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삼 년이 지났다. 브루스가 죽은 지 삼 년이 지났다. 그가 없어 뒤틀린 세상을 지켜보고자 내 손 안에 쥐었건만 그만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그 파편 속에 브루스는 더 이상 없었다. 부서진 세상과 함께 칼엘도 부서졌다.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세계의 브루스를 데려왔다. 이제야 한 조각이 모자랐던 퍼즐이 완성된 것 같았다. 세상이 다시 완벽해졌다. 이 행복을 놓기 싫어 나는 브루스를 내 손 안에 놓고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칼엘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브루스는 떠났다. 그가 아닌 다른 세계의 그를 택했다. 이 세계에서 칼엘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브루스를, 이 지구를 너무나 사랑했을 뿐이었다. 능력을 통제하는 법은 배웠지만 사랑을 다스리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두 번의 상실은 그 교훈을 얻기에 너무도 뼈아픈 대가였다.
정의는 브루스와 함께 죽었다. 칼엘이 모두 죽였다. 플래시의 재치, 아쿠아맨의 열정, 마샨의 자비와 최후에는 그린랜턴의 용기까지. 유일하게 다이애나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칼엘을 위해서가 아닌, 그녀의 삶의 터전을 슈퍼맨이 세상을 한 줌 재로 만들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임을 알았다.
다른 세계의 브루스가 떠나고, 다시 한번 내게서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찰나의 행복에 젖어 등한시했던 세상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칼엘은 혼자였다.
흰 망토를 벗어 던진 칼엘은 고담으로 갔다. 다른 세계의 브루스가 했던 마지막 말이 생명줄인 것처럼 그는 매달렸다. 클락. 그가 인간에게 어떤 짓을 했는데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면서 브루스는 칼엘에게 살아갈 방도를 주었다. 누구도 배트맨이 너그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제외한 모두를 그는 쉽게 용서를 했다.
그래서 그는 클락으로 살기로 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칼엘은 콧등으로 흘러내린 두툼한 안경테를 둔한 손길로 치켜 올렸다. 그는 놓아주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담에는 브루스의 흔적들이 많았다. 그가 숨 쉬고, 살았고, 사랑했던 도시에는 온통 브루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쉽지 않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능력을 써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파헤쳐 이제는 그가 사랑한 도시의 땅속에 파묻힌 남자를 다시 제 품 안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놓아야 했다. 브루스는 쉬어야 했다. 여덟 살 이후부터 한순간도 쉬지 못했던 남자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칼엘은 반쯤 허물어진 오래된 저택에 머물렀다. 매일 아침 일어나 벽돌을 나르고, 잡초를 뽑고, 먼지를 털어냈다. 한 인간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름 끼치는 적막을 메우고자 그는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능력을 쓰면 반나절도 안 걸리는 일이었지만 칼엘은 더 이상 능력을 쓰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 금빛 햇살을 뿌려대도 그를 신으로 만들어주는 축복의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부서진 건물을 고쳐나가며 칼엘은 브루스가 없는 세상에 점차 적응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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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해가 지났다.
“안녕, 칼엘.”
다이애나가 돌아왔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그녀의 우아한 자태와 강인한 턱은 변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이제는 전설로 남은 추억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똑같이 아름다웠다. 그런 원더우먼을 바라보며 칼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는 슈퍼맨이 아님을, 그녀가 찾아올 이유가 제게는 없음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마존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가 아니었다. 소년이었다.
“안녕.”
한때 날카로웠던 턱은 젖살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고 창백한 뺨은 혈색이 돌아 발그스름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새카만 머리칼은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헝클어졌다. 많이 달라졌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칼엘은 자신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적응한 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 년을 공들여 구멍 뚫린 가슴 위로 쌓아 올린 탑이 무너져 내렸다. 그 빈 구멍 위를 덮은 피부를 뚫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브루스.”
“오랜만이야.”
칼엘의 얼굴이 뜨거웠다. 그는 흙 묻은 손으로 제 뺨을 쓸었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눈앞의 소년이, 남자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칼엘은 눈물을 흘렸다. 어린아이의 얼굴에 피곤이 서렸다. 소년은 한순간도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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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은 항상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동료가 아닌 적으로서 슈퍼맨과 마주보던 날, 브루스는 자신이 이날을 맞이하도록 살아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리고 제 등 뒤에서부터 심장을 뚫어오는 손톱만 한 금속을 느꼈을 때는, 제 죽음이 고담의 쓰레기통 옆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배트맨에게는 항상 계획이 있었고,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준비를 해둬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다.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죽은 것은 영원히 죽어있어야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죽은 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의 균형을 위해서였다. 그 균형을 깨트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슈퍼맨과 전지전능한 메타휴먼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인간에게,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등 뒤에서 총을 맞아 죽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준비 되지 않았다. 브루스는 항상 총을 싫어했다. 제 죽음은 끔찍한 농담이었다.
