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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5-06-15
Completed:
2025-10-12
Words:
10,981
Chapters:
2/2
Comments:
2
Kudos:
12
Hits:
306

Caught in the Middle

Summary:

지금 호프만은 며칠 전 도착한 전보 하나를 닳도록 읽으며 초조해 하고 있다.
[마커스 5급 조사원과 토머스 3급 조사원, 캔자스 주의 토네이도 경보 발령 이후 연락 두절.]

Notes:

MyNeighborPirate님과 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을 바탕으로 공동제작하였습니다.

Chapter 1: Caught In the Middle

Chapter Text

그레타 호프만은 약에 중독되고 총에 맞고도 폭풍우에서 살아남았다. 다들 기적이라고 했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수많은 동료가 희생되었고 한 시대가 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축하 받았다.

 

하지만 회복된 몸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호프만 자신도 그 정도는 잘 알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연장해낸 삶이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경험 많은 조사원으로서 다시 임무를 맡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갑작스레 숨이 막히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그녀는 온 세상이 자신을 두고 도는 듯 어지러워 주저앉아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수술대에 올랐던 날로부터 수개월이 지났고 재활 치료도 원활히 끝났지만, 본래의 건강을 되찾기 어려울 것이란 소식을 들었던 날, 호프만은 놀라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물었고,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 정말로 쓰러진다면, 생사를 오갔던 그 며칠의 여파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모호한 대답을 들었다. ‘지금은 괜찮단 뜻이군요.’ 호프만의 담당 의사는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은 눈치였지만 그녀는 함구 부탁드린다는 말만 남기고 무언가 털어내듯 재빨리 진료실에서 나와버렸다. 

 

Z 씨는 복직 얘기를 꺼내는 호프만에게 그녀가 빈에서 이룬 공로를 축하하며, 승진에 관해 알릴 것이 있다고 했다. 승진? 요컨대 내근직으로 옮겨줄 수 있다고. 마커스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았고, 앞으로도 조사원 관리를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여태껏 호프만의 주된 업무는 관리가 아닌 조사였다. 물론 그녀도 호프만의 진단 결과를 전해 들었을 터였다. 그 관리란 호프만이 유구하게 맡아 온 멘토 역의 연장이자 확장일 것이다. 이것은 통보였다. 고민 없이 조사원으로 계속 일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직은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고, 상관은 더 말하지 않고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의사와 대면하고 온 아들러가 찾아와 그녀와 싸우고 갔다. 일방적으로 이어진 폭언이 잦아들고 그녀가 알고 싶은 건 한 가지 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호프만은 자신이 놓친 사실이 있을까 물었으나 동생은 그저 울적하게 대답했다. “누나. 당신이 그럴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아들러의 그 모든 분노가 소용없단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동생이 상처 받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들러는 누나의 선택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포자기하여 연구소로 돌아갔다.

 

‘호프만 씨의 첫 복귀를 함께하고 싶었어요.’ 마커스는 Z 씨에게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고 한다. 수개월 요양 끝의 복귀였고, 단순한 임무였기에 허락했다고 전해 들었다. 사적인 마음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고 마커스를 불러 따로 이야기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른 척을 해줬더니 마커스는 약속한 시각보다 한참을 앞서 숙소에 찾아와, 오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식사는 하셨나요? 무엇을요? 얼마나요? 입맛이 없으세요? 떠나기 전에 여긴 좀 청소를 해두는 게 좋을까요? 더 옮길 짐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그렇게 산만하게 굴었다. 파견지까지 이동하는 내내 불안하게 머플러를 비틀어 쥐고는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애써 무시하다, 결국 부담스러우니 그만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과하는 그녀는는 주인에게 걷어차인 강아지만큼이나 불쌍해 보였다.

 

자신이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 마커스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얇은 서류철을 보란 듯 꺼내든 호프만이 이번 임무에서 숙지할 것들을 되짚으며 마주 앉은 마커스의 의견을 물었다. 그 익숙한 풍경에 답답했던 공기가 한차례 바뀌었다. 마커스의 열성적인 답변은 임무의 목적을 정확히 복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꽤 어엿한 조사원의 모습이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기밀을 말하지도, 멘토가 무심코 흘린 혼잣말을 주워섬기지도 않았다. 지난 수개월이 아득히 멀리 느껴졌다. 

 

“성장했군요. 마커스.” 진심 어린 칭찬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웃던 마커스가 금세 표정을 찌푸리곤 다신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니까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의 그녀는 무척 든든했다. 분명 자신보다 훌륭한 조사원이 되겠지. 그녀는 지금보다 더욱 성장한 마커스를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젊을 때의 자신만큼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의 파견 임무 앞에, 그리고 훌륭한 조사원으로 성장하는 마커스의 곁에서 호프만은 낙관적이었다. 그래서 평화롭던 임무의 한가운데 영문도 모른 채 코피를 흘리고 쓰러졌을 때,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호프만이 정신을 차렸을 때, 마커스는 더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잠긴 목소리로 깨어나셔서 다행이라고 하더니 그녀는 의사를 불러오겠다며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사라져 버렸다.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등장한 재단 지부의 의사가 권고하길, 본부의 재활 센터와 연락이 닿았으며 서로의 진단 결과를 공유해 의논한 결과, 간헐적이겠으나 앞으로는 가벼운 어지럼증부터 심하게는 발작 증세까지 나타날 수 있으니 파견직, 나아가 대부분의 야외 활동에 대해 다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쪽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차가운 의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곧이어 본부로부터 더 정밀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니 거동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면 재활 센터로 이동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손 쓸 수 없이, 그리고 일사천리로 굴러가는 상황에 언짢아졌다. 분명 권고라고 했을 텐데… 이것은 권고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의사와 관계자가 떠나자 마커스가 닫히던 문을 붙들어 열고 병실로 들어왔다. 다시 만난 그녀의 눈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결연했다. “어째서 말하지 않으셨어요?”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호프만은 동생을 떠올렸다. “의사도 확신하지 못 했으니까요.” 하지만⋯⋯. 마커스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찾으려 방황했다. “하지만 건강 상태를 숨기고 임무에 나선 건 제 불찰이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마커스.” 멘토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때면 왜 그렇게 겁이 날까. 마커스는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니에요. 사과는 제가 해야 하는데. 저 때문에 이렇게 되신 거잖아요.” 그리고 마커스는 또다시⋯⋯




“그때 저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치실 일도 없었을 테고, 조사원도⋯ 조사원도 계속하실 수 있을 텐데.” 의사와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또는 읽은 것 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난 내 선택을 후회한 적 없어요.” 눈도 마주치지 못 하고 바닥을 향해 눈물만 떨구던 마커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 대화는 데자뷔마저 느껴졌다. 

 

“마커스, 지금의 당신이라면 이해하지 않나요?” 호프만은 그녀의 멘티를 알았다. 자신이 눈에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멀리 나갈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있으니까, 제가 곁에서 열심히 보조할 테니까⋯⋯” 마커스의 목소리가 확신을 잃고 점점 줄어들었다. 

 

“어떻게 날 보조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호프만은 마커스의 태도에 생각지도 못하게 화가 났다.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기에 앞서 따뜻한 식사를 내올 건가요? 내 업무를 대신해 줄 건가요? 내가 필요한 게 있다면 단걸음에 나가 사 올 건가요?” 마커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겁니다.” 병실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피가 났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호프만 씨와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자위가 뒤집히시더니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셨어요. 맥박도 너무 약했고, 저는⋯ 의료팀이 너무 늦을까 봐 초조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인명 구조 책자를 읽은 기억이 나서 똑바로 눕히려고 해도 고통스러워 하시면서 몸을 웅크리려고 하셨고, 코피는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어요. 저는,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듯 마커스는 가슴께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머플러를 두르지 않은 가는 목이 위태로워 보였다. 

 

“호프만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요. 제가 죄책감을 덜어내겠다고 비겁하게 구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호프만 씨가 조사원을 그만두시고 이대로 은퇴하시면⋯ 무슨 면목으로 제가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요.” 마커스에게는 이미 그녀가 모르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란 없었다. 먹구름 같은 감정이 마커스의 결심을 또다시 두텁게 가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은퇴라니? 호프만은 아직 은퇴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은퇴한다고 했던가요?” 네? 놀란 마커스가 눈물을 멈추고 훌쩍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재활 센터로 돌아가서 다시 진단을 받아보고, 외근 불가 판정을 받는다면 그땐 본부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Z 씨는 제안을 거둔 적이 없었다. “그건⋯⋯ 호프만 씨는 그걸로도 괜찮으세요?” 그 말에 실소가 나왔다. 내가 괜찮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 걸까?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질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다. “마커스, 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뒤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한 마커스에 의해 이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지만, 그녀의 마음 여린 제자는 나름대로 이해한 것인지 본부에서라면 어떤 일을 하게 되시냐고 물어보았다. 쓸모를 알 수 없는 인터뷰가 마커스의 노트에 기록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음날 두 사람이 병실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커스는 본래 두 사람에게 배정되었던 임무를 마치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고, 그 사이 호프만은 재단 본부에 연락해 새롭게 인사 관리직을 맡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그녀는 전날 마커스와의 대화로 고민을 마쳤다. 몸은 정말로 예전 같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발작 후 처음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 몇 걸음이 수만 걸음처럼 느껴졌다.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났다. 다시는 전처럼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현장에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프만은 실수라도 동료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마커스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재단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마커스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안을 내밀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멘티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독단적으로 움직인 첫 임무. 진행 방식도, 형식도 확실했고 실적은 아주 훌륭하다고 할 만 하다. 자잘한 수정을 짚어주던 호프만은 자신이 괜찮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자신도, 마커스도 괜찮을 것이다. 특히나 그 흠 잡을 데 없는 보고서를 어떻게 더 열심히 쓰겠다는 것인지 아주 의욕을 올리고 있으니,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레타 호프만에 대해 모두가 입을 모아 엄격하면서도 다정하신 분이라 칭송했다. 실수에 대해서는 엄격히 잘잘못을 이야기하면서도 항상 만회할 기회를 주었고, 수습 조사원이 잘못을 하면 함께 파견된 상급자의 지시가 부적절하지는 않았는지 공정히 따져보았다. 업무 능력은 또 어떤가? 호프만은 조사원 개인의 특성과 성향을 상세히 파악하여 그들을 알맞은 업무에 재배치했다. ‘수습들이 보낸 보고서를 읽어는 봤습니까?’ 기존의 관리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쉽게 화를 내거나 이성을 잃는 법이 없다고 모두가 그녀를 존경했다. 

 

하지만 지금 호프만은 며칠 전 도착한 전보 하나를 닳도록 읽으며 초조해 하고 있다. 

[마커스 5급 조사원과 토머스 3급 조사원, 캔자스 주의 토네이도 경보 발령 이후 연락 두절.]

 

파견된 조사원과 연락이 끊기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이나 갈등의 상황에서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생각보다 빈번했고, 연락 수단이 마도학 현상에 휘말려 고장 나거나 단순 실수로 통째 잃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마도학자를 비롯한 마도학 관련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늘 예상 밖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마커스는 마냥 어리기만 한 신참이 아니었다. 몇 년 사이 그녀는 호프만이 보았던 가능성을 넘어 성장했다. 멘토의 눈은 언제나 정확했다. 그러니 믿음직한 상급 조사원이란 멘토가 손수 배정한 위험한 임무를 맡을 때도 있는 것이다.

 

전보를 수신하고 토네이도 경보가 멈추고 이틀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폭풍우와 비슷하다고 알려진 특이 기상 현상의 데이터 수집을 위한 사전 답사였다. 이번 답사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얻는다면 곧 새로운 연구 센터가 그곳에 들어설 것이다. 그렇게 말하던 출발 전의 마커스는 매우 들떠 있었다. 최근 답답한 회색 도시만 누비던 조사원이자 작가에게 이 기록의 모험 은 꽤나 흥분 요소인 것 같았다. 



