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감기라니...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3년 동안 기침 한 번 한 적 없었다. 타고난 체질이 건강한 것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공백이나 휴식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을 들인 것도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야구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고시엔에 나가기까지 거쳐야 할 학교들, 치러야 할 경기들, 연습과 훈련들... 무수히 많아 보이지만 결국 반년도 지나지 않으면 모두 끝나는 일이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하면서 부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미유키는 그래도 고교 3년을 공백기 없이 치르는 게 목표였다. 옆구리 부상만으로도 이미 그 목표에 충분히 금이 간 것인데 그런데 이제는 감기라니... 부상은 경기라도 핑계로 댈 수라도 있지만 이런 건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수면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까? 훈련이 과했을까? 영양이 부족했을까? 미유키는 감기의 원인을 하나하나 따져보려고 했지만, 생각은 손에 쥐어도 손바닥을 펼치면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손바닥을 떠나버렸다.
미유키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겁나... 손바닥은 러닝을 막 마쳤을 때처럼 피가 돌아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한겨울 바람을 맞은 것처럼 시리고 곱아드는 것 같기도 했다. 뜨거운지 어쩐지 알 수 없었다. 이마에 얹어둔 수건이 미지근해진 걸 보면 아직 열이 나는 것 같기는 했다. 수건을 다시 적셔야겠지만 그러려면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럴 기운이 없었다. 미유키는 누운 채로 수건을 이마에서 치웠다 그래도 보건실에서 약을 받아와 먹었으니 한숨 자고 나면 열 정도는 가라앉을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엄격하게 관리해 온 건강한 십 대의 신체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유키는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이미 안대를 쓰고 있어 어두운 세상이 한결 더 컴컴해졌다. 조용하다. 아마 수업 시간인가 보지. 체육 시간인 학급이 하나도 없는지 으레 들릴 법한 구령 소리라든지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라든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평소에는 주변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던,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만이 미유키가 이 공간에 존재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미유키는 뒤척였다.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작은 움직임에도 두통이 일고 뼈마디가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차라리 맞은 거였다면 오후 훈련에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지금 몸 상태라면 내일 아침 훈련까지 빠져야 할지 몰랐다. 수업까지 놓치고... 쿠라모치가 내 몫까지 필기를 열심히 해주고 있으려나. 그냥 반장에게 필기를 보여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이 미친놈아, 이렇게 열나는 채로 훈련을 했냐?
나한테 감기 옮기려고 작정했냐며 화를 내던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선연했다. 컨디션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쯤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물을 많이 마시고 무리하지 않으면 감기 기운 정도로 그치고 넘어갈 것이라고 넘겨짚은 것이 실수였지만. 몸을 풀고 뜀박질을 하며 심장이 힘차게 펌프질되는 동안 혈관 곳곳으로 피만 아니라 바이러스까지 함께 운반됐는지, 훈련 중간부터 몸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오한, 근육통, 메스꺼움, 두통, 발열. 목이 껄끄럽지만 콧물이나 기침은 없다. 미유키는 배트를 휘두르며 몸의 증상을 파악했다. 오늘은 2학년 투수들이 1학년 포수들과 짝을 이뤄 피칭 연습을 하는 게 다행이려나. 사와무라가 오쿠무라에게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아이들의 훈련 소리에 묻혀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유키는 몇 가지 대사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유키 카즈야! 내 공을 받아달라고요! 사와무라의 고함에 머리가 아플 일은 피했다.
훈련을 마치고 쿠라모치가 다가왔다. 평소처럼 미유키의 어깨에 팔을 걸치는 걸 내버려둔 게 화근이었다. 쿠라모치의 성화에 떠밀려 보건실에 갔다. 원래도 갈 생각이었다만... 쿠라모치는 미유키가 보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봤다. 먹이를 노리는 치타 같았다. 미유키가 몸 관리를 못 하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서 빤히 읽혔다. 오해라고 해명하기에는 이미 아픈 채로는 설득력이 없을 게 뻔했다.
