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공안의 데블 헌터로서 일하다 보면 웬만큼 일진이 사나워도 불평을 입에 담지 않게 된다. 정말로 운이 나쁜 데블 헌터는 불평할 새도 없이 죽어 버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에 감사하기에는 기분이 몹시 더러운 날도 있다. 오늘 같은 날이 정확히 그렇다.
“…….”
“으~~! 냄새나서 죽겠네 진짜, 우욱…….”
몇 번째인지 모를 헛구역질 소리. 덴지가 또다시 요란하게 속을 게우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 모양이다. 이쪽도 별반 다른 상황은 아니어서, 좀 전부터 비위의 한계를 시험받고 있었다. 데블 헌터의 첫 번째 소양은 비위가 강한 것인데 이래서는 어디서 명함도 못 내밀겠다.
“……안 되겠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진 한적한 도쿄 근교의 풍경. 공안으로 복귀하려면 여기서부터는 대중교통을 타거나 공안에 관차를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이 꼬락서니로 민간인 사이에 끼어들려 했다간 오 초도 안 되어 욕설이 날아들 것이고, 관차에 타면 클리닝 비용이 적잖이 발생할 것이다.
차 내부를 세척하는 것보단 그래도 사람 몸을 씻어내는 게 훨씬 간단하고 빠른 길이겠지……. 결심이 서자, 금일 안에 복귀하겠다는 욕심은 악취와 함께 녹아 사라졌다.
“덴지.”
가로수를 붙들고 토하는 시늉을 하고 있던 덴지를 불렀다. 곧 몸 곳곳에 보라색 오물이 덕지덕지 묻은 덴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제 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좀 전에 본 무인 호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라도 좀 씻고 가자. 도저히 못 참겠다.”
“진작 좀 말하지 그랬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덴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퍼졌다.
총의 악마가 태평양 연안에 재출현한 지도 벌써 몇 년 전의 일.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지만 아키는 결국 공안으로 돌아왔다. 계약한 악마는 없었으나 데블 헌터로서의 적성을 검증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육체를 뺏고 빼앗기는 와중에 남은 총의 악마의 살점 극소량이 그대로 아키의 몸에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두경부와 상체, 두 팔을 위주로 새겨진 총의 악마의 흔적은 몇 차례의 제거 수술에도 불구하고 아키의 육체를 암세포처럼 좀먹으며 지금도 독성을 뿜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키는 총의 악마의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육체의 일부를 변형해 총기를 불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마인이었을 때보다 위력이 떨어지기는 하고, 무엇보다 악마의 살점이 내뿜는 독성으로 인해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남을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어차피 그전에도 시한부였던 인생이다. 가족을 몰살한 악마의 힘을 언제까지고 사용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대가가 따르는 건 차라리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상시 침범하는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달고 살게 된 건 좀 귀찮은 일이다만……. 현장으로 출발할 당시 한 움큼을 삼켰던 약의 효과가 벌써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키는 샤워기 아래에서 머리를 흔들었다.
“으악!! 나한테 피 튀잖아!! 하지 마 그거!!!”
공교롭게도 옆에서 먼저 물을 맞고 있던 덴지가 난리를 피웠다.
오늘 두 사람이 하달받은 명령은 ‘근교에 출현한 악마를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새로울 것이라곤 전혀 없는 일이었지만, 현장에 먼저 접근한 민간 데블 헌터가 처리에 애를 먹고 신고했다는 점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민간에서 상대하기 벅찬 레벨의 악마를 공안이 처리하는 건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나, 이는 그만큼 일의 난이도가 높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방심해도 되는 일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데블 헌터의 숙명상 긴장은 필수였다.
막상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맞닥뜨린 것은 예상과는 좀 달랐으나.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있던 민간 데블 헌터의 말로는, ‘야유의 악마’로 추정된다고 했다.
직경이 3m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구체. 공중에 떠 있는 검보랏빛의 우둘투둘한 구체 표면에는 사람의 육체를 닮은 것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어디는 손. 어디는 발. 지면 쪽으로는 귀. 저 위쪽에는 머리털과 눈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큼직하고 뚜렷하게 솟아 있는 것은, 단연코 ‘입’이었다.