‘—그럼 폭풍우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거예요.’ 파견지가 결정된 날, 명령서 귀퉁이의 담당자명을 확인한 마커스가 호프만에게 잽싸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밖은 이미 해가 저문 지 한참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것인지 빗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잡담 받아줄 시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커스, 이 번호는 제 사무실입니다. 자택이 아니라요.’ 그러나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번호 로 연락 드린 거잖아요.’ 잦은 야근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상대를 타박할 법도 한데 속상한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진실에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수화기 너머 따뜻하고 건조한 실내에서 호프만은 어째서인지 플라난 군도를 떠올렸다.  

 

하지만 캔자스는 바다도 물안개도 없이 바싹 마른 내륙이었다. 그곳에 머무는 마커스를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파견지 인근 주민들은 마도학자에 적대적이었고, 누군가 조사한답시고 돌아다니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사전 정보가 매우 적은 상황이었다. 위급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사고는 끝없이 나쁜 방향으로 흘렀다. 새로운 조사팀이자 구조팀을 보내야 했다. 이틀을 잠들지 않고 일하며 향후 일정을 정리했다. 직접 조사에 나서겠다는 호프만을 동료들은 극구 만류했으나, 이대로 본부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기다리더라도 가서 기다릴 겁니다. 그렇게 선언한 그녀는 사무실 문의 팻말을 ‘출장 중’으로 돌려놓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몸으로 캔자스까지 가려는 건가요?” Z 씨였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호프만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마커스의 눈앞에서 쓰러진 후, 재활 센터 소속 주치의와의 상담 하에 정밀하게 짜인 운동이며 식이 조절, 필요에 따라 약물—그때를 회상하자면, 더럽게 아프거나 더럽게 맛없는— 치료까지 병행해서야 매일 업무를 볼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흥분하거나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팡이를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부하 직원들은 그녀가 지팡이를 짚는 날이면 평소보다 빠르게 업무를 처리했다. 괜한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지팡이를 쓰지 않고 벽에 붙어 걷다 이를 목격한 아들러와 마커스에게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행방불명된 조사원들의 동향은 직접 임무를 배정하고 중간 보고를 받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커스 양을 믿고 기다려도 되지 않나요? 과잉보호할 나이도 지났을 텐데.” 서류를 건네받은 상관이 몇 없는 문장을 읊었다. “미국 중부 내륙에서 발생하는 특이 기상 현상의 데이터 수집을 위한 사전 답사 활동⋯⋯. 이전부터 통신이 불안정한 지역이군요.”

 

호프만은 자신도 모르게 동요했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닳도록 읽은 현장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원인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질문할 시간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Z 씨가 고개를 저으며 추궁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몸조심해요.” 평범한 인사말이 무겁게 들렸다. 

 

마커스를 믿어보란 Z 씨의 말이 그녀를 괴롭혔다. 파견지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자료를 다시 검토할까 했지만 그 무미건조한 낱장들에 호프만이 알지 못하는 정보는 이제 없었다. 없는 것이라면 마커스 일행으로부터의 소식이다. 서류철을 신경질적으로 밀어 치운 뒤 부족한 수면량을 채우기 위해 눈을 감아보았지만 불안이 다시 호프만을 덮쳤다. 그래, 이성적으로 통상 하루에서 이틀은 좀 더 기다린 후에 움직이는 게 맞을 것이다. 재단에서 진행한 모든 사전 답사에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한도 끝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토네이도에 마커스가 휩쓸린 것은 아닐까. 그 생각에 숨이 갑갑해졌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의사가 가르쳐준 심호흡을 따라 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고. 이렇게 평정을 잃어선 안 되는 일이다⋯⋯.

 

호프만은 지난 몇 년간 마커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녀는 이제 많은 후배들이 믿고 따르는 존재였다.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다. 전보다 훨씬 능동적으로 대처에 나서 빠르게 해결책을 찾아냈고, 소통 능력도 많이 늘어서 그 어떤 조사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재단의 유능한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 마커스의 관계가 두 사람의 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호프만은 마커스에 한해 유독 객관적이지 못했다. 칭찬할 일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 호프만 앞으로 들어온 다과를 나누기도 했다. 직접! 재단의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때마다 마커스는, 어디선가 나타난 잔뜩 화난 그녀의 동기에 의해 카페 밖으로 끌려 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자허토르테 한 조각에 감탄하던 신참은 이제 디저트의 단맛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바빠졌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호프만은 누구보다 마커스의 보고서를 기대했다. 그녀의 성장을 기대했다. 그녀의 여정은 곧 호프만의 자랑이었다.

 

마커스가 재단 본부에 머물고, 그녀 자신이 격무에 시달리지 않을 때면 함께 식사하고 밤거리를 걷곤 했다. 마커스는 항상 그녀가 보고서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멘토가 추천한 식당의 음식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부터 새롭게 알게 된 독특한 마도학자, 재단 지부에서 일어난 사사로운 사건들, 타임키퍼 소대와의 흥미로운 모험. 마커스의 임무가 길어질 때면 편지가 도착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었으나, 낭만을 아는, 또 배려를 아는 그녀의 작가는 한결같이 재단의 우편 서비스로 두툼한 편지를 보내오는 것이다.

 

호프만은 항상 곧바로 답장을 써 보냈다. 자신의 업무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고, 그녀에게 일상이란 곧 일이었다.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만큼 부서 외의 사람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마커스가 일상의 궁금한 것을 물으면 답하는 짤막한 답장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어디선가, 또 언제부턴가 사적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나 호프만은 이것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끝없는 질문에 숨어들기를 택했다. 

 

마커스를 무사히 찾고 시간이 나면 그녀와 함께 휴가를 내 캔자스시티를 여행할 수도 있겠지. 캔자스시티는 사실 캔자스의 이웃 주인 미주리에 속한다. 이틀 간의 조사로 알게 된 사실이다. 마커스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호프만은 좌석에 기댄 머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넬슨 아킨슨 박물관을 종일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호프만은 그런 곳을 관광지로 고르지는 않겠지만 마커스는 좋아할 것이다. 그녀는 호프만이 이해할 수 없는 미술품을 보며 눈을 반짝이곤 하니까. 신이 나서 팸플릿을 전부 읽어보고 어디로 먼저 갈지 바삐 동선을 짜는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그리고 저녁에는 재즈 카페에 가야겠어. 음악에 조예는 없지만,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지친 눈을 감고 착륙을 기다렸다. 잠이 들지는 못했다.

 

 

호프만과 조사팀은 착륙과 동시에 재빨리 차량으로 이동했다. 캔자스 주에서도 외곽의 농경지였다.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색할 계획이었는데 마을의 시장은 소문과 달리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시장은 마커스가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특이 기상 현상이 발생한 지점을 지도로 그리고 다녔다고 했다. “시골에 살면서 마도학자, 그것도 재단 직속 직원을 볼 일은 많이 없지만, 그녀는 꽤나⋯ 정중하더군요.” 시장은 그렇게 말하며 연신 끄덕였다. 인간 밖에 살지 않는 외딴 마을에 제복 차림의 낯선 마도학자가 찾아온 것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몇 주 동안 정중하고 진심 어린 태도로 다가온 마커스에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열었다고 회상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마도학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시장의 친절한 설명으로 두 사람이 아직 무사할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보고 받은 특이 기상 현상이란 거센 바람 을 맞고 행방불명되었던 사람들이 며칠 뒤 사라졌던 바로 그 장소에 다시 나타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광활한 황무지를 헤매며 돌아다니다 현실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신체나 정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분명 오싹하기는 했다. 익숙해진 마을 주민들은 피해 다닌다지만, 두 조사원이 그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 곳을 알려달라고 졸라댄 통에 그 거센 바람 을 계속 맞은, 다 쓰러져가는 폐가로 안내 해줬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바람이라는 건 얼마나 자주 부나요?” 시장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오후에 한 번쯤 불지 않을까요? 느긋하게 답했다. 폐가의 위치를 전달받은 호프만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조사원 절반을 폐가와 멀리 떨어진, 그러나 시야로 그들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의 대로변에 대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와 폐가로 가 바람을 기다렸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마커스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프만 씨, 저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한 조사원이 허물어진 헛간의 잔재가 바람에 들썩이는 모습을 가리켰다. 그 시원한 바람은 호프만의 피곤한 정신을 깨우며 활기를 불어넣었다.

 

거센 바람 에 휩쓸리자 순간 귀가 멍해졌다. 압력이 휙휙 바뀌었다. 눈 안쪽이 욱신거렸고 두 발이 아주 가볍게 떠올랐다. 지금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호프만은 숨을 참았다.

 

그녀의 일행은 모두 기묘할 정도로 푹신한 흙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이 바람은 단순한 공기가 아니었다. 바람의 덩어리가 귀에 가득 찬 느낌에 토할 것 같았다. 호프만은 토기를 잠재우려 노력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커스가 있었다. 정확히는, 동료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방금 허공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제복쟁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모두가 비슷한 차림으로 엉켜있는 탓에 아직 호프만을 발견하지는 못한 눈치였다.

 

그들은 오기 전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인지 꽤 튼튼해 보이는 천막 아래 의자에 앉아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있었다. 우려와 달리 그들은 너무나도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전보를 보내지 않은 거지? 왜? 하아.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우선 몸을 좀 일으켜야 했다. 

 

“호프만 씨?!” 드디어 아는 얼굴을 찾은 마커스가 빠르게 다가와 멘토를 부축했다. “무사했군요.” 최대한 멀쩡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했으나 여러모로 뒤집어진 속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마커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녀의 동료도 의아한 듯 책임자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프만은 그들의 태도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통신이 끊겨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수색⋯에 나섰습니다.” 조사원 중 하나가 격렬하게 토하는 소리에 호프만이 말을 더듬었다.

 

네⋯? 하지만 보통 하루 이틀은— “저희가 전보를 남기지 않았나요?” 마커스의 혼잣말을 끊고 동료 조사원이 머리를 긁으며 의문을 표했다. “분명 지역의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기 직전에 보낸 걸요?” 

 

못 받았으니 왔겠지. 턱 끝까지 그런 말이 찼지만 호프만은 인내심 있게 답변했다. 우선은 마커스가 무사하니 된 거야⋯⋯. “그런 전보는 수신하지 못 했습니다. 이후로도 며칠간 계속 통신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고요.” 두 사람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 이곳은 전파가 전혀 통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호프만 일행이 각자의 통신 기기를 확인해 보았다. 전원만 켜질 뿐 그것은 아무런 신호도 잡지 못했다.

 

“여기⋯ 이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마커스는 자신의 의자를 권했으나 그것을 자연스레 지나친 호프만은 마커스의 동료—그의 이름은 진부하게도 토머스였다—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빌어먹을 정도로 편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잠자코 앉아있자 두 사람이 다급히 해명에 나섰다. 

 

그러니까, 원래는 현지 조사를 끝냈으니 계획대로 복귀하려고 하였으나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거센 바람 탐사를 위해 폐가에 장비를 준비한 뒤 본부에 전보를 보내던 차에 마침 토네이도 경보가 울렸고,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그대로 폐가로 뛰어갔다. 그들은 당연히 전보가 닿았다고 생각해 여유롭게 황무지의 환경을 조사하던 중이라고 했다. 

 

“제가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당신들은 토네이도 경보가 울렸을 때 곧장 마을로 돌아가 대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애초 이곳의 전파 문제에 대해 숙지하고 있지 않았나요? 호프만은 두 사람 중에서도 직급이 높은 마커스를 몰아세웠다. 마커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네, 충분히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제가 알기로 저희가 위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추가 탐사 신청은 이러한 사전 답사를 위한 파견의 경우, 4급 이상 조사원의 판단에 따라 최초 통보일로부터 7일까지 연장할 수 있어요. 전 이곳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저희는⋯ 저희는 최소한의 조사를 마친 지금 나가려고 했어요.” 마구 쏘아붙이더니 마지막 문장은 변명으로 들릴 것 같은지 자신이 없어진 듯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변명 같지는 않았다. 하나 남은 이 천막은 그마저 삼 분의 이가 걷힌 상태였고, 짐은 이미 한쪽에 고이 꾸려져 있었다. 아마 식사 후 한두 시간 내로 출발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괴상한 입장 방법에 비해 탈출은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호프만은 추측했다.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확실한 안전이 보장되는 경우에 한해서 입니다, 마커스 조사원. 그리고 그 연장일의 기준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게 맞습니까? 토네이도 전의 전보가 닿았다 가정해도, 당신이 본부와 통신하지 않은지 거의 사흘이 흘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확실하게 안전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죠?” 마커스는 화를 냈다. 멘토가 이렇게까지 말꼬리를 잡는 경우는 드물었다. 임무 중 멋대로 간섭 당해 불쾌한 것은 둘째치고, 호프만에게 신뢰 받지 못했다는 낭패감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두 사람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알지 못하니 위험한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아보러 왔잖아요? 언제부터 그렇게 깨알 같은 글자들에 집착하셨어요?”