미유키의 짐작보다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약만 받을 예정이었는데 병결 사유서까지 받게 됐다. 보건 선생은 병원에 갔다가 집에서 쉬기를 권했지만, 미유키는 기숙사에서 쉬는 쪽을 택했다.
기숙사에 있으면 혼자 있게 될 텐데...
괜찮습니다.
집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었다.
담임과 감독에게 병결 사유서를 제출하고 기숙사에 돌아가는 길에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와 빵을 샀다.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보건 선생에게 받은 약을 먹은 후, 수건에 차가운 물을 적셨다. 쓰레기통을 근처로 끌어다 놓은 다음 손에 잘 닿는 곳에 이온 음료를 두고 누웠다.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얹고 안경을 벗은 후 안대를 썼다.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뒤척거리기를 몇 시간... 그리고 지금이었다.
미유키는 이온 음료를 몇 모금 더 마셨다. 흘린 땀으로 온몸이 끈적했다.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미유키가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면 머리가 아프고 메스꺼우니 누워서 뭐라도 해볼까 시도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안경을 껴도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고 집중이 안 되니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싫다...
조용한 방. 그의 기억은 순식간에 그를 몇년 전으로 데려갔다. 사람의 숨소리라고는 자신의 것밖에 들리지 않는 작은 공간. 웅웅 냉장고가 울리는 소리. 그보다 더 멀지만 조금 더 크게 들리는 공장의 기계 소리. 화장실 수도꼭지에 고인 물이 이따금 똑똑 떨어지는 소리... 여러 소리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조용하다고 느끼게 되는 시간들... 작은 방이 갈비뼈를 옥죄어 오는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너무 크게 느껴져서 흥얼흥얼 어쩐지 떠오르는 노래를 불러봐도 잠시뿐. 미유키가 멈추면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래서 미유키는 너무 조용할 때면 차라리 그냥 침묵했다. 혼자 적막을 깨려고 노력해 봤자 혼자라는 사실만 잘못 박은 못처럼 튀어나올 뿐이었다.
미유키의 머릿속에 머나먼 시절의 멜로디가 안개 속 불빛처럼 번졌다. 아플 때면 불러주던... 미유키는 애써 그 곡조를 밀어내고 악대의 행진곡을 떠올렸다. 그가 타석에 설 때면 울려 퍼지는 노래. 관중의 환호. 박수. 함성. 고조된 긴장감. 뜨거운 햇볕. 시끄러운 경기장. 날아오는 공. 배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휘두른 배트와 날아오는 공이 서로 맞물렸을 때 배트에서 울리는 소리. 더욱더 시끄러워지는 경기장. 공을 따라 하늘을 봤다가 다시 땅을 보면 보이는 팀원들의 얼굴들...
야구하고 싶다.
미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잠은 오기나 하는 걸까. 당장이라도 수마가 뻗칠 것처럼 몽롱한데 정작 생각은 무의식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얼른 잠들고 싶다. 조금이라도 빨리 잠들지 않으면 회복이 늦어질 것이다. 이래서야 수업이고 훈련이고 빠지는 의미가 없었다.
종이 울렸다. 조금 지나니 시끌시끌해졌다. 이제 쉬는 시간인가. 아니면 학교가 끝난 건가. 내내 잠들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깜빡 잠들었는데 모르는 건가... 미유키는 안대를 벗었다. 몸을 일으키자 구토감이 밀려와 침대 옆에 가져다둔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몇 시인지는 몰라도 점심시간은 지났을 것이다. 좀 늦었지만 뭐라도 먹고 약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머리가 울렸다. 쿵, 쿵, 쿵, 쿵 커다랗고 무거운 동물이 그의 머리에서 뛰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숨을 골라봐도 쿵쿵거리는 발소리는 오히려 커지기만 했다. 발소리가 멎고 문이 벌컥 열리고서야 미유키는 진짜 발소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유키 카즈야!”
갑작스러운 고성이 태풍처럼 덮쳤다. 머리가 띵 울렸다.
