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너, 나랑 만나자.”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백사헌은 생각했다.
‘지금도 만나고 있잖아요’ 따위의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목숨이 아깝기도 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잡고 ‘만나자’고 하는건 보통… 그런 뜻 아닌가?
‘김솔음이 미친놈인줄은 알았지만 설마…’
아니다, 이건 다 말을 애매하게 뱉은 뒤 자신의 반응을 보며 즐기려는 수작이다. 저 싸이코패스에게 틈을 줘서는 안된다! 백사헌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싹싹하게 대답했다.
“아 네! 언제 만날까요?”
“그런식으로 빠져나갈 생각 말고. 나랑 연애하자고.”
‘연애’.
설마했던 그 말에 백사헌은 얼이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말을 내뱉었다.
“왜…요?”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 잠깐, 어쩐지 이 미친놈이 내 목숨도 종종 구해주고, 날 재밌어한다 싶더니… 그게 ‘좋아해서’ 그런거였나?!
말이 되는 것 같다. 소름이 끼쳤다.
“저, 저는 주임님 안좋아하는데요?”
“그게 문제가 되나?”
시X…
욕이라도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었지만 백사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간 다져진 생존본능이 있었다.
“대답 안해?”
결국 그는,
“...네, 알았어요…”
싸이코 직장상사와의 연애를 승낙했다.
그게 지난 목요일 저녁이었다.
오늘은 금요일. 구내식당에서도 김솔음은 자기 조에 붙지 않고 굳이 백사헌을 찾아와 옆에 앉았다.
미칠것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백사헌은 생각했다.
어떻게 이 새끼랑 무사히 헤어지지?
하필 테이블의 대화 주제도 연애였다. 백사헌은 X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식사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노루 주임님은 어떤 타입 좋아하세여?”
C조 주임의 질문에 백사헌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 미친새끼가 설마 여기서 나랑 사귄다고 말하진 않겠지?
“글쎄요, 전… 곱슬머리에, 눈이 예쁜 사람?”
미친놈.
백사헌은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와… 누구 때문에 없어진 눈인데…!’
그게 예쁘다고? 아니 혹시 하나만 있어서 예쁘단 식의 싸패성 사고인가? 저놈이라면 뭐든 가능성 있었다!
‘곱슬머리가 좋다고? 주말만 되어봐라 내가 몇십만원을 들여서라도 머리 편다!’
“뭐야~ 외모만 봐여?”
“성격도 중요하죠.”
대체 뭐라고 말할거냐! 뭐라고 하든 정확히 그 반대로 행동해주마!
“전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한 김솔음은, 마치 백사헌의 빡침을 읽기라도 한듯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점심을 먹고 서류작업을 위해 자리로 돌아오자 김솔음으로부터의 새 카톡이 와 있었다.
이걸 확인을 해, 말아?
확인 안하는게 추후 여파가 더 클 것 같아 백사헌은 이를 악물고 카톡을 클릭했다.
[주말에 시간 내라]
미리보기 이상의 말이 없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백사헌은 그새 준비한 대답을 재빨리 작성했다.
[주임님 이번주말은 제가 부득이하게 바쁜 사정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야 해서요]
진짜였다. 아파서 가는건 아니지만! 요며칠 얼굴에 못보던 점이 생겨서 피부과에 가보려던 참이었다. 겸사겸사 관리도 받고… 그래, 미용실에도 들러야겠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김솔음이었다. 이걸 갖고 전화를 한다고? 백사헌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일단 전화를 받았다.
“어디 아파?”
“네, 뭐… 큰건 아닌데…”
“어디가?”
“...그냥, 얼굴이 좀 안좋아서…”
김솔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설마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병원은 어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백사헌은 최대한 사택에서 먼 곳을 대답했다. "목동이요."
“그래? 잘 됐네. 거기 나 아는 맛집 많은데. 내일 같이 가자.”
아….
피부과에 들렀다가 미용실에 가려고 했던 백사헌의 일정계획은 그렇게 망가졌다.
김솔음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머리를 피러 가는 건 자살 행위 같았다.
병원을 나와 김솔음이 찾은 브런치 가게 - 맛있었다 - 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를 보자는 건 백사헌의 주장이었다. 최소한 영화보는 두 시간 반 동안은 김솔음이랑 말 섞을 일이 없을거라는 판단이었다. 다만 영화 선택을 김솔음에게 맞기면 뽀로X 극장판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화 선택은 자신이 하고, 예매만 김솔음에게 맡겼다.
그 결과…
‘예매도 내가 했어야 하는데!’
돈 쓰기 싫단 이유로 예매를 김솔음이 하도록 놔둔 것이 문제였다. 이 미친놈이 커플석을 예매한 것이다!
“왜, 불만 있어?”
김솔음의 저 속을 알 수 없는 잔잔한 미소를 마주보며 백사헌은 백기를 들었다.
