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예언이랑 점술은 어떤 게 달라요?"
티타임 중 갑작스런 샬롯의 질문에 라플라스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언이나 점술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고 싶은 건가요?"
"그게, 메이링님은 신령님이 미래를 알려주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럼 라플라스님의 예언과는 뭐가 다른가 싶어서요."
질문한 건 샬롯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라플라스를 주목했다.
"아, 그런 이야기였군요. 묘족의 무녀님이라..."
라플라스가 곰곰히 생각했다.
"일단 근본 원리가 다르다, 고 해야겠군요. 앞날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한다는 결과는 같지만.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먼저 제가 보는 것은 가능성이 있는 미래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메이링님에게 보이는 것은 업. 누적되어온 과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흐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예? 하지만 오늘의 운세를 보는 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것 아닌가요?"
"과거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를 통해 미래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라플라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통계에 따른 예측이잖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솔피가 반문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라플라스가 생긋 웃자, 솔피 뿐 아니라 이 자리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쉽게 예를 들어보지요. 음, 보통 인생은 장거리 달리기에 비교하곤 하지요. 예를 들어 로드께서 숨에 턱이 차도록 달리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넘어지거나 주저앉을 거라고 예측을 할 겁니다. 그러지요?"
솔피와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과 샬롯은 표정이 오묘해졌다.
"논점에서 벗어난 건 알지만, 넘어지시기 전에 가서 잡아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미하일이 작은 목소리로 항의와 혼잣말의 중간쯤에 해당되는 말을 했다.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근처에 있던 미하일 경이 달려가서 로드를 부축한다'도 분명 가능성 있는 미래 중 하나니까요."
라플라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을 하기 위해선, 미하일 경이 로드를 지켜보고 있고 그분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리고 그런 사실은 로드와 미하일 경의 과거에 쌓아온 관계의 결과입니다. 과거를 알면 미래를 알수 있다고 말하면 쉬워 보이지만, 과거를 정말로 알고 그 중 앞날에 영향을 미칠 요소를 골라낼 수 있는 건 분명 누구나 할 수 없는 이능입니다."
"그렇군요."
가상으로라도 로드를 제 때 부축한 게 만족스러운지 미하일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비하면 제가 보는 것은 미래, 아까의 예시를 계속하자면 로드의 발치에 돌부리가 있는 것을 보고 곧 넘어지실 거라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음, 이렇게 말하면 제 예언 쪽이 더 신기하게 들릴 것 같아서 말하는데, 예언의 무거움은 메이링님 쪽이 높습니다. 사람이 지금껏 쌓아온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는 건 무척 어려우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싶어하는 건 자신이 살아온 결과를 몰라서가 아니라 갑자기 일어나는 재앙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싶어서니까, 역시 라플라스님의 능력이 더 대단해보이는데요."
샬롯이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제가 보는 미래도 확정된 미래의 한 장면을 뚝 떼어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알게 되는 것이고, 예언이라고 해도 막 아무런 맥락도 관계도 없이 갑자기 미래가 보이거나 하는 일은."
갑자기 라플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없다는 말이 나올 타이밍인데 왜 조용해요?"
솔피가 물었다.
"그게,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
라플라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드물고 특수한 경우입니다만.... 그런 예언이, '내려왔던' 적이 있습니다. 2차 마도대전 때에요."
그가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워낙 예외에 해당하는 일이라 지금 논의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평소 보는 미래와는 달리 완전한 문장의 형식으로 떠올랐습니다. 내용도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수수깨기 같은 말이었지요."
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그 예언이 무엇을 뜻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마치, 제가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가 저를 통해 전하는 말 같았지요. 누구에게 전하는 건지도 모른채.... 그때를 생각하면, 이 세계에 신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엘펜하임에선 그랑 엘베누스를 믿는줄 알았는데요."
솔피가 물었다.
"그게, 그랑 엘베누스는 관념적인 수호신이라고 해야 할지, 국가나 의례 같은데서 호명되긴 합니다만 사실 어떤 거대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우리를 돌봐주고 계시를 내리고 우리 앞날을 죄지우지한다고 실제로 믿는 엘프는 거의 없습니다. 교리도 선행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고..같이 꼭 종교가 아니라도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이고요."
"하긴 아발론도 신의 이름만 다르지 그런 내용은 비슷하죠."
샬롯이 말했다.
