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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화가 들어오는 문

Summary:

온달과 브랜든 관계를 라르곤과 일행들에게 들킵니다.

Chapter Text

 

"역시 이런 짓은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한밤중에 일행의 눈을 피해 여관을 몰래 빠져나와 찾아든 인적 없는 숲속에서, 먼저 나와 있던 브랜든이 온달에게 통보했다.

".....뭐라고?"

"너 역시 나와 하는 게 좋아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던 건 아니지 않나. 앞으론 알아서 하룻밤 상대를 구하도록 해라."

그 말만 하고 브랜든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지금 입을 딱 벌리고 굳어있는 온달이 그에게 매달릴까봐 두렵기라도 한 듯이.

"야. 이. 이...!!"

그래서 마침내 온달이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땐 브랜든은 이미 한참 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 미친놈아, 내가 먼저 말할 거였는데!"

 

 

온달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브랜든이 밤에 만나자는 신호를 보냈을 때 온달은 결심을 다졌다. 이런 관계가 더 이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나가서 오늘이야말로 저 놈에게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두자고,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핑계로 이렇게 불건전한 관계에 매달리는 건 서로에게 좋지 못하다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놈이.

먼저.

주체할 수 없는 빡침이 끓어올라 온달은 옆에 있는 나무에 주먹을 내질렀다.

쿵!

"엑? 온달님? 갑자기 가로수는 왜 때리세요?"

옆에 가던 여행자가 기겁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므로 온달은 바빠 변명을 짜냈다.

"그... 벌레가. 붙어있어서."

"벌레요?"

"나무에 벌레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여행자 옆에서 라르곤도 나란히 어리둥절했다.

"그, 벌레가 떨어져 이 녀석에게 붙으면 안 되니까."

"온달님이 방금 주먹으로 쳐서 떨어진 벌레가 더 많을 걸요."

자기 말을 증명하듯 라르곤이 여행자 머리 위로 떨어진 벌레며 나뭇잎을 털어주었다. 할 말이 없어진 온달은 그냥 고개를 돌리고 바삐 걸어갔다.

"하... 젠장."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역시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자기도 그만 하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말을 꺼내는 게 아주 조금 늦은 죄로 마치 자기가 저놈에게 차인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게.

'그렇다고 저놈을 또 따로 불러내서 나도 그만두자는 말 하러 나간 거라고 말해 봐야, 지기 싫어 치졸한 소리나 하는 놈으로 여겨질 뿐이란 말이지.'

온달이 생각하기에도 변명의 여지없이 그거였으므로 말로 해명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해명할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다 그만두고자 했으니 아무 말썽 없이 원만히 잘 끝냈다고 안도해 마땅한 일이다. 그저 온달의 자존심이 조금 상했을 뿐이지.

'그냥 깔끔하게 떼어내서 잘 됐다고 생각하자. 저놈이 매달리는 것보단 낫다.... 아니 근데.'

좋아하지도 않는 놈에게 차이고 해명도 못하는 게 너무나 빡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화가 났다. 이 원한을 어떻게 갚아줘야 잘 갚았다고 소문이 날까. 아니 소문은 나면 안 되겠지만.

"화해를 하라고 했더니 왜 더 사이가 나빠진 건가요?"

시프리에드가 온달에게 말을 걸었다.

"응? 나와 저 녀석한테 더 나빠질 사이가 있었던가?"

"그야 없었던 것도 같지만.. 그래도 적당히 해 둬요. 새 인원도 들어왔는데."

시프리에드가 헬가를 곁눈질했다.

"그래서 얌전하게 있지 않나. 싸움을 걸지도 않고 말싸움도 안 하고."

"그래요. 아무런 말도 안 걸고 아예 없는 듯 무시하고 그러는 주제에 브랜든의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을 뿐이지요."

뜨거운 눈빛이란 말에 괜히 온달의 심장이 덜컥했다. 평범하게 시프리에드의 돌려까기 발언이겠지만, 떳떳하지 못한 자는 양심이 찔렸다.

"저놈도 날 무시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네, 둘이 똑같은 수준이라 참 좋으시겠어요."

이건, 이건 꽤 심하게 아팠다.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온달이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여행자가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괜찮아요, 온달님?'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웬만하면 브랜든님하고 화해하세요.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더 강하고 멋있는 거잖아요."

온달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냥, 기억이 있는 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

"진짜 새삼스럽게 무슨 소릴..."

여행자가 온달에게 눈을 흘겼다.

"동료들끼리 반목하는 걸 못마땅해 하고, 말 안 듣는 녀석들을 잘 구슬러서 뜻대로 조종하려 드는 걸 보면."

"보면?"