“캡틴이 되어가지고서 감기? 무책임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내 공을 받아준다고 했잖아요! 약속을 어기는 겁니까? 뭐가 재밌다고 웃슴까!”
사와무라는 걸어오는 발소리도 작지 않았다. 쿵쿵쿵쿵 걸어온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앞에 멈춰섰다.
“하도 시끄러워서 난 또 코끼리가 쳐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미유키가 안경을 안 써 흐릿한 시야로 사와무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놀리는 데 시력은 필요 없었다.
“맞네. 코끼리.”
“코끼리?! 미유키 카즈야!”
“그래. 난 미유키 카즈야고.”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멱살을 잡았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 웃겼다. 웃으니까 머리가 울리고 메스꺼워졌다.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밀치고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자 사와무라가 그의 등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와무라, 도와주는 거야, 허리를 부러트리려는 거야? 너무 세서 뇌까지 쏟아지겠는데?”
“시끄러워요!”
버럭버럭 외치면서도 사와무라의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여긴 왜 온 거야? 오쿠무라가 뭐 놓고 갔대?”
“보면 몰라요?”
사와무라가 대뜸 미유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이 몸,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 카즈야의 감기를 낫게 해주려고 왔슴다!”
“감기가 낫는지는 모르겠고 귀청은 떨어질 것 같은데?”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됐고, 얼른 누워요!”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어깨를 밀쳤다. 미유키는 순순히 누웠다. 사와무라가 미유키가 한쪽으로 밀어둔 수건을 집어 들어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뭘 하는지 우당탕 한참 요란했다. 잠시 후 물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사와무라가 낑낑거리면서 나왔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대야에 물을 한가득 채워서 오고 있었다. 자칫하면 쏟아질 것 같았다.
“나한테 뿌릴 생각은 아니지?”
“아니거든요?!”
사와무라가 발끈하며 대야를 쾅 내려놓자 물이 확 엎질러졌다. 예상대로군. 평온한 미유키와 달리 사와무라는 당황해서 수건으로 방바닥을 닦았다.
“바닥 닦은 수건을 내 이마에 얹을 생각은 아니지?”
“아님다!”
사와무라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생각도 안 하고 외치고는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가서 새 수건을 가져왔다. 한강이 된 바닥에서 그렇게 뛰는데 안 미끄러진 게 용했다.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이 이마에 닿았다. 미유키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자 사와무라가 안절부절못했다. 미유키는 팔자로 처진 사와무라의 눈썹을 힐끔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사와무라, 간호는 핑계지? 훈련 땡땡이치는 거지?”
“아니라고요!”
“난 간호 같은 거 필요 없어. 잘 쉬고 있었다고.”
“필요 없긴요, 땀을 이렇게 줄줄 흘리는데!”
봐요, 자!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축축해진 손바닥을 보여줬다.
“그건 내 땀이 아니고 네가 수건 물을 덜 짜서 물 떨어진 거야.”
“뭐라고요?”
사와무라가 황급히 수건을 가져갔다. 비틀어 짜자 물이 비 오듯 후두둑 떨어졌다. 사와무라의 귀 끝이 붉어졌다.
“물이 많아야 차가운 게 오래갈 줄 알고... 아니, 불편하면 말을 했어야죠! 하여간 사람이 숨기는 것만 많아선!”
음흉한 너구리!! 씨근거리며 물기를 꽉 짠 사와무라가 다시 수건을 미유키의 이마에 살며시 얹었다. 하도 펄펄 뛰길래 패대기라도 칠 줄 알았는데 퍽 조심스러웠다.
“약은 먹었어요?”
“화제를 바꾸는 거야?”
“약 먹었냐고요!”
“감기에 걸렸지 귀가 안 들리는 게 아니야.”
“약!”
“이젠 고막이 터진 것 같네.”
미유키는 한 손으로는 사와무라와 가까운 쪽의 귀를 막으면서도 다른 손으로 약봉지를 가리켰다.
“아침에 먹었고 이제 점심 약 먹을 거야. 먹으려고 했는데 네가 와서 못 먹고 있던 거라고.”
