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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 브라우니

Summary:

동거한 지 10년 된 쿠라모치와 미유키. 어느 날 일찍 퇴근한 쿠라모치는 예상 밖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Work Text:

어쩐지 생활력 없어 보이던 녀석이라, 미유키가 자취를 한다고 해서 놀러가 봤더니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서 그렇지 살림을 야무지게 해치우며 잘 지내고 있어서 놀랐다.

집도 따로 사람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깨끗이 치우고 살고, 요리도 잘한다. 저 자식 고독사 안 하나 보자 하고 드나들던 것이 어느새 밥을 얻어먹으러 드나드는 것으로 탈바꿈하여,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가게 됐다. 비시즌에 자고 갈 때는 수제 도시락까지 받기도 해서, 회사 내에서 쿠라모치 대리님은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쯤 되니 오히려 그 미유키 카즈야 입에서 "쿠라모치, 그럴 거면 집세 아까우니까 그냥 내 집에서 살아. 혼자 뒀다간 고독사할 것 같고." 소리를 듣게 됐다. 퇴근하면 그냥 늘어지고 싶어서 그렇지 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 살고 그럭저럭 잘 치우고 산다고. 오히려 나 정도면 독신남 평균 이상이라고... 따지기는 했지만 결국 '과연 프로 연봉을 받는구나' 싶은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기는 했다. 집세도 아낄 수 있고, 미유키의 밥은 맛있으니까. 지인 찬스로 집세도 헐값으로 받으니 나로서는 어느 모로 보나 이득이었다.

반면 미유키 카즈야의 입장에선 군식구만 하나 더 는 것인데 무슨 이득이 있나 싶었지만, 저 재수없는 놈은 "미안해서 어쩌냐, 내가 뭐 해줄 수 있는 거 없나? 넌 손해만 보는 거 아니야?"라고 해도 "반려동물에게 그다지 큰 기대 없달까."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먹이고 재우고 놀려먹기만 하면 알아서 씻고 운동하고 놈의 연봉에 비해선 쥐꼬리지만 그래도 돈도 벌어오고 털도 안 날리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보다 나를 데리고 사는 것이 손도 안 가고 편하다는 것이다. 열받아서 엉덩이를 몇 대 걷어차 주었다.

그러면 원정 경기라든지, 캠프라든지 네가 오래 집을 비울 때 잘 지키고 있겠다고 했더니 "반려견이 아니라 경비견인 건가" 해서 그 녀석은 매를 또 벌었다. 곧 죽어도 외롭다는 말은 안 할 놈인 걸 알아서 그냥 그러마 했다. 그렇게 내 손에는 미유키 카즈야의 집 열쇠가 놓이게 됐고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유키 카즈야와 동거는 저혈압 걱정이 필요 없는 하루의 연속이었지만, 매일 아침 미유키가 차려주는 된장국을 먹고 출근해서 점심시간에는 그놈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저녁에는 갓 지은 밥상을 받으면 "그래도 끼고 살 만한 놈"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밥 시간만 기다리는 자신을 문득 깨달으면 역시 반려동물로 길들여졌나 좀 비참해지기도 했지만.

동거 생활의 규칙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둘 다 기숙사 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때 몸에 익힌 규칙대로 적당히 서로 배려하면 됐다. 미유키는 사람 성질을 긁는 놈이지만 그런 부분에서 타인의 선을 침범하는 인간은 아니라 같이 지내기에는 괜찮은 동거인이었다. 다만 미성년자에 학교 소속의 기숙사였던 그 시절과 성인이 된 지금의 동거 생활에서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면 '애인을 집에 데리고 오지 않을 것'이었다. 나도 양심이 있어서 말이 동거지 사실상 얻어 사는 입장에서 애인을 남의 집에 데려오는 짓은 할 생각이 없었고, 미유키는 타인을 집에 들이는 건 싫다고 못을 박았으니 각자의 애인을 이 집에 데려올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일이란 게 있으니 명목상 세워두기는 했다.

