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장식(裝飾)
1. 액세서리 따위로 치장함. 또는 그 꾸밈새.
2. 그릇, 가구, 옷 등에 쇠붙이ㆍ헝겊ㆍ뿔ㆍ돌 따위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다는 데 쓰는 물건.
3. 어떤 장면이나 부분 따위를 인상 깊고 의의 있게 만듦.
아무것도 닿지 않은 새하얀 눈밭이나 종이를 보면 무슨 기분이 드는가? 그리고 만약 거기에 무언가 얼룩이 생긴다면, 시선을 끌어당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워록은 용무가 있어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고갤 들어 큰 의미 없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때, 저도 모르게 눈이 무언가에 잡아끌렸다. 따라가 보니 그 끝에 선 것은 한 사람. 정확히는 그가 내리기 시작한 후드와 머리카락 틈으로 반짝인 광채였다. 붉은빛이 눈을 찔렀다. 잠시 멈췄던 두뇌가 안구와 빠르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여러 번 임무를 함께했던 헌터였다. 바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 붉은 빛 때문이었다.
거미줄에 아침 이슬 대신 핏방울이 맺힌 것처럼 가늘게 짜인 금색 선에 선명한 적색 보석이 얽혀있었다. 중앙의 다른 것보다 큰 타원형 알은 주변의 빛을 되비쳐 워록의 눈을 쏘듯이 간지럽혔다. 가히 사치스럽다고 말하기도 모자란 귀걸이였다. 햇빛마저도 그 주위를 굴곡져 작은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워록이 보던 단조롭고 흐릿한 색채의 헌터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새벽 하늘빛을 맞는 눈 덮인 평원이, 누군가 흘린 혈흔으로 얼룩진 걸 본 것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항상 아무런 장식도 없고 염색도 하지 않은 가벼운 기본 방어구 차림의 헌터였다. 무엇도 상관하지 않던, 마땅한 성향도 없어 안쪽까지 회색일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감추고 있던 취향인 걸까? 아니면 선물 받은 걸까. 혹은 특별히 오늘만 기분을 내는 것인가. 방어구와 같은 채도 낮은 무채색 복장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그쪽이려나. 자동적으로 분석은 하고 있었지만, 워록의 몸은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붙잡고 질문할 새도 없이 그를 발견하지 못한 헌터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워록이 미션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헌터의 귀걸이는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밋밋한 방어구를 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헌터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하나하나 망상하기 시작했다. 일단 발자국이 하나라도 찍히면 이전엔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자들이 설원에 앞다퉈 발자국을 남기듯. 워록은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보석과 수많은 색조, 알지도 못했던 수많은 종류의 장신구를 알아갔다. 깊은 상념에 잠겨 의미 없이 배회했다. 임무지에서 자잘한 실수가 늘었다. 그는 지독하게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때를 회상하며 거닐던 시장에서 자신의 망상과 제법, 아니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는 팔찌를 발견하고는 결국 충동적으로 하나 사버리고 말았다.
그걸 시작으로 워록은 반지며 팔찌, 목걸이, 머리 장식, 발찌, 귀걸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연구를 제하고는 검소하게 살아와서 비용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구상과 들어맞는 물품이 없을 때는 어렵사리 주문 제작을 하기까지 했다.
그 가볍고 자유로운 발목을 붙잡을 움직일 때마다 짤랑이는 발찌
반지와 이어져 헌터 특유의 은밀하고 섬세한 손놀림을 방해할 사슬 달린 팔찌
가느다랗게 짜인 금속에 조밀하게 보석 꽃을 얽은 헤어 바인과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가릴 베일
그리고 그의 스스로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도 자신 옆에 구속해놓을 목걸이까지
워록은 어느새 장식장 하나를 다 채운 그것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칼루스도 아니고 그리도 매인 곳 없는 사람을 보석으로 휘감아 제 곁에 붙들어놓겠다니.
