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s

Work Header

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Relationships:
Characters:
Additional Tags:
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5-06-24
Words:
9,200
Chapters:
1/1
Kudos:
1
Hits:
41

배꼽 없는 자들의 집

Summary:

불멸의 영혼과 소울스트림과의 연결을 대가로 베인을 살려낸 밀레시안은 그를 티르코네일로 데려가 인사시킨다. 그리고 베인은 유년 시절의 꿈을 꾸게 되는데...

Work Text:

배꼽 없는 자들의 집

 

 

 

 

 

피거품이 끓는 목 울림. 비명. 쇠창살을 이빨로 물어뜯는 날카로운 마찰음. 가두어진 짐승들이 신경질적으로 우리를 서성이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 웅크린 발로르에게는 익숙한 생활의 소음이다. 시커먼 구덩이에서 태어난 핏덩이는 요람도 다정한 손길도 몰랐으니, 절망과 비탄의 울부짖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발로르는 뒤척이며 인상을 썼다. 한 번도 그를 괴롭게 하지 않았던 소리가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토리 협곡의 진창에서 태어난 것이 보드라운 깃털 베개와 햇볕에 잘 마른 리넨 이불의 감촉을 알 리가 없는데, 벗은 채로 웅크린 몸이 추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발아래 고인 오물과 몸에 엉겨 붙은 피와 내장이 불쾌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잠든 발로르는 인상을 썼다. 지난밤 그는 이런 곳에서 잠들지 않았다. 분명히 곁에-

품 안으로 따스한 몸이 파고들었다. 햇빛에 마른 풀과 옅은 인동덩굴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어린 발로르는 잠기운이 눌어붙은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다.

토리 협곡의 비명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반투명한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 빛나는 머리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박고 작게 코를 골며 자는 앙하라드의 머리였다.

베인은 누운 채로 눈알을 굴렸다. 그들은 티르 코네일의 작은 여관방에 누워 있었다. 제대로 된 방도 아니고 천장이 낮은 다락방이다. 오래된 침대는 둘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좁아서 몸을 겹친 채로 누워야 했고, 곳곳에는 온갖 잡동사니와 쓰지 않는 물건들이 쌓여 창고처럼 번잡했다. 변변찮은 벽난로도 없어 초가을 아침에도 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그나마 있는 이불도 앙하라드가 밤사이 죄다 가져간 탓에 그는 맨몸이었다.

베인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 잠결에 추위를 느꼈군.

“왜 벌써 일어나…”

애벌레처럼 이불에 말려 있던 앙하라드가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가녀린 팔이 이불에서 구물구물 기어나와 온기를 찾듯 베인의 허리를 감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던 밀색 머리는 귀성길에 짧게 잘라 귀 아래 흐트러져 있다. 동그마한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베인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짧게 입을 맞췄다.

“밭일을 한낮에 할 리는 없으니 지금쯤 일어나야 할 텐데?”
“안 갈래….”
“그렇게는 안 되지. 마을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하지 않았나? 수확도 돕지 않는 약혼자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대의 명성이 어떻게 되겠어.”

베인이 웃음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앙하라드는 숙취에 끙끙 앓으면서도 마지못해 못해 그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사실 소문이 더 퍼질 것도 없었다. 면면이 빤한 작은 시골 동네에 소문이 도는 건 순식간이었으니까. 특히 그 주인공이 소문의 그 밀레시안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약혼자를 데려가겠다는 편지가 한 달 먼저 도착했다면? 그들은 마을 초입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언덕배기 위에 자리한 촌장의 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달라붙는 어린아이들의 극성에 옷매무새며 정돈한 머리까지 엉망이 되었을 정도였다.

베인은 그를 보고 하얗게 질리던 촌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담았다. 그 또한 앙하라드가 한 달이나 끙끙거리며 써 내려간 편지의 내용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두루뭉술하게 약혼자, 라고 소개된 사람을 던컨이 다른 이로 착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또한 앙하라드와 수호의 부적을 나누어 가진 근위대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그녀와 더 오래 알고 지낸 촌장이 그 둘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나이 지긋한 촌장은 아마 앙하라드가 그 은발의 기사를 데리고 올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피를 나눈 가족이 없어 앙하라드를 손녀딸처럼 여긴다는 자였으니 들뜨기도 했겠지.

베인은 문득 앙하라드와 함께 촌장 앞에 선 그 기사를 상상했다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침은 먹을 테지?”

맨살 드러난 팔을 다시 이불 안으로 잘 갈무리해 넣어 준 베인이 속삭이며 물었다. 앙하라드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밤에 아무렇게나 팽개친 셔츠를 꿰어 입은 베인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따스해지고 음식을 준비하는 냄새가 났다. 여관 로비 바로 옆에 딸린 작은 부엌으로 들어가자 여행자로 보이는 이들 몇이 앉아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인을 곁눈으로 흘끔 보더니 저들과 같은 여행자라 생각했는지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인사에 답하는 대신 베인은 그들이 먹는 음식을 살펴보았다. 말린 과일을 올린 귀리죽과 양젖을 탄 홍차 따위였다. 그들과 같은 것을 시켜야 할지 베인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주방에서 나온 여급이 명랑하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주무셨나요?”

이제 갓 소녀 태를 벗은 노라의 해끄무레한 얼굴을 바라보던 베인이 답했다.

“침대가 좁더군.”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노라가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앙하라드 씨도 참, 다른 방도 있는데 굳이 거기서 주무신다고 하실 건 또 뭐람… 약혼자분도 같이 오셨는데 말이에요, 그죠? 예전에 티르 코네일에 계실 때 그 방에서 꽤 오래 묵으셨거든요. 떠나신 이후엔 창고처럼 쓰고 있던 참이라 내어드리기가 좀 그랬는데, 그래도 추억이 많이 남았나봐요.”

베인은 지난밤 브리흐네 위스키를 진탕 마신 앙하라드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여기서 지낼 때는 말이야…

그에게 속삭였던 일들이 비밀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스레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베인은 수다스러운 여급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용건을 꺼냈다.

“아침 식사를 가지러 왔다만.”
“어머나, 앙하라드 씨께서 아침을 드시나요?”

노라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여기서 지낼 적에는 아침을 챙겨 먹지 않던가?”
“뭘 드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밀레시안이라 그런가 보다 했죠. 그래서 오늘 저녁 만찬에 오신다고 하셨을 때 다들 놀랐다니까요? 아유, 뭘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일단 이것저것 준비해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잘거리던 노라가 주방으로 후다닥 사라진 후 베인은 식당 한편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식사하던 이들이 각자의 짐을 챙겨 식당을 나섰다. 노라의 삼촌이라는 여관 주인과 낮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여관을 떠나자 시골 여관은 비로소 완전히 조용해졌다.

주방에서 노라가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며 베인은 다락방 침대에 홀로 웅크려 있을 앙하라드를 떠올렸다. 그러자 웅크린 채 토리 계곡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듣던 간밤 꿈의 단편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릴 적 꿈을 꾼 기억이 아득했다. 수백만 번의 굴레를 되풀이하는 중에도 그 시절의 꿈은 꾼 적이 없었다. 과거를 더듬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굳이 기억할 만큼 가치 있는 시절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앙하라드가 건져내어 피와 시간이 흐르는 몸을 되돌려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그녀의 고향에 와 감상에 젖어서일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끔찍한 곳이라도 고향이라는 장소에는 이상한 힘이 있는 법이었고, 하이미라크와 내기를 하던 시절에도 필요한 것이 있어 몇 번 다녀오기도 했으니.

의자 등받이에 팔 하나를 걸치고 무료하게 사색하던 베인 앞에 쟁반 가득 음식이 담겨 나왔다.

 

“일어났나?”

앙하라드는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에 앉아 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베인이 쟁반에 음식을 산처럼 쌓아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대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앙하라드는 베인이 침대에 내려놓은 쟁반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노릇하게 구운 빵과 삶은 달걀, 따뜻한 귀리죽, 버터와 꿀, 호두, 말린 사과, 진하게 우린 홍차와 양젖. 어떻게 봐도 두 사람분의 양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이?”
“먹어야 힘을 쓰는 법이지.”
“너무 많아.”
“나 혼자 다 먹을 수도 없겠어.”

베인이 빵에 버터와 꿀을 발라 앙하라드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앙하라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하는 수 없이 빵을 받아먹었다.

“예전에 여기서 지냈다지.”

앙하라드의 입가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훔쳐낸 베인은 그녀의 손에 빵을 쥐여주고는 달걀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 소울스트림에서 새 이름을 받고 돌아온 직후에 잠깐.”
“꽤 한동안 머물렀던 모양이야. 여급이 그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더군.”
“아, 노라? 가끔 돌아와서 이야기해주거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더라고.”

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식욕이 생긴 모양인지 앙하라드는 버터와 꿀을 바른 빵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남은 꿀을 귀리죽에 부어 퍼먹기 시작했다. 빵과 달걀을 먹고 호두를 집어먹던 베인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죽을 손가락으로 훔쳐 주었다. 그제야 그릇을 혼자 차지했던 게 머쓱했던지 앙하라드가 한 숟가락을 그에게 내밀었고, 베인은 양순하게 입을 벌려 그녀가 주는 귀리죽을 받아 삼켰다.

"오늘은 추수만 하면 되나?"
"아니. 오전 중에 추수하고, 새참 먹고, 양털 깎으러 가야 해. 마을 사람들이 다 만찬 준비하러 간다고 해서 데이안이 일손이 부족하다네."