20대 때야 운동만 하던 10대에서 벗어나 신이 나서 좋다는 사람만 있으면 덜컥 사귀고 설레하고 했지만, 30을 넘은 지금이 되니 설레는 감정도 없고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도 딱히 들지 않았다. 주변에서 결혼 생각 없냐 연애 안 하냐 소리도 많이 듣고 소개도 가끔 들어왔지만 정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부 거절했다. 지금 생활로 만족합니다. 쿠라모치 씨, 친구랑 둘이 동거한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남자 둘이 동거하면 힘들지 않아? 아뇨, 뭐... 그 녀석 요리도 잘하고. 도시락도 친구가 싸준다고 했지. 네, 그리고 어지럽히지도 않고 깔끔하고. 조용해요. 잠시만요, 이 녀석 양반은 못 되겠네요. 전화 좀 받을게요. 어, 미유키. ...이후 직장에서 여자 소개해 주겠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짐작은 가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만족하는 것이다. 미유키 카즈야와의 동거는 재미있었다. 취미도 같고(그 녀석에게는 일이겠지만) 유머 코드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고. 성격이 나쁘긴 해도 근본은 착한 놈이다. 집안 살림도 잘하는데 돈도 많이 버니까 여자라면 결혼시장에서 우수한 신부감으로 꼽힐 것이다. 하지만 늘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는 꼬인 놈의 팔자여서인지, 미유키 카즈야는 연애 상활에서도 어려운 길을 택했다. 뭐, 크리스 선배를 유달리 따를 때부터 조짐은 있었나.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연령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아무튼 잘생긴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외모를 가진 그 녀석은 정작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동성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굳이 알려고 한 것도 아니고, 미유키 쪽에서도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10년 정도 같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알게 된 이후에도 "너 남자 좋아하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미유키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이 생겨서 늦어질 수 있다, 결국 헤어졌다, 정도의 보고는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모든 정열은 야구에 쏟아부어서인지 연애에 있어서는 미적지근한 놈이라, 20대 때는 드문드문 연애를 하는 모양이더니 요새는 몇년째 잠잠했다. 재앙 같은 연애만 하던 놈이라 차라리 안 하는 게 안심이긴 했다. 슬쩍 찔러봐도 "난 고양이나 키우며 사는 독신 생활에 만족하니까, 그냥 이대로 늙어 죽으려고." 소리나 들었다. 고양이? 우리 고양이 안 키우잖아. 치타도 고양잇과야, 모치. 이 자식이!

서로 연애에는 관심없고 지금 생활에 만족하니, 각자 자기 위로만 조용히 잘 처리하면 함께 독신으로 늙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외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퇴근도 평소보다 빨라졌다. 같이 장이라도 보러 갈까 싶어서 미유키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이미 밖인가? 밥 차리는 거나 도와야겠다 싶어서 그냥 바로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원하는 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익숙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 나타났다. 고등학생 때보다 키도 몸집도 커졌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어린 티가 남아있었다.

"사와무라? 무슨 일이야?"

"모치 선배! 미유키가 불러서요.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불러주세요!"

유독 미유키에게 선배 호칭을 붙이길 어려워하던 놈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남기고 내가 내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고막을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집에 부른 적은 있었지만 하루이치, 후루야와 함께 트리오로 불렀지 사와무라만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잘 먹었다는 소리는 또 뭐야? 현관문을 벌컥 열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달콤한 냄새였다.

"어? 사와무라, 뭐 놓고 갔어?"

부엌에서 모습을 나타낸 미유키는 앞치마 차림이었고 얼굴과 팔이 얼룩덜룩했다. 냄새로 추정컨대 밀가루와 코코아가루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유키의 낯에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지만 순식간이었다.

"일찍 왔네?"

"외근이 빨리 마무리돼서."

식탁에는 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은 갈색 부스러기 몇 점을 제외하면 깨끗했고 다른 한쪽은 한 입 먹다 만 브라우니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뭐냐? 샀어?"

"아니, 브라우니."

"웬 브라우니?"

"연습하려고."

일단 사와무라를 주려고 만든 건 아니란 얘기다. 미유키는 요리는 잘해도 베이킹은 하지 않았다. 단 것을 안 좋아하는 놈이 자기 손으로 설탕을 들이붓는 짓 따위 할 리가 없었다. 본인이 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브라우니?

