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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의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 본 남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미노기 소류씨, 당신에게 질문, 아니 확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나루호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 왔나?”
“네?”
“기왕 나를 찾아올 거라면, 마요이를 대동하고 와 주었어도 좋았을텐데.”
“당신 좋을 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루호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마요이에게 들려줄 수 없는 것이고요.”
“이제 와서 무슨 얘기지?”
카미노기는 진심으로 의아해보였다.
“이미 밝혀진 진실보다 그 애에게 더 가혹한 이야기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데, 있더군요.”
나루호도가 카미노기를 노려보았다.
“아야사토 마이코가 죽지 않고 암살사건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가능성.”
“그게 무슨 소리지?”
“이번 사건, 근본적으로 이상합니다. 재판 당시에는 저도 진상을 밝히는 데 급급해서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데, 계획 단계부터 이상해요. 당신은 대체 왜 이런 난해하고 실패 가능성 높은 살인을 해야 했던 겁니까?”
“키미코의 계획을 알았을 때 자네에게 미리 상담하지 않은 건 실책이었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치히로의 하나뿐인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요. 틀립니다.”
나루호도가 말을 끊었다.
“마요이를 구하려 했다고 하기엔 수단이 너무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치히로씨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치히로씨의 어머니를 죽이다니, 그런 언어도단이 어디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마요이가 살긴 했지만 그걸로 마요이를 보호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요이의 마음까지 지키지 못한 건 내 실책 맞아. 극단적인 수단이긴 했어. 하지만 상황도 극단적이었지 않나. 마요이도 마요이지만 자칫하면 9살짜리 꼬마 여자애가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렇다고 경찰에 알릴 수도 없고.”
“그렇다 해도 살인보다는 쉬운 방법이 있었지요.”
나루호도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미는 계획서에 뜯은 자국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하미보다 먼저 그걸 손에 넣었어요. 그 시점에서 계획서를 태워버리면 끝납니다. 키미코는 형무소에 있으니 하미에게 새로운 살인 계획을 전달할 수는 없고.”
“그 여자의 집념을 과소평가하는군. 형무소의 검열이 정말로 새 살인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면회를 도청하는 노력으로 못 막을 것은 아닐 겁니다.”
“하.”
카미노기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나루호도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굳이 경찰에게 영매에 의한 살인을 납득시키지 않아도 살인을 막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그 ‘말도 안 되는 살인 계획’을 키미코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로 삼아 아이의 면회를 제한하거나 하다못해 그걸 빌미로 키미코를 협박할 수도 있었겠지. 그 계획서를 아야사토 가문에 알려서 하미의 입지를 묻어버리겠다고 하면 그 사람도 들었을 지도 몰라. 그랬으면 키미코도 죄를 더 짓지 않고 마이코씨도 죽지 않고 하미도 아야메도 이용당하지 않고 마요이는 암살 위협을 겪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런데 당신들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셋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살인 외의 방법은 생각조차 못했다는 듯이.”
“더 하기 전에, 내가 한 마디 해도 될까.”
카미노기가 말했다.
“안타깝게도 내겐 그 계획서를 태울 기회가 없었다. 그걸 펼쳐보고 도로 봉해둔 건 내가 아니라 아야사토 마이코니까.”
“잠깐!”
나루호도가 외쳤다.
“마이코씨는 쿠라인 마을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텐데, 너무 눈에 띄어요!”
“가뜩이나 남자가 적은 마을에 눈에 붉은 바이저를 단 남자가 돌아다니는 것은 눈에 안 띄고?”
카미노기가 반박했다.
“오랜 세월 암살 위협을 받아온 아야사토의 본가다. 당주만 아는 비밀통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아니 그래도.”
“심지어 그 계획서가 숨겨져 있던 곳은 키미코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영장을 들고 당당히 갔다 한들 여자 형사를 보내라는 소리를 들었을걸. 내가 계획서를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해.”
