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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다

Summary:

다른 사람들이 버키와 샘이 데이트하고 있다고 착각한 다섯 번, 데이트하고 있지 않다고 착각한 한 번.

Notes:

Work Text:

ONE

 

"너네 집 가는 길 아니잖아."

버키가 좌회전을 해야 할 곳에서 우회전을 한 지 5분 후 샘은 말했다.

"관찰력 좋네."

버키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속도를 줄이거나 돌아서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먼지 묻은 검은 군화가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며 따각따각 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전직 팔콘다우십니다."

"하나도 재미없거든, 벅. 우리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건데?"

"어디."

"어디가 뭐냐. 좀 자세하게 설명해 줄 생각 없냐?"

"음.... 없는데."

샘은 버키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래, 말하지 마라. 말하든 말든."

얼마 전 내린 비의 냄새가 배기가스 냄새와 맨홀에서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 같은 도시의 악취와 뒤섞이며 밤공기를 조금이나마 상쾌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골목에 놓인 쓰레기통에서 나는 냄새를 맡은 샘은 작게 욕을 하며 보폭을 넓혔다—모든 사람이 슈퍼 솔져만큼 빠르게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샘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을 한층 더 반짝이게 하는 더러운 물웅덩이 위로 늘어지는 버키의 그림자만 내려다보며 걷던 샘은 결국 갑자기 우뚝 멈춰 선 버키에게 부딪혀 나동그라질 뻔했다.

"야아."

버키가 빙글빙글 웃으며 가볍게 샘의 팔꿈치를 붙잡아 세웠다.

"걷다가 잠들었냐? 눈 나쁜 매는 또 처음 보네. 이대로 침대에 눕혀 줘? 혼자 눕기엔 너무 지쳐 보이는데."

"닥쳐. 네 몸 걱정이나 하세요, 할아버지."

눈앞의 식당 간판을 올려다본 샘은 휙 휘파람을 불었다.

"스시? 임무 끝난 기념으로 먹기엔 좀 비싼데, 벅."

어깨를 으쓱여 보인 버키가 대꾸했다.

"내 차례니까 내 마음이지."

뭐랄까, 일종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플래그 스매셔 일이 끝나고 파트너 미만 지인 이상의 관계가 된 샘과 버키는 임무를 마친 날에는 저녁을 같이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플래그 스매셔와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날부터였다. 그날 버키는 샘이 마지막 플래그 스매셔를 건지기를 기다리다가 말없이 샘의 아파트까지 따라왔었다. 그래 놓고는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단지 샘의 '연약한 일반인의 신체'가 무리한 활동을 견디지 못 하고 기절할까 봐, '길을 잘못 들까 봐' 따라온 거라고 주장했다.

결국 버키는 샘의 조그만 카우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가 샘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듣고는 제멋대로 샘부터 '가서 도와 줘'야겠다면서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고, 상황을 수긍하고 허겁지겁 볶음밥을 먹어 치우는 샘의 모습을 우울한 눈빛으로 빤히 지켜보았었다.

그 뒤로도 그는 샘을 꼬박꼬박 따라왔다. 샘의 임무에도, 샘의 집에도. 그러다 어느새 습관이 들어서는 자연스럽게 등을 맞대고 악당들을 물리친 다음 둘 중 하나의 집으로 가 멍들고 지친 몸을 추스르며 저녁을 배달시켜 먹게 되었다. 이번에도 같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저번에는 샘이 타이 커리를 주문했었으니 이번은 확실히 버키가 메뉴를 고를 차례가 맞았다. 그저 버키가 스시도 먹을 줄 안다는 데 놀랐을 뿐이다.

샘은 그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었고, 버키는 코웃음을 쳤다.

"스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음식이야? 그리고 어제 초밥 먹고 싶다고 징징거린 게 누군데."

버키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소리 오늘은 못 들어 주겠어."

갑자기 어제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날면서 초밥이 먹고 싶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슴이 빠듯해지는 느낌이었다. 버키가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었다.

"뭐야, 벅."

그는 버키의 오른팔을 툭 쳤다.

"세심한 거 뭔데!"

버키는 샘을 무시하고 문을 당겨 열었지만, 유리창으로 새어 나오는 오렌지빛 불빛에 비친 그의 입꼬리는 순간이나마 분명 올라가 있었다. 버키가 짜증스러운 척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닥치고 들어오기나 해."

늦은 저녁인 만큼 작은 식당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은 손님 몇 명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종이 맑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예쁘장한 젊은 여성이 바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이지스입니다! 금방 주문 도와—아! 그쪽이었네요."

"안녕하세요, 리아."

버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늘 나오는 줄은 몰랐는데요."

'리아'가 눈썹을 들어 보이며 가림막이 쳐진 주방의 입구로 나왔다.

"평일엔 다 나와요."

"오."

버키는 이제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랬군요."

"왜요. 설마 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냥—"

"장난이에요."

리아가 보조개가 패이도록 활짝 웃었다.

"그냥 요리 말고 다른 분이랑 오셨길래 좀 놀랐어요! 그때 그렇게 나가 놓고 다시 와서 놀라기도 했고요. 어쨌든 오랜만이에요. 편하신 데 앉으세요!"

버키는 그 말에 더 불안해진 눈치였다. 샘은, 피 냄새를 맡은 상어 같은 눈초리로 민망해하는 버키를 주시했다.

"안녕하세요, 리아."

그는 바로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전 샘입니다. 이 뚱한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시라니 유감이에요."

"리아예요."

리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말씀 안 하셔도 알아요, 캡틴 아메리카. 저도 악수하고 싶은데, 지금 손에 단촛물이 묻어서요."

"아, 네, 괜찮습니다. 반가워요. 벅이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긴 하고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슬슬 걱정이 되던 참이었거든요."

버키가 슬슬 샘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샘은 어깨로 버키의 어깨를 툭 쳤다.

"뭔데, 긴장 풀어. 네 친구가 내 친구지, 어? 그냥 나 말고 다른 친구도 있다니 신기해서 그래!"

"네가 그러니까 더 부담스럽다, 샘."

버키는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굳이 샘의 의자를 빼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버키의 그런 행동에 조금 당황했었다. 같은 남자끼리 의자를 빼 주고, 문을 열어 주고, 무거운 물건은 들어 주는 그런 거 말이다. 처음 그 사실을 인식하고서 이틀쯤 후에 그러는 이유가 뭐냐고 버키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버키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몰라, 샘. 버키는 그렇게 말했었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원래 내가 자주 했던 행동인 거겠지. 굳이 억지로 그만둬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샘은 버키의 그런 행동이 1940년대에는 예의 바른 신사의 기본 소양이었나 보다 하고는 자신이 익숙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하고 싶으면 하라지, 뭐.)

샘이 아무 말 없이 버키가 빼 준 의자에 앉는 것을 본 리아는 잠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한 갈색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리아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

"지금 메뉴판 가져다 드릴게요."

그로부터 5분이 지났을 때 샘과 버키는 메뉴판 위로 머리를 맞대고는 무엇을 주문할지 투닥이고 있었다. 팔 밑의 카운터는 닦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물기로 끈적였다. 샘은 짙은 갈색의 나무판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평소보다 한 접시 정도만 더 먹기로 결정했다.

"나 방어 먹고 싶은데—"

"아, 제일 비싼 거잖아! 안 돼."

"그래도 맛있잖아. 안 먹긴 좀 그래."

"내 지갑에 무슨 원수를 진 거야. 네가 안 낸다고 이러기야?"

