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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 있다. ‘첫째들은 남을 잘 챙긴다’. 타고 난 성향인지, 동생이 생기면서 변하는 건지는 몰라도 결론적으로는 다들 그렇다고 했다. ‘그럼 난 뭐지?’ 열세 살의 제라르는 생각했다. 어쩌면 첫째로 태어날 운명이 아니었는데 실수로 순서가 꼬여버린 걸지도 몰랐다.
제라르는 애초에 형이 되는게 싫었다. 갑자기 부모님의 관심을 나눠 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양보해야 하고, 심지어 형으로서 모범을 보이라는 것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 살 때 한 번은 부모님이 당시 다섯 살이던 동생 마크를 친구들이랑 축구하러 가는 데 데려가서 좀 봐주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인데. 내 경기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그 날 제라르는 마크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이들 사이에서 거칠게 파울을 당하고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꽤 즐거워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크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돼있었고 무릎은 양쪽이 다 까져있었다. 엄마는 동생을 잘 챙기지 않았다고 제라르를 나무랐다. 혼나고나서 제라르는 화해할 겸 마크의 방을 찾아갔다. 미안하다고, 친구들한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일러두겠다고 말해야했다. 하지만 마크와 눈을 마주친 순간 제라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다치기 싫으면 밀리지 말고 끝까지 버텨. 난 너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있는 거 아냐."
마크는 그 말을 듣고 더 크게 울었다. 제라르는 일주일 동안 외출금지를 당했다. 제라르는 동생이 한층 더 싫어졌다.
라 마시아에 들어가고서부터 제라르에게는 라 마시아 뿐이었다. 집에 있을 필요도 없었고, 동생을 돌보라는 말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그냥 축구만 잘 하면 됐다. 친구들이나 어린애들은 물론이고 몇몇 윗학년들까지 자신을 동경하듯 우러러보는 건 꽤나 기분이 좋았다.
세스크를 만난 건 그 때쯤이었다. 아마 난 쌍둥이여야 했나봐. 제라르는 생각했다. 둘은 꽤나 잘 맞았고, 같이 뛰면서 서로 실력을 늘려나갔다. 세스크는 조용한 만큼이나 관심에 딱히 목마르지 않은 친구였다. 그리고 키도 제라르보다 작았다. 객관적으로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라르보다는 작았다. 그 무렵 제라르는 매일밤 성장통으로 고생 중이었으나 그마저도 괜찮았다. 딱히 세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키가 큰 건 좋았고, 아무도 자신과 세스크를 건드리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이미 제라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모든게 딱 맞아 떨어져갔다. 트로피도 하나 들었다. 이름 없는 컵이었지만 세상을 전부 얻은 것 같았다. 부모님 역시도 무척이나 기뻐했고, 그렇게 제라르의 사진은 마크의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이 가족들의 벽을 뒤덮어갔다. 오랜만에 집에 가자 엄마는 넌지시 동생이 요즘 괴롭힘을 당해서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게 몇 년 전에 마크한테 혼자 못 버티면 힘들어질 거라고 한 번 말했는데요.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다시는 그 이야기를 제라르에게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훈련 도중에 누군가가 세스크에게 파울을 했다. 꽤나 거칠었기에 세스크는 무릎을 부여잡고 얼굴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뜨렸다. 순간 심장이 쿵쿵거렸다. 파울을 한 그 자식을 흠씬 두들겨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그 감정을 외면한 뒤 세스크더러 드리블을 그딴 식으로 하니까 그 정도 파울은 당연한 거라고 일갈했다. 씨발놈. 세스크는 제라르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 주 내내 제라르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열세 살이 됐다. 그 해 여름은 처음으로 즐겁지가 않았다. 라 마시아에서 제라르는 잘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집에 오면 마크는 늘 처져있었고, 부모님은 마크의 옆에 붙어있으라며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러 갈 때도 나쁜 아이들이랑 마주치지 않게끔 둘을 같이 보내곤 했다. 제라르는 알겠다고 했지만 그건 솔직히 마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부모님한테서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더 컸다. 자기 전이면 으레 다음 해 라 마시아에서의 모습을 상상하기 바빴다. 일단 예쁜 여자애랑 데이트를 해야겠다. 인기를 얻겠답시고 귀찮게 달라붙던 몇몇 애들은 이제 슬슬 정리하고. 무슨 포지션을 가든 최고가 될 거야. 키도 최소한 10센치는 더 크고, 목소리는 훨씬 낮아지겠지. 모든 게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시점임을 제라르는 알았다. 서로 죽고 못사는 친구 사이라든가 철없는 의리따위는 그들에게 이제 없을 것이다. 자리는 열한 개뿐이었으니까. 전세계에 있는 열세 살짜리 아이들 역시- 공을 한 번이라도 차봤다면 모두 경쟁 대상이 될 터였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8월 말이었다. 훈련은 진작에 다시 돌입한 뒤였다. 머리 속에 생각해두었던 꿈들은 느리게나마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아직 없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순조로웠다. 세스크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훌쩍 키가 커서 온 제라르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코치진 중 한 명은 제라르에게 수비수를 하면 잘 하겠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꼭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어쨌든 그 후로 제라르는 훈련 때마다 작은 녀석들을 인정사정없이 밀쳐대며 점점 거친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기왕 수비수를 할 거라면 경기장에 있는 그 누구도 제가 있는 한 살아남을 수 없어야 했다. 코치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라르에게 칭찬과 함께 좀 살살하라는 말을 이따금씩 건네곤 했다.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라 마시아 역사상 최고 세대가 나올 거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고, 제라르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타났다.
