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지.
베임네크는 셀 수도 없이 마주해온 테흐 두인의 어두운 아가리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한눈에 알아본다니.
한때 고결한 영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 또한 보기에 아름다운 자였다. 건장한 체격과 깎은 듯한 턱선, 빛나는 눈과 팔라라처럼 빛나는 머리칼. 전장의 열기에 취한 자를 부나방처럼 홀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 자의 본성은 어떠했는가?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영광된 영웅처럼 보이던 그 자는 비열한 속임수로 승리를 약탈해가는 무뢰배였고 눈부신 겉모습에 가려진 이면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베임네크는 이미 한 번뿐인 죽음으로 자신의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그 대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내기에 갇혔건만, 그 내기를 끝내는 방법이 그에게 진정으로 영광된 죽음을 가져다 줄 자를 '한눈에 알아보는' 것 뿐이라니.
그리하여 그는 이제 희망을 품지 않았다.
베임네크는 정해진 대로 땅굴의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제 친구 라릭이나 다른 교단 분들께서 왔던 걸까요?”
익숙한 소년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베임네크는 미리 검을 고쳐 들었다. 서두른다고 시간이 빨리 흐르지야 않겠으나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첫만남을 지나치고 싶었다. 이번에도 별볼일 없는 자겠거니 하여.
“글쎄…. 단서를 좀 더 찾아봐야겠는걸.”
베임네크의 걸음이 계단 끄트머리, 그림자의 경계에서 멈추었다.
테흐 두인의 눅눅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곳에 키가 큰 여자가 있다. 검붉은 옷을 길게 늘어뜨리고 햇빛처럼 말간 머리칼을 땋아 등 뒤로 넘긴 여자가 지팡이에 몸을 비스듬이 기대어 서 있었다.
이번엔 여자인가. 베임네크는 심드렁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발소리를 죽인 채 그들에게로 다가간 베임네크는 마지막 열 걸음 앞에서 잠시 뜸을 들였다. 셀 수도 없이 반복하여 인이 박힌 장면이다. 저들은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멍청하게 제대로 처리하지도 않은 적들에게 등을 보인 채 서서 영양가 없는 대화를 쑥덕거리다가 기습을 허용할 테지. 그는 때때로 심술을 부려 손을 쓰지 않고 가만히 있기도 했으나, 이번 굴레는 유독 피곤하였으므로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부관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길동무로 삼아 주마!"
바닥에 쓰러져 있던 포워르가 마지막 발악을 토해내며 일어났다. 그 소리에 그를 등지고 있던 여자가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베임네크의 다리가 지면을 박찼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는 간결한 동작으로 포워르의 심장을 꿰뚫었다.
정말로 약속된 그 자라면 이런 허술한 기습을 허용할 리가 만무하다. 죽음을 모르는 밀레시안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올 수도 없는 한심한 자였겠지. 베임네크는 불쑥 치밀어 오르려는 짜증을 애써 갈무리하며 검을 정리했다.
생명을 잃은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 속, 부연 먼지가 가라앉고 발밑으로 피 웅덩이가 번졌다. 햇살을 머금은 얼굴이 어느새 그의 목전에 있었다.
술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코 끝을 찌르는 불쾌한 냄새에 베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눈앞의 여자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싸구려 럼주의 들척지근한 향을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알콜의 냄새.
어처구니가 없어진 베인은 허탈하게 검을 내렸다. 수없이 많은 굴레를 되풀이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분별력도 없이 술에 빠져 사는 영웅이라니. 베인은 치솟는 짜증을 애써 삼키며 그 여자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은 푸석했고 식은땀에 젖어 있었으며 눈 아래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몸은 비쩍 말라 마치 비루먹은 말 같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알 수 없는 꼴이다.
이번에도 글렀나.
베인은 실망감을 삼켰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 긴 시간을 또 한번 반복해야 한다니.
그 때, 그를 향해 돌아선 여자가 마치 오래 기다려온 사람을 만난 듯 환하게 웃었다.
"으악! 앙하라드 님, 괜찮으세요?"
작은 체구의 소년이 뒤늦게 호들갑을 떨며 여자의 팔에 매달렸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살폈어야 했습니다."
장전한 석궁을 들고 서 있던 푸른 머리의 기사가 말했다. 지난 굴레에서의 부관이로군. 베임네크는 그제야 벌컥 짜증이 났다. 이 녀석은 부관으로 다루기도 까다로운 자였지만 원정대에 있으면 그 배로 짜증을 돋구곤 했다. 쓸데없이 앞뒤 꽉 막히고 융통성이라곤 없는 녀석.