워록은 그날부터 장식장 위에 천을 덮어버리고 장신구를 사는 것도 그만두었다. 대신 헌터와 약속을 더 자주 잡았다. 원래 임무가 끝나면 식사 일정이 이어지던 사이라 어렵지 않았다. 임시 화력팀을 구성할 때 가능한 한 헌터를 끼워 넣었다. 같이 임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사적인 만남도 함께 계획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며 헌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갔다.
한편 헌터는 손발 잘 맞던 워록이 더 친해지려는 기미를 보이자 잘 됐다고 생각했다. 수호자 생활을 오래 해온 만큼 슬슬 고정 화력팀원이 있어도 좋겠다 생각했으니까.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긴 했지만 흔히 워록하면 생각나는 이미지처럼 연구에 눈이 돌아있지도, 사교성 없이 딱딱하기만 하지도 않아 괜찮은 친구라 여기고 있었다.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나 워록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는 아직 상상도 못 했다. 어쨌거나 먼저 고정 화력팀 하자고 한 건 헌터였다.
그 제안을 받고 워록은 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고 손을 짚어 다시 확인했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빨랐나 싶기도 하지만-승낙했고, 민간인 구역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고스트에게 믿기지 않는다며 같은 말을 단어만 바꿔가면서 주절거렸다. 고스트는 그렇게 되도록 수호자가 유도하지 않았냐고 지적했지만 그런 건 워록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기준엔 별것도 아니었으니까. 헌터에게 선을 넘는 호감을 가질 것 같은 수호자에게는 기민하게 한동안 집중해야 하는 문젯거리를 던져주거나, 헌터가 손발이 맞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수호자에게는 그의 성향에 맞는 다른 수호자를 소개한다거나.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방해꾼들은 하나둘씩 치워지고 헌터와 워록은 워록에게는 느리게, 헌터에게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함께 군체 소굴을 돌파하기도 하고 네소스 경치 구경을 하면서 간식도 먹고. 헌터는 그런 사소한 시간들이 좋았다. 전투에서 있었던 실수로 웃고, 며칠간 이어진 임무 때문에 야영하면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거나 워록이 항상 간식으로 같은 것만 가져와서 장난스레 핀잔을 준 일 같은 것들.
그의 눈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 꿈결 같이 존재하는 장소를 향해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옆에 서있기 시작한 워록에게 닿아 머무르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헌터는 탑에 작은 개인 구역에서 살았기에 조금 더 널찍한 민간인 구역에 사는 워록이 가끔 하는 초대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주변 가게에서 산 음식은 따뜻하게 데워져 식사에 신경 쓰지 않던 헌터가 자주 느끼지 못하는 충족감을 주었다.
필요한 가구로만 채워져 있는 집은 워록의 손길이 묻어 보기만 해도 집주인의 섬세한 성정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반대로 헌터의 쿼터는 어질러지진 않았지만 정돈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게 휑했다. 그곳은 헌터가 탑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훤히 드러내서 헌터는 더욱 거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 비해 워록의 집은 따스하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점이 있었다. 천으로 덮인 저 장은 뭘까? 하루씩 자고 가는 일도 있었기에 헌터는 이제 워록의 집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워록도 그걸 의도했고. 하지만 먼지가 쌓이진 않았어도 오랫동안 건든 흔적이 없는 저건 뭘까? 여느 때와 같고 특별하지 않던 날 헌터는 워록에게 물었다. 기분 나쁘거나 말하기 어려운 주제라면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면서.
워록은 주저했다.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부끄럽거나 화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가 천을 처음에는 천천히, 입매를 굳히며 손을 다잡고는 확실히 끌어내렸다. 그 안에 유리 너머로 헌터를 사로잡은 건 작다고는 단연코 말할 수 없는 장 안에 가득 채워진 갖가지 장신구들.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잦아들고 내린 침묵을 헌터가 먼저 깨트렸다. 숨을 내쉼과 함께 터져 나온 작은 감탄사, 호사스러운 취향에 대한 경외. 워록은 헌터의 안색이 괜찮은 것을 보고 살짝 안심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안도할 수는 없었다. 그게 전부 헌터를 생각하며 샀다는 것을 들키면...!! 헌터가 징그럽다고 멸시하는 눈초리로 찌른다면 그는 견딜 수 없어서 그 눈을 영원히 감겨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워록이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헌터가 입을 열었다.
