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리보트릴, 테마제팜, 졸피뎀, 에스졸피클론, 자레플론, 아티반, 멜라토닌, …멜라토닌… 멜라토닌 하나… 멜라토닌 둘… 멜라토닌 셋… 멜라토닌 넷… 멜라토닌 다섯…. 잠이 온다. 멜라토닌 여섯… 복용량이 너무 많다. 1일 1회 2mg이 적정량이다. 여섯 알이면 12mg인데….
옐레나는 눈을 떴다. 계속 켜져있던 에어컨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커튼까지 쳐 뉴욕의 휘황찬란한 밤의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방은 그저 검었다. 하지만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옐레나는 한참 발렌티나가 비싼 돈 주고 고용했을 인테리어 업자의 취향일 천장 등의 현대적인 직선을 감상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불 꺼진 방과 별다른 바 없이 어두워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드문 상황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낮에 몸을 혹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다. 옐레나는 더듬더듬 잠옷 상의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 바로 아래를 더듬거렸다. 커다란 거즈가 붙은 부위를 살살 만지자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진통제는 1시간 전에 먹었다.
뉴-어벤져스-즈가 되었다고 해서 일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옐레나의 암살자 생활로 다져진 눈치로는 자신이 ‘대장’인 것 같았다. 아직 추측성인 건 공식적인 대장이 없어서고 그런데도 대장이라 생각하는 건 발렌티나의 임무 하달은 옐레나 본인이 받기 때문이었다. 다들 110세의 버키 의원님이 대장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게다가 의원님께서는 백인 남자다.- 투잡을 하는 건 아무리 하이드라 혈청 맞은 슈퍼 솔져여도 어려워 임무에 나가지 않는 날도 많았다.
거기에 전부 고집쟁이에 자기주장 강한 ‘동료’들을 데려다 위험한 임무를 하다 보니 사달이 났다. 추격 중에 말 그대로 오토바이 위에서 떨어졌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스팔트가 아니라 흙 위라는 정도였다. 갈비뼈 두 대가 금이 갔고 어깨가 빠진 것도 모자라 얻어맞은 것처럼 멍이 들었다. 멍은 거의 빠졌지만 갈비뼈는 아직이었다.
이정도 부상은 처음도 아니다.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떨어져서 구르는 찰나의 순간 이 모습이 셰임룸까지 갈 일은 아니길 바랐을 뿐이다.
옐레나는 임무를 할 수 있다고 우겼지만, 의사는 반대했고 놀랍게도 발렌티나가 최소한 의사가 허락할 때까지 임무를 나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알고 보니 언론에 새어나간 게 문제였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도 진통제를 배로 털어먹고 멕시코에 갔겠지.
“존 워커는 신나서 죽을 지경일 텐데….”
옐레나가 웅얼거렸다. 아무도 들을 사람은 없었다. 아니 발렌티나는 도청 장치를 설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방 전체가 그럴지도 몰랐다.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한 방이란 게 그런 거니까.
옐레나는 자는 걸 포기하고 벌떡 일어나려다 진통제를 뚫고 밀려오는 통증에 인상 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낮게 신음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진통제와 보드카는 마시면 안 되지. 그렇다면 와인은 괜찮은가? 샴페인은?
옐레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일어섰다. 헐렁해 골반에 걸친, 고무줄이 다 늘어난 잠옷 바지는 영 이 방과 어울리지 않았으나 편했다. 옐레나는 바지 끝이 발등에 찰랑이는 걸 느끼며 방을 나갔다.
복도에는 CCTV 불빛만 규칙적으로 깜박거리고 어떤 기척도 없었다. 옐레나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옐레나가 있는 층에 도착했다.
의사는 진통제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수면제를 추천했다. 옐레나는 익숙한 진통제만 먹고 수면제는 먹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약을 처방받는다는 너무나도 미국적인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건 너무나도 정상적인 반응이다. 문제가 있으니까, 병원에 간다. 보험도 있겠다. 신분도 처리되었겠다 거리낄 건 없었다. 더는 익명의 존재나 그림자 속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옐레나는 술만큼 많이 먹었을 진통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약물은 입이 꺼끌거렸다. 진통제는 씹어 삼킬 수도 있었다. 레드룸에서 어땠더라, 아니 어떻게 배웠더라? 그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독을 판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들이나 자연에서 생존술은 알았지만,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로 병원에 가도 된다는 건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다.
