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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도르 요정은 저주받았다.’ 갈라드리엘을 살면서 이 문장을 수천 번 접했다. 그 누구도 감히 ‘놀도르 공주님’인 갈라드리엘의 눈앞에서 말하진 않았지만.
갈라드리엘은 그 명제를 부정했다. 놀도르가 한둘도 아니고, ‘옛날이야기’라는 말로 일축하곤 했지만, 지금은 일견 맞는 문장이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요정의 형제들은 크고 작게 결함이 있다. 그중 제일 가까웠던 핀로드는 강박적으로 보석을 모았다. 큰 방안 사면의 선반이 꽉 찰 정도였다. 피나르핀 가문이 ‘황금 가문’이라 불리는 건 단순히 머리카락 색 때문은 아니라 생각할 수준으로. 그럴 때마다 갈라드리엘은 그가 요정으로 잘못 태어난 난쟁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자기 형제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닥치면 기꺼이 뛰어들었으나 그렇지 않은 평화로운 상황에서 놀도르 다수는 현장보단 책상을 좋아했고 모르고스가 죽자 손을 더럽히는 일을 꺼렸다. 하지만 갈라드리엘은 기꺼이 손을 더럽히는, 그들이 이해 못하는 번듯하고 존경받는 직업도 있었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다르게 그 저주는 갈라드리엘에게도 통했다. 일평생을 지배한 불안증과 예민함은 사건 해결을 이끌었지만, 명백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는 자기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화를 잘 냈고, 잠을 자지 않았다. 사건이 있다는 핑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갈라드리엘은 단지 다른 종족이, 그리고 때론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요정들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건 그의 상징적 지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상징적 지위와는 관련이 없다. 갈라드리엘은 그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알쿠아- 갈라드리엘의 말이 푸르르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생각에, 정확히는 과거를 반추하느라 한쪽만 빗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갈라드리엘은 사과의 의미로 한번 쓰다듬고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 중 유일하게 평화로운 시간이다. 갈라드리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번씩 말을 돌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시간이 길지 못하다. 갈라드리엘은 찬바람에 계속해 기침하며 자리를 옮겼다. 그럴 때마다 알쿠아는 갈라드리엘을 보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 집을 사면서 함께 데려온 아름다운 흰 말은 이곳에서 갈라드리엘의 유일한 친구였고, 안식처였다. 갈라드리엘은 솔로 몸을 쓸다 알쿠아의 몸에 기댔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다 너 같으면 얼마나 좋겠니?”
갈라드리엘은 현관문을 보았다. 커튼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다르는 상관할 바 아니라는 갈라드리엘의 말에 하는 일을 멈추었다. 일단은 그랬다.
분명 용무라면 그 사진이다. 요정은 덤이고, 거래는 핑계였다. 상황이 명백한데도 그는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 갈라드리엘은 전부 모르는 체하고 싶었다.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기 자신조차도. 요정은 다시 몇 번 기침하고 코를 훌쩍였다. 긴 옷을 입었는데도 으슬으슬 추웠다. 그 말대로 쉬어야 했지만 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고집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프면 쉬어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갈라드리엘은 더 생각하는 대신 말 머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말은 반쯤 젖어버린 금발 위로 머리를 비볐다. 갈라드리엘은 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마구간의 문을 닫았다.
“비 그치면 나가자.” 갈라드리엘이 말에게 말했다.
그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아다르는 다시 벽에 붙은 쪽지를 떼어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쪽지와 프린트한 종이가 꽤 쌓여있었다.
“아다르!”
갈라드리엘이 긴 작업용 장화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그에게 가 쪽지를 빼앗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갈라드리엘이 소리 질렀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고 사우론 사진 아래 붙어있는 한 오르크의 사진을 떼어냈다.
“죽었어.”
그는 테이블 위에 사진을 내려놓았다. 다시 보니 어떤 기준에 따라 분류한 것 같았다.
“뭐?”
“네가 뛰어내렸던 날, 사우론이 죽였지. 심사가 뒤틀린다는 이유로.”
“널 배신하고 다른 오르크들을 데려간 놈이잖아.”
“우루크.”
아다르는 항상 그렇듯 정정했다. 그는 다른 쪽지 하나를 떼어냈다. 2년 전 펠라르기르 내 누메노르 감시탑을 향한 테러 미수사건이었다. 폭탄이 불발했고 범인으로는 오르크가 붙잡혔다.
