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도박에 빠지고, 빚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간절해진 어머니는 연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사기꾼에게 당해 빚에 빚을 더했다. 절박해진 당신은 종교를 찾았고 하필 사이비에 빠졌다. 돈 없고 힘 없는 것들을 쪽쪽 빨아먹는 거머리들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힘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인 일반인 미즈키로서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절연당하고 만다. 이제 미즈키가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땅바닥을 딛고 선 두 다리. 그 두 다리로 서 있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 그러니까 자기 자신뿐이다. 의지할 부모가 없어진 미즈키는 고아가 됨으로써 죄책감이 덕지덕지 묻은 후련함을 느낀다. 빚을 더 만들어 올 사람도 없어진 것이다. 비록 기존의 빚이 눈덩이처럼 몸집을 불리고 있기는 해도, 그 빚에 새로운 빚을 보탤 사람은 이제 없다. 이제 갚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는 자유가 될 것이다. 미즈키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빚을 갚는 것. 부모가 지운 족쇄를 끊어버리는 것. 그러려면 올라가야 한다. 권력과 돈을 얻어야 한다. 미즈키는 자존심과 명예, 체면 같은 번지르르한 것을 내버린다. 상사에게 아첨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쉽게 무릎을 꿇는다. 쌓이는 스트레스만큼 술병과 담뱃값도 쌓여간다. 몸을 망치고 있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끝날 날이 올 거니까. 미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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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은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과 절연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아들을 팔아넘겼다. 하루아침에 전통 복식을 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퇴근하던 미즈키를 선팅이 짙게 된 차량에 태웠다. 영문을 모르고 거칠게 저항하던 미즈키는 머리 어딘가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질반질하게 닦인 마룻바닥 위에 뺨이 눌려 있었다. 미즈키는 차가운 바닥에 오래 있어서 얼얼해진 뺨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려고 했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버둥거려도 꼼짝하지 않고, 살갗을 옥죄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미즈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몸을 살폈다. 온몸이 밧줄로 묶여 있었다. 몸부림을 치다가 무언가를 발로 찼는지 쿠당탕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깼군."
그것을 시작으로 남자는 설명을 시작했다. 길지는 않았다. 첫째, 미즈키는 이제부터 자신이 모시는 가문의 귀한 딸을 대신하여 신의 신부가 될 것이다. 둘째, 미즈키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이미 미즈키의 사주단자를 신께 올렸기 때문에 미즈키가 거부하면 미즈키는 신을 기만한 죄로 화를 입게 된다.
미즈키는 신이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협박 따위 웃기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니 하나님이니 하는 글로벌한 유일신도 믿지 않는데 토속신앙 따위 무서울 리 없다. 미즈키가 무서운 것은 첩첩산중 인적 드문 곳의 잡신이 내릴 액보다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빚이다.
신에게 제물로 바쳐져서 미즈키가 얻는 것은, 신의 신부가 된다는 영예.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한 영혼만이 이 영예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미즈키는 자신이 속세의 때가 덕지덕지 묻다못해 땟국물이 흐를 것이 뻔한데 무슨 말인가 싶었으나, 남자의 음흉한 미소를 보고는 소위 '깨끗한 영혼'이란 것이 곧 동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눈치껏 깨달았다.
서른을 넘긴 나이에 아직까지 동정인 남자는 과연 현대 일본에 드물 것이다. 과연 남자도 요새 사람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영혼에 때를 묻힌다며 혀를 끌끌 차댔다. 그러면서도 미즈키를 보는 눈빛은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미즈키에겐 익숙한 눈빛이었다. 지금의 미즈키야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예스맨과의 영업사원이라지만, 학창시절의 미즈키는 괴짜였다. 음담패설로 결속을 다지는 남학우들의 대화에 어울리기보다는 책을 팠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봐도 귀엽다는 생각만 할 뿐 딱히 가슴이 설레거나 아래가 동하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고서는 보너스가 두둑하다는 이유로 베개 영업이라고 하는 성행위가 연관된 영업까지 뛰었지만, 삽입은 번번이 실패했다. 미소는 꾸며낼 수 있어도 원하기는커녕 역겨움을 느끼는 행위에 아랫도리는 도저히 세울 수 없었다. 약물의 힘을 빌려보기도 했으나 몸에 받지 않아 거하게 토하는 바람에 오히려 난처해진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튼튼하고 동정이고 연고 없는 사람을 찾다가 미즈키가 걸린 것이다. 미즈키를 바침으로써 미즈키의 모친은 감히 집단을 탈출하려고 했던 배신자에서 좀 더 안정적이고 신뢰받는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게 됐다고 한다. 미즈키가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 영예로부터 달아난다면 미즈키의 모친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나를 버린 여자인데 내가 신경 쓸 것 같아?"
남자는 미즈키의 나약한 심성 따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콧방귀만 한 번 뀌더니 화제를 바꿨다.