"그러고 보니 여급이 그대가 식사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더군."
“엥, 왜지? 나 저녁 만찬에도 꼬박꼬박 갔는데.”

앙하라드의 옛 식사 습관을 떠올린 베인이 피식 웃었다.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고 술만 마셨겠지.”
“그래도 자리에 앉아는 있었단 말이야.”

그래, 그래. 베인은 괜한 입씨름을 피하며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훔쳤다.
“여튼, 올해는 마을 사람들 모두를 먹일 파이를 만들 거라고 꽤 열심히 준비하는 모양이야. 그 거대한 파이를 구울 임시 오븐까지 만들더라니까.”

베인은 열심히 조잘거리는 앙하라드를 응시하며 어린 새처럼 입을 벌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군소리 없이 죽을 받아먹는 베인을 바라보던 앙하라드가 물었다.

“그나저나,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나 봐?”
“그건 왜 묻지?”
“자면서 끙끙거리더라고.”

베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릿한 꿈이다. 어린 시절의 꿈이라는 것 외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 죽 한 숟가락을 삼킨 그는 기억나지 않는 꿈의 윤곽을 더듬다 이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릴 적 꿈을 꿨던 것 같군.”
“흐음.”

앙하라드는 더 깊이 캐묻지 않았다.

음식량에 기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남은 아침 식사를 거의 다 먹어 치웠다. 남은 귀리죽 몇 숟가락을 베인에게 떠먹여 주고 양젖을 탄 홍차를 마신 앙하라드는 조금 남은 호두와 말린 과일을 작은 헝겊에 싸서 오후 간식으로 남겨두었다.

세수와 양치를 마친 앙하라드는 베인이 까치집인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나가려 하자 기겁하며 그를 끌어다 앉혔다. 시골 동네라고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여기 앉아! 앙하라드의 잔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빗는 내내 베인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토리 협곡의 매캐한 공기와 어두운 하늘, 그리고 토르 모르의 불길한 바람 소리 따위를. 하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너무 오래 죽은 채로 살아온 탓일지도 모른다.

앙하라드가 그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묶어 한쪽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뿌듯한 얼굴을 마주한 베인은 안개처럼 흩어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놓으며 빙긋 웃었다. 그렇게 그들이 몸단장을 마치고 여관을 나섰을 때는 새벽의 어둠이 물러가고 박명이 찾아오고 있었다.

 

***

 

맨발의 아낙들이 노래를 부르며 영근 곡식을 거둬들였다. 밀알이 주렁주렁 열린 짚단이 새신부의 부케처럼 한 다발씩 묶여 기름진 땅 위에 세워졌다. 허리를 숙인 사람들이 밀을 베며 천천히 나아갔고 그 뒤에서는 새를 쫓는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나 어젯밤 어느 집으로 찾아가
여주인에게 말했지

오늘 밤 여기 묵겠소
휘영청 뜬 달빛에
내 류트는 노래하고 싶다네

밤이 길다고 말해주오
달빛이 밝다고 말해주오
내 잔을 채워 주면 내 노래하리다
밤새도록 쉼 없이 노래하리다

나무 그늘에 앉아 만들다 만 행운의 토끼발을 만지작거리던 베인은 그 광경을 조금 무료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흙 위를 걸으며 밀을 베고 노래를 부르는 앙하라드는 얼핏 이곳에서 나고 자란 시골 처녀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그녀는 주변에 늘어선 다른 여자들, 혹은 그 누구와도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드러난 힘찬 팔뚝과 곧게 뻗은 목, 그 위에 조금씩 배어 나오는 땀방울. 베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노래를 부르며 움직이는 입술과 비옥한 땅으로 향한 시선도.

눈이 부셨다. 베인은 시큰거리기 시작하는 눈을 찡그리며 다시 만지작거리던 행운의 토끼 발로 시선을 돌렸다. 정오를 향하는 한낮의 햇살이 그의 눈을 무자비하게 쏘아댄 탓이었다.

너무도 오래 산송장으로 살아온 터라 그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식욕이나 피로감, 심지어는 통각까지도. 앙하라드가 외출한 사이 며칠 끼니를 거르다가 졸도한 적도 있었고 가죽을 무두질하다가 네 손가락을 잘라내기 직전까지 썰어버린 적도 있었다. 파괴자의 권능을 잃어버린 몸뚱어리는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 놀라울 만큼 연약했다. 굴레에 갇히기 전에도 겪어본 적 없는 신체적인 제약에 그는 마치 첫걸음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에 어설프기만 했다.

그렇게 도무지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이었으나 베인은 앙하라드가 보는 앞에서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가 고결한 죽음을 위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대가로 내놓았듯이, 앙하라드 또한 그를 굴레에서 건져내어 죽음이 깃든 몸을 입혀 주는 대가를 치렀으므로.

하지만 새 삶을 감사히 여김으로써 떠도는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있었느냐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일생토록 그를 좀먹던 파괴의 충동이 사라지자 그는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버려진 부표가 되었다. 파괴자의 권능과 함께 발로르, 또는 베임네크라는 존재를 이루던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셈이었다. 이후로 그는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져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첫 숨을 들이마실 때부터 파괴 이외에는 알지 못했던지라 그는 새로이 주어진 삶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해 방황했다. 자기파괴를 종용하던 지독한 권태감이 더 이상 치밀지 않는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낯선 이가 된 자신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일이다.

“그게 뭐예요?”

앳된 목소리에 베인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겨울을 열 번이나 보았을까 싶은 소년이 쭈뼛거리며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낱알을 노리는 참새를 쫓으며 뛰어다니던 아이들 무리 중 하나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얼굴이 발갛게 익은 아이들이 나무 그늘에 모여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소년은 또래보다 체구가 왜소하고 낯빛이 창백했다. 얼마 뛰지도 못하고 혼자 쉬다가 아이들이 몰려오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제일 약하고 도태되기 쉬운 녀석이로군. 베인은 소년의 깡마른 팔다리를 무심히 훑었다. 어릴 적 그가 살던 우리에도 저런 녀석이 있었다. 오래 본 기억은 없으니 아마 일찍 죽었을 것이다. 그가 죽였을 수도 있고.

손에 들린 토끼 발로 향한 소년의 시선에 베인은 미완성의 부적을 한 손으로 천천히 흔들어 보였다.

“토끼의 발로 만든 행운의 부적.”
“...이상하게 생겼어.”
“가지고 있으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물건이지.”

소년은 대꾸 없이 토끼의 발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지고 싶나?”
“네.”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지고 싶다면 넙죽 주리라 생각했는가 보지? 베인은 그가 토끼 발을 너무도 당연히 넘겨줄 것으로 생각한 소년의 태도에 조금 의아해졌다가 앙하라드의 평소 행동을 떠올리고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갈무리했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으면 응당 알맞은 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지.”

소년의 얼굴이 실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어린 것이 영 뱃심도 없고 발전 가능성도 없군. 베인은 소년의 한심스러운 태도에 그를 그만 쫓아버릴까 하다가 교단에서 어린 부관을 키우던 기억이 나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그는 양육을 받아본 적 없어 누군가를 양육하는 법은 몰랐지만 무른 것을 단단하게 벼려내는 법은 알았다.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있으면 네 것이다.”

베인이 엄지와 검지로 토끼 발을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자 소년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덫은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 녀석도 어릴 적엔 곧잘 저런 얼굴을 하곤 했지. 베인이 큭큭 웃으면서 소년의 눈앞으로 토끼 발을 들이밀자, 소년이 잽싸게 손을 휘둘러 그것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한물간 뒷방 늙은이 같은 마왕이라도 어린아이의 뻔한 움직임은 간파할 수 있는 법이었다. 손이 토끼 발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길 몇 번 반복하자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발을 굴렀다.

“이익-!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못 하겠나?”
“치,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어차피 마녀의 물건인걸, 행운은커녕 저주만 잔뜩 걸려 있겠지!”

빽 소리를 지른 소년이 마을 위쪽 언덕으로 달음박질쳐 올라갔다. 그를 지켜보던 동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못 쓰겠군.

베인은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와 허공에서 흔들던 토끼 발을 허리춤의 주머니에 갈무리해 넣었다. 그리고 주머니의 끈을 동여매는 순간 그의 머리에 가벼운 딱밤이 내려앉았다.

“애 괴롭히지 마.”

낫을 허리춤에 맨 앙하라드가 그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베인은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괴롭히다니.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있었다만.”
“세상의 이치는 개뿔. 고르도슈는 애를 약 올리는 걸 보고 세상 이치를 가르친다고 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지.”
“아, 그래? 그 최선은 힘으로 탈취하는 법도 포함되는 거겠지? 차암 좋은 거 가르친다.”

앙하라드가 심드렁한 얼굴로 그의 옆에 풀썩 앉아서 어깨를 기댔다.

“케흘렌 성격이 그 모양 그 꼴이 된 이유가 여기 있었네.”
“섭섭하군.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 몫을 하도록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고르도슈 방식으로?”

베인은 대꾸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수확을 마친 마을 사람들이 그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남자들은 이미 짚단을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낱알을 털어내고 저녁 만찬에 사용할 짚단 인형을 만들겠지. 그 틈에 끼어서 아침나절 내내 영근 곡식을 베어내고 짚단을 옮긴 베인의 손과 허리도 욱신거렸다.

“일은 다 끝난 건가?”

흙 묻은 손을 앞치마에 슥 문질러 닦은 앙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아침으로 먹고 남은 호두와 말린 사과를 꺼내 베인에게 몇 알 물려 주었다.

“수확은 이걸로 끝. 사실 어제 거의 다 끝냈대. 우리가 한 게 마지막이고.”

