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킨나라는 눈을 끔뻑였다. 익숙한 휘장이 보인다. 킨나라족 본거지, 왕의 침실. 그녀는 그녀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찰나의 위화감으로 인해 어색하게 들어갔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이제 와서는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째일지 헤아리는 것을 그만둔 지도 오래다. 킨나라는 정갈히 드리운 휘장의 주름에 시선을 주었다. 희뿌연 주름을 눈으로만 훑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이 지겨운 상황이 끝이 날지 몰랐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심코 몸을 수그리고 여윈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킨나라?” 낯익으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킨나라를 불렀다. 그녀가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멀거니 휘장을 수놓는 음영을 향했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화자를 보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놀란 표정의 아이라바타였다. 돌아온 횟수가 늘어 갈 수록 킨나라를 마주 대하는 그의 안색은 희어져가는 것도 같았다. 지난 회차의 무엇도 알지 못할 텐데, 이상도 하지. 상당히 놀란 것 같았던 그는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 가까스로 말소리를 냈다.
“괜찮아?”
인간형의 발성기관으로 말하기 어렵다면 수라어로 해도 될 텐데, 그런 것도 미처 생각지 못할 만큼 평정을 잃은 걸까. 바로 직전의 삶에서 그는 무어라 말했더라. 희뿌연 안개처럼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왔구나? 오랜만이야? 아니면 이번과 동일하게 괜찮아? 였던가.
메마른 시선이 아이라바타의 얼굴로부터 흐르듯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깎다 말아 반쯤만 과육이 드러난 사과가 바닥을 구르고, 아이라바타의 손은 느슨하게 과도를 쥔 채 늘어져 있다. 킨나라는 웅크렸던 몸을 바로 하고 느릿하게 사위를 훑어 보았다.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화분… 아마 그녀가 브리트라의 둥지로 거취를 옮겼을 적에 챙겨 가지 않았던 식물들이 방금 누군가가 물을 주기라도 했던 것처럼 함빡 젖어 있었다. 처소의 정경은 언제나처럼 적막했다. 언제부터 실내에 고여 있었을지 모를 공기는 미지근했다.
대답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킨나라는 그제야 자신이 아이라바타가 물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만히 아이라바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뭘… 말하는 거지.”
입술 밖으로 끄집어 낸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킨나라의 기억 속 그녀의 목소리는 항상 그랬다. 더는 기억하지 않게 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아이라바타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 내가 눈치가 없었네. 상심이 컸을 텐데…….”
킨나라는 미간을 좁히고 아이라바타의 말을 헤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생각해냈다. 그녀가 돌아오는 시점이 언제였는지. 언제로 고정되어 있었는지…. 그래, 죽지 않는 한 영영 눈치라는 것이 존재치 않을 이 망아지가 그녀의 눈치를 살필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브리트라와의 결별. 킨나라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일그러진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그 문제는 됐어.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녀가 돌아오는 시점은 항상 이 때로 정해져 있었다. 영원히 찬란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예기치 못한 종말을 맞은 직후. 영혼이 소멸되기까지 잊지 못할 깊은 상흔이 남겨진 그 때. 이렇게는 살지 못할 것만 같았고 오래도록 슬퍼하며 울었지만… 이젠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지금… 그런 것을 느끼기에 그녀는 너무 낡아 버렸다.
그것보다는 당장의 일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영원한 공허 속으로 침잠하려는 의식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앞으로의 삶의 궤적을 어찌하면 좋을지 대략 가늠해 보아야 하니까. 이맘 때 쯤 그녀의 동족들이 그녀를 닦달했던 문제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 아.
여태 그녀가… 첫 삶의 그녀가 왕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연애놀음이나 일삼았던 탓에 킨나라족에게는 동맹이랄 것이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상황이 개선되길 바라기에는 숫기 없고 내향적인 킨나라에게 외교적 수완이나 정치력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을 테니, 그런 만큼 종족의 내실을 다져야 하니 다들 입만 열면 번식 거리는 앵무새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번식은 왕으로서 일족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공무의 일환이었다. 킨나라의 이름을 받아 살고 있으니 그 정도는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수백 수천 번의 반복 끝에 서 있는 그녀는 첫 삶의 그녀 자신이 어째서 이런 사소한 의무조차 제대로 행치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첫 삶의 그녀는 무얼 했던가. 지끈거리는 두통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시점의 그녀의 몸에 이상이 있을 리 없으니, 그저 느낌 뿐이겠지만.