첫 날 제라르는 거의 그 애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느닷없이 세스크가 그 애를 가리키며 속삭였을 뿐이다. “여기서 여덟 살도 받는 줄은 몰랐는데.” 한 코치가 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저 아이는 너희와 동갑이라며, 입단 시험을 통과하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제라르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녀석은 다리부터가 가늘기 짝이 없었다. 바람만 불어도 그냥 부러질 것 같았다. 머리는 또 얼마나 긴지 몰랐다. 약간 떡져 보이기도 했다. 너무 창백하고 말라서 솔직히 축구장보다는 요양원이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애랑 뭘 같이 뛰라는 거야. 하지만 딱 20분이 지나고 그 쪼끄만 자식은 제라르를 쌩 지나쳐 벌써 세 번째나 완벽하게 골을 넣고 있었다. 제라르는 당황한 채로 그냥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세스크를 찾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깨달았다. 큰일났다. 키가 150센치도 안 되는 그 무시무시한 놈의 이름은 리오넬 메시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쪽팔린 적은 처음이야…” 세스크가 말했다. “그냥 슉 지나가버리더라, 이렇게.” 세스크는 한쪽 팔을 들고 반대쪽 손으로 들고 있는 팔 아래를 스치듯 통과해보였다.
“그러니까. 괴물 같은 자식.” 제라르가 말했다. 그 단어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욕지기와 동시에 감탄사가 나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모두가 그 새로 온 애 이야기만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왔단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건강상에 문제가 좀 있다고도 했다. 그 역시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꼭 혼자만 따로 앉았다. 제라르와 세스크는 아무래도 좀 재수없는 애 같다고 그 애를 단정지었다. 저 정도로 잘하니 당연히 건방지겠거니 싶기도 했다. 앞으로 녀석을 싫어하기로 다짐한 건 당연했다.
훈련 시간이면 그 애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팀이 딱히 나아지지도 않았다는 거였다. 녀석은 미친놈처럼 공만 쫓아다니기 바빴다. 팀플레이는 뒷전이고 무작정 골만 계속 넣으려고 드는데 같이 뛰는 이들 눈에 그 모습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몇몇 코치들 역시 그 애를 탐탁지 않아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하루는 한 코치가 제라르에게 일렀다. ‘쟤 한 번 혼 좀 내줘라.’ 그래서 제라르는 그렇게 했다. 리오넬의 발목을 노리고 불필요하게 거친 태클을 건 것이다. 녀석이 훈련 전에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는 이상한 습관이 없었더라면 아마 발목이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제라르는 먼저 일어나서 리오넬의 팔을 잡고 녀석을 일으켜세웠다. 마주친 그 애의 얼굴은 끔찍한 표정으로 물들어있었다.
“뭘 봐, 꼬맹아,” 제라르는 윙크했다. “상대팀이 실전에서 봐줄 것 같아? 이제 슬슬 익숙해져야 할걸. 너한테 달려드는 수비수들 쳐내주겠다고 내 포지션을 버릴 생각은 없거든.”
