생각하다 주머니에서 리모용 간식 봉지를 꺼내 침대 위에 놓아주고 뛰어나갔다. 리모는 세모가 나가는 것 까지 보고 간식 봉지에 기어들어갔다.
학교 갈 준비 하며 세모는 마음이 급했다.
자기가 오늘 주번인 걸 밥 다 먹을 때 쯤 하나가 지적해줘서야 알았다. 오늘은 미술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 챙겨가야 할 것도 많았다. 어제 숙제하고 가방에 바로 넣어둘 걸 그랬다고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뛰어 나가 제트에 탔다. 학교 가는 길에 도운에게 아빠는 자기 침대에 있을 테니 아침 챙겨달라고 문자로 남겼다. 전화를 하자니 도운 아저씨도 아침엔 바쁠 거고, 또 위험하게 같이 잤냐는 잔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제트가 빨리 가면 늦지는 않았다.
세모는 그걸로 된 줄 알았다.
1교시 수업 시작하기 전에 도운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모야, 리모 네 침대 위에 둔 것 맞니?
“네, 그런데요.”
세모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없나요? .....혹시 벽하고 침대 틈 같은 데 끼어있는 거 아닐까요?”
-그랬다면 불렀을 때 뭐라고 응답을 했겠지.
세모 생각에도 그건 그랬다.
-일단 더 찾아보고 연락하마. 리모가 답답하다고 방을 나갔을 지도 모르고.
“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세모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 앉아 공부할 준비를 하면서도 세모는 불안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이 빙빙 돌고 귀가 울렸다. 아빠가 어떻게 된 건지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저 자기가 깜빡 방문을 닫지 않고 나와서 방에서 나오신 것뿐이라면. 도운아저씨 오시기 전에 책상으로 돌아가 있으려고 세모네 방을 나온 거고 도운 아저씨가 아빠 방에 들어가 보면 시치미 뚝 떼고 쳇바퀴 돌리고 있는 거라면....
“꺄악, 쥐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뭐? 쥐?”
“으악!”
“으앙, 내 쪽으로 오지 마!”
아이들이 우르르 책상 위로 올라갔다. 갑작스런 소동에 세모는 어리둥절해졌다.
“쥐 어디?”
“저기!”
“저기 어디?”
“세모 미술 가방 저기!”
세모가 자기 미술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스케치북과 가방 틈에 매달려 있던 리모가 세모를 올려다보았다.
“......뀨.....”
“아, 아빠!”
‘아빠 주위에서는 조용히’도 잊고 세모가 소리 질렀다.
“어, 어째서! 어떻게 여기에 어쩌다.....”
소리치다 세모는 멈칫했다. 세모 아빠 권리모씨가 햄스터가 된 건 대외비였다. 아니라 해도 그런 말 해 봤자 미친놈 취급밖에 나올 게 없었다. 그런데.
말해버렸다. 아빠라고.
Notes:
세모가 리모 안고 자는데! 저 장면을 아무도 안 보다니! 저 장면을 아무도 안 찍다니!
Chapter Text
엄청난 실책에 세모가 굳어버렸다. 하나도 두리도 오공도 입만 뻐끔거렸다.
교실 전체가 조용해진 중에 딩요가 세모 자리로 뛰어왔다.
“얘들아, 괜찮아. 이거 쥐 아니야. 아빠는 햄스터야.”
딩요가 리모를 번쩍 들어서 애들에게 보였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울렸다. 애들이 책상에서 내려왔다.
“세모네 햄스터인데, 어쩌다 미술 가방에 들어간 거지? 응, 아빠?”
딩요가 좀 과장된 태도로 말하며 리모를 쓰다듬었다.
“...햄스터 이름이 아빠야?”
세모 옆자리 애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딩요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만화에도 나오는 이름이잖아.”
“아!”
두리가 소리쳤다.
“그 새끼 낳던 모래쥐 아ㅃ.....”
세모가 두리에게 지우개를 던졌다. 이마를 맞고 뒤로 넘어갈 뻔 하다 두리가 소리 질렀다.
“아프잖아! 세모 너 왼손으로 던졌지!”
“얘들아.”
선생님이 한 마디 하자 교실이 조용해졌다.
“세모야, 애완동물을 학교에 가져오면 안 되지.”
“죄송해요.”
세모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가방 싸다 실수로 들어갔나 봐요. 일부러 모... 데려오려던 건 아니었어요. 지금 바로 집에 연락할게요.”
세모가 진심어린 태도로 사과했다. 선생님도 누그러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동안 저 햄스터는 상자에라도...”
“저, 제가 데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세모가 움츠러들었다.
“얌전하게 있을 게요.”
선생님이 세모를 쳐다보았다.
“너는 얌전히 있을 수 있겠지만.”
“아빠도 얌전히 있을 수 있어요! 어, 그러니까 햄스터 말이에요.”
선생님이 눈치주자 딩요는 세모에게 리모를 넘겨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세모가 소중히 받아들어 품에 꼭 붙였다.
“햄스터가 어떻게 얌전히 있니,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알아듣는다고 세모는 말하고 싶었다. 정말 얌전히 있을 수 있다고, 그러니 같이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찍.”
리모가 세모를 올려다보며 세모의 손을 탁탁 쳤다. ‘괜찮아’ 또는 ‘진정해’ 정도 의미라고 세모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디에 두면 돼요?”
세모가 선생님께 물었다.
“응, 그래 잠깐만. 어디 적당한 상자 같은 게....”
“잘못하면 도망가요.”
애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상자 정도는 금방 구멍 내요. 종이면 안 되고 뚜껑도 꼭 있어야 해요.”
“너 햄스터 길러봤어?”
세모가 물었다.
“응. 근데 잠깐 안본 새 도망가선.....”
“가선?”
“.....하수구에 들어가 있는 걸 세탁기 돌리고 나서 찾았어.”
세모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가 리모를 더욱 꼭 쥐고 몸에 가까이 붙였다. 리모도 그의 손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못 도망가게 잘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서 어디다 둬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이 애들 더러 조용히 있으라고 하고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은 즉시 세모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햄스터 어떻게 생겼어?”
“나도 좀 보자.”
“쓰다듬어 봐도 돼?”
“그러고 있지 말고 우리도 좀 보여줘!”
“조용히 해, 햄스터는 큰 소리 내면 무서워 해.”
하나가 애들을 말렸다.
“그리고 함부로 쓰다듬는 것도 안 돼. 햄스터가 스트레스 받는데다 물릴 수도 있다고.”
“물릴 뿐 아니라 세모에게 맞고 날아갈걸.”
옆에서 두리가 중얼거렸다. 하나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러니까 조용히 눈으로만 봐야 돼.”
모여든 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모는 의심의 눈초리로 애들을 둘러보았다.
“정말 눈으로만 볼 거지?”
“그래. 그러니까 좀 보여줘.”
세모가 마지못해 리모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리모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킁킁거리며 책상 위를 조금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뒷다리로 발딱 서서 애들을 올려다 보았다.
“귀여워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이 감탄을 흘렸다. 세모는 조금 으쓱했다. 아빠가 구경거리가 되는 건 싫지만 다들 아빠의 귀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니 조금쯤 자랑스럽기도 했다.
“근데 햄스터 이름이 아빠야?”
누가 물었다.
“으, 응.”
“수컷이라서?”
세모는 얼굴이 헬쓱해졌다.
“당연하지, 암컷이 어떻게 아빠가 되냐.”
“못 될 건 뭐야, 만화에서도 새끼를 낳은 건 아빠 쪽이었다고.”
애들이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근데 수컷인지 암컷인지는 어떻게 아는데?”
“글쎄, 뒤집어보면 되는 거 아냐?”
그 말에 리모가 흠칫 놀라 세모에게 달려갔다. 그런 그에게 누가 손을 뻗었다.
“그럼 지금 보...”
두리가 그 애의 뒷덜미를 확 잡아채였다.
애는 뒤로 넘어갔고 간발의 차로 세모의 주먹이 빗나갔다. 애들이 모두 놀라 세모를 쳐다보았다.
“음, 그, 함부로 손대면 물려.”
세모가 변명했다.
“물릴까봐 때린다고? 차라리 물리는 게 낫겠다!”
그애가 벌떡 일어났다.
“귀에서 붕 소리 났거든? 날 죽일 셈이냐!”
“죽이려던 건 아니었어.”
세모가 아마도 변명인 것 같은 말을 했다.
“선생님 오신다!”
오공이 소리쳤다. 모두들 자기 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잠시 있다 애들이 물었다.
“계단 올라오셨어. 미리 조용하고 있어야지.”
오공이 변명했다.
다행히 오공이 너무 난처해지기 전에 선생님이 돌아왔다. 유리로 된 큼직한 수조를 들고.
“작년에 어느 반에선가 물고기 키우던 어항이야. 이 정도면 도망도 못 갈 거고, 안도 보이니 좋지?”
“예.”
이만하면 괜찮아보였으므로 세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차가운 유리 바닥인 게 마음에 걸려서 세모는 자기 상의를 벗어 안에 깔고 그 안에 리모를 내려놓았다.
“찍.”
리모가 항의했다. 여기는 학교고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고 그러니 햄스터의 말을 알아듣는 티는 내면 안 되기 때문에 세모는 못들은 척 했다.
“진짜 지극 정성이다.”
두리가 질려했다.
“나 같음 저렇겐 못 해.”
“할 필요가 없는 게 좋지.”
하나가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만.”
“저래도 돼?”
세모 옆자리 애가 세모를 쿡쿡 찔렀다.
“저러다 햄스터가 니 옷에 똥 싸면...”
세모가 죽여서 입을 막고 싶어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았기 때문에 그 애는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자, 얘들아.”
선생님이 교탁을 탁탁 쳤다.
“수업 계속해야지.”
“으.....”
두리가 신음했다.
“학교 언제 끝나.”
“참, 저 집에 전화하고 올게요.”
세모가 손을 들었다.
“저.. 햄스터 데리러 오라고요.”
“응? 기왕 이렇게 된 거 저기에 두었다가 네가 하교할 때 도로 데려가면 되잖니.”
“그... 래도 걱정하지 마시라는 연락 정도는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 그러렴.”
세모는 후다닥 복도로 나가 또키를 켰다.
-세모야? 리모는 아직...
“학교에 왔어요.”
세모가 작게 말했다.
“침대에서 미술 가방으로 굴러 떨어지셨나 봐요. 다친 덴 없고 지금은 수조에 넣어서 교실에 뒀어요.”
-...그래, 실종이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도운은 우선 안도했다.
-지금 데리러 가마.
“선생님이 오실 필요는 없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학교에 계속 놔둘 수는 없잖니. 다른 애들이 넘보지 않아?
“...넘봐요.”
-곧 갈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예.”
세모가 교실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애들은 그럴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계속 리모가 있는 수조 쪽을 쳐다보았다. 리모는 보이지도 않는 데도.
세모는 일부러 그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빠께서 보고 계시는데 수업에 소홀한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열심히 수업을 듣고 필기에도 힘썼다. 아빠한테 무슨 변화가 있으면 어차피 애들이.
“오~”
애들이 단체로 소리 질렀다.
“손 흔들었어! 봤어?”
“손 흔들긴 뭘 손 흔들어, 기어오르려다 미끄러졌겠지.”
“아냐, 진짜 흔들었다니까? 것도 웃으면서!”
“얘들아!”
선생님이 교탁을 탁 쳤다.
“햄스터 교무실에 갖다놓을까?”
“아니오!!”
반 애들 전원이 합창했다. 그 와중에도 수조 쪽을 보고 있던 애들은 햄스터가 깜짝 놀라 나동그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꺄아, 어떡해! 햄스터 쓰러졌어!”
“뭐?”
세모가 한달음에 달려가 수조를 들여다보았다. 리모가 윗몸을 일으키더니 세모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몸을 굴려 네 발로 섰다.
모르는 사람 눈엔 그저 햄스터가 일어나려고 바동거리는 동작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마도.
“햄스터는 큰 소리 나면 무척 놀라.”
딩요가 설교조로 말했다.
“햄스터는 작고 연약하니까...”
“찍!”
“햄스터 옆에선 조심해야 돼. 큰 소리를 내거나 함부로 집어 들어서도 안 되고.”
“들었지 얘들아? 시끄러우면 햄스터가 너희들을 싫어할 거야.”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공부 계속하자.”
햄스터를 두고 한 협박이 먹혀들어 아이들은 정말로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잠시 저 햄스터를 이대로 교실에서 기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2교시는 미술이었다. 단원은 보고 그리기.
그리라고 공이며 컵 같은 것을 갖다놓았지만 아이들은 햄스터를 그리고 싶어했다. 크게 말하면 햄스터가 싫어할테니까 조용조용 아우성쳤다.
“하지만 햄스터는 계속 돌아다닐텐데, 그리기 어렵잖니.”
“움직이는 걸 그리면 되요.”
“어떻게?”
“음, 엉덩이 뒤에 (( 표시를 해서?”
누가 교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선생님이 가서 문을 열었다.
“수업 중에 죄송합니다. 햄스터를 데려가려고 왔는데요.”
“어, 하나 두리 아버님이시네요, 세모 아버님이 안 오시고.”
“네, 그 친구가 지금 좀....”
도운이 교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아파서.”
세모가 수조로 달려가 자기 윗도리로 리모를 싸들고 와서 도운에게 내밀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도운이 관대하게 웃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니, 이 녀석 잘못인걸.”
“찍.”
“그래 그래. 아침도 못 먹고 배고팠지?”
도운이 리모에게 아몬드를 한 알 내밀었다. 받아든 리모는 곧장 갉기 시작했다. 문 근처 앉은 애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런 리모를 지켜보았다.
도운이 리모를 무릎에 놓고 윗도리는 탈탈 털어 세모에게 돌려주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살펴가세요.”
어른들끼리 점잖은 인사가 끝나고 리모는 가 버렸다. 아이들은 다들 매우 아쉬워했다. 세모는 미술시간에 아빠를 그리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옆줄 애가 세모를 찔렀다.
“너 혹시 아빠 사진 없어?”
세모가 대경실색했다.
“우리 아빠 사진을 왜?”
“아, 아니 니네 아빠 말고 햄스터... 근데 햄스터 이름이 왜 아빠야? 안 헷갈려?”
세모는 어물어물 대답을 못했다.
“아무튼 사진 찍어 놓은 거 있지, 그렇지?”
“없어.”
세모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없어? 정말로?”
“정말로 없어.”
사실이었다. 아빠를 보고 있으면 사진 같은 거 찍을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으니까.
‘어차피 딩요가 많이 찍고 있으니까, 필요하면 달라고 하면 되고.’
필요한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세모에게는 실물이 있으니까. 아빠께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이라면 혹시 다시 보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애들이 딩요에게서 아빠 사진을 입수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세모는 오싹해졌다. 자기 모르는 데서 아빠 사진이 거래되고 있는 건 싫었다. 아는 데면 더 싫었다.
쉬는 시간 되자마자 딩요에게 말해둬야겠다고 결심하며 세모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Chapter Text
도운은 리모를 든 채 제로에 올랐다.
“안도. 리모 박사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어쩐지 휠체어 리프트가 전에 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싶더니 제로는 둘이 타자마자 리모만 챙겼다. 도운은 조금 심술이 났다.
“제로, 난 안 반가운 거야?”
“예?”
제로가 당황했다.
“대답. 물론 도운 박사님도 반갑습니다. 보충. 도운 박사님께서 그 잠시 사이에 위험하실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리모 박사님 걱정부터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도운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제 집에 가자.”
“복종.”
제로가 출발했다.
“......제로.”
“네?”
시속 10km로 도로를 기어가던 제로가 도운이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태도로 응답했다.
“제로, 리모가 지금 작고 연약... 아야!”
깨물렸다. 리모가 도운의 손가락을 꽉 물어버렸다. 손을 들어보니 피는 안 나지만 그래도 잇자국이 선명했다.
“리모 너까지....”
“찍!”
“그래그래, 지금 리모는 작고 연약하지는 않지만 가벼우니까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걱정하는 건 이해를 해.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잡고 있고...”
“반론. 손에 잡은 건 놓칠 수 있습니다. 무릎은 굴러떨어지기 쉬운 위치입니다.”
“....”
도운이 리모를 집어 배에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자, 이제 리모는 내 뱃살 쿠션으로 안전하게 보호받으니까 좀 속력을 내지 않을래?”
“의심. 도운 박사님의 뱃살이 쿠션으로 충분한지 여분에 대해선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제로! 쫌!”
다행히 제로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종이 한 장 날아가지 않을 만큼 느릿느릿한 가속이긴 하지만 도운은 그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찍.”
리모가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왜, 너도 내 뱃살에 불만이 있냐?”
“찍. 찍.”
“통역. ‘쿠션감에는 불만이 없지만 네 건강에 대해선 불만이 있어.’라고 하십니다.”
“응, 내 건강을 걱정한다면 내 속이나 그만 썩이라고 전해줘.”
“찍.”
“통역. ‘전해주지 않아도 알아 듣는다고.’라고 하십니다.”
“그래. 그렇지.”
도운이 머리를 긁었다.
“학교에서 수상한 짓은 뭐 안 했겠지?”
“찍찍.”
“통역. ‘햄스터 이름이 아빠가 된 것 말고는 별 일 없었어. 최대한 햄스터처럼 행동했다고.’라고 하십니다.”
도운은 리모가 생각하는 햄스터처럼‘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뭐, 애들도 있었고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도 얼버무려줬겠지.’
“찍.”
“통역. ‘그래도 세모네 학교에 와보니 좋더라’라고 하십니다.”
“어떤 점이 좋았는데? 다들 만지려고 하고 그래서 귀찮고 불편하지 않았어?”
리모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리모?”
“찍... 찍찍.”
도운은 제로의 통역을 기다렸다. 제로는 유턴을 했다.
“.....제로?”
“응답. 네, 도운 박사님.”
“지금 어디 가는 거니?”
“대답. 성희롱범을 응징하러 갑니다.”
“찍!”
“뭐라고?”
“보충. 세모의 급우중 한 사람이 리모 박사님의 성별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박사님 몸에 손을 대려 했습니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이런 중대한 범죄는 미리부터 확실하게 계도를 해야....”
“멈춰, 제로!”
“찍!”
제로가 멈춰섰다.
“제로, 그 앤 초등학생이고 리모는 햄스터라고! 성희롱이 아니야!”
“부정. 리모 박사님은 사람이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 큰 성인 남성이 옷도 안 입고 초등학교 교실에 있었으니 리모야말로 심각한 성범죄자가 된다만.”
“찍!”
“알아. 말이 그렇다는 거야.”
“반론. 아이들은 리모 박사님의 존재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리모 박사님은 그 발언과 손길에 성적인 수치심과 위협을 느끼셨습니다.”
내가 왜 로봇 데리고 성희롱의 성립 요건을 따져야 하는 가 도운은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제로가 햄스터를 만졌을 뿐인 초등학생을 성희롱범으로 응징하게 둘 수도 없었다.
“리모.”
“찍.”
“너 제로가 그 애를 응징해주길 바라니?”
“찍!”
리모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들었지, 제로? 리모가 처벌을 바라지 않아.”
“주저. 그래도.”
“찍.”
리모가 한 마디 했다. 도운 듣기에도 좋은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제로가 조용해졌다. 그가 꾸물꾸물 다시 유턴했다.
도로가 한산한 시간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 애는 세모가 이미 응징했을 거 아니냐.”
도운이 투덜거렸다.
“찍.”
“통역. ‘확실히 그랬어. 두리가 안 잡았으면 그 애 맞고 날아갔을 지도 몰라.’라고 하십니다.”
“...그말 들으면서 뭐 반성되는 거 없냐?”
“후회. 저도 리모 박사님과 어디든 꼭 붙어다니며 박사님께서 위협당하는 상황이 생길 경우 즉시 대응할 수 있고 싶습니다.”
“그건 후회가 아니지!”
도운이 머리를 싸맸다.
‘리모, 너 나 없는 동안 제로를 대체 어떤 로봇으로 키운거냐, 응?’
도운의 속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리모가 제로 쪽을 보고 아마도 얼굴을 찌푸렸다.
“찍.”
통역이 없었다.
“....제로?”
“................응답, 네 도운 박사님.”
“리모가 뭐라고 했어?”
제로는 이번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제로?”
“..........응답. ‘제로 너 미워. 바보 로봇.’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도운은 바로 리모를 책상위 둥지에 올려놓고 인증샷을 찍어 세모의 폰으로 전송했다.
“자, 이제 세모 걱정시키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답답하면 쳇바퀴라도 돌리고.”
도운이 말했다.
“세모한테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돌아와봐서 없으면 매우 걱정할 거야.”
“찍!”
“지금 협박하는 거 맞아. 제발 하루라도 문제 없이 지내보자, 응?”
“찍....”
“그래, 반성해.”
“찍!”
리모가 항의했으나 도운은 손만 흔들어주고 나갔다. 방금 말은 반성의 의미가 아니라 ‘오늘은 이미 글른 거 아냐? 라는 뜻임을 전달할 길이 없어 리모는 속이 탔다.