이상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데 사와무라를 불러? 여태 미유키가 처음 시도하는 요리를 제일 먼저 먹어보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이번에도 그냥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다른 지역에 사는 후배를 굳이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게 할 필요 없이. 감추는 게 있는 것이다. 틀림없었다.

미유키의 어깨 너머에 걸린 벽걸이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2월 12일. 이마가 구겨졌다. 내게 숨기고 사와무라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못마땅해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 예상이 맞았다. 매우 못마땅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저놈이 헌신하는 사람은 투수뿐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유키는 연애에 있어 을을 자처했다. 애인이 부탁하고 요구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었다. 돈이든 시간이든 야구에 방해되지 않는 것이라면 뭐든 퍼줬다. 그의 연애사에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실제로는 얼마나 더 간이고 쓸개고 바쳤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애인 주려고?"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애인은 아니고..."

애인도 아닌 놈을 위해 자기는 먹지도 않는 걸 만들어서 바친다고.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더니 아주 대단한 사랑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자동차를 사주는 건 봤는데 케이크를 손수 구워주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이 더 기분이 나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퍼줄 정도로 애인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왜 사귀는 건데?" "안 사귈 이유도 없잖아?" 그런 놈이었다. 그 누구도 욕망하지 않는 놈이고 야구가 1위인 놈이었다. 그래서 친구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미유키 카즈야에게 애인은 사랑하는 대상도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친구는 하나뿐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언젠가 사회의 압박과 책임감을 못 이기고 갑자기 결혼하더라도 가족 다음의 순위. 그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족 외의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현재 위치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먹을래? 남은 건 다 사와무라 줘버려서 내가 먹다 남은 것뿐이지만."

대답하기도 전에 미유키가 포크를 가져와 내밀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싫음 말고' 하는 투이지만 자신있었다면 사와무라까지 불러서 시식회를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포크를 받아들자 조금 굳어있던 미유키의 표정이 풀렸다.

식탁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삼켰다. 연습용에 먹다 남은 걸 먹어보라는 미유키도 미유키지만 그걸 또 먹으라고 먹는 자신도 웃기는 놈이었다. 브라우니인지 초코파운드인지 포크로 크게 잘라서 입에 넣었다. 오븐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어 따끈하고 달콤했다. 미유키의 시선이 느껴졌다. 베이킹이란 건 그냥 정해진 양대로 재료를 넣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집에서 처음으로 튀김 요리를 했을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하지 않았으면서.

"맛있어." 퉁명스러울지언정 솔직하게 말해줬다.

"뭐, 쿠라모치는 단 거면 다 맛있다고 하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유키의 표정이 풀렸다. 안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자신감은 어디 간 거야. 그 남자가 그렇게 좋냐?

 

-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았느니 못 받았으니로 소란을 피우기에는 다들 지친 직장인이었다. 초콜릿이고 뭐고 얼른 집에 가고 싶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때 그 브라우니, 오늘을 위해서 만든 게 분명했으니까. 그 녀석 얼굴과 야구 빼면 남는 게 없다고 놀리고는 했지만 정말 그뿐이었으면 놀림거리 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얼굴에 직접 만든 브라우니. 눈과 위장을 사로잡는 건 식은 죽 먹기고 마음까지 사로잡기도 어렵지 않을 조건이었다. 오늘 집에 안 들어온다는 연락은 없었지만 밤은 아직 길었다.

퇴근 시각이 되자 정시에 맞추어 너도나도 일어났다. 평소라면 합류했겠지만 오늘은 사람들을 보내고도 일이 덜 끝났다며 굳이 오늘 안 해도 되는 일을 붙잡고 있다가 이것도 못 할 짓이다 싶어서 두 시간이 지나 일어섰다. 배가 고팠다. 미유키가 만든 밸런타인 특제 카레가 먹고 싶었다.

