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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dom:
Relationship:
Characters:
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5-03-31
Words:
1,393
Chapters:
1/1
Kudos:
1
Hits:
7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

Work Text:

숨 막히도록 더운 여름과 습한 겨울. 내리쬐는 태양과 습기를 머금는 지형 탓에 솔롱고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우 덥다.

때문에 강가의 솔롱고 사람들의 옷은 주로 통풍이 잘 되는 가벼운 직물로…


차가운 물을 가득 받은 나무 욕조에 앉았던 쿠무치는 언젠가 읽었던 여행가의 수필을 떠올렸다. 강가의 솔롱고가 매우 더운 지역이란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대체 어떤 더위인지 실제로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건조한 종이 위에 적힌 글자엔 열기가 담기지 않았고, 그가 여태껏 살아 온 날 중 단 하루도 “푹푹 찌는 열기”를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사원은 세상의 지붕인 산 높은 곳에 자리해 있었고, 여름에도 가끔 눈이 내리곤 했다. 가끔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비치는 날은 있었어도 숨 막히도록 더운 날은 쿠무치가 기억하는 한 없었다.


푹푹 찌는 더위. 가끔 더운 차에서 올라오는 김을 얼굴로 쐬며 이런 기운이 온 사방에 퍼져 있는 것인가 상상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상상이었을 뿐이었다. 신의 도서관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었고 쿠무치는 그 모든 지식을 들춰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차가운 물에 둥둥 뜨는 머리칼을 잠시 내려다보던 쿠무치는 천천히 몸을 미끄러트렸다. 창백한 가슴, 어깨, 목, 턱, 그리고 뺨이 차례대로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땅 위의 강줄기처럼 푸른빛 도는 머리칼이 수면 위로 퍼져나갔다. 쿠무치는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잠겼다.




차갑게 식은 발바닥이 푸른 타일 바닥을 탁탁 밟는 느낌이 좋았다. 옷을 느슨히 걸쳐 입고 머리를 수건으로 말아 틀어 올린 쿠무치는 한 손에 나무 빗을 들고 한라가 내어준 별채의 방문을 열었다.


“율리야, 내… 아.”


격자살 창문을 부드럽게 통과한 햇살 아래 테르무진이 책을 펼쳐 든 채 누워 있었다. 쿠무치가 가져온 책 중 하나였다. 그는 쿠무치와 눈이 마주치는 조금 머쓱해졌는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율리는 조금 전에 시장에 간다고 나갔는데.”


아, 이런. 낭패다. 쿠무치는 곤란해진 얼굴로 무겁게 젖은 수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틀어쥐었다.


“언제 오겠다는 말은?”
“글쎄. 나간 지 얼마 안 됐고 낙타도 안 데리고 나갔으니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왜, 심부름을 시키게?”
“아니, 음…”


율리는 괜히 시장을 구경삼아 기웃거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필요한 물건만 사고는 금방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율리가 돌아올 때쯤이면 머리카락은 엉킬 대로 엉켜서 수습이 곤란하게 되겠지.


쿠무치가 자신을 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자, 테르무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한 거라면 내가 도와줄까?”


쿠무치는 뭔가를 퍼뜩 깨달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소. 장군에게 부탁하기엔 좀 민망하군요.”
“왜? 뭔데?”


에둘러 거절하려던 것이 오히려 호기심만 자극한 꼴이 되었다. 테르무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쿠무치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나무 빗을 꽉 틀어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입이 작게 벌어지며, 아, 하고 알았다는 투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빗겨 줄 손이 필요하시군?”


테르무진이 씩 웃었다. 쿠무치는 그제야 그가 빗을 본 것을 알아차리고 허둥지둥 빗을 쥔 손을 등 뒤로 숨기고 방을 나서려 했다.


“미안합니다. 한라에게 하인을 불러 달라 부탁할…”
“아니, 아니, 안 되지.”


테르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가로 성큼 다가왔다. 과연 무인이라더니 그는 걸음이 무척이나 넓고 빨랐다. 테르무진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방 안으로 들인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쿠무치가 항변할 새도 없이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방석과 쿠션을 잔뜩 쌓아 푹신하게 만든 창 아래 햇빛 드는 자리로 그를 이끌었다.