배트맨은 죽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브루스 웨인은 다시 태어났다. 말 그대로였다. 네 살 아이의 육체에 마흔 살의 정신을 가지고 깨어났다. 그의 눈앞에는 다이애나와 자타나가 있었다. 마법. 부활은 더더욱 역겨운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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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는 인간들에게는 배트맨이 필요하다고 이유를 들었다. 브루스는 그 인간들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따졌지만 아마존의 공주님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 명의 삶이 전체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 하나가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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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수룩하게 긴 머리카락에,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은 눈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두꺼운 안경테가 가리고 있었다. 항상 또렷하던 파란 눈동자는 핏발이 서 흐릿했다. 그의 목덜미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흙먼지와 땀으로 더러워진 셔츠 아래 드러난 살갗에는 자잘한 흉터가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한 명의 인간을 보고 있었다. 세상을 포기한 남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남자는 구할 수 있었다. 그러기를 바랐다. 그 과정이 어렵더라도,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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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엘에게 대형폭탄을 안겨주고 다이애나는 떠났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칼엘은 열 살도 돼 보이지 않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지난 삼 년의 세월이 없었던 것처럼, 소년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칼엘은 빠르게 걸어가며 작아진 등을 쫓았다. 작은 손이 커다란 시계 뒤의 입구를 열고 케이브로 들어갔다. 그곳까지는 아직 칼엘이 손보지 못한 곳이었다. 바닥에 당도하자마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맹렬한 파란 눈이 칼엘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브루스, 나는……”
“내 허락 없이 고담에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브, 브루스……”
“이제 내가 죽었으니 고담이 네 거 같았어? 전 세계를 네 발아래에 조아리고 나니까 내 도시를 네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
소년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부드러운 아이의 피부는 더 이상 어른의 것처럼 표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어른이었다면 가슴팍에 닿았을 손가락으로 칼엘의 허벅지를 추궁하듯 찔러댔다. 크립톤 인은 황급히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같게 했다. 깡마른 허벅지 양옆으로 꼭 움켜쥔 주먹을 제 손안에 감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칼엘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브루스!”
“그럼 뭔데?”
“너랑……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어.”
“몇 피트 아래 파묻혀 썩어가고 있던 내 해골이랑?”
날카로운 목소리로 신랄하게 내뱉는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칼엘은 손을 뻗어 마른 어깨를 붙잡았지만 브루스는 그의 손을 털어냈다. 커다란 회청색 눈동자는 감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칼엘은 그 눈동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다 어디다 팽개쳐 두고 온 거지? 모두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이 모양 이 꼴밖에 보이지 않는 거지? 왜 세상에 슈퍼맨이 없는 거지?”
“내가…… 내가 다 망쳤어, 브루스. 난 모두를 실망시켰어. 아무도 슈퍼맨을 원하지 않아. 그래서 떠났어.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이제 알았어, 브루스. 아무도 날 원하지 않고서야 알았어. 널 실망시켰어.”
“그래, 맞아. 넌 내 모든 걸 망가트렸어.”
가슴께가 아플 정도로 묵직했다. 칼엘은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다시 회복시키는 것도 네가 해야 해.”
칼엘은 믿을 수 없었다. 브루스는 제 앞에 세상을 건넸다. 너무나 쉽게, 이렇게 간단히 칼엘의 손에 자신의 세상을 맡겼다. 그가 그의 세상을 무너트리고 결국은 그의 목숨까지 앗아갔는데도, 그는 그 암흑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가 다시 슈퍼맨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 그랬다간 내가 또 망쳐버리고 말 거야. 내가 또 통제를 잃고 세상을 망가트릴지 모른다고! 네가 또다시 크립토나이트를 내게 써야만 하는 상황은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아. 너랑 적으로 있고 싶지 않아. 젠장, 브루스! 내 눈앞에서 네가 죽었어! 나 때문에! 근데 그 위험을 또 감수하라고?”
