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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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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25-03-20
Words:
1,371
Chapters:
1/1
Hits:
4

손상된 카드의 사랑

Work Text:

오래된 수호자는 어떤 전형성을 띠기 마련이야. 최소한 이 헌터는 그렇게 생각했지.

정신에 금이 간 어느 헌터.

그는 싸움도 잘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임무에 성실하게 참여했어. 하지만 이상한 돌발행동을 하기도 하고 난데없이 자살해버리는 등 자세히 보면 문제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어. 그럼에도 자신의 그런 행동이 방해되지 않도록 단독임무를 주로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완수해오기 때문에 선봉대에서 신임이 있다는 점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었지.

그런 헌터에게도 한동안 일이 없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었지. 온종일 탑에서 늘어져 쉬고 있는데 그런 헌터에게 어린 워록이 다가왔어. 딱 봐도 햇병아리 같은 무기에 어리버리한 꼬라지가 귀찮아질 거란 예감을 줘서 헌터는 무시하고 난간에 기대서 손가락이나 두드려. 그러나 눈치가 없었던 건지 애기워록은 헌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어. 저기요 하면서 공손하게 시작된 장황한 말은 요약하면 자기가 스스로를 과신하는 바람에 혼자 하기 힘든 임무를 받아버렸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데 자긴 아는 사람이 아직 별로 없고 헌터가 여기서 제일 고참 같아 보이는 데다 실력 좋다는 소문도 들었다 등등 그런 내용이야. 뒤로 이어지는 칭찬을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헌터는 난간에 꾸물꾸물 올라서는 것으로 워록의 말을 끊었어.

"야," 

"네?" 

"싫어." 

그 말을 끝으로 헌터는 몸을 뒤로 기울여서 떨어졌어. 그러고 부활 깔쌈하게 한번 받을 줄 알았으나 갑자기 발목이 턱 잡힌 느낌이 들더니 눈앞이 번쩍였지. 헌터는 등과 뒤통수가 얼얼한 것에서 자신이 탑 벽에 세게 박았다는 것을 깨달아.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위를 올려다보는데 글쎄, 어리바리해 보이던 애기워록이 자길 잡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헌터는 뭐니 뭐니 해도 폼인데 꼴사나운 꼬라지에 민망함이 차올랐고 헌터는 놓으라며 꿈틀거렸지. 하지만 워록도 절박했는지 그 가늘어 보이는 팔에 힘을 주고 잡았어.

급기야 헌터가 잡히지 않은 발로 워록을 걷어차려고 하니까 빠르게 머릴 굴린 워록이 소리쳤어. 그렇게 해도 절대 안 놓을 거라고, 내기해도 된다고, 그리고 자기랑 임무 가기로 약속한다면 놓아주겠다고. 속으로 욕을 한 헌터는 빠르게 결정을 내려. 사실 귀찮은 거였지 싫은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싸움이 고프기도 했으니까. 그냥 애기 뒤치다꺼리는 안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렇게 합의하고 헌터는 한번 부활했어.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생글거리는 워록의 악수를 무시하고 헌터는 날짜랑 시간이나 잘 보내놓으라고 대화를 끊어버렸어.

 

그리고 임무 당일날 막상 전투 시작해보니 애기워록은 생각보다 헌터를 잘 따라와 줬어. 백업도 잘해주고, 잘 죽지도 않고. 나름 애기 있다고 헌터도 갑자기 자살한다거나 심심하다고 몰락자 함정 지뢰를 뛰어서 지나간다거나 하지는 않았어. 오랜만에 멀쩡하게 정신줄 잡고 임무 뛰니까 느낌이 이상했지만. 다음에도 불러도 돼요? 워록의 질문에 귀찮게 굴지 말라고 대답했으나 그래도 헌터는 매번 나가줬어.

그러다가 한번은 워록이 지금까지 도와준 거 고맙다고 자기가 밥이라도 산다고 제안했어. 헌터들에 대해 무슨 얘길 듣고 온 건지 술도 좋다며 잔 까딱이는 시늉도 하는 걸 보고 헌터는 됐다며 라면이나 한번 사라고 했어. 그래서 뭐어, 둘이 탑에 라면집에 갔고 거기서 대화를 좀 했어. 전투하면서는 사적인 대화를 잘 못하니까 만난 지는 좀 됐지만 이렇게 얘기한 건 처음이나 다름없었지.