몇 달이 지났다. 그 때쯤 라 마시아에서 레오의 자리는 이미 어느정도 확실해져 있었다. 오늘은 이 스쿼드로 처음 주전이 되어 공식적인 경기를 치르는 날이었다. 락커룸에서 레오는 축 처져있었다. 꼭 옛날에 마크가 그랬던 것처럼. 제라르는 괜히 경기를 망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분위기를 풀 겸 레오에게 다가갔다.
“긴장되냐?” 제라르가 물었다.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나 싶었다. “뭐야, 말 못해? 사람 말을 무시하면 안 되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레오가 그제서야 입을 떼고 말했다. 제라르는 웃었다. “뭐라고?”
“됐어. 너 발음 이상하다.”
그리고 레오는 제라르를 바라보았다. 처음 태클을 걸었던 날 스쳤던 그 표정이었다. 커다란 갈색 눈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앳된 얼굴인데도 왠지 세월을 덧입은듯 무척이나 지쳐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살의 제라르는 처음으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경기는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시작한지 20분만에 네 골을 넣고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으니까. 이쯤 되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약팀은 상대해봤자 얻는 것도 없는데. 물론 그 꼬맹이 자식은 해트트릭을 하고 나머지 한 골마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상대팀 선수들은 밀리는 팀들이 으레 그렇듯- 서서히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경기는 과열됐고, 점차 거칠어졌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레오는 또 골을 노리고 달리고 있었다. 단독 돌파였다. 상대팀은 그를 막고자 공격수들을 포함한 모두가 라인을 내리고 수비 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레오는 그 중 절반을 드리블로 제치고 이어서 골대 바로 왼쪽까지 다다랐다. 대각선으로 공을 차 골대 구석을 노릴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였다. 상대팀 중 한 명이 분을 못 이기고 레오를 들이받은 것이다. 레오는 그대로 튕겨나가 골대에 얼굴을 처박혔다.
처음에는 솔직히 웃겼다. 만화도 아니고 뭐 저렇게 바보같이 넘어지냐. 낄낄 웃고 있는데 곧바로 세스크가 옆에서 제라르를 팔꿈치로 쿡 찔러왔다. 고개를 젓는 세스크의 얼굴이 온통 하얗게 질려있었다. 세스크가 현장으로 다가갔고 제라르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레오는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쓰러져있었다. 주변에는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제라르는 마지막으로 도착했으나 키가 큰 덕에 그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무도 쓰러져있는 레오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고, 경기장 역시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했다. 곧 한 스태프가 달려와 다들 저리 가라고 소리지르며 제라르를 밀쳤다. 이어서 의료진들이 몰려왔고 모두가 얌전히 물러났으나- 세스크와 제라르는 왠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레오는 미동도 없었다. 세스크가 손을 내밀어 손목을 꽉 잡아오는데 제라르는 그 손을 쳐내기는커녕 저리 가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의료진들이 레오를 돌려서 바로 눕혔다. 레오는 창백한 얼굴에 한쪽 뺨이 피가 번진듯 새빨갰고, 입만 살짝 벌린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반대쪽 뺨을 가볍게 몇 번 때렸다. 영겁 같은 순간이 지나갔다. 세스크가 하도 손을 잡아와서인지 점점 손끝이 저려왔다. 이윽고 레오가 몸을 움찔 떨자 누군가 그 아이를 들어올렸다. 레오는 정말 작았다. 코치 중 한 명이 레오를 안아들고 그대로 경기장을 떠났으니까. 들것도 필요 없었다.
휴식 시간이 됐다. 레오는 광대뼈가 부러졌지만 괜찮을 거라고 했다. 후반전은 특별한 일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비록 골은 더 넣지 못했지만, 전반과 같이 4대0 클린시트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여름에만 해도 이런 승리를 꿈꾸며 설렘과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는데. 제라르는 캄캄한 방에서 침대에 누워 조용히 천장을 응시했다. 이상하리만큼 아무 느낌도 없었다.
“괜찮았으면 좋겠다…” 세스크가 맞은편 침대에서 속삭였다. 자려고 누운지 벌써 두세 시간은 족히 지난 때였다. 제라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어쩌면 혼잣말같기도 했다.
“그러게,” 제라르가 대답했다. “나도.” 그 날 제라르는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지새웠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져나가는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해본 건 처음이었다.
레오는 일주일 뒤에 돌아왔다.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있었지만, 다른 데는 괜찮아보였다. 훈련할 때만 마스크를 끼면 된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세스크와 제라르는 조용히 레오 옆에 가서 앉았다.