조그만 발 한 쌍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무릎과 발목은 그의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을 정도로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이 작은 존재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더 이상 세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브루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상실이 두려웠다.
칼엘의 뺨에 손이 닿았다. 짧은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감싸 올려 소년의 눈과 마주하게 했다. 그 눈 속에 든 영혼은 소년이 아니었다.
“그래. 여기서 어른은 내가 아니라 너야. 그러니까 징징거리지 말고 어른스럽게 굴어. 네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소년의 손가락이 칼엘의 길어진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조그만 코가 찡그려졌다.
“이발도 하고 면도도 좀 해. 남들이 우리를 보고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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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엘은 거울 앞에 섰다. 삼 년만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브루스를 잊으려 하는 일을 빼면 모든 것이 삼 년만이었다. 턱과 얼굴에 거품을 내고 면도칼을 들었다. 그의 목에는 반지가 걸려있었다. 삼 년 전보다도 더 오래전, 그가 브루스에게 줬던 그 반지였다. 칼엘은 그의 능력과 브루스와의 추억을 맞바꿨다. 잠시 녹색 광물에 시선을 주던 칼엘은 면도를 시작했다. 브루스가 제게 돌아왔지만, 칼엘은 브루스를 그리워했다.
그날 밤 칼엘은 브루스가 방에서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가슴이 생명으로 오르락내리락 들썩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브루스는 살아있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속도가 빨라진 심장 소리가 그의 의식 한 켠을 가득 채웠다.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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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를 지켜보다가 동이 틀 때쯤 칼엘은 잠이 들었다. 그는 짤막한 비명을 듣고 깨어났다. 그의 몸에 엉킨 담요 때문에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브루스. 심장이 뛰었다. 포이즌 아이비의 덩굴 같은 담요에서 황급히 빠져나온 칼엘이 기다시피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욕실 바닥에 브루스가 앉아있었다.
“브루스……?”
다른 사람의 존재에 여덟 살 소년의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칼엘의 가슴이 안도로 내려앉았다.
“뭘 봐? 넘어진 사람 처음 봐?”
눈 꼬리에 눈물을 매달고서는 이전만큼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칼엘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에 콧방귀를 뀌고는 브루스는 혼자서 일어섰다. 칼엘은 허공에 버려진 제 손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괜찮아?”
“그래. 네가 이만 나가준다면 그러겠어.”
“브루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나가.”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
“망할 세수를 하려다가! ……망할 세면대에 손이 안 닿아서 젠장 맞게 넘어진 일이 있었지. 됐어?”
조그만 손에 의해 욕실 밖으로 떠밀려 나간 칼엘의 얼굴 앞에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칼엘은 한참이고 문 앞에 서서 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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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엘은 자신이 차려준 아침을 깨작거리는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몸은 여덟 살이 되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우아했다. 핑크빛이 감도는 조그만 입술이 오물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칼엘은 마음이 자꾸만 벅찼다. 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고, 가냘파진 어깨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비록 정신은 성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브루스의 마음이 죽기 전과 같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한참 깨작이던 브루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더 안 먹으려고?”
“난 이미 마흔 살이야, 칼엘. 더 자랄 필요 없어.”
“하지만…….”
“네가 알프레드의 목을 비틀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쓰레기를 아침으로 먹지 않아도 됐겠지.”
브루스는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곧장 케이브로 향했다. 클락은 조금밖에 줄지 않은 그의 접시와 손도 안 댄 자신의 접시를 바라보았다. 증오가 담긴 소년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에 매번 새로운 상처를 냈다. 칼엘은 쓰레기통에 접시를 비웠다. 되살아난 브루스의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감정이 오직 증오로만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 마음이 꾸준히 뛰기만 하면 됐다. 살아있기만 하면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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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는 잠이 들었다. 아직 한낮인데도 커다란 모니터 앞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봤을 때 칼엘은 곧장 그에게 달려가 그의 코 밑에 손을 대보아야 했다.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계속 들리는데도 확인해야만 했다. 가느다란 손목에 가만히 손가락을 얹어 그 밑에서 뛰는 맥박을 느끼고 나서야 칼엘은 브루스가 단순히 낮잠을 자고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덟 살의 브루스에게 의자는 너무나 컸다. 커다란 의자 속의 브루스는 너무나 작아 보였다. 연약하고, 다치기 쉬워 보였다. 내내 그를 노려보기만 하던 시린 눈동자는 눈꺼풀 뒤로 숨었고, 찌푸려졌던 이마는 반듯하게 펴있었다. 잠든 브루스는 평화로워 보였다. 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브루스는 잠이 들어야만 긴장을 풀 수 있는 것일까? 소년은 제 곁에서 안식을 찾지 못했다.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했던 일이었고 다시금 이전과 같은 신뢰를 얻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바라는 것은 달랐다.