"어, 왜? 밀린 연금 좀 쓰고 살아야지."

샘은 흥분으로 발개진 버키의 얼굴에 대고 활짝 웃어 보였다. 하, 어림도 없지. 그 허연 피부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 나이에 그만큼 돈 모아 놓고 안 쓰면 스크루지 꼴 난다? 어? 이 할아버지야."

버키가 몸을 늘어뜨렸다.

"아, 그러면 그렇지. 너는 내 돈만 원하지."

"아냐, 그건 자의식 과잉이야, 버카루. 내가 원하는 건 이 방어초밥뿐이거든. 아, 쪼잔하게 그러지 마, 어? 은행에 쌓아 놓은 달러로 캘리포니아 롤 같은 것만 사 먹을 거야?"

버키가 메뉴판을 집어 들고 샘에게 휘둘렀다. 코팅된 종이가 파락파락 허공을 갈랐다.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 그래, 마음대로 시켜 먹어라. 이래 놓고 남기기만 해 봐."

"그런 말할 거면 뺏어 먹지나 말든가. 뱃속에 블랙홀이 들었지, 아주."

리아가 타이밍을 맞춰 닦던 잔을 내려놓고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서비스직답게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표정이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이 재밌어 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샘은 그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들었으리라 짐작했다. 사실 못 듣기가 더 힘들긴 했을 것이다. 그들만큼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손님이 없었다.

"그래서요, 리아."

샘은 주문을 받아 적고 있는 리아에게 물었다.

"귀찮게 하고 싶진 않지만요, 그냥 궁금해서요—여기 버키랑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정적이 흘렀다. 리아는 들고 있던 주문서를 만지작거리다가 약간 미안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사실 데이트 한 번 했었어요."

깜짝 놀란 샘은 켁켁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리아가 황급히 덧붙였다.

"근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뭐 어떤 사이도 아니에요. 보드게임 잘 하다가 갑자기 나가 버린 남자한테는 관심 없네요. 아, 딱히 찔리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버키."

샘은 더 크게 웃었다.

버키가 몸을 움츠렸다.

"그땐 정말 죄송—"

"아뇨, 괜찮아요. 이제 나한테 별로 관심 없던 이유도 알았고요."

그렇게 말하는 리아의 시선은 샘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샘은 리아가 뭘 보고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딱히 별건 없었다. 그냥 들어올 때 봤던 그 손님들만 보였다. 버키의 얼굴도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 괜히 샘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리아의 의미심장한 시선은 버키의 옆얼굴로 옮겨 가 있었다.

"아무튼요."

리아가 재빨리 눈을 돌려 샘과 시선을 맞췄다.

"그럼 저는 주방에 주문 넣으러 갈게요. 배고프실 텐데 오래 기다리시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말한 리아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와, 씨."

샘은 버키는 간지럽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버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버키! 너 평소 매너는 어쨌길래 리아가 저러는 거야!"

"평소 매너?"

"네가 아무한테나 다 해 주는 옛날 매너!"

버키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왜?"

"아무한테나 다 해 주는 거 아니야."

버키는 그렇게만 말하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 리아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들고 올 때까지도 버키는 벽만 노려보고 있었다.

 

***

 

식사가 끝날 때쯤 샘은 자신의 몸의 70%가 물이 아니라 스시로 구성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버키는 샘이 남긴 스시를 가져가 먹으면서 다 못 먹을 줄 알았다고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버키가 계산을 하는 사이 화장실에 갔던 샘은 나지막한 대화 소리를 듣고 복도에 멈춰 섰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됐던 건데요."

"나중에 문자라도 보내 주지 그랬어요."

리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질문을 너무 많이 했었죠. 그렇게 나가기 전에요, 제가 좀 너무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던 것 같아요. 선을 넘었던 거라면 죄송해요. 그럼 우리 이제 서로 아무 감정 없는 거죠?"

"전—네. 고마워요, 리아."

"네. 아무튼 축하해요. 좋아 보이던데요, 잘돼서 다행이에요. 그런데요, 진심으로 제가 저 메인 코스로 가는 애피타이저였던 거예요? 무슨 코스가 그래요? 취향 한번 스펙타클하네요."

"아."

버키가 당황한 듯한 소리를 냈다.

"리아, 제가 그러려고—"

샘은 버키가 더 말하기 전에 홀로 들어갔다. 더 듣고 싶긴 해도, 오늘은 충분히 버키를 괴롭혔으니 이쯤에서 리아가 버키를 놀리는 걸 끊어 주기로 했다. 뭐 때문에 버키가 놀림을 당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갈 때도 버키는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리아가 웃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TWO

 

샘은 버키의 습관을 잘 알았다. 버키의 길고 우울한 침묵 정도는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임무가 끝난 후 맞은편의 긴 의자에 앉은 버키가 평소처럼 아무 말도 없이 눈싸움을 걸어 왔을 때도 샘은 기꺼이 응했다.

사실 눈싸움 따위에나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쑤시는 어깨도 좀 덜 쑤시고, 한 시간은 더 남아 있는 비행 시간도 좀 짧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임무가 특별히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 주에는 지쳤다.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먼지와 땀과 멍 범벅이 되지 않고 보낼 수는 없는 걸까? ...버키의 눈동자에도 비슷한 생각이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글렀지. 샘은 눈싸움에나 계속 집중하기로 했다.

비행기가 왼쪽으로 기울며 안전망을 고정하는 금속 고리가 달각달각 흔들렸다. 샘은 몸을 앞으로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얹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버키는 그를 마주 노려보며 바닥을 발로 탁탁 두드렸다.

샘의 눈에는 이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버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망할 슈퍼 솔져 같으니라고. 눈깔도 강화됐다 이거지.

샘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고—

"저 왔습니다!"

토레스가 발랄하게 그들을 부르며 조종석에 연결되어 있는 사다리를 내려왔다.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운행 세팅 완료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도 잠깐 여기 앉아 있고 싶었지 말입니다. 샘, 저 옆에 앉아도 됩니까?"

샘은 시선을 버키에게 고정한 채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너무 오래 눈을 감지 않아 눈알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경쾌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토레스가 샘의 바로 옆에 앉았다. 군화가 서로 부딪혔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버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

샘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목소리가 비행기의 금속 벽을 울렸다. 토레스는 간발의 차로 샘의 어깨를 피할 수 있었다.

"너 깜빡였어! 오늘은 내가 이긴 거다, 버카루! 왔냐, 토레스."

"넵, 샘."

토레스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오늘 대단하셨지 말입니다!"

"아아, 고맙다—"

"안 대단한 날도 있나."

"어...."

샘은 눈을 깜빡이며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치켜든 버키를 쳐다보았다.

"그러냐? 고맙다, 벅. 이야, 저 사이보그가 칭찬을 해 주는 날이 내 생전에 다 오네."

버키는 시선을 돌린 채 팔짱을 꼈다.

"뭐. 그렇게 이상해? 뭘 쳐다봐?"

"이상하단 소리는 안 했어."

"간접적으로 했잖아."

"아, 뭐, 그랬던가? 근데 네가 말도 안 하고 사는 게 뭐 내 잘못인가."

"그럼  잘못이냐?"

"그냥 네가 언제 칭찬한 적이 있었냐고! 그래서 좀 놀랐다고!"

"놀라지 말라고! 그냥 사실만 말한 거라고!"

"알겠다고! 고맙다고!"

"그래!"