나루호도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게 몰래 드나들 방법이 있었으면 딸들이나 좀 만나러 올 것이지.....’
“그래서, 태울 기회를 놓친 것도 그런 계획을 짠 것도 마이코씨이니 본인은 죄가 없다 주장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카미노기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계획을 말리지 못한 것도 살인에 협력한 것도 결국 나고, 실행범 주제에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소릴 할 생각이었으면 여기 얌전히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안 들어올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법정에서 다 밝혀졌는데.”
“거 말꼬리 잡는 솜씨는 여전히 일품이군. 이건 꼭 증인 심문을 당하는 것 같은데. 여기는 법정도 아닌데 말이야.”
“그건..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그래도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숨겨진 진실이라. 우리가 살인 외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나루호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신들이 지키려고 했던 건, ‘아야사토 마요이’가 아니라 ‘아야사토가의 차기 당주’입니다.”
카미노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 둘이 다른가?”
“아주 다릅니다.”
고개를 젓는 나루호도는 슬퍼보였다.
“마요이는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어 자기 입지가 탄탄해지는 것보다 어머니가 돌아와주는 걸 더 기뻐했을 겁니다.”
카미노기의 기색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로 알고 있군 그래.”
“네. 마이코씨는 마요이를 지키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그 애가 물려받을 가문의 명예도 회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요이가 암살을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쿠라인류 영매도가 진짜임을, 당주인 마요이의 영력을 제대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나루호도가 말을 계속했다.
“다리가 끊어지는 계획 외의 사건이 일어나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영매가 진짜이며 불러들인 영이 살인도, 증언도, 거짓 증언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법정에서 증명되고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마이코씨의 계획이 성공한 겁니다.”
“마요이가 치나미를 영매한 채 재판장에 나타나는 건 계획에 없었어.”
“그럴 리가요. 마요이가 치나미를 영매하지 않았다면 하미가 다시 영매했을텐데, 그럴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마이코씨를 죽여서 치나미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마요이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거라고 믿지 못했다면,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다시 마요이가 하미에게 죽을 위험을 무릅쓰느니 치나미를 영매한 마이코씨를 죽이지 못해야 옳습니다. 처음부터 마이코씨를 묶어두고 치나미를 부를 수도 있었겠지요.”
카미노기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즉 당신들은 마요이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미리 암살을 예방하는 대신 도리어 죽을 곳으로 떠민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나루호도의 기색이 거칠어졌다.
“그러느라 마요이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냉굴에 갇히고 십 수 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알지도 못하는 새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어. 그런데도 그 애는 자기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몰린 하미를 위해 밝게 웃으며 견디고 있다고. 댁들은 마요이의 마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딸을 장기말로 이용한 거잖아. 키미코와 뭐가 다르냐고!”
“흠.”
카미노기의 손이 커피잔을 찾듯 허공을 헤매다 뒷목을 문질렀다.
“마이코라면 뭔가 변명할 말이 있었겠지만 나는 없어. 유죄를 인정하지.”
“그렇게 쉽게 유죄인정할 짓, 처음부터 안 하면 안 되었던 겁니까?”
나루호도가 한탄했다.
“마이코씨는 자기 가문에 책임질 일이 있으니 그렇다 칩시다. 아야메는 어머니와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속죄였겠지요. 그런데 당신의 동기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아야사토 가문의 사람도 아니잖아요? 치나미에게 원한이 있다곤 해도..”
카미노기가 나루호도의 눈을 피했다.
“...설마 정말 치나미를 죽여보고 싶.”
“그럴 리가 있겠나!”
그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게.....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긴 한데,”
카미노기는 한참 말을 골랐다.
“음, 그 내가 마요이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하고 마이코씨와 접촉했을 때, 치히로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털어놨거든. 이유 없는 접근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라서.”
“예. 그게 왜요?”
“..........치히로의 남자이니 당연히 아야사토의 일원이고 이 일에 협력할 거라는 전제를 깔고 계획을 짜더군.”
“.................”