구체 표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툼한 입술. 징그럽도록 새빨갛고 두툼한 그것이 벌어질 때마다 누렇게 물든 이와 새까만 혀가 드러났다. 문제는 그것이 양치를 일만 년쯤 하지 않은 듯했다는 것이다. 악마가 입을 열 때마다 누런 수증기와 함께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주변에 번졌고, 민간인은 그 냄새에 질려 대피 경보를 내리기도 전에 모조리 도망간 지 이미 오래였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악마는 ‘야유의 악마’답게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저 자식 마스크라도 씌우면 안 돼!?”
덴지가 코를 막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지만, 2m쯤 되는 마스크를 제작하려면 지금 당장 공장에 주문을 맡겨도 며칠은 걸릴 것이다.
공격력이 그렇게 높아 보이진 않는데, 민간의 데블 헌터들은 설마 이 냄새 때문에 포기한 건가. 사방에 퍼진 역한 냄새를 참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중에, 야유의 악마가 비로소 덴지를 포착했다. 저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며 덴지가 일찌감치 달려든 것이다.
“빨리 죽여버리면 더 이상 저 냄새나는 입도 나불대지 못하겠지!!!!”
저렇게 의욕이 충만한 덴지는 오래간만이었다. 정확히는 의욕이 충만한 게 아니라 악마의 냄새를 못 견딘 것이지만. 어느 쪽이든 덴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반가운 신호였다. 자신이 총의 악마의 힘을 꺼낼 일이 그만큼 줄어들게 되니까.
그러나…….
「아아, 이거 봐라. 여자랑 섹스 한 번 못 해본 원숭이 납셨군.」
야유의 악마의 일침이, 덴지의 의욕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냐!! 아니라고!!!”
「아니라고? 네 고추는 한 번도 여자 몸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질질 짜고 있는데?」
전투에 참전해야 마땅한 타이밍이었지만, 하야카와 아키는 좀 전부터 관자놀이를 짚은 채 이 말도 안 되는 꼬락서니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덴지와 야유의 악마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싸움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일방적 린치였다. 다만 린치의 수단이 주먹과 발이 아닌 혀와 입일 뿐이다. 우위에 선 쪽은 누가 봐도 야유의 악마. 물리적으로는 그저 둥둥 떠다니며 덴지의 공격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실제 유효타는 저 떠다니는 입에서만 나왔다.
머리에 든 것 없는 원숭이, 죽어주는 것만이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인 루저, 그런 주제에 헛되이 여자 욕심을 내는 쓰레기 등등. 아키조차도 덴지가 조금 안쓰러워져 그리 옮기고 싶지 않은 온갖 모욕이 쏟아졌다. 덴지는 머리에 열이 올라 마구잡이로 체인소를 휘두르고 있었지만, 본체의 덩치가 워낙 큰 탓에 체인소가 들어가도 얕은 상처만 남기고 마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여자랑 하고 싶을 수는 있는 거잖아!!”
이제는 조금 울고 있는 것 같은데. 아키는 한숨을 쉬며 등에 멘 칼을 뽑아들었다.
아마도 야유의 악마는 상대를 포착하면 상대의 트라우마나 콤플렉스를 읽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덴지가 여자와의 성적 경험에 굶주려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단 한 번 시야에 잡히면 사람의 열등감을 자극하며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니, 아무리 공격력이 낮아도 민간의 데블 헌터들은 저 악마와 그리 접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본인의 치부로 동네방네 놀림을 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악마의 공격이 겨우 저 정도로 그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삼의 악마 같은 저급 악마면 모를까, 보통 악마가 여러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아무래도 저 거대한 입이 신경 쓰인단 말이지. 고작 욕질만 하려고 달려 있진 않을 것 같고…….’
아키는 숨을 고르고 – 악취 때문에 심호흡을 할 수는 없었지만 – 악마의 뒤쪽으로 빙 돌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유의 악마가 악마가 덴지를 놀리는 데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뒤쪽에서 공격할 참이었다. 아무리 덴지라도 저런 정신공격을 계속 받아 좋을 건 없을 테다.
「이제까지도 못한 놈이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주제를 모르는 데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난 얼마 전까지 미성년이었다고!! 미성년이니까 못해본 건 당연하잖아!! 미성년 운행은 범죄인가 뭔가 아무튼 안 된다는 것도 모르냐!?!”
