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s

Work Header

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Relationship:
Characters:
Language:
한국어
Series:
Part 5 of 누카 팬캐논 세계관
Stats:
Published:
2025-03-08
Words:
2,150
Chapters:
1/1
Kudos:
4
Hits:
82

음탕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간 빵 한 조각만 남을 것이며

Summary:

단테가 레이를 태양성에 스카웃하려는 이야기

Notes:

설정 날조 잔뜩, 특히 레이 나이에 대해.
야한 일 없음

Work Text:

태양성은 인재 부족이다.

단테가 군주 자리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물론 피의 대숙청을 벌여 기존의 인사들을 모조리 사막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이제 텅 빈 태양성을 도로 채우기 위해 인재를 모집하는 것이었으나, 무능한 지난 정권이 최소 20여년에 걸쳐 행정이고 뭐고를 다 조져놓지 않았던가? 인재를 찾기 위해 체계부터 만들어야 했고 체계를 만들기 위해선 인재가 필요했는데 이 상호모순적 상황을 해결하려면 군주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넣으면 됐다. 단테가 하루 20시간 일하는 데엔 이런 배경이 있다.

유능한 사람을 최대한 많이 모으고 또 일부는 직접 키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맥이 한 번 끊긴 것은 치명적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행상인들이 쓰는 중요한 상행로를 마물들이 점거한 것이다. 토벌했는데도 3번이나 다시 나타났다는 보고다.

그래서 이번엔 단테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행차했다. 그런데 거기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레이가 기묘한 도구를 들고 마물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단테는 그가 포위당했다고 생각해 마물들을 재빨리 처리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 뿐이었다.

"칫, 귀중한 샘플을 얻을 기회를 놓쳤잖아."

"무슨…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설명해라."

태양의 전사들이 마물들과 싸우는 전쟁 한복판에서, 그 회색빛 학자는 너무도 태연하게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모래망령의 뇌척수액은 살아있을 때가 아니면 뽑아낼 수 없다고."

언제 봐도 미친 사람 같았다. 그제야 단테는 그가 들고있는 것이 일종의 주사기라는 걸 깨달았다.

단테는 어이없어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뇌척수액인지 뭔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전투에 방해되니 떠나라."

"샘플을 충분히 확보할 때까지 못 떠나. 내가 빨리 꺼지길 바란다면 네가 내 샘플 채취를 도와주던가."

성주에게 무슨 망발인가. 그가 평범한 학자였다면 그냥 여기서 처벌을 내렸겠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단테는 약간 관대함을 발휘하기로 했다. 기회를 한 번 준 것이다.

"뻔뻔하기 짝이 없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단체로 미련한 짓 할 거면 좀 생산적인 방향으로 하라고. 모래망령이랑 전면전을 왜 해?"

기회를 괜히 줬다. 그에겐 기회가 아니라 처벌이 필요하다. 감히 전사들의 신성한 전투를 미련한 짓으로 치부…… 어? 잠깐만.

"여기는 중요한 통로다. 마물들에게 내어줄 수 없어. 그러니 토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싸우냐고. 하루면 또 나타날텐데."

뭔가 알고 있다.

"자세히 설명해라."

단테는 부하들에게 늘 그러듯이 위엄있게 명령했다.

"너는 방금 태양성의 성주에게 몇 번이고 무례를 범했다. 목숨이 아깝다면 이 전투에 유효한 조언이라도 줘야 할 거야."

"얼씨구, 목숨?"

레이가 피식 웃자마자 단테는 잘못된 수를 뒀음을 깨달았다. 이 남자에겐 목숨을 건 협박 같은 게 통하지 않는다.

선택지는 오히려 레이가 제시했다.

"뇌척수액 뽑는 걸 도와준다면 이것들 쫓아내는 방법을 알려주지."

단테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거래 체결이군."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의 다리를 베었다. 단테는 심지어 레이의 추가 부탁대로 마물의 껍데기를 갈라 주사기를 꽂기 좋게 만들기까지 했다. 요구사항이 끝이 없다. 성주 앞에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뻔뻔한지 모르겠다.