칼엘은 점점 분노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이기적인 자신을 향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는 브루스가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먼저 그의 사랑을 내친 것은 자신이면서 감히 용서를 기대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칼엘은 황급히 상념에서 벗어나 소년에게 주의를 돌렸다. 잠시 전의 평화로움은 모두 사라지고 어린 아이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아, 아빠……! 아빠, 안 돼요…… 어, 엄마…… 엄마! 가지 마세요, 엄마……!”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앙상한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상실과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깊은 후회를 멈춰보고자 하는 무기력한 시도였다. 작은 손이 허공을 움켜쥘 때마다 칼엘의 심장이 비틀렸다. 브루스가 찾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칼엘은 뻗어진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마주 댔다. 놀라울 정도로 강한 악력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잠으로 달뜬 입술이 울음으로 떨리기 시작했을 때 칼엘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소년을 품에 끌어안았다.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담긴 후회와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 가벼웠다. 품 안에서 브루스는 떨었다. 칼엘은 제 온기가 소년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랐다.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소년의 헝클어진 머리칼에 칼엘은 연신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있어. 내가 곁에 있을게. 널 떠나지 않을게. 브루스.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게. 자신의 존재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소년이 평생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던 무게를 자신이 덜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에게 짊어진 많은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 품 안의 소년의 떨림이 잦아들고 그가 점차 진정하기 시작했을 때, 칼엘은 자신의 눈시울도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부활로 구원 받았건만 정작 부활한 자를 위한 구원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소년은 악몽에서 깨어나 그보다 자비롭지 않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브루스…….”
어떤 위로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칼엘을 노려보지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거나 신랄한 말로 비난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브루스는 조용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휘청거리다 케이브를 빠져나가는 그를 칼엘은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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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는 쿠키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알프레드가 구워준 것만 못하다며 한참이고 그를 갈구더니만 칼엘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 한 접시가 반은 동이 나 있었다. 입술 옆에 부스러기가 묻은 줄도 모르는지 시치미를 뚝 떼고 팔짱을 낀 브루스는 정말 여덟 살 같아 보여서 칼엘은 웃음을 삼켰다. 잠시뿐이었다. 브루스는 서른두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슈퍼맨으로는 언제 되돌아갈 생각이지?”
“브루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세상은 슈퍼맨이 필요해, 칼엘.”
“하지만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산수를 해, 칼엘. 육십 억 인구와 나 한 명. 뭐가 더 중요하겠어?”
“너.”
브루스가 마침내 입술 옆의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우스운 소리 하지 마. 난 여덟 살이야. 배트맨도, 브루시 웨인도 아니고 그냥 삐쩍 마른 어린애라고. 나한테 위험한 일이 생겨봤자 욕실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는 일이야.”
“하지만 만약…….”
“만약 뭐? 잘못 미끄러져서 뒤통수라도 깨져 죽을까 봐? 몸은 어려졌어도 그렇게 바보같이 죽지 않을 정도의 반사 신경은 남아 있어, 칼엘.”
칼엘은 마른세수를 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결국 언젠가는 다시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야 할 것이었다. 브루스가 원하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네가 돌아온 지 이제 나흘째야, 브루스. 내게 시간을 더 줘.”
브루스가 의자를 딛고 벌떡 일어섰다.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의 홍채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브루스는 쏘아붙였다.
“아니! 시간이 없어. 세상엔 슈퍼맨만 없는 게 아니야. 저스티스 리그도 없고 배트맨도 없어. 저스티스 리그는 네가 모조리 죽여 버렸고 배트맨은 여덟 살이 됐어. 어떤 범죄자가 일 미터를 간신히 넘기는 배트맨에게 겁을 먹겠어? 그러니까 선택사항은 없어. 이제 세상엔 슈퍼맨밖에 남지 않았어.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리고 칼엘의 목덜미로 손가락이 스쳤다. 순식간에 크립토나이트 반지가 걸린 끈이 그의 목에서 풀렸다. 어떻게……라는 물음은 제 혀 안에서 죽었다. 몇 살이든 그는 배트맨이었다.
“이 바보 같은 물건은 내가 다시 가져가지.”