‘아니, 운행이 아니라 음행이겠지…….’
혀를 차며 아키는 발을 재촉했다. 악마가 덴지의 콤플렉스를 정확히 저격한 덕분에 아직까진 위험한 발언이 나오지 않았으나, 덴지가 반박하다 보면 무슨 말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아키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악마의 바로 지척까지 다가갔다. 악마가 방심한 틈을 타 덴지를 불러, 양쪽에서 동시에 가를 생각이었다.
“진짜 짜증나네!!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게 아니라고!!! 내가 얼마나 연습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자식이……!!!”
저 봐. 슬슬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있잖아. 저러다 자칫하면…… 아니, 최악의 발언을 내뱉기 전에 재빨리 해치우자. 아키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어 덴지에게 신호를 주려고 악취를 참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아, 이거 봐라?」
악마의 등 뒤에서 – 정확히는 입의 뒤쪽이지만 – , 있는지도 몰랐던 악마의 눈이 또 하나 떠졌다. 눈꺼풀인 줄도 몰랐던 틈이 벌어지며 새빨간 동공의 눈이 드러난다. 악마가 자신을 정확히 포착한 순간, 아키의 머릿속으로 돌연 떠올리고 싶지 않은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악마가 자신의 기억을 읽어냈다는 것을 아키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하……」
악취와 함께 낮게 낄낄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척추를 타고 기분 나쁜 오한이 일었다. 갑자기 발이 묶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역시 단순히 야유만 던지고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주파가 근육을 건드리는 것처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덴지의 공격이 신통치 않았던 건 이 때문이었나?
“엥……?”
건너편에서 덴지가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고 아키는 그 와중에도 속이 터졌다. 멍청아, 뭐 하고 있어. 틈을 노리지 말고 태세를 정비하란 말이야……!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은 주제에 데블 헌터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놈이잖아?」
일순,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힘이 빠진 손에서 칼이 툭 떨어졌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고, 아키는 떨리는 시선으로 발치에 떨어진 칼을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렇구나. 이 녀석은 단순히 비아냥거리기만 하는 놈이 아니야. 이 자식이 던진 말이 정곡을 찌를수록, 야유는 실제로 사지를 얽매는 힘이 되어 데블 헌터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아키는 억지로 힘을 주어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쁘게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그 말에 또다시 다리에 힘이 빠졌다. 무릎이 절로 꺾이려는 것을 가까스로 버텨냈다. 타깃이 바뀌었는데도 덴지가 기습하지 못하는 건, 이미 놀림을 당할 대로 당한 탓일까. 그렇다면…….
“…….”
아키는 칼자루를 쥐지 못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힘은 정말이지 가급적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악마의 말마따나 부끄럽기 때문이다. 수백, 아니 수천만 명을 순식간에 비명횡사하게 만든 힘. 자기의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 힘. 그 힘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다는 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심장은 아직까지 뛰고 있다.
심장이 뛰고 있는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다.
타인의 심장이 자기보다 먼저 멈추기 전에, 이 힘을 한계까지 쓰는 수밖에는.
망설임은 짧았다. 아키는 눈을 감았다. 평범한 사람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감각, 숨골에 박힌 방아쇠에 신경섬유를 걸어 당기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압박. 아니, 실제로 튀어나가는지도 모른다. 머리부터 손가락 끝까지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고, 눈을 떠 보면 팔은 이미 쇠붙이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죽어버려.”
악마를 향해, 아키는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을 쏟아부었다. 놈의 살점이 진눈깨비처럼 사방에 흩날리는 광경을 눈에 담으며.
“으으, 속 안 좋아…….”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아니, 아키가 그 자식을 죽으로 만드는 바람에 그 자식 살점이 입에 들어갔다고오~!!”
덴지가 징징거렸다. 그 악취 나는 살점을 삼켰다면 확실히 속이 안 좋긴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쪽이 알 바는 아니다. 속에서 자꾸 냄새가 올라온다며 인상을 쓰는 덴지를 무시하고 아키는 먼저 욕실을 나갔다.