남은 사과를 모조리 털어먹은 앙하라드가 하품하며 말했다.

“새참 먹고 낮잠 한숨 자고 양털 깎으러 가면 돼.”

베인은 앙하라드가 손을 흔드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 위쪽에서 새참 바구니를 든 케이틴이 늦은 오전의 뙤약볕을 머리 위에 이고 내려오고 있었다.

 

***

 

“내놔!”

크고 거친 손이 발로르의 작은 손에 들린 고깃덩이를 낚아챘다.

반쯤 썩은 고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발로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 선 잿빛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 막 우리로 돌아와 고기 한 덩이를 움켜쥔 참이었다. 산성 독이 부글거리는 늪지대를 온종일 헤매며 움직이는 것들을 도륙 내고 온 뒤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기가 졌다. 그런데 같은 우리를 쓰는 것이 제 몫의 식사가 부족했는지 발로르의 것을 낚아챈 것이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발로르는 얼굴 위로 흐트러진 더러운 머리칼 사이로 형제를 노려보았다.

한 우리를 쓰는 것들은 경쟁자다. 자리와 음식과 물을 두고 싸우는 상대다. 죽이는 편이 그의 생존에 유리했다. 다만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던 것은 우리 밖에서 그들을 관리하는 자들이 우리 안에서 싸움이 나면 곧바로 응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었다. 발로르는 제게서 빼앗아 간 고깃덩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그보다 몸집이 큰 동배 형제를 노려보았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발로르는 이곳에서 죽을 생각이 없었다.

우선 그는 형제의 힘을 가늠했다. 어디를 어떻게 물어뜯고 쑤셔야 가장 빨리 죽일 수 있을지 셈해 보았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걸 보니 지난번에 끌려 나갔을 때 다친 모양이지. 그렇다면 다친 다리부터 부러뜨리자. 일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올라타 팔을 꺾으면 그 뒤는 식은 죽 먹기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발로르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그 뒤는 섬광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살과 뼈가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가는 소리, 피 끓는 비명과 죽어가는 신음, 뜨끈한 피와 오물이 몸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감각. 그 모든 것이 사그라졌을 때, 발로르는 시체의 손에서 고깃덩이를 우악스럽게 뜯어내 우리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식사를 계속했다.

크고 작은 형제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우리 가장자리로 슬금슬금 비켜났다. 그리고 우리 밖에 선 자들도 그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날부터 발로르는 식사를 방해하는 형제를 서슴없이 살해했다. 그럴수록 비좁았던 우리는 더 넓고 쾌적해졌고, 이윽고 모두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게 되었다.

 

***

베인은 뺨을 간질이는 풀잎 사이에서 뒤척이다 깨어났다. 땅을 달구던 정오의 열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온화한 빛깔로 무르익는 하늘과 그 광막한 공간을 유영하는 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는 문득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을 깨달았다.

“언제까지 잘 생각이세요, 아저씨?”

몸이 노곤했다. 아침 식사에 이어 점심도 너무 많이 먹은 탓이리라. 앙하라드가 농장에서 한가득 가져온 방울토마토와 차게 식힌 햄과 치즈를 가득 채운 샌드위치와 물에 희석한 포도주를 마신 후 기절하듯 잠든 기억이 났다. 베인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피곤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턴 앙하라드가 물었다. 베인은 졸음을 쫓아내려 마른세수를 했다.

“식사를 좀 과하게 한 모양이야.”
“어제 도착하자마자 촌장님 댁 장작을 패서 그런가 보다.”
“아쉽게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
“엄살은.”

핀잔을 준 앙하라드가 짧게 웃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그는 여전히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히 강했다. 완력도 검술 실력도 거의 그대로였고, 마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알려진다면 앙하라드의 농장은 그에게서 마법을 배우려는 마법사와 드루이드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었다.

“자, 일어나. 양털 깎으러 가자.”

앙하라드가 손을 내밀었다. 베인은 흙이 조금 묻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손을 맞잡고 햇볕 따스한 마을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이제 막 추수를 마친 기름진 땅을 지나, 일과를 마치고 잠든 풍차를 뒤로 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아델리아 천 위로 놓인 판자 다리를 건너는 내내 앙하라드는 그가 알지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오를 지난 팔라라가 깎아지른 북녘 설산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양들의 울음소리가 노래처럼 아스라이 들려오는 시간. 지독한 평화였다. 안락한 평화. 죽음처럼 그를 괴롭히던, 단조롭고 따분한 것들.

문득 기이한 불안감이 베인을 엄습했다. 그 또한 앙하라드의 눈에서 불안을 읽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어둠이 쉬이 물러가지 않는 새벽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질 환영일까 두려워하는 눈빛을 안다. 불멸의 영혼을 포기하고 그 수호자와 관계가 틀어지는 일까지 기꺼이 감내한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불안에 젖은 눈도.

‘그대는 참 미련한 구석이 있어.’

맞잡은 손을 고쳐 잡은 베인이 깊은 애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감상에 젖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망자의 회한에 발목이 잡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니. 영웅답지 않게. 새벽은 밤을 밀어내야만 하는 법이야, 그대. 애정을 돌려주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

적막을 메우기 위해 할 말을 찾던 베인이 불쑥 말했다.

“이곳에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 봐.”

반걸음 앞서서 걷던 앙하라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그를 보다가 슬쩍 웃었다.

“뭐야,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그대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인들 흥미롭지 않을까.”
“아, 그으러셔? 양털 깎는 법이나 감자 캐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는 영 시큰둥한 얼굴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런 것들은 그대에 관한 일이 아니지 않나.”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이곳에 살던 시절에는 달걀 모으다가 수탉한테 정수리를 쪼인 일이나 여우한테 발뒤꿈치를 물려서 기껏 모은 달걀을 죄다 깨 먹은 일처럼 시시한 이야기밖에 없는걸. 아, 낚시하다가 저수지에 빠져서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고.”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가던 앙하라드가 다시 곁눈질로 베인을 보았다. 그는 드물게도 초조해 보였다.

앙하라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투의 광기에 휩싸여 눈을 번뜩이거나 타다 남은 재처럼 푸석한 표정뿐이던 사람이었다고는 믿기 힘든 얼굴이 아닌가.

“뭐, 좋아. 언제적 이야기를 해 줄까? 내가 에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아니면 지금의 나로 다시 돌아왔을 때?”
“처음부터.”

앙하라드가 작게 목을 울리며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손을 놓고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좋아. 근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무슨 의미지?”
“나만 줄줄 말하는 것도 웃기잖아. 난 사실 너에 관한 걸 잘 모르는걸.”
“무엇을 더 알려 주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 뿔을 남기지 않았나?”

앙하라드는 콧등을 찡그렸다.

“이보세요, 마왕님. 그런 식으로 뺀질거리면서 빠져나갈 궁리 하지 마세요.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네 입으로 직접 말해준 것도 아니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메모리얼 아이템을 덜렁 던져줬던 거잖아. 그것도 두 번씩이나. 세상천지 어떤 사람이….”

거기까지 말한 앙하라드는 문득 눈이 시큰해져서 급히 숨을 삼키고 말았다.

세상천지 어떤 사람이 고백을 유언으로 남기느냔 말이야.

이 개자식.

그때는 센마이 평원의 매캐한 연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던 것이라 변명했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한다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앙하라드는 이제 울 필요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한 앙하라드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퉁 치려고 하면 곤란해. 그럼 나도 대충 내 물건으로 메모리얼 아이템 만들어서 쥐여줄 테니까.”

베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진심이야. 그분과 기아스를 맺기 전의 일들은 기억이 흐릿해서.”
“자기, 진짜 너무한다.”
“그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데.”

언제 초조했냐는 듯, 베인의 낯에 능구렁이 같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짜증이 치민 앙하라드가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팩 밀었다. 베인의 낮은 웃음이 오후의 햇빛 속으로 푸스스 흩어졌다.

토라져 뒤돌아선 앙하라드가 목축지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 뒤를 베인이 쫓았다.

“그대, 화 풀게. 맹세컨대 그대를 놀리려던 게 아니야. 듣다 보면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은데….”
“됐네요!”

앞서가던 앙하라드가 꽥 소리 질렀다. 베인은 드물게도 소리높여 웃었다.

 

***

 

외양간에 나타난 앙하라드와 베인을 마주한 데이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일터에 쳐들어온 손위 누이를 마주한 양 영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앙하라드가 환하게 웃으며 채집용 단검을 허공에 휘적거리자 그는 일감이 없다고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우기다가, 먼저 도착해 양털을 벗기던 또래 청년의 아우성을 듣고서야 하는 수 없이 앙하라드에게 양 몇 마리를 배정해 주었다.

“상처 하나 내 봐, 일당에서 깎고 손해배상도 청구할 거니까!”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데이안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버렸다.

“양치기와 사이가 안 좋은 편인가?”

양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든 베인이 물었다. 몇 번 몸부림치던 양은 베인이 눈을 한 번 들여다보자 기가 죽은 듯이 얌전해졌다.