"괜찮아, 안 다쳤어."
소년을 부드럽게 떼어낸 여자가 대답했다.
베임네크는 그를 바라보며 웃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와 보았다만. 네놈들은 누구지?"
"안녕. 나 모르겠어?"
내 장담하는데,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다.
하이미라크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불빛이라고는 마법으로 타오르는 등불의 어스름한 빛 뿐인 땅 아래의 어둠에서 그녀의 주위만 환하게 빛이 났다. 마치 팔라라의 광휘 아래 선 듯이.
턱에 힘이 들어갔다. 멍청한 베임네크, 누가 발로르로부터 난 그림자 아니랄까봐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군. 이젠 저주스러워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거북한 그 자에게도 한눈에 반해 죽지도 못하는산 송장이 되어 놓고도.
이게 그가 기다리던 자일 리 없었다. 그가 기다리는 건 그에게 걸맞는 죽음을 가져다 줄 영광되고 거룩한 영웅이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앙하라드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소리없는 음성에 부정하던 마음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베임네크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이 자가 그 자일 수가 있단 말인가? 제 몸 하나 가누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여자가 그 모든 밤을 넘어서서 찌거기처럼 남은 그의 존재를 밀어낼 별이라니. 베임네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목전에 나타나기로 약속된 눈부신 운명의 광휘는 대체 어디에 있지?
베임네크는 불안하게 선 여자의 앞에 무릎꿇고 있을 자신을 그려 보았다.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의 손에 들려 있을 신검과 그 휘황한 칼날에 떨어질 자신의 목이 보였다.
과연, 눈이 멀어 태양을 보지 못하더라도 얼굴 위로 내려앉는 따사로운 온기는 느낄 수 있는 법이로군.
굳어 있던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너무도 오래된 공허에 밀랍처럼 희게 말라붙은 심장에 피가 돌았다. 이 볼품없는 여자가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자여도 상관없다.
고결한 영웅만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갈 수 있다면, 그녀를 그렇게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누구십니까? 신원을 밝히십시오.”
"마르에드 누님!"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의 앞을 막아서며 나선 푸른 머리의 기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베임네크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여자의 목전에 서서 머뭇거렸다.
“내 이름은….”
발로르는 죽었다. 하지만 징벌자라는 이름을 건네기가 가당치 않았다. 베임네크, 내려치는 자. 지나치게 거창했다. 징벌하는 자라니, 누가 누구를 징벌한단 말인가? 그의 앞에 선 그의 운명을?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미르에드가 다그쳤다.
"속히 소속과 이름을 밝히십시오!"
"베..."
"베인."
베임네크가 이름을 꺼내기 전, 그 여자가 먼저 대답했다.
그녀는 베임네크의 놀란 얼굴을 보고 흡족한 듯이 실쭉 웃었다.
"방랑기사 베인, 맞지?"
베인. 베임네크는 조용히 입 안으로 그 이름을 뇌까려 보았다.
허영 가득한 자만심, 독으로 가득한 불운의 원천, 정해진 파멸. 그는 실제로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토리 협곡의 부글거리는 산성 점액질에서 태어난 자에게 걸맞은, 실로 적절한 이름이 아닌가.
푸른 머리의 기사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앙하라드 님, 이 자를 압니까?"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 그렇지?"
그렇게 말한 앙하라드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발로르 베임네크'
발로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대였군."
"나를 못 알아보다니 섭섭한걸, 베인.”
두 음절로 된 그의 새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와 시간에 새겨졌다.
베임네크는 그 순간 직감했다. 징벌자 베임네크, 발로르의 그림자는 이제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곧 베임네크는 억겁의 굴레에 얽힌 시간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는 베인이라는 남자가 차지하게 될 테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소문의 그 밀레시안인 것이로군.”
***
그건 아마 그들이 이리아 어드메에 텐트를 치고 밤새 와인을 마셨던 날이었을 것이다.
"나 진짜 궁금한 게 있어. 넌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어떻게 정신이 그렇게 멀쩡해?"
멀린은 떨떠름한 얼굴로 앙하라드를 돌아보았다.
“그거 칭찬이냐?”
"칭찬이지, 그럼."
"고오맙다. 근데 그건 왜 묻냐?"
“미쳐버린 거 같아서.”
멀린은 앙하라드의 대답에 놀라 옆에 드러누운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가?”
“내가.”