“그, 내 사랑을 장모님에게 인정받는 기분이라 도저히 거부할 수가.”
“이의 있음!”
나루호도가 삿대질했다.
“실제론 사귀지도 못했잖아!!”
“그러니까 더 짜릿했던 거라고!”
카미노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 입장도 생각해보게. 죽었다 살아나보니 치히로는 죽고 마요이는 살인 누명을 썼는데 치히로의 복수를 하고 마요이를 구한 것도 변호사 사무실을 물려받은 것도 생판 딴 놈이고 나는 치히로의 인생에 아무 자리가 없어. 그런데 치히로의 어머니가 나를 아야사토의 일원으로 취급해줬다고. 살인이 돌이킬 수 없는 죄인 건 알지만, 치히로를 위해서 거기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계획의 위험성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군.”
“그게 당신의 사랑이라고요.”
나루호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건 틀렸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자네는 이런 사랑을 해 본 적도 없.”
“해봤습니다.”
나루호도의 말에 카미노기가 말을 멈추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던지는 게 사랑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고 믿고, 이용당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독약병을 씹어 삼키기까지 했지요.”
나루호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치히로씨입니다.”
“뭐.”
“상대방의 마음과 진의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건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던지는 사랑 같은 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바보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당시 전 그런 바보였고, 치히로씨가 그런 바보를 끝까지 믿고 변호하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우쳐주었습니다.”
치나미의 재판 기록이라면 카미노기도 외울 만큼 읽었다. 그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치히로씨가 나를 구해주고, 제대로 된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마지막에 항상 치히로씨의 도움을 받는다며 화를 냈었죠. 네, 전 아직 미숙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진정한 변호사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치히로씨의 길을 따르려고 합니다.”
나루호도가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내 사랑입니다.”
“....하.”
카미노기가 큭큭 웃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네가 내리는 벌이로군. 모든 면에서 네게 패배하는 게.”
“벌을 주러 온 건 아니었지만요.”
나루호도가 멋쩍어하며 눈을 돌렸다.
“제 사랑... 얘기까진 할 생각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리고 이걸로 이기네 지네 하는 거 의미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도 짝사랑일 뿐이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나루호도는 딴청을 부렸다.
“그래서, 정말로 날 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진상을 확인하고 내 동기도 알았으니 여기 온 목적은 이제 다 끝난 건가?”
“그게, 실은 하나 더 남았습니다.”
“여기서 더?”
카미노기는 기가 막혔다.
“그래, 말해보시지. 여기서 얼마나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지 이젠 기대가 다 되는군.”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목적으로 제안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걸.”
“에....”
나루호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카미노기의 얼굴에 경계심이 서렸다.
“그게, 전 변호사입니다.”
“그래. 그게 왜.... 설마.”
카미노기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날 변호하겠다고?”
“당신이 한 짓은 분명 계획살인이지만, 또한 마요이가 암살당하는 걸 막기 위한 행위였고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까지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의 승낙은 살인 같은 중범죄에는 해당되지 않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위법성을 조각하기에는 부족해도 형량을 깎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완전 무죄만 변호했었잖아?”
“아뇨, 살인만 무죄고 다른 여죄가 있는 경우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카르마가 아니라서 완벽한 승리에 집착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치히로씨는 제게 항상 변호사는 끝까지 포기해선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야 이 비겁한.”
“저는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치히로씨도 그랬을 거고요.”
카미노기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차피 사형당하기 전에 몸이 버티지 못할텐데 구태여.”
“기왕 죽었다 살아난 거 더 버텨봅시다.”
“......그래.”
카미노기가 고개를 들었다.
“버텨야지. 치히로를 위해서. 아니.”
그가 나루호도를 가리켰다.
“치히로의 유지를 너 같은 녀석 혼자 잇게 하려니 안심이 안 되니까.”
“드디어 다시 고도 검사다워졌네요.”
나루호도도 마주 웃었다.
“그럼, 다음엔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