“아뇨…”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시작한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백사헌은 김솔음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김솔음의 손은 백사헌의 팔을 타고 올라와 결국 영화 종반부에는 반쯤 껴안은 상태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로맨스 영화도 아니고, 평범한 공포영환데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까지도 김솔음은 자신을 꽉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이지… 영화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다!
끔찍했던 토요일의 데이트였지만 그래도 장점은 있었으니, 이 모든 과정에서 김솔음이 혼자 비용을 부담했다는 것이다. 그야 김솔음이 사귀자고 했으니 마땅히 그래야지… 하지만 김솔음같은 미친놈이 남들 하는 대로 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백사헌은 이나마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또 한가지 다행인 점은 다음주 월요일부터 장기출장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출장 기간은 5일.
‘그럼 다음 한 주는 저 미친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귀찮게만 생각했던 장기출장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저 탈출구로만 생각될 뿐이었다.
그러나.
“왔어?”
월요일 새벽 기차역 앞에서 백사헌을 기다리는 건 장허운이 아닌 김솔음이었다.
“왜 주임님이…?!”
“장허운씨가 요새 힘들어 보여서, 내가 한번 바꿔드렸지. 뭐, 이번 탐사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일이 아니다.
백일몽이 아무리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회사라지만 그래도 대기업인데 다른 조의 탐사에 대신 들어가겠다는 요청 따위가 쉽게 받아들여졌을 리 만무하다!
이 미친놈이, 내가 고작 5일 떠나있는게 고까워서 그런 수고를 들였다고?!
이 어둠은 5일간 반복되는 현상을 관찰한 뒤 5일째에 행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첫날은 별 이상 없이 흘러갔고 백사헌은 아무 생각 없이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괴담보다 더 괴담같은 현실을 마주했는데 바로 김솔음과 자신이 2인1실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장허운이었을땐 별 생각 없이 출장비 아끼라는 상부의 압박에 한 일이었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사이코패스와 함께일때는 경우가 달랐다.
물론 침대는 2개였지만 상대는 김솔음이다. 어떻게 나올 지 알 수 없었다.
백사헌은 잔뜩 긴장한 채 10분만에 샤워를 끝내고 화장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김솔음이 샤워하는 동안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이불안에 들어가 자는척을 완료했다.
실제로는 김솔음이 잠들기 전까지는 이를 악물고 깨어있을 생각이었지만…
샤워 소리가 그쳤다.
얼마 후, 화장실 문이 열렸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침실 쪽으로 걸어오더니…
…백사헌의 침대 앞에 멈춰섰다.
차갑고 긴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백사헌은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다음 순간 차가운 손끝이 얼굴에 닿자 흠칫 놀랐다.
‘이 미친놈, 대체 뭘 하려고?’
혹시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
자는 사람이랑?
저 김솔음이라면 가능한 일이기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당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백사헌은 계속 눈을 감은 채 숨을 죽였다…
“...넌 참.”
김솔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같지 않게 생겼어."
가벼운 손길이 백사헌의 볼을 툭툭 쳤다.
“잘 자라.”
슬리퍼를 신은 걸음걸이는 백사헌의 침대에서 멀어졌다.
‘...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만지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혹시 날 방심하게 만든 뒤에 다시 오려는 건가?
백사헌은 방 저편의 침대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분명 이 어둠은 5일간 한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관측해 진입해야 했다. 그럴 터인데…
“이걸로 끝이네.”
저 김솔음이, 단 이틀만에 업무를 종결지었다!
그것도 이틀째 날 오전에!
김솔음이 혼자 다 캐리해 준 덕분에 백사헌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어둠 탈출 후에는 돌아가는 기차표 재예매와 이후의 보고서 작성 정도를 떠맡았을 뿐이다. 한마디로 완전히 꿀 빤 것이다.
‘뭐야, 개이득이잖아?’
전날의 긴장감은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거…’
김솔음 애인이라는거…
….나쁘지 않은 거 아닌가?
이대로 계속 김솔음 비위 맞춰주면서 지내면 개이득 아닌가?
생각보다, 밤에 건드리지도 않고…
회사에선 버스 태워 주고…
회사 밖에서 붙어다니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김솔음이 외부에선 의외로 선을 넘지 않았다.
싸패라도 아웃팅은 싫은건지… 이게 ‘데이트’라는 걸 대놓고 티낼 때는 모든 식사값을 혼자 결제할 때 뿐이었다.
데려간 음식점과 카페도 모두 고급이었고 맛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솔음과 대화할 때마다 아득한 심연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던 예전과 달리 이제 ‘저 녀석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1차적으로 안심이 되는 면이 있었다. 여전히 저 미친놈이 무서웠지만 약간은 마음이 편했다.
사실, 김솔음에 대한 백사헌의 마음은 원래부터도 다소 복잡했다.