앙하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동생이었다가 누나가 된 경우라 그렇지.”
“그게 무슨 말이지?”
“어릴 땐 데이안이 나보다 컸거든. 사실 나이도 나보다 많았고. 그런데, 뭐, 이젠 나보다 한참 아기니까.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데이안이 느끼기에야 하직 겨울도 여름도 몇 번 지나지 않았는데 일손 도와주던 꼬맹이가 정신 차려보니 갑자기 쑥 커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니, 배가 아프지 않겠어? 나한테 맨날 자기는 커서 모험가가 되겠다고 했거든. 뭐, 그래도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베인은 얌전하게 몸을 맡긴 양을 내려다보았다. 털을 잘라내는 손길이 익숙했다. 칼날이 털 위를 몇 번 지나지 않았는데 몸통의 털이 슥슥 깎여 나가더니, 이윽고 복슬복슬하던 양이 반들반들해졌다. 앙하라드가 장난스럽게 양의 엉덩이를 탁 치자 양이 펄쩍 뛰어올랐다. 동시에 양의 뿔을 잡고 있던 베인이 손을 놓았다. 시원하게 털을 민 양이 목초지로 뛰어나가 무리에 합류했다.

앙하라드가 다음 양을 데리고 나왔다. 조금 전처럼 양의 뿔을 잡고 자세를 잡은 베인이 물었다.

“그게 그대를 슬프게 했나?”
“뭐가 슬퍼?”

양털을 움켜쥔 앙하라드가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베인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달리 흐르는 시간이.”

앙하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슬픈 일일 것까지 있나? 원래 그런걸. 그리고 이젠 그럴 일 없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앙하라드가 다시 양털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째서 나는 놓지 않았지?

베인은 목 끝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되삼켰다. 마지막 염치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말은 뜨거운 독처럼 그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가슴께에 가라앉았다.

삶과 죽음이, 이 뒤틀린 낙원의 모든 것들이 원래 그런 법인데, 왜 나를 놓지 못했지?

“한번 해 볼래?”

두 번째 양을 끝낸 앙하라드가 베인을 향해 단검을 내밀었다. 베인은 칼날을 잡고 손잡이를 제게 내민 앙하라드의 작은 손을 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냐는 듯이 눈짓하며 칼을 쥔 손을 작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베인은 조금 망설이다가 단검을 받아들었다.

“그대만큼 능숙하지 못할 거야.”

“당연하지. 난 어릴 때부터 했고 자기는 사람 배때기밖에 쑤실 줄 모르는걸. 내가 가르쳐 줄게. 자, 일단 양을 이렇게 다리 사이에 끼워 두고….”

“잘못하면 살을 찌를 거 같은데.”
“걱정 마, 걱정 마. 좀 찔러도 데이안이 보기 전에 내가 말끔하게 고쳐놓으면 돼.”

베인이 어설프게 양을 다리 사이에 끼운 사이 앙하라드가 양의 머리를 잡아 주었다. 털을 잡고 살갗 가까이 밀듯이 잘라내야 한다는 앙하라드의 말대로 따라 해보려 했으나, 양은 생각보다 예민한 동물이었다.

어설픈 초보자의 머뭇거림을 감지한 양이 별안간 펄쩍 뛰어오르며 죽겠다고 소리를 꽥 질렀다.

“으악!”

양을 먼저 놓친 건 앙하라드이었다. 양의 박치기를 얻어맞은 그녀가 뒤로 나자빠지자 베인은 멍청하니 들고 있던 채집용 단검을 순식간에 역수로 고쳐 들었다. 짧고 날이 덜 갈린 칼이라도 살만 피둥피둥 찐 가축의 멱을 따지 못할 이유가 없지. 목을 그으면 곧바로 조용해질 테다. 베인이 몸부림치는 짐승의 뒷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 올리려던 찰나,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던 앙하라드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만둬!”

날붙이를 쥔 베인의 손이 허공에서 덜컥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지면을 디딘 양의 뒷발이 그의 허벅다리로 날아들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얼한 통증이 베인을 엄습했다. 다음 순간 그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두 무릎이 땅을 퍽 치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이미 양은 헛간 울타리를 넘어 저 멀리 도망간 뒤였고, 그는 네발짐승처럼 땅에 두 손을 짚고 엎어져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짚단을 나르던 데이안이 헛간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미안, 미안. 양이 도망갔어.”

앙하라드가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안은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와 베인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네 기둥서방한테 시켰냐?”

입을 비죽거리던 앙하라드는 부러 뻔뻔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기둥서방- 뭐, 그래. 하는 김에 좀 가르쳐보려고 했다, 왜?”
“너어는 진짜-!”
“아, 왜? 양털 깎아본 적 없다니 이참에 가르쳐야지! 매년 올 때마다 나만 일하라고?”
“매년 온다고? 매년? 왜, 그냥 촌장님 초상을 치르고 싶다고 하지?”
“이 쪼끄만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앙하라드가 소년과 툭탁거리는 사이 베인은 땅에 떨어진 채집용 단검을 주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에게 얻어맞은 곳이 꽤 얼얼했다. 그 사실이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양의 뒷발차기를 맞고서는 아프다니.

“양치기 말대로 아무래도 좀 더 보고 배우는 편이 좋겠어.”

앙하라드의 손에 단검을 부드러이 쥐여준 베인이 말했다.

“어딜 잡아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

데이안의 머리채를 잡기 직전이던 앙하라드가 흥 하고 콧김을 뿜으며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야, 내가 기가 막히게 벗겨 줄 테니까 넌 가서 일당이나 준비해놓고 있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데이안은 뭐라고 더 말하려 입을 뻐끔거리다가, 허공에 두 팔을 휘젓고는 몸을 홱 돌렸다. 티르 코네일 방언으로 무어라 욕을 퍼붓던 양치기가 다시 헛간 뒤편으로 사라지자 어깨를 늘어뜨린 앙하라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큰일 날 뻔했네. 그냥 다음에 농장에 있는 양으로 연습해보자.”

결국 베인은 이번에도 가만히 앉아만 있게 되었다. 앙하라드를 도와 양을 붙잡으려니 데이안이 또 부리나케 쫓아와 양을 도륙 낼 생각이냐고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앙하라드는 베인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양을 두 다리 사이에 끼워 털을 밀어냈다. 양은 이리저리 몸이 뒤집히면서도 양순하게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헛간 한구석에 엎어놓은 양동이에 앉은 베인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양털을 깎는 앙하라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그를 좀먹는 것은 권태감이 아니라 초조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백 수천 배는 더 끔찍한 괴물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한데, 그는 앙하라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디의 급소를 어떻게 찔러 비틀면 어떤 소리를 내며 죽는지 알았지만, 그 외의 것은 모른다. 파괴자 베임네크, 죽은 발로르는 그녀의 죽음과 외마디 비명에 만족했을지 몰랐으나 살아 있는 보통의 남자 베인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녀의 죽음이 아닌 삶을 알고 싶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한 욕망이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싸움의 희열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런 것들로만 가득했던 지난 삶이 외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싸움을 위한 싸움, 살육을 위한 살육, 진절머리 나는 비명과 생존. 그것이 발로르로 ‘살아가던’ 시절 그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산송장 베임네크에게는 억겁처럼 반복되는 하루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를 살고 그다음의 하루를 살아낸다 한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화하는 피와 순식간에 휘발되는 흥분이 지나간 뒤에는? 끝없는 파괴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것이 파괴자로 빚어진 자의 운명이었다. 발로르는 파괴를 갈구했고, 그 안에는 자기파괴의 충동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누군가 자신을 산산이 부수어주기만을 기다렸다. 마지막 순간을, 시선 끝에 있을 눈부신 자를 상상했다. 눅눅한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니 끝은 응당 빛의 한가운데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발로르의 유일한 욕망이었다.

그러므로 죽은 발로르의 그림자인 베임네크에게 사랑이란 죽기 직전 번쩍이는 단 한 번의 섬광 같은 것이었다. 찰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강렬하게 몸을 꿰뚫는 무언가. 곁에 머물지 않고 저 멀리 달려가는 빛. 그의 바람은 눈을 감기 직전 그 황홀한 뒷모습을 눈에 담는 것뿐이었다. 따스한 빛을 쬐며 살 수 있는 꿈결 같은 삶은 감히 바라지도….

“데이안, 다 끝났어!”

베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헛간을 밝힌 등불에 앙하라드의 그림자가 건초더미 위로 어룽거렸고, 그녀의 얼굴 윤곽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참 그 모습을 눈에 담던 그는 앙하라드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녀석은 없지?”
“일 한두 번 맡긴 것도 아니고 왜 그래.”

데이안은 앙하라드의 뒤에 선 베인을 영 미덥지 못하다는 눈으로 흘겨보다가 팔짱을 풀고 두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뭐, 좋아. 얼마나 했는지 보자.”

한 뭉치, 두 뭉치, 세 뭉치…. 포대자루에 담긴 양털을 한참이나 뒤적이던 양치기 소년은 입을 비죽거리며 허리를 폈다. 그 사이에 앙하라드는 양털 가위를 정리하고 걸어 두었던 겉옷을 입었다.

“이만하면 됐네. 늘 하던 대로 돈으로 주면 되지?”

건초가 묻은 치맛단을 탁탁 털던 앙하라드가 고개를 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돈? 아이, 참.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돈은 무슨 돈이야? 그런 거 말고, 좋은 거 좀 줘 봐.”
“…좋은 거 뭐?”

팔짱을 낀 데이안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시선을 피해 외양간 뒤의 작은 오두막을 흘긋거리는 모양새가 꼭 뭔가를 들킨 사람 같았다.

씩 웃은 앙하라드가 데이안의 어깨를 툭 쳤다.

“넌 꼭 너 불리할 때만 아직 애라고 하더라? 내일모레가 성년인 양치기 소년 씨, 집에서 몰래 술 담그는 거 다 알고 있네요.”
“뭐-뭐?”

지나칠 정도로 당황한 양치기 소년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렸다. 기회를 포착한 앙하라드가 깔깔 웃으며 데이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를 오두막 쪽으로 슬금슬금 몰아가기 시작했다.