“좀 어때?” 제라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말하고나니 좀 멍청해보였다.
“괜찮아.” 레오가 조용히 말했다. 눈은 앞에 놓인 접시에 고정돼있었다.
“진짜? 엄청 아파보이는데. 많이 놀랐겠다.”
레오는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예상하고 있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제라르가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녀석이 하는 말은 항상 수수께끼같았다.
“어떻게 보면 너한테 고마워해야겠지?” 레오가 제라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경고해줬잖아.”
“뭐?”
“저번에. 실전에서 상대팀이 엄청 거칠게 나올 거라며. 너는 나까지 신경 못 써준다고. 그러니까, 이럴 줄 알았어. 그래도 이겼잖아? 그럼 됐어. 그게 중요하지.” 젠장. 차라리 레오가 제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는게 나을 것 같았다.
제라르는 몇 주 동안이나 그 대화를 곱씹었다. 한편 세스크는 어쩐지 레오에게 좀 살가워졌다. 레오 역시 그런 세스크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눈치였다. 제라르는 그 날 점심 레오가 했던 말 중 정확히 어떤 게 계속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지 알 수 없었다. 슬픈 목소리거나 하다못해 지친 어조도 아니었는데. 그것보다 걔는 꼭… 이기기만 하면 뭐든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런 애는 처음이었다.
그건 어떤 계기가 됐다. 제라르의 노력 끝에 천천히 셋은 늘 함께 다니게 됐다. 다 나를 위한 거야. 제라르는 그렇게 되뇌었다. 레오는 이제 슈퍼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같이 붙어있으면 자신과 세스크 역시 유명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엉뚱한 말을 하는 웃긴 애였다. 제라르가 피파를 가르쳐주면 말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훈련 시간에는 뻔히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서도 작은 몸으로 제라르에게 어시스트를 해주곤 했다. 아니다. 그런건 다 필요없었다. 레오와 친하게 지내는 건 모두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다.
하루하루는 더디게 흘러도 시간은 빠르게만 지나갔다. 어느새 일주일 뒤면 여름 방학이었다. 끝내주는 시즌이었다.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으니까. 어디를 가든 코치들이나 다른 아이들이나 모두 그들 이야기뿐이었다. 덕분에 여름 방학 전 마지막 며칠은 내내 자유시간이었다. 제리와 세스크는 벤치에서 햇볕을 쬐며 노닥거렸으나 레오는 쉬는 시간에도 땡볕에서 공을 차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그만해. 더위 먹겠어!” 세스크가 물병을 이마에 대고 소리쳤다.
“응, 그래야지,” 레오는 공을 잔디 밖으로 뻥 차고 숨을 헐떡였다. 레오가 둘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가서 샤워 해야겠다. 한 15분? 그 동안은 여기 있을거지?”
“응.”
“알겠어,” 그리고 레오는 멀어졌다. 기다리는 와중에 어쩐지 잠이 들었던 것도 같았다.
세스크가 어깨를 흔들었다. “꺼져,” 제라르는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왜?”
“너도 더위 먹겠다. 이만 들어가자.”
“레오는?”
“진작에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 쐬고 있겠지. 빨리.”
제라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세스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 쪽으로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어서 제라르는 몸을 굳혔다. 머리가 이유 없이 어지러웠다. 더운데 너무 오래 밖에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왜 그래?”
“세스크. 샤워실 좀 같이 가자.”
“뭐?”
“샤워실 좀 가보자고.”
“왜?”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한 번만 들어줘.”
평소였다면 아마 세스크는 제라르에게 이상한 짓 좀 그만 하라고 핀잔을 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세스크는 제라르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몸을 돌렸다. 제라르가 뭔가 심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샤워실은 락커룸 안쪽에 있었다. 락커룸 앞까지 오자 문 너머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둘은 멈칫 서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다음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제라르는 곧바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락커룸은 둘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고 계속 떠들고 있는 한 녀석만이 시끄러웠다.
“얘 몸 좀 봐라, 미친. 삐쩍 말라선…” 녀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꼬맹아? 힘 빼, 너 맨날 맞는 헤로인 주사라도 가져다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섯 명이 모여서 레오를 가운데에 빙 둘러싸고 있었다. 얼어있는 제라르를 대신해서 세스크가 나섰다.
“뭐하는 거야?” 세스크가 물었다.
“아, 별거 아냐, 세스크. 그냥 이야기 중이었어.”
