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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땅이라 해도 식물은 살았다. 잘 찾아보면 화톳불 두엇을 만들 정도 마른 가지쯤은 세계의 근원에서도 주울 수 있었다. 다행하게도.
유니버스의 단말인 뮤가 지쳐 잠들었기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이곳을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아발론의 기사들이 내려올 때 보급품을 충분히 챙겨 와서 다행이었다.
특이하게도 그 보급품 중에는 술도 많은 양을 차지했다.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세상이 멸망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는데도, 이들은 축하주를 챙겨올 정도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걸까.
상당히 오랜 기간 자신감이나 확신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라플라스에겐 무척 낮선 기분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침략자들을 아무런 구속 없이 내버려 두는 것 역시. 권능을 잃어 더 이상 위협은 되지 않는다 해도, 도망쳐 이 세계 어딘가에 숨어드는 건 막아야 할 텐데.
다른 카멜롯 인원들과는 달리 먼저 항복하고 협력도 했기에 그들보단 조금쯤 떳떳하지만 그렇다고 저 승전 축하 대열에 낄 마음도 없는 라플라스는 술만 한 병 챙겨들고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그늘로 숨어들었다. 어차피 저 아발론의 군주가 카멜롯 기사들을 죽일 리도 없고, 지금 당장 그가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라플라스는 대지에 박힌 거대한 검의 옆면에 등을 기댄 채 돌이킬 길 없는 상실을 애도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엘펜하임도, 카멜롯의 로드도 사라졌으니 이제 그에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아발론의 군주는 그를 살려두겠지만 라플라스 본인이 자신이 왜 계속 살아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위험도 높은 업무에 자원했다가...'
"혼자 드시나?"
육중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술은 혼자 마시면 안 되는 거라오. 거 그런 말도 있지 않소? 혼자 마시는 술은 독이요, 함께 마시는 술은 약이다."
"그것도 다케온에 있는 말인가요?"
라플라스가 이 세계의 아슬란을 올려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저는 같이 술을 마셔줄 동료들이 없어서, 독을 마시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가 보란 듯이 술을 쭉 들이켰다.
"독이라.."
라플라스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술병을 보다 다시 한 잔 따르려 했다. 그 술병을 아슬란이 잡았다.
"내가 한 잔 따라드리지."
라플라스의 질문하는 눈빛에 그렇게 답하곤 아슬란은 그의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이게 정말로 독이 되는 것도 아니고."
"먹고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렇겠지. 하지만 마음은 다를 것 아니겠소."
아슬란이 라플라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괜찮으시오?"
라플라스가 잠시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아니오."
그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아무래도, 오랜 세월 매진해 왔던 목표가 사라졌고 돌아갈 곳조차 남지 않았으니까요. 시안이나 브랜든도, 아까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지금 심정은 말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아발론에 합류했지 않소. 돌아갈 곳은 남아 있다오."
".........."
라플라스는 말없이 텅 빈 술잔만 내려다보았다. 술을 더 따르는 대신 아슬란이 그의 기색을 살폈다.
"그, 카멜롯의 대의에 미련이 남아있는 거요?"
"미련이랄 것도 없지요. 저희가 추구했던 목표는 거짓이었고, 엡실론이 우리에게 주려던 건....."
허공을 바라보다 라플라스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고 단숨에 마셨다.
"글쎄요... 제가 늙고 지친 탓인지, 그런 모조 정원도,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그가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그렇게 되더라도 평화로운 모형정원 속에 '만들어진' 새 엘펜하임에 찾아갈 수는 없었을 테지만요. 루실리카가 저를 용서할 리 없으니."
라플라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부터 잘못 선택했던 거에요. ....그 세계가 죽을 때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술병을 빼앗기고 라플라스가 눈을 깜빡였다.
"이래서 혼자 마시면 독이 된다는 거요. 내가 같이 마셔드리리다."
그리고 아슬란은 잔에 따르지도 않고 술병을 그대로 들어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아니... 그, 한 병 밖에 없는 걸 뺏어 드시다니."