“빈속에 먹으려는 건 아니죠? 내가 가서 빵이라도...”
“이미 사 왔지.”
“그럼 물을...”
“이미 가져다 놨어. 이온 음료도 사놨고. 봐, 부족할까 봐 두 병 샀어.”
“그럼... 그럼 내가...”
사와무라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사와무라가 지나간 곳은 난장판이었고 미유키에게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미유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와무라의 고개가 푹 꺾였다.
“사와무라.”
미유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서 훈련해. 보다시피 나 혼자서 알아서 할 수 있어. 네 도움은 필요 없다고.”
사와무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사와무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네 제구력이야. 너도 이제 2학년인데 아픈 선배 핑계로 훈련을 땡땡이쳐서야 1학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겠어?”
“땡땡이 아니라고!”
사와무라가 버럭 외치더니 벌떡 일어섰다. 이제 가려나 싶었는데 옆 침대, 위 침대에서 베개란 베개는 싹 가져와 미유키의 무릎에 쏟아부었다.
“뭐야? 생매장?”
“밥 먹어야죠! 일어나요!”
“네가 눕혔잖아.”
“일어나!”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고는 그의 등과 머리 뒤로 베개를 받쳐주었다. 그러고는 부스럭부스럭 빵 봉지를 뜯어 미유키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와무라, 그렇게 간절히 훈련을 빠지고 싶었어?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돼. 그냥 빈 침대 아무 데나 누워 있어. 비밀로 해줄게.”
“시끄럽고 빵이나 먹어요!”
“여기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걸?”
“먹으라고!”
3초 내로 안 먹으면 입에 쑤셔 넣을 기세라 미유키는 건조한 입에 빵을 밀어 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혀가 두껍고 무겁게 느껴졌다. 모래알을 씹는지 빵을 씹는지 분간이 안 갔다. 그만 먹고 싶어도 보는 눈이 있어서 절반은 먹고 내려놨다. 다 먹을 때까지 닦달할 줄 알았더니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남긴 빵을 치우고 물컵과 약을 내밀었다.
“안 먹여줄 거야?”
“당신이 8살이야?!”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가슴에 물컵을 세차게 들이밀었다. 미유키가 한 발 늦게 반응하는 바람에 컵이 떨어졌다. 미유키는 허벅지 부근의 이불이 엎질러진 물에 젖어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미유키 카즈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골이 울렸다. 사와무라와 함께 있으면 이름 잊어버릴 일은 없겠군. 한바탕 잔소리가 쏟아지려나 했는데 사와무라가 조용했다. 미유키가 돌아보니 입술을 꾹 깨물고 앉아 있었다. 미유키는 그의 허벅지 위에 놓인 손에 눈길을 줬다. 꽉 쥔 두 손. 미유키와 눈이 마주치자 사와무라가 얼른 일어나더니 미유키의 허벅지에서 컵을 치우고 이불을 걷으려고 했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 많이 젖지도 않았고. 이 정도면 금방 말라. 어차피 나 땀 흘려서 나중에 빨아야 해.”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 줘.”
사와무라가 이온 음료병의 뚜껑을 열어서 약과 함께 건넸다. 미유키가 약을 삼키고 누울 동안 사와무라는 가만히 미유키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유키는 다시 안대를 썼다.
“나 이제 잘 거니까 가도 돼.”
미유키는 눈을 감았다. 사와무라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공 하나도 안 던질 거야?”
“내 공 받아줘야죠.”
“미안, 오늘은 안 되겠다.”
“그러니까 얼른 나아요.”
“그럴 계획이었어. 네가 오기 전까진.”
사와무라는 대꾸가 없었다. 미유키는 안대를 벗고 사와무라의 표정을 살필 기력이 없었다. 피곤했다.안 봐도 알 것 같긴 했다. 분명 기가 팍 죽었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유키는 시무룩해진 투수의 기를 살리는 방법은 알아도 풀 죽은 후배를 위로하는 방법 같은 건 몰랐다.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미유키 자신의 숨소리,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하교 인파가 꽤 빠졌는지 드문드문해진 말소리, 그리고...