이럴 땐 제로라도 곁에 있어서 통역을 해줬으면 싶었다.
바보 멍청이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바보 멍청이 과보호꾼 순 지 멋대로 굴고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 불량품 로봇이지만.
리모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 멍청이 과보호꾼 순 지 멋대로 굴고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 놈인 건 맞지만 제로는 불량품은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그저 주인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제로는. 그 과정에서 다른 무엇도 돌아보지 않는 게 큰 골칫거리긴 하지만.
‘정말 내가 저렇게 키운 것일까.’
리모는 고민했다.
‘내가 제로의 인격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혀서, 이제 제로는 저럴 수 밖에 없게 된 걸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로를 복원했다. 파괴를 위해 쓰이던 과거를 잊고 사람들을 보호하고 다른 또봇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그러면서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로봇이 되기를 기원하며 제로를 다시 만들었다.
지금까진 제로가 잘 해주고 있다고 리모는 생각했다. 새로운 삶에도 적응하고 또봇들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불안했다. 제로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저 리모가 그러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또봇팀의 일원으로 지내는 것 뿐이고 명령권자가 바뀌면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악당 로봇으로 돌아가지나 않을지 겁이 났다.
세모나 도운이사라지면, 자기가 도로 악당으로 돌아가버릴까 두려웠다.
문 열리는 소리에 리모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세모가 학교에서 돌아왔나 하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리모? 자고 있나요?”
리모가 발딱 일어났다. 이 사태의 원흉, 노교수였다. 리모는 그가 다가오길 가만히 기다렸다.
노교수가 책상 앞으로 왔다. 아쉽게도 리모에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 리모의 현재 크기에 맞는 카시트를 부탁받았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넓은 제로의 운전석에 혼자 동그마니 있어봐야 뭐가 재미있나요, 밖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운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서 말인데.”
노교수가 리모에게 몸을 기울였다. 물론 안 물릴 정도 간격은 두고.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겠어요?”
격납고에 나타난 노교수와 리모를 보고 도운과 또봇들은 매우 놀랐다.
“속보입니다! 작은 리모 박사님이 작은 쪼꼬봇 위에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매우 귀엽다는 소식인데요, 노...”
“스파이더 킥! 이라고 그러더라구!”
제트가 알에게 날아차기를 날렸다.
“리모 박사님은 작고 귀엽다고 하는 거 싫어하신다 그러더라구! 지금 박사님이 작고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고 귀엽다고 계속 말했다간 나중에 무서운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더라구.”
“그치만 그치만, 그러는 제트야말로 리모 박사님이 작고 귀엽다고 계속 말하고 있잖아? 그러다 작고 귀엽다는 말이 싫은 리모 박사님한테 보복당하는 건 알이 아니라 네가 되는 거 아니야?”
“맞아. 와이.”
“히익, 이라 그러더라구.”
제트는 재빨리 차로 변해서 주차구역 구석에 틀어박히...려 했으나 제일 구석자리에 틀어박힌 제로에게 밀려 그 옆으로 갔다.
“응? 형님은 왜 리모 박사님 보러 안 가냐고 그러더라구? 쪼꼬봇이랑 크기가 맞아서 작고 귀엽... 지는 않지만 그래도 박사님 즐거워 보이시고 그런다 그러더라구?”
“응답. 제가 보이면 리모 박사님의 즐거운 기분을 망칠 겁니다. 그래서 안 가고 있습니다.”
“마트에 따라가서 그러냐 그러더라구?”
“부정. 그것만이 아니라...”
“찍.”
두 또봇이 얼어붙었다.
“저, 저기 절대 리모 박사님이 작고 귀엽다는 말을 하던 게 아니라....”
“찍.”
제트가 침묵했다.
제로는 리모를 보았다. 여전히 햄스터 상태인 리모는 카시트라기보단 ‘안장’이라고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몸에 벨트를 매고, 자리 앞쪽에는 조종간 같은 게 붙어있고 전선이 나와 쪼꼬봇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쪼꼬봇은 리모 박사님 뜻대로 잘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역시 이제 리모 박사님이 탈 수도 없는데다 말도 안 들어 미움 받는 자기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찍!”
리모가 소리쳤다. 제로가 그에게 주의를 돌렸다.
“리모 박사님....”
리모가 쪼꼬봇 위에서 일어섰다. 그가 짧은 앞다리를 휘두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제트는 슬금슬금 그들 곁에서 물러났다.
“리모 박사님 뭐라고 하시는 거임?”
엑스가 물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러더라구. 마트에 쫓아온 거 혼내시는 거랑 또....... 그리고 그렇게 쫓아다니고 막 보호하고 그러지 않아도 안 없어진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러더라구.”
“그러니?”
도운이 반색했다.
“설마 도운 박사님도 리모 박사님이 제로 형님을.”
“버릴 리가 없다는 건 물론 알고 있어.”
도운이 재빨리 말했다.
“그저, 그걸 확실하게 제로에게 말해줬다는 게 기쁜 거지.”
도운이 리모와 제로 쪽을 쳐다보았다. 리모는 쪼꼬봇에서 제로 쪽으로 건너가 있었다. 저러다 자칫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 리모는 작고 귀엽.... 햄스터 크기여서인지 그릴을 붙잡고 범퍼를 디딘 채 잘 붙어있었다.
제로가 과도하게 걱정하는 게 단번에 고쳐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저런 걸 반복하다 보면 차츰 나이질 거라고 도운은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허나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닌가, 아닌가. 파일럿과 또봇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 크기나 모양이 좀 달라졌다 하여 그 인연이 끊어질 일은 없는 것을. 제로 형장은 어찌하여 리모 박사님이 자기를 버릴 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염려를 하는가, 는가, 는가.”
더블유가 말했다.
“제로는 너희의 여섯 배는 나이를 먹었어. 그 기간 대부분을 리모에게 미움 받으며 살았고. 너희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거기에 더해 사람이 햄스터가 되어버린 걸 ‘크기와 모양이 좀 달리진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더블유가 조금 부럽다고 도운은 생각했다.
“아, 싫어 싫어 그런 것 이해하고 싶지 않네요.”
와이가 말했다.
“두리한테 미움 받다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하나 두리가 우리를 바보, 배신자라고 했을 땐 충격으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음. 그런 것을 겪었다면 제로가 성격이 삐뚤어지는 것도 이해가 감.”
“아니, 성격이 삐뚤어졌다고까지 할 일은 아니고.”
“찍.”
리모가 나타났다. 쪼꼬봇에 탄 채로, 뒤에 제로를 거느리고 15cm밖에 안 되는 키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찍. 찍.”
“리모가 뭐라고 하는 거니?”
도운이 제로에게 물었다.
“해석. ‘제로는 성격이 삐뚤어진 게 아니야. 모함하는 녀석은 가만두지 않겠어.’라고 하십니다.”
“히엑.”
모여있던 또봇들이 모두 한발짝씩 물러났다.
“그래. 제로랑은 잘 화해했고?”
“찍.”
“해석. ‘그래’라고 하십니다.”
“응, 제로.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들어.”
“의문. 그런데 아까는 왜 못 알아들으신 겁니까?”
일반적으로 인간은 햄스터어를 못 알아듣지만 대화의 문맥이나 상대의 태도를 보고 간단한 답 정도는 추측할 수 있는 거라고 어떻게 말해야 제로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도운은 잠시 고민했다.
Chapter Text
“어때요, 리모. 쪼꼬봇용 카시트는 마음에 드나요?”
노교수가 물었다.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 되었네요. 그럼.... 음.”
노교수가 살짝 손을 내밀었다.
“화를 좀 풀어주면 어떨까, 하는데요..”
리모는 그 손을 한참 쳐다보다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교수가 조심스럽게 리모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리모는 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노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축하드립니다.”
도운이 웃었다.
도운의 전화가 울렸다. 건 사람은 세모였다.
“응...”
-우리 아빠가 없어졌어요!!
세모야, 왜. 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세모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누가 침입한 걸까요? 뭘 노리고? 어쩌죠? 혹시 노교수님이 그런 약을 받아온 것부터가 아빠를 납치하기 위한 음모.....
“그럴 리가 있나요!”
노교수가 소리쳤다.
“내가 어디까지나 ‘실수로’ ‘의도치 않게’ 리모가 햄스터가 되는데 기여를 했다고 해서 리모를 해칠 의도가 있었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어, 노교수님?
세모가 조금 당황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저, 저희 아빠 혹시 보셨..
“리모는 여기 있어. 기지에.”
더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도운이 재빨리 말했다.
“노교수님이 리모가 쪼꼬봇에 탈 수 있게 카시트를.. 쪼꼬봇은 차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래서 이젠 리모가 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직접 보고 말하게 이리로 올래?”
-가고 있어요.
그리고 곧 수화기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미끄럼틀로 세모가 튀어나왔다.
전화 시작할 때 세모가 집에 있었던 거라면 리모가 여기 있다고 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왔단 뜻이었다.
‘나중에 세모가 아빠가 되면 대체 얼마나 심각한 과보호 아빠가 될까.......’
자기는 고사하고 리모마저 손자 안아보기 힘들게 되는 건 아닐까 도운은 두려움에 떨었다.
세모는 쪼꼬봇 위에 폼 잡고 서 있는 리모를 직접 보고서야 안도했다.
“미안해요. 쪽지라도 써두고 나올 걸 그랬죠?”
리모랑 화해해 봐야 세모한테 잘못보이면 국물도 없는 걸 깨달았는지 노교수가 세모에게 상냥하게 사과했다.
“리모가 빨리 외출을 해보고 싶어해서요. 나도 빨리 시운전을 해보고 싶었고.”
“교수님 잘못이 아니에요. 어디 위험한 데 간 것도 아니고.”
세모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아, 근데 송신기나 뭐 그런 것도 만드신다고.”
“그것도 물론 만들었지요.”
노교수가 말했다.
“이건 또봇 시스템 전체에 새 경보 업그레이드를 설치해야 하는 거라서, 그래서 이쪽으로 먼저 온 거랍니다. 리모도 같이요.”
“네.”
그렇게 들으면 납득은 되었다. 세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외출할 땐 반드시 쪼꼬봇을 탄다면 이제 적어도 누가 실수로 밟거나 할 걱정은 크게 줄어드네요.”
도운이 말했다.
“그렇죠? 경보를 보내는 것도 좋지만 우선 눈에 띄어야 더 안전할 것 같아서, 리모 크기에 맞는 탈것을 따로 만들까 하다가...”
제로가 흠칫했다.
“리모가 이 상태로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인공지능을 새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말이지요. 그래서 마침 크기도 적당하겠다 쪼꼬봇을 이용하기로 한 거에요.”
“질문.”
리모 박사님은 이 상태로 오래 계시지 않을 겁니까?“
“물론이지요, 내가 내 친구 김박사의 친구인 오교수의 후배가 되는....”
“해독제를 만드셨어요?”
세모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노교수가 도로 얌전해졌다.
“그래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선 거의 감을 잡은 것 같아요. 원인을 알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지요. 반은 한 거라고요.”
세모는 ‘겨우 반’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거 다행이군요.”
도운은 드디어 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시작할까요?”
업그레이드는 무사히 끝났다. 아이들의 또키에도 또봇들의 내비게이션에도 리모의 위치가 떴다.
“이제 걱정 좀 그만 해라.”
두리가 세모를 찔렀다.
“학교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가더니, 집에 와서는 아빠부터 확인이냐.”
“집에 왔으면 먼저 아빠한테 다녀왔습니다 하는 게 맞는 거지 뭐 어때서.”
세모가 변명했다.
“그건 세모 말이 맞아.”
도운이 말했다.
“너희도.”
“다녀왔습니다!”
두리가 소리쳤다. 세모 손 위에서 리모가 킥킥 웃었다.
“...말을 좀 안 들어서 그렇지 하나 두리도 효자거든?”
도운이 약하게 항의했다.
“찍.”
리모가 벌떡 일어나서 한껏 뻐겼다.
“통역. ‘우리 세모는 말까지 잘 듣는 효자라고.’라고 하십니다.”
말 안 듣는 효자(?)의 또 다른 예가 통역했다.
“그래, 기왕 탈것이 생겼는데 좀 돌아다니다 오면 어때?”
이들하고 계속 함께 있다간 대체 일을 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도운이 제안했다.
“밟히거나 실종될 걱정 없이 공원 산책을 간다거나.”
“찍.”
리모가 고개를 들었다.
“통역. ‘찬성. 오랜만에 햇볕도 좀 쐬고 싶어.’라고 하십니다.”
“가자.”
세모가 냉큼 말했다.
“너 엄청 예상 가능하다.”
딩요가 감탄했다.
“그게 나빠?”
“흠, 너무 예상대로인 건 매력 없다고도 하지만.”
“찍!”
“세모는 잘생겼으니까 상관 없나.”
“통역. ‘세모는 충분히 매력이 넘쳐!’라고 하십니다.”
“네. 그렇다고요.”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 저 닭살 부자.”
두리가 팔을 긁는 시늉을 했다.
“가기 싫으면 그럼 우린 집에서 숙제나.”
“무슨 소리야, 갈 거라고!”
하나의 말에 두리가 소리쳤다.
“숙제는 너나 해.”
“두리야.”
도운이 말했다. 두리가 목을 움츠렸다.
“갔다 와서 할게요.”
그가 변명했다.
“숙제 하다보면 해 질 거고 그러면 공원에 못 갈 거고....”
“그래, 먼저 다녀와라.”
도운도 한숨을 쉬었다.
“잘 놀고 오고,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공원에 위험할 게 어딧어요.”
“찍찍.”
“통역. ‘있어. 잔디밭 울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다른 애들 놀고 있는 옆에서 공 같은 거에 맞을 지도 모르고....”
“아, 제로 아니었으면 리모 아저씨 잔소리라도 안 듣는 건데.”
“찍!”
“왈!”
쪼꼬봇까지 뭐라 하자 두리가 찔끔했다.
“갔다 오자.”
계속 이러고 있다간 공원에도 못가고 숙제도 못한 채 해가 질 것 같다는 위기감에 하나가 두리를 잡아끌었다.
“안 위험하다고 주장할 거면 가서 안 다치며 되지 뭐.”
공원에 도착하자 제로는 다른 또봇들과 함께 뒤에 남겨졌다. 공원 안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슬퍼하는 제로를 리모가 달라붙어 달래주고 나서 아이들과 리모와 쪼꼬봇은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날은 맑고 햇살은 너무 뜨겁지 않아 밖에서 놀기 좋은 날씨였다. 리모가 안장 끈을 풀고 몸을 쭉 폈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발라당 넘어질 뻔 하자 세모가 재빨리 받쳐 잡았다.
“찍.”
리모가 세모 손에 누워 볼을 비볐다.
“당연한 거에요.”
세모가 매우 따스한 눈으로 리모를 바라보았다.
“안전벨트가 갑갑한 거면 쪼꼬봇은 따로 놀라고 하고 아빠는....”
세모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차양이 설치된 벤치가 있었다.
“저런 근처라면 자전거 타거나 달리기 하는 사람도 없을 거고 괜찮지 않을까.”
“뭐, 정 불안하면 벤치 위에 올려도 되고.”
하나도 찬성했다.
“축구 안 해?”
두리가 잽싸게 챙겨온 공을 들어보였다.
“넌 노는 게 축구밖에 없냐.”
하나가 타박했다.
“그럼 뭐 하고 노는데? 수학 문제 풀면서?”
“수학은 재미있어.”
“너한테나 재미있지!”
쌍둥이가 아주 오래된 다툼을 또 시작하는 동안 세모 딩요 오공은 리모를 벤치로 옮겨놓았다.
약간 떨어진 곳에 운동 기구들이 설치되어있는 걸 보고 딩요가 다가갔다.
“이거, 그네 같은 건가? 어떻게 하는 거지?”
딩요가 발판 표시를 밟았다가 그게 휙 밀려나자 꺅하고 손잡이에 매달렸다. 세모가 딩요를 잡고 내려오게 도와주었다.
“어른용이라서 애들 크기엔 위험할 것 같아.”
오공이 설명서를 읽었다.
“운동할 거면 차라리.....”
그들 옆으로 자전거 한 대가 쌩하니 지나갔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세모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자전거가 벤치 옆에서 멎었다.
“어라? 이런데 웬 햄스터가 있네?”
세모 또래거나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리모를 덥석 집어 들었다.
“찍!”
“이름도 목줄도 없고, 누가 버렸....”
“안 버렸어!!”
세모가 목청껏 소리 질렀다. 추정 햄스터 도둑뿐 아니라 이제는 타이어 수사대를 다 읽은 뒤 제대로 책장에 꽂지 않고 함부로 소파에 엎어놨다 깔고 앉아 책이 구겨지게 만든 범인이 누구냐는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 싸우고 있던 하나 두리까지 모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햄스터 도둑이 안 움직이고 있는 틈을 타 세모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그에게서 리모를 낚아채었다. 물론 리모가 다치거나 아프지 않도록 살살.
“우리 아.... 햄스터한테서 손 떼.”
세모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잠깐 당황하던 상대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사람을 도둑으로 모네. 난 그저 주인 없는 햄스터인가 했을 뿐이라고!”
“아닌 거 알았으면 이제 됐지?”
세모는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상대도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건데?”
“뭐?”
“아무런 표시도 없는 그냥 햄스터인데, 네가 주인인 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응?”
세모가 머뭇거렸다. 상대 소년이 기세가 등등해졌다.
“뭐야, 소유권을 주장할 거면 적어도 이름 정도는 써놔야지. 그냥 놔두면.”
“얘네 햄스터 맞아.”
오공이 말했다.
“그래. 우리 반 애들도 다 안다고.”
딩요가 거들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너희는 저 애 친구니까 감싸는 건줄 어떻게 알고?”
애들이 말문이 막혔다.
“찍.”
리모가 말했다. 애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리모가 영차영차 세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팔을 타고 달려 세모의 어깨로 올라갔다. 세모는 기겁해서 리모가 팔을 오르다 떨어지거나 하지 않도록 팔꿈치를 들어 리모의 움직임을 도왔다.
세모의 어깨에 도달한 리모가 세모의 볼에 입을 맞추고 온 몸을 던져 부비작거렸다. 그러더니 자전거 남자애를 보고 혀를 쏙 내밀었다.
세모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빠가 이렇게 애정을 과시해주는 게 기쁘긴 하지만 완전 남 앞이라 그런지 좀 부끄럽기도 했다.
“어....”
그 애가 말을 못했다. 세모가 리모를 다시 손으로 잡았다. 자칫 떨어지거나 하지 않도록.
“알았음 됐지? 이제......”
“너 그 햄스터 나한테 팔아라!”
그 애가 세모의 팔을 덥석 잡았다.
“뭐....어?”
“내가 비싸게 쳐줄 테니까. 어, 삼만 원 어때? 삼만 원. 내가 크게 마음 썼다, 이거 엄청 쳐준 거야, 요새 햄스터 시세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세모가 그 애를 뿌리쳤다.
“몇 억을 준다 해도 안 팔거라구!”
“어, 억.... 그럼 날 매니저로 삼으면 어때, 그 햄스터 분명 대박칠 거야. 너도 그만하면 화면빨 받을 거고, TV에 나가 유명인이 되면 출연료며 후원도 잔뜩 받을 거고 그 때 가서 수익은.”
“그딴 거 되고 싶지 않아!”
이제 세모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TV 안 나가. 돈도 필요 없어. 우릴 내버려 두라고!”
세모가 뒷걸음질 쳤다. 그 앞을 오공이 막아섰다. 딩요랑 하나두리도 줄지어 막았다.
“무슨 헛소리야, 돈이 필요 없다니! 니가 갑부가 되면 분명 니네 부모님도.”
“아 안한다고!!”
Chapter Text
“형!”
자전거 소리가 달려왔다. 이들 옆으로 세모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와 섰다.
“뭐하고 있는 거야, 래오 형이 빨리 오랬는데.”
새로 도착한 애가 어쩐지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 있는 세모네 일행을 보았다.
“지오 형, 설마.”
“아니거든! 삥 뜯는 거 아냐, 난 그저 저 햄스터를 스타로 만들어 주려는 거라고!”
“아 되기 싫대도 그러네!”
“햄스터?”
어린 쪽이 세모의 손에 들린 햄스터를 보았다.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와, 귀여워라.”
그 애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리모는 마주 흔들 뻔 했다.
“어때, 피오 너 보기에도 엄청 귀엽지. 그치? 게다가 저거 재롱이 장난 아니라고, 분명 대박이....”
“찍!”
리모가 세모의 품에 파고들며 달달 떨었다. 피오가 형을 째려보았다.
“형이 말하니까 햄스터가 무서워하잖아, 얼마나 괴롭혔음 그래? 저런 작은 동물 상대로...”
“괴롭히긴 내가 뭘.”
“얼른 오기나 해. 더 늦으면 래오 형 진짜 화낼 거야.”
피오가 세모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 우린 갈테니까 신경쓰지 마. 놀라게 해서 미안.”
피오는 리모에게도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형을 끌고 사라졌다. 자전거 두 대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이들은 잠시 꼼짝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찍?”
“어.... 갔어요. 확실히.”
세모가 말했다.