“이건 사우론의 짓이 아니야.”
“그건 대체 어떻게….” 갈라드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아니 아다르의 명령으로 한 일이 분명했다. 갈라드리엘은 지금 그가 하는 짓을 그대로 두어야 할지 아니면 막아야 할지 고민했다. 정말 경찰 내에 첩자가 있는 걸까? 그래서? 아니면 그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서?
그는 인쇄물 몇 개를 떼어냈다.
“이런 건 의미 없어,”
갈라드리엘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말이 귀에 꽂혔다. 다른 의미로 들렸다. 역시 싫다.
“가.” 갈라드리엘이 그의 팔을 잡았다. “‘일’ 끝났잖아.”
요정의 머리는 반쯤 젖어 푹 주저앉아있었고 마구간에서 일하다 나온 바로라 후줄근한 작업용 옷을 입고 있었다. 상의와 하의가 어울리지 않았고 비맞은 모습이 추레해 꽤 우스꽝스러웠다. 아다르는 그런 갈라드리엘의 모습을 발부터 머리끝까지 훑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갈라드리엘은 기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감옥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무슨 말을?”
“촌구석으로 도망쳤다고.”
갈라드리엘이 그를 보았다. 이건 또 무슨 얘긴가? 그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영 무표정한 얼굴과 다르게 확연히 실망한 얼굴이었다. 처음보는 표정. 갈라드리엘은 시선을 피했다.
“이런 곳에 평생 눌러앉으려고?”
갈라드리엘의 얼굴이 굳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여기 온 목적이 대체 뭐야?” 갈라드리엘이 으르렁대며 물었다.
“왜, 섹스를 못하니 그게 아쉬운가?”
아다르는 한숨 쉬었다. 갈라드리엘은 그의 가슴을 밀쳤다. 아다르는 밀리지 않았고 이 모든 상황이 갈라드리엘의 화를 돋웠다.
“날 배신하고, 마음대로 찾아오면 내가 달려가서 반기기라도 할 줄 알았어?”
“엘론드.”
그가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일이 없는 이름이었다. 갈라드리엘은 순간 아다르가 했던 첩자 얘기가 생각났다.
“뭐?”
“그 요정이 나에게 연락했다. 너에게 가보라고 하더군.”
갈라드리엘의 눈이 커졌다.
“엘론드가?”
“말 그대로.”
왜? 아니, 믿을 수 있는 말인가? 아다르는 신뢰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엘론드를 언급할 이유는 더 없었다. 그러니까, 엘론드가 자발적으로 아다르에게 연락했다는 얘기야? 나오자마자 잡아넣겠다고 이를 갈더니, 여기로 보냈다고? 갈라드리엘은 손끝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정말로 열이 올랐다. 숨 쉴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설마, 다시 돌아오게 만들려고?
엘론드는 무능하지 않다. 아다르가 감옥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게 뻔했다. 아니면 혹시 그가 가진 모든 게 엘론드의 정보인가.
“네가 가지고 있던 건?”
“그건 내 정보야.”
“거래는?”
“그 요정은 모른다.”
“그래서. 넌 왜 걔 말을 따랐는데?”
기침이 이어졌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속이려 하고. 숨기고 거짓말해서 제 뜻대로 하려한다. 갈라드리엘은 다른 것보다 엘론드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 그리고 아다르가 그에 가담했다는 것이 말 그대로 화가 났다. 목 뒤가 뜨거웠다. 하지만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꽉 뭉쳐진 종이로 가득 찬 기분이다.
“엘론드가… 뭐라고 했는데?”
“날 보면 나아질 거라고.”
“그래서?”
“잘못 짚은 것 같군.”
그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여전히 대단하게도 갈라드리엘이 한심하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왜 왔는데?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래서 세 번째로 갈라드리엘은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가란다고 가지도 오란다고 오지도 않았으면서. 3년 전에도 항상 갈라드리엘이 그를 찾아가야 했다. 그는 제일 개인적인 은신처를 알려주는 것으로 그 노력을 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상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인 관계라는 걸 알았지만 이런식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저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갈라드리엘은 그를 보지 않은 채 차 열쇠를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갈라드리엘은 아다르를 취조실에서 처음 만났다. 그 옛날 모르고스에게 고문당하고 오르크가 되었다는 모르온도르. 긴 검은 머리에, 창백하고 화상흉터가 또렷한 얼굴을 한 그는 요정과 닮았지만, 전혀 달랐다.