"음? 이런, 내가 다 마셔버렸군."
아슬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술이 떨어져 버렸으니 저기 술 남은 데로 옮겨가는 게 어떻겠소?"
아슬란이 화톳불이 밝은 진지 가운데를 가리켰다. 라플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그러면 내가 술을 더 가져오겠소."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라플라스가 말했다.
"가서 동료분들과 함께 축배를 드세요. 제게 더 이상 마실 술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니, 걱정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아슬란이 조금 당황했다.
"혹시.. 나와 같이 있는 게 싫으시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슬란님께는 저보다 챙겨야 할 동료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슬란이 뭐라 말하려는데 라플라스가 손을 들어 막았다.
"저도 동료라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적의 낙오병에 불과하고, 잘 봐줘야 전향자입니다. 당신이 생사를 함께해 온 진짜 아군들보다 우선시해서 챙길 만 한 자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도....."
아슬란이 곤란한 얼굴로 뒷목을 문질렀다.
"그래도, 내가 당신을 더 챙기고 싶다면 어떠시겠소."
그 말에 라플라스는 한참이나 말없이 아슬란을 올려다보았다.
"무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만, 혹시 제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으십니까?"
"....음?"
"그렇다면 어울려드리겠지만, 그저 동정이라면 어서 가주시기 바랍니다. 도망치거나, 진짜로 독을 먹는 일은 없을테니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요."
막 격렬히 부정하려던 아슬란이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동정은 아니오. 도망치거나 그런 걸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방금은 아니라고 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개인적인 관심이 맞는 것 같소.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 눈길이 가고 혼자 내버려둘 수 없다고 느꼈다오."
"이유는 모르시겠다고요?"
"그, 원래 사람 마음이란 게 이유가 딱 있고 그런 건 아니잖소."
아슬란이 괜히 움츠러든 채 변명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알려드려야겠네요."
"알려준다고?"
라플라스가 몸을 일으키며 아슬란을 잡아끌었다. 아슬란이 허둥지둥 따라 일어났다.
"어디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지요."
"가, 가서 무엇을 할 작정이오?"
"한 번 자고 나면 모든 게 확실해지지 않겠어요?"
아슬란은 입을 딱 벌렸다.
눈치 없는 그였지만 저 잠이 그저 수면 만을 뜻하지 않으리란 것 정도는 알았다.
"어, 어째서 그런 걸? 설마 당신 나를 사... 사..."
"이 나이 쯤 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상대와 한 번 쯤 자도 별 일 안 생기는 거 알지 않나요?"
라플라스의 한심하단 눈빛을 마주하고 아슬란은 쥐구멍을 찾았다.
"그, 아니, 그야 잘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랑 말고 다른 이유라도 있을 것 아니오."
다행히 아슬란은 곧 자기는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음흉한 마음을 품고 당신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
"네, 그저 이곳의 1마탑주님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죽상을 하고 앉아있으니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마탑주님?"
아슬란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 분 얘기는 왜 나오는 거요?"
"그야. 당신이 이곳의 그분을 사모하기 때문이지요. 당신에겐 이래저래 빚진 것도 있으니, 하룻밤 대용품 쯤 되어드릴 용의가."
"아, 아, 아니 아니 아니!"
아슬란이 소리 질렀다.
"내가 그분을 사모..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대체 어디서 나온 거요?"
"당신이 그를 온후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던 말에서요."
라플라스가 설명했다.
"게다가 당신은 그 사람의 아이들을 마치 자기 아이처럼 살뜰히 돌보며 아끼고 있으니 아무래도."
"그, 오해요, 오해. 애들은 아니 난 애들을 먼저 만났다오. 내가 그 아이들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은 건 사실이나 그 결심은 라플라스님을 만나기 한참 전에 한 거고 그런 혈연... 비슷한 관계가 있는 줄도 몰랐소."
아슬란이 서둘러 변명했다.