“트레보가 다 불었지롱. 자, 한 병 내놔 봐. 일당도 같이 주면 더 좋고.”
“이-이익! 이젠 하다 하다 어린애 용돈벌이 수단까지 뜯어가려고?”

앙하라드의 어깨동무를 뿌리친 데이안이 그녀를 향해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그러니까 왕도에서 여왕의 마녀라느니 모리안 여신의 까마귀라느니 하는 불길한 이름으로 불리는 거야! 처신 좀 잘해!”
“아, 그래? 그럼 내 명성에 걸맞게 네 궁둥짝에 번개나 한번 지져주면 그 대단한 술맛 좀 볼 수 있으려나?”

입꼬리를 이죽거린 앙하라드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새파란 번개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손가락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넘었다. 양치기 소년은 조금 겁에 질린 듯하더니, 킥킥대는 앙하라드의 얼굴을 보고는 그녀가 진심은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소년은 입을 뻐끔거리며 허공에 손을 휘젓다가 공격 대상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알았어, 알았다구! 으이구, 안 봐도 뻔하다! 너 그 근위대장님한테 차여서 저런 수상한 놈팽이 데리고 온 거지? 저렇게 허우대만 멀끔하고 할 줄 아는 거 없는 기둥서방 데려왔을 때부터 알아봤어!”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소리를 꽥 지른 앙하라드가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을 잽싸게 피한 데이안이 오두막으로 쑥 들어갔다. 앙하라드가 그를 따라 들어가려던 찰나, 작은 덧창이 벌컥 열리더니 그 사이로 술병 하나가 휙 날아 나왔다.

“먹고 떨어져라, 이 마녀야!”

반만 열린 덧창 뒤에 숨은 데이안이 소리쳤고, 술병을 가볍게 낚아챈 앙하라드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말 곱게 해, 너!”
“남이사!”
“이게 진짜-!”
“그대, 시간이 늦었어.”

베인이 술병을 허공에 휘적휘적 흔들던 앙하라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입술을 비죽거리던 앙하라드는 짧게 콧방귀를 뀌고는 마을을 향해 홱 돌아섰다.

“이따 만찬에 늦기만 해 봐! 밀주 빚는 거 다 까발릴 테다!”
“가라, 가!”

오두막의 덧창이 쾅 닫히고 그 너머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앙하라드는 콧방귀를 흥 내뿜고는 데이안에게서 뜯어낸 술병을 품에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돌아서서 마을을 향해 걷는 그녀의 얼굴은 희미한 만족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전하네.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즐거운 듯 노래를 흥얼거리는 앙하라드의 동그마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베인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직접 볼 수 없어 문득 아쉬워졌다.

***

팔라라가 지고 검은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자, 작은 마을에도 별이 피어났다.

추수를 마무리한 사람들은 마을 창고에 애지중지 모셔 두었던 램프를 꺼내 일 년 내 준비한 양초로 불을 밝혔다. 동물 기름으로 만든 초는 타라의 귀족들이 쓰는 밀랍 양초처럼 말끔히 타오르지 않고 특유의 냄새가 밴 거무스름한 연기를 남겼지만, 그 정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변방의 시골 동네에서는 밤에 양초를 켜는 것마저 사치였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다음은 식탁이었다. 활짝 열어젖혀진 문으로 저마다의 식탁이 들려 나왔다. 모양도 재질도 높이도 제각각인 식탁이 광장에 들쭉날쭉 줄지어 섰다. 그 위에 덮은 광목천도 흰색, 옅은 노란색, 풀색으로 가지각색이라 마치 꽃이 피어난 듯했다. 어른들이 식탁을 붙이고 집에서 식기를 들고나와 상차림을 준비하는 사이에 사탕과자를 온종일 집어먹고 잠이 달아난 아이들은 그사이를 뛰어다니며 장난치기 바빴다.

그 시각, 여관에서는 베인을 뒤에 거느린 앙하라드가 키들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피곤하면 그냥 쉬어도 된다니까.”
“그대가 나를 귀애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다만, 집에 들여앉힌 사내를 그렇게 싸고돌면 좋은 말 못 들을 텐데.”
“아, 기둥서방이란 말 듣기 싫다 이거구나?”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앙하라드가 로비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노라가 여관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앙하라드는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포도주가 한가득 든 궤짝을 안아 들었다.

“앙하라드 님, 올라가시는 길에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대꾸할 새도 없이 궤짝을 받아 든 앙하라드는 뒤에서 따라 나오던 베인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번 돌아보았다. 그 사이 노라는 다시 주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멀뚱하게 서 있던 앙하라드가 노라를 향해 외쳤다.

“도와줘?”
“괜찮아요! 앗, 약혼자분도 손 남으시면 입구 옆에 상자 좀 옮겨주세요! 그것만 들고 가면 돼요! 저도 이제 옷 갈아입고 가려고요!”
“진짜 안 도와줘도 돼?”
“괜찮아요, 괜찮-! 꺄악!”

안쪽에서 집기가 우당탕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앙하라드는 궤짝을 베인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가지고 먼저 올라가 있을래? 아무래도 노라를 좀 도와줘야겠어.”
“그러지.”

앙하라드는 베인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휴, 얘 좀 봐! 이걸 어떻게 혼자 입겠다는 거야? 앞으로 돌려서 묶고 다시 원래대로 하면 돼요…. 그럼 옷매무새가 안 살잖아, 이리 내! 일단 이거부터 닦고-

안쪽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났다. 베인은 주방 문 옆에 놓인 맥주 궤짝을 반대쪽 옆구리에 끼고 여관을 나섰다. 예전 같으면 오지랖이 넓다는 둥, 좋은 소리도 못 들으면서 남들 돕지 말고 나랑 놀자는 둥 투정하기 바빴겠지만 이젠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안사람의 유흥거리에 질투하는 사내는 사랑받지 못하는 법이다.

술병이 가득 담긴 상자 두 짝을 옆구리에 낀 베인이 언덕길을 올라왔을 때는 이미 만찬 준비가 거의 다 끝난 뒤였다. 테이블과 의자가 광장을 빙 둘러 들쭉날쭉 세워져 있었고, 그 위로 식기와 음식들이 날라지고 있었다.

“파이가 다 됐어요!”

케이틴이 외치자 식료품점 뒤에 세워진 임시 오븐이 열렸다. 그러자 식탁을 세팅하던 사람들이 와아 소리를 내며 베인을 지나쳐 오븐으로 달려갔다.

“앙게 약혼자 분 아니에요? 거기서 뭐 하세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서는?”

여자 목소리에 베인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의 작은 여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의 마법 선생이라고 했던가. 베인은 어제 소개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터라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베인은 옆구리에 낀 궤짝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관에서 이걸 옮겨 달라고 해서 들고 왔다만.”
“아, 포도주랑 맥주! 그건 이쪽이지, 이쪽.”

마법 선생 뒤에서 나타난 검술 선생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에게서 궤짝 하나를 받아서 들었다.

“이게 포도주인가?”
“맥주라고 했던 것 같군.”
“그럼 그게 포도주겠구만. 테이블마다 한 병씩만 놔 주겠나? 그나저나 앙게 이 녀석은 약혼자만 혼자 덜렁 보내놓고 뭘 하는 거야?”

꽁지머리를 한 검술 선생이 궤짝을 들고 휑하니 사라졌다. 베인은 품에 남은 포도주 궤짝을 멀뚱히 보다가 그가 말한 대로 테이블마다 한 병씩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샌가 그를 먼저 보고 인사했던 붉은 머리의 마법 선생이 그를 도와 포도주병을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죠? 여기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수확제만 기다리거든요. 그다지 할 게 없는 시골 마을이라.”

포도주를 꺼내서 건네주는 여자를 흘끔 본 베인이 말했다.

“나의 그대는 만찬이라고 하던데.”

그녀는 베인이 앙하라드를 부르는 이름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수확제, 만찬, 뭐 그렇게 불러요. 사실 딱히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마지막 수확을 하는 날에 다 같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거죠. 앙하라드가 설명 안 해주던가요?”

“그저 저녁 만찬이라고만 하더군.”

“하긴, 보통 참석해도 식사는 안 하고 술만 마시다가 돌아가니까 그렇게 기억에 안 남았나 보네요. 아 참, 노라가 그러던데 오늘은 아침 식사를 했다면서요? 앙게도 먹었어요?”

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사는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사실이로군요! 밀레시안이라 식사를 아예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아침에 뭘-”
“뭐야, 뭐야.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약혼자 질투나게!”

그때 앙하라드가 베인의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녀가 냉큼 베인과 팔짱을 끼자 라사는 테이블에 포도주병을 올리다 말고 까르르 웃었다.

“어머, 앙게. 벌써 질투해? 신혼이네.”
“그대가 아침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그게 뭐? 나도 먹고 살아야지.”
“그치만 예전엔 와도 음식에는 거의 입도 안 댔잖아?”
“그거야...”
“거기 잠깐 비켜요! 파이 지나갑니다!”

깜짝 놀란 앙하라드가 베인의 팔을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 장정 몇이 거대한 파이를 올린 나무 널빤지를 조심스럽게 광장 가운데 놓인 식탁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이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앙하라드! 거기 있었군.”

파이가 자리잡는 것을 지켜보던 던컨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자네도 잘 왔네. 시골 동네 축제라 별건 없지만.”
“없긴 뭐가 없어요! 케이틴이 파이도 구워냈는데!”

앙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던컨도 따라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약혼자도 데려왔으니 이번 만찬의 주인공은 자네들로 정해야겠군. 자, 와서 파이를 자르게.”