"그럼 식을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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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는 욕조에 담가졌다.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구부러진 노년 여성 대여섯 명이 미즈키에게 달라붙어 밧줄과 옷을 잘라내 벗겼다. 미즈키가 타인 앞에서 발가벗겨진 수치에 저항할 것을 예상한 듯 손목과 발목의 결박은 그대로 둔 채였다. 미즈키는 표정도 대꾸도 없는 할머니들에게 구석구석 씻겨졌다. 차라리 기절해 있을 때 씻길 것이지. 피부가 분홍색으로 달아오르고 온몸에서 향기가 풍기게 된 미즈키는 혀를 깨물고 기절하고 싶었으나 목욕물에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약물이라도 들어있었는지 몸이 둔하고 정신이 멍해 생각만 겨우 할 뿐 몸을 뜻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손목과 발목의 결박도 그대로였다.
구석구석 씻겨진 미즈키의 몸은 예복이라는 이름의 흰색 천으로 겹겹이 둘러싸였다.
"남자를 신부로 바치면 오히려 신이 노하시는 거 아닙니까?"
미즈키가 마지막으로 미약한 반항을 했다.
"신께선 성별을 특정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런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인간을 초월하신 분을 논하려고 들지 마라."
21세기 과학문명시대에 토속신앙을 과신하여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꽉 막힌 인간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운운하다니. 모순을 비웃는 그의 얼굴 앞으로 흰색 천이 드리워졌다. 서양식 결혼식에서 신부가 쓰는 면사포라기엔 두꺼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초야를 치르기 전까지 너의 얼굴은 신랑을 제외하고는 볼 수 없다."
하나하나 본격적이고 규칙에 엄격해서 미즈키는 있지도 않은 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우스웠다. 결국 인간이 만든 규칙을 오랜 세월 인간이 지켜오면서 그 자체로 신의 법칙이 된 것이 우스웠다. 신이라는 것도 인간의 말에 시간에 덧입혀져 만들어진 허깨비일 뿐일 텐데.
발목이 묶여서 걸을 수 없어 미즈키는 여러 장정에게 들려 신방으로 이동했다. 복잡한 발소리. 잠시 후 차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고, 엔진음이 나다가 그마저도 서서히 멀어진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완전한 적막. 아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 바람에 나뭇잎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린다. 쏴아아 울리는 것이 빗소리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것을 제외하면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자기 자신이 내는 소리뿐이다. 남자들이 앉혀놓은 대로 무릎을 꿇고 꼿꼿하게 앉아 있던 미즈키는, 다리가 저려오자 그냥 뒤로 누워버렸다. 법도 따위 알 바냐... 시야는 여전히 천 한 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천이 눈을 가리지 않았더라도 앞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밤중이고 불조차 켜지 않았다. 이런 산골짜기에서는 광공해 같은 것도 없어서 불을 꺼도 환한 도시의 밤과는 달리, 불을 끄면 암흑이다.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에 큰 차이가 없어 미즈키는 눈을 감았다.
천지를 뒤흔드는 포격음. 아니면 심장이 뛰는 소리일까?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미즈키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뛴다. 손에 무엇인가 들려 있다. 슬쩍 보니 총이다. 놀라서 떨어트린다. 바보 같은 놈! 뺨을 맞는다. 미즈키의 고개가 돌아간다. 돌아간 시선 끝에 보이는 군화. 고개를 드니 어린애 티를 채 못 벗은 군인 하나가 바들바들 총을 들고 서 있다. 쾅! 다시 포격음. 그리고 비명.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아까 그 소년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파편뿐. 미즈키는 뛴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린다. 아비규환이다. 피할 곳을 찾다가 통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오두막 문을 허겁지겁 열었다. 여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의 위에는... 이곳도 지옥이다. 미즈키는 짐승이 된 남자들을 밀쳐낼 용기도 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도망친다. 비겁자, 겁쟁이, 비겁자, 겁쟁이... 비명은 계속 따라다닌다. 남자의 비명, 소년의 비명, 여자의 비명... 양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아도 비명은 멎지 않는다. 시야가 온통 시뻘겋다. 눈을 질끈 감아도 감은 눈두덩이가 시뻘겋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미즈키, 미즈키... 피냄새를 뚫고 그 모든 비명을 가로지르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명한다. 미즈키는 어물어물 눈을 뜬다. 아직도 귀에서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심장이 거세게 뛴다. 입을 다물고서야 마침내 조용해지자 자신이 지르던 비명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바람이 우우우 울부짖는다. 깜빡 존 모양이다. 뒤척이다가 천이 움직였는지 한쪽 눈은 보였다. 빨강과는 정반대의 빛바랜 청색 계열의 기모노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의지로 버티지 않으면 금세 다시 닫힐 것 같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가느다란 것 같기도, 낮은 것 같기도 했다. 공기를 타고 진동하여 귀에 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미즈키의 고막이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미즈키... 고작 이름을 몇 번 불린 것뿐인데 거세게 뛰던 미즈키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두려워 마시게. 차가운 듯도 뜨거운 듯도 한 손길이 미즈키의 손등을 스친다. 그제야 미즈키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감정을 자각한다. 무서웠던 건가, 나... 낯선 사람들에게 잡혀와 인적 드문 산에 버려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 손발이 묶인 채... 신인지 뭔지 신부가 되기보단 산짐승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이런 곳에... 미래는커녕 한치앞도, 당장의 현재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이런 상황... 미즈키는 무서웠던 것이다. 안 무서운 게 이상한 거지.