“레오, 무슨 일이야?”
“나… 난…”
“‘나-나-난…’ 발음도 웃긴게 이제 더듬기까지 하네? 미친. 코치님들이 오냐오냐라도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
“야. 그만해. 애 좀 내버려둬.”
“와, 무서워라. 힘 센 파브레가스가 우리 아기 레오를 구해주는거야? 귀엽기도 하지.”
“장난할 기분 아니다.”
“그냥 이야기 중이라고. 맞지, 레오?”
녀석은 그러고 어깨에 팔을 두르는 척 레오의 목덜미를 잡아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레오는 고개도 들어올리지 못하고 허리에 두른 수건만 꼭 잡고 있었다. 머리를 푹 숙인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제라르가 녀석들에게 저리 꺼지고 덩치에 맞는 놈이나 찾아보라고 대충 윽박지르고 말려던 참이었다. 불현듯 레오가 작게 고개를 들어 제라르를 올려다보았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한순간에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전부 꿈처럼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제라르는 문득 자신이 여태, 주변에 벌어진 일은 물론 저 스스로에게 닥친 일조차 항상 무신경하게 흘려보내기만 한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이 뒤집혔다. 온몸이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고, 누가 머리를 세게 친 듯 귀가 웅웅 울리는 것도 같았다.
제라르는 앞으로 성큼 나서서 녀석의 팔을 낚아챘다. 레오에게서 그 자식을 끌어내 확 밀치자 녀석은 뒤에 있던 락커에 쇳소리를 쨍 내며 머리를 부딪혔다. 모두가 얼어붙은 채로 둘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조용한 락커룸에 제라르의 숨소리만 생생했다.
“얘 건드리면 넌 뒤질 줄 알아.” 한참 있다가 제라르는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약간 오싹해질 정도로 딱딱한 목소리였다. 세스크는 눈을 크게 뜨고 눈썹을 들어올린 채 제라르를 보고 있었다. 제라르는 레오의 손을 잡고 이어서 세스크의 팔을 잡아당겨 락커룸에서 나왔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 제라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자신은 결국 첫째가 될 운명이었나보다. 그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샤워실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타고난 본능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
몇 년이 지났다. 그 일이 있고나서 라 마시아에서 제라르와 세스크, 레오 셋은 항상 같이 붙어다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흩어졌다. 레오는 바르셀로나에 남았다. 그 애는 이미 누가 봐도 너무 뛰어났다. 나머지 둘은 다른 곳에서 자신을 증명해야했다. 그러다 제라르 역시 바르셀로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제라르는 계약 조건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제라르는 레오와 다시 만났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온 첫 해. 예전과 달리 제라르는 더이상 크고 압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모든게 어색하고 어렵기만 했다. 아마 레오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제는 레오가 필요 이상으로 거친 태클을 받을 때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수도 없이 싸워주었다. 어른들이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항의를 하고 있으면 푸욜은 맨 앞에서 차가운 얼굴로 뼈있는 소리를 한 마디씩 상대팀에게 던지는 식이었다.
다음 해 제라르의 입지는 훨씬 더 불안해졌다. 이제 큰 키조차 장점이 되지 않았다. 크다 못해 거대하기까지 한 스웨덴 출신이 한 명 등장했기 때문이다. 허세라고 생각했던 태도 역시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즐라탄은 뼛속까지 공격수였지만, 제라르는 그가 수비수를 했으면 아마 더 뛰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즐라탄은 온 세상이 자신의 발 밑에 놓여있는 것마냥 굴었다. 가끔 제라르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즐라탄에게 감히 말을 붙이지 않았다. 감독인 펩만이 이따금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마저도 이브라히모비치의 시선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라르는 즐라탄을 닮고 싶어서 때때로 거울을 보고 표정이나 자세를 연습해보곤 했다. 두려울 게 없다는 듯 가슴을 쭉 내밀고, 어깨를 핀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섰다. 그리고 눈썹을 최대한 찌푸린 뒤 입꼬리는 비웃는 것처럼 뒤튼 다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확실히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꽤나 위협적이어 보였다. 하지만 그 매서운 눈빛은 아무리 해도 따라할 수가 없었다. 그런 눈빛은 원초적으로 거친 뭔가를 지니고 있어야만 나오는 것 같았다. 제라르가 살면서 본 거친 장면이라곤 라 마시아에서 있었던 사소한 괴롭힘 정도가 다였는데. 그래, 정말 애송이가 따로없었다.