"이거 다 산 거야? 아니, 당연히 그렇겠지. 정말 멋지다. 왜 하고 다니지 않았어? 예뻤을 텐데!"
하고 다니다니? 워록은 전혀 예상도 못 했던-하지만 미리 계산할 수 있었어야 했던-질문에 혼란을 감추려 애썼다. 그에게 이것들은 당연히 헌터의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착용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제 무덤을 파는 일이었기에 워록은 순순히 거짓을 지어냈다. 한때 즐겼던 취미지만 이제는 축제 같은 날에만 착용한다고. 헌터가 보기에도 과도하게 화려한 물건이 많아 일상생활에는 거추장스러울 것 같았다. 수호자라는 그들의 직업에는 더욱. 자세히 보니 아름다운 만큼 운신에 방해될 것 같은 것도 있었다. 워록의 취향이 그런 걸까? 자신도 알아챈 걸 그걸 직접 착용했을 워록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찬란한 것은 사실이라 워록이 그걸 걸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입은 걸 보여줄 수 있겠냐 물어보자 워록은 망설이다가 유리문을 열고 상대적으로 수수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은사가 손의 오목한 곳을 따라 스르륵 늘어지고 공연히 뒷목을 쓸어올린 손은 더듬거리다가 잠금장치에 가 닿았다. 들릴 리 없는 작은 맞물리는 소리, 성격처럼 섬세한 목선과 느릿하게 목걸이에 세트인 귀걸이 뒤꼭지를 누르는 손끝. 우연히도, 아니, 워록이 처음 본 헌터의 귀걸이를 생각하면 당연히도, 귀걸이 중앙엔 선혈의 붉은색이 자리잡았다. 고개만 돌려 헌터를 일별한 워록은 마저 팔찌를 들었다.
팔목까지 꽤 길게 감싸는 사슬이 손가락에 걸치고 사이에 시선을 사로잡는 선명한 알갱이들을 제자리로 다듬는 손길에 헌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아, 얼굴이 붉어졌으려나, 경황이 없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았다. 가정집의 은은한 조명에 상기된 낯빛이며 과하지 않게 반짝이는 은제 목걸이, 귓불의 타원형 붉은 보옥을 둘러싼 투명한 큐빅, 늘어트린 가느다란 팔을 따라 손뼈에 얹히는 선을 이루는 작은 원들.
체격이 극적으로 차이 나지 않았기에 장신구들은 나쁘지 않게 들어맞았다. 헌터는 홀린 것처럼 워록에게 다가갔다. 같은 숨을 나뉘어 쉴 때까지 가까이 서서 목걸이에 손가락을 얽었다. 워록은 호흡조차 앝게 했다. 상대를 묶어놓으려 했던 구속구가 오히려 제 목줄을 채워버린 상황이라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조적으로 진지한 헌터의 곧은 눈썹과 펜던트가 고인 워록의 쇄골을 주시하며 내리 깐 눈. 손바닥이 오므라드는 느낌과 갑작스레 닥치는 갈증에 마른침을 삼키자, 목이 움직이는 걸 감지한 헌터가 살짝 올려다보며 시선이 맞물렸다.
아, 헌터가 목소리를 내고 경직된 고요가 흔적 없이 녹아버려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화들짝 물러난 헌터가 워록에게 황급히 사과했다. 그걸 고개를 흔들어 물린 워록은 바뀐 공기를 느끼고 기묘하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석류알이 맺힌 팔찌를 풀어내며 스친 예감은 불안하면서도 두근거렸다. 이제 덫을 놓는 쪽은 누가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