그녀는 크리스털 잔 대신 코코넛 껍질을 깎아 만든 컵에 고급 와인을 담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멀린이 입을 벙긋거리고 있으니 그녀가 술기운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턱을 까딱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비법이 있을 거 아냐? 나도 좀 알자. 그래야 완전히 정신 놓기 전에 뭐라도 좀 해보지.”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멀린은 그제야 술을 가지고 온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물 대신 술을 입에 달고 사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선물이랍시고 술을 안겨주다니. 하지만 실수인 척 병을 쓰러트려 내용물을 처리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드러누운 앙하라드가 한쪽 옆구리에 마지막 병을 끼고 있었고, 그 내용물도 거의 다 그녀의 뱃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멀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거 없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삼시세끼 밥 잘 챙겨 먹고, 주기적으로 운동하고, 친구들 만나고….”
“야, 그런 말은 마누스도 할 수 있어.”
“진짠데.”
“그러지 말고.”
앙하라드가 한쪽 다리를 휙 들어서 멀린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멀린은 질색하며 그녀의 다리를 팔로 밀어 걷어냈다. 앙하라드가 깔깔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쩨쩨하게 굴 거야?”
“알려주면 얼마 줄 건데.”
“트레저헌터가 사람 하나 버려놨네.”
“와, 어떻게 그렇게 심한 욕을 하냐?”
“그러니까 말해 보라고. 오래 살면서 안 미치는 방법.”
“글쎄. 걱정을 사서 안 하는 거 정도려나.”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걱정을 일삼는 것은 비단 오랜 삶을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모두를 가장 빨리 미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구나.”
조용하던 앙하라드가 말했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친 것 같기도 했다.
대화의 주제는 곧 디바와 에아렌의 비밀 연애로 넘어갔고, 앙하라드는 그 주제가 끝나기도 전에 잠들었다. 그냥 술 취해서 한 말이겠지. 멀린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멀린은 자신의 대답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음을 인정했다. 걱정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목숨을 건 기아스를 맺게 할 만큼.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그 나름대로 조금 덜 미쳐 보려는 시도였다. 덕분에 그는 토르 모르에서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역설적이게도, 조금이라도 덜 미쳐 보려는 바로 그 시도가 그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멀린은 앙하라드와 함께 인적이 끊긴 토르 모르에서 구르듯이 빠져나왔다.
“너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했지?”
축 늘어진 앙하라드를 부축한 그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악을 썼다. 반쯤 정신을 잃은 그녀는 체구도 작지 않아 무겁기도 더럽게 무거웠다. 멀린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러대며 그녀를 짐짝처럼 업고 검은 자갈 해안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내려갔다. 반절 정도 내려갔을 때부터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겨우 해안에 다다랐을 때는 둘 다 검은 진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해안에 다다른 멀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앙하라드를 자갈 바닥에 내던졌다.
“반신에다가 이계신의 신성력까지 있으니까 암흑의 에르그 정도는 건드려도 별일 없겠지 싶었냐? 너는 도대체가-!”
자갈밭에 엎어진 앙하라드의 등이 들썩였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법도 했건만, 그녀의 웃음소리는 너무도 컸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던 앙하라드가 고개를 들어 멀린을 바라보았다. 땀과 피와 비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 사이로 시뻘건 눈이 번뜩였다.
“왜, 기아스 때문에 쫄았어? 너도 나랑 같이 도매금으로 죽을까 봐? 저번처럼?”
“앙하라드!”
“그러게 왜 괜한 기아스를 맺어서 매번 똥 마려운 개처럼 전전긍긍해? 나 걱정할 시간 있으면 너랑 네 친구들 걱정이나 하세요, 천재 대마법사님!”
“죽는 게 문제야? 내가 지금 너 죽는 걸 걱정하는 거 같아?!”
멀린이 자갈을 발로 걷어차며 고함을 질렀다. 튀어 나간 자갈 몇 개가 앙하라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며 상처를 냈다. 그러자 그녀는 완전히 미쳐버린 여자처럼 바닥에 벌렁 나자빠져 웃기 시작했다. 그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미치지 않았는데, 멀린은 이제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기나 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냐고!”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이러고 있겠냐고!”
미친 듯이 웃던 앙하라드도 지지 않고 악다구니로 응수했다.
“그 새끼는 배가 불러 자빠진 새끼야. 하이미라크가 손수 되감아 주는 수레바퀴에 고상하게 올라앉아서는 힘들다고 징징대기나 하고! 나는 그런 높으신 뒷배도 없어서 한번 되감을 때마다 온갖 개고생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덜떨어진 훼방꾼들이 파리떼처럼 들러붙는 걸 쫓아내야 하는데!”