즐라탄이 오고 몇 주 동안 제라르는 그와 말을 섞을만한 자리를 최대한 피해다녔다. 레오가 왜 그러냐고 묻자 제라르는 말했다. “무섭잖아. 눈빛만 가지고도 누구 한 명 죽일 기세야.” 그러자 레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라르를 바라보았다.
“즐라탄이? 무섭다고?” 레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냐. 즐라탄이 얼마나 상냥한데. 아직 잘 몰라서 그래.”
그래서 제라르는 노력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흠, 레오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애초에 즐라탄이 레오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 듯했다. 훈련 시간이면 즐라탄은 레오를 마치 눈이 부시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밀치고 걷어차다가도 레오를 대할 때만큼은 누가 보면 애가 설탕 과자라도 되는 것 마냥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레오 옆에서는 무척이나 자주 웃었다. 걔가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고, 그들은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팀을 상대하게 됐다. 이런 팀들이 으레 그렇듯 상대팀 선수들은 자신들이 너무 쉽게 밀리는 데에 화를 감추지 못하고 점점 거칠게 나오고 있었다. 점수차가 이미 꽤 벌어져있었기에 제라르는 그냥 제 포지션을 버리고 레오의 옆에 최대한 붙어서 뛰기 시작했다. 펩이 황당한지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상관없었다. 레오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물론 어느 정도 거리는 두기는 했다. 너무 가까이 있다가 괜히 뛰는 데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는 어느새 드리블로 수비수 두 명을 돌파하고 그대로 골대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골키퍼와의 일대일 기회였다. 제라르는 그쯤에서 레오를 따라가던 걸 멈췄다. 이런 상황에 레오라면 어차피 곧 골일 게 뻔했다. 그래서, 제라르는 방심한 사이 상대팀 수비수 한 명이 다가오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슬라이딩 태클이었다. 지저분하긴 했지만 다행히 치명적이진 않아보였다. 레오는 얼굴을 살짝 찡그린 채로 넘어진 몸을 일으키려고 바닥을 짚었다. 하지만 그 때, 방금 태클을 걸었던 놈이 발로 레오의 등을 밟았다. 실수였는지 일부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옛날 생각이 났다. 라 마시아에서 수십 번은 반복된 상황이었다. 레오가 다쳐서 쓰러져있으면 (지금은 여기 없는 세스크와 함께) 제라르는 미친듯이 상대팀 선수에게 달려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즐라탄이 먼저 달려와있었다.
즐라탄은 그 수비수 놈을 거칠게 밀친 뒤 허리를 숙여 바닥에 굴러 넘어져있는 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녀석은 불쌍하게도 잔뜩 공포에 찬 표정이었다. 제라르는 멈춰선 채로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씨발 얘한테 허튼짓 했다간,” 즐라탄이 으르렁거렸다.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즐라탄은 잡고 있던 유니폼을 놓았다. 녀석은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졌으나 즐라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레오에게 향했다. 레오는 아직도 엎드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라르는 멍하니 즐라탄의 험악한 표정이 바뀌는 순간을 눈에 담았다. 즐라탄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레오의 등을 쓸어준 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
어느 순간 제라르는 자신과 레오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레오가 저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레오를 지켜주는 데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좋았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사람들이 레오의 곁에 찾아왔다. 제라르보다 레오를 훨씬 더 사랑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제라르는 뒤로 밀려났고, 레오를 지켜야한다는 첫째로서의 책임감은 서서히 옅어져갔다. 수아레즈, 네이마르, 세스크 (얘는 어느 때엔가 다시 돌아왔다), 알바, 부시. 무슨 줄을 지어 나타나는 것 같았다.
“쿤,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제라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구에로는 락커를 거칠게 닫고 옷을 마구잡이로 던져대고 있었다. 발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걸을 때마다 쿵쿵 소리가 났지만 입은 꾹 다물고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클럽을 위한 결정인데 따라야지 별 수 있어? 알고 있잖아.”
세르히오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아, 그래. 넌 예외인가 보지. 교활한 자식. 정말 어이가 없다.”
“그럼 내가 뭐 어떻게 해야 했는데? 걔가 내 상황이었어도 분명 똑같이 했을 거라고.”
“아니, 피케,” 쿤이 말했다. “걔는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너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이용해 먹은 거고. 그 애가 평생 사랑해온 유일한 걸 바로 눈 앞에서 뺏어가? 걔가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건 안중에도 없지.”