알타리에. 그는 갈라드리엘을 보자마자 지금은 잘 부르지 않는 이름으로 갈라드리엘은 부르며 미소 지었다. 요정은 그 웃음을 비웃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무기 밀매, 청부살인, 테러 등 단순한 용병회사를 운영한다기에는 위험한 죄목의 용의자였고 실종된 사우론의 협력자라 의심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갈라드리엘의 증거는 빈약했고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아다르 옆에는 유능한 변호사도 있었다. 결국 그는 제 발로 취조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다르는 후에 그를 배신한 부하를 통해 갈라드리엘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장소와 날짜가 쓰여있었다. 갈라드리엘은 그 쪽지를 무시했다. 그러자 그는 거짓 신고로 갈라드리엘을 원하는 장소로 불러들였고, 그를 납치했다.
갈라드리엘은 그와 번듯하게 음식이 올라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갈라드리엘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협상하려 했다. 그는 무기뿐만 아니라 정보를 팔았다. 갈라드리엘은 아다르만큼이나 사우론을 찾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에 아다르는 그가 기다리던 정보원이었다.
약속한 시각 약속한 때에 만나 정보를 받고 사라졌고 갈라드리엘은 허가받지 않은 자의적인 작전으로 할브란드와 함께 그에게 경찰 내 정보를 흘렸다. 어디까지나 형사와 정보원인 관계. 갈라드리엘과 아다르는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한참 뒤 할브란드가 사우론으로 밝혀진 뒤 갈라드리엘을 모두가 경계하고 사우론과 내통했다고 의심할 때 아다르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는 갈라드리엘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사우론에게 당했고, 죽였었다. 그는 사우론의 기만과 야비한 책략, 폭력적인 성격을 알았다. 그도 당했으니까. 그걸 알게 된 이후 갈라드리엘은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만남이 잦아지졌다. 급기야 공공장소가 아니라 사적인 장소에서 만남이 이어졌다. 고립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있던 것이 갈라드리엘에게는 다행이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부 지나간 일이다. 서로 다친 상처를 핥았고, 이젠 흉터만 남았다.
그는 갈라드리엘과 협상을 어겼고 그것으로 끝났다.
갈라드리엘은 낡은 건물 좁은 주차장으로 바로 들어갔다. 제대로 보수하지 않은 건물 앞 주차장은 여기저기 바닥이 깨져있어 차가 요동쳤다. 그는 빈자리에 주차하고 건물 입구를 노려보았다. 갈라드리엘은 저 건물이 어떤 공간인지 알았다. 중독자들을 이용해 처방전을 남발하고 중독성 약물을 처방해주는 ‘병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 앞에서 몇 마디만 하면 갈라드리엘이 원하는 약보다 강한 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기분과 기억을 잊을 수 있다. 갈라드리엘은 무의식적으로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그가 언젠가 소탕하겠다고 생각했던, 익명으로 신고했던 병원이었다. 1년이 지났지만, 병원은 건재했다. 수사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갈라드리엘은 마르는 입을 핥았다. 그리고 시동을 껐다.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감기는 낫지 않았다. 갈라드리엘은 사우론과 아다르와 엘론드와 마지막으로 - 켈레브림보르를 떠올렸다. 왼손의 반지가 그를 죄이는 것 같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손톱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갈라드리엘은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했다.
아다르는 여전히 떠나지 않았고, 보아하니 엘론드의 차가 있었다. 갈라드리엘은 망설이다 집 뒤편에 주차했을 때는 해가 진 시간이었다. 갈라드리엘은 조수석에서 물건이 잔뜩 든 봉투를 손으로 꺼냈다. 열이 더 오른 건지 이젠 식은땀까지 났지만 태연한척했다.
입구로 향하는데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엘론드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갈라드리엘은 인사도 없이 그를 지나쳤다.
“갈라드리엘!”
“어제 오늘 손님이 많네.”
갈라드리엘은 여전히 식탁을 차지하고 있는 구형 컴퓨터 뒤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어딜 갔다 오신 겁니까?”
“그사이 엘론드한테 밀고 한 거야? 밀고자는 혀를 자르는 게 네 처분 아닌가?”