기념일은커녕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도 까먹던 놈이, 동거를 시작하고 첫 밸런타인데이에 내가 "그래도 살면서 안 하던 짓을 굳이 하는 날도 있는 게 재밌지 않겠냐? 해마다 이정표 몇 개쯤 있는 것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며 다크초콜릿을 사 온 이후 우리는 밸런타인과 크리스마스, 새해와 각자의 생일 정도는 챙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간식거리를 사 가고, 미유키는 달콤한 카레나 함바그, 오므라이스 정도를 하는 것뿐이었지만, 미유키가 평소에는 식단 관리를 하느라 잘 해주지 않는 메뉴이기 때문에 나름 특식인 셈이었다.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데이트하느라 바쁠 줄 알았더니 미유키에게서 10분 전쯤 메시지가 와 있었다. "늦어?" 한마디뿐이었지만. 잠시 망설이다 전화했다. 연결이 안 됐다. 그냥 메시지로 답장해야겠다 싶었는데 미유키 쪽에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하는데 마침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던 타팀 여자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줬던 걸 말하는 것이었다. 적당히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보냈다.

"어, 미유키."

"어디야?"

"회사 앞. 이제 나왔어."

"오늘 야근한다는 말 없었잖아."

너 때문에 심란해서 회사에서 늑장부렸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미안. 갑자기 일이 좀 생겼어."

"난 또. 데이트하느라 안 오나 했네."

"놀리냐?"

미유키 쪽은 조용한 게 실내 같았다. 어디냐고 그러는 너는 데이트 어땠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밥은?"

"아직."

"밥도 안 먹고 뭐 했냐? 식은 카레나 먹어라."

미유키가 투덜거렸다. 오늘 데이트가 어떻게 됐든 나와의 전통대로 카레를 해뒀다는 얘기였다.

"데워줘. 얼른 갈게."

"네가 데워 먹어."

 

-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레 냄새가 났다. "왔어?" 거실 소파에 누워서 야구 경기를 보던 미유키가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물었다. 대충 "다녀왔어." 대답하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

씻고 나오자 미유키가 부엌에서 상을 차리고 있었다. 카레와 밥 모두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반찬도 손이 꽤 가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케이크도 만들고 데이트 준비도 하느라 바빴을 텐데도 신경 써준 것이다. 낮에 누구를 만났든 결국 쿠라모치 요이치와 사는 집에 돌아와 준 것이다. 이거면 된 게 아닐까. 어쩐지 스스로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연락 늦게 해서 미안. 번거롭게 했다."

"또 식기 전에 얼른 먹기나 해."

밥을 먹는 사이 미유키는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하루 어땠냐는 물음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미유키는 기분이 특별히 좋아 보이지도 안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긴장한 것 같았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넌 오늘 어땠냐고 물어보려는데 미유키가 일어났다.

"쿠라모치 아직 배 남았지?"

"응. 왜?"

미유키가 냉장고에서 검은색 상자를 꺼내 왔다. 빨간 리본이 장식된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얼굴을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이길래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한입 크기로 썰어진 브라우니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다 먹어치우고 남은 부스러기도, 한 입 먹은 흔적도 없었다. 손도 안 댄, 만든 그대로였다.

"안 줬어?"

"못 줬어."

"왜?"

"줄 기회가 없었어."

미소에 힘이 없었다. 머리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냥 주면 되잖아. 다들 너한테 뭘 못 줘서 안달인데.

"먹어줄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냐? 남한테 주려던 걸 나한테 주는 거냐? 내가 쓰레기통이야? 무신경해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미유키는 오늘 이미 그 남자에게 거절당했을 것이다. 두 번의 거절을 겪게 하기 싫었다. 미유키더러 호구를 자처한다고 욕할 자격은 못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알았다 하고 먹었다. 그냥 대충 투박하게 구운 것이 아니었다. 조각마다 토핑이 다 달랐다. 하얀 설탕가루를 뿌린 것도 있고 견과류를 얹은 것도 있고 초코칩을 뿌린 것도 있었다. 포장 상자에 리본까지. 공을 많이 들인 티가 겉보기에도 맛으로도 느껴졌다. 이번에는 진짜인 것이다. 이 남자는, 미유키를 자신 없게 만드는 이 남자는 미유키가 직접 정성을 담을 정도로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뱉고 싶었다. 미유키의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을 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 또한 미유키의 마음이니까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이야. 이렇게 공들여서 만들어 놓은 걸 받지도 않은 놈은 누구란 말인가. 미유키는 줄 기회가 없었다고 했지만 이렇게 주지도 못하고 다시 가져올 거였으면 애초에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받아줄 것 같았으니까 줘야겠다고 생각했겠지. 마음은 못 받아도 이거라도 받아줄 순 있는 거잖아. 만든 성의가 있는데. 안 하던 걸 하겠다고 야구와 관련없는 일에 후배까지 불러서 연습한 건데. 

