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테슬러가 플루토를 깨워서 열차에 태우고 다니게 되었다.
괴상한 무기들이 다 제거된 플루토는 정말로 열차의 누구보다도 연약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말썽부리는 일 없이 얌전히 굴었다. 테슬러가 하는 말도 잘 따랐다.
코일은 테슬러만큼 속 편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 녀석을 동료로 여겨도 되는 건지, 아니면 그저 테슬러를 해칠 방법이 사라져서 참고 있을 뿐인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사실은 플루토가 지금 적인 공국의 후계자가 될 녀석이었다니.
테슬러는 그 때문에 플루토를 의심할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무르게 굴다가 또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총통의 몫까지 경계하는 것도 대위인 자신의 임무였다.
그래서 코일은 플루토의 일상을 꾸준히 감시했다.
이제 겨우 일상생활에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 플루토는 감시할 만한 수상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의료실에서 진찰받을 때나 식사 때를 빼면 거의 열차의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코일은 그의 방을 뒤지기로 했다.
새 ‘대원’을 위해 이것저것 갖춰주고 열차 전체 보급도 하느라 테슬러는 요 며칠 열차를 세우고 많은 물품을 반입하거나 버렸다. 열차의 보안도 그만큼 취약해졌으니 결코 자신이 유난을 떠는 게 아니었다.
플루토가 방을 가장 오래 비우는 시간은 의료실에서 테슬러에게 진찰받을 때였다. 이제까지 코일은 거기에 따라가서 감시했지만 이번엔 패러데이에게 부탁하고 자신은 플루토의 방으로 갔다.
방은 아직 생활감 없이 스산했다. 옷장에는 급히 사놓은 옷 몇 벌뿐이고 책상 위엔 휴게실에서 빌려온 잡지 한 권과 테슬러가 선물한 다이어리뿐이었다.
어차피 전부 테슬러가 열차 예산으로 사주는 것들인데 저 다이어리만은 따로 선물이라고 말하며 직접 건네주었던 게 떠올랐다. 받을 때 플루토는 손을 떨다가 그대로 놓칠 뻔했고.
‘그러고 보니 요새는 그렇게 손 떠는 건 못 봤네. 악력이 좀 회복된 건가?’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손 많이 가는 환자 신세여도 곤란하니 건강은 되찾아야 했다.
물론 딴 꿍꿍이가 없을 때 얘기지만.
다이어리는 평범한 가죽끈으로 매어 놓았고 잠금장치 같은 건 없었다. 손쉽게 풀어서 펼칠 수 있었다.
새것이라 아직 빳빳한 다이어리는 속지도 깨끗했다. 첫 장에 ‘플루토’라는 이름과 다이어리를 받은 날짜가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바로 뒷부분 몇 장이 뜯겨져 나간 흔적이 눈에 띄었다.
끝까지 훑어봐도 더 이상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다이어리를 덮고 코일은 휴지통을 뒤졌다. 뭔가 있다면 뜯어서 버린 쪽에 있는 게 분명했다.
역시나 구겨 버린 종이쪽 몇 장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펼쳐보니 펜으로 마구 갈겨 쓰고 다시 죽죽 그어서 지운 여러 줄의 문장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이게 뭐야?’
잉크가 지저분하게 번져 읽기 힘든 글씨는, 내용도 코일의 이해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테슬러는 요리사와 설거지 당번을 내쫓고 주방을 차지했다.
“전쟁으로 어수선해져 있어도 초콜렛은 살 수 있다니 여기도 원래 번화한 도시였나봐.”
초콜렛을 녹이고 있는 커다란 냄비 곁에는 각종 견과류와 설탕에 절여서 말린 과일 조각들이 볼에 담겨 있었다. 전부 테슬러가 직접 손질한 것들이었다.
“초콜렛, 초콜렛, 내가 좋아하는 초콜렛~ 코일도 좋아하는 초콜렛~”
설탕통을 들고 흐뭇하게 웃던 테슬러가, 여전히 냄비에 집중한 것 같은 얼굴로 돌연 콧노래를 그쳤다.
“그래서. 플루토의 방에서는 뭔가 수상한 걸 발견했나, 대위?”