“결과적으로 안전했을 뿐이죠.”

“제 경험과 능력껏 내린 결정이에요. 보시다시피 이곳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보고를 잊었군요.”

“네, 그게 제 유일한 실수라면 실수겠죠.”

 

“호프만 씨, 제 판단을 믿지 못해서 이렇게 직접 찾으러 오신 건가요?” 호프만은 그 말에 정곡을 찔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 답사의 최종 담당자는 나예요. 그러니 위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건 내 책임입니다, 마커스.” 마커스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보였다. 오히려 더욱 매섭게 그녀를 노려봤다.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조사팀의 리더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호프만 씨,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호프만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알아냈나요?” 당연히 알고 있겠지. 토머스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가는 건 아주 쉬워요. 여기가 터무니 없어 넓어 보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마도학 현상으로 이루어진 공간입니다. 매개체의 감정에 예민하게 영향을 받는 데다 환경을 인식하는 감각이 아주 뛰어나서—” 그의 설명은 5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가고자 하면 나가진다. 하지만 인간 조사원이 그 감각을 이해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기에, 마을 주민들의 설명에 따라 이곳에서 반나절이면 나오는 숲길의 우측으로 걸어 들어가면 출발했던 폐가에 다시 도착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마커스는 와중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마커스, 지금까지의 기록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마커스는 주저하더니 그저 관찰 일지라며 자신의 수첩을 건네주었다. 이틀 동안 기록한 것치곤 꽤 세세하고 열정이 담긴 기록이었다. 주변 자생 식물과 동물에 대한 묘사와 간단한 삽화, 그리고 앞서 토마스가 소개한 황무지의 인식 반응에 대한 흥미로운 이론이 담겨있었다. 인정해야 했다. 호프만은 그녀에게 수첩을 다시 돌려주며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조사를 계속해 보세요.” 침통하게 수첩을 받아 들던 마커스는 놀란 눈으로 호프만을 쳐다보기만 했다. “저는 남아서 마커스 조사원을 도울 테니 다들 복귀하시죠.” 호프만은 가지고 있던 서류 몇 가지에 짧은 문구와 서명을 휘갈긴 뒤 조사팀의 리더에게 본부에 도착하는 즉시 제출할 것을 당부했다.

 

호프만은 더욱 길어진 탐사에 대비하기 위해 토머스에게 필요한 장비나 소모품이 있을지 물어보았지만, 그는 머뭇대더니 이제 그만 돌아가서 진짜 호텔에서 진짜 샤워를 즐기고 싶다며 복귀 명령을 요구했다. 호프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그의 직속상관은 마커스이다. 비상시가 아니라면 2인 1조의 원칙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마커스는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머스는 어디까지나 관측 장비의 엔지니어로서 이번 답사 뿐만 아니라 황무지 탐사에서까지 그녀를 충분히 보조해 주었다. 데이터와 샘플이 수집된 기기들을 라플라스로 무사히 돌려보내기만 한다면 그는 지금 돌아가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마커스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미 빼곡해진 수첩에는 황무지의 놀라운 생태가 담겨 있었고, 그녀는 칼럼니스트 경력을 가감 없이 발휘하여 정식 보고서 외에도 개인적인 관찰 일지를 작성 중이었다. 연장 가능한 날짜까지 최대한 머무를 작정이었으나 동료 조사원의 호기심과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복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커스는 멘토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결국 천막은 걷을 필요가 없어졌다. 황무지에 남을 두 사람을 위해 식료품과 의약품을 보충한 조사팀과 토머스는 유유히 떠났다. 

 

일행을 돌려보내고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마커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호프만 씨, 제가 미덥지 못한가요?” 마커스는 호프만을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마커스는 천막 기둥에 비스듬히 놓인 호프만의 지팡이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저 때문에 이렇게 나오신 거잖아요.” 부정할 수 없었다. 호프만은 마커스가 그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보았고,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둘만 남으니 미안한 마음보다는 다시금 안도가 앞섰다. 

 

“경보가 멈추자마자 캔자스로 오신 거죠. 지팡이까지⋯⋯ 잠은 제대로 주무셨어요?” 하지만 마커스는 속상해하고 있었다. 멘토의 건강을 염려했다. 양손이 다시 목의 머플러로 향했다. 5급쯤 됐으면 그런 애 같은 습관은 고치라고 며칠을 잔소리한 끝에 겨우 떨어뜨려 놓았었는데. 평범하게 조사팀이나 구조팀만 보냈다면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일 일은 없었다. 그녀는 무턱대고 찾아온 사람이 하필이면 자신의 멘토였기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백 명을 보내더라도 그곳에는 호프만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됐다. 어째서일까?

 

“⋯⋯왜 돌아가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호프만 자신도 그 답을 몰랐다. “이곳까지 온 이상 그냥 갈 순 없으니까요.” 마커스는 그 말을 잠자코 곱씹더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마커스, 지금까지 관찰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줄래요? 수첩에 쓴 것 말고도 다른 기록이 있다면 보여주면 좋겠군요.” 마커스는 여전히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황무지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의 말이 점차 빨라지더니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뒤 며칠 동안 함께 황무지를 탐사했다. 탐사와 기록은 주로 마커스가 담당했고, 사실 이곳에서의 일이랄 것은 그 두 가지 뿐이었으므로 지난 며칠간의 혹사로 몸 여기저기가 경직된 호프만은 마커스가 멀리 나갈 때면 천막에서 마커스가 남겨둔 책을 읽거나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마커스와 토머스의 기록을 분석하고 색인을 붙이며 낮을 보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주변을 걸어 다니며 굳은 몸을 풀었다. 마커스가 그런 모습을 본다면 바로 돌아가자고 할 게 뻔했다. 업무를 분담하던 토머스를 보낸 것이 잘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이 작업을 멈춘다면⋯⋯ 호프만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마커스가 화낸 것은 정당하지 않은가.

 

그날 저녁, 새로운 관찰 일지를 쓰는 마커스의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들이 머무는 천막을 가득 채웠다. 그 아래로 생김새를 감히 추측할 수 없는 동물의 낮고 규칙적인 울음소리가 깔렸다. 멀리 솔숲에서 불어오는, 황무지의 독특한 향을 머금은 공기는 생각보다 산뜻했다. 온화한 등불 아래 마커스는 잉크를 열심히 놀렸고, 호프만은 드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난 마커스가 쓴 글이 좋아요. 어쩌면 지금 더 좋을지도요.” 지금까지 그들이 쌓아온 모든 것을 걷어내면, 변치 않는 진심이 있다.

 

“네?” 마커스는 어리둥절한 듯 펜을 내려두고 마주 앉은 멘토에게 귀를 기울였다. 등불이 두어 차례 깜빡였다. 호프만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 은퇴를 두고 화내던 게 종종 생각납니다. 그때의 난 당신이 앞만 보고 나아가기만을 바랐거든요.” 사실, 그건 지금도 그래요. 

 

“하지만 최근에는⋯⋯ 마커스, 당신이 훌쩍 떠나버리면 하염없이 소식을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해요.” 패배한 기분으로, 호프만은 이실직고했다. 하지만 기쁜 패배였다. 마커스가 이겼으니.

 

“그렇게라도 선물을 남기고 싶어서, 당신이 가고 싶다고 했던 카페가 있는 곳으로 다음 임무를 배정하기도 했어요. 내가 사랑하지만 이제는 갈 수 없을 도시로 보낸 뒤엔 그곳에서 당신이 보낸 보고서와 편지를 즐겁게 읽었죠. 그리고 그곳을 함께 거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하기도 합니다⋯⋯.”

 

“마커스.” 이름이 불린 그녀의 오랜 제자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나는 항상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 를 기대하고 있어요. 보고서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미안합니다. 내 이기심 때문에 당신을 찾으러 와야 했어요.” 호프만은 고개를 숙였다. 줄곧 마커스의 글을 사랑했다. 글에 묻어나는 마커스라는 사람도,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욕심은 커져 가고 있는데,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커스를 보고 싶었다. 마커스가 어서 돌아와 주길 바랐다.

 

“호프만 씨, 저는—” 마커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그녀의 성장을 응원한다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보호하려 들지 않았던가. 존중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당장의 두서없는 고백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보고서는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그녀에게 필요할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천막은 너무 좁았다. 젊고 활기찬 마커스는 지친 멘토의 앞을 금세 가로막았다.

 

“저는⋯ 저도 호프만 씨가 읽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보고서를 써요!” 마커스는 호프만이 그대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히 외쳤다. 보고서—아, 지금 그게 다 뭐람? 

 

 “호프만 씨가 늘 저를 챙기시는 것을 잘 알아요. 파견지가 정해지면 늘 그곳이 어떤 곳일지 미리 말씀해 주시잖아요. 귀환이 늦어지면 신경 써 연락 주시는 것도 기뻐요. 그리고, 그리고 제 편지가 도착하면 늘 바로 답장을 써주시죠. 피곤하실 텐데 매번 절 마중 나오시는 것도, 제 보고서를 두고 마주 앉아 얘기할 때도, 그 시간이 전부 좋아요. 저를 걱정하셨을 줄 알아요. 그렇지만⋯⋯ 절 믿어주시길 바랐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과할 순 없어요⋯⋯.” 말을 맺어놓고도 숨이 가빠졌다. 호프만은 고개를 저었다. “사과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난 며칠 이 주제를 피해왔다. 어쩌면 호프만 밖에 답하지 못할, 그러나 그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진심을 기다렸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숨긴 채 눈앞의 미지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동안 서로 뿐이었던 그들은 태초의 인류처럼 황무지를 거닐면서도, 이성만을 추구했다. 그러니 감정을 배제한 수치심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당신과 나의 휴가를 신청했어요.” 호프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쯤 수리되었을 거예요. 본부로 귀환한 뒤 시작입니다. 기한은 넉넉하게 잡았으니 당신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예요.” 사랑하는 도시에 더 이상 가지 못할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캔자스까지 날아왔으니 가지 못할 곳은 없다. 마커스가 보내오는 글을 읽는 데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함께 있고 싶다. 몸이 약해지니 그새 마음도 약해졌던 것이다. 호프만은 후회했다. 

 

굳어버린 마커스가 휴가의 사전적 의미까지 파고드는 동안 호프만은 자연스레 깜빡이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데이트 신청입니다, 마커스.” 아. “데이트요?!” 진심이세요? 그녀의 멘티는 농담이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호프만이 한쪽 눈을 떴다. “진심이에요.” 

 

마커스는 이제 적당한 대답을 찾는 중이었다. 좋아요? 글쎄, 이건 좀 진부하지⋯. 감사합니다? 호프만 씨가 감사 인사 듣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시겠어? 영광이에요? 영광은 맞지만⋯⋯. 그러다 시선이 얽혔다. 며칠 만에 제대로 마주한 멘토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지쳐있었고, 또 충분히 상기되어 있었다. ⋯⋯나도 같은 얼굴일까?

 

그래서 마커스는 그대로 발을 돋아, 늘 걱정 많고 이제 막 주름이 패기 시작한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멘티의 용기는 거기까지였다. 아직은 가르칠 게 많은 듯했다. 그 소심한 키스를 받은 호프만은 멀어지지 않고 자신의 반응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커스를 느꼈다.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마커스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입꼬리를 떨었고, 그 턱을 한 손으로 받친 호프만은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뺨이 아니었다. 