퍼거스가 이 날을 위해 만들었다며 어딘가에서 커다란 빵칼을 들고 나타났다. 앙하라드나 베인이 거절할 새도 없이 그들은 순식간에 파이 앞으로 떠밀려갔다. 손에 퍼거스의 빵칼이 엄숙하게 쥐어졌고, 어느샌가 포도주를 잔에 따른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일어서 있었다.

던컨이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앞에 놓인 길이 일어나 그대들을 맞이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항상 그대들의 등 뒤에 있기를.
따스하게 내리쬐는 팔라라의 온기와
부드러이 땅을 적시는 빗방울이 그대들을 축복하니
그대들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앙하라드가 칼로 파이를 잘랐다. 사람들이 잔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축제의 시작이었다.

***

“그래서, 성기사단에 있다가 환속했다며? 형씨는 우리 앙하라드를 어떻게 만났나?”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퍼거스가 베인의 술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물었다.

베인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옆에 앉은 앙하라드를 돌아보았다. 성기사단이라니. 그녀는 베인을 한번 보고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촌장에게 보낸 편지에다가 그를 환속한 성기사단의 단원으로 소개한 모양이다. 눈치로 상황을 대충 파악한 베인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는 사이 앙하라드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아아, 이래서 오기 싫었단 말이야. 꼭 그렇게 호구조사를 해야겠어요, 퍼거스?”
“내 손수 만든 칼 쥐여주며 키운 단골손님의 약혼자라는데 궁금하지, 그럼!”
“누가 누굴 키워요?”
“어어, 왜 이래? 자네 돈 없을 때 내 공짜 칼 숱하게 가져다 썼으면서 딴소리하기는!”
“수리하다 부러뜨린 칼이었겠죠.”
“어쨌든, 그거라도 아니었으면 알비 던전에 들어갔다 나올 수나 있었겠어? 그 큰 거미를 나무 막대기 하나로 잡을 순 없지.”

앙하라드가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 술을 홀짝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베인에게로 쏟아졌다.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넘어가려던 그는 옆에 앞은 앙하라드를 슬쩍 돌아보았다. 도움을 구하는 눈빛에 그녀는 눈을 샐쭉하게 흘겼다.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라는 뜻이다.

하기야, 구구절절 다 풀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였다.

베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척 목을 울리며 앙하라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임무 중에 우연히 마주쳤다가 한눈에 반해서 잠시 동행했다네. 그 일로 꽤 혼이 나서 복귀한 후 한동안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런데 그 후로 운명인지 필연인지 발걸음이 자주 겹쳤고….”
“우연 좋아하시네.”
“그대, 맹세컨대 그대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던 게 아니야.”
“반호르에서는?”
“그건…. 너무 들떴던 나머지. 반성하고 있어.”
“괜히 와서는 말도 안 되는 생떼나 부리고 일만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매일 그대를 만나러 갈 핑계만 찾고 있었지. 알다시피 규율이 엄한 곳이었기에 말이야.”
“황송하기도 해라.”
“아휴, 사랑싸움 하려면 딴 데 가서 해요!”

케이틴이 핀잔을 주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베인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까 하다가 모든 이들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그마저도 여의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앙하라드의 반응을 흘끔 살피고 말을 이었다.

“사실 나의 그대를 만났던 게 은퇴 전 마지막 임무였던 터였다네. 그 일이 끝난 후엔 죽은 듯이 지내려 했는데, 이 아가씨가 가지 말라고 울며불며 붙잡는 통에 이렇게 됐지.”
“내가 언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앙하라드가 제 어깨를 감싼 베인의 팔을 팩 쳐내려다가 실패했다. 능구렁이처럼 웃는 그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입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는 분통을 터뜨리며 에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반대쪽 테이블에서 자경단 청년 둘이 술김에 팔씨름을 시작했다. 새로운 구경거리가 나타나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고, 퍼거스와 레이널드도 훈수를 둔다며 자리를 떴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트레보도 둘이 저러다 싸움 나겠다며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베빈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앙하라드와 베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성기사단에서 무슨 일을 했길래 앙하라드씩이나 되는 사람과 그렇게 자주 마주쳤던 거예요? 한 실력 하던 분이셨나 봐.”

앙하라드가 식탁 아래로 베인의 발을 꾹 밟았다. 베인은 소리죽여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밝힐 수 없겠는걸.”

“예? 왜죠?”

말콤이 되물었다.

잔을 내려놓은 베인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말했다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하거든.”

모여앉은 테이블에 순식간에 정적이 내렸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트레보가 그래, 그 정도는 돼야 앙하라드를 데려가죠! 라고 소리쳤다. 옆에서 술을 홀짝이던 앙하라드만이 그간 있었던 일을 반추하며 홀로 간담이 서늘해질 뿐이었다.

***

이제 우리에는 발로르 혼자만 남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깡마른 어린아이가 아니다. 무수한 흉터로 덮인 팔뚝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던 적이 있었냐는 듯 촘촘한 근육으로 덮였고 너른 등과 어깨는 분명한 청년의 그것이었다. 몸이 커지면서 힘이 세지자 그의 성격은 더욱 포악해졌고 한 우리를 쓰던 동배 형제들은 모조리 그의 손에 죽임당했다. 그 뒤로 들어오는 것들조차 모조리 잡아 죽이니 우리 밖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의 우리에 다른 것들을 들여보내지 않게 되었다.

발로르는 우리 너머에서 자신을 가리키며 소곤거리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거적데기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자들. 그들은 밥과 물을 넣어줄 때 하루 한 번 찾아왔다. 아직 밥시간이 아닌데 그들이 왔다는 건 불길한 징조였다. 그들이 우리에서 누군가를 꺼내 가면 항상 비명이 솟아올랐고, 끌려 나간 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발로르는 죽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사명이 있었다. 속을 불태울 듯 들끓는 용암을 세상에 토해내야 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수고 또 부수어야만 했다.

우리 반대편에서 스태프를 든 자들이 나타났다. 발로르는 이를 드러내며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곧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베인, 자?”

베인은 얕은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앙하라드가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

베인은 그제야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찬은 벌써 파한 듯 테이블이 하나둘 치워지고 있었고,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어깨를 걸고 저마다의 집으로 휘청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지? 베인은 당황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떠들썩한 자리에서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칼이 날아들지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언제 잠들던가?”
“글쎄, 라사를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오니까 자고 있던걸.”

빨간머리 마법 선생이 제멋대로 개사한 뱃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기억이 났다. 이미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을 때니 그리 오래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얼른.”

씩 웃으며 그의 손을 낚아챈 앙하라드가 성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관은 이쪽이 아닌 것 같다만.”
“벌써 들어가기 아깝잖아.”

그들은 잠든 성당을 지나 닫힌 목책을 열었다. 그러자 숲으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앙하라드는 베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 내내 그녀는 몰래 나쁜 짓을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평소보다 더 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 베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솔길이 끝나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풀이 웃자라 반딧불이 몇이 외로이 배회하는 작은 언덕배기. 앙하라드는 그제야 베인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공터 끄트머리에 풀썩 앉았다. 풀숲에서 쉬던 벌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반딧불이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별처럼 어지럽게 춤췄다.

“오랜만에 올라오니까 좋다.”

팔을 뒤로 짚고 두 다리를 쭉 편 앙하라드가 말했다. 쏟아질듯한 별을 머리 위에 쓴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베인도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가파른 언덕 아래로 조용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멀리 우뚝 선 설산과 그 위를 빙글빙글 도는 별들도. 베인은 그런 것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앙하라드가 그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재미없지, 이 동네?”

베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와 함께하는 순간 모두가 내게는 기쁨이지.”
“어휴, 또 입에 발린 소리.”
“진심이야.”

앙하라드가 푸스스 웃었다. 그녀는 다시 먼 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그의 어깨에 제 어깨를 기댔다.

“내 고향을 보여주고 싶었어. 자기 고향엔 한번 다녀온 적이 있잖아.”

굳이 고향이라 불러야 할 곳이 있다면 토리 협곡이 그의 고향이기는 했다. 베인은 큭큭 웃었다.

“나는 그대를 내 가족에게 소개하진 않았는데, 아쉽지는 않나?”
“너 가족이 있어?”
“있을 리가.”
“아, 뭐야. 그럼, 뭐, 나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어?”

베인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목적이 있어 태어난 것들은 다들 그렇게 이 세상에 오곤 했다. 제 어미와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수많은 형제, 그의 손에 죽임당한 그를 닮은 것들도 그렇게 태어났다. 모든 고르도슈가 어떤 목적을 위한 교배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장성한 뒤였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자신의 태생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고르도슈 중에서도 힘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의 태생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했겠는가.

베인의 대답을 기다리던 앙하라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답답하단 말이야.”
“그대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잖아.”
“내 태생에 관한 정보에 지금 와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군.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이제 막 태어난 게 아닌가? 그대가 손수 베임네크를 죽였으니 말이야. 그리고 베임네크는 발로르가 죽은 후에 드리운 그림자에 불과하지. 발로르의 태생이 궁금하다면 그 답은 왕실 장서관에서도 찾을 수 있을 텐데.”
“발로르 베임네크, 발로르 발크베임네크, 발로르 비루그데르크, 발로르 누 술라 니바... 이름만 해도 몇 개야, 벌써? 게다가 아버지는 소머리 브러네흐라는 말도 있도 네트라는 말도 있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고.”

베인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 요점을 잘못 짚었어. 나는 발로르가 아니야. 지나간 일을 되짚지 말아. 앞으로 나아가야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구.”

