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의 일은 지구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외계 행성을 탐사하던 도중 지구 최고의 탐정은 빌런이 남긴 불발탄을 발견하고 관찰하려고 다가갔다. 하필 그때 불발탄...이 아니고 그 옆의 괴생물체가 터졌다. 버섯 형태로 생긴 그 물체가 뿜어낸 것은 얼핏 보기에는 연기 같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포자 무더기였다. 배트맨은 망토로 황급히 입과 코를 가렸다. 신체와 정신에 당장의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흡기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B?"
슈퍼맨이 물었고 배트맨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배트맨의 성정을 아는 슈퍼맨은 더 묻지 않았다. 어쩌면 더 물어봐야 했을지 모른다고 슈퍼맨은 이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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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플래닛에서 어깨를 옹송그리고 자판을 두드리던 클락 켄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12시간 이후의 일이었다. 메트로폴리스 번호가 아니었다. 고담 억만장자의 충직한 집사가 일개 기자에게 저택 번호로 친히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배트맨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케이브를 통해 연락했을 터고, 브루스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휴대전화로 연락했을 것이었다. 저택 번호로 연락한다는 것은 웨인가의 입장에서 연락했다는 의미인데 신중한 집사가 대체 무슨 일로...
전화를 받으면 알게 될 일이다. 클락 켄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켄트 씨."
미국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국 억양이 옅어지지 않는 집사의 말투에서 기자는 당황을 읽어냈다. 클락 켄트는 의식을 집중했다. 그가 늘 귀를 기울이는 인물이 지구상에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집사의 하나뿐인 도련님이었다. 심장 소리는 언제나처럼 일정했다. 영문을 알기 어려워졌다.
"무슨 일인가요?"
클락 켄트가 입을 여는 순간 데일리 플래닛 사람들의 심장은 불규칙해졌다. 소란에 클락의 시선이 출입구로 향했다.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저 남자는 분명한 외부인이자, 집사가 급하게 전화를 건 원인이었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고담의 억만장자는 캔자스 출신 기자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전화기를 붙든 기자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편의점 타블로이드부터 주간지 사회면까지 골고루 장식하는 주인공이 미소를 지었다. 추문이 끊이지 않는 장본인답게 눈부시게 달콤했다.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집사가 말했다.
"기억에 이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브루스 웨인이 말했다.
"안녕, 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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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켄트는 브루스 웨인을 데리고 허둥지둥 비어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블라인드를 치고 문을 잠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을 막았다. 회사 밖으로 데려갔다가는 오히려 더 이목을 끌 것이었다. 싸구려 커피가 든 종이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을 쏟아부은 남자의 손에 쥐여 있었다.
"웨인 씨." 기자는 차분한 말투로 운을 뗐다. 손으로 쉴 새 없이 볼펜을 딸깍거렸다. 백만장자가 기자의 손을 감싸서 저지했다. "브루스."
"웨인 씨." 고집스럽게 말한 기자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무슨 일로..."
"신문사에 왜 오겠어요?"
데일리 플래닛에 브루스 웨인의 인터뷰가 잡혀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날짜는 오늘이 아니었고, 담당 기자는 클락 켄트가 아니었으며, 방식도 대면이 아니었다. 인터뷰는 핑계라는 소리였다. 클락은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우스운 일이 아니면서도 우습지만, 브루스 웨인이 기억을 잃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브루스만이 아니었다. 클락도, 또 다른 히어로도 마찬가지였다.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르는 순간부터 부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브루스 웨인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브루스 웨인의 기억은 제법 온전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의 두 번째, 혹은 관점에 따라 첫 번째 신분에 대한 것이었다.
"손님 대우가 영 형편없네."
시늉으로 쥐여준 커피를 그새 마셨는지 종이컵이 비어 있었다. "커피머신이 좀 낡아서... 새로 타드릴게요." 클락이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을 뒤적였다.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배트맨의 기억을 잃었을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 오래 묵은 트라우마가 켜켜이 엮여 있어서 섣불리 언급했다간 정신적 손상이 클 수 있었다. 신문사 찬장에 백만장자의 입맛을 충족시킬 만한 싸구려 티백은 없어 보였다. 찬장을 뒤적이던 손 옆에 길쭉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켄트 씨."
브루스 웨인이 기자의 오른쪽 옆에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기자의 오른쪽 등과 백만장자의 왼쪽 팔이 스쳤다. 가까운 거리가 느껴졌다.
"클락."