헌터는 빠르게 라면을 먹고 그릇을 밀어놨어. 워록은 먹는 둥 마는 둥 헌터한테 연신 질문하기 바빴고. 언제부터 수호자였는지, 처음에 수호자였을 땐 어땠는지, 싸울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그리고 오래 수호자 생활하면 어떤지. 헌터는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하나하나 말해줬어. 나름 친해졌다고 충고 비슷한 것도 해줬지. 샤크스 경처럼 강한 게 아니라면 살라딘처럼 계속해나갈 이유라도 만들라고. 나 같은 헌터야 대충 살다가 언젠가 죽어버리라지, 헌터는 킬킬 웃으며 팔을 괴고 엎드렸어.

기갑단의 총성을 환청으로 듣고 귓가를 떠나지 않는 군체의 비명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불안해서 제대로 쉴 수도 없는데. 싸움에 나서면 당장은 괜찮아도 장기적으로 보면 악화될 뿐이지. 워록은 자신의 라면이 불어 터질 때까지 울었다. 그럼 수호자는 부질없는 일이냐며, 자기도 나중에는 당신처럼 돼서 희망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전쟁의 끝은 상상도 못 하면서 살게 되는 거냐고. 헌터는 볼을 긁적였어. 그리곤 워록의 등을 쓸어주었어. 정확히는 그런 건 아니라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거야."

헌터가 두리뭉실하게 손을 저어가며 설명했어. 본인도 말로 표현해보긴 처음이었지. 끝이 안 좋아도 해야 할 일로부터 도망치지 않아, 그게 중요한 거라면서. 워록이 울면서 라면을 마저 먹기 시작하자 잘 달랬다고 생각했는지 건성으로 등을 토닥이는 헌터를 보고 워록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

 

그다음 임무를 마치고 워록은 헌터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어. 저번에 실례했으니까 저녁을 대접하는 걸로 만회하겠다고 하자 헌터도 거절하기 어려웠지. 워록의 집은 가구는 갖춰져 있어도 개인적인 짐이나 그런 건 아직 얼마 없어 전체적으로 휑했어. 워록이 직접 한 따뜻한 요리를 내왔고 그런 식으로 둘은 워록의 집에서 몇번 식사를 했어. 헌터가 얻어먹기 미안하다고 음식을 사 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워록이 먹을 걸 준비했고 이제 헌터도 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지.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워록을 자기 집에 초대했어.

물건이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던 걸 치우고 부서진 가구는 버렸어. 오랜만에 환기를 하자 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이는 피나 기름으로 얼룩진 벽을 가리거나 닦고. 그리고 먼지 쌓인 조리도구를 씻어 어색하게 간단히 먹을만한 걸 만들었어. 누굴 집에 들인 건 오랜만이라 나름 마음이 불편했지만 워록이 과하게 예를 차린 것 같은 복장으로 꽃까지 들고 긴장해서 등장하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어. 꽃을 받아 들고 뭘 그렇게 굳었냐며 눈물까지 훔치자 워록 얼굴은 민망해서 금방이라도 정수리에 김이 올라올 만큼 달아올랐어.

워록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헌터는 컵 하나를 꺼내 물을 채워 꽃을 꽂았어. 그리고 식탁에 올려놓자 낡고 군데군데 부서진 집이 그나마 화사해 보였지. 실패한 음식을 만들지 않기 위해 정말 간단히 먹을 걸 만들었던 헌터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식사는 금방 끝나버려. 워록이 아쉬움을 내색하기도 전에 헌터는 집에서 드물게 예쁜 잔 하나를 꺼내 워록 앞에 놓았어. 그리고는 뭔가 알록달록한 술과 풀 쪼가리 같은 걸 꺼냈지.

기대하시라! 하며 우아하고 화려한 손길로 잔에 술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해, 기다란 컵에 층층이 액체가 쌓였고 얼음이 달그락거렸어. 마지막으로 투명한 술을 따르자 가운데가 가라앉으며 액체들이 얼음에 달라붙으면서 천천히 섞이기 시작했어. 위에 허브 같은 걸 뿌리고 헌터는 자랑스럽게 그걸 워록에게 밀어놓아.

헌터 특제 칵테일이었어. 전에 바에서 내기해서 배워온 거였지. 자기 앞에는 적당한 도수의 술을 따라놓은 헌터는 워록이 눈을 반짝이며 칵테일에 혀를 대보는 걸 지켜보았어. 한 모금씩 홀짝거리던 워록은 신기하고 예쁘다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칭찬을 쏟아냈어. 칭찬에 점점 반복되는 내용이 늘어가고 헌터가 슬슬 저거 집에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 무렵 워록은 슬슬 헌터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 좋아하는 행성에서부터 연애 경험은 있어요? 등등. 헌터는 저 자식 신상털이범이라고 투덜거렸어.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비유하자면 어린 친척 동생이 가족 모임에서 질문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서 친척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질문은 수호자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어. 헌터는 성의 없거나 짧은 대답이어도 착실히 답은 해줬지.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워록의 낯빛이 안 좋아졌어. 토하려는 건가 물어보려는 순간 워록이 소리쳤어.