앙하라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도 연약한 음색에 베인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들은 이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시시때때로 불안에 시달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먼 별들이 설산의 능선으로, 땅과 맞닿은 곳으로 긴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졌다. 그것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베인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난 양파가 싫어.”
“...뭐?”

갑작스러운 선언에 앙하라드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들척지근한 게 영 입에 맞지 않더군.”
“그게 대체 무슨…. 앗, 설마 저번에 양파스프를 모조리 쏟아버린 게-”
“이런, 들켰나.”
“그냥 말을 하면 되잖아! 내가 그거 만든다고 눈이 붓도록 양파를 썰었는데-”
“실수를 가장해 쏟고 나서야 양파가 싫다는 걸 깨달아서 말이야. 말했잖은가, 나는 이제 막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앙하라드가 앉은 채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별 진심은 담기지 않은 발길질에 베인이 소리높여 웃었다.

“자, 이제 나에 대해 알게 되었군. 어때, 기분은 좀 나아졌나?”
“...얄밉게 굴 때마다 뺨을 얻어맞았다면 지금쯤 금붕어가 됐을 텐데.”
“그대가 자비롭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군. 하지만 가끔은 올려붙여도 괜찮을 것 같다만. 시쳇말로 업계포상, 이라고 하던가?”
“그래, 알려줘서 참 고맙다.”
“더 알고 싶은 게 있나?”

쭈뼛거리던 앙하라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로 어린아이였던 적은 없어?”
“이런, 그대는 기어코 알아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군. 뭐... 발로르도 피와 살로 만들어졌던 존재니 어린 시절은 있었지.”
“그렇구나…. 볼 수 없어서 좀 아쉬운걸.”

베인은 작게 웃었다.

“장담하는데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어린아이는 아니었다네.”

차라리 짐승에 가깝다면 가깝겠지. 하지만 베인은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이 다정한 별은 제 일이 아닌 불행에도 곧잘 눈물을 흘리곤 하는데.

흘끔 곁눈질한 앙하라드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발끝을 몇 번 까딱이던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인도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옷에 풀물 들 거 같아. 이제 가자.”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밤이 더욱 깊어졌다. 마을을 밝혔던 등불들도 모두 꺼져 그들은 희미한 별빛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내일은 촌장님 장작 좀 패 드리고….”

막 오솔길을 벗어날 무렵이었다. 베인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던 앙하라드는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손을 놓칠 뻔 했다.

“왜?”
“누군가 있군.”

앙하라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또 타라 귀족들이 보낸 건가? 연례행사야, 정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만….”
“응?”

앙하라드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반문할 새도 없이 목책 옆의 수풀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스태프를 소환할 시간도 없었다. 앙하라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새파란 낙뢰의 줄기가 불꽃을 튀기며 모여들었다.

“잠깐!”

덩굴처럼 얽힌 낙뢰가 달려드는 그림자를 향해 쏘아져 나가기 직전, 베인이 다급하게 앙하라드의 손목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역류한 마나가 쇠를 쇠로 긁는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그리고 달려들던 그림자는 베인의 몸을 전력으로 치고 지나갔다.

“베인!”

허리께를 들이박힌 베인이 휘청이며 앙하라드에게로 넘어졌다.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지 않았다면 둘 다 그대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어안이 벙벙해진 앙하라드는 베인과 그를 치고 지나간 그림자를 번갈아 보았다.

오솔길 끝에 작은 소년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소년이 한쪽 팔을 허공으로 쭉 뻗었다. 손에 작은 주머니를 움켜쥔 채로.

“빼앗으면 내 거라고 했죠? 다른 말 하기 없기예요!”

빠르게 말한 소년이 잽싸게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앙상한 팔다리를 휘적이며 뛰는 모양새가 꼭 어린 사슴이 뛰어가는 것 같았다.

“하하!”

잡았던 손목을 놓은 베인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앙하라드는 그제야 낮에 베인의 손에 들렸던 토끼발을 낚아채려 용을 쓰던 소년을 떠올리고 맥이 탁 풀려 팔을 떨어트렸다.

“아아, 이게 뭐야. 간 떨어질 뻔했네….”
“영 근성 없는 녀석 같았는데, 의외로군.”
“야, 뭘 잘했다고 웃어! 너 때문에 애 하나 잡을 뻔했잖아!”
“너무 화내지 말아, 그대. 내가 제때 말리지 않았나?”

성당 뒤편으로 후다닥 사라진 소년을 바라보던 베인이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티르 코네일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앙하라드는 어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어졌다.

***

발로르는 거세게 저항했다. 팔다리를 붙들리고 목을 조여 당기는 사슬에 끌려가지 않도록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다. 전보다 많이 자랐다고는 하나 몸이 아직 다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땅에 박아 버텨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몽둥이가 그의 등과 정강이를 후려쳤다. 발로르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할퀴고 찢어 놓았다. 불운하게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몇몇이 비명을 질렀고,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뭐 해, 잡아!’

하지만 그럴수록 구속은 점점 더 그를 조여왔고 몸을 붙든 손들은 더 우악스럽게 그를 떠밀 뿐이었다.

‘솥 열어!’

누군가 소리쳤다. 붙드는 손을 떨쳐내기 위해 발악하던 발로르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로 끌려왔는지 깨달았다.

불과 두세 걸음 앞에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불 위에 얹힌 솥이 있었다. 사람 하나는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크기였다. 솥 안에는 이상한 색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증기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는 자신을 끌고 나온 자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기회는 한 번이야! 제대로 던져넣어!’
‘드디어…!’

솥 주변에 모여든 자들이 웅성거렸다. 발로르가 그 안으로 던져지는 것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이들이었다.

‘자, 얌전히 들어가!’

발로르의 머리채를 잡아챈 손이 그의 얼굴을 솥 위로 들이밀었다. 피어오르는 마법의 증기가 그의 얼굴 반쪽을 덮쳤다. 용암으로 살을 태우는 듯한 격통이 그를 집어삼켰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발로르의 손이 제 머리채를 잡은 손을 낚아챘다.

***

잠결에 손목을 붙잡힌 앙하라드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어나려고 했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베인이 그녀의 몸을 반쯤 타고 앉아 위협적으로 두 팔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여관 다락방의 작은 창으로 비뚜름한 달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들은 떨리는 숨을 내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래된 공포에 젖었던 베인의 눈빛이 서서히 누그러졌고, 앙하라드의 눈에는 그 반대로 당혹감과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베인, 이건- 내 실수야. 마법이 덜 풀렸어. 맹세하는데 더 볼 생각은 없-,”

긴장이 탁 풀린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앙하라드의 팔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고, 그녀를 타고 앉았던 베인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베인, 내가-”
“하하하, 이상하게 어릴 적 꿈을 꾼다 했더니! 그대의 소행이었군.”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린 베인이 다시 그녀의 옆으로 풀썩 몸을 뉘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큭큭 웃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만족할 만큼 보았나? 남의 꿈을 훔쳐보다니, 생각보다 엉큼한 구석이 있어. 정 보고 싶다고 했으면 기꺼이 보여주었을 텐데.”

이번에는 앙하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미안해, 난 정말….”
“이런, 그대. 그대를 나무라는 게 아니야. 내가 꿈 좀 훔쳐보는 걸로 화를 낼 속 좁은 사내일 줄 알았나? 서운하군. 첫 만남에 철없던 시절의 모습까지 모조리 다 보여주었는데, 이제 와 이깟 기억 좀 몰래 보았다고 화를 낼 생각은 없어.”
“왜… 화를 안 내? 알려주기 싫어했잖아.”
“싫어했다고? 내가?”
“아까 거기서는 분명히-”
“그거야 그대가 알 필요 없는 과거의 정보이지 않은가. 지금의 나와는 관계가 없지. 그대가 나를 다시 빚었는데 굳이-”

짜악-

눈앞이 번쩍였다. 말을 끝맺지 못한 베인은 얼얼한 뺨을 한 손으로 감싼 채 어리둥절하게 앙하라드를 올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대, 왜 우는….”

앙하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인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쏜살같이 방을 뛰쳐나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베인은 화끈거리는 한쪽 뺨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

잠이 오지 않아 장부를 정리하던 던컨은 집 앞을 달음박질쳐 지나치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열린 덧창 틈새로 익숙한 밀색 뒤통수가 잠옷 차림으로 묘지로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밤사이 싸우기라도 한 모양이지.

던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밀레시안이라 해도 이 새벽에 얇은 잠옷 차림으로 묘지 풀숲에 웅크려 있으면 탈이 나기 마련이었다. 담요를 챙긴 던컨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침 광장을 두리번거리는 베인을 발견했다.

“거기 자네, 여길세.”

혹여 앙하라드가 들을까 싶어 나직이 부르니 베인도 그를 보고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그 또한 자다가 뛰쳐나온 모양인지 얇은 튜닉 차림이었다. 던컨은 담요를 내밀었다.

“밤중에 사랑싸움이라도 한 모양이구먼. 그렇다고 젊은 아가씨를 이 밤중에 나가게 두면 못 쓰지.”

하지만 베인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이걸 왜 내게 주냐는 듯이.

“자네 하라는 거 아닐세. 앙하라드도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왔더군.”

베인은 그제야 그가 내민 담요를 받았다.

“어디로 갔지?”
“묘지에 있다네. 왜인지는 모르지만 속상한 일이 있으면 항상 저기 가서 울곤 했거든.”

그 말을 들은 베인은 바로 묘지로 몸을 돌렸다. 던컨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단숨에 올라갈 기세였다.