“찍.”
리모가 세모의 손을 앞발로 톡톡 두드렸다.
“위로하는 건가요.”
“찍.”
“왜 아빠가 절 걱정하시는 거죠, 무섭긴 아빠 쪽이 훨씬 더 무서웠을 텐데!”
“찍.”
리모가 웃어보였다. 그 귀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모가 그를 꽉 끌어안고 부비작거렸다.
“세모야.”
하나가 불렀다. 세모는 황급히 리모를 얼굴에서 떼어냈다.
“아니, 난 그저....”
하나가 손을 내밀었다.
“리모 아저씨는 우리도 걱정하실 거야.”
세모는 잠시 하나의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찍.”
리모가 다시 세모를 다독였다. 세모는 할 수 없이 하나에게 리모를 건네주었다.
하나를 다독다독 부비부비 하고 난 뒤에는 당연히 다른 애들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명 모두에게 부비부비 토닥토닥을 해준 다음에야 리모는 풀려나서 다시 벤치에 놓일 수 있었다.
“하지만 리모 아저씨 저대로 혼자 두는 건 안 되겠어.”
하나가 말했다.
“우리가 뭘 하고 놀든 아저씨는 혼자 계셔야 할 텐데.”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금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몰라.”
“그럼 내가 아빠를 주머니에 넣고.”
“공 맞을까봐 축구 할 수 있겠냐? 뛰기만 해도 멀미 하시는 거 아니야?”
두리가 지적했다. 세모는 말문이 막혔다. 꼭 축구가 아니라도 애들 놀이는 거의 대부분 뛰고 달리는 거였다. 아빠랑 같이 놀 수가 없었다.
“아까 걔가 그랬잖아, 이름 써놨냐고.”
두리가 말했다.
“써놓으면 어떨까?”
“찍?”
“아, 방법이 있어!”
딩요가 손뼉을 쳤다. 그리곤 가방에서 햄스터 산책줄을 꺼냈다.
“찍!”
“그래도 이걸 하고 있으면 누가 아까처럼 시비 걸지는 않을 거에요.”
딩요가 설명했다.
“그래. 그렇게 하고 누가 가까이 오면 쪼꼬봇더러 짖으라고 하자.”
하나가 말했다.
“그럼 누가 리모 아저씨한테 함부로 손대지도 못할 거고 우리도 금방 알 수 있을 거고.”
“그래. 그러자.”
세모도 찬성했다. 그리고 리모를 잡아 산책줄을 끼웠다.
“찍!”
리모가 버둥거렸다. 세모가 그의 팔다리를 꽉 붙들었다.
“가만히 계세요. 저도 아빠 묶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가 납치되어 위험에 처하는 것 보단 나으니까 이러는 거에요.”
말하는 게 열 살이라 참 다행인 소리를 하며 세모가 리모를 산책줄에 끼워 묶었다. 그리고 줄에 달린 이름표에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쓰고 손잡이 부분을 벤치 끝에 끼웠다.
“이 위 정도는 충분히 돌아다니실 수 있을 거에요.”
그러는 동안 하나는 쪼꼬봇을 잡고 낯선 사람이 벤치로 접근하면 짖으라고 가르쳤다.
“멀리 안 가고 요 앞에서만 놀 거에요.”
세모가 말했다. 리모는 휙 그를 외면했다. 세모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주머니에 아몬드 있는 게 생각이 미쳤으나 아빠가 그것마저 거부한다면 정말로 더는 방법이 없어 망설여졌다.
그러는 동안 리모는 보란듯이 벤치를 종종 걸어 세모와 먼 저쪽 끝으로 갔다. 그리고 엉덩이를 이쪽으로 돌리고 앉았다.
‘뒷모습도 귀여운데.....’
말해봐야 아빠 화만 더 돋굴테니 말할 수 없지만 이쪽에 등 돌리고 식빵 자세 하고 있는 리모는 매우 귀여웠다. 아빠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 세모를 두리가 잡아끌었다.
“아저씨 화 풀릴 때 까지 우린 그냥 놀고 있자.”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면 굳이 묶어두는 보람이 없잖아?”
리모의 귀가 쫑긋했다.
“그럼 그냥 풀어드리고....”
“야, 권세모. 너도 다 컸어. 이제 아빠 품을 떠나서 좀 살아봐라.”
두리가 세모를 강제로 끌고 갔다. 하나는 말리지 않았다. 딩요랑 오공은 동조하는 것 같았다.
“별로 아빠 품에만 매달려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래, 그러니까 리모 아저씨하고 좀 떨어져 있자.”
애들이 세모를 질질 끌어갔다. 리모는 뭐라 할까 망설였지만 말해봐야 확실하게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화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계속 등 돌리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리모는 몸을 쭉 펴고 엎드렸다. 묶여있긴 해도 햇볕은 따뜻했다. 햇살을 즐기다 리모는 곧 잠이 들었다.
“왈!”
리모가 눈을 뜨고 몸을 발딱 일으켰다.
“잉전미!”
낮선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또 납치 위기인가 싶어 리모는 바짝 긴장해 주변을 둘레둘레 보았다.
“인절미 아니야. 햄스터야.”
리모가 고개를 들고 말한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
아이가 리모 쪽으로 한 발짝 더 내밀었다.
“왈!”
쪼꼬봇이 짖었다. 그가 리모를 지키듯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발소리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세모가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우선 리모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고 당황했다.
“아...... 아니구나.”
세모가 조금 안도했다.
“뭐가?”
애가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세모가 손에 쥔 리모만 쓰다듬었다.
“귀여워.”
아이가 말했다. 세모가 미소 지었다.
“응. 귀엽지.”
“나도 쓰다듬고 싶어.”
세모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그건 안돼.”
“왜?”
“그, 햄스터는 작.... 예민한 동물이라 모르는 사람이 손대는 거 싫어해. 물릴지도 몰라.”
“물려도 돼!”
“안 돼.”
“돼!”
리모는 세모가 어쩌나 보겠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세모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아이 엄마를 보았다.
“햄스터가 재연이 무서워서 그래. 괴롭히면 안 되지?”
“안 괴롭힐 건데. 쓰다듬을 건데.”
“막 이만한 코끼리가 너 쓰다듬으려고 하면 무섭겠어, 안 무섭겠어?”
“안 무서워!”
“실제로 보면 무서울 텐데.....”
세모가 중얼거렸다.
“찍.”
리모가 말했다.
“왜.....”
세모는 ‘왜요, 아빠?’라고 묻기 전에 간신히 혀를 붙들었다.
“찍.”
리모가 아이 쪽을 보고 세모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리모가 세모 손바닥을 두드렸다. 세모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세모가 아이에게 리모를 내밀었다.
“햄스터가 너 쓰다듬어도 된대.”
“와!”
“살살해야 돼, 햄스터는 연약하니까.”
리모가 세모를 째려보았다. 세모는 못본 체 했다.
“응!”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가 리모를 덮듯이 손으로 쓰다듬었다.
“폭신해!”
“부드러운 게 아니고?”
“어, 부드럽기도 해.”
세모가 웃었다.
“역시 세모는 과보호 아빠가 될 거야.”
세모 때문에 놀다 말고 달려온 두리가 투덜거렸다.
“왜, 애들에게 친절한 게 뭐 어때서.”
오공이 리모를 쓰다듬고 있는 아이를 쓰다듬었다.
삑.
또키가 울렸다. 하나가 먼저 받았다.
“예,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희들 잘 놀고 있니?
“네. 여기도 아무 문제없어요.”
아까 리모를 TV출연 시키자던 끈질기게 돈 밝히던 애가 떠올랐지만 그건 별 일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포기하고 가버리기도 했고.
‘설마 아직 포기 못 하고 집까지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애가 리포터며 카메라맨을 이끌고 기지로 몰려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하나는 집에 가면 아빠에게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터널에 무슨 장치라도 하자고 건의해야겠다 결심했다.
그런 하나의 속도 모르고 도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즐겁게 놀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라.
“네. 그럴게요.”
하나가 전화를 끊었다.
“자, 형들도 집에 간대. 햄스터도 집에 가야 하니까 이만 놔주렴.”
엄마가 아이를 설득했다.
“응. 햄스터 잘 가.”
아이가 리모에게 손을 흔들었다. 리모도 앞발을 마주 흔들었다. 아이 엄마는 신기하단 눈으로 리모를 보았지만 아까 그 애처럼 난리 치거나 하지 않고 아이 따라 손만 흔들어주고 갔다.
리모가 한숨을 내쉬고 세모 손바닥에 픽 쓰러졌다.
“지쳤어요?”
“찍.”
“그러니까 꼭 안 그래도 된다니까...”
리모가 흥하고 고개를 둘렸다. 세모는 난처한 표정을 했다.
“여전히 산책줄 때문에 그래요?”
리모는 대답을 안 했다. 세모는 이걸 어쩌면 좋나 고민했다.
“이만 집에 갈까?”
오공이 말했다.
“숙제도 해야 하고 곧 저녁도 먹어야 할 거고.”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하나도 찬성했다.
“집에 가면 줄 풀어도 되니까 리모 아저씨도 화 푸실 거야.”
“어......”
세모가 한층 더 난처한 목소리를 내었다.
“왜, 그래도 계속 삐져 계실까봐 그래?”
두리가 세모를 툭툭 쳤다. 세모는 움찔 몸을 피했다.
“왜 그래?”
“그게.....”
“아.”
외치고 딩요가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왜냐고 물으려던 두리 입도 막았다.
세모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리모는 눈을 감고 색색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응, 햄스터는 낮에 잔댔지.”
하나가 속삭였다.
“귀여워.”
오공이 중얼거렸다. 엎어져 자고 있을 뿐인데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그렇지만 저 보들보들하고 폭신폭신할 것 같은 털이라든지 꼭 감은 눈이라든지 조금씩 벌름거리는 분홍색 코라든지 분홍 앞발이라든지.....
딩요가 가방에서 사과 말린 것을 꺼내 리모 코앞에 들이대었다. 리모의 코가 움찔거리더니 그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들어 사과를 물었다. 그리고 여전히 잠결인 게 분명한 모습으로 사과를 사각사각 먹었다.
“그거 동영상 용량 안 부족해?”
오공이 딩요의 폰을 넘겨보았다.
“부족해. 매일 컴퓨터로 옮기고 비우는데도....”
“내가 클라우드 스토리지 알려줄게. 찍는 즉시 용량 비울 수 있을 거야. 외장하드도 필요하겠다. 백업은 많이 해놔야 하니까.”
“나도 공유해줘.”
하나가 말했다.
“그래. 세모 넌?”
“나중에.”
세모는 꼼짝 않고 리모만 바라보았다.
“응, 실물 보느라 바빠서 동영상 볼 시간 없다 이거지?”
그러는 동안 리모는 사과를 다 먹고 도로 잠들었다.
“먹고 자기만 하면 되다니 좋겠다아.....”
두리가 말했다가 하나에게 옆구리를 찍혔다.
“과자도 못 먹고 축구도 못 하는데?”
“윽.... 그래, 인간인 것도 나쁘진 않.....”
“조용히 해, 아빠 깨실라.”
애들은 모두 조용히 했다.
Chapter Text
결국 세모가 팔이 아파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나서야 아이들은 자는 리모를 들여다보는 건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운은 애들에게 밖에서 놀고 들어왔으면 우선 씻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세모는 샤워를 하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올려놓자 리모가 깨었다. 충분히 잤는지 몸을 쭉 펴고 하품을 했다.
‘어째서 아빠는 하품을 해도 귀여운 거지?’
기지개를 다 켜고 리모가 세모를 올려다보았다. 세모는 어쩐지 부끄러운 짓이라도 한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집에 왔으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셔도 돼요. 전 샤워할게요.”
“찍.”
“죄송해요, 싫다는 데 막 묶고 그래서.”
“찍.”
리모가 다가와 세모의 손을 잡았다. 세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찍?”
“왜 그러세요?”
“찍.”
리모가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고 싶다는 뜻일까 싶지만 지금까지 나갔다 들어온 건데. 세모는 리모가 뭘 말하고 싶은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거에요?”
“찍.”
“잠시만요.”
세모는 리모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제로는 기지로 내려가 주차장에 있지 않고 집 바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인사. 안녕하십니까, 리모 박사님. 그리고 세모.”
“응, 안녕.”
“찍.”
“통역을 좀 해줬으면 해서 그래.”
세모가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아빠께서 뭔가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데 난 구체적인 것 까지는 알아듣기 어려워서.”
“찍.”
리모가 말했다.
“찍. 찍.”
“이해. 그런 것입니까.”
제로가 차 앞부분을 약간 끄덕였다.
“선망. 세모가 부럽습니다. 저도 리모 박사님을 문제없이 들 수 있을 만한 정교한 손이 있었더라면.....”
“찍!”
“무슨 얘긴데?”
얘기가 딴데로 새는 것 같아 세모가 끼어들었다.
“해석. 리모 박사님은 세모와 목욕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어, 그래?”
“긍정. 네. 물론 세모가 리모 박사님의 아들이니 그분과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도 햄스터가 되어 작고 귀여워진.”
“찍!”
“박사님을 심지어 손에 쥐고 조물조물 목욕을 시킬 수 있다니 세모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그래.”
부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세모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이런 귀여운 아빠를 독차지할 수 있는 건 행운이겠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햄스터가 된 게 운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찍.”
리모가 한 마디 했다. 제로가 추욱 쳐졌다.
“사죄. 기분 나쁘시게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 그래?”
세모가 물었다.
“찍.”
“통역.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서 목욕이나 계속 하자.’라고 하십니다.”
세모는 아빠와 제로를 번갈아 보았지만 별로 그 이상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자 포기했다.
“그래. 제로 넌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긍정. 네. 리모 박사님이 절 필요로 하실 지도 모릅니다.”
필요해서 지금 나와 본 것이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응. 잘 있어, 우린 들어갈게.”
“인사. 안녕히 가십시오.”
집 안에 다시 들어온 세모는 욕실로 갔다. ‘같이’ 목욕하고 싶다고 해도 아빠는 지금 손바닥만 한 햄스터였다. 인간처럼 샤워를 할 수는 없었다.
세모는 잠시 궁리하다 세면대에 더운 물을 채웠다. 가득은 말고, 햄스터 등 높이 정도로만. 이러면 잠기고 싶으면 푹 잠길 수 있고 숨 쉬는 데도 아무 지장 없을 터였다.
“어때요?”
세모가 물었다.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모가 리모를 세면대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리모는 세면대의 경사진 면을 타고 쭈욱 미끄러져 물속에 첨벙 뛰어들었다.
“찍!!!”
물에 닿자마자 리모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마구 허우적거리며 물속을 뒹굴었다.
“아, 아빠?”
예상치 못한 사태에 세모는 당황했다. 그가 서둘러 리모를 양손으로 떠냈다. 세모의 손가락을 꽉 안고 리모가 바들바들 떨었다. 세모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리모를 손에 쥐고 뭘 어째야 좋을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 괜찮으세요? 코나 귀에 물 들어갔어요?”
리모는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떨기만 했다. 제로에게 가볼까 하다 세모는 지금 아빠는 말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다 이렇게 푹 젖은 상태로 밖에 나가면 곧 추워질 거란 생각에 우선 수건을 꺼내 리모를 감쌌다.
놀랍게도 물기를 어느 정도 닦고 나자 리모는 정신을 차리고 패닉에서 벗어났다. 그가 스스로 수건에 뒹굴거나 머리를 비벼서 더 열심히 물기를 닦아냈다.
“아빠, 혹시.... 물이 싫어요?”
세모의 말에 리모가 수건에서 뒹굴다 말고 딱 굳었다.
“......찍.”
리모가 풀이 죽었다.
“어,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햄스터는 건조한데 살던 동물이라 그러고, 아빠도 들어가기 전엔 몰랐을 거고....”
세모가 리모를 수건 안 젖은 쪽으로 옮겨서 물기를 더 닦았다.
“드라이기 쓸까요?”
가늘고 긴 털이라 수건만으로는 말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위잉 소리는 사람이 듣기에도 시끄러웠다. 햄스터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리모도 망설였다.
“약풍으로 멀리서 해 볼까요?”
“찍.”
세모가 리모 멀리서 드라이기를 켰다. 리모가 움찍 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세모가 리모에게 바람을 향했다. 리모는 눈을 감고 더운 바람을 맞았다.
가는 털이 사라락 바람에 휘날렸다. 리모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골고루 말리려고 그러는 것뿐이라는 거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세모는 이제 햄스터 아빠가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멋있기도 해 보여서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광경을 또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를 또 물에 빠뜨릴 일은 없으니 다시 말릴 일 역시 없겠지.
딩요가 이래서 계속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는 거라고 세모는 납득했다. 딩요를 여기 데려올 걸 그랬나 후회도 되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지금 목욕중인 거잖아 나도 아빠도!’
세모는 아직 옷을 벗지 않았고 리모는 털가죽이 있지만 그래도 여기에 여자애를 들일 수는 없었다. 남자애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모는 열심히 아빠를 보았다. 이 모습을 기억해두려고 노력했다.
리모가 발라당 누워 사지를 쭉 폈다.
“아빠?”
“찍.”
리모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편안해 보여 세모는 계속 리모에게 온풍을 쐬어주었다.
보송보송 따뜻해진 리모는 다시 잠이 들었다. 졸고 있는 아빠를 책상 위 집 안에 넣어놓은 뒤 세모는 서둘러 샤워를 하고 도운네 집으로 갔다.
도운네 식구들은 이미 저녁 먹을 준비를 끝내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세모는 도운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 우리도 막 앉았어.”
도운이 웃으며 맞아주었다. 세모는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리모한테 무슨 문제는 더 없고?”
“그게....”
세모는 망설였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빠께서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 세면대에 물을 받아드렸거든요. 그런데 햄스터는 물을 싫어하는 모양이라 막상 젖으니까 몹시 놀라셔서.”
“어, 그거 완전 물에 빠진 쥐?”
두리가 말했다가 세모에게 식탁 밑으로 걷어차였다.
“으악!”
“그런 문제가 있구나.”
도운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했다.
“리모는 사람이지만 몸은 햄스터이고 햄스터의 본능이 있을 테니까, 목욕 뿐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을 거야.”
세모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 리모 아저씨는 목욕 전혀 못하는 건가? 냄새 날 텐데.”
이번엔 두리도 미리 다리를 옆으로 치워두었다.
“우리 아빤 냄새 같은 거 안 나!”
“하지만 햄스터는.”
“모래 목욕을 하면 된대.”
하나가 열심히 폰으로 검색했다.
“모래로?”
두리가 놀랐다.
“그거, 만화에 나오는 금화 목욕 같은 건가? 욕조에 모래를 채우고 다이빙.... 모래 찜질?”
“실제로 금은 매우 비중이 높은 금속이기 때문에 금화에 사람 몸이 가라앉을 리도 없고 다이빙을 하거나 하면 몹시 위험해.”
애들이 따라할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도운은 주의를 주었다.
“근데 모래에 파묻히면 도리어 더러워지는 거 아니야?”
세모가 물었다.
“끼끗한 목욕용 모래가 있대. 모래에 털을 비벼서 때나 각질을 털어낸다는데.”
“마른 때타올로 문지르는 것 같겠다, 그거.”
두리는 싫은 표정을 지었다.
“시도는 해봐도 좋겠지. 햄스터 목욕용 모래라고 검색하면 되나?”
도운이 주문하려고 타블렛을 켰다. 아이들한테는 밥 먹는 동안엔 스마트폰 만지지 말라고 잔소리 하면서 자기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리모 관련한 일이고 지금은 일종의 비상사태니까.
상품을 검색하던 도운의 손이 멎었다.
“어.....”
“왜 그러세요?”
세모가 벌떡 일어나 도운의 뒤로 가 화면을 보았다.
아주 귀여운 햄스터가,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모래에 등을 비비고 있는 사진이었다. 도운도 세모도 즉시 저러고 모래 목욕을 하는 리모를 상상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면이 떠 있었다.
“밥 계속 먹자.”
도운이 헛기침했다.
“모래가 오려면 이틀은 걸릴 거야.”
“이틀이나.....”
세모가 실망했다. 도운도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실망할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 이제 밥 먹는 데 집중하렴.”
“네.”
세모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저녁 먹은 뒤 아이들은 숙제 하고 자라고 올려 보내 놓고 도운은 기지로 갔다. 새 또봇을 만들거나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을 때라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통상 정비 등의 잡무는 제로가 대신해주게 되어 많이 편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 손이 꼭 필요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일을 같이 해 줄 친구는 햄스터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할 일은 늘고 일손은 줄었으니.
‘내가 햄스터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리모가 이렇게 살뜰히 돌봐주었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리모가 햄스터용 특제 요리를 만들어서 먹인다고 쫓아오고 자신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상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자기가 햄스터가 되었더라면 다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몸 상태나 부상 같은 건 얼마나 바뀌고 반영될까. 리모는 어떨까.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있지는 않을까. 도리어 좋아진 곳은 없을까.
조금쯤 장난으로 햄스터일 때 많이 운동해두라고 했지만, 실제론 이 변신이 리모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찍.”