그리고 쭉 정적이었다. 그들은 그대로 앉아서 맞은편에 앉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토레스는 어색하게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초조한 시선이 샘과 버키를 번갈아 오간다. 편하게 자세를 바꿔 벽에 등을 기대려던 샘은 갑작스레 어깨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아무래도 얼굴에 티가 난 것 같았다. 버키의 표정이 순식간에 짜증에서 걱정으로 바뀌었다.

"왜 그래?"

"아니야."

빠르게 대답한 샘은 어깨를 앞뒤로 돌렸다.

"그냥 좀 당겨서."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아니면 우리가 비킬까?"

버키가 '우리'에 묘하게 힘을 주어 발음하며 토레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샘은 인상을 썼다. 아니, 엔진 소리가 좀 시끄럽긴 한데, 저렇게 소리를 지를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근데 왜 소리를 질러? 너랑 우리랑 뭐 몇 미터 떨어져 있다고."

푹 한숨을 내쉰 버키가 손을 풀기 시작했다.

"그냥 좀 와라."

그래서 샘은 자리를 옮겼다. 버키 반즈의 친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해야겠지. 비브라늄암은 굉장한 마사지기였다.

"좀 더."

샘이 버키에게 등을 돌리고 옆에 앉자 버키가 말했다. 샘은 몇 센티미터 더 버키 쪽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됐어. 아픈 데가 어디야?"

"왼쪽."

"응."

토레스는 버키가 샘의 어깨를 주물러 주는 것을 꽤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지켜보았지만, 얼마 안 가 마사지 구경이 지루해진 것 같았다. 3분쯤 후부터 토레스는 다시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까는 버키 말씀이 맞았지 말입니다."

토레스는 자기 이름을 막 불렀다고 노려보는 버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샘, 샘은 진짜 대단합니다. 저 고등학교 때 샘 팬이 엄청 많았던 거 아십니까?"

"그러냐?"

버키의 능숙한 손길에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흥분되는 동시에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샘은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거의 항상 이렇게 고개를 숙였다. 버키가 주물러 줄 때마다 매번 이랬다. 왜일까? 아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피곤해 죽겠는 몸으로 끝내주는 마사지를 받는 와중이어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처럼 좋았다. 어벤져스에 합류한 지 10년 가까이 됐는데도 절대로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 정도였어?"

"옙! 어벤져스는 맨날 TV에 나왔지 않습니까? 저희한테는 그게 유행이었습니다. 아이언맨 팬인 애들이랑 캡 팬들이랑은 엄청 싸웠었지 말입니다. 저도 좀, 유행 따라 갔던 겁니다."

토레스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맞혀 볼까."

버키가 빈정거렸다.

"너 팔콘 팬클럽 회장이었지? 지금은 캡틴 팬클럽 회장일 테고."

"맞습니다!"

토레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샘의 어깨를 주무르는 버키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버키가 소리 죽여 속삭였다.

"나 참. 퍽이나 모르겠다."

샘은 손을 뒤로 뻗어 버키의 손등을 찰싹 쳤다.

"야, 내 인기 의심하지 마라? 어? 토레스, 너 취향 좋을 줄 진작 알았다!"

"네, 사실 저 17살 때는 샘을 엄청 짝사랑했었습니다!"

토레스는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제가 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제 토레스는 그냥 이대로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퍽 웃음이 터진 샘은 몸이 뒤로 넘어갈 지경으로 웃어 댔다. 갑자기 샘을 받아 안게 된 버키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웃기고 있네!"

"그렇게 크게 말씀드리려던 건 아니었지 말입니다."

토레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냐? 너 설마 방에 내 포스터 도배해 놓고 그랬어?"

"딱 두 장 붙였었지 말입니다...."

"미친다."

샘은 킬킬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버키의 딱딱하게 경직된 가슴 근육이 뒤통수를 감쌌다.

"딱 두 장 붙였었대! 토레스, 이게 널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야, 영광이다, 영광! 진짜로! 그래, 내가 좀 잘났긴 해? 어? 윌슨 가문은 대대로 미남미녀만 있었다고. 안 반하기가 더 힘들지. 인정하냐, 벅?"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말을 들은 토레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샘의 어깨 너머를 쳐다본 토레스가 웃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샘의 몸을 감싸안다시피 하고 있는 버키의 팔로 시선을 내렸다.

"그게 아니고요, 제가 방금 저도 모르게 좀 이상한 말씀을 드린 거 같은데 저는 절대 그런—저는, 저도 지금 만나는 사람 있지 말입니다—"

저도?

"—그리고 어렸을 때였습니다! 고등학생 때였지 말입니다! 아니 저는, 저는 지금도 샘이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토레스."

토레스가 고백한 후 처음으로 버키가 입을 열어 말했다. 목소리가 꼭 변비에 걸린 것 같았다.

"그만하면 된 것 같다."

"네.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 토레스가 겸연쩍어 하며 두 손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샘. 죄송합니다, 버키."

샘은 3초 정도 얘가 왜 버키한테까지 사과를 하나 생각하다가, 다시 뭉친 근육을 주무르기 시작한 비브라늄암에 도로 흐물흐물해졌다. 머릿속에 남아 있던 생각도 같이 녹아 버렸다. 그는 크게 신음을 내뱉었다.

"흐, 거기. 고맙다, 벅. 너밖에 없다."

"응."

버키가 의기양양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계속해서 어깨를 주물러 주는 금속 손가락에서 시원한 냉기가 전해져 온다.

"나밖에 없지."

 

 

 

 

THREE

 

샘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올 거면 말하고 오라고 했지, 언제 나 나간 사이에 문 따고 들어와 있으랬냐?"

샘의 카우치에 늘어져서 샘의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던 버키가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말은 했고 문 따지 말라고도 안 했잖아. 그나저나 보안 강화해야겠는데. 딱 10초 걸리더라."

샘은 그를 노려보았다. 버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빨리 들어와서 문 닫아. 벌레 들어오잖아."

"슈퍼 스파이 하나 못 막는 평범한 아파트에 살아서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샘은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버키가 시키는 대로 현관으로 들어가 문을 발로 차 닫았다—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지. 그도 안다. 하지만 빈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샘은 현관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묵직한 군화 두 짝도 차례대로 걷어차 버렸다. 군화는 데굴데굴 굴러가 샘이 각 맞춰 벗어 놓은 스니커즈 옆에 안착했다.

"벅,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 으라고 몇 번을 말해?"

"미안."

버키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샘이 한가득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가져갔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샘이 장 봐 온 것들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농담 아니니까 자꾸 흘려듣지 말고. 캡틴 아메리카가 평범한 아파트에 살면 안 된다고 전부터 말했잖아. 누가 침입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너처럼?"

"말뜻 알잖아."

"내가 보안이 왜 필요해. 와칸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시는 화이트 울프가—"

"—너 그거 하지 말랬지—"

"고귀하신 화이트 울프가 매일매일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면서 무료 보안 평가에 밀착 경호까지 해 주잖아."

"매일매일 오진 않거든."

버키는 짜증스레 받아쳤지만,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움직이며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두유는 냉장고 두 번째 선반 왼쪽에, 흑설탕은 가스레인지 옆 선반 제일 위에, 유기농 녹차 티백은 그 밑의 서랍 안에.

"어어."

샘은 버키가 빈 장바구니를 접어 싱크대 밑의 비닐봉투를 모아 두는 곳에 넣는 것을 보며 말했다.

"너 지금 존나 우리 집 처음 온 것 같아."

"닥쳐."

이제 카운터 위에는 빨강 하양 줄무늬의 팝콘 봉지만이 남아 있었다. 당근과 샐러리 다발 아래에 파묻어 놓았던 것이었다. 팝콘 봉지를 집어 드는 버키의 표정이 기대감에 차 있길래 샘은 코웃음을 쳐 주었다.