"그분이 탄생을 인지하지 못했던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고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오만, 그걸 곧 사모한다고 간주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소. 애초에... 그분을 마음에 두었다면 당신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거요. 나 아슬란, 그렇게 함부로 대용품에 눈 돌리는 남자는 아니라오."
"...예, 그렇군요."
라플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소. 모아놓고 보니 오해할 만도 했다는 생각도 드오."
아슬란은 가볍게 넘어갔다.
"하지만... 대용품이 아니라면 어째서 제게 관심 가지신 건가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라 아슬란은 조금 머리가 아파졌다.
"그냥 그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있어 관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라플라스의 눈에 서린 혼란이 깊어졌다가, 문득 깨달음이 빛났다.
"당신을 치료한 일에 대해서라면 이미 그대들의 맹주가 값을 치렀고 나인에게 감사 인사도 받았습니다. 부담 가지실 일이 아닙니다."
아슬란이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카멜롯은, 대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거요?"
"....네?"
"그래, 대의를 위해서라며 사람들에게 마수를 풀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이 그 구성원에게라 한들 인간을 귀히 여기며 대우하지는 않았겠지. 그렇다 해도, 그대는 엘펜하임의 마탑주였으니 당신 자체로 사랑받고 귀히 여겨져 본 경험이 있을 것 아니오."
라플라스가 숨을 삼켰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슬란을 바라보다 시선을 피했다. 눈 둘 곳 없이 시선이 방황하고 손끝이 허공을 더듬었다.
명백히 평정을 잃어버린 라플라스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아슬란이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라플라스가 양손을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이어서......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알기는 알겠지만 그게...."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어째서죠?'
아슬란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라플라스가 말을 이었다.
"사람 마음이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움직이는 건 아니지요. 예.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납치해서 세뇌했고 나인과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해를 입혔습니다. 좋은 감정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잖소."
"그 논리면 갈루스의 황제도 용서받겠는데요."
그 말에 아슬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 새 기회를 주자는 데 찬성할 정도로는 용서했다오, 나는."
라플라스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너무나 상냥한 세상이로군요, 이곳은."
"기왕 정착하게 된 곳이 상냥하다면 좋은 것 아니겠소?"
아슬란이 하하 웃었다. 라플라스는 기운이 쭉 빠져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제 악행을 용서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늙고 지쳤고 너무 오랫동안 인간적인 교류를 잊고 살아왔습니다. 당신의 그런.. 진실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부응하기에는 제가."
라플라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비하하지 마시오."
아슬란이 고개를 저어 라플라스가 못 다한 말을 흩어버렸다.
"속죄하려는 마음가짐은 좋지만, 그것 만이 아니지 않소?"
카멜롯의 라샤드가 그를 비난할 때 아슬란도 그 자리에 있었음을 상기하고 라플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 그렇지요. 알량한 자기 비하 버릇으로 넘어갈 게 아니라, 제대로 행동으로 속죄를 해야겠지요."
"그러다 힘들면 내게 기대도 괜찮소."
아슬란이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라플라스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물론,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말이오."
"네."
라플라스가 작게 웃었다.
"제게 과분한 제안이란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래도... 고맙고 기쁩니다. 아직은..."
라플라스가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 아슬란의 팔뚝에 머리를 대었다.
"아니, 앞으로를 말하기는 이르군요. 그냥, 지금은, 독이 되지 않을 술이나 같이 마실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구료. 금방 가져오리다."
아슬란이 일어나 큰 화톳불 쪽으로 갔다. 라플라스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보같을 정도로 무르고 상냥한 세상이었다, 저 아슬란도 맹주 되는 아발론의 군주도.
정말 이런데서 여생을 보내도 되는 걸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걱정은 컸다. 그러나 그런 자격지심만으로 저 사람을 거절하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순 자기 욕심일 뿐이라 해도, 그래도.
'아, 나 저 사람을 욕심내고 있구나.'
그야 저렇게 다정하고 듬직한 사람에게 끌리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더라도, 라플라스는 이 무르고 다정한 세상을 위해 살고 싶어졌다.
이 결정만은 실수가 아니길 빌며 라플라스는 아슬란을 기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