미친놈이라 생각하고 피하고만 싶었지만, 일면 동경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싸이코같은 인간이지만… 그만큼 능력자이기도 하니까.
그런 사람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솔직히 고양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인정받았다는 느낌.
저 미친놈의, 보통의 인간 같지 않은 관점도…
사실 백사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남들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단 것을.
백사헌은 이를 다른 사람들이 다 바보인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자신만큼 계산이 빠른 사람이 많지 않은 거라고.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 온전히 예측 불허인 사람이 나타났을 때…
백사헌이 느낀 감정들은
두려움,
질투,
경이,
그리고…
그 뒤로도 김솔음과는 주말마다 데이트를 했다.
그럼 평일엔 어땠냐고?
평일에도 함께 붙어 지냈다. 같이 배달음식 시켜먹고, 마트에 장보러 가고…
이건 뭐, 동거하는 애인 느낌?
‘그게 맞긴 하지…’
매일 밤마다 김솔음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팝콘을 씹으며 어린이용 티비만화를 보았다.
솔직히 처음엔 정말 또라이같고 무서웠지만, 다른 걸 보면 안되냐는 자신의 요청을 김솔음이 받아줘서 평범한 스릴러 영화를 함께 본 뒤로,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었다. 보다 보니 어린이 만화도 나름 스토리가 있었다.
김솔음은 아침에도 밤에도 껴안음 이상의 터치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4주정도 동거연애의 시간이 흘렀다.
백사헌은 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엔 분명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맞춰주지 않아도 이득은 받아가니 개꿀이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애를 시작한 지 몇 주가 되었을 뿐이지만 매일 얼굴을 보다보니 체감상 몇 달은 된것같은데…
그래, 보통의 애인들이 주1회 데이트를 한다 치면, 이십며칠쯤 매일 봤으니 벌써 대여섯달은 지난 셈이란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진도가 이 이상 안나가는게 말이 되나?
건드리지 않는게 다행이긴 한데…
왜 건드리려는 시도도 안 하지?
매일밤 소파에서 함께 TV를 보다가도 잘 시간이 되면 김솔음은 칼같이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백사헌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고백한건 김솔음인데 왜 먼저 들어가는 것도 항상 김솔음이지?
날 좋아한다며?
그런데 이게 다라고?
사귀자고 한게, 고작 소파에서 손이나 만지작거리려고 그런거였다고?
X나게 담백하네 시X…
한번은 김솔음이 샤워하러 간 동안 마루에 남겨둔 그 X같은 토끼인형에게 말도 걸어보았다
“야 브라운. 너네 주인은 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거냐? 아니 좋아한다는건 알겠는데 대체…”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백사헌은 깊은 현타에 빠져들었다. 아니 내가 지금 진짜로 인형에다 말을 걸고 있다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쪽팔렸다. 백사헌은 변명하듯 혼잣말로 방향을 틀었다.
“아니 시X 이 토끼새끼도 김솔음 옆에서 자는데…”
말로 하고 나니 더 X같았다. 백사헌은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아니 보통 남자들끼리 사귀면 진도 빼는데 며칠 안 걸리지 않나? 게다가 룸메이트인데? 김솔음은 나랑 지 멋대로 뭐든 할 수 있으면서 여기서 더 원하는 게 없다고?
그게 다행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기왕 사귀는 거…
나를 더, 더, 더 많이 좋아하면 좋겠는데.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말도 있고…’
그러던 어느날.
백사헌은 느긋하게 팝콘 봉지를 접으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김솔음과 함께 아동용 만화를 보고 있었고, 김솔음은 양치를 하러 자기방 화장실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
김솔음이 방에서 나왔다.
‘자기 전에 또 포옹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미친놈은 딥한 스킨십은 생각도 없는 것처럼 굴면서 이상하게 포옹은 좋아했다. 특히 야근하고 온 날은 자러 가기 전에 꼭 한번씩 껴안고 갔다. 이때쯤엔 백사헌도 익숙해져 있었기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김솔음이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왔다. 백사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벌렸다.
그러나 김솔음은 백사헌을 껴안지 않았다. 대신 백사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 손으로, 백사헌의 뺨을 감쌌다.
‘어…?’
이거… 각인가?
각이지?
백사헌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던 상황.
분명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에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할까에 대한 생각 뿐이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숨이 턱 막혔다.
김솔음은 여느 때와 같이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눈빛을 하고 백사헌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손은 부드러웠고, 손가락 끝은 백사헌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순간 백사헌은,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곱슬머리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입술이 닿았다.
‘아.’
드디어,
드디어 시작이구나…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려움인지 떨림인지 모를 감정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두근두근두근두근.
백사헌은 눈을 감았다.
“사헌아.”
백사헌은 눈을 떴다.
김솔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 동안 고생했다.”