"네가 돌려라."

"네가 샀잖아."

"영화 보겠다고 문 따고 침입한 주제에 팝콘 하나 못 돌려 줘?"

샘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머릿속으로는 '버키가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드라마 리스트'에서 아직 보지 않은 것들을 훑어 보는 중이었다. 지난 두 달 간 본 게 꽤 많았다. 샘의 기억이 맞다면 블랙 미러를 절반쯤 보던 중이었던 것 같다.

거실 쪽으로 세 발짝을 걸어갔던 샘은 딱 멈춰 서서 뒤로 홱 돌았다.

"아, 맞다—"

벌써 전자레인지의 터치스크린을 조작하고 있던 버키가 대충 손을 저어 보였다.

"팝콘 버튼 누르지 말고 그냥 돌리라고. 알아. 팝콘 돌릴 때마다 그 소리야."

그리고 조명을 약하게 켜 놓은 거실에서 카우치 팔걸이에 반쯤 기대 넷플릭스의 마이 리스트를 쭉쭉 내리던 샘은 벨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커피 테이블에 둔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샤론이었다.

샘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윌슨입니다."

"안녕, 캡."

샤론이 작게 속삭였다.

"큰일로 전화한 건 아니에요. 근데 새로운 보고가 들어와서 알려 주려고 전화—"

전자레인지가 띵 소리를 냈다. 곧이어 버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샘! 팝콘 다 됐어! 소금 뿌려 말아?"

"...아. 샘, 혹시 지금—"

"윈터 솔져 놈이 영화 보자고 쳐들어와서요."

샘은 조금 급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전화하는 데는 문제 없어요. 우리가 나가야 하는 일이면 10분 안에—"

"아."

샤론이 톤이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샘은 그 목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샤론이 못되게 굴 때 내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때의 희생양은 대개 샘이었다.

"그런 거라면! 전혀 급한 용건이 아니에요. 이제 바빠질 텐데 방해 안 할게요."

"예?"

어이가 없어서 손에 힘이 풀렸다. 샘은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샤론, 왜 갑자기 딴소리를—"

"걱정 말고요, 캡! 내일 다시 전화할게요. 좋은 시간 보내시고요!"

뚝. 전화가 끊겼다.

샘은 멍하니 검게 변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얼빠진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방금 뭐였지? 바빠질 거라는 게 뭔 소리야?

"샘."

버키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세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샘의 얼굴을 본 버키가 표정을 굳혔다. 걱정할 때면 짓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위험 요소를 찾아 방 안을 훑었다. 

"무슨 일이지?"

"아냐."

샘은 얼빠진 상태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대폰은 다시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냥 샤론이 또 이상하게 혼자만 아는 소리를 하길래."

버키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평소처럼. 그래, 어쨌든 소금을 넣을까, 버터를 넣을까?"

"둘 다 넣어."

버키는 둘 다 넣는 걸 좋아했다. 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둘 다 넣지 말든가. 할아버지 입맛에 내가 맞춰 드려야지."

그 말에 버키가 지은 표정을 본 샘은 웃음을 터트렸다.

 

***

 

넷플릭스를 튼 지 20분쯤 후 샘은 갈증을 느끼고 카우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물 좀."

바깥의 무더위를 막기 위해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설정해 놓았었다. 샘은 맨팔에 닿는 찬바람을 느끼고 몸을 약간 떨었다.

"너도 뭐 마실래?"

버키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도 물. 고마워, 자기야."

샘은 삐걱삐걱 부엌으로 걸어갔다.

버키는 최근부터 그놈의 자기야 소리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지스에서 저녁을 먹고 나온 후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버키, 옛날에 연애를 어떻게 했었길래 저렇게 예쁜 여자분이랑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제대로 못 한 거야, 라고 했었다. 버키는 그 말에 40년대에 내가 얼마나 잘나갔었는데, 뭐 그런 식으로 답했다. 그래서 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여자 친구들한테 막 여보, 자기, 이런 거도 했었냐? 40년대엔 그랬었다며, 하하, 지금 해 보면 안 되냐

그래. 생각해 보면 샘이 자초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처음 한두 번은 자신이 잘못 들었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젠 적당히 부정하고 넘길 수 있는 횟수를 넘어섰다.... 잘못 듣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버키가 뜬금없이 사람한테 '작아'라고 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키가 뭘 노리고 그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경을 긁으려는 목적일까? 뭐 자기만 아는 포인트가 있는 건가?

아니면—

 

***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아주 간단한 설명이 있긴 했다. 가벼운 스킨십과 여보니 자기니 하는 소리들. 그 눈빛.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치는 눈웃음과 반짝이는 눈동자. 샘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버키가 짓는 부드러운 미소.

그게—

버키는—

 

***

 

아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방패와 슈트와 버키. 그의 어깨에는 너무 많은 것이 얹혀 있었다.

아무것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

 

"여깄습니다."

샘은 버키 앞에 버키 전용의 머그를 내려놓았다.

"부디 갈증을 푸시길 바랍니다, 주인님."

버키는 코웃음을 쳤다.

"뭐야. 내가 언제 시켰어? 부탁했지."

"손발 멀쩡한 놈이 부탁하면 그게 시키는 거지."

버키는 샘을 걷어찼지만, 힘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발가락이 샘의 종아리를 스치기만 하는 정도였다. 근력의 1퍼센트도 사용하지 않은 정도. 사실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언제는 너도 마시겠냐며."

"사람이 사양할 줄도 알아야지."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

샘은 눈만 굴려 주고는 도로 카우치에 앉았다. 버키와 다리가 서로 5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그의 자리였다. 샘은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버키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추워?"

"어?"

"아까 떨었잖아. 추워?"

"됐어, 벅. 그냥 에어컨 때문에 잠깐 그랬어."

"그러게 내가 너무 세게 트는 거 아니냐고 했지."

버키는 잔소리를 하면서 샘에게 몸을 붙였다. 갑자기 그들 사이의 플라토닉 구역이 사라졌다. 어깨가 버키의 어깨와 닿고 허벅지가 버키의 허벅지와 닿았다.

샘은 몸을 굳혔다.

"왜 이래, 벅?"

"난 체온 높거든. 더 붙어 봐."

샘은 그대로 몸을 굳히고 있었다. 버키가 한숨을 내쉬며 더 바짝 몸을 붙이고 왼팔로 샘의 어깨를 감쌌다.

"붙어 보라니까."

한심하다는 듯 내뱉은 버키가 샘의 팔을 오른손으로 문질렀다.

"아, 차갑잖아. 긴팔 입지 그랬어."

"이제 여름인데 뭐."

샘은 간신히 대꾸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TV에서는 무언가, 뭐 액션 신과 비명 소리와 욕설 같은 게 나오고 있었지만, 사실 스티브 로저스의 엉덩이가 국가 연주 중의 국기처럼 화면을 꽉 채웠더라도 샘은 그걸 인식하지 못 했을 거였다. 피부에 닿는 버키의 손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서, TV 화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으로 푸르스름하게 물든 버키의 옆얼굴이 너무 날카로운 선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조그만 카우치에 푹 기대 앉은 버키의 모습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냥 샘과 보내는 평소대로의 저녁인 것처럼. 이게 보통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보통이 맞았다. 속에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샘은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이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한 지 벌써 몇 주째였다.

"좀 나아졌어?"

