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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잭은 나른한 여운에 젖어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그가 그 날 그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그들이 그대로 거리를 유지했더라면. 그리고 마치 그의 상념을 방해하듯 하얗고 보드라운 손길이 시트 아래로 그의 가슴팍을 더듬어왔다.
"잭, 무슨 생각해요?"
그는 등을 감싸오는 부드러운 손길에 모든 생각을 멈추었다. 몸을 돌리자 프라이니 피셔의 그윽한 눈길이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주 미소지었지만 의도한만큼 편안한 웃음은 아니었다.
"슬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프라이니. 내일은 일찍 나가봐야 해서요."
프라이니는 진심을 듬뿍 담아 아쉬워하며 앓는 소리를 냈지만 그를 붙잡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고작해야 자정을 넘은 시간이라 아직 남은 밤이 길었지만, 아침까지 머무를 게 아닌 한 빨리 떠나는 게 낫다는 걸 그녀도알고 있었다. 잭 로빈슨은 여성의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프라이니 피셔 역시 아침까지 침대에 남자를 남겨두는 타입이 아니었으니.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패턴이었다. 언제나 사건을 몰고 다니는 사립탐정 프라이니 피셔가 현장에서 잭 로빈슨을 마주치는 일은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잦았고, 현장에서 시시덕거리며 주고 받는 사이에 은근한 눈빛이 오가고 나면 일을 마친 잭 로빈슨이 밤중에 프라이니의 저택을 찾았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응접실로 안내하는 집사를 따라 준비된 술을 한두 잔 정도 주고 받다보면 끈적해진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탐하며 침실로 향하고 마는 것이다.
객관성과 냉철함을 가지고 수사에 임해야 하는 경찰이 언제나 사건현장에서 수사를 '방해'하는 민간인 여성과 불건전한 육체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단순히 그의 평판뿐 아니라 경력 자체가 위태로워질 게 분명했기에 둘의 관계는 은밀하게 감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업무 중에 그녀가 잭에게 던지는 유혹적인 농담이나 은유 따위를 두고도 둘 사이를 의심할 사람은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잭 뿐만 아니라 마주치는 모든 매력적인 남성들에게 그런 태도를 취했기에.
처음에 잭을 괴롭힌 건 별거중인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물론 굳이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로지 또한 최근 어떤 신사와 유달리 자주 함께 다닌다는 이야기를 건너건너 들었다지만, 잭 로빈슨의 고지식한 도덕성에 있어 이러한 혼외관계는 어딘지 껄끄러운 구석이 있었다. 자유분방한 프라이니의 태도가 그 부담을 덜어주기는 했지만. 알 거 다 아는 성인 남녀 두 사람 사이의 사생활에 거리낄 게 뭐 있냐는 그녀의 호탕함은 유혹에 넘어가는 그의 무기력한 자제심을 합리화 해줬고, 그렇게 한 번으로 끝날 것 같던 밀회가 두 번, 세 번, 점차 길게 이어질수록 그의 고삐도 느슨해졌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잭 로빈슨은 그들의 관계가 순전히 육욕적인 것이라고, 그저 한순간의 불장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라이니 피셔는 누구라도 인정할만큼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앤드류스 저택에서의 첫만남에서부터 느껴진 강렬한 끌림은 그저 남성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일 뿐이라고, 몇 번 몸을 섞고 나면 금세 시들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적어도 프라이니 피셔가 그에게 가진 흥미는 딱 그 정도라는 걸, 그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저 그가 그럴 수 없었을 뿐이었다.
프라이니 피셔의 침대를 거쳐간 남자가 멜버른에 그 뿐인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주기적으로 그녀의 저택을 오가는 와중에도 그는 사건 현장에서 프라이니와 시선을 주고 받는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그가 누웠던 바로 그 침대에서 그녀와 밤을 보냈으리라. 그가 방문하지 않은 날에.
그에겐 간섭할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그럴만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는 굳이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타는 갈망이 그를 괴롭게 했다. 저 미소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그를 좀 더 특별하게 봐주기만 한다면.
가져서는 안되는 마음이었다. 프라이니 피셔는 결코 누군가에게 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사랑한 남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순간적인 쾌락을 따라, 짧은 유희를 즐기고 헤어지는 데 납득했다. 그저 잭 로빈슨, 어리석은 자신만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며 번민하는 것이다.
텅 빈 도로를 달려 차를 몰아 돌아온 잭은 어두운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서며 씁쓸한 자조를 떨쳐내려 노력했다. 전부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은 하릴없이 무의미한 가정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밤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좀 더 서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가까워졌다면, 그녀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한 명의 동등한 파트너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면. 그럼 두 사람의 관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그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눈으로 보고, 좀 더 다른 방식으로 가까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