어조의 변화에 클락의 시선이 백만장자에게 향했다. 싹튼 줄도 몰랐던 불안함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삽시간에 불어났다. 브루스 웨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란히 놓인 손은 닿지는 않았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클락의 손이 움찔했다. 백만장자의 눈이 깊어지는 순간 클락 켄트는 확신했다. 브루스가 이상하다. 분명히, 확실히, 틀림없이 이상하다. 불쑥 회사에 찾아오는 브루스 웨인은 익숙했다.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브루스 웨인, 공허한 바람둥이 갑부의 연기를 하는 브루스 웨인도 익숙했다. 그때의 브루스는 브루시였다. 하지만 지금 클락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브루시가 아니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브루스든, 브루시든, 배트맨이든.
"오늘 좀 이상하네, 스몰빌."
클락 켄트에게 키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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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키스를 당한 이후 얼떨떨하게 굳은 클락 켄트를 데리고 백만장자는 초라한 연봉의 기자는 존재만 알고 가본 적이 없는 레스토랑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통째로 예약했으리란 것 정도는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우아한 음악에 맞춰 나오는 코스 요리를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클락 켄트는 브루스의 이상 행동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45분의 대화를 나눈 끝에 기자가 취재 대상에게 얻어낸 특종이란 이랬다. 브루스 웨인은 기억에 이상이 생겼고, 배트맨은 다른 사람인 줄 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기억 상실의 영역으로 분류해도 무방했다. 전에 겪어본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브루스는 클락 켄트와 자신이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에 구멍이 뚫린 저 뇌에서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그런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 크립토니안은 좀체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충실하게 연인 장단을 맞춰 주고 있기는 했다. 그래 봤자 브루스 웨인이 하자는 대로 전부 따라 주는 것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었다. 클락은 브루스 웨인의 파트너이긴 했지만 이런 종류의 파트너가 되어본 적은 물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브루스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그를 어떻게 대할지는 잘 알았지만 연인으로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브루스가 딱히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브루스가 생각하는 클락과의 로맨틱한 관계는 평소 그들의 파트너 관계와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고담의 정치 상황을 얘기하던 와중이었다. 웨이터가 디저트를 들고 나왔지만 백만장자가 물렸다.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사라지는 웨이터의 기척에서야 접시 위의 음식을 해체하던 기자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먹어? 좋아하는 거잖아."
"일어나지."
데일리 플래닛에 들이닥쳤던 때와 비교하면 브루스가 확실히 가라앉아 보였다. 클락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머리 아픈 거야?"
"머리가 왜?"
"인상을 찌푸리길래."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평소의 브루스라면 자연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배트맨의 과업을 벗어던진 브루스에게는 낯선 얼굴이었다. 오후 내내 같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증상이 악화하는 건가 싶어 클락이 손을 뻗어 브루스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반쯤은 피할 것을 예상하고 한 행동이었는데 의외로 브루스는 순순히 손길을 받았다. 열은 없었다. 클락은 안도하는 한편 불안해졌다. 평소라면 패트롤에 관한 일을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브루스는 아프지도 않고, 패트롤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클락 켄트가 슈퍼맨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좀 걷지."
"잠깐만."
클락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서 건넸다. 브루스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괜찮아. 안 추워."
"이대로 나가면 파파라치가..."
브루스가 단정하게 넘긴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왠지 심기를 더 잘못 건드릴 느낌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이 건넨 점퍼를 낚아채듯 받아서 걸쳤다. 클락에게도 헐렁한 점퍼라 백만장자에게도 핏이 전혀 맞지 않았다. 입어 놓고 보니 패션지 커버를 장식하는 백만장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 흐트러진 머리. 정장 바지를 입었으면서도 핏이 맞지 않는 점퍼.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같았다. 브루스 웨인에게서 느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감상이라 클락은 슬쩍 웃음을 삼켰다. 브루스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안 웃기는 농담이라고 하겠지.
두 사람은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브루스는 그들이 연인이라고 생각했고, 브루스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충실한 연인이라면 기분이 안 좋은 연인을 응당 달래줘야 했고, 클락은 매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브루스는 연인의 스킨십으로 기분이 풀리는 타입일까? 동료로서 배트맨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은 그의 방식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고, 친구로서 브루스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해 주는 것이었다. 브루스는 눈부신 지성과 어두운 트라우마를 지닌 꼬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칼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전혀 달랐지만 비슷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했다. 브루스가 잃어버린 것, 만들어 낸 것을 클락은 어떻게 채워주고 따라잡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해도 바로잡아야 할 텐데... 알프레드와 상의하는 게 우선이었다. 웨인가에 문전박대당하지 않으려면 이 데이트 산책을 무사히 마치는 게 급선무였다.
차라리 브루시 웨인이었다면 상대하기 편했을 텐데. 말 많고, 플러팅 많고, 가벼운 브루시는 휘둘리듯 장단을 맞춰주면 그만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본질이 배트맨이고 브루스가 가면일 뿐이라고 종종 얘기했지만, 운명적인 밤을 겪은 8살 소년 브루스도 브루스의 본질이었다. 브루시야말로 가면이었다. 브루시도, 배트맨도 아닌 브루스 웨인은 조용하고 우울한 청년이었다. 클락의 눈에 가판대가 들어왔다. 브루스의 손을 덥석 잡아 끌었다.