악마를 완전히 박살 낸 건 좋았으나, 남은 악마의 잔해가 문제였다. 살아있을 때도 사방팔방에 악취를 내뿜고 다니더니 피와 살점에서도 악취가 풍겼던 것이다. 얌전하게 갈라서 죽였으면 피해가 좀 덜했을지도 모르건만, 덴지의 말대로 아키가 악마를 죽사발로 만드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두 사람은 이 악취를 어쩔 거냐며 항의하는 주민들의 원성을 피해 간신히 빠져나왔다.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해결해줄 것이다.
오물이 잔뜩 묻은 옷은 욕조에 넣고 세안비누를 녹여 대강 세탁했다. 도시처럼 근방에 옷을 살 만한 마땅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옷이 마르기 전까진 어디에 갈 수도 없다. 일단 드라이기로 대충 말리고 밖에 펼쳐 놓으면 내일 아침엔 어떻게든 걸칠 수 있겠지. 아무튼 지금으로선 무인 호텔에 싸구려 가운이 비치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하아…….”
두통이 일어 아키는 더블 사이즈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관자놀이며 총으로 변했던 팔이 홧홧하게 아팠다. 진통제가 간절했지만, 아침나절엔 당연히 오늘 안으로 귀가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분의 약이 없었다.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덴지한테 약국을 좀 찾아보라고 할까? 저 녀석이라면 가운 차림으로라도 나가줄지 몰라……. 그런 무의미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이며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키.”
뺨에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마르지 않은 덴지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었다. 아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나 제대로 말리고 와,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덴지가 조금 더 빨랐다.
“아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지?”
덴지가 물었다.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화살처럼 아키를 찔렀다.
“어…… 집에 연락해 둬. 내일 오전에나 들어갈 것 같으니까…….”
덴지가 데리고 있다는 어린애를 떠올리며 아키가 중얼거렸다. 어어 그럴 거야, 라고 대꾸하면서도 덴지의 시선은 아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 좋지는 않은 징조였다. 나쁘다고 할 것도 아니었지만.
덴지의 머리카락에서 또다시 물이 떨어졌다.
“너 말이야, 그 젖은 머리부터 어떻게 좀―.”
“그럼, 오늘 연습하자. 간만에.”
덴지가 힘주어 말했다. 아키의 말이 끊겼다. 적막이 흘렀다. 덴지의 시선은 여전히 아키를 향해 수직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습하자고?”
“어.”
그걸 꼭 지금 해야겠냐고 대꾸하려던 순간, 관자놀이가 지끈 울렸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고, 아키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덴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아키의 입술 쪽으로 미끄러졌을 뿐.
아키는 누운 채 잠자코 이마를 짚었다. 맥박에 맞춰 울리는 두통이 몹시 거슬렸다. ……진통제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뭐. 설득의 의지가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들어가 있던 몸의 긴장이 풀렸다. 하긴 어차피 처음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주저해 봤자 꼴만 우스워지겠지.
“……그러든가, 그럼.”
손을 뻗어 덴지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아주 살짝 내리누른 것만으로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입술을 덮쳐 왔다. 악마의 살점 얘기가 떠올라서 순간 껄끄러워졌지만, 덴지가 맹렬하게 공격해 오는 탓에 아키의 잡념은 이내 사라졌다.
그러니까 덴지의 성년 기념으로 들이부은 술이 문제였다.
조그마한 대폿집에서 소박하게 가진 축하 자리였다. 덴지는 이전엔 주문하지 못했던 메뉴를 시켜볼 수 있어서 신이 났다. 다만 맥주는 이전에 아키가 마시던 걸 훔쳐먹어 본 적이 있어서 테이블에 오르지 못했다. 시커먼 시궁창물 – 블랙커피를 뜻한다 – 보다 더 맛없는 건 처음이라고 투덜거리던 덴지를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카페인이나 알코올의 쓴맛을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과일향 하이사워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쁜 여자가 나오는 TV 광고라면 모조리 꿰고 있는 녀석답게, 덴지는 ‘섞는다면 하이사워!’라는 멘트로 유명한 제품을 전부 맛보고 싶어했다. 결국 광고에 나오는 세 가지 맛을 빠짐없이 주문해서 얼마간의 소주와 얼음에 섞었다. 이건 쓰지도 않고 괜찮다며 히죽거리는 녀석을 아키는 ‘뭐, 이제 성인이니까…….’ 라는 생각으로 내버려뒀다. 그게 결정적인 패착이 될 줄도 모르고.