갈라드리엘은 그를 무시하고 그의 뒤로 보이는 아다르에게 말했다. 벽을 보아하니 떠났을 때 원하는 만큼 정리를 한 모양새였다. 갈라드리엘은 기가 찼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전화하라고요.”
감옥에서 교화해 준법 시민이라도 된 건가?
“전화?” 여전히 갈라드리엘은 엘론드가 아니라 아다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첫날 입고 왔던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곧 떠날 사람처럼.
“가. 둘 다.”
갈라드리엘은 엘론드를 보았다. 지금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힘을 쏟고싶지 않다. 당장 버틸 자신도 없었다. 손발이 차가운데 몸은 뜨거웠다. 주변이 어지럽다.
“뭘 원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할 말 없어.”
“사진을 봤습니다. 단서도 있고. 대테러부서와도 협력하고 있으니 소재 파악만 된다면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이 있어야 하고요.”
엘론드 말이 멀게 들렸다. 갈라드리엘은 식탁에 팔을 올리고 몸을 지탱했다. 엄지 손톱에 말라붙은 피가 보였다. 엘론드보다 먼저 아다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가 주저앉는 갈라드리엘을 부축했다. 갈라드리엘은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만 가는 게 좋겠군.”
아다르가 엘론드에게 말했다. 갈라드리엘은 그를 밀어내고 모두를 무시한 채 방으로 향했다.
방 밖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버틸 수가 없다. 도저히. 그냥 눕고 싶었다. 온몸이 땀으로 찝찝했지만 벗을 생각도 들지 않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의사한테 감기약을 처방받았는데.
그 의사가 보기엔 갈라드리엘은 꼭 그가 형사 생활을 하면서 본 수많은 중독자와 같았을 테다. 하지만 갈라드리엘은 도저히 왼손의 반지를 끼고 그런 약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대신 평범한 감기약을 요구했다. 여전히 약을 먹어야 가라앉는 증상은 그를 괴롭히고 과거는 변하지 않고 과오도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마에 손이 닿았다. 체온이 서늘했다. 요정은 누구의 손인지 바로 알았다. 갈라드리엘은 손을 피하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왜….”
“엘론드는 떠났어. 다시 오겠다고 하더군.”
그는 침대 옆 선반에 약과 물컵을 놓았다.
“이러는 거야? 부탁한 적 없어. 부탁하고 싶지도 않아.”
갈라드리엘이 물었다. 목에서 색색 대는 소리가 났다. 아다르는 대답하지 않고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넌 누군가 필요해.”
갈라드리엘은 입을 열었지만, 기침에 말이 막혔다. 말 대신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이런 모양새로 사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런 거, 전부 어떤 의미도 없어. 너도 알잖아.”
갈라드리엘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리고 그가 떠나지 않는 이유를 알았지만 부정했다.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말을 멈추고 약을 먹었다. 아다르는 조용했지만, 갈라드리엘의 대답에 그가 손을 꼭 쥔 걸 보았다. 갈라드리엘은 약을 먹고 컵안의 물을 비우고 다시 누웠다. 일어났을 때는 다시 혼자이길 바라면서.
갈라드리엘은 새벽에 눈을 떴다. 아직 해도 뜰 기미가 없는 어두운 새벽이었다. 땀으로 온몸이 젖어있고 몸에 힘이 없었지만 잠들기 전 과 달리 머릿속이 산뜻 했다. 그는 반쯤 깬 머리로 어두운 천장을 보고 누웠다.
비가 그쳤다. 갈라드리엘은 커튼 너머의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라드리엘은 다시 한쪽으로 돌아누우며 다시 깜박거리는 정신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베게 아래로 진동이 울렸다. 갈라드리엘은 화들짝 놀라 깼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베게 아래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다. 새벽 3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대체 누가 이 시간에? 그는 눈을 비비며 화면을 보았다. ‘엘론드’ 오늘도 밤샘 근무 중임이 분명했다.
갈라드리엘은 문자를 무시하려 했지만 대기 화면에 바로 문자 내용이 보였다.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갈라드리엘은 문자를 지우기 위해 화면을 쓸었다. 그런데 문자 삭제 버튼은 나오지 않고 엘론드에게 통화연결이 되었다. 갈라드리엘은 잠이 달아나는 걸 느끼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제기랄. 갈라드리엘은 바로 핸드폰 전원을 종료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엘론드에게 전화가 왔다. 갈라드리엘은 고민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갈라드리엘? 몸은 괜찮아요? 걱정했습니다.”