도운은 깜짝 놀라 옆을 내려다보았다. 쪼꼬봇에 탄 리모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밤엔 자지 않고.”
“찍.”
제로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통역. ‘햄스터는 야행성이야. 잠이 안 와.’라고 하십니다.”
“...고맙다.”
도운이 제로의 범퍼를 토닥여주었다.
“그래서 기지에서 또봇들하고 놀려고?”
리모가 고개를 휙 돌리고 토라졌다.
“찍.”
“감격. 리모 박사님께서 절 그렇게 의지해주신다면 기꺼이....”
“통역 플리즈.”
도운이 재촉했다.
“사과.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 그만. 통역. ‘지금도 생각이라면 할 수 있어. 움직임은 제로가 도와줄 수 있고. 일할 수 있다고.’ 라고 하십니다.”
“...그래. 해봐.”
둘이 콤비가 된다고 해도 하나는 너무 작고 하나는 너무 크니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제로 덕이 이제 대화도 원활하고, 안될 건 없겠다 싶어서 도운도 찬성했다.
“지치면 언제라도 그만해. 무리하지 말고. 햄스터는 장시간 두뇌 노동에 적합한 몸은 아닐 거야.”
“찍.”
“통역. ‘알았어, 잔소리쟁이.’라고 하십니다.”
도운은 다시 자기 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햄스터의 두뇌 용적으로 어떻게 인간만큼 사고할 수 있는 걸까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 쓰이기로 따지자면 물질-에너지 총량 보존 법칙부터 문제였다. 신경 쓰면 지는 거라고, 머리 구석에서 노교수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꺼지시죠.’
가상 노교수를 내쫓고 도운은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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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은 근미래니까 국내 쇼핑몰에서도 원클릭 구매가 가능해졌으려니 합시다. 아니면 도운도 세모도 좀 오래 넋을 잃고 있었거나......
Chapter Text
‘도운 박사님.’
도운은 머리 위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화면에서 눈을 떼었다.
“무... 제로?”
‘쉿.’
제로가 여전히 속삭였다.
‘요청. 리모 박사님을 받아 주십시오.’
“응?”
도운은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다. 제로는 아주 조심스럽게 리모를 도운의 손으로 미끄러뜨렸다.
리모는 자고 있었다.
“역시 힘든가보구나.”
도운이 웃으며 리모를 쓰다듬었다.
“요청. 깨우지 말아주십시오.”
제로가 말했다.
“깨우려는 거 아니....”
“요청. 도운 박사님은 부드럽고 따듯한 손이 있으시니 건드리는 정도로 깨우지는 않으실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주의해주십시오.”
제로가 사람 손을 엄청나게 부러워하고 있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다 해도.
“깨우면 어때서?”
“반문. 예?”
“리모를 깨우면 뭐가 어때서 그렇게 전전긍긍 하는 거야? 별로 리모는 인간이었을 때도 햄스터가 된 뒤에도 잠투정이 있거나 쉽게 화내는 사람은.”
말하고 도운은 생각했다. 제로와 지내던 그 6년 간, 리모는 아마도 쉽게 화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혹시 리모가 이전에 네가 깨우거나 하면 마구 화내고 그랬니?”
“부정. 반대입니다.”
“응?”
“설명. 그 시절 리모 박사님은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제게 화를 내시긴 했지만 박사님 당신께도 늘 화가 나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로.”
도운이 리모를 들지 않은 손으로 제로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
“리모는 이제 행복하고 편안해. 인간일 때도 햄스터일 때도 잘 먹고 잘 자고 있고.”
“긍정. 알고 있습니다.”
“고맙다.”
도운이 제로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갰다.
“리모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줘서. 네겐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겠지만,”
“부정. 전 리모 박사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아냐.”
도운이 제로의 말을 끊었다.
“네가 있어서 그나마 리모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거야. 내 말 믿어. 나도 그 사고를 겪었어. 하나두리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목숨은 붙어있었어도, 혼자선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어. 리모가 네게 향한 감정이 긍정적이지 않았다곤 해도, 그것마저 없었으면 리모는 혼자 말라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도운이 제로를 올려다보았다.
“넌 자책할 것도 부족한 것도 아무 것도 없어.”
“......감사.”
제로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해지고 잠시 후, 리모가 옴칠 몸을 뒤척였다. 그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아, 리모.”
도운이 다정하게 불렀다.
“깼어?”
“찍.”
“통역. ‘배고파..’라고 하십니다.”
“응, 그래. 잠깐만.”
도운이 주머니에서 간식 봉지를 꺼냈다.
“사과 당근 아몬드.....”
“찍.”
“통역. ‘아몬드.’라고 하십니다.”
“밤중인데?”
“찍.”
“통역. ‘햄스터는 한창 활동할 때야.’라고 하십니다.”
“그 한참 활동할 때 신나게 잔건.”
“찍!”
“통역. ‘운동할 거니까 줘!’ 라고 하십니다.”
“그래그래.”
도운이 아몬드를 내밀었다. 리모가 행복한 표정으로 아몬드를 받아들고 갉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말린 당근도 주자 별 불평 없이 그것도 볼에 넣었다.
“견과가 그렇게 좋아?”
“찍.”
“통역. ‘응.’이라고 하십니다.”
알아들었지만 도운은 아무 말 않기로 했다.
“해바라기 씨도 사줄까? 햄스터가 좋아한다던데.”
리모가 고민했다.
“찍.”
“통역. ‘그래. 먹어볼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럼 리모, 난 이제 잘까 하는데 넌 어쩔래?”
“찍.”
“통역. ‘그럼 나도 이만 잘게.’ 라고 하십니다.”
“역시 그게 좋겠지?”
햄스터는 야행성이 아니라 아침 저녁에 활동하고 낮과 밤엔 자는 거였다. 도운은 아까 한참 활동할 때 운운은 잊어주기로 했다.
그가 리모를 손에 쥔 채 제로를 보았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서 잘테니까, 너도 쉬도록 해.”
“인사. 안녕히 주무십시오, 도운 박사님, 리모박사님.”
“찍.”
제로가 주차 자리로 가는 걸 보고, 도운은 리모를 데리고 언덕 위로 올라왔다.
“리모.”
“찍?”
“들었지?”
“찍?”
리모가 ‘뭘?’ 이라고 반문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 했다. 그 모양이 매우 귀여웠지만 그래서 그냥 넘어갈 거면 말 꺼내지도 않았다.
“내거 널 들고 있었는데 모를까봐? 사람 손에 얼마나 감각기가 집적되어있는지 너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모르는 척은 집어치우고 리모가 침묵했다.
“내가 실수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도운이 말했다.
“내 말이 틀렸다면, 네가 가만있지 않았겠지. 그렇지?”
“.....찍.”
리모가 마지못해 인정했다.
“누군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제로한테. 넌 리모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지금은 물론이고 그 때에 조차도.”
“찍.”
“그리고.”
도운이 웃었다.
“그 일로 제로에게 고마워하는 건 역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리모가 도운의 손목을 잡고 몸을 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찍?”
“그래.”
도운이 대답했다.
“네가 살아있어서 기쁘고 고마워.”
“찍.”
리모가 도운에게 몸을 기댔다. 도운이 웃으며 그를 쓰다듬었다.
세모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조용히 리모를 그의 책상 위 집에 데려다 주고 도운은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자기도 잘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데. 리모가 자기에게 기대서 부비작거리던 게 생각났다. 털의 감촉이 정말로 부드럽고 쥐면 한 손에 폭 들어왔다.
목욕용 모래는 언제 도착하는 걸까.
이틀은 걸릴 거라고 몇 시간 전에 자기가 말했으면서 도운은 결국 타블렛을 켜고 쇼핑 정보에 들어갔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상품 준비 중인 걸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그냥 끄고 자면 되었을 텐데, 도운은 괜히 판매자의 다른 상품 항목을 눌러보았다.
각종 햄스터 용품이 페이지 가득 줄줄이 늘어섰다. [햄스터 장난감. 파격가]라는 항목을 보고 도운은 망설이다 한 번 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클릭했다. 햄스터는 뭘 가지고 노는지 알아두면 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햄스터 장난감은 장난감이라기보다는 놀이터 정글짐에 가까웠다. 타이어를 얼기설기 쌓아놓은 것 같은 구조물을 보고 도운이 미소 지었다. 리모가 저길 들락거리다가 위로 고개를 쏙 내밀면 무척 귀여워 보일 것이다.
클릭.
비슷한 물건이 더 있었다. 이층집 같이 생긴 속이 빈 나무 블록도 있고 무슨 수묵화에 나올 것 같은 울퉁불퉁한 산 모양도 있었다. 도자기로 되어 있어 햄스터가 갉지 못하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금문교를 본뜬 플라스틱 터널도 있었다.
클릭.
그 중에서도 도운의 눈길을 끈 건 조립할 수 있다는 둥근 터널이었다. 직선부와 경사부, 직각 연결 부품 등이 있어 이리저리 맞추면 꽤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릭.
장난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기농 천연 참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 -인공 참나무도 있나? 라고 도운은 중얼거렸다. - 이갈이용 목재도 있었다. 돌만 갉아대는 게 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니 이런 것도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클릭.
햄스터용 마사지 브러쉬라는 게 있었다. 모래 목욕이나 거품 목욕 후 털을 빗어주면 각질이나 죽은 털을 제거하여 건강하고 윤기 있는 털을 가꿔준다고 했다. 죽은 털의 악영향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빗이 있어서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클릭.
방금 본 거품목욕이란 말이 신경 쓰여 햄스터 목욕을 더 찾아보았다. 그래서 소동물용 거품 샴푸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을 쓰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게 목욕을 시킬 수 있다고 되어있었다. 인간용 뿌리는 샴푸나 비슷하다면 써볼만 하겠다고 도운은 판단했다.
클릭.
햄스터 영양제도 있었다. 오메가3니 아사이베리니 하는 건 그냥 넘겼지만 유산균은 조금 솔깃했다. 새끼 햄스터용 조제 분유까지 있는 걸 보고 좀 멍해졌다가 어른 쥐도 영양식으로 먹는다는 말에 도운은 리모에게 단백질 보급용으로 분유를 먹여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밀웜과 말린 메뚜기는 재빨리 넘겼지만 마른 새우는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도 먹는 거고. 그럼 반찬용 말린 새우를 사서 아이들에겐 볶아주고 리모에겐 단백질과 칼슘을 보급하면.....
다음날은 노는 토요일이었다. 상용 클라우드 서버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봇기지 서버 내에도 햄스터 리모 아저씨 동영상&사진 공유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느라 요새 잠이 부족했던 오공은 이날 마음껏 늦잠을 잤다.
또키로 더블유가 시조를 읊어 주기 전까지만.
“쉬는 날은 늦잠을 자도 되는 거라구.”
일어나서 아점 아닌 그냥 점심을 먹고 오공은 더블유를 세차하며 불평했다.
“하지만 오공, 오공, 오공. 요새는 나에게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가, 닌가, 닌가. 오공의 학업을 위해서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으나, 요즘 들어 오공이 하는 일은 오직.”
“오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오공이 먼저 말을 끊었다.
“딩요가 찍은 사진하고 동영상을 어딘가에는 저장해야 하니까, 그냥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뿐이라고. 게다가 하나도 두리도 자기들도 보고 싶어하고.”
“적은 속이더라도 자신이 속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있다, 있다.”
더블유는 끈질겼다.
“사실은 오공 자신이 보고 싶기에 그리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닌가, 닌가. 인정하여도 괜찮다, 햄스터가 된 리모 박사님의 귀여움은 이 더블유가 보기에도 탁월하니, 그 모습과 행위를 기록하여 만고에 남기는 것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며.”
“아니, 널리 퍼뜨리려는 거 아니거든. 퍼지면 곤란하거든.”
오공이 찔렀으나 더블유는 꿋꿋했다.
“특히 햄스터가 되어서도 성실히 연구에 임하시는 모습은 매우 귀엽고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배우는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니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모두 열심히 공부할 나이인 또봇 파일럿들이 돌려보는데 부족함이 없는 영상일 것이다, 이다, 이다.”
“아, 그..... 그런 장면 찍었나?”
오공은 어리둥절했다. 항상 붙어 다닌 건 아니지만 딩요가 찍을 때 정도는 자기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밤에 업로드 된 최신 영상이니 오공이 아직 보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하다. 하다. 빠른 시일 안에 보길 바란다. 오공, 오공, 오공. 카메라란 오직 사실 만을 기록하는 것이나, 그럼에도 찍는 사람의 마음은 반영되는 것이어서 제로 형장이 촬영한 리모 박사님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
“제로가 찍어 올렸어?!”
오공이 놀랐다.
“어떻게? 아니 찍은 건 그렇다 치고 나 분명 그 DB 나랑 딩요 한둘셈 밖에 접근 못하게 했.....”
“또봇은 파일럿의 접속 권한을 공유한다, 한다, 한다. 그리고 제로 형장의 파일럿인 리모 박사님은 시스템 관리자가 아닌가, 닌가, 닌가.”
“아.”
말하고 오공은 그걸로 안심할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애들끼리만 소소하게 돌려보고 말 셈이었는데, 이 말은 즉 그들의 또봇들도 보고 있다는 뜻이며, 어쩌면 도운 아저씨도.
서둘러 세차를 마치고 오공은 DB접속자를 열람했다. 로봇인 또봇들이 왜 귀여운 햄스터 영상 - 리모 아저씨지만 - 에 열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엑스 와이 제트 더블유 디 제로가 동영상이나 사진이 올라오는 족족 열성적으로 보고 또 봤다는 건 분명해보였다. 도운 아저씨도 접속 기록이 있었다.
‘혼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일로 혼낼 거면 애초에 찍지 못하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오공은 이걸 몽땅 어디 딴 데 숨길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가 허가받지 않은 접근을 발견했다.
“뭐.”
오공은 깜짝 놀랐다. 그 아마도 해커가 햄스터 동영상을 몇 편 빼내가는 데 성공한 걸 확인하곤 패닉할 뻔 했다.
문제가 심각했다. 고작해야 햄스터가 뭘 먹거나 사람 손에 부비대거나 책상 위를 달려 다니는 영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봇기지 시스템에 침투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달리 뭘 더 빼갔는지 확인해야 했다. 일부러 이 영상을 노린 건지 아닌지도. 또봇의 데이터를 빼가려다 엉뚱한 걸 건드린 거면 차라리 걱정이 덜하지만 만약 일부러 햄스터가 된 리모 아저씨의 영상을 노린 거라면.
오공은 서둘러 기억을 되새겼다. 이 햄스터가 보통 햄스터보다 많이 귀엽고 애교가 많다고 알 수 있는 동영상은 많지만 그래도 지성체임이 대놓고 드러나는 영상은 찍은 적이 없었다.
딩요는.
제로는 리모 아저씨가 연구 중인 모습을 찍었다고 했다.
오공은 도운에게 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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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는 발칵 뒤집혔다.
도운과 오공은 시스템 로그 확인에 매달렸다. 우선 무엇무엇이 얼마만큼 털렸는지 알아야 했다.
하나두리 세모 딩요 네옹은 자기 또봇들과 함께 기지 비상 경계를 섰다. 도운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지만, 정보를 빼내갔으면 그 다음엔 실제로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라 도운도 말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좋은 휴일에 경계만 하는 것도 안쓰러워 또봇들은 교대로 기지 주변을 순찰하고 아이들은 돌아다니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기지 내에 모여있기로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세모네 집에 모두 모여 만약의 경우 침입자를 막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까 심심해졌다.
“어차피 뭐가 쳐들어오면 또봇들이 미리 알려줄 텐데, 그 때까지 우리는 공부라도 하고 있으면 어떨까?”
하나가 제안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뛰어나갈 수만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안 그래.”
두리가 투덜거렸다.
“이런 와중에도 공부냐, 이 공부 귀신 수학 귀신.”
“뭔가 하고 있는 건 좋을 것 같아.”
딩요가 찬성했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거 진이 빠져.”
“그럼 공부 말고 뭘 해볼까.”
네옹이 말했다.
“형은 고등학생인데 공부 더 해야 하지 않아?”
하나가 지적했다.
“고등학생이라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공부만 하잖냐, 쉬는 날 정도는 봐줘라 야.”
네옹이 죽는 시늉을 했다.
“그러지 말고 게임 할까? 시간 때우기엔 최고잖아.”
두리가 제안했다.
“막 아슬아슬할 때 출동하라고 그러면?”
딩요가 찔렀다.
“으..... 나쁜 악당 놈들.”
악당이 나쁜 놈들인 건 당연하지만 그건 좀 이유가 이상하다고 하나도 딩요도 생각했다.
“세모야 네 생각은 어때..... 세모야?”
“어, 응?”
딩요가 흔들자 세모가 정신을 차렸다.
“뭘 정신 빼놓고 있는 거야, 침략을 앞두고.”
두리가 타박했다.
“정신 빼놓고 있는 거 아냐! 그냥.....”
“그냥?”
“그냥..... 실수가 아니면?”
“뭐가?”
하나가 물었다.
“아빠 사진 빼간 거, 그게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면? 악당들이 또.... 아빠를 노리는 거면?”
세모가 리모네 방문을 쳐다보았다.
“거대 로봇들이 싸우러 오는 게 아니라, 막 스파이나 요원 같은 사람들이 침입해서 아빠만 납치해가면 어쩌지?”
“음.....”
“걱정 마, 그럼 나랑 네옹 형이 무찌를 거니까.”
두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안 믿겨.”
딩요가 말했다.
“일단, 문 걸어 잠그기만 해도 어느정도 시간은 벌지 않을까?”
하나가 말했다.
“여기 집들은 튼튼하게 지었다고 전에 아빠께서 그랬어.”
“창문이 큰데 쉽게 깨지지 않을까?”
네옹이 말했다.
“아니, 그것보다 리모 박사님을 혼자 두지 않는 게 낫잖냐? 스파이라면 이러고 있는 새....”
“아!”
세모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낮이라고 둥지 안에서 자고 있던 리모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찍?”
“아.... 무사하시구나.”
세모가 안도했다.
“찍?”
세모가 리모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모가 손바닥 위에 올라오자 감싸 안고 거실로 나갔다.
“잘 계시지?”
“응.”
세모가 고개를 끄덕이고 리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리모가 고개를 들고 모여 있는 애들을 두리번거렸다.
도운은 이번 해킹 건에 대해 리모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 뭘 할 수도 없는데 불안하고 걱정하고 스트레스 받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였다. 인간과 달리 작은 동물들은 스트레스만으로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주의해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애들도 리모 듣는 데선 해킹이니 납치니 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런데 리모가 나와 있으니 이제 대책 논의를 할 수 없었다.
“찍?”
리모가 불만스러운 태도로 질문했다.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세모가 어색하게 변명했다.
“그냥 아빠랑 놀고 싶어서 그래요. 어, 네옹형 오랜만에 보죠?”
세모가 네옹을 가리켰다.
“리모 박사님 여전하시네요.”
네옹이 웃으며 그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리모가 휙 피하자 멋쩍게 거둬들였다.
“하지만 리모 아저씨.”
두리가 대신 불평해주었다.
“노교수님도 이젠 쓰다듬어도 되는데, 네옹형은 안 돼요?”
그 말에 리모가 움찔했다. 그 반응을 보고 용기를 얻은 네옹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는 리모가 이번엔 안 피하는 걸 확인하고 살며시 쓰다듬었다.
“우와, 겁나 부드럽네잉.”
네옹이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보드랍고 귀엽.... 아니 이쁜... 아니 이것도 아니고....”
리모가 네옹을 째려보았다. 햄스터 눈으로 째려봐 봐야 티도 안 나지만 네옹은 긴장했다.
“아..... 음......”
네옹이 당황해서 입을 빠끔거렸다. 리모는 네옹의 손가락을 잡고 깨물 준비를 했다.
“아, 닭꼬치 드실래요?”
“잉?”
“뭐?”
“찍?”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세모가 물었다.
“뭔 소리... 가 닭을 먹자는 거지.”
네옹은 자기도 자기가 뭔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는 와중에도 열심히 말을 계속했다.
“암튼 맛있는 걸 먹는 건 좋은 거 아녀? 점심 먹은 지도 한참 됐는데 출출하지 않냐? 닭꼬치 구워서 우리도 먹고, 리모 박사님도....”
네옹은 슬며시 다시 리모를 내려다보았다. 리모는 입을 헤벌리고 네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침이라도 뚝뚝 흘리고 있으면 어울릴법한 표정이었다.
“어때요, 리모 박사님. 드시고 싶죠?”
리모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근데 괜찮을까?”
하나가 걱정했다.
“혹시라도 햄스터 건강에 해로우면.”
“뭘 걱정 하냐. 야들아, 햄스터가 뭐냐. 쥐잖냐? 쥐는 뭐든 잘 먹는다고.”
“그거야...”
아이들이라고 해서 햄스터 건강에 대해 엄청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커다란 형이 괜찮다고 하자 괜찮은가보다 싶어졌다.
“그래도 너무 짜고 맵고 기름진 건 해롭댔어.”
세모가 말했다.
“전에 도운 아저씨는 용꼬리 치킨도 못 먹게 하셨다고.”