 

마커스의 표정은 볼 만했다. 눈빛이 어쩔 줄 모르고 마구 흔들렸다. 귀 끝까지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둘 다 성인이니까요.” 호프만은 문제가 되냐는 듯 태연했다. 헛기침을 애써 삼켰다. “그렇죠⋯ 성인이니까⋯⋯.” 마커스가 메아리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뭐라도 붙잡고 싶은지 습관대로 머플러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호프만이 마커스를—정확히는 그 머플러를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마커스가 숨을 다급히 들이켰다. “아, 잠깐,”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 마커스를 두고 호프만은 머플러를 천천히 풀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두텁게 겹쳐있던 직물이 사라지자 부드러운 회갈색 머리칼이 빈 공간을 채웠다.   

 

아⋯⋯. 괜히 긴장했던 것이 민망한지 마커스는 고개를 돌린 그대로 떨구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었다. 이 상황을 걱정해야 할지 기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드러난 목이 그녀를 취약해 보이게 했다. 다시 손을 든 호프만이 마커스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맞출 수 있게끔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당겼다. 머뭇대는, 그리고 순종적인 눈이 맞아왔다. 

 

겁이 나는 걸까? 목께를 가볍게 감싸며 다시 입을 맞췄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는 뺨과 입술보다 뜨거웠다. 어릴 적, 알을 품는 암탉의 깃털에 손가락을 집어넣었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서툴게 입맞춰 오는 호흡에 맞추어 호프만은 그녀의 허락을 구하듯 닫힌 입술을 부드럽게 깨물었다. 섞인 혀가 머릿속을 몽롱하게 휘저었다. 마커스는 매달리듯 몸을 기대어 왔다. 방황하는 손을 어깨로 끌어오자 다른 손이 따라왔다. 동시에 호프만은 뒷목을 더듬던 손을 천천히 등으로 쓸어내렸다. 입을 뗀 마커스가 작게 몸을 떨며 한숨을 쉬고는 호프만을 올려다보았다. 늘 따뜻해 보이던 호박색 눈이 흐릿했다. 그녀가 숨을 충분히 가라앉히길 기다리고 있다. 황무지의 긴 해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의자에 파묻혀 얼굴을 감싸 쥔 마커스가 중얼거렸다. “⋯⋯저 첫 키스예요.” 아직 데이트도 안 해봤는데. 호프만이 생각하기에 데이트는 지금까지 실컷 했던 것 같지만, 마커스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긴 휴가가 시작될 테니 걱정은 없었다.

 

호프만은 마커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휴가 때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마커스는 아직 달아오른 얼굴로 호프만을 휙 쳐다봤다. “바, 방금 저희 첫 키스였는데.” 웃음을 참으며 답했다. “나는 아닌데요?” 여러 표정이 얼굴을 스쳤다. 저는 그렇다니까요! “네, 그리고 아주 좋았어요.” 호프만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하면 더 잘 할 수 있어요.” 할 때마다 잘 하던데? 그만 놀리세요! 마커스가 또 머플러를 쥐려다 허전한 목을 깨닫고 조금 전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시선을 피했다. 엉터리로 개인 머플러는 아직 탁자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데이트 전까지는 참아야죠.” 의자에 걸린 호프만의 코트 깃을 멍하니 만지작대던 마커스는 그 말에 입을 삐죽였다. “너무하세요.” 호프만이 다가와 마커스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보고서 마무리가 먼저예요, 마커스.” 

 

호프만이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취침 준비를 하는 동안 끝없이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마커스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생각해 두신 것 있으세요?” 아, 그러니까— 여행지 말이에요.

 

호프만은 출발 전 초조하게 보낸 이틀을 떠올렸다. “사실, 온 김에 캔자스 시티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충분히 곤란한 상황이라 귀환 전에 그러면 안 되긴 하는데⋯⋯. 여기랑 꽤 가까우니까. 별일은 없겠죠. 물론 당신이 무사한 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지만.” 캔자스 시티⋯⋯. 캔자스 시티. 마커스가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데이트하려고 오신 거예요?” 호프만이 말없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커스가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가렸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다시 보고서 앞에 앉은 순간부터 손으로는 펜을 놀리면서도 머릿속 한 켠에는 호프만의 어수선한 고백이 재생되고 있었다. 저를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저의 무엇을 보고 어떻게 좋아하게 되신 거예요? 물론 저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아니, 이게 아니야⋯⋯. 

 

“그런 건 일 먼저 다 끝내고 물어봐 줄래요.” 네? 소리 없이 다가온 호프만에 놀라 마커스가 의자에서 반 뼘쯤 솟아올랐다. “⋯⋯생각한 걸 그대로 적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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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 이르지만 미리 말해둘게요. 우리 관계를 본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당신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아주 숨기자는 뜻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각오는 해왔어요.” 

“예전부터요?”

“아, 데이트 전까지는 비밀이에요!” 

 

2.

“마커스, 캔자스 시티가 주의 어디쯤 있는지 알아요?”

“음⋯⋯. 사실 이름이 그럴 뿐이지, 바로 옆 주인 미주리와의 경계에 있어요.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미주리 소속이지만 행정구역은 두 개로 나뉘어요.”

“⋯⋯.”

“⋯⋯제가 틀렸나요?”

“아니에요.”

 

 

 

 

 

 

Chapter 2: Out of the Middle

Summary:

호프만은 복귀 후 곧바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으나 재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Notes:

- Caught in the Middle의 후일담입니다. 감상에 불편함은 없으나 되도록 이전 챕터를 읽고 읽어 주세요.
- 등장인물은 모두 성인입니다.
- 다소 노골적인 스킨십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ee the end of the chapter for more notes.)

Chapter Text

 

 

호프만은 복귀 후 곧바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으나 재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여긴 다 종잇조각으로 돌아가는 거 알잖아요. 그렇게 말한 제트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고, 호프만은 짧게 혀를 차곤 결코 종잇조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두툼한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사람 하나 움직이는 데 돈이며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 이렇다 할 사고도, 피해도 없었고,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고는 하나 전례 없는 특별 대우였다. 

 

호프만이 장을 맡은 부서는 일개 사무실 단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몇 차례 한계를 맛본 그녀는 더이상의 권한도 책임도 원치 않았지만, 기어코 호프만을 가만히 앉혀두는 데 성공한 재단 측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야금야금 개편을 거치더니 파견 인력 관리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떠맡겨 버렸다.  

 

“재단은 인재가 그렇게 없습니까? 누가 썼어요, 이거?” 

앞면을 빠르게 훑은 호프만이 한 문장을 짚어 디밀었다. ‘핵심 관리자의 부재로 업무에 심각한 차질’? 이거 직장 내 괴롭힘입니다.

 

“나도 같은 마음이지만 해 줄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레타. 당신도 알겠지만 거기 성의는 필요 없어요.” 

그래도 모범은 보여야 하니까. 제트가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한편 오랜만에 책임자 노릇을 면한 5급 조사원이 멘토의 뒤에서 멍하니 바닥의 얼룩을 헤아리고 있었다. 제트와 호프만의 설전은 익숙했다. 이건 두 사람만의 전우애 확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호프만이 일방적으로 깨지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이곳으로 향하는 호프만에게서는 어서 끝내고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읽을 수 있었으므로— “마커스 양,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워주겠어요?”

그러니 여태 방심했던 것이다. 대화를 마친 제트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마커스가 급히 시선을 들었다. “네?” 

당황하여 호프만을 바라보자 그녀 또한 어서 가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문은 시무룩한 소리를 내며 닫혔고, 발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린 제트가 호프만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레타! 당장 불어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라플라스랑도 거금이 엮여 있다고요. 

불러들일 때부터 사담이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전혀 뜻밖의 단어가 등장하자 호프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커스 일행이 보낸 기기에 문제가 생겼나?

 

“휴직계를 냈다고 들었어요. 마커스 양도. 제발 내가 기대하던 답변이라고 해 줄래요.” 

 

이건 확실히 사담이었다. 거금? 기대하던 답변? 머릿속에서 슬슬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호프만이 언짢은 얼굴로 무엄한 도박꾼들을 추려내느라 침묵을 지키자 결국 참다못한 제트가 선득 눈을 빛냈다.

 

 “저 애가 뭐래요?”

 

 아, 이것들이⋯⋯.

 

 

-

 

 

“금방 끝내겠습니다. 우선 좀 쉬고 있어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호프만이 안절부절못하는 마커스를 진정시켰다. 

“역시 징계인가요? 죄송해요, 예상했어야 했는데.” 마커스가 답답한지 눈썹을 한껏 내렸다. 제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아뇨. 별일 아니었습니다.” 

 

징계는 무슨. 프라이버시를 막 뜯긴 뒤 동조자들의 명단까지 받아낸 참이었다. 호프만이 그라인더 손잡이를 신랄히 돌리며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 때 저러시면서! 당장 읽어내고 싶은 조바심을 겨우 눌러 담은 마커스는 애꿎은 소매만 만지작댔다. 무언가 더 물으려 입을 열던 차, 재단의 보급형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신음으로 발신자를 짐작한 마커스가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한다. 긴급 호출을 알리는 기호가 깜빡였다.

 

타임키퍼 소대 수석 조수 발신. 

  • 귀하의 신속한 협조를 요청합니다. 최근 타임키퍼 소대는 재건의 손에 의해 고도의 마도학적 변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다량 입수하였습니다. 라플라스 연구센터와의 협력으로 안전 및 안정성 점검을 금일 전량 완료하였으나, 여전히 수집물의 출처, 본래의 용도, 변형 수단과 목적 모두 불명입니다. 귀하의 합류 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임키퍼인가요?” 이번에는 호프만이 물을 차례였다.

눈이 좌우로 바쁜 것을 보니 저쪽도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수신음 한 번에 긴장을 되찾은 마커스가 짧은 메모를 휘갈겼다. 챙길 게 많겠어. 

“네. 재건의 수집물을 분석할 인력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하네요.” 

참았던 숨을 내쉬고 통신기를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경험 많은 조사원이다. 이런 돋보기 노릇은 익숙했다. 

 

음⋯⋯. 호프만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전기 포트를 단호히 눌러 껐다. 이것도 예상 밖인데. 시끄럽게 뿜어나온 김만큼이나 속이 복잡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합니다. 많이 피곤할 텐데.” 

“아니에요! 호프만 씨가 사과하실 일은 전혀 아닌 걸요.” 

 

타임키퍼 측의 호출이라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떠맡길 수도 없을 뿐더러 마커스 자신도 그러길 원치 않을 것이다. 이래서야 황무지에서의 약속은 무의미했다. 괜히 발목을 잡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 호프만이 투덜거렸다. 나 참. 캔자스에 계속 있을걸 그랬나.

 

“휴가 도중에 불려가는 것보다야 낫죠.” 어쩔 수 있냐며, 허탈하게 웃어 보인 마커스가 응접 소파에 놓아 두었던 코트와 머플러를 집어 들었다. 탕약 캔디가 얼마나 남았더라? 안주머니를 더듬어 보지만 텅 비었다. 그제야 캔자스의 첫 며칠 내내 입에 달고 있던 것이 기억났다. 거긴 경계할 것도 읽을 것도 많은 동네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좀 심한데. 

 

당황하여 맞은편의 가방을 한참 뒤적였지만,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나가는 길에 본부 지하의 약국에 들러야 했다. 시차 탓에 지금이 토요일 저녁임을 겨우 계산해낸 마커스가 약국의 영업시간을 가늠하는 동안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눈높이를 낮춘 호프만이 당부했다. 

 

“연락해요.”

 

“댁으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마치 그것이 공식적인 업무라도 되는 양, 수첩을 다시 꺼내 들며 고개를 돌린 마커스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피했다. 네, 네? 

 

던진 적 없는 질문에 답하며 얼굴을 붉힌 연인이 끔찍한 것이라도 본 듯 질끈 눈을 감는 꼴에 호프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중간이 없군. 

“아뇨.” 나도 다른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눈썹을 작게 찡그린 호프만이 강조했다. 그러고는 눈앞의 긴 회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한 줌 감아쥐고 목을 가다듬는다. “민망해서 그러는데, 나 좀 봐 줄래요?” 

 

“약속 못 지킨 체면은 차리고 싶어서.” 