조금은 서늘한 듯도, 미지근한 듯도 한 온기가 손에 닿았다. 사와무라의 손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미유키의 손을, 정확히는 검지와 중지를 잡았다.
“미안해요.”
뭐가? 미유키는 생각했다.
“나... 부상당했을 때도 나만 몰랐고 아무런 도움도 안 돼서 이번에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내 도움은 필요 없었고... 오히려 사고만 친 것 같아요.”
“알긴 아네?”
“잔다면서요! 자라고요!”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다섯 손가락에 손바닥까지 모두 꽉 쥐었다.
“혼자 알아서 잘하는 건 알겠는데! 하지만 아프잖아요! 아프면... 도움이 필요하든 안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요! 혼자 할 수 있는 거여도 남한테 부탁하면 된다고요. 기대고, 의지하고, 남자친구한테 응석도 부리고... 그래도 되는 날이라고요! 아프면 말이에요.”
“부려먹어달라는 거야? 사와무라, M이야?”
“엠? 그게 뭔데! 왜 기분 나쁘게 웃는 건데? M은 당신이죠, 미유키 카즈야! 따지고 보면 난 S라고요, 사와무라니까!”
사와무라가 잡은 손을 흔들었다.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바보무라.”
“바보 아니거든요!”
“그래? 아쉽네. 뽀뽀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해도 돼요?”
“안 돼. 감기 옮으려고.”
“하려고 했다면서!! 말을 말든가!!”
“바보는 감기 안 걸리잖아. 근데 바보가 아니니깐 위험하지.”
“뭔 소리야!”
미유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목이 쉬어 웃음이라기보다는 주전자가 울리는 소리 같은 우스꽝스러운 소리였다. 사와무라는 놀리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미유키의 손을 고쳐잡을 뿐이었다.
“좀 자요. 이제.”
사와무라가 속삭였다. 작게 말할 줄도 아네? 미유키가 생각했다. 길게 숨을 내쉬자 의식하지 못하던 긴장도 함께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잡힌 손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소리가 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손등으로 사와무라의 입김이 느껴졌다. 사와무라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정도로 조용했지만, 더는 조용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사와무라와 함께 있으면 시끄러웠다. 조용할 틈이 없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드디어...
“사와무라.”
“자라고요. 자장가라도 불러줘요?”
“응.”
“에?”
얼빠진 목소리. 그걸 놀릴까 하다가 미유키는 대신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냥 생각만 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아주아주 조용한 방에서만 겨우 들릴 정도로.
“불러줘. 자장가.”
늘 시끄러운 사와무라 에이준은,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쩌렁쩌렁한 그 소년은, 언제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서 눈을 빛내는 투수는, 그 작은 소리를 들었다. 목청을 가다듬었다.
간다, 이 길을 지금 당장. 어떤 시련도 극복해서 날려버려, 사와무라...
“히팅 마치? 잠을 자란 건지, 깨란 건지...”
“불러달라면서!”
“시끄러워, 사와무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유키는 자신의 손을 잡은 사와무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와무라가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 불렀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았다.
불타는 남자의 피는 뜨겁고 지금이다 날려버려...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이번에는 정말 잠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 미유키의 고개가 그 손길을 따라갔다. 미유키만 있는 방. 공장의 기계가 모두 꺼지고 나면, 모든 것이 조용해지면, 고요에 잠기고 나면, 세상에 그만 존재하는 것 같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시간을 버티다 보면... 다시 시끄러워지는 순간이 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조용히 하려고 노력해도 완전히 죽일 수 없는 현관문 닫는 소리, 미유키의 옆에 앉으며 바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의 귓가를 간질이는 한숨 소리.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 두꺼운 손. 카즈야...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그 소리들. 더는 조용해지지 않은 방. 미유키는 잠의 물결에 몸을 누인다. 그렇게 휩쓸려 가라앉는다. 그를 잠으로 이끄는 파도 소리는 에이준의 목소리를 하고 있다. 역시, 시끄러운 게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