“그라믄 양념은 안 하고 간만 살짝 해서 구워드림 되겠네. 어차피 꼬치를 드실 순 없을 테고... 아니, 이쑤시개에 작게 꿰어서 꼬치처럼 따로 만들면 어떨까. 어때요?”
“찍!”
리모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햄스터는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보니 몸 전체가 흔들려 위태로워보였다.
“정말 괜찮아?”
세모가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빠가 저렇게 드시고 싶어 하시니 몸에 좀 해롭더라도 드리고 싶은 생각 간절하지만 안 그래도 햄스터까지 되었는데 위험요소를 더해선 안 된다던 도운 아저씨 말씀도 분명 옳았다.
“그럼, 그 때 용꼬리는 튀긴 거였지? 이번엔 구울 거고 그럼 기름은 더 빠진다고.”
그 말에 세모도 마침내 안심했다. 그래, 과도한 기름이 문제지 고기 자체는 좋은 단백질 공급원인데 해로울 리가.
“좋아. 결정했지? 그럼 바베큐 틀 꺼내자!”
두리가 신나게 뛰어나갔다.
“괜찮을까?”
딩요가 하나에게 속삭였다.
“괜찮지 않을까, 리모 아저씨도 저렇게 먹고 싶어 하시고.”
“아니 그거 말고.”
“아.”
그러자 왜 자기들이 모여 있었나 떠올린 하나가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우리가 모여 있기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 꼭 오늘 공격해온다고 정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래.”
딩요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공격당할지 몰라 불안 초조해하며 그저 모여앉아 있는 것 보다는 닭꼬치를 먹는 게 더 좋은 건 당연했다.
‘뭐 괜찮겠지, 리모 아저씨도 좋다고 하시고. 어른인데 해로운 걸 드시려고 는 안할 거 아냐.’
리모가 평소 만들던 요리를 생각하면 조금 자신 없어지지만, 아이들은 마음 편하게 합리화해버렸다.
“우와, 네옹형 만든 거 진짜 맛있어.”
두리는 양 손에 꼬치를 두 개씩 쥐고 아구아구 먹었다.
“거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라. 누가 안 뺏어가.”
새로 양념한 꼬치를 쭉 숯불 위에 늘어놓고 네옹은 다시 이쑤시개에 쌀알만 하게 자른 닭가슴살을 꿰었다. 워낙 작아서인지 조심하지 않으면 홀랑 타 버렸다. 간도 할 겸 쉽게 타지 말라고 소금물에 담갔다가 네옹은 그걸 숯불 위로 슬쩍슬쩍 스치듯이 익혔다. 그 옆에서 리모는 구워지는 꼬치를 열렬히 주목하고 있었다.
“리모 아저씨 고기를 저렇게 좋아하셨나?”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꼬리 치킨을 좋아하시긴 했는데...”
세모도 그건 좀 이상했다. 평소에 별로 채식이나 건강식을 한 건 아니지만 막 고기반찬 없으면 밥을 못 먹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오래 못 먹어서 아닐까?”
딩요가 말했다.
“그, 뭐더라, 작은 동물은 시간을 훨씬 빠르게 느낀다고 하잖아. 하루가 한 달 같고 뭐 그런 거.”
“어떤 동물이든 평생 뛰는 맥박 수는 비슷하다는 이야기?”
하나가 말했다.
“그래, 그런 거. 그렇게 따지면 리모 아저씨는 막 몇 달간 고기를 구경도 못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힉.”
두리가 꼬치 두 개를 입에 문 채 굳어버렸다.
“그거, 너무 끔찍하잖아.”
두리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몇 달 씩이나 치킨을 못 먹는다고? 햄버거도 튀김도? 대체 어떤 나쁜 놈이 리모 아저씨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야?”
“노교수님이.”
“그런 분일 줄이야! 노교수님 거 안되겠네!”
“.....지금 화내기엔 좀 뒤늦지 않냐?”
하나가 두리를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네옹은 햄스터 사이즈 닭꼬치를 다 구워서 리모에게 내밀었다. 리모는 냉큼 양 앞발로 받아들고 고기를 앙 물었다.
“니들 다 조용히 해.”
딩요가 못 보던 캠코더를 들고 리모를 찍기 시작했다.
“새로 산거야?”
세모가 조용히 물었다.
“응. 아무래도 폰카로는 한계가 느껴져서.”
찍거나 말거나 리모가 부지런히 닭고기를 뜯어먹었다. 이쑤시개가 미끄러지자 입에 문 채 다시 고쳐 잡아가며 입을 오물거렸다. 고기를 다 먹고 나자 혀로 이쑤시개를 날름 핥았다.
네옹이 연달아 두 번째 꼬치를 내밀었다. 리모는 이번에도 받아들고 앞니로 고기를 물어뜯었다.
“맛있어요?”
네옹이 물었다.
“찍!”
리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옹은 서둘러 세 번째 꼬치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모가 풀이 죽었다.
“찍......”
“에? 왜요? 무슨 문제라도?”
“통역. ‘맛있긴 한데, 인간일 때 먹던 그 맛은 안 나.....’ 라고 하십니다.”
모여 있던 애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제로? 너 언제 왔어?”
세모가 대표로 물었다.
“응답. 리모 박사님이 집안을 벗어나셨기에 걱정이 되어 와보았습니다. 기지 주위 순찰은 다른 또봇들이 잘 하고 있고, 정말로 적이 침투할 경우 저는 응전할 화력이 없기 때문에 제가 빠지는 건 전력상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찍.”
“인정. 변명입니다. 하지만 리모 박사님께 보호가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리모가 휙 제로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고개를 조금만 돌려 말했다.
“찍.”
“응답. 예, 명심하겠습니다.”
리모가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제로 목소리는 매우 행복하게 들렸다.
“저, 제로.”
세모가 물었다.
“아빠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통역. ‘너 미워. 그렇다고 꼴 보기 싫은 건 아니고 널 사랑하는 건 그대로지만 지금 과보호하는 건 싫어.’ 라고 하셨습니다.”
“응.”
세모는 옛날에 아빠 책장에서 육아에 관련된 책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내용 중에 아이를 혼낼 땐 잘못한 행동을 혼내야지 아이의 인격을 비난하거나 미워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이런 뜻이었구나.’
그러는 동안 네옹은 미니 닭꼬치를 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너무 싱겁나, 고기는 적당 짜야 맛이 나는 긴데. 어때요, 박사님. 살짝이라도 양념 발라볼까요?”
“찍.”
리모가 고개를 저었다.
“통역. ‘아니, 됐어.’ 라고 하십니다.”
제로가 말했다.
“찍. 찍.”
“통역. ‘양념의 문제라기보다, 인간과 햄스터의 입맛 차이겠지. 그래도 고마워.’ 라고 하십니다.”
“차라리 햄스터여서 다행이구나.”
하나가 중얼거렸다.
“토끼였으면 정말 먹는 게 고역이었을지도.”
두 번째 닭꼬치까지 다 뜯어먹고 리모는 네옹에게 가서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찍.”
네옹이 내려다보자 그의 손가락을 잡고 몸을 비볐다.
“아이고.”
네옹이 그를 양손으로 감싸 들고 자기 얼굴에 비볐다.
“리모 박사님 어찌 이리 귀엽대요.”
제로가 네옹의 몸통과 리모를 든 팔을 양손으로 잡고 리모를 그의 얼굴에서 떼어놓았다.
“통역. ‘덕분에 오랜만에 인간일 때 기분 내봤어. 고마워.’라고 하십니다.”
“저기, 제로, 말하고 행동하고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은 혹시 안 드냐?”
아플 만큼 세게 쥐고 있지는 않지만 커다란 로봇이 팔을 잡아당기고 있는 건 분명 무서웠다. 그리고 ‘만약’ 이러다 리모를 떨어뜨리기라도 했다간 제로가 이대로 팔을 뽑아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찍.”
“반론. 하지만 네옹은 리모 박사님의 명시적 허락 없이....”
“찍.”
“....복종. 알겠습니다.”
제로가 네옹을 놔주었다. 그러나 네옹은 차마 더 리모를 끌어안을 생각은 못하고 그를 탁자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Chapter Text
“어? 근데 닭꼬치 다 어디 갔어?”
열심히 촬영하다 잠깐 쉬면서 닭꼬치를 먹으려던 딩요가 소리 질렀다.
“그야.”
하나가 두리 쪽을 눈짓했다. 의자에 늘어져 배를 쓰다듬고 있는 두리 옆에는 꼬치 막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두리 너!”
“왜, 안 먹은 사람이 잘못이지.”
“내가 나 혼자 좋자고 안 먹었냐! 넌 오늘 찍은 거 안 보여줄 거야!”
“뭐야 그거 치사하게!”
두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거 동영상 좀 찍는다고 너무 재는 거 아냐? 애초 오늘 일만 해도 네가 그런 걸 찍어댔기 때문에...”
“찍?”
“두리야!”
뒤늦게 두리가 입을 흡 막았다. 그러나 쏟아진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찍?”
“통역. ‘오늘 일 뭐?’ 그리고 ‘뭔데. 나만 모르는 일 있어?’라고 하십니다.”
애들은 모두 조용해져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
“찍.”
“통역. ‘두리야?’라고 하십니다.”
“에, 저, 그, 그냥 딩요 잘난 척 한다고 뭐라 그런 거에요, 저 전에도 그랬잖아요.”
두리가 변명했다.
“찍찍.”
“통역. ‘‘딩요한테 또봇이 뭐가 필요해요? 조심하면 되는데. 기자라고 특종을 취재하겠다고 설치고 다니니까 그런 거죠’라고 했던 때 같이 말이니?’라고 하십니다.”
“으악! 그런 걸 왜 기억하고 있어요!”
두리가 소리 질렀다.
“설명. 리모 박사님은 천재십니다. 그 정도는 기억하실 수 있습니다.”
제로가 쓸데없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흐음, 그랬단 말이지...”
딩요가 두리를 노려보았다. 두리는 뒷걸음질 쳤다.
“찍?”
“통역. ‘그래서, 대답은?’이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입을 합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세모의 또키가 울렸다. 세모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오공이 나타났다.
-위치 알아냈어!
그 말에 애들이 대번에 주목했다.
“정말로? 어느 놈인데?”
-그리고 나쁜 소식이야. 그놈들 리모 아저씨 영상만 빼갔고, 위치는 대전 생명공학 연구단지 내야.
“설마.”
하나가 말했다.
“노교수님의 제자의 사돈의 팔촌의 이웃의.”
-맞아.
세모가 들고 있던 캔을 와그작 구겼다.
“역시 그놈들 처음부터 아빠를 노리고!”
-그러니 우리가 가서....
“찍?”
“통역. ‘가서 뭐?’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찍?”
“통역. ‘내 영상이라고. 그런데 모두들 나한테 숨기고 있었군. 그렇지?’라고 하십니다.”
“어.......”
리모가 매우 기분이 안 좋은 태도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찍.”
리모의 말에 제로는 통역을 하는 대신 정중하게 손바닥을 탁자 옆으로 갖다 댔다. 리모가 그의 손 위로 올라갔다.
“어, 어디 가시려는 거에요?”
세모가 놀라 물었다.
“찍.”
“통역. ‘너희들에게 물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니. 도운에게 가보려고.’라고 하십니다.”
“윽.”
제로는 기지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무시당했다고 섭섭해해야할지 리모아저씨의 분노를 안 뒤집어쓰게 되어서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니들 왜 리모 아저씨랑 같이 있었던 거야? 경계 중 아니었어?
오공이 물었다. 지금껏 일하던 오공이한테 자기들은 리모 아저씨랑 닭꼬치 먹었다고 말하기 뭐해서 아이들은 먼산만 바라보았다.
-아무튼 너희들도 와라. 싸우러 나가게 될 지도 몰라.
“아싸, 선제공격!”
두리가 좋 아했다.
“지금 그런 걸로 좋아할 때냐.”
하나가 타박했다.
“뭐 어때, 적의 본거지를 무찌를 수 있는 좋은 기횐데....”
“암튼 가자.”
세모가 나서서 기지를 향했다.
“아빠 괴롭히려는 놈들 가만 안 둬.”
애들이 가보니 제로가 리모를 도운 앞 눈높이에 받쳐 들고 있고 도운은 리모에게 싹싹 빌고 있었다.
“절대 너 지금 작고 연약하다고 무시해서가 아니야, 햄스터는 사람에 비해 훨씬 스트레스에 취약하니까 보호하려고......”
“찍!”
“알아. 내가 잘못했어.”
“통역. ‘날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보호받는다고? 도운, 우리 애들 상대로도 그렇게는 안 하잖아?’라고 하십니다.”
“찍.”
“당연히 잘못한 줄 알지. 그래도 영원히 감출 생각은 아니었어. 행동에 나설 때 정도...”
“통역. ‘잘못한 줄 알긴 해?’라고 하십니다.”
“...알리려고 했어. 그냥 불안 초조한 채 결과 기다리는 것만 면하려고 그런 거야.”
“찍.”
“그건 안 돼.”
“통역. ‘그럼 나 따라가도 돼?’라고 하십니다.”
“찍.”
“.....복종.”
리모가 말하자 제로가 축 쳐졌다.
“뭐래?”
자기한테 하는 말은 잘 알아듣던 도운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응답. ‘방해되니까 넌 말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도운은 제로가 안쓰러웠지만 방금은 정말로 별 도움이 안 되었기에 뭐라 편들어줄 말이 없었다.
“도운 아저씨!”
세모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악당들 지금 당장 무찌르러 가면 되나요?”
“찍!”
“안 된다고 하셔도 갈 거에요. 더 이상 나쁜 놈들이 아빠를 노리도록 놔두지 않겠어요.”
“기다려, 세모야. 그렇다 해도 당장 무찌르러 갈 수는 없어.”
도운이 말했다가 세모가 노려보자 찔끔했다.
“왜요?”
“행동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당장 가야 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리모는 여기 이렇게 안전하게 있잖아?”
도운이 우선 이전 사건과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그러니까, 그놈들을 확실하게 잡아서 목적을 추궁할 수 있도록 미리 계획을 잘 짜서 신중하게 잡으러 가도 늦지 않다는 거지.”
세모는 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계획인데요, 그래서?”
“우선 노교수님한테 연락을 할 거야.”
“하지만 노교수님도 악당이잖아요?”
그 말을 세모가 아니라 두리가 했기 때문에 도운은 깜짝 놀랐다.
“노교수님이 악당이라고? 어째서?”
“리모 아저씨를 몇 달 간이나 치킨도 못 먹게 만들고....”
“잠깐만, 두리야. 이 일은 노교수님 잘못이 맞긴 하지만.”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도운이 머리를 짚었다.
“아니, 그보다 웬 치킨? 몇 달은 또 어디서 나온 거야?”
“찍.”
“아, 그래.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모를 햄스터로 만든 약을 만든 쪽에서 이 영상을 훔쳐갔다는 건 처음부터 이런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경우 노교수님이 그놈들에게 속아 인질이 된다거나.”
“처음부터 악당이었으면요?”
세모가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질이 되게 놔둘 수는 없잖니? 잡아다 우리가 책임을 추궁해야지.”
그 말엔 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찍.”
리모가 말했다. 잠깐 있다 그가 제로를 돌아보았다.
“찍?”
“해명. 아까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하라고 하셔서.”
“찍.”
“복종. 알겠습니다. 통역. ‘그래도 도주 우려가 있고 우리가 눈치 챘다고 그 쪽에서 알면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모르니까 일단 또봇으로 근처에 가 있다가 상황 봐가며 대응하자.’라고 하십니다.”
“아빠 말씀이 맞아요.”
“나도 찬성이요.”
애들이 다 동의하고 나섰다.
“하지만 벌써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참 너희들 밥은.”
“닭꼬치 많이 먹어서 배 안 고파요.”
두리가 냉큼 말했다.
“너나 그렇지. 이 배신자가.”
딩요가 다시 두리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안 돼. 현장 출동은 이미 오순경님한테 부탁했으니까, 너희는 우선 저녁 먹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또요?”
“자, 기다리는 것도 작전의 일부야.”
그리고 애들한테 저녁을 먹이기 위해선 도운이 밥을 차려야 했다. 오늘은 그냥 밑반찬하고만 먹으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도운은 집으로 올라가려 했다.
“찍?”
“통역. ‘노교수님께 연락은? 빨리 하는 게 좋잖아?’ 라고 하십니다.”
“아, 그래.”
도운이 머리를 긁었다. 자기가 애들 챙기는 동안 이쪽 일은 리모가 맡아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찍?”
“통역. ‘아니면 내가 할까?’라고 하십니다.”
“노교수님은 햄스터어를.”
“대책. 제가 대신 전하면 됩니다.”
“그래라.”
도운은 안도했다. 나가서 날뛰는 일도 아니고, 노교수 오순경하고 연락하고 어떻게 할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햄스터여도 할 수 있었다. 전술적 계획은 원래 리모 몫이기도 했고.
도운은 재빨리 어미닭처럼 애들을 몰아갔다.
“그럼 부탁해, 리모.”
“찍.”
애들 뿐 아니라 도운도 그날 저녁은 매우 서둘러 먹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노교수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그놈들은 사람을 햄스터로 만들어서 뭘 어쩌려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리모가 잘 하고 있을까 염려도 되어서 마음 편하게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저녁을 먹고, 설거지 거리는 물만 부어서 개수대에 방치한 뒤 도운은 아이들과 기지로 내려갔다.
“리모, 어떻게 되었어?”
가보니 리모는 의자에 앉아 양 손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햄스터다보니 의자에 서서 양 앞발로 눈을 가리고 있거나 혹은 세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낭패한 감정은 전해졌다.
“.....리모? 무슨 일이야?”
“찍.”
“통역. ‘직접 노교수님하고 대화해 봐.’라고 하십니다.”
도운이 전화를 걸며 불안한 눈으로 기지 안을 훑어보았다. 제트가 보이지 않았다.
“제트는 어디 갔어?”
“찍.”
“통역. ‘대전에. 노교수님을 애벌레 말이 해오라고 보냈어.’ 라고 하십니다.”
뭐, 라고 묻기 전에 노교수가 전화를 받았다.
-도운? 무슨 일인가요?
아직은 애벌레 꼴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도운은 이걸 제자 된 도리로 도망치라고 말해줘야 하나 고민했다.
-아, 리모에게 이야기 들었나요? 미안해요, 난 그저....
“리모가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교수님께 들으라고 하더군요.”
-아.
노교수가 잠시 침묵했다.
-그...... 해킹 내가 한 거에요.
노교수가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애벌레 돌돌말이란 소리 들었을 때 그 가능성은 예상했기 때문에 도운은 놀라지 않았다.
“왜요?”
그래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야 나도 햄스터 리모의 귀여운 재롱을 보고 싶기 때문이지요.
노교수가 매우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또봇팀의 일원인데, 못 보게 하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음, 그건 확실히 너무하제.”
네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네옹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뒤 다시 전화를 받았다.
“말로 하지 그러셨어요, 접근 권한을 달라고 하셨으면 설마 애들이 안 된다고 했겠습니까. 게다가 왜 하필 거기서.”
도운이 눈을 문질렀다.
“설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한 건 아니지요?”
-그럴 리가 있나요!
노교수가 펄쩍 뛰었다.
-이 늙은이도 그 정도 분별은 있답니다. 사람이 햄스터가 되었다는 얘기도 한마디도 안 했어요.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모르면 해독제 만들기 어렵다고 통사정을 하는데도 입을 꽉 다물었단 말입니다.
“......네, 그건 잘하셨습니다.”
그래도 애벌레 돌돌말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 노교수님 거기 계속 계셔야 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독촉을 하느라고 이러고 있는 것 뿐이지, 연구에 직접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노교수님이 독촉한다면 진척이 무척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운은 말하지 않았다.
“네, 그러면 좀 기지로 돌아와 주셔야겠습니다. 실은 그 해킹 건으로 무척 소동이 벌어져서 말입니다.”
-리모가 전화한 것 보고 짐작은 했답니다. 하지만 방식을 보면 이미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인 게 티가 났을 텐데....
“그럴 거면 차라리 ‘노교수 다녀가다’라고 써 붙여두시지 그랬어요.”
도운이 중얼거렸다.
-네?
“아뇨, 그래서 마중을 보냈으니까.”
말하다 도운은 씨와 제트 중에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할까 궁금해졌다. 씨가 훨씬 먼저 출발한데다 긴급 자동차이기도 하지만, 리모에게 재촉 받은 제트라면 사고 나지 않는 선에서 전속력을 다하고 도로 뿐 아니라 터널 지붕이나 빌딩 벽도 달릴 것이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노교수가 경찰차에 실려 올까, 스파이더 웹 돌돌말이가 되어 제트 지붕에 얹혀 올까 도운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Chapter Text
약 한 시간 뒤. 돌돌말이 노교수를 지붕에 얹은 채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제트가 기지에 도착했다.
“대체 어떻게 왕복 두 시간에 끊은 거냐.”
도운은 우선 노교수가 살아있는지 살폈다.