버키가 물었다. 나직하고 부드럽기만 한 목소리였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어."

"내 말이 맞잖아, 자기야."

깊게 생각하지 말자. 샘은 어깨를 감싸는 홧홧한 무게를 느끼며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버키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비몽사몽한 채 이불에 감싸지며 생각했다.

뺨에 부드럽게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쉿."

버키가 어둠 속에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야, 여보. 나 카우치에서 잘게."

그리고 발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샘은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샘은 다시 생각했다. 또 다시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속이 훅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마치 자유낙하를 하는 순간처럼.

 

 

 

 

FOUR

 

열린 냉장고에서 쏟아져 나오는 냉기는 무더운 루이지애나의 여름 속에서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달걀과 우유를 집어넣으면서 고개도 함께 처박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러는 대신 샘은 어젯밤 파티에서 남은 검보 뒤에 숨겨 놓은 6개들이 맥주캔을 꺼냈다.

시원한 냉장고 속에서 머리를 꺼내고 뒤로 돌아선 샘은 사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샘은 너무 놀라서 맥주캔을 바닥에 던져 버릴 뻔했다.

"악! 깜짝아."

샘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누나, 몰래 다가오지 좀 말라고!"

사라는 시큰둥하게 뒤로 돌아섰다. 샘은 사라의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었다.

사라는 매번 기척 없이 다가와 그를 놀래고는 했다. 어렸을 때 샘은 사라에게 방울을 달아 놔야 한다는 소리까지 했었다. 물론 계속 그런 농담을 했다가는 한 대 얻어맞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은 버키에게만 그런 소리를 했다.

샘은 보란 듯이 옆구리를 꽉 움켜쥐었다. 사라는 부엌 카운터의 키 홀더에 열쇠를 툭 던져 놓고는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한테는 언제 말해 줄 생각이야?"

"뭘?"

샘은 약간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뭔 소린지 모르겠고, 언제 왔어? 트럭 소리 못 들었는데."

"음."

사라가 팔짱을 꼈다.

"방금. 지가 딴 데 정신 팔고 있느라 못 들은 거면서."

그리고 사라는 입을 다물고는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였다,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내 말뜻 아는 거 아니까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샘은 얼굴을 찡그렸다. 6개들이 맥주캔의 플라스틱 고리가 손가락을 아프게 파고들고 있었다. 맥주캔을 카운터에 올려놓은 그는 시원한 냉기가 남은 손을 털었다.

"왜 또 시비래. 맥주 좀 가지러 왔어."

"진짜 이럴래?"

사라가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일단, 샘! 일단 너 와서 나도 좋긴 한데, 손님을 데려올 거면 미리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집 비운 게 딱 3시간이었거든? 딱 3시간 나갔다 왔고 너한테서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집에 와서 차 세우자마자 애들이 뛰어와서는 '버키 아저씨'가 또 왔다고 하잖아! 내가 얼마나 놀랐겠냐고!"

샘은 몸을 움찔 떨었다. 사라의 미술 숙제를 망가뜨려서 혼나던 8살 때처럼 손을 티셔츠 속에 숨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알겠어, 미안해. 말 안 해서 미안. 근데 걔도 나한테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새뮤얼 토머스 윌슨, 내 말 안 끝났다. 두 번째로—이게 더 중요한 문제 같은데—도대체 언제쯤 나한테도 걔랑 잘됐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어? 뭐 그래, 예상은 하고 있긴 했어. 오래 걸릴 줄 알았다고. 근데 하나밖에 없는 누나한테까지 숨길 일이야? 드디어 남자 친구가 생겼으면 바로 말을—"

"뭐, 뭐야, 뭐래, 뭐?"

"네 남자 친구. 네 애인. 너만 졸졸 쫓아다니는 바닐라 와퍼. 모르는 척하지 말고, 샘. 징그러워."

"내가 언제—걔가 왜 내 남자 친구야! 아니, 예상했다는 건 뭔 소리야?"

"뭘 나한테 숨기려고 해."

사라가 코웃음을 쳤다. 샘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사라는 푹 숨을 내쉬고는 컵을 꺼내 냉장고에 넣어 놓았던 아이스티를 따랐다.

"야, 일단, 너희가 배 고칠 때 나도 있었거든? 내 눈 멀쩡하거든. 그리고 방금—캐스랑 AJ가 뭐라고 말했냐면, 정확히 이렇게 말하더라. '버키 아저씨가 삼촌한테 자기야라고 했어요. 볼 만지면서 키스할 것처럼 쳐다봤어요.'"

샘은 사레가 들렸다.

"얼굴에 뭐 묻은 거 닦아 준 거야! 그리고 걔가 자꾸 자기 자기 하는 건 그냥—우리끼리 장난하는 거지! 아니 그리고 애들은 왜 사람 말을 엿듣고 돌아다니는 거야—"

"애들이잖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사라가 컵에 입을 댄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샘, 동생아, 축하한다고. 그런 걸 나한테 숨길 필요 없어. 그냥 집에 데려올 때는 말만 미리 해 달라는 거잖아."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애초에—우리 배 고치는 거 보러 왔을 때 걔가 누나한테 작업 걸던 건 생각 안 나? 그래서 내가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어제도 계속—"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그만하라고 하냐? 네가 이 집안 가장이세요? 어?"

"아니, 누나, 내가 언제...."

사라가 한 발짝 다가섰다.

"저기 아래 사는 마리아한테 차였을 때 너 우는 거 달래 줬던 거 누구야? 그 피어싱 많이 했던, 벤자민이랑 데이트한다고 몰래 나갔다가 외출금지 당했을 때 너 감싸 줬던 건 누구고?"

"누나."

"그래. 아니, 샘, 네 남자 친구가 나한테 하루이틀 플러팅을 좀 하긴 했지! 나도 걔 취향일 테니까! 샘, 내 눈 봐."

"누나—"

"말 끊지 말랬지. 눈이 있으면 걔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 알 거 아냐. 장난은 그게 장난이었고! 걔가 배 고쳐 준 건 너 때문이잖아!"

사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깔고 브루클린 사투리를 흉내 냈다.

"새미, 그거 내가 들어 줄게. 너는 내 근육만 보고 있어. 새미, 잠깐 좀 닿을게—배가 너무 좁네. 좀 더듬어도 신경 쓰지 마. 새미, 자기야, 그거 내가 조여 줄게. 너만 좋다면 너도 내가 조—"

"걔는 그렇게 말 안 하거든."

샘은 사라의 말을 끊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샘도 그날에 대해서 약간 자주 생각하긴 했었지만, 어쨌든 그건 자신의 일이었다. 

"알겠어. 알겠는데, 누나, 우리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사라가 다시 원래대로의 목소리로 말했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럼 뭔데."

"그냥 친구라고."

"그냥 친구라서 걔가 네 집에 살다시피 하니?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너 나랑 영상통화할 때마다 걔도 인사하잖아."

"걔가 혼자서는 잠을 잘 못 자."

사라가 눈을 꾹 감았다.

"제발 진짜...."

샘은 초조하게 카운터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심장이 쾅쾅 뛰었다. 맥주캔에는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버키가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을 너무 끌었다.

"개소리 좀 그만하고, 샘. 너도 걔 좋아하잖아. 걔가 어제 케이크 하나 사 왔다고 너 어떻게 했냐? 하루종일 걔한테만 들러붙어 있었잖아! 걔는 더 심해! 너 쫓아다니는 것만 보면 뭔 강아지 같아. 걔가 너 보는 눈빛은 어떤지 알아? 난 네가 걔한테 달이라도 따다 준 줄 알았다."