바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드리엘은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괜찮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요정은 네 문자를 삭제하려다가 통화가 연결됐어. 라고 말하지 못하고 “후회하지 않는다고?”라고 말했다. 톡 쏘는 어조였다.
잠시 핸드폰 너머가 조용했다.
“네. 당신을 위해서였습니다.”
“날 위해서? 넌 처음부터 나와 아다르의 관계를 싫어했잖아.”
“싫어했다는 표현은 너무 강합니다. 친구로서 조언한 것뿐이고요.”
갈라드리엘은 한숨 쉬었다.
“내가 아니어도 너는 아다르를 싫어하잖아. 한 번도 좋게 말하지 않았었고.”
“잘 아시네요.”
갈라드리엘은 그가 정말 걱정하는지 의심됐다.
“하지만 저보단 그자가 당신을 돌아오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아다르는 나와 협상을 깼어.”
“하지만-.”
“날 배신했다고.”
엘론드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갈라드리엘은 단어를 짓씹듯이 말했다. 다시 엘론드가 조용해졌다.
“갈라드리엘. 그가 왜 ‘배신’했는지 아시나요?”
“사우론이 도망쳤으니 보복이 두려웠겠지.”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사우론을 죽이려던 자가 보복이 두려웠을 거라고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의아했다. 엘론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하들에게 배신당했잖아.”
“남은 부하들이 있는 건 아시잖아요. 아다르 같은 자는 다시 자기 세력을 쉽게 모을 겁니다.”
갈라드리엘은 한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마치 엘론드가 아다르의 편을 들어주는 꼴이다.
“아다르 편을 드는 거야?”
“편이라 하면 편향된 표현이네요.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시길 바라는 겁니다.”
갈라드리엘은 눈을 감았다. 그의 태도가 건방지게 느껴졌다.
“올바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들어보세요. 갈라드리엘. 당신은 그에게 증언을 부탁했잖아요. 증언 후에는 증인프로그램에 등록할 거였고요.”
“맞아. 아다르도 동의했잖아.”
“네. 그게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모리온도르는 증인프로그램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어요.”
“그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 그리고 그건 증언을 거절할 이유는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그 조건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잖아요. 증인프로그램은 피할 수 없는 절차였고 당시에 증언했다면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증인프로그램에 들어가면 그자는 앞으로 당신을 만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우론이 붙잡혀 재판이 끝나거나 죽기 전까지요.”
갈라드리엘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귀에 닿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의 상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왜-.”
“제 말을 부정하기 전에 생각해보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휴대폰 넘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당신과 아다르의 관계를 아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갈라드리엘은 손끝으로 이불 위를 긁다가 멈추었다. 엘론드의 말을, 문장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쳤다. 그가 잠들기 전 그의 반응이 떠올랐다. 갈라드리엘은 엘론드에게 할 말을 고민했다.
“네가 넘겨짚는 거야.”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니길 바라세요?”
엘론드가 물었다. 갈라드리엘은 단호하게 “그럴 리 없어.”라고 거짓말했다. 그러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엘론드는 다시 답이 없었다. 갈라드리엘은 그가 먼저 이 통화를 끝내길 바랐다.
“아다르가 사진을 넘겼습니다. 이쪽에 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도 흘렸고요.”
“나에게는 사진을 이유로 거래를 제안했어. 이동 제한을 풀어달라고.”
“그 얘기는 하지 않았는데….”
미행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아다르는 이미 한 번 미행을 따돌린 적 있었다.
“당신께 한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사우론을 체포할 때 당신이 있어야 해요.”
“나 혼자 할 수 있어.”
갈라드리엘은 또 한 번 거짓말 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제 아무도 당신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자에 대해서.”
엘론드는 간곡히 말했다. 하지만 갈라드리엘은 결심이 서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엘론드. 나는….” 갈라드리엘은 말을 골랐다. “아직 모르겠어.”
“계속 제 아이디는 열어 둘 테니,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십시오.”
갈라드리엘의 눈이 커졌다. 말이 해킹이지 그는 경찰 서버를 뚫고 엘론드의 계정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세요.”
갈라드리엘의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통화가 끊겼다. 갈라드리엘은 화면 위 깜박이다가 사라지는 엘론드의 이름을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