왜 부탁을 자꾸 들어주고 있는지는 단테 본인도 잘 모르겠다만…….

마물은 다리를 베였을 땐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몸통 한가운데에 주사기가 꽂혀 생명력을 빨아먹힐 때는 웃음 비슷한 소리를 기이하게 흘리며 경련했다. 생물이 보일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레이가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히히덕대며 채취한 뇌척수액을 병에 담았다.

"좋아. 아직 병 안에서 살아있어."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냥 무시할 걸 그랬나.

단테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는데, 레이가 갑자기 정색하고 줄줄 말했다.

"모래망령은 군체 생물이야. 여왕에게서 텔레파시에 가까운 수단으로 연락을 받아. 새로 태어난 여왕이 아마도 여기서 남서쪽으로 삼, 사백 미터 위치에 자리잡았겠지. 그래야 위치상 여기가 영역 안에 걸쳐. 여왕은 영역 안에 마력이 진한 곳이 있으면 거기다 일꾼들을 보내 시설을 만들거든. 자세히 보면 모래망령들이 두 종류가 있지? 칼날 있는 쪽이 일꾼의 호위 병정이야. 이쯤 설명했으면 사태의 원인은 알겠지만은."

"자, 잠깐."

전쟁 한복판에서 사태의 원인부터 설명하고 있다. 확실히 타고난 연구자다. 단테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간신히 알아야 할 것을 추려냈다.

"그러니까 여왕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군."

"그렇다고 또 지금처럼 무식하게 칼 들고 쳐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잡는 방법이 따로 있어. 태양성 군사 썩어나?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 아냐?"

숨 쉬듯 무례하다. 그런데 아니야?

"그럼 어쩌란 말이지?"

레이가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이 병정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지원해줘."

"!"

뭔…! 태양성의 역사를 뻔히 아는 사람이 무슨…!!

"그게 가장 효율적이야. 지금 전사들 퇴각시켜."

이후로는 레이의 제안을 따랐다. 상인들에게는 보조금을 지급해 다른 길로 돌아가게 하고, 모래망령들이 이 행상로에 '시설'이란 걸 짓게끔 내버려두었다. 모래망령들은 입에서 실 같은 걸 뽑아내 이틀만에 기묘한 탑 같은 걸 쌓았다. 단테도 사막을 가로지를 때면 가끔씩 멀리서 봤던 것들이었다. 그게 이거였군.

그리고 모래망령들이 자는 사이 몰래 탑 꼭대기의 '텔레파시 장비'에 모종의 약물을 살포하고, 그것들의 칼날에 독을 발랐다. 그랬더니 바로 다음날부터 모래망령들이 갑자기 흥분해서 동족상잔을 시작했다. 보아하니 병정들이 일꾼들을 학살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남은 병정들은 돌연 남서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잔해만 남은 통행로를 보고 레이가 후련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독까지 발라줬으니 운이 좋으면 쿠데타에 성공해 여왕을 처형할 수 있겠지. 그러면 생식능력 없는 병정이 왕위에 오르겠고, 쿠데타에 실패해 부상만 입힌다 해도 다른 여왕이 전쟁을 걸 테니 왕국 하나가 끝났군."

마물들의 시체와 그것들이 남긴 시설물은 레이가 일부 가져가고 나머지는 전사들이 철거했다. 상인들은 다시 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요시간 4일. 비용은 상정했던 것의 1/20. 사태 끝.

다시 북적이게 된 통행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단테는 어안이 벙벙해서 레이에게 물었다.

"마물들이 갑자기 동족상잔은 왜 한거지?"

"그야 텔레파시 장비에 뿌린 게 발정제니까."

레이는 이걸로 설명을 다 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학자 중에선 이런 타입이 많다. 보통 사람에겐 어느 정도 수준의 설명이 필요한지 감을 잡지 못 한다.

"…더 자세히 설명해라."

"…."

레이는 잠시 단테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의외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여왕에게서 받는 메시지와 내가 뿌린 발정제가 섞여서, 여왕의 목소리를 듣고 흥분한거야. 그래서 그것들은 급한대로 여왕과 닮은 일꾼들부터 잡아먹고, 그 다음엔 여왕을 잡으러 간 거지."