“어휴, 말도 마세요. 간발의 차로 따라잡혔는데 올 땐 같이 오는 것도 간신히 였어요. 도로가 막히면 건물벽을 타고 달리려고 하길래, 같이 가지 않으면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체포당할 거라고 겨우 말렸다고요.”
오혜라가 말했다.
“찍찍.”
“통역. ‘알았니, 얘들아? 뭔가 안 되는 게 있으면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기 전에 꼭 말로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단다.’라고 하십니다.”
제트를 보내서 노교수를 애벌레말이 하는 것도 충분히 실력 행사 같았지만 아이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제트.”
세모가 제트를 토닥였다.
“근디 니들만 보고 비공개로 해 놓은 건 너무하긴 했어.”
네옹이 말했다.
“이참에 또봇팀 식구는 누구나 볼 수 있게 해둬라. 우린 직접 볼 시간도 없으니 동영상이라도 봐야 하잖냐. 안 그래요, 순경 누님?”
“어? 난 이미 다 봤는데?”
“.........네?”
네옹이 오공을 쳐다보았다. 오공도 당황했다.
“아니, 전 분명.”
“딩요가 보여줬어. 네옹이 넌 못 봤던 거야? 두리라던가 안 보여줬어?”
네옹이 배신당한 표정으로 두리를 보았다. 두리가 딩요한테 소리 질렀다.
“야, 그런 걸 왜 보여주는데!”
“왜, 비밀도 아니고 순경 언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찍은 거 내가 보여주는 게 뭐 어때서? 여자들 간의 의리다, 뭐.”
딩요가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저도 엑스 와이 제트한테 보여 달라고 할 걸 그랬다는 소식입니다! 저도 작고 귀여운 리모 박사님 참 좋아하는데요, 어디 한 번 이참에 동영상도.”
“그걸 혼자만 봤단 말인가, 오순경! 본인은 몹시 실망했다! 좋은 건 나눠 봐야 하는 법인데 혼자만 보고 입을 씻다니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이상 칙!”
“어? 어.... 미안, 보고 싶어 하는 줄 몰랐어....... 근데 넌 로봇인데 햄스터 같은 게 보고 싶은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오순경,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또봇은 없다. 당연히 본인도 보고 싶다. 이상 칙!”
“찍!”
“통역. ‘작고 귀엽다고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통역으로 끝내지 않고 제로는 스패너를 손에 쥐고 누구든 리모 박사님을 작고 귀엽다고 하는 또봇은 어디 한 군데 분해해주겠다는 태도를 했다.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라고, 아까 리모가 말하지 않았니?”
도운이 매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시판 권한은 또봇 식구들 전체에게 개방하도록 하자. 외부 유출은 엄금이라고 경고문 넣고. 애들끼리 소소하게 돌려보려던 것 뿐이고 누굴 따돌리거나 배제하려던 의도는 아니야. 그러니 싸우지들 마라.”
“도운 말이 맞아요.”
노교수가 찬성하고 나섰다.
“찍.”
“리모도......”
“통역. ‘그래도 노교수님은 접근 제한. 범죄의 결과는 누리면 안 되죠.’라고 하십니다.”
“너무하지 않나요!”
“해킹은 안 됩니다.”
도운이 말했다.
“글래도 앞으로 영원히 제한은 너무하니까, 일주일 어때?”
“찍.”
“그래 이주로 하자.”
“통역. ‘그건 짧아. 적어도 이주는...... 저, 이번에도 방해됩니까?”
제로가 리모의 눈치를 살폈다.
“찍.”
“계속. 지나야지.’라고 하십니다.”
제로가 기쁘게 통역을 마쳤다.
“아, 다 헛소동이었다니.”
오혜라가 기지개를 켰다.
“즐거운 주말인데 연장 근무에 해킹 소동에.....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얘들아, 너흰 이제 자야지.”
“네?”
“벌써?”
그러나 자야 하는 시간이 맞았다.
“토요일인데 놀지도 못하고...”
두리가 불평했다.
“너흰 그래도 닭꼬치도 먹고 그랬다며. 나는.”
“자, 딩요도 순경 누님도 못 먹었으니까 내일 또 구워줄게.”
네옹이 오공을 달랬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도운이 말했다.
“자, 내일도 노는 날이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노는 시간이 길어지지?”
“네~”
아이들이 미적미적 집 쪽으로 갔다. 가다말고 세모가 리모에게 달려왔다.
“아빠도 이만 주무시는 게 어때요?”
“찍?”
“좀 이르지만 오늘 일이 많았으니까 피곤하실 거고.”
“그래. 소동은 끝났으니까 가서 자는 게 좋겠다.”
도운도 찬성했다.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모가 손을 내밀었다. 리모가 세모의 손바닥 위로 옮겨갔다.
“찍. 찍.”
“통역. 나는 가서 잘게. 이따 잘 자, 도운. 제로 너도 쉬어.‘라고 하십니다.”
“그래. 잘 자, 리모.”
도운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세모가 리모를 든 채 집으로 갔다.
“자, 제로. 제트 정비만 하고 우리도 쉬자.”
“동의. 제트, 이 쪽으로 오기 바랍니다.”
리모는 이날도 세모의 머리맡 바구니에서 잤다.
지난번 학교에 휩쓸려 가버린 이후로는 조심하느라 그러지 않았지만 세모가 그러고 싶어 했다. 헛소동으로 끝났다곤 해도 미지의 악당이 아빠를 노리는 줄 알고 하루 종일 전전긍긍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어서 리모는 일부러 누워있는 세모에게 부비부비도 하고 손바닥에 폭 쥐어지기도 하고 친근하게 애교를 부리면서 세모가 안심하고 잘 수 있도록 곁을 지켰다.
그래서 세모는 그 날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리모를 다시 자기 책상 위 둥지에 넣어주고 밥그릇과 물그릇도 새로 채워놓고 세모는 도운네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을 먹고 하나두리는 일요일 아침에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봤다. 세모도 끼었다. TV를 다 보고는 하나두리랑 좀 놀았다. 어차피 낮에는 아빠는 주무셨다. 귀찮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저기 세모야. 리모 아저씨 보러 안 가?”
두리가 은근히 물었다.
“보러가긴 뭘. 낮이라 주무실 텐데 뭐 하러 방해해.”
“그래도 어제 낮엔 같이 놀았잖아.”
“그 땐 그 때고.”
세모가 수상하단 눈으로 두리를 바라보았다.
“뭘 노리고 있는 거야?”
“아니, 뭘 노리는 건 아니고.”
“정말로?”
두리가 대답을 못했다.
“뭐, 두리니까 이번엔 리모 아저씨를 자기가 직접 찍어서 딩요 안보여주겠다거나 뭐 그런 정도 계획이 아닐까?”
하나가 말했다.
“뭐?”
세모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 사진 찍고 그러는 거 보기보다 쉽지 않아.”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해봤으니까. 보는 거랑 사진으로 찍히는 거랑 무지 다르다고.”
리모는 사진 찍는 걸, 정확히는 세모 사진을 찍는 걸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세모는 자기도 아빠를 찍어드리겠다고 나서서 해본 적이 있었다. 리모는 기쁘게 그러라고 해주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크고 선명하고 확실하고 예쁘게 보이던 아빠가 사진으로 찍어놓으니 쬐끄맣고 특색 없게, 좀 심하게 말해 지나가던 사람 1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모는 웃으며 사진은 원래 그런 거라고, 사람 눈은 좋아하거나 중요한 건 크게 보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었다.
“난 더 잘할 수 있어. 셀카도 많이 찍어봤다고.”
두리가 계속 주장했다.
“게다가 내겐 리모 아저씨의 협조를 얻어낼 비장의 아이템이 있지.”
“뭐?”
세모의 귀가 번쩍 뜨였다.
“대체 뭐가.”
“짜잔.”
두리가 과자 봉지를 꺼냈다.
“도운 아저씨가 과자는.”
“이건 두부 과자라고.”
두리가 뻐겼다.
“막 짜고 기름지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이거라면 리모 아저씨도 맘껏 드실 수 있을 거고, 그럼 사진도 맘껏 찍게 해주실 거고.....”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야.”
세모 아니라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리모 아저씨는 두부 싫어하실 지도 모르고 그건 아니라도 두부 과자는 덤덤해서 별로라고 하실 지도 모르잖아.”
세모는 우리 아빠 두부 안 싫어하신다고 해야 하나 아빠가 과자에 목숨 건 사람도 아니고 두부 과자에 넘어가서 포즈를 취해 주시지는 않을 거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가보자.”
아무튼 아빠는 보러 가고 싶었다. 한나절이나 혼자 놔두다니 아무리 납치 걱정이 헛소동이었어도 너무 마음 놓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리모네 집 그의 방 창문 밖 가까이 제로가 주차해 있었다.
세모가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
“부정. 아무 일 없습니다. 핑계. 저는 특별히 리모 박사님의 안위를 과도하게 걱정한 나마저 위험이 없는데도 지키고 섰는 게 아니라 그저 이쯤에서 바라보는 기지 전경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서 보면 하나두리네 집 벽 밖에 안 보이는데? 게다가 ‘핑계’라고 했어.”
제로의 앞부분이 축 쳐졌다.
“부탁. 리모 박사님께 이르지는 말아주십시오.”
“걱정 마. 안 일러. 그리고 어제는 헛소동이었다고 해도 그러니까 바로 안심할 수는 없는 거잖아. 딴 악당이라든지 있을지도 모르고.”
“감사.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르기는 고사하고 자기도 아빠를 과보호하고 싶었다. 그래도 그런 소리까진 하지 않고 세모는 하나두리와 함께 집에 들어갔다.
그가 아빠방 문을 열었다.
“아빠, 주무세요?”
조용히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주무시나보다 하고 세모는 살금살금 집 가까이 갔다. 자고 있는 아빠는 무척 귀엽고 가만히 있으면 두리라도 괜찮게 찍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둥지 안을 들여다보니 과연 아빠는 눈 감고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인간보다는 훨씬 빠르게 몸통이 숨 쉬는 대로 움직였다.
하나와 두리도 뒤꿈치 들고 살금살금 방안에 들어와 리모를 들여다보았다. 두리가 휴대폰을 들이댔다.
번쩍!
플래시가 터졌다. 세모가 기겁했다.
‘야!’
세모가 입모양으로만 소리 질렀다.
‘일부러 안 그랬어!’
두리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서둘러 플래시 설정을 찾아 허둥거렸다.
“뀍......”
리모가 괴로운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세모는 두리를 노려보곤 아빠를 집어 들었다.
리모가 축 늘어졌다. 발이 찼다.
세모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햄스터는 인간보다 체온이 높았다. 발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찬 건 명백히 위험신호였다. 리모가 세모 손 위에서 옴작거리며 숨을 쉬고 있는 걸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무서웠다. 아니 보고 있기 때문에 무서웠다. 그가 발딱 일어나 세모를 올려다보며 ‘찍?’하는 대신 여전히 움츠린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덜덜 떨던 세모가 도운에게 달려갔다.
“도운 아저씨! 우리 아빠가 아파요!”
‘두리가 리모에게 플래시를 썼더니 이렇게 되었다.’라는 세모의 설명에 도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고 있는 햄스터한테 플래시를 터트린 두리는 물론 잘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지 그 이유로 이렇게 아플 리는 없었다.
“저, 리모?”
도운이 손끝으로 살살 리모를 흔들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 왜인지 뭐 짐작 가는 거 있어?”
리모가 힘겹게 눈을 떴다.
“뀍..........”
도운이 리모를 든 채 할 수만 있으면 도운네 집 벽을 들이받아서라도 들어오고 싶은 것 같은 제로 앞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왜 아픈 건지 통역 좀 해줄래?”
리모가 입을 달싹거렸다. 제로는 주의 깊게 들었다.
“해석. 리모 박사님은 배가 아프다고, 아마 체한 것 같다고 하십니다.”
“체하다니 대체 뭐에? 어제 오늘 뭐 새로운 거 먹기라도 했어?”
“아!”
두리가 소리쳤다.
“닭꼬치!”
“닭꼬치?”
도운은 기가 막혔다.
“그런 걸 먹였단 말이냐? 내가 사람 먹.... 간식 같은 거 함부로 주지 말라고 말을!”
“햄스터용으로 따로 했어요.”
세모가 말했다.
“양념 안 하고, 구워서. 쥐니까 그러면 괜찮을 거랬는데...”
“고기가 덜 신선했든지, 덜 익었든지, 아니면 역시 어제 일이 스트레스로 작용해서 소화불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도운은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어제 저녁에 먹은 고기였다. 진짜로 위험한 식중독 같은 거였다면 어제 밤새 탈이 나도 났을 것이다.
“언제부터 아팠던 거야, 리모?”
“찌.......”
“질책. 이런 건 사실대로 털어놔야 합니다. 변명은 치료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리모?”
“찍.”
“통역. ‘오늘 새벽 정도부터.’라고 하십니다. 추측.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리모가 반쯤 몸을 일으켜 제로를 노려보았다.
“찍.”
“의심. 많이 아프지도 않으신데 그렇게 몸도 제대로 못 가누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찍.”
“추궁. 그건 변명일 뿐입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제로.”
도운이 불렀다.
“리모가 혼날 소리를 하고 있는 거 알겠고 나도 혼내고 싶지만 지금은 환자랑 논쟁을 하기 보다는 치료할 방법을 찾자꾸나.”
“사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보다.”
도운은 고민했다. 리모에게 아프면 동물 병원에 보내겠다고 위협하긴 했어도 정말로 그를 동물병원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도 어려울 거고 수의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햄스터를 인간처럼 다뤄줄 리는 없는데다 리모가 겪게 될 공포와 불안을 생각하면 도리어 병이 악화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발.... 손발이 찬 게 마음에 걸렸다. 먼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약이라도.
‘애들용 배탈 시럽이라도 먹이면 되려나? 그런데 용량은 대체 어느 정도여야지?’
약을 잘못 먹였다간 닭꼬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참상이 일어날 것이다. 도운은 약은 포기하고 따뜻한 미음이라도 먹이는 편이 낫겠다고 결심했다.
Chapter Text
찜질팩을 따뜻하게 덥히고 수건을 깔아서 리모를 눕혀놓고 도운은 미음을 끓였다. 마음 같아서는 방에 두고 싶었지만 뭔가 변화가 있을 경우 호소도 못할 리모의 상태를 생각해서 바깥 탁자에 두고 그 옆을 제로가 지키고 섰다. 리모의 작은 칭얼거림도 놓치지 않고 들어 전할 수 있도록 귀를 바짝 세우고. 아직 낮이고 날씨도 따뜻하고 해도 밝으니 괜찮을 것이다. 세모 역시 제로가 돌볼 수 없는 세심한 것들을 챙기기 위해 옆에 대기했다.
다행히 찜질팩에 올려놓고 나자 리모는 한결 편안해보였다.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세모가 원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 전부터 아팠으면 그 때 세모를 깨웠으면 좋았을 것이다. 깨우지는 않더라도 일어났을 때 정도 말해줘도 좋았을 텐데.
“찍.....”
“통역. ‘내가 먹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미안해서 그러지...’라고 하십니다.”
“아픈데 미안한 게 어디 있어요. 게다가 인간 몸일 때는 참는다 쳐도 지금은 안돼요. 아시잖아요?”
“찍...”
“통역. ‘미안...’이라고 하십니다.”
세모가 축 늘어져 있는 작은 몸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보드랍고 귀엽지만 힘없이 엎드려 있는 게 애처로워보였다. 찜질팩의 온기로 평소보다 따뜻해진 아빠를 조물조물 쓰다듬다 세모가 꼬리를 만졌다.
“찍!”
리모가 펄쩍 뛰듯이 놀랐다. 세모도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어, 죄송해요. 싫으세요?”
그야 아빠 엉덩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게 맞지만 세모는 진짜 별 생각 하지 못했다. 햄스터의 엉덩이와 꼬리는 다들 귀엽게 여긴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만 봐도. 리모는 꾸물꾸물 찜질팩에 푹 파묻혀 덮은 수건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방해 안 할테니까 편히 주무세요.”
괜히 한마디 더 해보았지만 리모는 고개만 끄덕하고 조용했다. 세모는 가만히 리모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 있는데 도운이 왔다.
“자, 리모. 미음 끓였는데 먹을래?”
리모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 긍정으로 해석한 도운이 주사기로 미음을 빨아들여 리모 입가에 갖다 대었다. 도운이 천천히 주사기를 누르자 리모가 혀를 날름거리며 미음을 받아마셨다.
1ml정도 먹이고 도운이 리모의 상태를 살폈다.
“아픈 건 좀 어때?”
“찍.”
“통역. ‘괜찮아, 나아가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넨 생각에도 이번엔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추정. 목소리도 편안하고 아픈 기색도 줄어드신 걸로 봐서 실제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찍.”
“왜 의심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도운이 엄하게 말했다.
“오공이 무슨 일 있으면 신호 보낼 수 있게 만들어줬다며? 아니 세모 걱정시키기 싫으면 나한테 만이라도 알리라고.”
세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운을 보았다. 도운은 못 본체 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상한 거 맘대로 먹지 말고.”
이제는 리모도 도운을 흘겼다. 도운은 이것도 못 본체 했다.
“그러니 오늘은 금식...”
“찌이이이이익.......”
리모가 차마 들어줄 수 없을 만큼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하고 싶지만 그건 인간 기준이고 햄스터는 금방 배고파질 테니까 오늘 오후 5시까지만 금식이야. 그 때 까지는 미음만 마시도록 해.”
도운이 세모에게 주사기를 내밀었다.
“이것도 너무 많이 먹이지는 말렴. 과도한 수분도 햄스터에게는 안 좋을 테니까. 달라는 대로 주지 말고.”
“네. 그럴게요.”
세모가 주사기를 받아들었다.
“찍.”
리모가 앞발로 눈을 가렸다.
“통역. ‘니네 다 미워.’라고 하십니다. 저, 리모 박사님.”
“찍.”
“해명. 저는 금식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질문. 저도 ‘니네’에 들어갑니까?”
이번엔 도운과 세모가 나란히 제로를 째려보았다.
“......이 배신자가.”
시간이 흐르자 리모는 순조롭게 나았다. 자기들 하는 일이 이렇게 잘 풀릴 리 없다고 생각한 도운은 긴장해서 어디 잘못되지나 않나 살폈지만 리모는 이제 혼자 돌아다니고 아픈 기색도 없었다.
“정말 안 아픈 거 맞지?”
“찍.”
“통역. ‘아프면 내가 먼저 말을 할게.’라고 하십니다.”
“진작 그랬으면 내가 걱정이 없었을텐데.....”
“찌익.”
리모가 뒷발로 서서 손을 모으고 도운의 눈치를 보았다.
“미안하다고?”
도운이 물었다.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찍.”
“그러니까 밥 달라고?”
제로는 도운이 너무 잘 알아들어버려 통역할 말이 없는 게 아쉬웠다.
도운이 짐짓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시간은 5시가 안 되었다.
“먹었다가 또 아프면?”
리모가 축 쪼그라들었다. 그가 두 발로 총총 도운에게서 멀어져서 이번엔 세모에게 가 다시 애처로운 눈빛 공격을 시작했다.
“리모, 아들을 공략하다니 너무하단 생각 안 하냐.”
“이제 안 아프시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요.”
세모는 넘어갔다.
“애초 엄청 위험한 병이었던 것도 아니고, 단순 배탈이잖아요. 이제 나았고 평소 먹던 거 먹으면 괜찮을 텐데.”
“동의. 세모의 의견이 옳습니다.”
제로까지 리모 편을 들었다.
“정말 완전히 나았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도운이 자기도 모르게 변명했다.
“별로 리모를 괴롭히려고 안 된다고 하는 거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가 언제나 주머니에 넣어두는 리모 간식 주머니를 꺼냈다. 그중에서도 부드럽고 소화에 무리없을만한 걸 한참 물색하다 말린 딸기를 꺼내주었다.
“아프지 말라고. 십년감수했단 말이다.”
열심히 딸기를 아삭거리는 리모를 보며 도운이 불평했다.
“인간일 때 아파도 걱정되어서 일이 손에 안 잡힐 텐데, 심지어 지금은 햄스터면서. 반성하고 있어?”
“찍.”
리모가 딸기를 다 먹고 고개를 들었다.
“반성했다는 거냐, 더 달라는 거냐.”
“찍.”
“더 달라고?”
“찍.”
“반성은?”
“찍.”
“통역. ‘할게.’라고 하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식탐이 있었어?”
그러면서도 도운은 이번엔 당근 말린 것을 내밀었다. 리모는 역시 열심히 갉았다.
“의견. 햄스터는 인간보다 체적 대비 표면적이 넓어 체온 유지를 위해서 많은 열량이 필요하므로 자주 음식물을 섭취하는 게 당연합니다.”
제로가 말했다.
“응, 나도 알긴 아는데 말이지...”
도운이 리모를 집어 들어 손바닥에 얹어놓고 감싸듯 쥐었다. 따뜻하고 동그스름하고 보들보들하니 감촉이 좋았다. 인간인 리모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지만 이 리모는 이 리모대로 리모답다고 생각했다.
“도운 아저씨...”
“그래.”