“야, 약속이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마커스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태연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은 호프만은 얼굴을 가로지른 머리카락으로 그 주인의 얼굴을 가만가만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호프만 씨? 실없는 장난에 다소 긴장을 놓은 마커스가 입을 달싹이더니 겨우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다른 일이시란 게⋯⋯. 제가 더 일찍 끝날 일은 없겠죠? 여행지 같이 알아보고 싶었는데.” 마커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서두를 건 없잖아요. 우선 돌아와서 천천히 얘기해요.” 그리고 지금 기껏 묻는다는 게 그겁니까? 그러나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내 일은 금방 끝날 겁니다.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요.” 이건 우리 둘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명예? 영문을 모르는 마커스가 웃었다. 

“이것도 나중이네요. 휴가가 시작되면 입이 많이 아프겠어요.” 

“글쎄, 지금 아플 수도 있죠.” 

어떻게 생각해요? 그 은근한 물음에 다시 심장이 조여들기 시작해 그녀는 습관대로 말을 돌렸다. 간지러워요. 간지러우라고 하는 건데 그건 별로 적절한 반응 같지 않네요⋯⋯.

 

가죽 소파가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 

등받이에 퇴로를 막힌 채, 그때까지도 마커스는 멘토의 부탁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한 뼘까지 좁혀지자 본능이 경보를 울려댄다. 제발, 마커스. 이럴 나이는 지났잖아. 겁 많은 애처럼 굴지 마. 호프만 씨가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마커스.”

 

늘 그랬듯 멘토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냥 눈 감아도 돼요.”

 

비로소 온몸의 근육이 이완했다. 기억에도 없는 시구가 눈앞을 스친다. 아, 이는 나를 인도하는 어둠이라. 밤의 어둠은 여명보다도 사랑스러우니*.

 

집요하게 볼을 간지럽히던 감각이 문득 사라졌다. 소리 없이 다가온 손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귓바퀴를 스치는 온기에 무심코 팔을 움츠렸으나 안심시키듯 그것을 지그시 어루만져대는 손길에 몸을 더욱 가까이 붙일 수 밖에 없다. 

맥박이 점차 가라앉았다. 익숙한 향과 온기를 가진 어둠. 이것이 무엇이며, 또한 누구인지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니 기꺼이 고삐를 내어 주어야 했다. 

 

꼭 감은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떨리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눈에 담던 찰나 호프만은 소매에 가벼운 당김을 느꼈고, 그것을 신호 삼아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애틋하게 답해 온다. 집무실의 건조한 공기가 일순 녹아내렸다. 숨결이 섞이자 터져 나온, 습기를 머금은 신음이 여러 겹 부딪혀 퍼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서툴게 굴지 않았다. 마커스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가자 그녀의 팔꿈치를 쓰다듬던 호프만의 왼손이 오히려 잘게 떨기 시작했다. 떨림을 의식해 손을 거두었으나 다른 손이 불쑥 그것을 더듬어 붙잡았다. 순순히 힘을 빼 보였으나 용기도 잠깐이었는지 더 움직임이 없다. 장물이라도 집은 것처럼 떫은 손길을 호프만이 그대로 마주 쥐었고, 곧 소심한 손가락이 틈을 파고들었다.

 

나란히 앉았던 자세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다. 낮은 팔걸이가 어느새 뒷목에 닿았다. 호프만은 상체를 더욱 깊게 숙였고, 그 기분 좋은 압박감에 마커스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멘토의 관심은 어느덧 목과 귀를 향했다. 아, 거기. 귀에 닿는 입술에 소름이 돋아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 지금 웃어도 되는 건가? 

그 의문에 답하듯 호프만이 이를 세워 귓볼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마커스가 한 차례 몸을 떨더니 이내 딸꾹질을 시작했다. 

 

도저히 흥분감을 더한다고는 볼 수 없는 그 소리에 호프만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분주히 내려가던 입을 떼고 마커스를 내려다 본다. 앞머리가 엉망으로 달라붙어 갈라졌다. 얇은 셔츠가 빠르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호프만은 가만히 혀를 씹었다.

       

“죄,” 딸꾹. “죄송해요.”  

“뭐가요?” 

“아, 아까 웃어서⋯?” 딸꾹. “그리고 이거.”

 

둘 다 왜 죄송하죠? 죄송한 건 압니까? 마커스가 어느 것에 어떻게 답해야 할 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을 때, 호프만은 빠져나온 셔츠 밑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 

이제는 구분할 수 없는 체온 탓에 극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손을 따라 팽팽히 조여드는 근육이 답을 대신한다. 호프만이 낮게 속삭였다. “계속 숨 참으면 멈출 겁니다.”

 

마커스는 그렇게 했다. 턱에 힘을 주고, 입가에 갖다 댄 손을 한껏 누르며 숨을 참았다. 흉터 덮인 손이 명치를 누른다. 딸꾹. 그 움직임에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마커스가 재차 들썩였다. 날숨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가 눈으로 몰리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호프만이 입을 작게 벌렸다 닫았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안 가 다시 열린다. 

 

“당신 지금 정말 아름다워요.” 

 

⋯⋯알고 있어요? 한숨처럼 묻는 얼굴이 까닭 없이 슬퍼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호프만의 왼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어깨를 타고 마커스에게도 전해진다. 

 

당장이라도 그 손을 붙들고 싶지만—지금 진짜 슬픈 건 나인데! 마커스는 이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호프만이 자신더러 ‘아름답다’는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도, 끝을 모르는 딸꾹질도, 셔츠 아래 손도 다 벅찼다. 그 손이 가슴 아래 굴곡을 훑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습기가 묻어났다. 애써 정신을 붙드느라 손끝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호프만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아직 휴가 중은 아니지만⋯ 누가 들어올 리도 없고.” 닫힌 문에 시선을 던진 호프만이 다시 몸을 기울인다. 마커스는 이제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거의 잊어 버렸다. 황무지에서의 탁한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손이 천천히 등으로 옮겨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 입을 떼었을 때, 그리고 동시에 마커스가 눈을 떴을 때 호프만이 물었다. 합류 시각까지 여유 있나요? 없어도 있어야 했다. 있고 싶었다. 마커스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던 것이다. 이동 수단으로 전송 플로피 디스크를 제공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딸꾹질이 멈췄다. 

 

허리를 띄워 그 손을 들였다. 반쯤 올라간 와이어가 엉뚱한 곳을 조여 답답했지만 곧 해결될 문제였다. 치켜든 턱 아래 얇은 피부에 호프만이 성급히 입을 맞춘다. 

긴급 호출이니 뭐니 하는 것은 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폭풍우? 이곳이라면 안전할 것이다. 그래, 지금 여긴 안전해. 여기서 그냥⋯⋯ 

 

 

‘삑’?

 

삑삑삑삑삑삑

 

손이 멈추었다. 먹먹한 귀 너머로 통신기의 전자음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건 가뿐히 무시해줘야 한창 때라고 할 만하겠으나—그게 좀 시끄러워야지! 호프만도 같은 생각인 듯 몸을 물리고 소리의 근원지를 불만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이런. 3초 전만 해도 그건 다른 의미일 수 있었는데.

“잠깐 실례할게요!” 마커스가 다급히 허리춤을 더듬어 통신기를 뽑아 든 뒤 손바닥만 한 그것을 코 앞에 댄다.

 

예상대로 타임키퍼 소대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지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읽자, 마커스. 일단 이거 제대로 읽고 나서 부끄러워 해.

 

호프만이 말없이 손을 넣어 셔츠와, 어쨌든 셔츠를 다시 끌어내렸다. 가차 없는 손길에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러곤 언제 풀었는지 단추까지 두어 개 손보더니 이제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빨리 오라고 합니까?”

“그, 그런 건 아니고⋯. 일정이 좀 앞당겨졌다고 하네요.”

“그게 그 뜻으로 들리는데요.”

“⋯⋯.”

 

마커스는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앞으로의 동선을 그렸다. 

6층에서 디스크를 받아야 해. 엘리베이터는 붐빌 테니까 계단으로 가야지. 금요일 당직이 틸레아였던가? 그 애한테 전해줄 게 있었는데. 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니까 중앙 안전실에 가서 받아 와야 하나? 거기까진 너무 먼데⋯⋯. 일단 약국 들르는 걸 잊으면 안 돼. 그래도 여행가방 숙소에 웬만한 물건은 있으니까 다행—

 

“⋯⋯지금 가야 하는 거죠?”

“네⋯⋯.”   

 

 

-

 

 

어디 보자. 마커스를 배웅한 호프만은 코트 주머니에서 두 번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두고 돈내기를 해? 유독 눈에 띄는 한 이름에 여러 겹 줄을 그으며 수화기를 집

 

어들 뻔했으나, 문이 험악한 소리를 내며 다시 열린 탓에 손을 멈춰야 했다. 놀란 마음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곧장 다가온다. 

 

“마커스?” 

 

왜 그래요? 두고 간 게 있나요? 지, 지금 늦은 거 아닙니까? 대답 없이 차가운 얼굴을 마주하자 호프만이 드디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거 안 좋은데. 이건 확실히 좋지 않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마커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호프만은 지난 10분을 낱낱이 상기했다. 내가 너무 징그럽게 굴었나?

 

“괜찮을 줄 알았는데,” 

Scheiße!* 나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다니까.

“오자마자 일하러 가려니까 역시 억울해요.” 

 “⋯⋯예?” 

 

내뱉듯 용건을 실토한 마커스가 그 완벽한 각도의 크라바트를 그러쥐었고, 느닷없이 멱살을 잡힌 호프만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등장부터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 순식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그녀는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금세 숨이 가빠진 호프만이 마커스의 손등을 긴급히 두드렸다. 멀어지기가 무섭게 이성을 되찾은 마커스는 잠시 머뭇대더니—이제 와서 부끄러워 하다니, 꼴불견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게다가 방금 나 노크도 안 했잖아—내리던 손을 허리에 둘러 멘토를 꼭 껴안았고, 호프만은 조용히 품을 내어주었다.

 

그것 말고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일하시는 동안 제 생각 하셔야 해요.” 

 

저도 그럴 테니까. 재차 얼굴을 묻으며 마커스가 당부한다. 휴식도 간절했지만 지금만큼은 이 사람과 떨어지기 싫었다. 

아직도 당신의 고백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릴 만큼 행복하단 말이에요. 계속 보고 만지고 싶어요. 잠드는 것도 아까울 정도예요. 당장 이걸 다 말할 수는 없겠지. 팔에 힘을 준다.

 

“빨리 끝내겠다고 무리하지만 말아요. 너무 유능한 걸 어떡하겠습니까.” 

호프만이 그렇게 말하며 다독였다. 드문 칭찬에 마커스가 웃음 섞인 숨을 내쉬고는 더욱 발을 돋아 마지막 투정을 부린다. 

 

“음, 대답 못 들었어요.”

“생각은 틈만 나면 할게요.” 

그러니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든 전화해도 돼요. 언제든 못 할 거 아시면서. 그럼 말도 못 하나요?

 

그 대답에 마커스가 다시 웃었다. 소리가 진동이 되어 마주 안은 이를 울린다.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거리에서 우습게도 두 사람은 경쟁하듯 서로를 당겨댔다. 호프만은 그런 자신이 새삼스러웠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온몸이 따끔대는 것 같았다. 

왼팔이 다시 저리기 시작해 그녀는 어색히 몸을 떼곤 짐짓 경건한 태도로 이미 가지런해진 그 곱슬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손길을 따라 기우는 평온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다. 포옹한 팔을 자연스럽게 거두는 것조차 어색해 하는 그 이마에 격려 담긴 키스를 보낸다. 

 

다음부터는 노크해요! 대답도 없이 다급히 멀어지는 뒤통수를 향해 소리치고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힘을 주어 발을 구르자 천장의 격자무늬가 어지럽게 돈다. 문득 마커스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던 장면이 떠올랐고, 호프만은 웃었다. 볼펜 몇 자루가 요란하게 굴러떨어졌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임시 연구 센터.

여행 가방의 황무지에 발을 딛자마자 마커스는 그 희고 반듯한 건물의 크기에 깜짝 놀랐다. 이건 임시를 넘어섰잖아. 두 달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5일차.