반쯤 걷힌 커튼 사이로 금빛 햇살이 쏟아졌다. 많지는 않았지만, 칼엘의 목덜미에 난 면도칼 흉터가 빠르게 사라졌다. 서서히 힘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크립톤 인은 그들의 관계도 이와 같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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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엘은 슈트를 입었다. 파란 옷과 붉은 망토. 사람들은 흰 망토의 슈퍼맨을 빠르게 잊었다. 빠르게 용서했다. 그들에겐 구원이 필요했다. 영웅이 필요했다. 그렇게 세상엔 슈퍼맨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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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이 고담에 돌아왔을 때, 브루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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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은 로빈 옷을 입은 브루스를 고담의 한 뒷골목에서 발견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상관없었다. 슈퍼맨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맹렬히 저항하는 소년을 품에 안고 슈퍼맨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잿더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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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생각이었어, 브루스?! 정신이 나간 거야?!”
“너야말로 제정신이야, 칼엘?! 히트비전?! 민간인을 상대로?!”
“민간인? 민간인! 그놈들은 유괴범이야, 브루스! 망할 범죄자라고! 널! 널 납치했어!”
“그런다고 죽여? 그게 네가 달라진 모습이야? 어? 내가 죽고 나서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어? 우리가 뭘 겪었는데 아직도 이따위야?”
“노력하고 있어! 젠장, 브루스! 난 노력하고 있다고!”
“노력? 사람 열두 명을 눈에서 레이저를 쏴서 잿더미로 만드는 게 노력이야? 그게 달라진 거야? 산채로 조커의 심장을 쥐어 뜯어내 죽였을 때랑 다른 게 뭐가 있어, 어?!”
“너! 너를 데려갔잖아! 브루스, 그 새끼들이 나한테서 너를 데려갔어! 너를 해치려고 했어. 널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나보고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그래!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어!”
“넌 여덟 살이야, 브루스! 시발!”
칼엘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떨어지며 유리 파편이 튀었다. 브루스의 부드러운 뺨에 길쭉한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렀다. 그것이 신호였다. 슈퍼맨은 무너졌다. 소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분노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넘실거리는 절망이 메웠다.
“브, 브루스…… 괜찮아? 많이…… 많이 다쳤어?”
피가 흐르는 뺨을 향해 떨리는 손이 다가갔다. 아직도 이전의 말싸움으로 인해 브루스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칼엘의 손이 소년의 뺨에 닿기 전, 브루스는 고개를 틀었다.
“난 자러 갈 거니까 뒷정리는 알아서 해.”
중력을 거스르고 우주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 남자의 손이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상을 구한 남자는 절망에게서 스스로를 구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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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엘은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가라는 말도 없었으니 칼엘은 살며시 문고리를 돌렸다. 브루스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칼엘은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그의 옆으로 날아갔다.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뺨에 난 얕은 상처를 제외하고는 무사했다. 다친 곳이 없었다. 칼엘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그의 흉터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소년의 온기가 그에게 스며들기에는 충분했다. 미안해, 브루스. 속삭였다. 그리고 달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브루스……”
“뭐하는 거지?”
“노크……했는데 네가 대답이 없어서 난…… 너, 네가 괜찮은가 궁금해서…… 잘 자는지만 확인하려고 들어왔다가 뺨에 상처를 보고…….”
중얼거리던 칼엘은 말을 멈췄다. 공중에 떠 있던 발을 땅바닥에 디뎠다.
“미안해, 브루스. 다시는 오늘 같은 일 없을 거야.”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나가.”
“조건이 있어.”
“뭐?”
“다시는 아무 말 없이 혼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난 어린애가 아니야, 칼엘. 언제 어딜 가든지 그건 내 마음이야.”
“알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래. 브루스, 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네 육체는 여덟 살이야! 너도 알잖아! 오늘은 대체 어딜 가려고 했던 거야? 고담이 너처럼 어린아이들한테 얼마나 위험한 도시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브루스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 바로 그래서야. 이 도시에는 내가 필요해.”
“내가 네 몫까지 지켜볼게. 내가 널 위한 배트맨이 될게.”
“하지만 넌 슈퍼맨이잖아.”
“네 도시를 뺏으려는 것도 아니고, 너한테서 배트맨을 뺏으려는 것도 아니야. 브루스, 네가 다시 어른이 될 때까지만, 아니 적어도 청소년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배트맨에게서 멀어져 있어 줘.”