"아니—"

"그리고 그 자기야 소리는! 야, 그건 뭔데, 어?"

그러니까 그건 그냥 우리끼리 장난친 거라고. 샘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재밌잖아, 어? 나는 걔의 자기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걔가 나를 자기라고 부르는 게 웃긴 거라고. 진짜가 아니니까.

"샘."

사라가 굳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몰라. 누나, 근데 진짜 그런 게 아니야—걔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걔는 내가 더 잘 안다고. 준비되기 전에는 강요 안 할 거야."

"샘, 내가 걔는 잘 몰라도 너는 알거든. 우리가 서로 다른 걸 본 것도 아니잖아. 왜 인정을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이게 그렇게 빙빙 돌아갈 문제야?"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샘은 볼 안쪽을 잘근잘근 세게 씹었다. 망치고 싶지 않아걔는 잃고 싶지 않아.

사라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말이라도 좀 해 봐. 뭐가 문제라서 그래?"

샘은 시선을 돌렸다.

 

***

 

"샘. 라일리 때문에 그래?"

 

***

 

아프가니스탄에서 루이지애나로 돌아오고 나서 샘은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며 보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밤새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잠에서 깨면 혀부터 깨물어 비명을 참았다.

한 달쯤 후 사라는 불 꺼진 부엌에서 샘을 발견했다. 시각은 새벽 4시였다. 샘은 메이플 시럽 도넛을 꽉 움켜쥐고 서 있었다. 전날 오후에 사라가 빵집에서 12개 세트로 사 온 도넛이었다.

거기서 뭐 하냐고 묻자, 샘은 사라를 돌아보았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라일리가 집에 가면 이것부터 먹을 거랬어. 멍청이 새끼. 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바보 멍청이 새끼. 그렇게 맛있지도 않은데.

그리고 샘은 어린아이처럼 사라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차가운 부엌 타일을 디딘 발은 맨발이었고 피부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샘은 헐떡였다. 부들부들 떨었다.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사라는 샘의 눈물로 티셔츠가 젖어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샘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샘은 이렇게 말했다. 위에서 보는 것밖에 못 했어.

샘은 이렇게 말했다. 부대 사람들이 걔를 수습한다고 험비를 타고 돌아다녔어. 보물찾기하는 것처럼.

샘은 이렇게 말했다. 무서워서 그랬어. 내가 나약해서 그랬어. 내가 죽었을 수도 있었던 건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뭐라도 있었을 텐데. 내가 맞을까 봐 무서워하지 말고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나 혼자 살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만 더 낮게 날았으면—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갔으면—걔는—

 

***

 

부엌은 조용하고 포근했다. 저녁의 햇살은 부드러운 빛으로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악몽은 오래전 사라졌다.

"누군가를 잃는 것만 상처가 되는 게 아니잖아."

샘은 사라의 말을 들으며 맥주캔 표면을 미끄러지는 물방울만 내려다보았다.

"세상 모든 걸 다 네가 짊어질 수는 없어, 샘. 너부터 생각해. 이번 한 번은 너부터 생각해."

 

***

 

배로 내려갔을 때 버키는 부두 가장자리에 쌓인 상자 위에 걸터앉아 수평선 아래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 아래에서는 파도가 일었다.

샘은 몰래 다가가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소금기와 습기에 절은 부두의 나무바닥도 문제였지만 애초에 버키의 청력이 너무 좋았다. 버키는 샘이 맥주캔 하나를 불쑥 목에 가져다 댔을 때도 한 번 움찔하지조차 않았다.

"고마워, 자기야."

버키가 샘의 손에서 맥주캔을 가져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집에 가다가 길이라도 잃었었던 거야? 기다리다가 목 빠질 뻔했잖아."

그래서 샘은 버키의 등을 무릎으로 콱 찍어 주며 옆의 상자에 앉았다.

"아야."

버키가 아픈 척 신음을 냈다. 그가 샘의 톡 튀어나온 슬개골에 손을 얹었다.

"무릎 조심해야지."

무릎을 감싸 쥔 버키가 샘의 허벅지에 팔을 얹으며 상체를 기대 왔다. 버키가 머리를 팔에 괴고는 편하게 샘의 무릎을 베고 엎드렸다.

샘은 버키의 가슴이 허벅지를 누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목이 늘어난 헨리넥 밑으로 드러나는 근육의 결. 샘은 버키의 정수리에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로 시선을 돌렸다.

"너나 아무 데나 엎드리지 마."

샘은 조그맣게 말했다.

"아무나 다 네 팔걸이를 해 주는 게 아니거든."

그러자 버키가 고개를 들어 샘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그가 웃으며 드러나는 치아가 새하얘서, 웃음기를 담고 휘어지는 눈동자는 또 새파래서, 그래서, 망할—

"너만 해 주면 됐어."

버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FIVE

 

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보는 타입은 아니었다. 급한 소식 확인 같은 건 버키가 맡고 있었다. 버키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어김없이 휴대폰부터 꺼내 들고 커피를 마시고는 했다. 발은 샘이 비싸게 준 의자에 얹어 놓고 말이다. 꼭 아침 신문이라도 보는 듯한 자세였다.

그러니까 샘이 아침 조깅을 하고 들어온 후에야 사라의 메시지를 본 것도 당연하다는 이야기였다.

"샘."

버키가 하품을 하며 불러서 샘은 고개를 들었다. 버키가 현관 복도를 지나 부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방울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어깨로 뚝뚝 떨어졌다.

"이제 화장실 써도 돼. 그런데 바디워시 거의 다 떨어졌더라. 이따가 내가 장 보면서 사 올게."

샘은 발갛게 상기된 흰 피부를 너무 오래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버키는 여유롭고 생기가 넘쳤다. 편한 스웨트팬츠와 티셔츠 차림으로 샘의 부엌에 있는 그는...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어, 그래."

샘은 자신이 너무 오래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버키가 장을 봐 줬더라? 아니, 생각하지 말자. 샘은 다시 사라의 문자로 주의를 돌렸다.

한 시간쯤 전에 온 문자였다. 샘은 물컵을 입에 댄 채로 스크롤을 내렸다.

 

사라

너 이거 봤어?

다 보고 정신 돌아오면 답장해. 다 웃고 하든가. 다 웃고 정신 돌아오면 해도 되고.

 

그리고 링크가 하나 와 있었다. 막연한 호기심을 느낀 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링크를 터치했다. 화면이 유튜브로 넘어갔다.

자동 재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는지 영상이 곧바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진부한 인트로 뮤직이 흘러나왔다.

"이제 나한테 할아버지 소리 하지 마라."

식탁에 앉아 있던 버키가 말했다. 버키는 항상 창문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자리에 앉았다. 빌딩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좋다고 했다.

"아침부터 식탁에서 이어폰도 안 끼고 폰으로 뉴스 트는 아저씨는 그럴 자격 없어."

"식탁 아니거든, 카운터에 있잖아. 그리고 아까도 카우치에서 잤더니 허리 아프다고 징징댔던 주제에 뭐라는 거냐. 닥치고 콘플레이크나 드세요, 영감님."

"좆 까."

"니 좆이나 까."

버키는 대꾸하지 않았다. 샘은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어느새 화려한 인트로 배너는 사라지고 금발의 앵커가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샘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라는 원래 이런 뉴스는 보지 않았었다. 이건 좀, 피플 매거진이나 병원 대기실에 널려 있는 가십지의 온라인 버전 같은 거 아닌가? 샘은 탭을 닫고 사라에게 언제부터 이딴 가십에 빠진 거냐고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고, 발랄한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에서 빠져나왔다.