"왜 그렇게 삶에 의지가 없어요? 해야 할 일이 아닌 거로부터는 도망쳐도 돼요? 그렇게 자신을 함부로 다뤄도 되냐구요!"

헌터는 어깨나 으쓱했다. 안 그래도 사는 거 고달픈데 술 취한 애송이 이야기에 진지해질 생각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럼 우리 내기해요!"

워록이 빽 소리를 질렀어. 피곤하게 굴지 말라는 헌터를 붙잡고 그는 강하게 말했어. 내기 한번 이길 때마다 원하는 거 하나씩 주기로. 갑자기 무슨 내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록을 달래기 위해 헌터는 그것에 응했어. 마침 집에 한두 장 빼고 멀쩡한 카드가 있었고 둘은 카드 게임을 시작해. 처음에는 대충 했으나 워록이 정신이 흐릿한데도 불구하고 우세하자 헌터도 진지해지기 시작했어. 나름 짬이 있는데 지면 자존심 상하잖아. 그래서 첫판은 헌터가 이겼어. 헌터는 앞으로 임무를 다섯 번 빼달라고 했고 워록의 흥정으로 두 번이 되었어. 헌터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워록과 임무 뛰는 게 자연스러워진 거지.

이제 그만하자고 했으나 워록이 때를 써서 한 판 더 하게 됐어. 그리고 이번에도 헌터가 이겼어. 그리고 또 한 번만 더, 한 판만, 이번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워록은 계속 투정을 부렸고 헌터는 거기에 넘어갔어. 대가는 미광체 한 줌, 전설 조각 조금, 라면 쿠폰 같은 사소한 것에서 앞으로 얻는 아이템 중 하나, 이오에서 방산충에 입수하기, 확프 뺑뺑이권 같은 워록 골려주는 걸로 변해갔어. 그리고 이번이 진짜 최종 완전 딱 진짜 마지막 판이 되었을 때, 마침내 워록이 승리를 쟁취했다. 손상된 카드를 빼지 않고 그대로 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용해서 헌터의 허를 찌른 거였어. 조금 놀랐지만 이제 워록이 이길 때도 됐지.

헌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뭘 줬으면 좋겠냐고 물었어. 당신이요. 헌터는 잠시 동안 못 알아듣고 눈만 깜빡거렸어. 워록이 목소리에 힘을 줘서 다시 말했어.

"당신이라고요. 그렇게 쓸 거면 저한테 주세요. 적어도 당신보다는 잘 관리할 거니까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워록의 눈에서 헌터는 취기가 아닌 불꽃을 보았어.

하하, 워록이랑은 내기를 하질 말라더니. 누가 머리를 후려갈긴 것처럼 멍해 있던 헌터는 뭔가 후련해진 것처럼 웃었어.

"이런 낡고 다 망가진 걸 가져서 어쩌시려고?"

그렇게 말하는 헌터는 숨길 수 없이 더러운 벽과 부서진 걸 버렸음에도 삐걱이는 가구처럼, 이미 고칠 수 없이 바스러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워록은 그런 헌터가 좋았어. 골동품에 이끌려 비싼 값에도 그걸 구입하고 보수하며 보존하는 것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 같이, 그렇게 잘 싸우는 헌터가 자신에게 의지해줬으면 했고 워록이 보기에는 충분히 훌륭한 본인을 아꼈으면 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떨어트린 카드에 물방울이 잔뜩 맺혔어.

방금의 불꽃은 어디 가고 고개를 푹 숙이고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기는 워록에게 헌터가 몸을 굽혔어. 볼을 적신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헌터는 워록과 시선을 맞추고,

"그래, 좋아. 잘해봐라. 이래 놓고 어리바리하게 굴면 도망갈 거다?"

씩 미소 짓자 예상하지 못했는지 훌쩍이던 워록의 눈이 커졌어. 그리고는 진짜냐고 묻는 것처럼 헌터의 손목을 잡고 그를 바라봤어. 헌터는 고개를 끄덕여 확답했지. 그러자 워록이 그대로 그를 꼭 껴안았어. 알겠어요, 좋아해요, 열심히 할게요 워록이 속삭이는 걸 들으며 이거 고백이었던가 하던 헌터는 그냥 그를 마주 안아주었어.

 

좋은 이야기지? 이런 이야기. 사랑이란 건 말이야, 어떤 전형성도 뛰어넘어버린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