“그러니까 대체 왜 되돌리냐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발로르를 되살리려고 하냐고 묻고 있잖아!”
“아, 아, 아. 그 이름이 아니지. 발로르는 오래전에 죽었어. 네 눈엔 내가 고작 시체나 되살리려고 이 개고생을 하는 것처럼 보여? 실망이야, 멀린. 넌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멀린은 더 할 말이 없어서 입만 벙긋거렸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벽에 대고 말하고 말지, 광인과 무슨 논리적인 대화를 기대한단 말인가.
오래 사는 사람들은 다 미친다. 왜 앙하라드는 그 운명을 비껴가리라 생각했을까?
한참을 웃던 앙하라드가 자리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톨비쉬에게 전해, 한 번만 더 훼방을 놓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노파심에 말하는데, 내가 못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난 그 새끼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쩌고 하면서 내 등에 칼을 꽂았을 때 마음이 떴거든.”
멀린의 얼굴이 희게 질려갔다. 앙하라드는 그냥 정신만 나간 게 아니었다.
“난 인간들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했어, 앙하라드. 아무리 너라도….”
“말했지, 공갈 협박이라는 생각하지 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멀린이 마지막 애원처럼 물었다.
앙하라드는 먼바다를 향해 섰다. 온 세상이 잿빛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리는 날카로운 사선으로 조각조각 잘려나간 듯 보였다. 비에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세상엔 사서 하는 걱정 말고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너무 많더라, 멀린.”
해변에 홀로 남겨진 멀린은 앙하라드가 바라보았던 수평선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슬프게도 그녀의 마지막 말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럼 다음 행선지는 시드 스넷타로군요."
마르에드가 말했다. 피르안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고, 그들은 먼저 테흐 두인 밖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이제 가 봐야겠다."
중얼거린 앙하라드도 곧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베인은 테흐 두인의 긴 계단을 지나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두어 걸음 뒤에서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폐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평원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앙하라드는 바람을 맞는 듯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묶이지 않고 흘러내린 잔머리가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베인은 그 모습을 응시하면 속내을 알 수 있기라도 하듯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몇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앙하라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안 가?"
앙하라드가 물었다. 마법 안개 너머로 들락날락거리는 사이 술이 좀 깬 모양인지 눈의 초점도 돌아왔고 더 이상 식은땀도 흘리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떠나길 원하나? 제법 매정한 구석이 있군."
"아니, 보통은 할 일이 있다고 우리보다 먼저 가버리거든..."
앙하라드가 말꼬리를 흐렸다. 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지만 그녀의 의중이 어떻든간에 베인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잃어버렸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어떻게, 그리고 왜 굴레를 반복하는거지?
마법 안개 너머로 훌쩍 들어간 그녀는 본디 그의 힘인 것을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다는 양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전광석화처럼 쇄도하는 마법의 공을 가볍게 튕겨내는가 하면 제멋대로 시간을 접어버리기도 했다. 힘을 넘겨줄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 건네주려 했던 뿔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잘 된 일이긴 하지, 그런 철없는 시절의 모습은 웬만하면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같이 갈래?"
앙하라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베인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 전의 실패작들과도 동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결말이 빤히 보이는 책처럼 하나같이 진부하기 짝이 없었으니. 하지만 앙하라드, 그의 앞에 선 이 이상한 여자는 달랐다. 밤을 넘어섰는데도 돌아온 이유를 그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앙하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그런데 이번엔 뭔가 새롭네."
"앙하라드님, 얼른 가요! 해가 지겠어요!"
피르안이 문게이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에 선 마르에드는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지 않는 베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이 굴레를 되풀이하는지."
앙하라드가 말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몇 번을 되풀이한들 똑같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어떤 사건은 시간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마왕 발로르가 오래 전 루 라바다의 손에 죽은 것처럼. 그렇다면 굴레를 되풀이하는 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변하지 않을 결말로 달려가는 길을 빙글빙글 돌 이유가 대체 무엇이기에?
베인이 대답할 말을 궁리하는 사이, 앙하라드가 말했다.
"널 살려내려고 왔어."
팔라라가 먼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사위가 시시각각 어둠에 잠겨들었고, 베인은 바람 부는 센마이 평원 가운데 선 앙하라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별이 뜨는 하늘 아래서 그녀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그 순간 베인은 깨달았다. 이 여자는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또 봐."
짧은 인사를 끝으로 앙하라드가 몸을 돌렸다. 기다리는 일행에게로 돌아간 그녀가 문게이트의 번쩍이는 빛과 함께 사라질 때까지 베인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