물론 이것은 수면 시간—10시간? 11시간? “정확히는 9시간 21분. 오차 범위는 15분 이내야.” 마커스가 뱀 한 마리에게 묵례로 감사를 표했다—을 제외한 계산이다. 잠드는 것이 아깝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미 층 하나를 천장까지 가득 채우고도 남을 골동품들을 수없이 읽고 난 뒤였다. 작게는 압정 한 줌에서부터 크게는 요트 한 척⋯⋯ 하나하나의 제작 과정이며 출처 시대, 마도술 사용 흔적, 변형 여부, 소유자가 몇 번 바뀌었는지, 심지어 그것들의 몇 번째 주인이 어느 손잡이인지까지 알아냈다. 

 

읽기는 맥락을 읽어내는 데에 용이하다. 높은 수준의 통찰력과 지식을 갖추었다면 피시전대상이 거쳐 온 사건의 사소한 정보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읽은 것을 형편 없는 해상도로 출력할 뿐이다. 그런 것은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다.

 

즉 더이상의 분석이니 하는 것에는 무용지물이라는 뜻이었다. 앞으로는 관련 분야 전문가와의 면밀한 의견 교환이 필요했다. 모두 눈물 날 정도로 번거로운 과정이다. 

지금은 정보가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할 일이 끝난 사람들을 억지로 앉혀두자 의욕도 능률도 바닥나고 말았다. 

 

“이건 내 전공이 아니라고!” 

 

아니, 사실 전공은 맞지. 그 ‘전문가’ 중 하나로 끌려온 히사베스가 나무젓가락을 두 동강 내며 불평했다.

그녀는 마커스보다 반나절 늦게 이곳에 도착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는 물건은 지옥불로 달구든지 하데스의 입김으로 얼리든지 해서 정체를 알아내라는 명령이었다. 재미있어 보였지만 동시에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 양이 너무나 방대했다. 

“게다가 여긴 내 팀도 없잖아.” 손에 든 컵라면을 다시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청록색 머리카락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형제자매들이 둘째의 정신과 신체 건강을 걱정하며 웅성댔다.

 

“같이 오신 분들은요?”

“걔넨 아냐. 다 처음 본다고. 윽, 마커스, 미안한데 거기서 새 포크 좀 꺼내줘. 배고파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네.”

 

마커스가 고개도 들지 않고 플라스틱 포크를 뜯어 건넸다. 꿩 깃털 모자에 대한 감정서를 그녀는 세 번째 작성 중이었다.

“왜 라플라스 본부에 맡기지 않는 걸까요? 거긴 장비도 인력도 더 좋을 텐데.”

“여기에 뭐 하러 이런 건물을 지었겠어? 무슨 일이 나도 금방 덮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히사베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마커스는 조용히 팔을 문질렀다. 

“두 달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런 건 없었어요.” 

무표정한 연구원들과 함께 이곳 임시 연구 센터에 들어서던, 히사베스의 언짢아 하는 얼굴을 마커스는 기억했다. 그때 그녀에게선 분노와 죄책감이 읽혔다. 

 

“⋯⋯라플라스는 무슨 생각이죠?”  

진지하게 묻는 마커스를 향해 히사베스가 유쾌히 웃었다. 

“무슨 생각은. 다 돈 문제야, 돈 문제.” 

그래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다. 멋쩍어진 히사베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꼬리를 굳혔다.

“버틴네가 걱정되는 건 이해해. 소식 듣고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진짜 별거 아니야. 내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걸고 맹세할게.”

“그런가요⋯?”

마커스가 힘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다. 스스로도 신경이 지나치게 날카로워진 것을 느꼈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미간을 찌푸린 히사베스가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마커스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열은 없는데. 쉭쉭. 열이 없다고 해서 병이 아닌 건 아냐, 실비. 나도 알거든? 내가 의사야? 걱정되니까 그러지. 그 쇠창살 낀 여자한테 보내. 투스 페어리 씨? 지금은 이집트인가 어디 갔다고 들었는데. 여긴 이래서 문제라니까. 마커스. 마커스?

 

“마커스!”

“네, 네?”

 

히사베스가 고개를 젓더니 마커스를 의자에서 뽑아내듯 끌어당겼다.

“너 지금 엄청 피곤해 보이거든. 우리 아홉의 의견으로는 이건 아주 심각한 수면 부족이야.”

일으킨 대로 몸을 맡긴 마커스가 눈을 깜빡이려 안간힘을 쓴다. 얘가 아주 넋을 놨네. “이 멍청한 모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장 눈 붙이러 가. 깨우러 갈 때까지 일어나지 말고.”

 

할 일 다 한 거 알잖아. 좀 쉬어.

그 말을 듣자 맥이 풀렸다. 

 

-

 

씻자마자 쓰러지듯 가로 누운 채 마커스는 히사베스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타임키퍼 소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이 책임감 강한 조사원은 침대까지 고민을 끌고 오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나흘 전의 히사베스는 그저 본부에 두고 온 파트너의 생일을 직접 챙기지 못한 것에 심통이 났던 것 뿐이다—진짜진짜 웃길 예정인 서프라이즈 파티였는데! 게다가 케이크도 못 먹었어!—하지만 마커스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큰 그 라플라스 건물은 대체 뭐지? 왜 하필 여기에 지은 걸까?

엄밀히 말하면 이곳 임시 연구 센터는 타임키퍼 소대 소속 연구원들의 거듭된 요구와 라플라스 전(前) 수장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이번 일만 마무리 된다면 어떤 기관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것이다—통근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발표에서 루시는 그 문장을 끝으로 스크린을 꺼 버렸다.

 

무엇보다 수집물을 본부까지 안전히 옮기는 것에 지나치게 비용이 드는 탓이다. 결국 돈 문제였다.

 

멀리서 여행가방 숙소동 로비의 떠들썩한 소음이 들려왔다. 

휴대용 연락 장치의 화면을 확인한다. 호프만으로부터 새 문자 한 건. 아침 식사 잘 챙기라는 인사. 거의 일곱 시간 전이었으므로 급하게 답장을 입력했다. 시간만 나면 여기 숙소든 연구실 책상에서든 잠에 빠져드느라 호프만과는 그간 문자만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이다. 첫날 저녁에 처음 문자가 왔었다. 한창 바빴던 시점이라 형식적인 답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호프만은 마커스가 피곤할 것을 염려했는지 점차 빈도를 줄였다. 

 

이게 아닌데. 지난 대화를 훑던 마커스는 자책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이라도 전화해 볼까? 늦은 시간은 아니니까⋯⋯. 눈이 감기자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아 구역감이 들었다. 다 탕약 캔디 때문이다. 

⋯⋯. 지잉. 재빨리 손을 뻗어 전원을 켰다. 

 

  • 괜찮아요? 숙소러 돌ㅇ아갔다고 들었어요 깨웠다면미안합니ㅣ다

 

멘토답지 않은 오타며 여유 없는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답장을 고민하는데 화면이 바뀐다.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마커스?”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자 안도감이 들었다. 마커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불이 유독 포근히 느껴진다.

“마커스? 괜찮은 거죠?” 수신 표시가 뜨길래. 변명처럼 덧붙인 호프만은 잠자코 답을 기다렸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히사베스 씨가⋯⋯”     

 

그런데 숙소에 왔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거지? 사고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이 눈이 감긴다. 마커스는 그대로 까무룩 잠들었다.

 

-

 

20여분 전, 컵라면 두 개를 더 해치운 히사베스는 본격적으로 실험 준비를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멜뤼진의 예민한 감각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낯선 발걸음을 포착했다. 보안경을 착용하고 고개를 듦과 동시에 문이 열린다. 재단 배지를 단 여자가 연구실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인사도 없이 용건을 말했다. “여기가 502호 맞습니까? 마커스 조사원을 찾고 있습니다.”

히사베스가 니트릴 장갑을 찾아 서랍을 통째로 뒤집으며 대답했다. “누군진 몰라도 늦게 왔네. 그 앤 아까—” 

잠깐. 재단? 9인분의 뇌가 폭발적인 속도로 연산을 시작했다. 

 

“성함이 혹시?”

“그레타 호프만입니다.” 

 

우와! 호프만! 호프만! 뱀 여덟 마리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더니 신나게 떠들었다. 

 

내가 맞췄어! 나도! 이런, 2대7이면 몫이 너무 적어지는데. 우리 말고 다른 녀석들도 포함해야 하니까 아직 판단은 일러. 아니지, 다시 생각해봐. 찾으러 왔다고만 했잖아. 왜 그리 부정적이야? 숲을 보라고. 실비는 어디 걸었더라? 우리 2호는 7이지 당연히. 이거 럭키 세븐이잖아! 포인터한테 선물 하나 더 사 가자!  

 

호프만은 그 광경을 떨떠름히 지켜보았다. 분명 갑자기 튀어나온 뱀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단 맨 끝의 낯선 이름이 떠올랐다. 라플라스의 메두사라는 별명이 과장은 아니군.

 

“그쪽이 ‘히사베스’군요?” 

 

들뜬 가족들을 겨우 진정시킨 히사베스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뭐, 그게 내 ‘이름’이긴 한데. 우리 초면이지 않나? 내 얘기도 하던가요?”

마커스를 생각해서라도 체면은 좀 차려줘야 했다.

“마커스는 아까 숙소로 돌아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길래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라고 했죠.”

 

2호, 당장 돈 내놓으라고 해. 조용히 해 봐. 그리고 2호라고 부르지 말랬지!

 

다시 시끌벅적해진 상대를 두고 호프만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어디 걸었죠?”

 

“⋯⋯뭐야! 누가 불었어!”

 

히사베스가 삿대질을 했다. 잠시나마 차렸던 예의는 어디 갔는지 다시 사방에서 튀어나온 뱀 여덟 마리가 눈을 번득인다. 누구야? 누가 불었어? 대체 어떤 의리 없는 자식이 분 거야? 그 눈길에 호프만은 온몸이 잠시 굳는 것을 느꼈다. 

 

좁혔던 동공을 금세 푼 히사베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다시피 난 그쪽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버틴 따라 ‘사귄다’에 걸었죠. 타임키퍼의 안목은 믿을 만하니까.”

 

“그래요?”

 

놀랍게도 호프만은 웃어 보였다.

 

 

-

 

 

이 나이 먹고 용돈을 다 받네. 히사베스가 빳빳한 지폐를 휘적였다. 

 

호프만은 승자 일곱의 불만을 듣더니 그들이 건 액수만큼 봉투에 담아 건넸다. 패자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사례비라고 생각해요.”

“사례를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지간히 기분 좋으신가 보네.”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호프만이 봉투를 더 가까이 내밀었다. 흥. 내기가 들통난 것에 빈정이 상한 히사베스는 완고히 버텼으나, 턱힘 좋은 형제 하나가 그것을 낚아챈다.

 

히사베스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우리 판돈 다 뺏은 건 아니죠? 그래서 돌려주는 거고.”

“당신들이 돈통 어디에 뒀는지 압니다.”

“역시나 그걸 가지러 오셨군. 도둑질은 한 번으로 족할 텐데요.”

“⋯⋯아니. 그건 도박꾼들 마음대로 해요.” 

 

히사베스의 야유를 다시 한 번 무시한 호프만이 수첩에 무언가 끄적인 후 문고리를 쥐었다.

 

그것이 반쯤 돌아갔을 때 히사베스가 장난기 없는 목소리로 조언했다.

“내가 아깐 너무 무신경이 보냈나 싶은데, 오늘 그 애 상태가 영 아니었거든요. 가서 숨 잘 쉬나 봐요.”

호프만은 세 번째로 무시하려다 뒤돌았다. 마지막 신탁은 귀담아들어야 하는 법이다. 

“많이 안 좋던가요?”

히사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와서 거의 못 잤을 걸요. 단 것도 엄청 먹었고.”

호프만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괜히 연락해서 깨우지는 마시고. 열 없나 정도만 보면 될 거예요. 나도 갑자기 걱정되네.”

고마워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호프만은 502호를 뛰쳐나왔다. 급히 연락 장치를 꺼내 든 순간 수신음이 울린다.

 

 

-

 

 

인기척에 마커스는 깨어났다. 이상할 정도로 개운한 정신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람을 못 들었나? 

 

“히사베스 씨?”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눈 안쪽이 지끈거렸다. 손마디로 눈가를 강하게 누른다. 