"흥분했다고… 잡아먹는다고? 마물들에겐 도무지 상식이 통하질 않는군."

"그거 알아?"

레이는 돌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히죽 지었다.

"인간도 똑같아."

"!"

무서운 진실을 암시하는 그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단테가 움찔 놀라 몸을 뒤로 뺀 만큼 레이가 다가왔다. 녹빛 눈동자가 자신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신경회로가 타버릴 만큼 흥분하면 성욕과 식욕과 지배욕을 구분할 수 없어. 그러면 인간끼리도 산 채로 뜯어먹는 거야."

레이는 단테의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넘기며 소근거렸다.

"감미로운 인육의 맛에 울 정도로 감격하면서…."

그… 그런 걸 어떻게 알지?

본 건가? 한 건가? 현장에 있던 건가? 차마 물어볼 수가 없다. 다만 산 채로 잡아먹히는 쪽의 입장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압도당하는 기분.

레이는 단테의 귀걸이까지 한 번 건드리며 눈웃음쳤다.

"사랑 속에서 죽는 거야."

"……손 치워라!"

단테가 기어이 버럭 소리질렀다. 레이가 낄낄대며 미련없이 손을 털고 벽에 기댔다.

"그나저나 성 안에 마물 전문가도 없어?"

"……."

주제 전환 너무 빠른데?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데도?

게다가 레이가 한 일은 단순히 마물 전문가의 수준이 아닌 것 같다. 단테는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시기가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있다. …지금은 연구소를 폐쇄했기에 기존 자료가 소실되었을,"

"허!?"

여기서 반응할 줄 알았다. 이후로 모욕이 폭풍처럼 몰아닥치겠지. 그 전에 단테는 허겁지겁 변명했다.

"제대로 된 학자도 아닌 자들이 나라의 녹을 빨아먹고 있었기에 닫았다. 내 결정에 반론은 받지 않아."

"빨리 다시 열어."

"일의 순리라는 것이 있으니 재촉하지 마라."

"오오."

단테는 통솔력과 추진력이 뛰어나지만 대담한만큼 위기 감지 능력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 그조차 곧 생전 들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듣지 않을 수준의 모욕이 쏟아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 전에 지른다.

"그 연구소에 네가 있었으면 한다."

"네 판단력……."

레이가 할 말을 잊고 얼이 빠졌다.

"……하?"

모욕 회피 성공!

현명하고 용감했다.

하지만 단순히 욕 먹기 싫어서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다.

"너만한 자를 본 적이 없다. 너의 궁극적인 연구 목표는 모르겠다만 지원해주지. 무엇으로부터 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비호해주겠다. 나에게 그 정도 능력이 있다는 건 알 것이다. 태양성에 머물러라."

단테, 사랑고백엔 서툴지만 인재영입엔 거침없다.

그런데 얼굴은 왜 뜨거워지고 목은 왜 타는지.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이 없었다. 놀랐군. 단테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만큼이나 놀라게 할 수도 있군, 내가.

약간 만족스러울지도.

레이는 한참이나 믿을 수 없어 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하하하, 하…!"

비웃는다기 보다는 정말 신이 난 것 같았다. 단테는 순수하게 의아해져 물었다.

"왜 웃지?"

"아니… 내가 태양성에 가면 존경하는 나의 혈육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하."

그가 단테의 앞에서 본인의 사연 얘길 꺼낸 건 처음이다. 표현도 묘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낼 단서였다. 단테는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이는 이 제안이 어지간히도 유쾌한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웃고는, 즐거운 듯 이런 말까지 했다.

"이번만큼은 전부 무덤에서 꺼내서 이 얘길 들려주고 싶군."

내심 놀랐다. 그가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 노골적인 악의를 드러낸 것도 처음이었다.

레이는 계속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지. 태양성도 곤란해질 거고, 나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면 이룰 수 없는 목표가 있거든."

"그게 뭐지?"