“강가 사람들도 백족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야. 누가 엉뚱한 마음 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세이케이 공이-”
“사람이 욕심에 눈이 멀면 상상도 못 할 짓도 서슴없이 하는 법이지.”


그래, 그렇겠지. 아즈막의 왕궁 지하에서 본 섬뜩한 광경이 쿠무치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악취와 신음, 혀 잘린 듯 뭉개지던 말과 공포에 질린 눈들. 뱃속에 매듭이 얽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테르무진은 딱딱하게 굳어진 쿠무치의 얼굴을 흘끔 보더니 그를 방석 위에 앉히고 주먹 쥔 창백한 손에서 빗을 꺼냈다.


“그리고 이 집 사람들 바빠서 우린 상대도 잘 안 해주던걸.”


쿠무치 뒤에 자리 잡고 앉은 테르무진이 심드렁하니 말했다. 쿠무치는 다리 위로 쏟아지는 격자살 무늬의 햇살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번만 신세 좀 지겠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수건을 벗겨내자 머리칼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테르무진은 새삼 엄청난 길이와 숱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익숙하게 머리칼을 구역별로 나누고 끝에서부터 살살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빗이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소리만 방 안에 가득했다. 햇살 아래 잘 말린 무명천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것 같은 소리. 테르무진은 물기 머금어 엉킨 머리칼을 빗이 잡아당기지 않도록 머리칼을 중간에서부터 잡고 조금씩 힘을 주어 빗어 나갔다. 나무 빗에도 물기가 닿자 은은한 나무 향이 공기 중으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그 냄새였군.”
“예?”


테르무진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조금 나른해지려던 쿠무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관장한테서 무슨 향내 같은 게 나더라고. 난 사원 사람들은 다들 좋은 곳에서 향을 오래 맡고 살아서 그 냄새가 몸에 밴 줄 알았지.”


쿠무치는 작게 웃었다.


“향나무를 깎아 만든 빗이오. 여행길에서 자주 씻을 수 없을 때 머리에 벌레가 끓는 걸 막아 준다고 한답니다. 여행자들은 길 떠나기 직전에 머리를 짧게 깎는다지만 난 그럴 수가 없으니까.”
“좋은 물건이군. 나도 용병단 시절에 이런 거 하나 가지고 다닐 걸 그랬어.”


이젠 머리끝에서 조금 더 올라왔다. 나무 기름이 머리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빗질도 한층 수월해졌다.


“평소에는 율리가 빗겨 주나?”


테르무진이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엔 괄괄하고 천둥 같지만 지금은 마치 잠들기 전의 낙타같이 들렸다.


“길 떠난 이후로는.”
“저런, 율리는 조심성이 없어서 좀 아플 텐데.”
“씻지 않으면 그냥 내 손으로 합니다.”
“그래. 그럼 사원에 있었을 때는? 그때도 혼자 했나?”
“도서관에서… 도와주던 수행자가.”


눌미라. 쿠무치는 문득 그의 안녕이 궁금해졌다. 지금쯤 큰달님이 율리가 노각나무씨란 사실을 알아냈을까?


“머리까지 빗겨 줬다면 가까운 사이였겠군.”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소.”
“집에서 멀리 나왔으니 보고 싶겠네.”
“뭐…”


쿠무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집.


“어쩔 수 없지.”


바깥 정원의 분수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원 가득히 심어진 온갖 과일나무 꽃나무 사이로 새들이 분주히 날아다녔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와 노랫소리가 세이케이 저택의 벽을 덮은 푸른색 타일을 영롱하게 울리고, 정오가 지나 조금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바람으로 비즈나가 꽃의 향기가 실려 들어왔다. 모든 것들이 쿠무치의 눈꺼풀을 조금씩 밀어 내리고 있었다.


쿠무치는 조금씩 앞으로 떨어지려는 몸을 바로 세웠다.


“빗질.”


잠들지 않으려면 아무 말이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응?”
“많이 해 보았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테르무진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이제 머리 끝은 거의 다 말랐다. 나무 빗의 이가 점점 더 정수리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부 위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스쳐 지나가는 감각.


“어릴 적에. 아직 미성이었던 시절의 손위 누이들의 머리를 곧잘 빗겨 줬거든. 하하, 다들 어찌나 머리카락이 뻣뻣하던지. 차라리 양털을 빗는 게 덜 힘들었어.”
“누이가 있었소?”