사실, 퇴원한 이후로 아키는 더 이상 덴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아키는 덴지를 말리기는커녕 덴지가 마시다 남긴 술로 진통제를 삼켰다. 의사가 약을 먹는 동안에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무시했다. 그래야 약기운이 더 강하게 돌았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덴지는 돌아가기도 전에 대폿집의 허름한 화장실에서 일찌감치 한 차례 토했다. 덴지만큼 인사불성은 아니었던 아키가 덴지를 수습했다. 등을 두드리고, 물로 입을 가시게 해주고, 집으로 데려갔다. 덴지가 집 주소를 똑바로 말할 수 있었다면 그냥 택시에 태워보낼 수도 있었지만.
아키의 집에서 덴지는 두 번을 더 토했고, 끝내는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뻗었다. 참으로 기념할 만한 성년식이었다. 아키는 덴지 위에 이불만 대충 끌어다놓은 다음, 그 옆에 같이 벌러덩 누웠다. 익숙한 동시에 아주 낯선 기분이 들었다.
분명 덴지와 한 지붕 아래 사는 게 당연했던 나날이 있었다.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한 사람 더 있었던 동거인은 사라졌고, 덴지는 아키가 사경을 헤매는 사이 어엿하게 독립했다. 그리고 자신은 통증과 함께 총의 악마의 흔적을 질질 매달고 다니는, 인간도 마인도 아닌 무언가가 됐다.
그중 어느 것이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 이유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아마 그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문제였을 것이다. 아키는 잠들지 못한 채 계속 덴지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이따금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이를 갈기도 하는 입술. 상처가 생겨도 매번 재생되는 뺨은 깨끗했고, 아키가 대강 감긴 머리카락은 아직 바싹 마르지 않은 채 이마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키는 그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이마를 짚어 보고, 숨을 쉬는 걸 뻔히 보면서도 코언저리에 손을 뻗어 숨결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어쨌든 덴지는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에 기어이 성인이 됐다. 불사신에게 나이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덴지의 성년이란, 아키에게 있어 분명 맞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미래였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아키는 덴지의 콧잔등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이마에도. 뺨에도. 살아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울 정도의 애착. 덴지가 게슴츠레 눈을 떴을 때에도 아키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덴지가 웅얼거리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에는 조금 놀랐다.
녀석은 안을 것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아키는 덴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대로 잠자코 안겼다. 덴지의 몸은 뜨거웠다.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 때문이기도 했고, 살아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키는 몸을 수그려 덴지의 늑골 위에 머리를 얹었다. 뼈와 살 너머로 느껴지는 규칙적인 맥동을 잠들지 못하고 계속 듣고 있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덴지.”
“……으…… 어…….”
“덴지.”
“……으어…… 어……?”
덴지가 눈을 반쯤 떴다. 아키는 아직 흐리멍덩한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덴지, 하고 싶냐?”
“어엉……?”
“딱 한 번만 더 물어볼 거야. 하고 싶어? 대답해 봐.”
여전히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덴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아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물론 이튿날 아침이 되자마자 아키는 예상한 대로 후회했다. 그냥 후회한 정도가 아니고 아주 막심하게 후회했다. 진통제와 술을 섞어 마시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둘다 성인이라지만 미친 짓을 했다. 그나마 자신이 덴지를 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덴지에게 육체적 충격마저 안길 뻔했다.
이제 더는 알코올도 진통제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머리를 붙들고, 아키는 구역질을 참으며 심각하게 궁리했다. 어떻게 둘러대야 저 녀석이 남자로 동정을 뗐다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여자를 밝히는 주제에 사랑하는 사람과 첫 경험을 하겠다고 벼르는 녀석이었다. 그런 덴지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제 네 첫 경험 상대는 나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키는 뻔뻔하지 못했다. 삶의 대부분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쩡하게 굴러가는 양심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아키는 실감했다. 기왕 남아있을 거면 어젯밤도 작동해 줬어야지, 망할.