정 외면하고 싶었다면 야크샤족의 왕처럼 끝까지 외면하든지. 연애놀음에 심취해서 미적거리며 뜸하게 마지못해 번식에 참여하니 동족들이 이리 방자히 구는 것 아닌가. 이름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일평생 휘둘렸던 첫 삶에서조차 이 시점에서는 명백한 일인자요 일족의 왕이었는데,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처신하지 못 해서……. 무책임했던 과거의 자신의 행보에 옅은 짜증을 느꼈다. 킨나라는 상체를 뒤로 하고, 한 팔로 침대를 짚었다.
“동족들에게 전해. 내가 여성형으로 있을 테니, 짝 지을 순번을 정하라고.”
킨나라는 손을 뻗어 휘장을 고정했던 끈을 잡아당겼다. 매듭은 쉬이 풀렸고, 얇은 천이 흩날리듯 내려앉았다. 아이라바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킨나라.” 우물쭈물하던 아이라바타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킨나라는 휘장 건너의 아이라바타를, 아이라바타의 잔상을 바라보았다. 킨나라는 아이라바타가 단 한 번도 그녀와 짝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킨나라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저가 그녀에게 마음이 없음을, 최상위권 나스티카에게 응당 기대되는 일인자와의 번식을 확실하게 거절함으로써 구태여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터인데. 간다르바를 아주 싫어하는 우르바시조차 이렇게까지 굴지는 않았다.
“널더러 나와 짝 지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 짝을 짓든, 번식에 참여하지 않든 네가 알아서 해.”
그리 말하는 킨나라의 음성에 옅은 좌절이 묻어났다. 아이라바타가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휘장 너머로도 보였다. 휘장 쪽으로 손을 뻗었던 그는 머뭇거리다가 다시금 손을 내렸다. 킨나라는 휘장을 쳐 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덕에 아이라바타의 표정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 그녀는 지금 아이라바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이라바타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지만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킨나라는 누운 자세를 바로 하고 천장 쪽을 바라보았다. 누워 바라보니 드리운 휘장에 아무런 문양이 없어 심심해 보였다. 아이라바타가 돌아가면 휘장에 문양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킨나라는 혼잣말을 하듯 작고 옅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이 여성형으로 있으면 효율이야 나쁘겠지…. 그러나 나는 남성형이 약하니, 그 모습으로 번식을 해서는 의미가 없어. 임신 기간 중에 수라화하지 못하는 건, ……. 뭐, 대뜸 타종족 왕을 죽일 놈도 없을 테니 상관 없겠군.”
“그게 아니라! ….”
아이라바타가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이자 킨나라는 입을 다물었다. 킨나라는 눈만 굴려 아이라바타를 바라보았다.
휘장에, 침대에, 그녀의 몸 위에 아이라바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이라바타의 뒤로 쏟아지는 빛이 눈부셨다.
두통이 일 것만 같아 킨나라는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 빛으로 가득했던 시야가 잠잠해지자 마음 또한 침착해졌다.
그녀는 아이라바타와의 대화를 이만 끝내고 싶었다. 누워 있었는데도 킨나라는 편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환경에 조성된 처소에 있었지만 좋지 않았다. 연이은 침묵으로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싫었던 것도 아니다. 나스티카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일이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기꺼운 일이었다. 그저, 그저.
킨나라는 아이라바타가 불편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목소리가 잠긴 채 흘러나왔다. 듣기에 따라 울먹이는 것 같이 느껴질 지도 모른다. 킨나라는 어째서 목소리가 그리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통상 이러한 음성은 그녀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을 때 들린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무엇을 참고 있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을. 킨나라는 자신의 마음 속을 샅샅이 훑어보았으나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
“그…….”