등 뒤에서 푸스스 웃는 소리가 났다.


“왜, 극악무도한 용병대장에게도 가족이 있단 게 놀라운가?”
“그건 아니고….”


쿠무치는 잠시 어린 테르무진을 상상해 보았다. 붉은 머리를 산발하고 양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미성의 테르무진. 누이들에게 잡혀 와 머리를 빗겨 주는 테르무진.


“손위로 누이만 다섯이 있었지. 다들 내가 여자로 변성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어. 그런데 내가 그만 하룻밤 새 사내애로 변성한 게 아니겠소? 아침에 내가 끙끙거리고 있자 내 이불을 들춰 본 내 바로 손위 누이는 웬 우락부락한 사내애가 몸이 아프다며 뒹굴대는 꼴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지.”


그러면서 테르무진은 여자아이의 새된 비명을 흉내를 냈다. 쿠무치는 잠시 깜짝 놀랐다가 그게 그의 장난이란 걸 깨닫고는 작게 웃었다.


“그러면서는 울며불며 나더러 다시 여자애로 변성하라고 하는데, 아니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저런.”
“그래서 변성하고도 한동안은 하던 대로 여자 옷을 입고 머리도 누이들처럼 하고 다녔지. 성인식을 하고 나서야 겨우 누이들에게서 물려받은 옷을 뜯어고쳐 만든 남자 옷을 입게 됐고.”
“누이들이 무척 아쉬워했나 보군.”
“말도 마.”
“누이들은 잘 계시오?”
“음…”


잠시 뜸을 들이던 테르무진이 대답했다.


“다들 먼저 갔어.”


아.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쿠무치의 손이 멎었다. 방 안은 다시금 그의 머리를 빗질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실수했다.


빗질하는 손이 멈췄다. 쿠무치가 사과하고자 뒤를 돌아보았다. 테르무진은 가지런히 정돈된 그의 머리칼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다 됐다.”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쿠무치는 사과의 말을 꺼내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리칼은 엉킨 데 한 곳 없이, 한 가닥도 끊어지지 않고 근사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햇빛을 받은 옥색이 이리저리 빛났다.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뿌듯하게 보던 테르무진이 문득 눈을 빚내며 쿠무치와 시선을 마주쳤다.


“쿠무치 관장, 머리를 땋아 보신 적은 있소?”
“땋아?”
“그 편이 두건을 쓸 때도 머리를 정리하기 편할 거 같은데. 혹시 땋으면 아픈가?”
“그런 것 같지는 않소만…”
“그럼 내 땋아 드릴까?”


쿠무치는 잠시 망설였다. 빗질을 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를 만지게 하다니. 마치 아랫사람 부리는 꼴이 아닌가. 그는 정중히 거절하려다가, 문득 들판에 앉아 누이의 머리를 땋아 주는 어린 테르무진이 떠올라 말을 삼켰다.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쿠무치가 나와 마주한 세상은 그런 것들로 가득했다. 이를테면 세상의 전장을 주름잡던 용병대장의 능숙한 머리 손질 솜씨나 그에게 다섯 누이들이 있었단 사실 같은 것이. 너무도 사소해서 글로 적히지 않고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풀잎을 스쳐 지나 사라져버리는 이야기들이.


“자, 다 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테르무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쿠무치는 그제야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테르무진이 씩 웃으며 근사한 비늘을 가진 뱀처럼 길게 늘어진 테르무진의 머리칼을 그의 어깨에 얹어 앞으로 늘어뜨려 주었다.


“숱도 많고 길기도 해서 길이가 그렇게 줄어들진 않네. 묶을 게 마땅치 않아 내가 가진 가죽끈을 썼는데, 혹시 영 아니다 싶으면 비단 끈을 찾아올 수도 있어. 머리가 당기지는 않으시나, 쿠무치 관장?”


테르무진이 빗을 건네며 말했다. 비단 끈이라. 쿠무치는 땋은 머리 끄트머리에 둘둘 말린 구슬 달린 가죽끈을 보았다. 테르무진의 허리띠 위에 놓였던 끈이다. 매끈한 구슬들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쿠무치는 고개를 저었다.


“훌륭합니다. 신세를 졌군요.”


테르무진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또 머리를 빗어야 할 때 말해. 언제든 환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