“...?”
김솔음은 백사헌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인가와 같이 백사헌의 뺨을 부드럽게 툭툭 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헤어지자.”
순간 백사헌의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내 스킬이 그렇게 별로였나?
설마 그렇다고 날 먹버하는건가? 키스만 하고 먹버라고?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아니다, 나에게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데… 장난이겠지?
그래, 장난일 거다.
역시 싸패새끼다. 지 애인한테 이런 장난을…
“그동안 나한테 밥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이건 내가 가져간다.”
김솔음이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꿈결수집기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D등급 물약이 가득 차 있었다.
백사헌은 멍청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김솔음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헤어지긴 했지만 앞으로도 종종 TV는 같이 보자. 이의없지?”
뭐…?
“아참, 그리고 화장실 가서 거울 한 번 봐라. 너 나한테 목숨 또 빚진거다, 알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솔음은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듯 기계적인 걸음으로, 백사헌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몇 주 동안 자신을 피부과에 들락날락하게 만들었던 얼굴의 점이 사라져 있었다.
…몸이 묘하게 개운했다.
백사헌은 그제서야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했다.
김솔음은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나는…!
- 정말 재미있는 구경이었습니다! 역시 노루씨 옆에선 지루할 틈이 없군요!
“하하하…”
좀 그럴 틈이 있으면 좋겠다!
회사에서도 모자라서 이번엔 집에서 괴담과 마주치다니!
D등급 괴담 ‘연애가 아니면 죽음을’
말그대로 정해진 기일 내에 연애를 하지 않으면 죽는 괴담으로, 한 달 이상 연애를 지속했을 시 무사히 종결된다. 참고로 계약연애는 무효하며 정기적 스킨십 및 일정 수준 이상의 스킨십 진도도 필수 포함이다.
이따위 괴담도 있냐 싶겠지만 이건 사실 위키독자들을 저격해 쓰여진 메타적 괴담이었다. 즉 ‘허구한 날 집에 처박혀서 위키괴담이나 읽고 있는 너같은 종자는 절대로 못 빠져나올 괴담’이란게 포인트인, 반쯤은 개그 목적으로 작성된 괴담이란 소리다.
그 괴담에 내 룸메이트 백사헌이 걸려든 것이다.
오른쪽 눈 아래의 하트모양 반점을 본 순간 바로 눈치챘다.
처음엔 바로 알려주려 했다. 겸사겸사 나에게 빚도 만들고… 하지만 이건 너무 괴담같지 않은 괴담이라 그런지 회사 데이터베이스에도 없었다. 내 말로만 저 ‘독사’를 설득할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백사헌이 저 인성으로 한 달 동안 누군가와 안정적인 연애를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한 달이면 차이게 될 상대방이 불쌍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답은 하나였다.
‘이렇게 된 이상 기강잡기로 간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생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기적 스킨십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조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일단 매일의 일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특히 밤늦게 아동애니를 볼 때 말이다.
단순한 기강잡기에서 ‘연애’로 컨셉을 바꾼 만큼 가끔은 백사헌이 원하는 걸 보기도 했는데, 사람 죽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옆에 살아있는 사람이 함께 앉아있어서 그런지 그닥 무섭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고 쫑알쫑알대는 백사헌 앞에서 계속 정신차리고 있어야 하는게 피곤하기도 했지만 나름 괜찮기도 했다.
애초에 내가 유지하기 편할 정도로 기획한 컨셉이기도 했고 말이다.
평소 썸녀에게 했던 행동들과, 연애를 한다면 이정도는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행동, 그리고 그냥 백사헌과 하고 싶었던 행동들을 섞었다. 무서운 영화 볼때 매달리기 라던가, TV 볼 때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소파 옆자리에 앉혀놓고 만지기 라던가…
특히, 원할 때마다 껴안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마음에 큰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아마 백사헌은 스트레스를 꽤나 받았겠지만…
- 아, 옆방의 희생양 씨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정말 기대되는군요!
브라운이 신이 난다는 듯 말했다.
하아…
그렇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너무 기대하진 마, 브라운. 별 일 없을거야.”
백사헌은 내가 무서워서 연애를 승낙한 것이니… 아마 지금쯤 ‘다 거짓말이었다니 십년 감수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키스까지 한 것도, 일반인이라면 농락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백사헌은 셈이 빠른 녀석이니 내가 목숨 구해줬단 걸 잘 파악했겠지.
비록 D급이긴 하지만 물약도 강탈해 왔고, 그걸로 백사헌 안에서의 내 위상도 그럭저럭 유지될 것 같다.
나름 나쁘지 않은 한달이었기에, 좀 아쉽기도 하지만…
저 ‘독사’의 성품을 생각하면, 무사히 빠져나온 걸 축하해야 할 것이다!
이걸로, 안전한 이별 성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