차갑고 달콤한 디저트를 나란히 하나씩 받아들었다. 네가 사니 내가 사니 옥신각신하다가 끝내 클락이 승리했다. 가난한 기자가 지갑을 털었다. 브루스는 그걸 가지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손가락에 묻을까 봐 클락이 가판대에서 몇 장 가져온 티슈를 건넸다. 집사에게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도련님은 아이스크림을 전혀 흘리지도 묻히지도 않았지만 소프트콘이라 입술에 아이스크림이 묻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브루스가 손을 뻗자 순간 장난기가 든 클락이 티슈를 손에 건네주는 대신 브루스의 입술을 슥 문질러 닦았다.
갑작스러운 어린애 취급에 당황한 브루스가 입술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황망한 얼굴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 당황스러워 보여서 기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클락의 정강이를 걷어차던 브루스도 결국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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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늦었으니 브루스는 바로 고담으로 돌아가지 않고 클락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몇 시간이면 돌아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브루스가 그러겠다고 해서 클락은 알겠다고 했다. 브루스가 부쩍 피곤해 보였다. 슬쩍 몸을 스캔해 봤지만 딱히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외계 버섯이 인간의 신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손님이니 먼저 씻으라고 해도 손님이기 때문에 먼저 씻을 수 없다며 브루스가 욕실에 밀어넣은 통에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온 클락은 브루스가 씻는 동안 그의 잠자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고민했다. 도련님을 소파에서 재울 수는 없으니 기자가 소파에서 자야겠지. 소파에 베개와 이불을 옮기는데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 씼었냐고 물어보며 고개를 들던 클락은 샤워 가운도 아니고 수건 한 장만 하반신에 두른 고담의 황태자의 등장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뒀는데..."
"봤어."
브루스는 머리를 털면서 클락의 집을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며 기웃거렸다. 수건에 매듭을 어떻게 지어놓은 것인지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었다. 클락은 미처 닦지 못한 물방울이 브루스의 몸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저도 모르게 보다가 수건 사이로 사라지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돌아다니다니 알프레드가 도련님을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 같았다. 브루스가 소파에 앉는 사이 클락은 브루스가 입을 옷을 가져왔다.
"침대에서 자."
"싫어."
"시트 새거로 갈아놨으니까..."
클락이 말했지만 브루스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옷가지를 건네줘도 안 받았다. 클락이 티셔츠를 브루스의 머리통에 씌워서 눌렀다. 입혀주니까 티셔츠 한 장을 겨우 입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어줬다. 정말 도련님이군. 클락이 피식 웃었다. 그런 클락을 바라보던 브루스가 투덜거렸다. "이제야 웃는군."
"무슨 소리야?"
"놀라게 해주려고 온 건데. 딱히 즐거워 보이질 않던데."
클락은 이마를 짚었다. 브루스를 걱정하느라 눈앞의 브루스에게 소홀했던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서로 바쁜 사람이니 함께 있어도 서로가 최우선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클락을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브루스에게는 섭섭한 일인 듯했다. 브루스가 배트맨의 기억을 잃을 때마다, 클락은 비극을 겪지 않은 브루스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했다. 누구도 그런 비극을 겪지 않았으면 했고, 그런 비극을 두 번 살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부작용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기억은 돌아와야 했다. 모래 위에 지어진 성처럼 불안정한 찰나의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비극이 닿지 않은 정신을 지켜주고 싶었다.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클락의 손이 다정하게 브루스의 뺨을 감쌌다. 즐거웠어. 속삭였다. 단순히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난감했지만, 돌이켜보면 단연코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보낸 시간이었지만 평소에 그들이 보내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억 상실을 도피처로 삼아 어떠한 과업도, 압박도,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 한때로 도망쳤을 뿐. 오롯이 서로에게 서로만 존재하던 시간이었다. 상대한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슈퍼맨의 과업도, 기자 클락 켄트의 의무도, 칼엘의 트라우마도 잊고 클락 켄트라는 인간으로 배트맨도, 브루시도, 웨인가의 유일한 상속자도 아닌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간을...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어쩌면... 클락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브루스가 몸을 기울였고 무게중심이 뒤로넘어갔다.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남자는 순순히 소파 위로 쓰러졌다. 방금 샤워를 마친 두 사람에게선 같은 치약 냄새가 났다. 오고가는 숨결이 뜨거워졌다. 클락은 브루스의 어깨를 잡더니 몸을 뒤집으며 입술을 뗐다. 브루스의 입술이 따라오려 했지만 막았다. 혼란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며 클락은 브루스의 이마에 제 이마를 떨궜다.