"속보입니다, 슈퍼히어로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밝고 인위적인 스튜디오 조명 아래의 앵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맞습니다! 캡과 윈터 솔져의 열애가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저희가 확보했—"

샘의 손가락이 정지 버튼을 콱 눌렀다.

뭐지, 이게? 이게 뭐지?

스튜디오에 있는 앵커의 모습 위로 파파라치 사진이 겹쳐져 있었다. 그와 버키의 사진이었다. 배경은 뉴욕의 거리였고, 둘 다 한 3일쯤 못 잔 얼굴이었는데—무심하게 샘의 허리를 감싼 버키의 팔에 빨간 원이 쳐져 있었다. 시청자가 못 볼까 봐 걱정이라도 됐는지 원 주위에 열 개쯤 되는 화살표까지 둘러 놨다.

파파라치 사진 가장자리에는 하트 이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샘은 질끈 눈을 감았다.

숟가락을 그릇에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나 때문이면 됐어."

버키가 등 뒤에서 말했다. 샘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오한을 느꼈다. 버키. 버키가 있었다.

"다시 틀어."

시발.

이미 온몸이 굳어 버린 샘은 고개를 최소한으로 뒤로 돌렸다. 버키는 식탁에 앉은 그대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버키의 어깨는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버키는 온몸을 굳히고 앉아 있었다.

더 먹을 생각이 없는지 시리얼 그릇에 걸쳐져 있는 숟가락이 보였다. 콘플레이크가 눅눅해질 것 같았다.

"버키—"

"그 망할 뉴스 계속 보라고, 샘."

샘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망할 뉴스를 계속 보았다.

앵커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덮쳤다. 그 입에서 나오는 문장은 갈수록 더 끔찍해졌다. 부엌 반대편에 가만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버키가 의식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식은땀에 젖은 손에서 자꾸만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같이 장을 보는 모습이 목격되었었죠—"

"—반즈 씨는 이날 자고 갔다고—"

"—아늑해 보이는—윌슨 가족의 집에서—"

그리고 샘이 드디어 이 망할 뉴스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카드를 넘긴 앵커가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시청자 분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코너로 넘어가죠! 저희가 이번 주에 찍은 최신 사진입니다!"

파파라치 사진의 슬라이드쇼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슬라이드쇼는 끝나지를 않았다. 고등학생이 만든 PPT 퀄리티의 슬라이드쇼를 보면서 샘은 어깨가 점점 더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이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건 너무 민망하고, 너무 이상하고, 너무—

"그래서."

예상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버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겁한 샘은 고개를 휙 돌려 등 바로 뒤까지 다가온 버키를 확인했다—언제 일어난 거지?

"이게 뭐야, 샘?"

샘은 허둥지둥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뭐냐면, 인터넷에서 우리를 엮고 있는 거지. 어."

"인터넷에서만은 아닐걸."

버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말했는데, 그런데 뭐?

"뭔 소린데 그게."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냥."

버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지만—눈빛이 날카로웠다. 무언가를 재 보고 있다. 샘은 바짝 긴장했다.

"딱히 그걸 숨긴 사람은 없었지만."

"뭐—누가 그랬는데?"

"음, 일단—리아 기억하냐?"

샘은 헉 숨을 내쉬었다.

"이지스? 그때 딱 한 번 만났잖아!"

다시 어깨를 으쓱인 버키가 스토브 옆의 캐비닛에 몸을 기댔다.

"그걸로 충분했었나 보지. 내가 너 때문에 자길 버리고 갔던 거라고 생각하던데."

샘은 그를 노려보았다.

"나한텐 그런 말 안 했었잖아."

버키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알겠어. 말 안 해서 미안해, 응?"

"됐어. 또 누가 그랬는데?"

"어...."

버키가 머릿속의 리스트를 확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토레스. 샤론."

"토레스?! 그 자식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 놓고는! 그리고 샤론이 그렇—"

"혈청, 자기야. 혈청. 저번에 같이 영화 봤을 때 너랑 통화했었잖아. 나 부엌에 있었을 때. 그리고 토레스는—"

버키가 코웃음을 쳤다. 눈빛이 어두웠다.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어어, 그래,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든 딱히 아무—"

버키가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 누나도."

샘은 너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누나? 우리집 부두랑 5분 거린데 그게 들렸다고?"

그리고 다 내뱉은 다음에야 그 말이 얼마나 지레 찔린 것 같은지 깨달았다....

버키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지금 당장 바닥으로 꺼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면 좀 웃겼을지도 모르겠다.

"그거?"

"아니야."

샘은 지금 날개가 있어서 창문 밖으로 날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 난—사라와 문자했다는 얘기였어—샘, 너 누나랑 내 얘기했어?"

"네 알 바 아니고!"

샘은 절박한 심정이 되어 소리쳤다. 제가 판 구덩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우리 누나한테는 왜 문자했어?"

버키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저번에 같이 파티에 갔다 온 다음부터 혼 나간 것처럼 굴길래, 뭐 안 좋은 일 있었나 싶어서."

"언제 같이 갔어. 네가 마음대로 온 거지."

"아무튼. 그런데 네 누나가 그러더라. 네가 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그래도 나는 너한테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누나는—왜 모든 사람들이 네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왜,"

버키가 미치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는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침묵이 흘렀다.

샘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버키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샘."

그가 잇새로 내뱉었다.

"새대가리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왜 이렇게 멍청한 척을 해?"

샘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심장이 쾅쾅 뛰며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우리를 좀 봐. 너도 항상 말하잖아. 나는 사실상 네 집에 같이 살고 있어. 네 가족도 수십 번도 더 만났어. 넌 네가 쓰지도 않는 비싼 샴푸를 사 놓잖아. 너는 차만 마시면서 아침마다 나 때문에 커피메이커를 켜 놓잖아."

버키는 이제 흥분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벅...."

"나도 숨긴 적 없어, 샘. 내가 너한테 하는 행동이 다 장난 같아?"

버키가 몸에 힘을 빼고 다시 캐비닛에 기댔다. 샘이 신경질적이 되었을 때 그러는 것처럼 양손을 서로 움켜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던 그가 마침내 오른손으로 비브라늄 의수를 꽉 감싸쥐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마디가 하얬다.

"너는 아니라면, 괜찮아. 난 그냥—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해. 그런데 네 눈치가 너무 빨라서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샘. 지금쯤이면 당연히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샘은 꿀꺽 침을 삼켰다.

문제는.

문제는—

샘이 눈치를 챘다는 것이었다. 샘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언제나 알고 있었다. 버키의 푸른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는 매 순간 버키의 푸른 눈동자에 자유낙하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쿵 떨어지는 매 순간 직감했었다. 컵을 주고받으며 손끝이 스치던 매 순간, 햇살 속에서 함께 웃음을 터트리던 매 순간, 버키의 팔에 온몸을 맡기던 매 순간 심장이 덜컥 떨어지며 소리쳤었다. 한밤중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버키가 샘의 옆을 찾아와 머무는 순간마다 깨달았었다. 버키가 그렇게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매 순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웃는 매 순간 그는 알았다.

매 순간이 그리도 확연했었다. 그 모든 순간에 샘이 눈을 돌렸었을 뿐이었다.

버키는 그대로 기대서서 손만 쥐어짜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순간마다 고개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샘은 이를 악물었다.

버키를 생각했다. 버키가 어느새 이렇게 깊숙이 그의 삶에 들어왔던가를 생각했다.