어쨌든 이미 던져진 주사위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게 아니라 단념하고 치워야 한다. 아키는 간헐적으로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간밤의 흔적을 최대한 없앴다. 정신을 못 차리는 덴지를 벽 쪽으로 굴려놓고, 엉망이 된 옷과 이부자리를 한데 모아 세탁기에 던진 다음,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마침내 눈을 뜬 덴지가 ‘아키―, 어제……’ 하고 입을 연 순간에는 각오가 무색하게 심장이 발등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키는 자기도 모르게 덴지에게 주먹부터 날렸다. 병상에서 오래 지내며 근육이 많이 빠졌는데도 덴지는 반쯤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내심 안도하며 아키는 나가떨어진 덴지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젯밤은 연습이었어.”
덴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아키가 못을 박았다.
“갑자기 왜 때리는―.”
“너도 이제 어른이니까 연습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실전에 돌입하면 상대한테 실례잖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어어, 그래…… 대충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러니까, 왜 때리냐고!! 덴지가 포효하며 팔다리를 휘둘렀다. 숙취 탓에 정밀도가 낮은 게 다행이었다. 덴지의 발악을 뒤로하고 아키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밥이나 먹이고 집으로 보내면 저 녀석의 단순한 뇌는 이 모든 일을 금방 잊어버리게 되리라고 믿으며.
하지만 며칠 뒤, 공안에서 마주친 덴지는.
“있잖아, 나 그 연습이라는 거, 한번 더 해보고 싶은데~~.”
라는 말로 아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어 버렸다.
그냥 그때 한번 더 쥐어팼어야 했는데. 천장을 올려다보며 후회했지만 때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아키는 누운 채로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배를 찾으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씻고 나온 게 무색하게 다리 사이가 다시 엉망이 된 탓이었다. 다시 씻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주로 육체보다는 정신 쪽이.
“덴지, 물 좀 줘봐…….”
“엉? 그래.”
잠시 후 500ml 페트병이 머리 위로 날아왔다. 저 자식이. 욕이 입술까지 올라왔지만 뱉을 기운이 없어 도로 삼켰다.
보호자 노릇은 그만뒀으나, 자신이 여전히 덴지에게 위압적이지 못하다는 걸 아키는 잘 알았다. 덴지의 문제라기보단 자신의 문제였다. 애착을 지니고 만 대가가 이토록 크게 돌아왔어도, 그 애착을 버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버리고 난 뒤의 상실감은 둘째 치고, 애초에 자신은 버리는 법 자체를 모른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그 탓에 한번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한없이 약해지고 만다는 것을.
덕분에 저 녀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남자와의 섹스 경험을 신나게 쌓고 있었다. 진실을 감추기 위해 연습이라고 둘러댔던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진짜로 하는 게 아니고 어차피 연습이잖아, 라고 말하는 덴지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연습, 그래, 고작해야 연습인 것을 무슨 수로 단호하게 거절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아니, 하려면 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아키는 너무 늦게 알았다.
최초의 행위는 술김이라 아키도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두 번째 ‘연습’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고, 아키는 이 행위의 원인을 제공한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 심지어 덴지조차도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 . 그래서 세 번째는 안 하려고 했는데, 여기서도 또다시 아키의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목을 잡았다.
이 녀석을 이대로 사회에 내놓으면, 녀석은 여자와 꽁냥거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원을 평생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처음은 끔찍하기 마련이다. 숱한 수난을 겪으며 좌충우돌해야지만 간신히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서로의 서투름을 참지 못하는 시대다. 상대에게 경험을 다질 시간과 여유가 있었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처음부터 당연히 능숙하기만을 바란다. 당연하지만 그런 사회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옳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쨌든 덴지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지 않는가.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더 오래.
그렇다면 누군가는 녀석을 정말로 ‘연습’시켜야만 한다고, 아키는 생각했다.
이건 보호자 노릇이 아니다. 어차피 제 몸은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그전에 덴지에게 연습이나 시켜주는 거다.