"브루스... 할 말이 있어."
"헤어지잔 소린 아니겠지."
"아니야."
"그러면 왜?"
"지켜주고 싶어."
그 말에 브루스 웨인이 코웃음을 쳤다.
"스몰빌. 난 미성년자도 아니고 동정도 아니야."
"그렇지만 넌..." 클락이 고개를 들고 브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기억을 잃었어."
클락이 브루스에게 떨어졌다. 브루스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기억이 있는 너라면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걸... 이 관계를."
브루스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브루스?"
클락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자 브루스가 그 손을 쳐내더니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끝이 씁쓸했다.
"알아."
"뭘?"
"나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알아. 눈을 떠보니 알프레드가 몇 가지 질문으로 내 상태를 확인했어. 기억을 잃은 것 같다더군. 과연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려고 하면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어. 불완전한 기억에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 첫째로 알프레드였고 그다음은 너였지. 알프레드가 채워줄 수 있는 기억에는 한계가 있었어. 내가 기억을 잃게 됐을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너라고 하길래 내 기억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넌 누굴까? 알프레드가 내 기억을 많이 차지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넌? 그냥 기자일 뿐인데, 고담 사람도 아닌데 우리는 어떠한 유대를 형성했어. 어떻게?"
브루스가 일어서서 옷을 챙겨 입었다. 클락이 대학 시절 입던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지만 눈을 번뜩이며 서성거리는 얼굴은 클락이 기억하는 그의 표정과 비슷했다.
"기억 속 우리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종합해 추리한 결과... 우리가 어떠한 관계라는 것은 알 수 있었어. 내가 추측한 결과가 맞다면... 넌 더욱 중요한 열쇠가 될 테니까. 그래서 널 확인하러 갔고 네가 나를 보는 눈빛과 태도를 읽었고 스킨십을 한 이후의 신체 반응을 보고 내 추측이 맞다고 확신했어."
브루스가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읽을 수 없었다.
"브루스."
"절대 확신하면 안 돼. 뭐든 100% 확실한 건 없어. 매사에 의심해야 했는데 방심하고 말았어. 치즈처럼 기억에 구멍이 숭숭 뚫린 주제에 확신하다니. 오만했던 거지."
"브루스."
클락이 일어나 브루스의 팔을 잡았다. 몸을 돌려세우려 했지만 브루스가 거부했다. 실랑이가 일었다.
"연기가 제법이야, 스몰빌. 넌 그저 장단을 맞춰준 거였겠지. 내 추리는 틀렸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에 유대가 있었다는 건... 틀리지 않았을 테니까. 넌 그 의리를 지킨 건데 난... 난처하게 해서 미안하군."
브루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클락을 마주했을 때는 표정을 정돈한 상태였다.
"브루스, 자고 가. 난..."
클락이 붙잡았다. 브루스는 순순히 잡혀 있었지만 결국에는 떠나리란 것을 둘 다 알았다. 클락은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사람을 움켜쥐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즐거웠어. 오늘 너와 있으면서 원하지 않은 것을 한 적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 적도 없어."
그래, 네 추리는 틀렸어. 그렇지만 맞기도 해.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어. 우리의 관계에 어떤 이름이 붙든 나는 상관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오늘과 이전의 다른 점까지 포함해서 즐거웠어. 진심이야.
클락 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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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버섯의 효과는 영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3일 후 자연스럽게 증상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알프레드에게 전해들었다. 클락 켄트는 (기자의 삶과 슈퍼맨의 삶을 포함한) 긴 하루를 마치고 퇴근했다. 오늘은 어린이 피해자가 많아서 정신적으로 더 힘든 하루였다. 별다른 사건 사고가 또 터지지 않길 기도하며, 그대로 엎어져 자고 싶었다. 클락은 어두컴컴한 실내에 잠시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불을 켰다. 그리고 주춤했다. 슈퍼맨을 놀라게 할 사람은 지구상에 몇 없었다. 기자의 조그마한 식탁에는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전에 먹지 못하고 돌려보낸 디저트의 앞에는 몇 시간을 연인으로 살았던 고담의 십자군이 앉아 있었다. 패트롤을 하다가 왔는지 배트맨 슈트를 갖춰 입고 카울만 벗은 상태였다. 배트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클락은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문지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녀왔어."
접시에 작은 조각을 얹어 건네는 손길은 무심했지만, 포크에 찍어 입으로 넘어가는 케이크는 달콤했다. 늘 그가 귀를 기울이는 소리가 의식에 들어왔다. 정교하게 훈련된 일정한 소리. 순간 미묘하게 박자가 달라졌다면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클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크립토니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최고의 파트너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입술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그는 이 역시 놓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