도운이 세모에게 리모를 건네주었다.
“이제 안 아프다고 해도, 금식도 하고 체력 약해졌을 테니까 오늘은 연구나 그런 거 하지 말고 일찍 쉬도록 해.”
“찍?”
“통역. ‘쳇바퀴도 돌리지 말고?’라고 하십니다.”
“그래, 쳇바퀴도 돌리지 말고.”
“찍?”
“통역. ‘그럼 간식은?’이라고 하십니다.”
“...조금만 먹도록 해.”
“찍.”
리모가 안도했다.
정말 알아서 먹게 놔둬도 좋은 걸까 걱정은 되었지만 입 밖에 내었다간 자길 못 믿느냐며 리모가 또 삐질 게 분명하기에 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집에 가볼게요.”
세모가 말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보온은 계속해야 한다.”
“그럴게요.”
오늘 밤은 둘이 함께 자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보온 목적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정말 안 깔아뭉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라면 자면서 뒤채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도운이 생각 했을 땐 세모는 이미 집으로 도망가 버린 뒤였다. 도운은 어깨를 으쓱하고 오늘 안한 일을 뒤늦게 하러 갔다.
그러나 어떤 효자에게도 월요일은 오는 것이고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는 집에 있는 어른에게 작고 귀여운데다 아프기까지 해서 걱정되는 아빠를 맡기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간 세모는 우울하게 자리에 늘어져있었다. 월요일은 다들 그러기 때문에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다른 월요일보다 배는 우울했다.
그러고 있는데 같은 반 세영이란 애가 세모에게 다가왔다.
“세모야, 나도 햄스터 샀다?”
“응?”
그 애가 세모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리모랑 비슷한 노르스름한 얼룩이 있는 햄스터가 분홍 리본을 매고 있는 사진이었다.
“예쁘지? 이름은 공주라고 해.”
“공...”
세모는 장난하냐는 시선으로 세영을 올려다봤다가 자기 햄스터 이름은 ‘아빠’라는 점을 생각하고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응. 귀엽네.”
우리 아빠에 비하면 백 배 쯤 부족하지만, 이라고는 속으로만 덧붙였다.
“나 공주 데리고 너네 집 놀러가도 돼?”
“응?”
“햄스터끼리도 친구하면 좋잖아.”
우리 아빠는 햄스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 그 우리... ‘아빠’는 좀 외로움을 타서.”
‘수줍음을 타서’라고 말해야 하는데 실수했단 사실을 깨달은 건 세영이 표정이 환해진 다음이었다.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 바로 가자. 공주 데려올게.”
“아, 아니 햄스터를 학교에 데려오면 안 되는데.”
학교에 햄스터를 데려와서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그렇게 말해도 설득력은 없겠지만.
“걱정 마, 몰래 잘 데려올게.”
“어.....”
세모가 어버버 하는 새 약속은 결정이 되어버렸다. 세영이 자기 자리로 가버린 뒤 세모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고 딩요가 다가 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우리 집에 햄스터 데리고 온대.”
“뭐? 그냥.... 딴 햄스터?”
“샀대.”
“하지만...”
딩요가 미간에 주름살을 모았다.
“나라면 싫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에도 싫을 것 같아. 아빠 어쩌지.”
세모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그래도 햄스터인 거 싫으실 텐데, 거기에 아빠만한 다른 햄스터를 들이대서 지금 상황을 강조하다니. 아빠 화내실 거야. 돌아앉아서 쓰다듬지도 못하게 하실 지도 몰라...”
“너무 걱정하지 마.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딩요가 세모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 집에 가서 어른들께 말씀드려보자.”
그래서 집에 오며 세모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빠는 사람 같은 기분을 조금 맛보다가 알아 눕기까지 했는데 거기에다 햄스터를 ‘친구 하라고’ 들이대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아빠나 도운 아저씨가 좋은 방법을 알려주셔야 했다. 세영이네 부모님이 햄스터를 학교 데려가면 안 된다고 혼내주면 좋겠지만 그걸 믿고 아무 대비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세모가 기분이 푹 가라앉아 있자 다른 애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햄스터를 집에 데려와선 안 된다는 데에는 모두가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먼저 리모를 보러갔다.
리모는 자기 방에 없었다.
“우리 아빠랑 기지에 계시나봐.”
세모가 패닉할까봐 하나가 재빨리 말했다.
“그래. 가보자.”
일단 책가방은 내려놓고 미끄럼틀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내려가보니 기지에도 리모는 없었다. 심지어 도운도 없었다.
“아, 그래 당연히 우리 집에 계시겠지. 또 간식을 만들고 계시는 거야. 틀림없어.”
두리가 이마를 탁 치며 소리쳤다. 그리고 누가 걱정 시작할세라 집으로 달렸다.
세모는 좀 짜증이 났다. 자기가 아빠 좀 걱정했기로서니 다들 그가 아빠한테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이성을 잃을 것같이 조심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아빠가 뭘 하고 있어도 놀라거나 소리 지르거나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세모는 도운네 집으로 들어갔다.
“아........ 엑?? 뭐, 뭐에요 이게?”
결심도 뒤로 하고 세모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도운네 거실은 놀이동산이 되어있었다.
정확히는 햄스터용 놀이동산이었다. 거실을 가득 메운 햄스터 터널이 롤러코스터보다 더 복잡한 형태를 그리며 투명하게 빛났다. 그만큼 거대하고 복잡하지는 않은 햄스터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거실 한쪽엔 아직 뜯지 않은 상자도 쌓여있었다.
거실 한쪽에 칠판을 끌어다 놓고 햄스터 터널의 더욱 새롭고 복잡하고 재미있는 형태를 설계 중이던 도운이 애들을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얘들아... 이, 이건 말이다.”
“찍.”
리모가 맨 위로 솟은 터널 끝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아빠.”
세모가 다가가며 말했다.
“아픈 건 이제 괜찮으시고요?”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언제 다 사셨어요?”
하나가 금문교 모양 플라스틱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 목욕 모래 산 날.”
세모가 홱 고개를 들었다.
“목욕 벌써 하셨어요?”
“구경 못해서 아쉽니?”
도운이 짓궂은 표정을 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걱정하지 말렴, 아직 안했으니까.”
도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아직 뜯지도 못했단다. 저 상자 중 어디 있을 텐데, 터널 먼저 설치하다 보니.”
Chapter Text
리모가 터널 속으로 다시 쏙 들어가더니 옆으로 부다다 달렸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었다가,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내려가는 지점에서는 햄스터답지 않게도 등을 대고 좍 미끄러지며 빙글빙글 미끄럼을 탔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내려선 리모는 어지러운지 조금 비틀거렸다.
“아빠? 괜찮으세요?”
“찍.”
리모가 두 발로 휘청휘청 걸어서 세모에게 왔다. 그 모습이 꼭 취하기라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모가 리모를 안아들었다.
“어때, 리모?”
도운이 물었다.
“찍.....”
리모가 고민했다.
“두 분 그럼 하루 종일 이거 조립하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은 아냐, 이거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도운이 변명했다. 애들은 ‘얼마 되지 않아’ 이 만큼이나 만들다니 과연 또봇의 제작자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고민했다.
딩요가 주머니에서 말린 군고구마를 꺼냈다.
“리모 아저씨, 이거 이쪽 끝에 저쪽 끝까지 한 번 더 쭉 달려주실래요? 동영상 찍게요.”
“찍.”
리모가 양 앞발을 내밀었다. 딩요가 고구마를 주었다.
“리모, 단 거 너무 먹으면....”
“찍.”
“운동할 거잖아, 라고 하시는 거죠?”
이제는 세모도 햄스터어 통역의 길에 뛰어들었다. 도운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러는 동안 리모는 고구마를 다 먹고는 다시 햄스터 터널을 달리기 시작했다. 딩요는 새 캠코더로 리모가 터널을 오르고 내리고 코너를 돌고 미끄럼을 타는 모습을 쭉 쫓았다.
“왜 투명인가 했더니 이런 점이 좋은 거구나.”
같이 구경하며 오공이 중얼거렸다.
“햄스터의 편의를 생각한다면 불투명해서 굴처럼 어두운 게 좋았을 텐데.”
“애완용으로 기르는 거니까, 보는 사람 편의에 맞춰지는 건 어쩔 수 없지.”
하나가 말했다.
“리모 아저씨가 안 싫어하셔서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애완동물용이라는 거 너무 지적하지 마.”
딩요가 말했다.
터널을 모두 통과한 리모가 세모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세모가 그를 들어올렸다.
“재미있어요?”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모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터널 말고 다른 건 어때요?”
리모가 고개를 갸웃했다.
“찍.”
“딴 상자도 열어볼까요?‘
“찍.”
세모가 쌓여있는 상자로 가서 칼을 찾다가 리모를 손에 쥔 채로는 상자를 열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찍.”
리모가 세모의 팔을 타고 달렸다. 세모가 그가 올라가기 쉽게 팔을 들어주었다. 리모가 세모의 어깨에 올라갔다.
“그냥 딴 사람한테 옮겨가도 될텐데요.”
하나가 눈높이가 같아진 리모를 보며 말했다.
“어깨 같은 덴 자칫 떨어질 지도 몰라요.”
하나가 세모 어깨 옆에 손바닥을 붙였다. 세모는 몸을 옆으로 비켰다.
“야.”
“칼 찾는 거야.”
세모가 어색하게 변명했다. 그가 상자를 뜯었다.
처음 손에 잡힌 뾱뾱이 뭉치를 풀어보니 손잡이가 뒤로 달린 작은 브러시가 나왔다.
“햄스터 털도 빗어요?”
세모가 도운에게 물었다.
“그런다더구나.”
“그치만 이미 이렇게 부드럽고 매끈한데도요?”
“한번 해 보면 알겠지.”
도운이 다가와서 세모가 항의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브러시를 받아들고 어깨에서 리모를 집었다. 그리곤 비장한 태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리모의 털에 브러시를 묻고 잡아당겼다.
스윽하고 털이 빗겼다. 도운이 이번엔 좀 더 자연스럽게 빗을 놀렸다. 머리부터 등까지 판판한 곳 부터 살살 쓸어내리자 리모가 눈을 감고 몸을 쭉 폈다.
“리모, 기분 좋아?”
“찍...”
리모가 고개를 옆으로 눕혔다. 도운은 리모가 유도하는 대로 옆도 빗질하기 시작했다.
“어, 이거 보기보다 털이 빠지는구나.”
한참 빗질하다 도운이 브러시를 들어보였다.
“우리 중에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자주 빗어주는 게 좋겠는걸.”
“그럴게요.”
세모가 냉큼 브러시를 뺏어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리모를 빗기 시작했다.
“나도 리모 아저씨 빗어보고 싶어.”
두리가 손을 들었다.
“나도.”
하나도 나섰다.
“빗는 거라면 너희보단 내가 낫지.”
딩요도 끼었다.
“애들아.”
도운이 엄하게 말했다.
“리모는 장난감이 아니야. 그냥 햄스터라도 그렇게 흥미 위주로 너도나도 달려들면 짜증날 텐데 사람인 리모는 더 어떻겠니.”
“....아!”
세모가 소리 질렀다.
“으, 맞다. 큰일 났어요, 도운 아저씨.”
“뭐? 큰일?”
도운이 긴장했다. 거의 겁먹은 것처럼도 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그, 반 친구 중에, 햄스터를 새로 산 애가 있는데.....”
“지난 번 리모가 학교 갔을 때 이후로?”
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햄스터끼리 친구하자며, 데리고 놀러오겠대요.”
“찍!”
리모가 소리를 질렀다.
“네, 저도 싫어요. 근데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세모가 비참한 심경으로 대답했다.
“어떡하죠? 바로 내일 온다고, 햄스터를 학교에 데리고 왔다가 곧장 온다는데...”
세모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데 실수해서 오라는 식으로 말해버려서... 내일 학교 가서 거절하려면 늦을 텐데.”
“아빠가 안 된다고 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도운이 제안했다.
“그치만 왜 같이 못 놀게 하는데요? 세모는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하나가 지적했다.
“음, 그런가. 이상하려나.”
도운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해도 제대로 이유도 없이 호의를 거절하는 건 무례하게 여겨질 것이다.
“찍...”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거절을 못하는 바람에.”
“찍.”
리모가 세모의 손바닥을 앞발로 토닥였다.
“아빠...”
“찍.”
말하고 리모가 세모를 바라보았다.
“네?”
“....찍.”
그가 앞다리를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세모는 밖에 뭐가 있나 내다봤다가, 제로가 옆으로 쭈그려 눕다시피 해서 집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모양을 보았다.
세모가 가서 창문을 넓게 열어젖혔다.
“감사. 열어줘서 고맙습니다, 세모. 인사. 오랜만입니다. 리모 박사님.”
“찍.”
“해명. 리모 박사님과 헤어져 있는 기간은 단 몇 시간이라고 해도 제게는 오래입니다.”
리모가 양 앞발로 눈을 가렸다.
“...아빠,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제로 부르신 거 아니에요?”
“찍.”
“통역. ‘응, 그래.’라고 하십니다.”
“찍. 찍.”
“반대. 그건 안 됩니다.”
“찍!”
“그래도 안 됩니다. 지난번에 있었던 무시무시한 일을 잊으신 겁니까.”
“뭔데 그래?”
세모가 당황했다.
“아빠 혹시, 또 닭꼬치 드시고 싶다고 라도 했어?”
여기서 닭꼬치가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아빠한테 일어났던 무시무시한 일은 세모 알기론 그것 밖에 없었다.
“제로, 리모가 뭐라고 했기에 그러는 거니?”
도운도 창가로 다가왔다.
“부탁. 도운 박사님, 리모 박사님을 말려주십시오. 리모 박사님께선 세모네 학교에 다시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찍!”
“반론. 그런 뜻 맞습니다.”
“제로.”
도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모가 바보짓하면 내가 나서서 반대하고 말릴 테니까, 우선은 내게 그 리모의 멍청한 계획이 뭔지 리모가 한 말 그대로 말해주지 않겠니?”
“찍.”
“통역. ‘멍청한 계획 아니거든?’이라고 하십니다.”
“그래그래. 그 안 멍청한 계획이 뭔지 궁금해 죽겠다고.”
“찍. 찍찍.”
“통역. ‘집에 오게 할 수 없으면 내가 가면 되는 거야. 학교에서라면 쉬는 시간에 잠깐 보는 걸로 끝날 거고, 선생님한테 들켜서 혼난다면... 아니 우리 세모가 혼나면 안 되는데.’라고 하십니다.”
“혼나도 돼요!”
세모가 소리쳤다.
“혼나면 다음부턴 햄스터 못 데려오기도 할 거고, 제 실수로 이렇게 된 일이니 그 정도 책임은 질게요.”
“찍!”
“통역. ‘그런 걸로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제가 혼나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그... 전략적으로 잘 된 거잖아요.”
“찍. 찍.”
“통역. ‘전략이란 그런 때 쓰는 말이 아니야. 그리고 되도록 혼나지 않게 주의하렴. 나도 안 들키게 있을 테니까.’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난 뒤에 집에 오겠다고 하는 건 어떻게 막을 거야, 리모? 그 햄스터랑 만나야 하는 문제는 그대로인데다 일단 보고 나면 오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도리어.”
“찍.”
“통역. ‘그건 내게 방법이 있으니 맡겨둬.’라고 하십니다.”
“안 돼!”
도운이 말했다.
“찍!”
“적어도 무슨 방법인지 알기 전에는 못 보내. 너니까 뭔가 너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한 극단적인 방법을 쓸 것 같다고.”
“찍...”
리모가 세모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통역. ‘세모야, 도운이 날 안 믿어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리모 박사님.”
“찍?”
“의심. 그건 저도 못 믿겠습니다.”
“찍!”
“자, 괜찮아요, 아빠.”
세모가 리모를 쓰다듬었다.
“저는 아빠를 믿어요.”
“찍.....”
“그래서 어떤 방법인데요?”
“....”
리모가 돌아앉았다. 그래봐야 세모 손바닥 위이지만.
‘그리고 뒷모습도 귀여운데.’
동그스름한 엉덩이와 삐죽 솟은 꼬리를 보고 있으니 다시 건드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빠가 더 삐지실까봐 세모는 가만히 있었다.
“리모 아저씨.”
하나가 리모 앞으로 왔다.
“그러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정말 리모 아저씨의 안전을 도외시한 위험한 방법인 게 아니라면 알려줘도 상관없지 않나요?”
“...찍.”
“의문. 정말 그걸로 되는 겁니까?”
“제로, 제발 통역을 해주고 나서 반론하는 게 어떠니.”
“사과. 죄송합니다, 도운 박사님. 통역. ‘내가 그 애한테 안 귀엽게 굴면 돼.’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걸로 되는 거야?”
“음, 하지만 걔는 리모 아저씨 보다는 세모를 노리는 건데요.”
딩요가 말했다.
“뭐? 날?”
“찍.”
“통역. ‘그러니까.’라고 하십니다.”
“날 왜 노려? 걔네 악당이었어?”
세모만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악당이라서가 아니라 여기서 노린다는 건.”
“아, 그래 잘 생긴 녀석은 좋겠다.”
두리가 툴툴거렸다.
“여자애가 친해지려고 햄스터까지 키우고.”
“인기 있고 싶으면 너도 좀 인기있을만한 짓을 하던가.”
딩요가 찔렀다.
“축구 신문엔 이상한 셀카나 올리지 말고.”
“이상하긴 뭐 이상해, 멋있게 잘 나온 것만 올리고 있는데!”
“그렇게 미적 감각이 이상하니까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없지.”
“어흠.”
도운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리모, 여자애한테 못되게 굴어서 세모를 단념시키겠다고?”
“찍. 찍.”“통역. 그래. 적어도 햄스터를 이용하는 방법 만은 단념시킬 수 있겠지.‘라고 하십니다.”
도운은 고뇌했다. 서른 여덟 먹은 어른이, 아무리 지금은 햄스터 상태라지만, 초등학교 3학년짜리 여자애 상대로 못되게 굴어도 되는 걸까.
“찍.”
“통역. ‘애보단 그 햄스터 상대로 그럴 거야. 어차피 친구될 수 없는 건 명백하잖아.’라고 하십니다.”
“...너무 괴롭히지는 마.”
“찍.”
Chapter Text
“그런데 이거 이대로 거실에 설치하실 거에요?”
칠판의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오공이 물었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
도운이 퍼뜩 정신 차린 것처럼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 지형지물 활용의 예시로 나온 오브젝트가 꼭 소파랑 탁자 같아서.”
“그냥 생각을 해본 것뿐이야, 생각을.”
도운이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걸로 거실을 채울 생각인 건 아니고말고. 그랬다간 TV도 못 볼 거고....”
“그래서 어디 설치하실 건데요?”
세모가 물었다.
“리모 방에, 책상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이걸로 하면 괜찮지 않을까 해.”
“그것 만요? 이 정도 길이면 세모네 집하고 여길 이어도 되겠는데요.”
오공이 지적했다. 하나두리 눈이 빛났다.
“아니, 안 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도운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얇은 플라스틱일 뿐이라 실외에 지지도 없이 떠있는 걸 견딜 수는 없어. 중간에 부서지기라도 하면 리모가 위험하고.”
“안 되죠, 그럼.”
세모가 냉큼 말했다.
“그럼 이걸론 어떻게 놀아야 하는데요?”
두리가 물었다.
“이건 너희가 아니라 리모가.”
“찍?”
“통역. ‘너도 노교수님의 사돈의 팔촌이 만든 약을 먹고 작아지면 놀 수 있어.’라고 하십니다.”
“.....숙제 하면 되잖아요.”
두리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만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나도 칠판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우리 모두 리모 아저씨 놀이터를 하나씩 만들어서 누가 만든 게 제일 재미있나 해보면.”
“무조건 세모가 이길 거니까 싫어.”
두리가 툴툴대었다.
“무조건이라고 할 것 까지는...”
“찍.”
“통역. ‘아저씨 그렇게 치사한 사람 아니야. 심사를 할 때는 공정하게 한다고.’라고 하십니다.”
“그럼 하죠.”
오공이 말했다.
“우승 상품은 뭐가 좋을까요?”
“그렇게 해서.”
오공이 의기양양하게 더블유에게 리모를 내밀어보였다.
“리모 아저씨랑 같이 대도시 일주 비행을 하게 되었어.”
“오, 과연 나의 오공은 세계 최고의 또봇 파일럿이로다, 이로다, 이로다.”
더블유가 감격에 차서 이 자리에 있는 또봇들뿐만 아니라 딴 데서 일하고 있는 또봇들에게까지 연락을 넣어 빼먹지 않고 자랑을 했다.
“그럼 어서....”
“지적. 떠나기에 앞서, 잠시 안전 점검을 해야 합니다.”
제로가 더블유를 잡았다.
“안전 점검이라니, 현재 내 기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안전장치도 모두 정상이다, 이다, 이다.”
“추가. 바로 그렇게 방심하는데서 안전사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안전해보일수록 더욱 주의하여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습관을.”