레이가 기분 좋아보이는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안 알려줘, 꼬맹이."

"꼬맹이 취급하지 마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런 제안 하는 걸 봐라. 혈기왕성한 꼬마나 할 수 있는 짓이지."

그 표현은 틀렸다. 불같은 성질머리는 나이에 상관 없는 태양성 특산품이다.

"흥, 너는 과감한 결단력을 꼬마 짓이라 부르나."

"그리고 책사 해달라는 거잖아? 개인 연구시간 뺏기기 싫어."

"비호는?"

"없이도 지금껏 잘 살았어."

'잘' 살았는지는 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만.

뭐, 단테도 그가 스카우트 한 번에 태양성에 오리라 생각한 건 아니다. 온건한 제안으로 안 온다면 역시 좀 더 계획을 세워야겠다.

단테 개인이 탐욕스럽고 야심찬 성격인가는 다소 모호하다. 하지만 태양성의 군주로 국한하자면, 그 자는 확실히 탐욕스럽고 야심찬 게 맞다. 태양성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져야만 하니까.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상대가 태양성에 오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난다."

윽. 단테가 팔짱을 끼웠다. 하여간에 군주로서는 이 신출귀몰한 현자와 계속 끈을 연결해두고 싶다.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대가를 내어주지. 원하는 게 있나?"

"신기루 불꽃."

그건 태양성의 보물, 주홍빛 빛을 뿜는 4500캐럿짜리 가넷의 별명이다.

"일주일만 보게 해줘. 흠집 하나 없이 돌려주지."

참고로 대관식 때나 나오는 물건이다.

"십 년 정도 태양성에 머문다면 생각은 해보지."

"아, 협상은 성가신데. 태양성에만 있는 보물이 필요하다고."

레이가 슥 단테를 훑어봤다. 사실 태양성의 제일가는 보물은 신기루 불꽃 따위가 아니다….

단테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왜 그렇게 보지?"

이 때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성주님. 변경백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요약하자면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의 백작이 태양의 군주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지난 사흘간 어째서 마물들이 떡하니 상행로 위에 자리잡게 두냐며 내내 단테를 들볶던 자다.

그는 사건이 빠르게 해결되었다고 말을 바꾸지 않았고, 어쨌든 마물들이 국경 안에 거점까지 세웠던 건 사실이지 않냐며 국경 방어권을 좀 더 가져가려고 한다.

레이는 지난 나흘간 단테와 함께 있었으므로 그가 무슨 요구를 받는지도 알고 있었다. 변경백은 국경 방어에도 백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이 없고 자신의 재산이나 불리는 자다. 더불어 단테가 제대로 권력을 장악하려면 반드시 없애버려야 하는 가문이기도 했으나 여태껏 없애지 못했다.

시종이 나가자, 레이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단테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상행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자산이 많아."

"그런데 용병 노릇을 해줬어?"

"용병 노릇이 아니다. 책임 방기죄를 물어 재산을 몰수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당장 무고한 백성들이 죽고 있는데 그걸 방치한단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내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함은 백성을 위해서지 그 반대가 아니다."

"……."

단테가 투덜거렸고 레이가 잠시 말이 없었다. 단테가 시종이 준 편지를 보며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레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2주만 있어주지."

"!"

"변경백을 없앤다면 신기루 불꽃 빌려줘."

"대여시간을 초단위로 계산한다면 좋다."

단테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시종을 불렀다. 레이가 통이 작다느니 뭐라 욕했는데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의 단테는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시종에게 계약서 쓸 종이부터 가져오라 한 후, 단테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2주만에 변경백을 어떻게 처리할거지? 몇 년간 골치아픈 상대였다만."

"애송이 성주."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투 준비하듯 어깨를 풀었다.

"너는 편법을 몰라. 내가 정쟁을 알려주지."

그리고 2주동안 레이는,

내부 분열 유도, 증거 조작, 혐의 조작, 암살 시도 조작, 반란 유도, 군사 배치, 회유, 협박, 설득, 자백제, 심리 조작, 여론전, 정치전, 뇌물, 상인 회유, 거짓소문, 무역 규제 강화와 완화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정말 약속한 날짜에 변경백을 처형장에 세웠다.