"쿠라모치 맛있어?"

한 개를 다 먹고도 말이 없어서 불안해진 눈치였다. 눈치 보는 미유키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남자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만큼 그 사람이 너한테 영향을 준다는 거겠지. 더럽게 맛없다고 해주고 싶었다. 베이킹 따위 이대로 단념하라고. 그만 잊으라고. 그를.

하지만 이렇게나 좋아한다면 미유키가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야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크리스 선배를 봐도 그랬다. 미유키는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한번 좋아하면 절대 놓지 않았다. 한때는 그 소수에 들어가고 싶었고 한때는 거기에 자신도 속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미유키에게 몇 순위일까? 미유키의 유일한 존재... 그런 집착은 유치하고 무의미했다. 지금 보니 분명했다. 자만이었다. 이제는 단지 바랄 뿐이었다.

"네가 만든 게 맛이 없을 리가 없잖아."

바보 안경. 그에게 말했다. 밥도 카레도 모두 맛있었다고. 평생 네가 해준 밥을 먹고 싶을 정도라고.

내가 요리 칭찬을 해준 게 처음도 아닌데 미유키는 그 말이 기뻤던 것인지 여기에는 뭘 넣었고 저기에는 뭘 넣었고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으면 말이 많아지는 것은 후루야나 사와무라도 아는 미유키의 특징이었다. 이제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는 맛도 잘 볼 수 없어서 답답했다고 푸념하는 얼굴이 짜증 나게도 귀여웠다.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했다. 그래도 미유키의 기분이 풀린 것은 다행이었다.

남은 브라우니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고무장갑을 꼈다. 야근했으니 쉬라고 자기가 설거지하겠다는 미유키를 밀치고 싱크대 앞에 섰다. 한창 접시를 헹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미유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소리에 반은 묻혔다.

"밸런타인데이 축하해, 쿠라모치."

쭈뼛 소름이 돋으며 손에서 접시를 떨어트렸다. 다행히 높게 들고 있지 않아서 깨지지는 않았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일부러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입이 말랐다. 미유키, 솔직하게 말해.

"그거... 나 주려고 만든 거였어?"

미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이틀 전으로 거슬러올라갔다. 오해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넌... 선물할 사람한테 연습용이라고 먹여보냐?"

"들킬 생각 없었는데 기왕 들킨 김에..."

남보다 선물받을 본인이 먹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고 합리적이지 않냐는 해명이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고무장갑에서 비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야, 넌... 그런 걸 먹고 나서 말하면 어떡해?"

"알고 먹으면 뭐가 달라져? 음식은 똑같은데."

"당연하지!"

버럭 외쳤다. 3초간 정적이 흘렀다. '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라고 쓰여 있는 미유키의 뻔뻔한 얼굴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그냥 하하하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이상하다고 미유키도 곧 따라서 웃었다. 둘이서 포복절도를 했다. 서른 넘게 먹고 바보 같은 꼴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고민했던 게 우스워졌다. 좋았다. 그게 나였다니. 미유키의 그 남자가 나였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일을 벌인 거야?"

밸런타인데이가 아니어도, 브라우니가 아니어도, 검은색 포장 상자에 빨간 리본이 아니어도 난 괜찮았을 것이다.

"살면서 안 하던 짓을 굳이 하는 날도 있는 게 재밌지 않겠냐고 했잖아."

그래도 미유키는 나름 이정표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꼭 안 그래도 되지만 유별하고 싶던 것이다. 특별하니까.

"평생 내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 쿠라모치?" 미유키가 놀리듯이 물었다.

"그래. 해줄 거냐?"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분명 붉어졌을 것이다. 이런 내 얼굴을 미유키는 놀리지 못했다. 그의 얼굴도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뭐... 그래. 평생 먹어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