“쿤, 이 쪽 업계가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
“쿤이라고 씨발 부르지 마!”
“이 바닥은 원래 힘든 법이야,” 제라르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쿤은 움직이던 걸 멈추고 제라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너는 정말 끔찍한 인간이야. 알고는 있지?” 그는 말했다. “걔가 얼마나 이 일로 상처를 받았는 지는 생각해봤어?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울기만 하더라.”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야.”
“그러시겠지.”
“직접 사과하고 싶어. 힘들게 할 생각은 정말 없었어.”
그 말에 쿤은 빈정대듯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고 제라르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압도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럴 일은,” 쿤이 입을 뗐다.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였다.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야. 걔한테 말 걸 생각 하지 마. 전화고 문자고, 망할,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그랬다간,” 쿤이 몸을 기울였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그리고 쿤은 문을 쾅 닫고 락커룸을 나갔다. 십수 년 전 라 마시아에서 샤워실 앞에 있었던 애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제라르는 생각했다.
***
“‘킬리안 음바페와 세르히오 라모스가 상대팀 선수를 위협해 경고를 받았다’…” 제라르가 뉴스 헤드라인을 읽으며 핸드폰에 대고 중얼거렸다. “씨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씨씨?”
“경기 안 봤어? 그 자식이 먼저 레오를 골대에다가 냅다 밀쳤다고! 존나 어이가 없어서.”
제라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심판이 보는 앞에서 협박을 해? 미친, 진짜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네가 그렇게 메시를 아낄 줄은 몰랐네. 마지막으로 경기장에서 봤을 때는 분명 걔 발목을 거의 두 동강 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뭐, 이제 같은 팀이잖아. 동료끼리는 서로 위해줘야지.” 세르히오가 말했다. “그리고 난 협박 안했어. 밀치기만 했지.”
“‘밀치기만’ 했다고,” 제라르가 말했다. “뉴스에서는 그렇게 말 안하던데.”
“아, 그건 킬리안이야.”
“뭐?” 제라르가 물었다. “뭐라고 했길래?”
“불어라 제대로는 못 들었는데, 대충 ‘그 사람한테 손 끝 하나라도 대면 후회하게 될 줄 알아라’, 뭐 그런 말이었어. 꽤 살벌했지.”
“말도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킬리안이? 걔 뭐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대냐?”
“무슨 소리야?”
“메시한테 월드컵이랑 골든볼을 뺏긴게 몇 달 되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정정당당하게 이긴 경기인걸. 뭐 그게 아니라도 걔를 싫어하긴 어렵지.”
“그래?” 제라르가 이죽이며 물었다.
“응. 너도 알ㄱ… 아니다.” 라모스는 말을 흐렸다.
“걔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 그런가 보네. 눈이 좀 그렁그렁하긴 해. 난 아무래도 오래 보면서 익숙해졌나봐.”
“아, 어떻게 해야 그래?” 세르히오가 외쳤다. “저번에 훈련하면서 파울 한 번 했다가 나를 얼마나 끔찍한 표정으로 보던지… 죄책감 때문에 삼일 동안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오더라.”
“그래,” 제라르가 말했다. “내 말이. 몇 년 있다 보면 적응될 거야. 나중에는 좀 짜증도 날 걸.”
통화는 길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내내 제라르는 뒤숭숭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또다시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첫째로서 남을 지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물론이고 도리어 그 자리를 버리다 못해 망쳐버렸으므로.
아,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메시는 어차피 저와 생일이 몇 달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그 날 밤 잠든 제라르는 라 마시아 시절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레오는 락커룸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제라르는 세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을 울었다. 세스크는 피해자인 척은 그만 하고 정신 차리라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알아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제라르는 인스타그램을 켰다. 메시와 세스크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친형제처럼 가까워보였다. 자신은 이미 그들로부터 천천히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나보다. 그래, 결국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법이었다.
제라르는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제라르는 누군가 경기장에서 메시에게 파울을 할 때마다 속이 울렁이는 걸 참았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당장이라도 야구 방망이를 들고 그 자식을 죽이러 어디든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가라앉혔다. 가끔 ‘메시’ 대신 ‘레오’라고 무심코 그를 부른 뒤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아 상대방이 의아해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샤키라와 별거한 날 메시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끊어버렸던 것도, 다 없었던 일이었다. 그 편이 더 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