 

침대로 다가온 히사베스가 무어라 대답했지만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지, 지금 몇시죠? 죄송해요. 잠깐만 잔다는 게 제가 알람을⋯⋯. 금방 준비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 계시면—”

“마커스. 연구 센터 일은 괜찮습니다. 더 자요.”

히사베스는 분명히 아니었다. 손을 뗀 마커스가 캄캄한 방을 배경으로 초점을 잡으려 애썼다.

 

⋯⋯지금 더 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더 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실루엣의 정체를 알아본 마커스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덩달아 놀란 호프만이 어깨를 움츠렸다. 

 

자다 깨서 그런가 맹랑하네.

“자다 깨서 그런가 맹랑하네요.”

 

방황하던 호프만의 팔이 엉거주춤 팔짱을 끼었다. 마커스가 깨길 꽤 오래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앞에 두고 보니 지난 며칠 한 소리씩 듣고 다닌 것이 떠오른 것이다. 기껏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고작 남들 잔소리에⋯⋯. 그런 생각에 입이 썼다. 침대맡에 우두커니 선 호프만은 그저 마커스의 표정을 살피려 애쓸 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아니, 지금 몇 시죠?”

잠에 취해 횡설수설하던 사람이 갑자기 또렷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대자 호프만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커스는 그녀를 껴안으려 했고, 잽싸게 몸을 뺀 호프만에 의해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했다. 아, 정말!

 

“우선 걱정 돼서 왔고, 둘째, 그건 몰라도 돼요. 몇 시⋯⋯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호프만이 차례로 답했다. 자꾸 어물대는 태도에 마커스는 말없이 연락 장치를 켰다. 5시. 1시 조금 넘어 잠들었으니 이 정도면 양호하다. 어서 연구센터로 돌아가야 한다. 저녁까지 다시 올려보낼 감정서가 산더미였다. 급히 거실화를 구겨 신고 세면대에 섰다. 찬물이 닿으니 겨우 정신이 들었다.

 

“마커스.” 

 

욕실 문가에서 초조한 듯 손목을 눌러대던 호프만이 결국 진실을 알렸다.  

 

⋯⋯.

⋯⋯.

 

“저 설마 여태⋯⋯”

“그래도 몸은 많이 괜찮아졌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렇게 묻는 멘토를 뒤로 하고, 외투를 낚아챈 마커스는 방을 뛰쳐나왔다.   

 

 

-

 

 

“마커스!”

 

긴 복도를 뛰다시피 하며 마커스는 히사베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답이 없다. 그래, 당연히 바쁘시겠지! 

 

부재중 하나 없이 깨끗한 수신함도, 정말 일손이 모자랐다면 이미 끌려가고도 남았을 거란 사실도 그녀를 멈출 수 없었다. 지금 그런 것에 이상함을 느낄 여유가 없다. 마커스는 연구실에 도착해 할 일을 빠르게 되뇌기 시작했다.

 

“잠깐 멈춰봐요!”

 

코너를 돌자 어둑한 복도와 달리 강한 조명에 마커스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관성에 의해 상체가 급격히 기운다. “젠장, 마커스. 멈추라니까!”

 

“와, 말버릇 뭐야.”

 

누군가 감탄사를 뱉었다. 로비의 모두가 점점 다가오는 그 소음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연극 무대의 배우처럼 등장한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시선이 쏠린다. 실내복에 외투 차림인 마커스는 자다 깬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런 그녀를 뒤에서 껴안다시피 지탱한 호프만은 누가 봐도 지쳐 보였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죠?” 

 

정적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빌라. 그녀의 교육자의 피가 이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알린다. 아니나 다를까 로비는 금세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모두 조용!” 로비는 적막으로 가득 찼다. 

 

이런. 욕은 하지 말걸. 호프만이 어디까지 해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현직 선생들의 연이은 호령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마커스가 홀린 듯 로비 옆 황무지 출입구로 향했다. 단단히 붙든 어깨를 흔들며 호프만이 음절마다 힘을 주어 속삭였다. “마커스. 일은 끝났습니다.”  

 

연구실은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부탁인데 당장 뭐라고 말 좀 해 줄래요. 저 인간⋯ 마도학자들이 나 잡아먹기 전에.

 

 

 

 

결국 마커스가 형편 없는 웅변을 펼치기 직전, 황무지 출입구에서 히사베스가 태연히 하품을 하며 등장했다. 가벽 탓에 앞에 선 두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던 그녀와 그 형제들은 장장 스물여덟 시간짜리 숙면을 취한 마커스를 반갑게 맞았다. 허겁지겁 사과하는 마커스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친 히사베스는 한 박자 늦게 뒷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호프만 씨도 안녕하세요? 아무리 반가울 사이라지만 이거 두 사람 꼴이—” 

 

말이 아닌 것 같네요. 혼자 큭큭 대며 몇 발짝 뗀 히사베스는 그제야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내어 로비를 재빨리 살피곤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둘이 여기서 키스라도 했어?”

 

“네?” 예상 밖의 물음에 마커스가 펄쩍 뛰었다. 아뇨! 왜, 왜,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신이 기억하지 못 하는 키스가 지난 5분 새 있었는지 혼란스러워 하며, 마커스는 달아오른 얼굴과 입가를 두서없이 더듬댔다. 도움을 청하듯 옆에 선 호프만을 바라보았지만 갑작스러운 술래잡기의 후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그녀의 멘토는 이마의 땀을 두드리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도와줘요?” 

여전히 뻘뻘 대는 마커스를 두고 히사베스가 제안했다. 

“⋯⋯부탁 좀 합시다.”

 

동앗줄이 내렸으니 잡긴 했지만 대체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지. 호프만은 잠자코 히사베스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마커스는 불안한 눈으로 선배들을 살폈다. 호프만이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손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불안했던 마커스는 느닷없는 접촉에 화들짝 튀어 올랐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히사베스가 호프만을 향해 혀를 찼다. 저것 봐. 잡으면 잡는 거지 놓는 건 또 뭐예요?

그 도발에 보기 좋게 걸려든 호프만이 눈을 굴리더니 깍지까지 낀 손을 들어 보였다. 마커스가 휘청였고, 히사베스는 웃었다. “이런 분이신 줄은 몰랐네. 우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준비 됐죠?

 

자습 중인 교실처럼 속닥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던 로비는 배우들의 등장에 다시 조용해졌다. 히사베스가 관객 몇몇에게 눈을 찡긋였다. 그들은 엄지를 들어 보이거나 조용히 미소 짓는 것으로 답한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위풍당당히 로비를 가로지른 셋은 드디어 맞은편의 복도로 돌아왔다.          

“이런 건 당당하게 돌파해야지. 그나저나 내 방은 저 쪽인데.”  

“아! C동이셨죠! 다, 다시 갈까요?”

“마커스⋯⋯.” 호프만이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히사베스. 아깐 나도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천만에요. 돕고 살아야죠.”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는 나도 좀 알고 싶은데요. 히사베스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이어진 군더더기 없는 설명에 그녀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마커스, 정말 쉬라고 보낸 거야. 네가 계속 도와준 덕분에 우리도 빨리 끝낸 거고. 내가 메시지라도 넣을 걸 그랬네. 네 성격 두 번 잊었다간 사람 잡겠다. 호프만 씨도 봐요. 지금처럼 애한테 이렇게 바로 조리 있게 얘기해줬으면 됐잖아요? 하려고 했습니다⋯. 마커스가 너무 빨랐고요. 보통 이십 대를 달리기에서 이길 수 있는 사십 대는 없거든요. 윽, 죄송해요. 아까 막 일어났을 땐 너무 놀라서⋯⋯. 

 

“그리고 욕도 너무했어. 여긴 그쪽한테는 감시 카메라가 백 대씩 있는 곳이나 다름 없다고요. 입조심 하셔야지.”

“그건 할 말 없네요.”

호프만이 인정했다. 멍하니 선 마커스가 이 대화의 이상함을 읽어낸 순간, 히사베스가 싱긋 웃으며 호프만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잘 해 봐요.”

 

“그냥 그레타라고 불러요.” 악수를 하며 호프만이 일렀고, 한참 연상의 친구 신청을 흔쾌히 수락한 히사베스는 마커스에게도 이젠 정말 마음 놓고 쉬라는 둥 짤막한 인사를 건넨 뒤 왔던 길로 돌아갔다. 홀가분해 보이는 발걸음에 마커스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초등학생들처럼 어색히 손을 붙든 채 그들은 복도에 남겨졌다. 열 하나가 둘이 되자 정적이 무겁다.   

 

“히사베스 씨가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거죠? 마커스가 머뭇대며 물었다. 조금 전 읽은 것은 그게 다였다.  

“티가 났나 보죠.” 호프만이 다시 앞서 걷기 시작한다. 그 손에 이끌려 마커스도 발을 떼었다. “우선 방으로 돌아갈까요.”

 

그들은 말없이 복도를 지나왔다. 닫히지 않은 문이 눈에 들어와서야 마커스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맨발에 거실화. 구겨진 외투에 되는 대로 꿰어 넣은 팔이 뻐근했다. 닫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호프만이 말했고, 괜찮아요. 간단히 답한 방 주인은 예의상 멈춘 앞사람 대신 문을 젖혔다. 

 

자연스레 탁자로 다가간 호프만이 물을 한 잔 따라 건네고는 맞은편의 블라인드를 걷어 올렸다. 마커스가 왼손에 남은 온기에 집중하는 동안 여행가방의 샛노란 인공 태양빛이 늦은 오후를 알리며 스며들었다. 천천히 밝아지는 익숙한 배경을 그녀는 습관처럼 읽는다. 

 

호프만의 머릿속은 늘 어려웠다. 답지를 놓고도 마커스는 종종 헤매어야 했다. 쉽게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지만, 오늘은 유독⋯⋯

 

“무슨 일 있으셨죠?”

“⋯⋯.”

“저 없을 때요.”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얘길 꺼낼지 고민이에요.”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 끝으로 문질러댔다. 젠장. 아까부터 어색해 죽겠네. 그래 보이겠지?

“네.”

 

단조로운 창밖 어딘가를 바라보던 호프만이 고개를 돌린다. 방금 읽었죠. 마커스가 무고한 얼굴로 끄덕였다. 하지 마요. 짐짓 언짢은 투로 말해보지만 곧 마커스의—호프만의—눈앞에 맥락도 의미도 알 수 없는 장면 몇이 스쳤다. 자신도 잘 아는 얼굴들이 속속 떠오른다. 창틀에 기댄 호프만이 미간을 좁히며 마커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읽고 있는 거 압니다.” 

 

그 말에 마커스는 민망히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왜 웃어요?” 

“오늘 정말 이상하세요.”

“알아요.”

 

아. 또 부끄러워 하시네. 

마커스. 자꾸 웃지 마요. 이제는 웃음기가 분명해진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컵을 마커스는 내려놓았다. 

 

 

-

 

 

“잠깐. 한 명 더 있어요.” 

 

제트가 호프만을 불러 세웠다. “히사베스. 타임키퍼랑 같이 일하는 라플라스 소속인데, 나도 잘 알지는—”

“히⋯ 뭐?”

“그냥 적어줄게요.” 재촉하며 손짓하자 의심을 거두지 않은 호프만이 떨떠름히 쪽지를 꺼낸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니까 괜히 마음 졸일 필요 없어요. 보다시피 두 사람도 잘 아는 친구들이고⋯. 내가 이렇게 스파이가 될 줄은 몰랐지만.” 

“돈내기를 해놓고 선심은⋯⋯.” 

“멀쩡히 돌아온 것 보니까 우리도 기쁘다는 뜻이에요.”

“다 맞나 확인해 보기나 해요.” 민망해진 호프만이 투덜댔다. 

 

“내가 알려줬다곤 하지 말아요.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한 명씩 찾아간다거나.”

안 그럴 거죠? 마지막 희생양을 적어 넣고 모두의 이름을 거듭 확인한 제트가 쪽지를 다시 접어 건넸다. 대답 없이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이 없다. “그레타, 약속해요. 나도 애들한테 물어 뜯히긴 싫으니까.”