“방심하는 것이 아니다, 니다, 니다. 나는 항상 파일럿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다, 있다, 있다. 당연히 다른 또봇에 비해도 일곱 배 이상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바로 오늘 아침에도 시설 점검을 했다, 했다, 했다. 그러하므로 지금 과도한 추가 검사로 유람의 출발을 지체하여 기대에 부풀어 있는 소년과 리모 박사님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야 말로 파일럿을 위한다면 해선 안 될 일이다, 이다, 이다.”
제로는 말문이 막혔다.
“오오, 과연 더블유.”
“제로. 침묵.”
“굉장하다, 선비 파워.”
또봇들이 감탄했다.
“찍.”
리모가 제로에게 손짓했다.
“찍. 찍찍.”
“반문. 정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제로가 기쁜 태도로 물러났다. 인간들은 전부 리모를 쳐다보았다.
“해명. 이번엔 따라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제로가 들뜬 음색으로 말했다.
“요청. 와이, 같이 가주었으면 합니다.”
“어? 왜? 아니, 가기 싫다는 게 아니고, 물론 나도 아주 많이 같이 가고 싶은데, 왜 날 고른 거야?”
“이유. 와이에게 에어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파이더 웹으로도 추락 방지는 할 수 있다 그러더라구.”
제트가 나섰다.
“그럼 제트도 같이 가주기 바랍니다.”
“사고란 어떤 상황에서 생길지 모르는 것임. 구조라면 힘센 또봇이 필요한 경우도 많음.”
엑스도 질 수 없었다.
“잠깐만, 모두!”
오공이 소리쳤다.
“더블유는 아주 안전하고 사고 같은 거 안 나, 그러니 추락을 전제로 얘기하는 건 그만둬!”
또봇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그럼, 더블유는 사고 안 나니까 꼭 사고 수습에 도움이 안 되어도 따라가도 되는 거지?”
딩요가 손을 들었다.
차로 돌아온 혜라는 핸들 위에 푹 쓰러졌다.
“괜찮은가, 오순경.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이상 칙.”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러면서도 혜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경찰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아 정말 내가 경찰만 아니었어도 그 아저씨를 확!”
“오순경은 또봇 파일럿이기도 하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또봇의 파일럿은 경찰이 아니어도 사람을 패면 안 된다. 이상 칙.”
“누가 팬대. 그냥....... 하아...........”
그가 그대로 핸들에 머리를 쿵 찧었다.
“힘들다......”
“그러지 말고 이걸 봐라, 오순경.”
씨가 내비게이션 화면에 동영상을 띄웠다.
“올라온 지 두 시간도 안 된 최신 영상이다. 리모 박사님이 여러 형태의 햄스터 터널을 달리는 걸 보며 마음을 정화하길 바란다. 이상 칙.”
“새 거 올라왔어? 햄스터 터널?”
혜라가 고개를 들었다. 딩요는 리모가 터널을 달리는 모습에 더해 고구마를 달라고 손을 뻗은 것까지 빼놓지 않고 촬영했다. 말린 군고구마를 갉갉하는 햄스터를 보며 혜라의 표정이 풀어졌다.
“고구마 먹고 싶다....”
“감상은 그쪽인가, 오순경!”
“귀엽다아아...는 너무 많이 한다고 네가 면박줬잖아.”
“나는 면박을 준 게 아니고...... 어른으로서 품위를 좀 지키라는 뜻이었다! 이상 칙!”
“응, 그래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며 혜라는 계속 동영상을 보았다.
“햄스터는 왜 이리 귀여운 걸까. 털도 그렇고 몸매도.... 아 인간도 통통한 게 예쁜 거면 좀 좋아.”
“순수하게 영상을 즐길 마음은 없는 건가. 이상 칙.”
“네 말대로 난 어른이라서 순수함 같은 건 없.....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음.”
화면 안에서 리모가 터널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아, 리모 박사님은 인간일 땐 그렇게 까칠하고 무서웠는데 왜 햄스터가 되니까 저렇게 귀여운 걸까. 막 표정도 웃는 얼굴이고.”
“햄스터는 원래 저렇게 생겼다. 이상 칙.”
“그래, 리모 박사님만 귀엽다고 해서 삐졌구나?”
오순경이 대시보드를 토닥였다.
“무, 무슨 소린가 오순경, 나는 귀여움 받고 싶다는 말 한 적이 없다. 이상 칙!”
“응, 그래. 귀엽지 않아. 이 삐돌이.”
오순경이 끝난 동영상을 껐다.
“그래, 어쨌든 정신력 충전했으니 이제 다시 일을 하러 가볼까.”
“오해하지 마라, 오순경. 내 말은.”
“그래 알았다니까.... 어, 더블유다.”
“말을 돌리지 말고.... 더블유?”
정말로 저 하늘에 더블유가 날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켜 보니 다른 또봇들도 전부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뭐 사건 났나? 나한테는 연락 없었는데.”
“아, 저건 출동이 아니라 대도시 일주를 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상 칙.”
“대도시 일주?”
“뭔가 애들끼리 만들기 대회를 해서 승리한 오공이 리모 박사님과 드라이브를 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 같다. 이상 칙.”
“우와, 우린 쏙 빼놓고. 나도 리모 박사님 쥐고 쓰다듬고 싶은데.”
“어차피 오순경 솜씨로는 우승은 못했을 것이다. 아쉬워하지 마라, 이상 칙.”
“위로든 놀림이든 하나만 해.”
혜라가 투덜거렸다.
“자, 일이나 하자. 일.”
그 날 또봇 정비 담당은 리모였다. 거의 제로가 점검하고 리모는 뭔가 더 손봐야 할 곳이 없나 확인하는 정도였지만 별로 출동을 나가거나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어서 그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았다. 리모가 햄스터가 된 뒤로 모든 일을 혼자 하느라 지쳐있던 도운은 기꺼이 리모의 설득에 넘어가주었다. 제로와 함께 있으니 무슨 위험한 일 같은 건 안 일어날 거라 믿고.
그래서 다들 정비 끝내고 수면 모드에 들어간 뒤 씨가 조심스럽게 리모에게 다가왔을 때 리모 옆에 있는 건 제로 뿐이었다.
“저, 리모 박사님.”
“찍?”
“그게.... 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이상 칙.”
“찍?”
“그, 사소하고 개인적인... 부탁인데....”
씨가 우물거렸다. 씨답지 않은 태도에 리모와 제로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설명. 마음은 알겠지만, 또봇 C는 경찰차이기 때문에 외관을 많이 변형할 수 없어 업그레이드를 한다 해도...”
“아니, 업그레이드 요청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상 칙.”
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어 언제 오순경이 박사님을 쓰다듬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상 칙.”
리모가 펄쩍 뛰었다.
“찍?!”
“그렇게 이상한 요청입니까...”
“찍.....”
리모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 어째서 안 되는 겁니까, 오순경도 또봇 파일럿이고 박사님께 무례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박사님을 들고 있다 떨어뜨리거나 넘어질 게 걱정이라면 꼼짝 말고 의자에라도 앉아있게 하면 됩니다. 이상 칙.”
“찍...”
리모가 난처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지적. 리모 박사님, 혹시 부끄러워하시는 겁니까?”
제로가 말했다. 리모가 움찔했다.
“예? 하지만 지금까지 리모 박사님은 도운 박사님이나 애들 손에 쥐어지거나 쓰다듬어지거나 많이 하셨지만 별로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상 칙.”
“찍!”
리모가 돌아앉았다. 두 또봇은 잠시 침묵했다.
“...저, 분명 딩요도 여자입니다만.....”
“찍.”
“그런, 문제라면, 오순경도 그리 어른스럽거나 하지 않습니다. 늘 군것질 생각이나 하고 연애에 관심 갖는 것도 뜬구름 잡기 수준이라 그냥 발육이 좋은 초등학교 고학년 애 정도로 생각하시면.”
“충고. 파일럿을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알지만 그 과정에 파일럿을 마구 깎아내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파일럿을 위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합니다.”
제로가, 파일럿을 ‘적당히’ 위하라고 충고했다.
“아니 난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아니 오순경은 분명 성숙한 여성이고 어른의 매력...은 아닌가 아니 난 그저 박사님이 부담 느끼신다기에....”
“찍.”
횡설수설하던 씨가 조용해졌다.
“찍. 찍.”
리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괜찮으시겠습니까?”
리모의 허락에 씨가 좋아하기도 전에 제로가 나서서 참견했다.
“씨가 뭐라고 말하든 오순경은 젊은 여성이 맞습니다. 의식된다면 굳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접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모가 고개를 저었다.
“찍.”
“저, 그렇게까지 막 오순경을 생각하고 위하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이상 칙!”
씨가 소리쳤다.
“찍?”
“아, 아니... 그, 그런 건 아니고.....”
“당황하던 씨는 휙 차량 형태로 바꿨다.
“오순경 데려오겠습니다! 이상 칙!”
씨가 도망갔다. 기지에는 제로와 리모만 남았다.
Chapter Text
도망간 씨의 뒷모습을 보다 리모가 피식 웃었다.
“질문. 저런 게 귀여운 겁니까? 실제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걸로 보입니다만.”
“이해. 알겠습니다.”
정말 이해한걸까 리모는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놀람 .그나저나 리모 박사님께서 여성과의 접촉을 꺼리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질문. 리모 박사님은 역시 젊은 여성이 좋으십니까?”
리모는 햄스터도 사래들릴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깨달았다.
“추측. 전혀 아무 상관도 없다면 의식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리모가 약간 부풀었다.
“지적. 하지만 리모 박사님도 27년 뒤면 늙은 남자가 되실 겁니다.”
리모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로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리모가 재빨리 앞발을 들어 막았다.
“변명. 저도 그 정도 비유는 알아듣습니다.”
리모가 정말이냐고 묻는 눈으로 제로를 쳐다보았다. 햄스터 눈이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못 느꼈겠지만 제로는 알아보았다.
“..질문. 비유에 대해 좀 더 공부하는 편이 좋을까요?”
그러고 있는데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짐작. 어른은 아직 잘 시간이 아니니 큭 ㅔ준비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격납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씨가 들어왔다.
“중요한 일이란 게 이거였어요?”
제로에게서 설명을 듣고 난 혜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 또 아주 중요한 일로 리모 박사님이 보잔다고 해서 내가 뭐 또 실수한 줄...... 괜히 놀랐잖아.”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걸 보고 씨는 당황했다.
“아니, 난 분명히 오순경이 잘못한 거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을 했다. 이상 칙.”
“하지만 꼭 내가 일부러 잘못을 하지 않아도 실수하거나 착각하거나 심지어 우연의 일치로 혼나는 일 정도는 많이 있었는걸.”
“찍.”
“통역. ‘우연의 일치 정도로 혼내거나 하지 않습니다, 저도 도운도.’ 라고 하십니다.”
“네, 그거야 그렇죠. 그래서 정말 쓰다듬어도 되나요?”
“찍.”
“통역. ‘예, 씨가 정말 간절하게 부탁해서요.’라고 하십니다.
“저, 저 그렇게까지 간절했던 건 아닙니다! 이상 칙!”
“찍.”
리모가 헤죽 웃었다.
“통역. ‘파일럿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서 원하는 대로 들어줄 수 밖에 없었어요.’라고 하십니다.”
“....씨.”
씨는 제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했다.
“나는 그냥.... 요새 업무 스트레스가 많아 보이길래, 애들과는 달리 리모 박사님을 직접 볼 시간도 없다고 불평하던 게 떠올라서.... 정말 별 뜻 없이....”
“고마워.”
씨는 로봇이고 자동차니까 붉어질 리가 없는데도 홍조가 도는 것 같은 착시가 보였다.
“그럼 쓰다듬을게요.”
혜라가 리모가 있는 책상으로 다가왔다.
“주의. 우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주십시오.”
남에겐 뭐라고 충고해도 자기 파일럿이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전력을 다해 막는 게 제로의 행동원칙이었다. 제로가 왜 그러는지 모르는 혜라는 순순히 의자에 앉아 리모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모가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꺄아......”
그래도 햄스터는 쉽게 놀라니까 큰 소리 내면 안 된다는 건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쩜 어쩜 어쩜 이렇게 부드럽고.....”
혜라가 조심스럽게 다른 손으로 리모를 덮듯이 하고 살살 쓰다듬었다.
“털 진짜 부드러워... 따뜻해....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열심히 쓰다듬으면 된다. 이상 칙.”
“이건 그냥 감탄사거든? 정말 뭘 어떻게 한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며 혜라는 리모를 연신 쓰다듬었다.
“아, 정말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하고....... 진짜 치유된다.......”
혜라가 에헤헤 하고 웃었다. 씨가 그 모습을 슬쩍 훔쳐보는 걸 제로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리모도 오순경이 쓰다듬게 해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찍.”
“통역. ‘참, 이거 네옹에게는 비밀입니다.’라고 하십니다.”
“네옹이요? 왜요?”
“찍.”
“통역. ‘그야 네옹하고 알이 싸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라고 하십니다.”
“아.”
혜라가 씨를 쳐다보았다.
“알보다 낫네.”
“무, 무슨 소린가, 오순경, 나는 원래 알보다 낫다. 이상 칙.”
“그래그래.”
오순경이 환하게 웃었다.
“내 또봇이 제일 좋고말고.”
다음날 아침 세모는 몹시 긴장해서 아침 일찍부터 학교 갈 준비를 꼼꼼히 했다.
진작 반대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무슨 핑계라도 대고서 아빠와 학교에 갈 수는 없다고 해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해봤다.
“찍.”
반면에 아빠는 이게 몹시 즐겁고 심지어 기대되는 일인 것 같았다. 그가 쳇바퀴 일체형 햄스터 놀이터 겸 이동장에 먹을 갖다 쌓고 깔짚이 충분히 푹신한지 밟아보았다. 특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모습이 너무 신나보여서, 역시 조금쯤은 햄스터에 동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조금 들었다.
‘설마 정말로 햄스터 친구를 만나고 싶은 건 아닐텐데, 아니면 누굴 괴롭히는 게 그렇게 기대되는 건가.’
그건 아닐 거라고, 아빠는 이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마음은 역시 좀 불안했다. 일이 계획대로 잘 흘러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가방을 다 싸고 혹시 빼먹은 건 없는지 세번씩 확인한 세모는 결연한 태도로 책가방을 메었다.
“가요, 아빠.”
“찍.”
리모가 이동장 안에 들어갔다. 세모가 문을 잘 잠그고 집어 들었다.
학교에 간다고 해도 리모를 교실 안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리모는 이동장째 제트에 놔두고 쉬는 시간이든 방과 후든 만나게 될 때만 들고 온다는 계획이었다.
‘괜찮겠지? 제트는 보통 차도 아니고, 혹시 누가 공격한대도 방어나 도주할 수 있고, 나한테 연락할 수도 있고.’
학교 가는 동안 세모는 이동장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기왕이면 아빠를 꺼내서 손에 쥐고 싶지만 그랬다간 다시 이동장에 넣어 잠그지 못할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어가고싶어...’
“저, 세모?”
제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학교에 다 왔다고 그러더라구.”
“어.”
세모가 밖을 보았다. 정말로 학교였다.
“벌써? 어떻게?”
제트를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이보다 훨씬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체감으로 몇 분 지나지 않았어도 시간이 이른 건 아니었다. 세모는 리모를 의자에 놔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제트에서 내렸다.
“아빠 잘 부탁해.”
“걱정 말라 그러더라구. 안전도 물론이고 온도 조절까지 완벽하게 할 거라 그러더라구.”
“응.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연락하고. 수업시간 중이어도 상관없으니까.”
“당연하다 그러더라구.”
아빠 놔두고 가기가 싫어서인지 세모는 선생님 오시기 직전에야 교실에 들어갔다. 세영이가 세모에게 마구 손을 흔들었다. 햄스터를 데려오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세모는 모호하게만 웃어주었다.
‘세영이네 부모님은 뭐 하는 거야, 햄스터를 함부로 학교에 갖고 오게 놔두다니. 학교에서 놓치기라도 했다간 큰일 나는데.’
열 살이 아니라 열 살의 부모 같은 생각을 하며 세모는 자리에 앉았다. 곧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세영도 와서 무슨 말을 하지는 못했다.
창밖은 화창했다. 세모는 오늘 학교 끝나고 이대로 아빠랑 소풍을 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평소엔 아빠가 신나서 도시락 싸는 게 무서워 놀러가잔 말 쉽게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햄스터니까 도시락을 쌀 수 없고 그러니 사가도 된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세모가 꿈에 부풀어 있는 동안 1교시가 끝났다. 세영이 세모에게 달려왔다.
“공주 데려왔어.”
“어, 나도.”
“잘됐다. 어디 있어?”
세모는 조금 망설였다.
“밖에. 넌?”
“가방에.”
“도망 안 가?”
“지퍼 잠가뒀으니 괜찮아.”
정말 그걸로 충분할까 걱정이 들었지만 세모는 말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은 짧으니까 이따 다 끝나고 만나게 시키자.”
혹시 지금 가져올까봐 세모가 먼저 못을 박았다.
“그래.”
세영은 별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걔네 햄스터는 가방 바닥에 쭈그리고 있는 걸까 생각하다 세모는 아빠는 어쩌고 계실까 궁금해졌다. 그가 슬며시 밖으로 나가 또키를 켰다.
“제트, 아빠는 어떠셔?”
-주무신다 그러더라구.
제트가 뒷좌석 카메라를 최대한 당겼다. 투명한 케이지 안에 리모가 보였다.
머리는 쳇바퀴 위에 괴고, 몸은 밖에 쭉 늘어나 머리로 걸려있다시피 한 리모를 보고 세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기엔 이상해도 불편하신 건 아니라 그러더라구. 숨소리도 고르고 몸 아래엔 깔짚이 받치고 있다 그러더라구.
리모와 세모의 상호 과보호 성향을 잘 아는 제트는 세모가 뛰어나오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정 걱정되면 내가 살짝 깨워서 자세를 고치시게 할 수도 있다 그러더라구.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세모가 진정했다.
“불편하신 거 아니면 됐어. 그냥......”
세모는 푹 퍼진 털방석 같은 리모를 바라보았다.
“햄스터도 유연성 높구나.”
쓰다듬고 싶었다. 저 말랑말랑한 몸을 쥐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귀에 대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저, 세모? 수업종소리 같은 게 들린다 그러더라구.
“어.”
제트가 지적하자 세모에게도 소리가 들렸다. 세모는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중에 또키 켜 놓으면 안된다 그러더라구.
제트가 연락을 차단해버렸다. 세모는 억울했다. 별로 수업중에도 아빠만 쳐다보느라 공부 안 하거나 그러려는 게 아닌데, 그저 아빠는 잘 계시나 저러고 자다가 목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가끔 확인하려는 것 뿐인데.
그래서 세모는 다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뛰어나가 또키를 켰다.
제트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리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당연히 아빠가 아까 그대로거나 거기서 머리만 내려놓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던 세모는 리모가 케이지 한중간에 사지를 대자로 뻗고 누워있자 대경실색했다.
-괜찮다 그러더라구. 리모박사님 멀쩡하시다 그러더라구.
제트가 서둘러 세모를 안심시켰다.
“그.... 그치만, 저, 괜찮은 거야? 햄스터는, 동물은, 그러니까 배를 감싼다던가 뭐 그런 거.”
고개가 뒤로 젖혀져서 벌어진 입 안으로 앞니가 보였다. 코고는 소리가 자동음성지원될 것 가은 자세였지만 코끝이 분홍색으로 움찔거리는데다 하얀 배 부분 털은 등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이 햄스터는 세모의 아빠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세모 눈에는 전부 귀엽게만 보였다.
‘빨랑 집에 가서 아빠랑 놀고 싶다. 왜 사람은 학교에 다녀야 하는 거지?’
-더우신 것 같아 온도를 내렸는데, 또 저 자세라면 너무 시원하게 해도 곤란하지 않을까 걱정이라 그러더라구.
“어, 괜찮지 않을까? 덥다고 자면서 저기까지 굴러갈 수 있으면 쌀쌀하면 다시 알아서 배를 덮으시겠지.”
-알았다 그러더라구. 이제 곧 수업 또 시작하니까 세모는 들어가라 그러더라구.
“또 벌써?”
세모는 놀라서 시계를 보았다. 쉬는 시간이란 원래 짧은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짧은 건 좀 이상했다. 하지만 시계가 고장난 것도 아니었다.
“...아빠 잘 부탁해.”
-당연한 소리를 한다 그러더라구.
교실에 앉아 세모는 햄스터의 잠버릇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일 때 아빠는 분명 저렇게 격렬하게 굴러다시지 않았다. 햄스터가 되어서도 보통은 둥지 안에서 몸을 말고 잤다.
‘아니었나? 같이 잤을 때 깨 보니까 옆에 와 있던 거 일부러 온 게 아니라 굴러왔던 거였나?’
리모가 밤새 책상 위를 엎치락 뒤치락 굴러다니다 새벽에 다시 둥지로 굴러들어가 밤새 거기서 잔 척 시치미 떼는 상상을 하며 세모는 수업시간을 알차고 쓸데없이 보냈다.

엘리 (Guest) on Chapter 7 Sat 28 Mar 2015 01:29PM 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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