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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메네스. 원하는 게 있나?"
다소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서너 번의 잠자리 동안 올림피아스는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대가를 바라진 않습니다."
에우메네스는 건조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필리포스의 서기관은 왕비에게 베갯머리송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물론 그와 잘 마음도 없었지만. 올림피아스가 상체를 일으켜 턱을 괴었다.
"알고 있네. 그래서 하는 말일세. 불륜이라면 서로 정분이 있고 창남이라면 돈을 쥐여 보내면 되지. 그러나 자네는 내 욕심에 어울려주는 것뿐이니, 자네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공평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약점을 잡으시겠다는 거군요."
공평은 비단 가지는 것뿐 아니라 잃는 것에도 해당된다. 서로 취할 것을 갖고 끈끈이 얽혀있을수록 한쪽이 수렁에 빠졌을 때 혼자 달아날 염려가 줄어든다. 올림피아스는 직설적인 대꾸에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해가 빨라서 좋다는 듯 짙은 눈으로 서기관을 응시했다.
"알아들었으면 말해봐."
에우메네스가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하지만 마땅히 바라는 건 없습니다."
돈이라면 서기관의 급료로도 살 만했다. 넘쳐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치하는 습관도 없었고, 왕비를 통해 권력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리스인인 그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엔 한계가 있으며 필리포스가 그를 신임하고 있었으므로 서기관이라는 위치도 썩 나쁘지 않았다. 디오게네스처럼 무욕의 인간은 아니었으나 현재로선 그가 바라는 것은 스스로 이룰 수 있을 만큼 사소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왕비에게 얻을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미래의 후의를 담보로 잡는다는 부담을 지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그런 사고는 새파랗게 젊은 시절이라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부르시는 건 자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 원."
에우메네스가 몸을 일으키고 올림피아스가 으쓱했다. 그의 눈은 키톤을 주워 입는 사내의 등을 떠나지 않았다. 곧 사내는 들어왔을 때와 같은 차림이 되었다.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이대로 보내줄 것 같나?"
에우메네스가 멈칫했다. 여즉 베개에 턱을 괸 채 이불 밖으로 나신을 반쯤 드러내고 있는 여자는, 아킬레우스보단 피로스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비단 붉은 머리뿐 아니라⋯⋯.
"농담일세. 서쪽 뒷문으로 나가게."
그러나 밤이 늦어서인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는지 왕비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에우메네스가 막 뒷문을 열려는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대가는 생각해두는 게 좋을 거야."
서기관은 왕비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결과적으로 그가 왕비에게 대가를 요구할 일은 없었다. 서기관은 올림피아스가 부르지 않는 것을 신경 쓸 겨를 없이 바빴고, 곧 필리포스가 살해당했으며, 에우메네스는 젊은 왕의 비서가 되어 출정을 함께하게 되었다. 13년의 원정 끝에 알렉산드로스가 병사한 뒤에도 둘이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들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혼란한 전장에서 아르가이 왕가 수호를 내세운 장군과 작고한 대왕의 모후는 정치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유럽과 아시아를 뛰어넘어 그들을 잇는 실재적인 끈은, 서기관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인 서신이라는 모습이었다.
⋯⋯그대에게 내 손자이자 마케도니아의 어린 왕인 알렉산드로스를 보호하며 원조할 것을 일임하고⋯⋯
에우메네스는 다 읽은 편지를 고이 접었다. 올림피아스와 폴리페르콘에게서 도착한 서신은 불안정한 정세를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패였다. 육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노라를 떠나며 에우메네스는 여러 수를 점쳐 보았다. 정통성과 금전, 권력, 무력까지 확보하게 될 장군의 머릿속에 갖가지 계획이 세워지고 파기되었다. 저녁이 되어 말에서 내릴 때가 돼서야 아주 오래전의 일이 스쳤다.
그때의 대가가 어마어마한 보상이 되어 돌아왔다기엔, 그들의 잠자리와 정치적 동맹이 추호도 관련이 없음을 에우메네스는 아주 잘 알았다. 설령 왕비가 그를 부르는 일이 없었더라도 올림피아스는 친親왕조파인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며, 그 역시 정통성을 보장해줄 모후에게 최선을 다해 협력했을 것이다. 상황은 끝없이 바뀌었고 받지 못한—원하지도 않은 대가를 요구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와서 그까짓 과거를 입에 담을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왜 손해밖에 보지 않을 일을 수락했는가? 왕비가 권력을 휘두른다 한들 그의 상관인 왕보다는 아래일진대 어째서 그런 위험을 감수했는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동이 틀 때 출발한다. 서두르되 무리하지는 마라. 이변이 없다면 예정대로 퀸다로 향한다."
"예."
이제 그런 것은 굳이 생각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일이 되었다. 그보다는 가급적 빨리 은방패 부대와 합류하고, 지휘관들의 환심을 살 방법도 생각해두어야 한다. 마케도니아군 사이에선 밉보이는 입장이니 하나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금전을 포기하여 부대를 확실히 끌어들이는 게 가장 낫고,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결속시킬 만한 방법을 모색해야지⋯⋯.
어쨌거나 자고 일어나면 더 나은 길이 보일 것이다. 준비해두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다음날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드는 사내에게, 과거는 흐릿한 기억이 되어 강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지나간 운명이 닿는다면 그곳에서 올림피아스가 흘려보낸 기억과 스쳐갈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영영 알지 못할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