아이라바타가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듯 옷자락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그는 숨을 흡 들이마셨다. 부유하던 마음을 마침내 다잡은 것처럼. 곧 킨나라의 위로 선선한 공기가 쏟아졌다. 아이라바타가 휘장을 걷은 모양이었다.
킨나라는 시야를 새카맣게 만드는 천 사이로 따갑게 쏟아지는 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덮은 팔에 꾹 힘을 주었다.
아이라바타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라바타가 킨나라의 위로 몸을 기울였고, 그녀는 그가 만든 그늘 가운데 있었다.
아이라바타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킨나라는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을 들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어. 꼭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 지금 많이 힘들 테니까.”
반사적으로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따위의 말이 튀어갈 뻔 했다.
첫 십여 번의 삶이 남긴 잔흔이었다. 약해져서 존중받지 못했던 왕으로 살았던 시간의 증거였다.
킨나라는 목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수도 없이 삶을 반복해도, 첫 삶에 가까운 수많은 삶들의 기억이 이제는 희미해도 불안정했던 그 시간들이 그녀에게 남긴 흔적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이라바타에게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이라바타는 수도 없이 그녀를 상처입혔고 아이라바타의 존재 자체가 킨나라를 위협했지만 우습게도 그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눈치가 없을 뿐이었으니까.
킨나라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눈을 덮은 천자락에 속눈썹이 쓸렸다.
킨나라가 지난하게 늘어선 자신의 기억들을 한 바퀴 돌아보는 와중에도 아이라바타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일단 네가 돌아……왔으니까 다들 전처럼 널 채근하진 않을 거 아냐.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아이라바타는 첫 삶으로부터 여태까지 한결같이 바보같았다. 킨나라는 입 안이 쓰다고 생각했다. 아이라바타는 동족들이 킨나라의 상처받은 마음… 실연당한 사정을 배려해줄 것이라고 여기는듯 했지만, 킨나라는 회의적이었다. 근거 있는 회의였다. 동족들은 그저 여태껏 왕의 의무를 사실상 내팽개쳤던 왕에게 의무를 다하길 요구할 생각만 만만일 것이다. 수많은 삶들 가운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그러나 킨나라는 아이라바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그가 좋을 대로 생각할 것이고, 그에게 동족들의 인성에 대한 사실을 구태여 깨우쳐줄 필요도 없었기에.
“말은 전해 줘.”
“……알았어.”
아이라바타는 여전히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듯 했다. 그가 스스로 물러나길 기다리던 킨나라는 참을성을 잃고, 그를 등지고 돌아누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나가. 혼자 있고 싶어.”
“……응.”
아이라바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숨결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는 일어서서 휘장 밖으로 나섰다. 살랑이는 기척이 침실에서, 처소에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번에도, 아이라바타와의 대화가 이리 길게 이어졌던가. 회고하던 킨나라는 다시 바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끝내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이라바타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그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에게 정을 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셀 수 없이 반복된 삶들 가운데 아이라바타가 오류 수정 시기를 무탈히 넘긴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삶이라고 다를 것이라고 여길 이유는 없었다.
처음 몇 번은 이름에 생긴 오류 때문이었다. 킨나라는 아이라바타의 이름을 빼앗아 죽인 적도 있고, 그저 목숨만 취했던 적도 있었다. 삶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그녀의 이름에 오류가 생기는 것은 킨나라라는 이름 자체에 예정되어 있는 것임을 알았고, 이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그녀는 아이라바타에게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언제나 아이라바타는 죽었다. 살해자는 매번 바뀌었어지만 결과는 같았다. 여러 번 아이라바타를 살려 보려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누적된 실패는 절망이 되었고, 끝내는 체념으로 귀결되었다.
그 시절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안다.
브라흐마가 아이라바타를 죽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킨나라가 아이라바타가 되든, 킨나라인 채 왕으로 남든, 킨나라의 이름을 반납하고 죽기를 택하든, 아이라바타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이야기였다.
킨나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꾹 눌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