레이는 능력을 보여줬다.

단테는 레이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졌다.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다. 레이는 단테가 보는 앞에서 신기루 불꽃에 측정장치를 연결하고 모종의 실험을 했다. 텔레파시 장치와 통신… 뭐 그런 걸 연구한댔는데 적당히 흘려들었다.

대여시간은 1시간. 태양성 최중요 국보이니만큼 성주가 직접 감시하는 형태다만은 누가 감시했어도 저 학자는 신경도 안 썼을 것 같다. 저 집중한, 신난, 연구에 푹 빠져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 안다.

단테는 그냥 소파에 반쯤 누워서 레이를 구경했다.

정체가 뭘까?

더러운 정쟁에 익숙하고, 숨어 사는 처지고, 태양성에 온다면 곤란한 일이 생기고.

거기에 저 명령이 익숙한 태도, 일반인 신분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지식, 가끔씩 보이는 버릇, 음악 교육을 받았던 흔적, 심지어 옷입는 스타일에서까지.

나이는… 글쎄.

단테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몇 살이지?"

뭔가 사각사각 빠르게 적어내리던 레이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124."

"…."

단테가 한 박자 늦게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대답해 준 거?

레이도 뒤늦게서야 필기를 멈추고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딱 한 마디 하고 필기로 돌아갔다.

"방해하지 마."

1시간밖에 안 되니까 최대한 집중하고 싶은가보다. 단테는 스르르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렇군. 103살 연상이군….

…그게 어느 정도지?

십 년 이십 년이라면 알겠는데 단위가 세 자릿수로 넘어가니까 가늠이 안 된다. 백 년 전엔 무슨 일이 있었지? 단테는 역사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과 더불어 이전 성주 내외가 말해줬던 역사 뒷편 야사까지 떠올렸다. 백 년 전에 클라인스터 왕국에서 피바람이 불어 왕조가 바뀌었다는데, 그때 이전 왕족은 물론 그들의 시종들까지 싹 다 처형하면서 인재를 많이 잃었다고, 그 중에 가장 아까운 건 불세출의 천재 왕자…….…

"……."

응?

잠깐…….

10살 때부터 마도공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시신을 발견하지 못 해서 아직도 왕국 내에서 비밀리에 추적 중인…………….

세간에는……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권속 수준의 마법사이기도 했다는……….

발각되면 기사단한테 처형당할………….

태양성에 있는 것까지 들키면 왕국이랑 전면전………………….

한시간이 지나자 시계에서 종이 울렸다. 레이가 혀를 차더니 미련이 뚝뚝 남은 손길로 일지를 정리하고 측정 장치를 수거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는데….

"엉? 표정이 왜 그래?"

단테는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냥 레이를 가리키며 멍청하게 입만 뻐끔거렸다. 대담하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고, 잘도 태양성 지하 보물고까지 왔다. 그러고보면 이 자는 부기사단장 앞에서도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했다.

이런 말밖에 안 나왔다.

"너, 너, 너 잘도, 잘도…!"

"뭐가? 신기루 불꽃은 멀쩡해. 확인해봐."

아니, 아니, 아니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다. 단테는 이런 불확실한 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의 발작적으로 물었다.

"너 혹시 백 년 전의…."

그런데 이 이상으로 말이 안 나왔다. 맞으면? 맞으면 어쩌지? 단테는 걸려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만은 스스로 전쟁의 원인을 불러일으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레이가 짧게 탄식했다.

"아."

그리고 슥 눈알을 굴렸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오해고, 전부 뜬소문이야. 나는 그냥 오래 살았을 뿐 평범한 학자라고."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사기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양성에서 볼 일은 다 끝났으니 다음에 보자."

경악하는 단테를 두고, 레이는 휙 도망쳐 사라졌다.

미소만 남기고.

그렇게 스카우트는 불발로 끝났다.

태양성의 젊은 성주는 인생을 배웠다.

끝.

Series this work belongs 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