“칼엘, 넌 이해 못 하고 있어.”
“그럼 이해를 시켜줘!”
칼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미안해, 소리 지르려던 건 아니었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자꾸만 가라앉았다. 브루스가 돌아왔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꾸만 위험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아무리 슈퍼맨이라도 지켜주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지난번처럼. 그의 시체를 두 번 묻고 싶지 않았다.
“넌…… 칼엘. 네가 슈퍼맨이어야 하는 것처럼 나는 배트맨이어야 해. 네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하지. 너는 낮이고 나는 밤이야. 네 옆에는 배트맨이 있어야 해. 만약 네가 잘못되거나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상황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나는…… 내가 그 파트너였어, 칼엘.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은 없을 거야. 비록 망할 여덟 살이 됐다고 하더라도.”
“브루스,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내가 왜 다시 살아났겠어, 칼엘? 왜 그들이 날 다시 살렸겠어? 세상엔 슈퍼맨이 필요하고 너에겐 내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그놈의 빌어먹을 마법을 나한테 쓸 거였으면 제대로 했어야지 난 망할 네 살로 되살아났어! 사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겨우 넘어지지 않고 뛸 수 있는 정도야. 난 예전만큼 키가 크지도 않고, 힘이 세지도 않아. 조금만 격하게 움직이면 금방 지쳐서 망할 낮잠을 자야 하고 망할 받침대가 없으면 망할 세면대에 손이 닿지 않아서 세수도 못 한다고!”
브루스의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속눈썹을 축축하게 적실 정도로 고인 눈물은 금방이라도 타고 흐를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 눈물을 닦아주지 못해 칼엘의 손가락이 저렸다. 브루스가 제 손길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난 무능력해, 칼엘. 너한테 달라진 게 없다고 따졌지. 하지만 정말 달라지지 않은 사람은 나야. 죽기 전의 여덟 살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없이 무능력해. 너는 여전히 절망적이고, 능력은 이제야 되찾은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분노도 여전히 통제 못 하잖아!”
“아니야, 내가…… 내가 잘못했어, 브루스. 내가 열심히 할게. 내가 노력할게.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눈물이 브루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무기력한 것은 칼엘이었다. 어깨가 떨리고 딸꾹질을 할 정도로 브루스가 울고 있는데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눈물로 흐려졌어도 그의 눈은 칼엘에게 향해있었다.
“이렇게 된 나를 볼 때마다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도 알아.”
칼엘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그게 아니야, 브루스. 난…….”
“아니, 난 너한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내 몸 하나 통제도 제대로 못 해. 지금도 이 망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칼엘은 손을 뻗었다. 브루스는 밀어내지 않았다. 잔뜩 젖은 그의 뺨을 엄지로 닦았다. 금방 새로운 눈물에 적셔졌다. 칼엘은 연신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브루스의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칼엘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브루스의 눈물이 제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를 뚫고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왜…… 내가 필요해?”
칼엘의 목울대가 울렸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 역시 젖어들었다.
“너를…… 사랑해서. 브루스, 내가 너를 많이…… 정말 사랑해서, 그래서 미안해. 브루스, 사랑해서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필요해.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울지 마, 브루스.”
소년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칼엘은 황급히 팔을 뻗었다가, 실수를 깨닫고 몸을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셔츠 칼라를 움켜쥐었다. 작은 손길이 그를 끌어당겼다. 크립톤 인의 손이 조심스럽게 소년의 마른 등에 내려앉았다. 얕은 숨이 그의 목덜미에 뿌려졌다.
“방법을 알면…… 진작 그쳤지, 멍청아.”
브루스의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온기에 빠르게 녹아들며 칼엘은 제게 안긴 생명을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감히 그가 갈망했던 구원이 제게 안겼다. 다시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조금씩 떨림이 가라앉고, 이따금 브루스가 코를 훌쩍였다. 작은 속삭임이 그의 가슴팍을 간질였다.
“난 여덟 살이야, 클락.”
칼엘은, 클락은 품에 안은 소년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드러나는 창백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기다릴게. 저번에는 널 기다리게 했지.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게. 기다릴 수 있어.”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점차 잠에게 빼앗겼다. 클락은 개의치 않았다. 잠든 소년의 이마에, 머리칼에,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추적추적 빗소리는 자장가이자 찬송가였다. 구원을 받은 남자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다가올 기다림은 다가올 아침처럼 두 사람 모두에게 축복이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