처음에 덴지를 속이기 위해 입에 담았던 ‘연습’은, 이제 아키에게도 정말로 연습의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비록 빈말로도 순조로운 과정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전은 의외로 빨랐다. 여타의 일과는 달리 이 영역에 한해서는 덴지에게 배울 의욕이 넘쳤던 덕분이다. 답지 않게 진지한 태도로, 덴지는 하기 전에 꼼꼼히 씻는 법부터, 콘돔을 끼는 법, 젤을 쓰는 법을 귀담아 들었고, 전희는 길게 잡으라는 조언이나 마구잡이로 처박지만 말고 상대의 컨디션을 살펴 호흡을 맞추라는 말도 최대한 실현하려 했다. 그 과정이 아키의 예상을 뛰어넘는 연습량을 요구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아키는 덴지에게 기특함마저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조루를 극복하겠다며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관계를 가졌을 때는 그냥 이 모든 걸 때려치우고 덴지를 죽일까도 했었는데…….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물을 넘기며, 아키는 먼 과거라도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 일이 벌어진 지는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당분간 연습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화를 낸 이후로, 다시 잠자리를 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하는 꼴을 보면 보나마나 여자친구는 아직도 없는 것이리라. 덴지는 질릴 만큼 성욕이 왕성해서, 아키가 겨우 한 번 달할 동안 혼자 두세 번은 가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전보다 희미해진 아키의 복근 위엔 정액이 잔뜩 말라붙은 상태였다. 그뿐인가, 저 녀석치고는 많이 참은 탓이었는지 오늘 덴지는 유난히 깨물고 빨고 만지고 핥았다. 도중에 참지 못하고 적당히 하란 뜻으로 머리를 밀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한마디 해도 가슴을 깨물면서 싫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진저리만 쳐야 했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더라, 뼈가 부딪힐 것 같으니까 슬슬 이쯤에서 살이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던가.
아, 역시 발로 한 대 차 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러려면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씻고 담배를 한 대 물고, 저 녀석을 내쫓아 끼니를 때울 거리를 사 오게 해야겠다. 결심을 마치고 아키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아~~ 속이 영 안 좋긴 한데, 그래도 배가 고프단 말이지…….”
“배가 고픈 걸 보면 괜찮은 거 아니냐?”
아키는 냉담하게 말하며 지갑을 찾았다. 비겁하게도 먼저 씻고 나온 덴지는 아직 허리에 수건 한 장만 걸친 차림이었다. 이쪽은 아직 욕실에 발도 못 디딘 터라 괘씸하기 그지없다. 지갑을 열어 천 엔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낸 아키는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덴지를 향해 내던졌다.
“이거 가지고 나가서 뭐라도 사 와.”
“OK!”
속을 긁을 심산으로 던진 것이었으나, 식사와 관련된 일에 한해 덴지는 한없이 긍정적인 인간이 된다. 이쪽의 짜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 덴지는 금세 덜 마른 옷을 찾아 주워입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성욕을 발산한 직후의 개운함에 다소 들뜬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녀석, 진짜 짜증나지 않았어?! 아직 못 해봤다고 엄청 얕봐서 무진장 열받았다고~! 아키 때문에 그놈 살을 삼킨 건 좀 빡쳤지만 그래도 아키가 그 자식을 갈아버려서 진짜 다행이었다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는데, 그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고 말야.”
덴지가 히죽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키는 대꾸도 하지 않고 지갑을 닫았다.
야유의 악마는 바보가 아니다. 눈이 마주친 상대의 기억을 읽어냈으니, 덴지가 동정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을 거다. 그럼에도 덴지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악마는 덴지가 ‘여자’와 하지 않았다는 점을 교묘히 강조하며 녀석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하지만 저 녀석이 반박하며 한 마디만 삐끗했어도 곧장 남자로 동정을 뗐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을 것이다.
하기는 이번 사건이 아니어도 사실이 밝혀지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였다. 솔직히 아키 자신도 덴지가 이 행위를 평생 연습이라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덴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즈음이 되면 아마 자신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다. 그때의 충격은 오롯이 덴지 혼자 감당하기를 바라면서. 속인 건 미안하게 됐지만, 이 몸을 고스란히 연습 상대로 내어준 만큼 그 정도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아키는 생각했다. 그 정도의 조그만 복수라도 하지 못한다면 아키는 진작 이 빌어먹을 연습을 때려치웠을 것이다.
훗날 덴지가 머리를 감싸쥐며 사기를 당했다고 외칠 광경을 상상하자 아키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니면 그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분을 풀고 이제는 정말로 씻고 나와야겠다. 가까운 편의점에 김치 우동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아키가 몸을 돌린 찰나였다.
“―욱.”
뒤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렸다.
아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도 명랑해 보였던 덴지의 얼굴이 흙빛이 된 게 보였다.