"네. 다른 나라들도 그렇죠. .....그 점에 대해, 프라우님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게 말해주진 않더군요."
"프라우경은 늘 그래요. 뭔가 비밀이 많아. 물어보면 그런 게 있다고만 하고... 로드하고는 잘 이야기 하면서 말이에요."
"예. 여러모로 특이한 분이지요."
"전에 프라우 경은 원래 1마탑주 후계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미하일이 물었다.
"그렇게 특이한 분을 후계자로 삼으셨던 것도 혹시 예언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러게요. 후계 같이 중요한 일이면 미래를 보고 결정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요."
샬롯도 맞장구쳤다.
"늘 그런 건 아닙니다만 프라우님의 경우엔 예언의 영향이 있었던 게 맞습니다."
라플라스가 인정했다.
"그렇지만 지금 프라우 경은 아발론의 기사가 되어버렸잖아요."
솔피가 지적했다.
"예언이 빗나간 건가요?"
라플라스는 대답 없이 모호한 웃음만 지었다.
"아, 혹시 이렇게 타국에서 경험을 쌓아서, 나이가 들면 엘펜하임으로 돌아가 더 훌륭한 마탑주가 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미래인가요?"
린이 물었다.
"죄송하지만 프라우님에 대한 예언을 다른 분들께 말씀드릴 수는 없답니다. 아직 본인한테도 말 안 한걸요."
"어, 왠지 그거 아닐 것 같아.."
샬롯이 린에게 소근거렸다.
"그치만 프라우경이 마탑주가 안 될 거면 후계자로 삼지도 않으셨을 거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제 예언은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랍니다. 그러니 프라우경에게 말을 옮기지 말아주세요."
라플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미래란 모호한 것이라, 어떤 식으로 도달하게 될지 닥치기 전에는 알기 어려운 점도 많고요. 그래도 이 경우엔 이게 옳은 길이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리고 라플라스는 예언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다물자 대화의 주제는 차차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는 지금까지 프라우 레망과 관련한 예언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게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라플라스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가 본 프라우의 미래는, 세상의 끝이었다.
이 세상이 완전한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프라우는 환하게 웃으며 라플라스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제 끝이라고. 지금까지 이 세계를 사랑해주어 감사하다고.
그러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처음에 라플라스는 프라우가 종말의 하수인일 가능성을 생각했다. 레네치카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홀리고 이 세상을 파멸로 인도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까이 두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면밀히 살펴보아도 프라우는 다소 엉뚱하고 고대 문물에 관심이 많은 것 말고는 멀쩡한 엘프였다.
레네치카도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진 멀쩡하고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그걸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그의 도덕성과 판단 기준을 시험했고, 빠진 머리카락을 가져다 몰래 여러가지로 검사해보기까지 했다.
라플라스가 파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프라우는 정상적인 엘프가 맞았다. 그렇게 위장한 무언가가 아니라. 개성이 강하고, 출처 모를 기묘한 지식을 알고 있고, 이상한 점은 많았지만 적어도 그의 기원은 완전히 평범했고, 그래서 완전히 기이했다.
결국 라플라스는 프라우가 재앙의 종복인 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그가 늙기도 전에 세상이 멸망하고 프라우가 거기 관여할 것이 분명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마침맞게 그때쯤 해서 프라우가 다음 대 1마탑주 후보라는 소문이 퍼졌다. 라플라스가 가까이 두고 가르치고 여러 일을 두루 맡기며 직접 챙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라플라스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그의 현란한 개성과 장난스런 태도 뒤의 프라우는 어딘지 공허해 보였다. 그걸 채워줄 수는 없을까. 세상의 끝이 도래해올 때, 후련한 듯 웃으며 맞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말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자리는 사람을 만든다. 프라우 레망이 1 마탑주가 되어, 그 책임감 때문에라도 멸망에 맞선다면 어떨까. 다행히 프라우에게는 능력이 있었고, 그 소문에 대해 떠봤을 때도 싫거나 귀찮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라플라스는 그 소문을 거의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멸망의 예언을 비껴갈 수 있다면 마탑주 자리 같은 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으므로. 프라우가 엘펜하임에 책임감과 애착을 갖는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리고 프라우는 아발론으로 떠났다. 자기는 평생 로드를 기다려왔다 말하며.
괜찮을 거다. 로드는 세상을 지키려 하는 자니까.
그 미래가 아직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프라우가 세상을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라플라스에겐 그걸로 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