곁에서 같이 초콜렛 향에 취해가던 코일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
“어제까지 너 내가 플루토랑 있으면 절대 안 떨어지고 감시했잖아.”
설탕을 냄비에 푹푹 퍼넣으며 테슬러가 대꾸했다.
“아무리 패러데이가 믿음직해도 감시 일을 맡겨놓고 직접 따로 할 일이라면 뻔하지. 디스티 때처럼 또 직접 방에 가서 뒤진 거지?”
“내가 그렇게 안 뒤졌으면 그놈 끝까지 네 눈을 제멋대로 숨겨놨을 거야. 과거 이야기도 안 하고.”
코일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리고 플루토가 자기 아버지랑 내통한 증거는 못 찾았지만 대신 좀 이상한 걸 봤어.”
“그래? 뭔데?”
여전히 테슬러는 초콜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 무방비한 모습에 심통이 난 코일은 망설임을 버리고 자기가 읽은 것을 들려주기로 했다.
“막 쓰다가 막 지운 거라 제대로 읽었나 모르겠는데, 뭔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 말을 잔뜩 적어놨더라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응. 암호문이라기엔 좀 이상하고 그렇다고 그냥 일기 쓴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연결 안 되는 문장들이었어.”
“뭐라고 써놨는데? 그냥 기억나는 대로 말해봐.”
“뭐였더라......‘천사같이 아름답고 악마같이 잔혹한 그대에게’, ‘그대의 다정한 손길이 차갑게도 나를 어루만지네’ ‘이토록 따스한데 나는 그 속에서 얼어붙어가고......’, 얘 눈 속에서 조난당한 적도 있는 거야?”
“에이, 난 또 뭐라고.”
테슬러가 말린 과일 하나를 집어 초콜렛에 담갔다.
“암호문이나 이상한 말 같은 게 아니고 그냥 시야. 걔 옛날엔 시를 썼거든.”
“시?”
“응. 원래는 군대도 싸움도 싫어하고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어. 다시 써보기로 한 모양이네.”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코일은 눈만 깜박거렸다.
“누군가 예쁘고 성질 더러운 사람한테 쓰는 편지 같기도 했는데......성질 더러운 건지 착한 건지 헷갈리게 적어놓기는 했지만.”
“시 중에 그런 거 있어.”
테슬러는 과일과 견과에 둥글게 초콜렛 입히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황궁에 있을 때 문학도 배웠거든. 공학만큼 재미있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때 배운 시 중에도 ‘님’을 향한 연애편지처럼 읽히는 게 있었는데 그 시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대. ‘님’은 그가 추구하던 종교적 열정과 목표 같은 걸로 해석한다더라고. 그 외에도 현실의 연인이나 친구인 것처럼 은유했지만 시인의 실제 인생과는 아무 상관 없는 시 많이 있었어.”
“......시라는 거 어렵네.”
“그러게. 잘 써내면 그것도 나름 대단할 거야. 자, 그보다 아~”
테슬러가 굳어가는 트러플 초콜렛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그러자 코일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말린 자두 조각이 들어간 달콤한 초콜렛이 그 입에 쏙 들어갔다.
“맛있어!”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아기새처럼 오물거리며 코일이 웃는 걸 보고 테슬러도 흐뭇하게 웃었다.
“이대로 다 굳으면 완성이야. 내일 아침 대원들한테 하나씩 쫙 돌려야지. 남은 건 전부 내 차지~”
개수가 넉넉한 것을 확인하고 테슬러가 하나 더 집어 자기 입에 넣었다. 굳어가는 도중이라 쉽게 물러지는 달콤한 덩어리 사이로 말린 체리가 새콤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난 정말 발렌타인 데이가 좋아.”
혀끝으로 체리를 굴리며 테슬러가 중얼거렸다.
“어느 가게를 가도 초콜렛이 쌓여있고, 당일 지나면 떨이로 파는 걸 잔뜩 사다가 이렇게 내 맘대로 만들 수도 있고.”
“응. 나도 좋아.”
코일도 나란히 웃었다.
“파는 초콜렛도 좋지만 테슬러가 만든 게 제일 맛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