그걸 추천 한 건 버키였다. 버키는 효과를 보았다는데, 옐레나는 아직 모르겠다고 하라는 대로 병원에 갈 때마다 생각했다. 어쨌건 뭐든 해야 했다. 효과를 본 사람이 있으니까, 자신도 그러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곳, 와치타워에 문 대신 벽을 뚫고 왔을 때 처음 보았던 층이다. 크게 난 통창으로 뉴욕의 야경이 보였다. 하지만 옐레나는 화려한 불빛에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고 바로 어두운 바로 향했다. 구조가 익숙해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진통제 먹고 술 마시면 간이 작살날 텐데.
에어컨을 켜지 않았지만 온종일 켜져 있어서인지 지금까지 한기가 남아있었다. 몇 도더라. 내일도 덥다던데. 옐레나는 머리를 비우고 술의 맛을 상상했다.
바는 익숙한 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옐레나는 늘어선 술병을 한 발짝 뒤에서 살펴보았다. 발렌티나의 술 취향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옐레나는 턱 위로 손가락 끝을 까딱거리다 보드카 한 병을 쥐고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익숙하게 선반에서 잔을 꺼냈다. 주변을 고요하고 간독성이니 이런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수면제보단 술이 낫지 않아? 옐레나의 비이성이 속삭였다.
“옐레나?”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고 옐레나는 소름이 돋는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잔에 술을 따르기 전에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잔을 던졌다. 얼굴이 간신히 보이는 창가 소파 자리였다.
“옐레나! 뭐 하는 거야?”
“버키?!”
옐레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형체를 보며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임무를 시작할 때처럼 빠르게 뛰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그만큼 옐레나의 표정도 그림자 속에서 구겨졌다.
“사람이 오면 기척이라도 내지? 화석처럼 웅크리고 있지 말고.”
버키는 어느새 일어나 바로 다가오고 있었고 옐레나는 민망함을 숨기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에 버키가 김빠진 소리를 냈다. 옐레나는 무시하며 다시 새 잔을 꺼냈다. 그제야 느껴지는 기척과 이어지는 발소리에 옐레나는 이 커다란 바 구석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시각은 새벽 2시 30분. 헛소리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대체 이 시간에 불도 안 켜고 뭐 하는 거야?”
옐레나가 새 잔에 보드카를 따르며 말했다. 알렉세이가 추천하던 병이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어느새 바까지 온 버키가 옐레나가 따르는 잔과 보드카 병을 슬쩍 보았다. 옐레나는 병을 내려놓고 투명한 액체를 마시려다 잔 위로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술 끊기로 한 거 아니었어?”
옐레나는 버키의 말에 어깨만 으쓱하고 보란 듯이 잔을 들어 보였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버키는 오호가 없는 얼굴이었다. 옐레나는 바닥에 까는 듯 따른 보드카를 들이켰다.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여기 온다는 건 술 때문 아니야?”
옐레나가 물었다. 버키는 바 의자에 앉았다. 옐레나는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움직인 탓에 슬슬 금 간 갈비뼈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체했다.
“야경이 잘 보이잖아.”
“와치 타워에서는 다 잘 보이지 않아?”
“여긴 통창이라.”
“그래서 이 시간에 야경을 보러오셨다?”
“잠이 안 와서. 너도 그런 것 같은데.”
“뭐.”
옐레나는 크게 긍정하지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의사가 수면제 줬을 텐데.”
옐레나가 말했다. 버키는 말이 없었다. 옐레나와 마찬가지로 피하고 싶은 주제일 테다. 약물 주입 당하고 세뇌당한 사람이 약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럼 전혀 먹질 않나? 옐레나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술은?”
“내일 일찍 일이 있어서.”
“슈-퍼 솔져는 한두 잔으로 취하지도 않잖아.”
옐레나가 버키 앞에 빈 잔을 놓고 따랐다. 버키는 잔을 들고 고개를 까딱하더니 망설임 없이 마셨다. 옐레나는 그걸 보고 웃었다. 보드카는 만병통치약이다. 러시아에서는.
“그럼.” 버키가 말했다. 마치 술자리가 파한 사람의 말투다. 하지만 옐레나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버키도 움직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옐레나에게 가보라는 말 같았다. 어째서?
옐레나는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그러자 버키가 손을 뻗어 잔을 가로챘다.
“뭐 하는 거야?”
“진통제 먹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갈비뼈가 일주일 만에 붙진 않으니까. 그리고 아까 잔 던지느라 힘 좀 썼겠지. 간단한 추론이야.” 버키가 말했다. 옐레나에게는 잘난체하는 투로 들렸고 잔을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대신 아닌 척 가슴 아래에 슬쩍 손을 댔다. 통증이 있었다.