이번 한 번은 스스로를 위해서.

"나도."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얼어붙은 호수를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슴 안쪽 깊숙이 숨겨 둔 것이 드러나고,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끔찍한 느낌이었다. 끔찍했다. 하지만 좋았다.

버키가 휙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말해 줄래?"

"나도."

샘은 대답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나도 좋아해."

버키가 조심스레 샘에게로 다가왔다.

"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었어?"

샘은 입술을 적셨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어. 넌 그럴 준비가 안 됐었잖아. 내가 강요하는 걸까 봐 걱정됐어."

버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야."

"알아. 미안해."

이제 그들은 단 한 걸음을 떨어져 있었다.

"샘."

버키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

"나—나는—우리—"

"좋아."

버키가 몸을 떨었다.

"말 끝까지 듣지도 않았잖아. 뭔 줄 알고 좋다는 거야."

"뭔 줄 알아."

샘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런데 좋다고."

버키는 그대로 몸을 굳히고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샘을 들어 올려 부엌 카운터에 앉히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잠깐만."

샘은 겨우 버키에게서 놓여나 숨을 들이쉬었다. 그제서야 부드러운 입술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나 땀 났어—너 방금 씻었잖아—"

"됐거든."

버키가 목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몇 달을 오늘만 기다렸는데. 그런 건 상관없잖아."

"알겠는데—"

버키가 귀 뒤의 연약한 부분을 깨물었다.

"그냥 하자, 샘."

샘은 버키의 티셔츠 목 부분을 쭉 잡아당겼다. 버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몸을 뗐다.

"내 말은."

버키가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샘은 간신히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하는 건 좋은데 좀 편한 데서 해도 되지 않냐고."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는 버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샘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우리 집에는 침대가 있거든."

"아. 아."

버키가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손을 샘의 허벅지 아래로 넣은 버키가 그대로 샘을 안아 들었다. 힘이 센 건 알아도 불안했다.

하지만 버키의 미소는 너무 달콤했고 너무 강렬했고 너무, 너무....

"자기야."

버키가 눈이 부시게 웃으며 말했다.

"웬일로 그런 기특한 소리를 해."

 

 

 

 

(+1) SIX

 

샘이 평생 가 봤던 바 중 이 바가 최고였다.

댄스플로어에서 번쩍이며 뿜어져 나오는 네온 라이트 때믄에 약간 상향이 들어가긴 했다. 시력 보호를 위해 눈을 내리깐 샘은 시켜 놓은 값비싼 마티니를 홀짝였다.

마티니를 다 마셔갈 때쯤 누군가 옆자리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나는 드르륵 소리가 쿵쿵 울리는 음악을 뚫고 귀에 박혔다.

샘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혼자 왔나요? 그러기엔 너무 잘생기긴 했는데."

샘은 간신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겨우 진정하고 나서야 그는 대답했다.

"고맙지만 아닙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가 하얗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형편없는 사람 같네요."

샘은 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훑었다.

"글쎄요? 바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기다릴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런데, 걔가 좀 예민하거든요. 곧 올 텐데 그쪽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별로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아서요. 그냥 다른 사람—"

그가 손을 뻗어 샘의 어깨뼈를 더듬었다.

"그런가요."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난 당신 같은 사람을 포기할 만큼 바보가 아니라서.... 그냥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요. 재밌게 해 줄게요."

슬금슬금 내려온 손이 샘의 등을—

"저기요, 도와드릴까요?"

샘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그의 뒤에 바짝 붙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건 것은 바텐더였다. 샘은 그녀가 바의 반대편 끝에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와 있었다. 바텐더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샘 쪽을—그러니까 샘의 등 뒤에 있는 버키를 노려보았다.

"어...."

샘은 입을 열었다.

"다 들었거든요?"

바텐더가 버키에게 말했다. 한 손은 바 아래로 내린 채였다.

"싫다는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가시죠. 이 버튼 누르면 5초 내로 보안요원 옵니다—"

"아니, 잠깐만요."

샘은 황급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죄송합니다, 보안요원 안 불러 주셔도 돼요."

바텐더가 미간을 좁혔다.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리고 어차피 보안요원이 와도 버키를 끌어내지는 못할 거였다.

"이 친구 기다리던 거였어요. 방금 그건 좀 장난쳤던 겁니다. 오늘이 저희 1주년이라 여기 온 거거든요.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합니다."

'1주년'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텐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아."

바텐더가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해요! 그래도 안전에는 과한 게 없으니까요.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바텐더가 다시 바의 반대편으로 간 직후 샘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진짜—너 진짜 최악이다. 너 진짜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웃긴 놈이야. 그만 좀 웃고!"

버키가 샘의 등에 밀착해 있던 몸을 뗐다. 즐거움과 민망함이 반반씩 섞여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샘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야, 너 이제 끝났다. 너 방금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지? 완전 쪽팔리지? 이제 얼굴 들고 다닐 수나 있겠냐?"

"나 혼자 했냐? 그리고 이런 데서 이런 거 한 것도 오랜만이었잖아."

버키가 눈썹을 올려 보이며 대꾸했다.

"아니면 다른 거 할래? 넌 스마일링 타이거를 하고, 나는 네 경호원이 되는 거야. 좀 무뚝뚝한 성격으로—"

"너 진짜 싫다."

"아!"

버키가 한 손을 가슴에 얹으며 서글픈 척 말했다.

"1주년이 되자마자 내 사랑에게 거절당하다니—"

"닥쳐라, 좀."

샘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툭 쳤다.

"너 오늘따라 왜 이래? 멍청이 같이."

그 말에 버키는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을 쳤다.

"멍청이라니."

버키가 샘의 목덜미를 감싸며 말했다.

"캡틴 아메리카가 우리 기념일이라고 이렇게 예쁘게 입고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멍청이 같이 굴겠어?"

샘은 퍽 웃음이 터져 바 위로 쓰러졌다.

"너 그거—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버키가 눈을 깜빡였다.

"AJ와 캐스."

"오케이. 일단 그거 다시는 하지 마라. 변태 늙은이 같으니까."

샘은 뺨을 향하는 손을 피하고 대신 버키의 옆구리를 꼬집어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버키가 몸을 움츠리며 바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는 것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가 그렇게 좋으면 오늘 아침에 마지막 요거트 처먹지나 말았어야지. 내 거였다고, 나쁜 자식아."

"아아, 샘, 그 얘기 언제까지 할 거야? 늦어서 정신이 없었다니까."

"딸기 무스였다고, 자기야. 그거 못 먹어서 내 얼굴 대칭이 무너졌다고."

"안 되는데."

버키가 한숨을 쉬었다.

"네 완벽한 얼굴이 무너지다니. 그건 안 되지."

"그래?"

샘은 몸을 기대며 씩 웃어 보였다.

"내 얼굴이 완벽해 보여? 네 눈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생겨 보이냐?"

버키는 5초 가량 샘의 전신을 훑더니 무표정하게 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실은 이마가 조금 작긴 해—아하하, 미안해! 농담이었어, 자기야. 밀지 마. 집에 가서 제대로 사과하면 되잖아. 응?"

그가 애교스럽게 윙크했다.

"아까 내가 재밌게 해 준다고 했잖아."

"진짜 별로다."

샘은 말과는 반대로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왜 널 데리고 다니는지 나도 모르겠다."

"넌 나를 사랑하니까."

버키가 키스해 달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간식을 조르는 강아지 같았다.

"알긴 아네."

샘은 웃음을 터트리며 마주 고개를 기울였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