손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천 밖으로 드러난 미즈키의 눈을 쓰다듬는다. 눈꺼풀을 감겨준다. 미즈키는 순순히 눈을 감는다. 이 남자는 무엇일까. 딸을 대신해 자신을 신에게 바친 사이비 일가의 사람일까? 그들이 주장하던 신이란 존재일까? 아니면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것일까? 신랑보다 먼저 봐버리고 말았군...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어느샌가 바짝 긴장해 있던 미즈키의 어깨가 풀린다. 용서해 주겠지. 기다렸으니... 아주 오래 기다렸다네. 다시 바람이 분다.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같던 거친 소리가 한풀 꺾여 다시금 빗소리를 낸다. 쏴아아 나뭇잎이 비벼지고 나뭇가지가 스쳤다가 흩어진다. 그리고 미즈키는 다시 수마에 빠진다.
눈을 떴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눅눅한 습기에 여러 겹의 천이 몸에 들러붙어 불쾌했다. 미즈키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산 채로 굶어죽거나 들개 밥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밧줄부터 풀어야 했다. 꿈틀거리던 미즈키는 천 밑으로 하얀 발을 발견하고 멈췄다. 누군가가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발. 발톱이 단정하게 깎인 인간의 발. 남자의 것이라기엔 작은 발이었다. 여자인가? 일가에서 미즈키를 씻기려고 보낸 것일까? 미즈키가 다가오는 사람을 피해 몸을 물리는 것보다 다가오는 쪽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천이 벗겨졌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마저 반나절 빛을 차단당했던 미즈키에게는 눈이 부셨다. 눈을 찡그려도 아파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한 남자가, 아니. 미즈키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갈색 머리, 캐주얼한 셔츠와 반바지. 소년이 서 있었다.
"미즈키."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 열다섯? 열셋이나 되었을까? 이런 어린아이가 왜 이런 곳에 온 거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차분해 보였다. 미즈키처럼 잡혀 온 아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즈키는 두어 번 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빛이 따가워 자연히 고였던 눈물이 눈꼬리에 머물다가 흘러내렸다. 미즈키는 메마른 목을 쥐어짜냈다.
"누구..."
소년은 표정이 없었다. 영업을 하며 무수히 많은 얼굴과 표정을 봤고 익숙해졌다고 자신했지만 이 아이의 얼굴은 읽을 수 없다. 어린아이를 상대한 적이 없긴 하지만... 벌레처럼 엉거주춤 누워 있는 미즈키의 맞은편에 소년이 무릎을 꿇고 정좌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
"키타로입니다."
소년이 고개를 들고 미즈키를 쳐다봤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은 미즈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즈키는 소년에게 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소년에게 달라고 할 것이 많았다. 무수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어주기를 바랐다. 어떻게 여기 온 것인지, 너의 정체와 역할은 무엇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내가 달아나도 너는 무사한지...
미즈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키타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 때문에 실망한 것일까? 소년이 손을 뻗었다. 미즈키의 손목에 닿았다. 차가워서 미즈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아니, 뜨거웠던 것일까? 차가운 듯도, 뜨거운 듯도... 미즈키는 순간 연푸른색 기모노를 떠올렸지만, 키타로가 그의 손을 잡자 다시 소년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미즈키 씨."
키타로가 손목의 밧줄을 쥐었다가 놓자 그것만으로도 밧줄이 끊어져 미즈키의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키타로는 미즈키의 발목도 쥐었다. 작은 키의 소년인데 키에 비해 손이 컸다. 키타로가 발목에서 손을 떼자 미즈키의 발목도 자유로워졌다. 미즈키는 사지가 자유로워졌음에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굳어서 그럴 수 없었다. 일어난 쪽은 키타로였다.
"씻을 물과 식사를 준비할게요. 쉬고 계세요."
키타로는 가만히 서 있었다. 미즈키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미즈키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키타로가 나갔다. 소년이 사라지고서야 미즈키는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게 된 것은 소년의 이름뿐. 소년의 정체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지만 미즈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였던 소년에게는 어떠한 박력이 있어서, 미즈키는 그 기운에 조금 눌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자, 밧줄에 쓸려 붉어진 손목이 보였다. 왼쪽 손목은 밧줄이 덜 풀렸는지 무언가 묶여 있었다. 그쪽 손목을 들어 올리니 밧줄이 아니었다. 밧줄보다 가느다란 금색 실로 엮은 팔찌였다. 각도에 따라 희미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손목을 여유 있게 감싸고 있는데, 막상 벗으려고 하면 신기하게도 빠지지 않았다. 팔찌의 매듭을 풀어보려고 해도 풀리지도 않았다. 활동에 제약이 있는 건 아니니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다.
"신부라..."
미즈키는 서서히 일어섰다. 계속 누워 있다가 일어나니 순간 머리가 핑 돌았지만 벽을 짚고 잠시 심호흡을 하니 괜찮아졌다. 미즈키는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천천히 벗었다. 일단 키타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