"넌 분명 보모였을 거다. 말 안 듣는 애들을 떼거지로 돌보는."

"아 왜 결론이 그렇게 나요!"

여행자가 온달의 팔을 투닥투닥 두드렸다. 온달은 하하 웃으며 아프지 않은 주먹질을 맞아주었다.

"쯧."

브랜든이 온달 들으라는 듯 혀를 차고 고개를 획 돌려 외면했다. 잊고 있던 굴욕이 떠올라, 모처럼 좋아졌던 온달의 기분이 도로 가라앉아버렸다.

'저 새끼 좀 패기라도 하면 안 될까?'

 

 

"대체 뭐가 또 문제인 걸까요."

사람들을 이끌고 여관을 나온 시프리에드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역시 시프리에드님 보기에도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은 거지요?"

여행자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둘만 떼어놓고 와도 돼?"

헬가가 물었다.

"말릴 사람도 없는데 싸우면 어쩌려고?"

"차라리 싸우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라르곤이 말했다.

"예전에는 브랜든이랑 온달님이 싸우더라도 동료끼리 투닥거리는 거였는데 요새는 서로 없는 것처럼 외면하잖아요.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정 궁금하면 지금 돌아가 보면 어때?"

헬가가 제안했다.

"둘이 싸우든 뭐든 하면 이유라도 나올 거 아냐."

"그치만 그건 몰래 엿듣는 거 아닌가요?"

여행자가 만류했다.

"애초에 우리에게 말 못할 일 일까봐 둘이서 해결 보라고 놔두고 오는 건데."

"우리가 남이냐? 동료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잖아."

헬가가 거듭 주장했다.

"거 온달도 브랜든도, 자존심만 하늘같이 높아서 다들 함께 고민하면 쉽게 끝날 문제를 혼자 짊어지고 끙끙거릴 그런 타입이잖아."

"그건 맞는 말이네요."

시프리에드가 찬성했다.

"지금까지 밤낮으로 붙어 다녔으니 이제 와서 우리에게 말 못할 개인적인 비밀이 생겼을 가능성도 낮고, 혹시 그런 거라면 조용히 물러나와 모른 척 해주도록 하죠."

"그...래도 괜찮을까요?"

라르곤은 주저했다.

"자기가 말 안한 사실을 억지로 알아내려고 하면 브랜든은 싫어할 텐데."

"온달도 좋아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행자가 말했다.

"그래도 필요하면 간섭도 해 주는 게 진정한 동료 아닐까요? 모른 척 해줘야 할 상황인지 간섭을 해야 할 상황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원인을 알긴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돌아가죠."

시프리에드가 결정했다.

"분명 시시한 자존심 싸움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러니까 개입이 필요한 상황일지도 몰라요."

 

 

온달과 브랜든 둘만이 남아버린 여관방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또 왜 싸웠는지 몰라도 둘이 알아서 화해 좀 하라며, 시프리에드가 나머지 일행을 몽땅 이끌고 장보러 나가버린 지도 벌써 십여 분이 지났다. 그러나 그 동안 두 사람은 화해를 하기는 고사하고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상대를 무시하기 위해서 전력으로 의식하느라 숨조차 크게 쉬기 어려운 이 상황에 먼저 나가떨어진 건, 아이러니하게도 숨을 쉴 필요가 없는 브랜든이었다.

그가 소리 없이 움직여 문으로 향했다.

"야."

온달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착각할까봐 말해두는데 나도 너 싫고 진작 그만둘 생각이었다."

이걸 말하는 게 더 짜증날지 저 놈이 자기가 언제 저를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하는 게 더 짜증날지 고민하다 온달이 내뱉어 버렸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잘됐군."

브랜든이 정말 잘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없었던 일은 되지 않더라도 그런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겠지. 모두 잊도록 해라."

어째서 저놈하고 의견이 일치하는 게 일치하지 않을 때 보다 더 짜증나고 기분 나쁘고 빡치는 것일까. 잠시라도 저런 녀석하고 붙어먹을 생각을 한 자신이 진짜 미친놈이었다고 온달은 새삼 생각했다.

"오냐 그래."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저런 말을 하는 건 너무 꼬왔기 때문에, 온달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 한 마디를 덧붙이고 말았다.

"아, 잊기 전에 한 가지만 말해주마. 너 넋 나갔을 때 헤르야 부르더라."

"뭐?"

브랜든이 온달에게 획 돌아섰다.

"알아는 두라고, 라르곤 품에서는 혀 잘 잡고 있."

쾅!

문이 박살날 듯 열렸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라르곤이 방 안에 뛰어 들어왔다.

열린 문 밖에는 시프리에드와 헬가, 그리고 역시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여행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