그런 짓은 안 합니다. 나도 당신도 체면이 있는데.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대꾸하며 호프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커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트는 그새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다들 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 애한테도 이제 좀 당당하게 놀러 오라고 전해줘요. 그동안 지켜보는 것도 재밌긴 했는데,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말은 정말 오랜만이라서!

 

재미⋯⋯. 호프만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정말 묻기 싫은데. “어디 걸었습니까?”

 

 

 

 

호프만과 구조대가 자진해 캔자스의 돌풍에 휩쓸린 직후, 마커스 일행의 전보가 뒤늦게 본부에 닿았다. 그것을 재단 측은 즉시 호프만에게 전했으나 소식은 다시 황무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 순간의 호프만과 마커스는 한창 언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곧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구조대가 단독 복귀를 보고하며 모두가 무사함을 알렸다. 그들의 생환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구조대만 돌아왔다는 말인가요?” 제트가 되물었다.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호프만의 부서에 들른 참이었다. 제트와 안면이 있는 직원 하나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 씨 동료도 같이 데리고 복귀했어요. 그러니까—” 나란히 선 다른 직원에게 옆구리를 찔린 그녀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거기 지금 둘만 남아있다는 거죠?”

“일단은 그, 그런 셈입니다.” 황급히 말을 맺은 직원이 어색히 헛기침을 했다. 

 

가십의 냄새를 맡은 상사가 저마다 모여 떠드는 사무실을 흘긋 둘러보았다.

“⋯⋯호프만도 모르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만 말해봐요.” 여기선 이런 스포츠라도 있어야죠. 안심하라는 듯 덧붙인 제트는 귀를 기울였다.

 

 

-

 

 

쾅!

 

문학의 기사가 집무실 문을 힘차게 박찼다. 

“버틴, 나의 친구! 아주 기쁜 소식이에요!”

“아, 레콜레타. 어서 와요.” 손질하던 필기구를 내려놓은 버틴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모자를 벗어 가슴께에 내려놓은 레콜레타가 엄숙히 선언한다. 놀라지 말아요. 마커스는⋯⋯

 

“마커스는 무사해요⋯⋯.”

 

흥분을 감출 수 없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까지 한다. 허공을 향해 굳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아, 정말 다행이야! 전 그녀의 유작이라면서 미완성 원고가 공개될까 봐 방금까지도 슬퍼서 죽을 뻔했다고요!

앞뒤 자른 그 말에 타임키퍼와 수석 조수는 멀뚱히 마주 보았다. 유작과 미완성 중 어디에 방점을 두어야 할지 버틴은 혼란스러웠다. 소네트, 재단에서 연락 온 게 있었던가? 아뇨, 마커스 씨 관련으로는 아직⋯⋯.

 

“전해 줘서 고마워요, 레콜레타.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도 다시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죠?”

“알레프, 내 펜팔. 그는 소중한 친구의 일이라면 모두 알고 있답니다.” 

그럼, 이만⋯⋯. 기사는 물러난다. 그 절도 있는 걸음걸이가 멀어지기 무섭게 통신기가 울렸고, 확인을 마친 소네트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타임키퍼. 조금 전 재단에서 마커스 씨와 연락이 닿았다고 해요.”

 

버틴이 로비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온갖 종류의 화폐가 쌓인 뒤였다. 그들 연애사의 우여곡절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치껏 물러나 이 논쟁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엿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엄연한 사생활이라느니 하는 시정의 목소리가 몇 차례 오갔고, 동의한 참여자 대부분이 슬그머니 돈을 뺐다. 

 

관심이 사그라들자 테이블 앞에는 재단 소속의 몇몇과 끼어들기 좋아하는 이들만 남았다. 그들은 여전히 호프만의 의중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다들 비약이 너무 심하네요.”

 

“제트 씨? 어떻게⋯⋯”

“버틴, 전개 상 내가 여기 나와줘야 해.” 

눈을 찡긋여 질문에 미리 답한 제트가 다시 테이블로 주의를 돌렸다. 유의미한 의견을 낼 사람이 늘자 누군가 참여를 제안한다. 나도 이미 왕창 걸고 오는 길이에요. 제트가 재단 측 도박판의 존재를 알렸고, 그 자리의 모두는 거대한 연대감에 전율했다.           

 

 

-

 

 

“그냥 솔직히 말씀하셔도 됐어요.”

“부탁했습니다. 당신 동료들한테. 거의 끝난 일이라 문제 없다고는 들었는데,”

 

그래도⋯⋯ 호프만이 말끝을 흐렸다. 캔자스에서의 사건이 꽤 인상 깊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소심하게 굴 일인가? 그런 의문을 떨치지 못하며, 마커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긴 아무래도 두 명이 앉기엔 조금 불편하다. 그것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호프만이 다급히 소매를 붙잡아 당겼다. 영문을 모르고 옷을 붙들린 마커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이 어색히 떨어진다. 그게, 어디 가는 줄 알고⋯⋯ “화난 거 아니죠?”

 

머뭇대는 물음에 마커스가 반문했다. “제가 왜 화를⋯ 오늘 정말 왜 이러세요?” 

“난 원래 이래요.”

불과 며칠 전 매섭게 따져 묻던 마커스를 떠올리자 식은땀이 나왔다. 그리고 당신한테 더 밉보이기 싫습니다. 그렇게 덧붙인 호프만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멘토의 드문 솔직함—무려 솔직하기까지 한 속마음이었다. 이런 것은 읽기로도 겨우 건져내는 월척인데—에 마커스가 멍하니 감탄사를 내었다. 

 

맨날 혼내시던 분은 어디 갔죠? 내가 많이 혼내긴 했죠. 그래도 다 맞는 말이었잖아요. 글쎄, 그건 호프만 씨 생각이에요. 얼토당토않은 트집들도 많았다고요. 얼토당토않은⋯? 지금 다 말해드릴 수도 있어요. 듣기 싫으시면 이 팔 좀⋯⋯. ⋯⋯. 미안하신 만큼 안아주세요. ⋯⋯. 아, 아파요⋯. 방금 그건 취소할게요.

 

온몸에 뿌듯이 기대어 오는 무게에 호프만은 편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주기로 했었죠.”  

마커스는 대답 없이 다시 몸을 뒤척여 자리를 잡았다. 좁은 소파가 먼지 섞인 공기를 뿜는다.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랑 여기 타임키퍼 소대 몇 명이 돈을 걸고 내기를 했습니다.” 

“어떤 걸로요?” 

“우리가 돌아왔을 때 어떤 관계일지.”

“⋯⋯.”

“⋯⋯사귀는지, 안 사귀는지 말이에요.” 

마커스가 급히 고개를 들자 그 움직임에 턱을 가격 당한 호프만이 불만스러운 신음을 냈다. 마커스. 나 말하고 있잖아요⋯⋯. 어떡해. 죄, 죄송해요. 엄청 아프셨을 것 같은데. 손을 내어 턱을 감싸는 것을 내버려 둔 호프만은 말을 맺었다. “그게 다예요.”

 

서른 일곱 명 모두를 하나하나 찾아가 추궁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중 스물 여섯 명이 긍정표를 던졌다는 것도, 그들에게만 판돈을 돌려주었다는 것도, 그랬더니 지출이 상당했다는 것도, 귀환 직후 말도 안 되는 업무가 떠맡겨진 게 사실은 직원들의 돌발 이벤트였다는 것도, 이후 제트를 들볶아 여행가방의 위치를 알아내어 찾아왔다는 것도, 마커스의 업무 일지를 작년 것까지 구경했다는 것도, 널려 있는 속옷을 정리해 주었다는 것도, 방을 여섯 번이나 들락거리는 동안 가습기 물을 한 번 채워 넣었다는 것도, 그 내기에 이니그마도 참여했다는 것도—아들러. 넌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전화 너머 누나의 물음에 동생은 괜한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실장 상담 받으러 왔다가 그냥 재밌어 보이길래. 바, 바쁘니까 끊어. ‘실장’?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네가 바쁠 일이 뭐가 있어? 아, 누나! 권한대행은 원래 바쁘다고! 뚝.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요.”

“히사베스도 그래서 알고 있었던 겁니다.”

 

모른 척하는 호프만을 마커스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여차하면 읽으면 되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뭐⋯. 여태까지 다 그랬어요? 내가 말 안 한 것들?”

“당연하죠.” 제가 바본 줄 아세요? 

 

여전히 턱에 갖다 대고 있는 마커스의 손을 잡아 내려놓을 요량으로 호프만은 손을 겹쳤다. 순간 문제의 왼손이 세차게 떨린다.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손을 떼었다. 육안으로 보일 만큼 떨림이 심했다. 망할. 하필 지금 이럴 게 뭐람. 

 

당장 감출 곳이 없어 호프만은 잠자코 손을 내려놓았다. 그 광경을 눈에 담던 마커스가 여전히 떨고 있는 그것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혈관 모양 그대로 흉터가 남은 손. 호프만은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그런 것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커스.” 호프만이 제지한다.

 

악마의 신발끈, 벨라도나, 나르시스 뿌리, 탕약나무 뿌리와 열매⋯⋯. 익숙한 이름들이 지나자 자신의 것이 아닌 불안이 왈칵 쏟아든다. 반사적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여 그것을 털어냈다. 

 

“읽지 마요.”  

부탁이에요. 호프만이 반대 손으로 마커스의 눈을 가렸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소한 같이 걱정은 하게 해주세요.”

“몇 번을 말합니까. 나는 원래 이렇다고. 알잖아요.”

“늘 걱정이 많으시죠. 그래서 숨기는 것도 많으시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잖아요. 손이 간지러웠다. 마커스는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달라졌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항상 저를, 제 이야기를 기다리신다면서요? 저는 그러면 안 되나요?”

 

“⋯⋯내가 왜 지금 와서 건강을 걱정하겠어요?” 

 

다 당신 때문이지. 난 그 나이 때 마흔 먹으면 죽어야지 하던 사람이에요. 호프만 씨, 지금은 별로 농담하기 좋은 타이밍 같지 않아요. 아뇨, 진심입니다. 호프만이 진지하게 말했고, “여, 염세적이시다고는 생각은 했는데 그 정도이셨을 줄은 몰랐네요.” 마커스도 진심으로 당황했다. 

 

말다툼이 잠시 멎자 마커스는 문득 기억을 더듬었다. 탕약나무 중독의 후유증.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지만, “정서적인 반응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개들도 기분 좋으면 다리를 떨잖아요.” 

이런. 말실수를 깨닫고는 재빨리 입을 가린다. “그건, 허, 아주 정확한 비유네요.” 호프만이 감탄하더니 웃었다. 생각 없이 따라 웃던 마커스가 애써 정색했다. “호프만 씨, 말 돌리지 마세요.”

 

“저희 지금 싸우던 중이라고요!” 

“마커스, 말 돌린 건 당신이에요. 우리가 뭐 때문에 싸우던 중이었는데요?” 

“⋯⋯‘그레타 호프만은 왜 자꾸 겁쟁이처럼 구는가?’ 주제는 이거죠.”

“틀렸어요.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 이겁니다.” 

“현직 작가의 말을 믿으세요.”

“연장자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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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건 직접 말해주세요. 여행가방에 정말로 어떻게 오신 거예요? 여기 위치 그래도 나름 극비인데, 이렇게 막 오시면⋯⋯.”

“내가 이십 년 넘도록 재단에 붙어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

“⋯⋯.”

“연금 때문에⋯⋯?”

 

2.

“이게 뭡니까?”

“제가 간단히 추려봤습니다.”

“그러니까, 뭘요?”

“여행지마다 코스도 여러 개라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서점,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 같은 건 꼭 끼워 넣었고요.”

“리플리, 승진 축하해요.” 

“네? 가, 감사합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3.

“이거 뭐야?”

“당신 선물.”

“고마워. 기쁘다. 그런데 좀 많은 것 같은데?”

“포인터. 실비가 생일파티 못 와서 엄청 미안하대.”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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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원문 Saint John of the Cross, Dark Night of the Soul
‘Oh, night that guided me / Oh, night more lovely than the dawn’

*Scheiße : 독일어. 망할, 젠장

*'휴대용 연락 장치'는 2.7버전 ‘1987 우주의 서곡’에서 공개된 히사베스의 연락 장치 화면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