“내 간인데 무슨 상관이야?”
“친구 좋은 거로 생각해.”
“친구? 저기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제 친구가 아니거든요.”
“그럼, 조카?”
버키가 웃으며 말했다. 옐레나는 과장된 얼굴로 구역질하는 척했다.
“의원실에 항의서 보낼 거야.”
버키는 웃으며 보드카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빈 잔이 있었다. 옐레나는 새 잔을 꺼낼 수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나한테 정신과 의사를 추천한 건 너잖아. 그런데 이 새벽에 네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옐레나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상담을 추천한 거야. 그리고 그 의사가 안 맞으면 바꿔.”
참 쉽게 말하네. 옐레나는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버키는 더운 뉴욕 여름에 반소매를 입고 있었고 야경 불빛에 검은 흑요석 같은 금속이 미세하게 반짝거렸다.
“요즘에도 상담받는다고?”
“뭐. 그렇긴 하지. 완치는 없잖아.”
버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임무 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상담할 시간은 있어?”
“임무가 먼저야?”
옐레나의 말에 버키가 물었다. 옐레나는 대답 대신 아주 천천히 보드카 병뚜껑을 닫았다.
“일단은 그렇지 않나?” 옐레나는 조금 자신 없는 말투였다. “넌 뭐가 먼저인데?”
“난 의원이잖아.”
“절차대로 하기 지루하다고 오토바이 타고 쫓아 오는 초선 의원?”
“내가 먼저 물었잖아.”
버키가 질문을 피해 가려는 옐레나를 막아섰다. 옐레나는 고민하는 척 천장에 매달린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장은 임무보다 우선 할 게 없었다.
“그게 내 일이잖아.”
옐레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어쨌건 일이었다. 보험도 나오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일. 대외적으로 얼굴도 팔리고.
“그런데 아직도 잠은 못 자고.” 버키가 말했다.
“남 일처럼 말하네.”
옐레나가 푹 찌르고 들어갔다. 하하. 버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지긴 하지.” 옐레나가 농담조로 말하자 버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이야기가 빙빙 돈다. 옐레나는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나 자신이나 비슷할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잠이 올까? 어떻게 하면 잘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나?
“야경을 보면 잠이 와?”
“사람이 있다는 건 느껴지지.”
버키의 대답에 옐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 너머로 야경이 보였다. 불빛이 여기저기 번쩍였다. 잠들지 않는 뉴욕은 한낮같이 느껴졌다.
“난 가끔… 밤에 잠입 임무를 가면….” 옐레나는 말하다 말고 낮게 신음 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공허 Void로 들어갔을 때가 생각나.”
버키는 공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옐레나는 창가 가까이 희미하게 보이는 소파 그림자를 보았다. 버키는 옐레나의 시선을 눈치채고 잠시 같은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 들어간 그것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
“지금, 이것도 어쩌면 그곳일 수 있잖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옐레나.”
“눈을 감으면-. 그렇잖아.”
옐레나는 야경을 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집어삼키던 뉴욕을 떠올렸다. 그건 블립과는 달랐다. 블립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공허에는 무언가 남았다.
“옐레나. 괜찮아?”
버키가 여전히 야경에 사로잡힌 듯한 옐레나에게 물었다. 옐레나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습관적으로 생각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네.” 옐레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꿈과 공허가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어.” 옐레나가 다시 버키를 보았다. “이건 너도 마찬가지지?”
버키는 이번에 부정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옐레나에게 꿈은 보통 어두운 형태로 찾아왔다. 그건 버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공허와 다른 게 뭐가 있겠는가?
“네 말 대로 뭐든 하고 있잖아.” 옐레나가 버키를 보고 말했다. “뭐. 널 탓을 하는 건 아니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넌- 나아졌다고 하니까.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옐레나는 마지막을 거의 얼버무렸다. 미래에 어찌 될까 싶은 건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런 직업은 특히. 옐레나는 다시 임무를 할거고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할 시간도 없다.
“당장은 갈비뼈가 붙어야지. 옐레나.”
버키의 말에 옐레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혈청 맞은 윈터 솔져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영 재수 없네.” 옐레나가 말을 끝내곤 하품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빨리 자러 가야 해. 잘 수 있어.” 그러곤 바를 벗어났다.
“봐, 러시아인한테는 보드카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옐레나가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 버키를 향해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