일순 몇 가지의 불길한 가정이 아키의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된 거지? 목에 뭐가 걸렸나? 미처 처리하지 못한 악마가 내내 덴지에게 들러붙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래서 저 녀석이 자꾸 속이 안 좋다고 했던 거라면……. 세간의 상식이라곤 통하지 않는 존재가 악마이니만큼, 데블 헌터는 개연성 없이 찾아오는 최악의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키는 자신이 아직 나체라는 것도 잊고 총을 불러내려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우웨에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덴지가 무언가를 와락 게워냈다. 어딘지 눈에 익은 보랏빛의 액체가 촌스러운 무늬의 카펫 위로 철썩 떨어졌다.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악취가 방안에 확 퍼졌다. 눈보다도 코가 먼저 그놈의 존재를 확신했다. 틀림없었다. 저건 ‘야유의 악마’의 잔해다.
많은 악마가 잔해를 통해 부활한다…… 저 녀석도 설마? 얼굴이 창백해진 아키가 눈을 질끈 감고 또다시 숨골에 박힌 방아쇠를 떠올리려는데―.
「―ㅁ ―머 ―멍청아.」
덴지가 토해낸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아키는 방아쇠를 떠올리는 것도 잊고 눈을 떴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퍼져 있던 보랏빛 잔해가 기를 쓰며 둥근 형태를 만들려고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좀처럼 뭉쳐지지 않는 듯, 자꾸만 흐물거리며 무너지는 형체 사이로 만들어지다 만 입이 보였다.
「그게― 아직도― 연습인 것 같냐?」
구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퍼진 액체도 아닌 것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낮에 보았던 것에 비하면 가느다랗고 불안정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말소리를 충분히 분간해낼 수 있었다. 콜록거리던 덴지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악마가 말을 잇지 못하게 해야 한다.
총을 불러내는 건 늦다. 아키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가벼운 건 안 된다. 집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묵직한 게 필요하다.
「넌― 이미 했다고― 저 놈이랑―!」
이거다 싶은 게 집히자마자, 아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내던졌다.
「―네가 한 건 연습이 아니라, 진짜 섹스라고!」
와장창, 하는 소음과 더불어, ‘야유의 악마’는 진실을 전달한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끝장이 났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키는 말없이 몸에 가운을 걸쳤다. 깨어진 재떨이 조각 사이로 악취를 풍기는 보랏빛 액체가 흩어져 있었다. 닦아내고 환기를 시켜도 냄새가 빠지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방을 바꿔 달라고 요청해야 할 것이다.
덴지는 이제 더 이상 구역질을 하지 않았다. 저런 걸 삼켰으니 내내 속이 안 좋았던 것도 당연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토하지 않고 어떻게 버텼던 걸까. 사람이 너무 둔해도 질린다는 것을 아키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쨌든 이미 뱉은 말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이다. 아키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야유의 악마가 던진 폭탄을 되새겼다. 방금 들은 말을 덴지가 야유의 악마가 자아낸 헛소리로 치부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도한 것보다 조금 빠르게 복수가 이뤄질 듯했다. 아키가 바란 건 결코 이런 게 아니었으나. 하지만, 이걸로 연습을 끝내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마무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려는데.
“……어어, 뭐…….”
덴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차마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어, 아키는 악마의 잔해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잔해와 깨진 재떨이를 치우는 걸로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할 참이었다.
그런데.
“……뭐, 아키로 동정 졸업한 거면 괜찮지 않아?”
덴지가 씩 웃었다.
“계속 동정인 것보단 낫잖아? 인정하긴 싫지만 아키라면 뭐, 얼굴도 나쁘지 않고…….”
멋쩍게 코끝을 긁적이는 손.
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주 작은 실소부터 시작됐기에, 아키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작은 실소가 얼마 가지 않아 아키의 몸 곳곳으로 번졌다. 몸을 수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아키는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이렇게 웃어 본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병원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뭐야……? 왜 웃는데? 나 바보 취급하는 거 아냐?! 어?!”
영문을 모르는 덴지가 부아를 내기 시작했으나, 아키는 오랫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토록 유쾌한 기분은 아마 앞으로도 좀처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약이 오른 덴지가 자신을 밀어 침대 위에 넘어뜨리는 동안에도 아키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눈물이 고이도록 웃지 않으면, 이 기분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