“잠깐, 아직 가지 말게.”
“왜지?”
“이럴 땐 좀 울게 두는 게 좋아.”

베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던컨은 짧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포워르이지?”

묘지로 시선을 두었던 베인이 그를 흘긋 돌아보았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나도 소싯적엔 세상을 돌아다녀 본 적이 있다네. 늙었어도 그 정도는 아직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담요를 옆구리에 낀 베인이 코웃음을 쳤다.

“별로 놀란 기색은 아니군.”

그는 다시 묘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던컨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은퇴한 기사와 약혼했다기에 난 이멘마하의 그 근위대장을 말하는 줄 알았지 뭔가. 그런데 웬 시커먼 포워르를 서방 될 사람이라며 데리고 왔으니 이 늙은이가 어찌 놀라지 않았겠나. 하기사 그자와 약혼할 리가 없는데, 나이가 드니 바라는 것만 많아지는구먼.”
“할 리가 없다니.”
“그자는 보통의 인간이지 않은가. 앙하라드와는 어울리지 않지.”

아. 베인은 그제야 사람 좋게 웃는 노인의 눈빛을 이해했다.

“포워르는 괜찮고?”
“그런 말이 아닌 걸 자네도 알잖는가. 보통의 사람은 태양에 너무 가까워지면 타죽는 법이네. 인간이든 포워르든.”

앙하라드가 편지에 모든 걸 다 적지는 않았군. 베인은 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현명하고 다정한 아이이지 않나.”

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정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제가 맞다 생각해 내린 결정에 토를 달지는 않겠네. 다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네가 뭘 알겠나. 뭔가 긴 사연이 있겠지.”

베인이 짧고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손녀사위가 마음에 안 찬다는 말을 장황하게도 하는군.”
“하하하, 그냥 늙은이 주책이라고 생각하게. 그래서, 왜 싸웠나?”
“싸우지 않았어. 자기가 잘못해놓고 울면서 뛰쳐나가더군.”
“그럴 리가. 보통 이런 상황에서 잘못은 사내에게 있는 법이라네. 잘못하지 않았어도 원래 그런 법이야.”

무슨 소린지 베인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희미하게 들려오던 흐느낌이 훌쩍거림으로 변했다. 소리에 귀 기울이던 던컨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올라가 보게.”

명령조가 듣기 싫었던 베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한걸음에 묘지로 올라갔다.

앙하라드는 아델리아 천을 내려다보는 묘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돌담에 등을 기대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묻은 그녀는 제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소매로 눈을 비비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베인은 들고 온 담요를 건넸다.

“공기가 차가워, 그대.”
“...필요 없어.”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어.”
“모르는데 무슨 잘못을 해?”

앙하라드가 코맹맹이 소리로 부루퉁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건넨 담요를 받아 가지 않자 베인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대가 나에 대해 그렇게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
“자기는 내 어린 시절을 궁금하다고 해 놓고...”
“사랑받아본 적 없는 자의 우매함이라고 생각해주게. 그리고 꿈을 꾸기 전까지는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미안.”

앙하라드가 다시 얼굴을 무릎 사이에 숨겼다.

박동하는 심장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베인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지금 웃었다가는 정말 그녀의 화를 돋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바보 같은 여자를 눈앞에 두고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 눈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알고 싶었던 것일 테지?”

앙하라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의 고개가 슬며시 들렸다. 눈만 내놓은채로 베인의 얼굴을 살피는 게 마치 그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이제 괜찮아.”
“딱히 숨기고 싶었던 건 아니야. 사안의 내력을 아는 것이 우리의 관계에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그대가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 이제는 건네줄 뿔도 다 떨어졌고 말이야.”

고개를 든 앙하라드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반쪽 얼굴을 가리는 안대의 끈을 풀었다. 검붉게 변색한 얼굴에 박힌 붉은 사안이 그녀를 응시했다.

“어디서부터 듣고 싶지?”

맹독을 뿜어내는 시선에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처음부터.”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베인이 낮게 웃었다.

“첫 기억은 같은 우리를 쓰던 동배 형제가 피거품을 무는 소리였지….”

***

발로르는 피 웅덩이 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독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솥은 넘어져 내용물이 죄 쏟아져 있고, 그 위로 조각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반쪽은 여전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발로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곳에 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빗방울이 검게 오염된 대지를 때리는 적막 속에서, 그는 출구로 보이는 곳을 향해 걸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났으니, 그가 죽을 자리는 마땅히 빛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다.

***

새벽빛이 스미는 시각, 베인은 담요를 뒤집어쓴 앙하라드를 업고 묘지를 내려왔다.

“베인.”

베인의 등에 업힌 앙하라드가 속삭였다.

“음?”
“필리아에 가 봤어?”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엘프들의 도시 말이군.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가 본 적은 있었다. 아마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베인은 망령들만 배회하는, 모래 먼지 날리던 황무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은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필리아는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하니까 지낼만할 거야. 간 김에 콘누스 항 휴양지에도 가자.”
“귀가하면 짐부터 다시 챙겨야겠군.”

기분이 조금 좋아진 앙하라드가 작게 키득거렸다.

“포셔가 관리를 부탁한 저택이 있어. 매년 티르 코네일의 추수를 끝내고 갔는데 한동안 누구 때문에 너무 바빠서 못 갔거든.”

말을 끝낸 앙하라드가 돌연 베인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움켜쥐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기우뚱한 탓에 그는 낡은 비석들 사이에서 발을 살짝 헛디뎠다. 업힌 채로 옆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을 받은 앙하라드는 제 잘못인 줄도 모르고 그의 등에 더 바싹 매달리며 핀잔을 줬다. 하지만 베인은 그마저도 기꺼웠다.

“몇 년이나 방치되어 있었으면 집주인이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당연히 사람을 고용해서 돌보고 있었지. 나도 그 집이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앞마당에 있는 분수랑 야자수랑 온 집안을 덮은 타일을 내가 일일이 다 관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울음기가 가신 앙하라드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베인은 흐음, 하고 목을 울렸다.

“차라리 잘 된 셈이지 않나? 궂은일을 그대 대신 할 사람이 생겼으니 이제 사람을 살 필요는 없겠군.”
“대신 할 사람?”
“사지 멀쩡한 장정을 두었다가 무엇에 쓰려고?”
“자기가 정원사 노릇을 하겠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앙하라드가 되물었다. 베인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으하핫, 어쩜 이렇게 꿈이 클까! 양은 움직이니까 안 되지만 야자수는 가만히 있으니까 괜찮겠다 이거야?”

앙하라드가 깔깔 웃었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전지가위로 야자수 잎을 다듬고 분수에 떨어진 마른 잎을 뜰채로 건져내는 베인을 상상하니 즐거워졌다.

“가지치기 좀 잘못했다고 야자수가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하진 않을 거 아닌가.”
“야자수도 엄연히 살아 있거든요?”
“죽으면 뽑아내고 다시 심게.”
“정원수 한 그루에 얼마나 하는지나 알아? 누구 가산을 탕진시키려고….”

아침이 밝아 왔다. 조용한 시골 마을의 흙길을 걷는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먼 동쪽에서 팔라라가 모습을 드러내고 어둠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밤이 앗아갔던 색채가 서서히 되살아났다. 생명 없이 새카맣게만 보이던 베인의 머리 색이 다시 짙은 고동색으로 돌아왔고, 상록수는 푸른빛으로, 광장의 낡은 돌바닥은 새벽 어스름과 같은 옅은 분홍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앙하라드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용기 내어 속삭였다.

“그래서, 나랑 같이 갈 거야?”

이 질문을 좀 더 일찍 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시체 타는 매캐한 연기 자욱한 모이투라에서 그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해야 했을까? 이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베인은 바로 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울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앙하라드는 돌연 두려워져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 인간의 마음은 어찌도 이리 연약한지.

“그대가 원한다면.”

한참 만에야 베인이 나직이 대답했다. 앙하라드는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밀랍 인형이나 창백한 시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엔 혈색이 돌았고 눈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났다. 그가 몸을 틀어 등에 업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전에 말했잖나. 이제 나는 오롯이 그대의 것이라고.”

잠시 조용하던 앙하라드는 다시금 베인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 조금 훌쩍이기 시작했다.

숨죽여 울던 앙하라드의 숨소리가 이내 고르게 잦아들었다. 목덜미에 닿은 뺨이 축축했다. 베인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끼고 사랑해주는 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발로르도 베임네크도 아닌, 죽은 이름을 벗은 베인은 사랑하는 이를 등에 업고 비탈진 시골길을 내려가며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이곳에는 어쩌면 마흔 번 정도는 올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보다 열 번 정도는 더 올 수도 있겠지. 운이 나쁘면 그 전에 병에 걸려 죽거나 여러 이유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겠지만, 베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귀가한 후에 다시 짐을 챙겨 필리아로 향하는 배편을 알아보는 것이 먼저였다. 전지가위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도 있을 테다. 위험하니 내려오라고 소리치면서도 사다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앙하라드를 상상하며 베인은 작게 웃었다.

그녀가 삶과 죽음을 되찾아주었기에, 그는 다시 한번 피 끓는 비명만이 가득한 토리 협곡의 그늘에서 태어나, 억겁의 굴레를 반복하라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회한에 젖어 스치듯 흘린 말 한마디에 그녀가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를 잿더미에서 건져 올렸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몸과 끝이 예정된 시간을 돌려주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그를 짓누르던 충동을 벗겨내고 따스한 음식으로 곯은 배를 채워 주었다. 그리고 가르쳐 주었다.

배꼽 없이 태어난 자들도 자신이 살 집을 만들 수 있는 법이라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