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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미즈키

Summary:

게나조 미즈키가 묘타로와 만나는 이야기

Chapter Text

거래처 접대를 하다 보면 음주는 피할 수 없다. 재수없는 놈들을 맨정신으로 상대하느니 술을 마시는 편이 미즈키 쪽에서도 환영이었다. 주는 대로 연거푸 마시기도 하고, 먼저 권하기도 하며 술을 잔뜩 마셨다. 평소에도 즐겨 마시고 영업 일을 하다보며 마셔 버릇하니 이 정도는 거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시간 뒤 귀가하는 길, 미즈키는 그 짐작을 깊이 후회한다. 분명 예전에는 끄떡없었던 것 같은데... 주사가 없기를 망정이었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는지 걸을 때마다 두통이 몰려온다. 비가 올 듯 날이 흐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심하다. 눈도 아프고, 가슴도 아프다. 흉터가 욱신거린다. 밤하늘이 잔뜩 흐리다. 역시 비가 올 것 같다. 흉터마다 심장이 생긴 듯 두근거린다. 미즈키는 차라리 아픈 눈 한쪽을 감는다. 시야가 좁아지며 걸음이 느려진다. 발걸음이 잠시 갈피를 잃었다가 비틀비틀 집을 찾아 움직인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추적추적 오기 시작한다. 미즈키는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잠시 망연자실해진다.  어느 가게 처마 밑이라도 들어가 비를 피할까 했으나 쉽게 그칠 비도 아닌 것 같고, 우산을 가져다 줄 사람도 없고. 지친 직장인은 계속 걸음을 옮기고 빗줄기는 점차 굵어진다. 흙을 적시고 잎사귀를 적시고 담벼락을 적신다. 채 스며들지 못한 물은 고여서 웅덩이를 만든다. 그 웅덩이를 미즈키의 발이 밟는다. 보기보다 깊었는지 구두 위로 드러난 발목을 타고 물이 들어간다. 양말이 젖는다. 시원함은 한순간이고 불쾌감이 따라온다. 어차피 젖은 발과 몸, 미즈키는 웅덩이를 피하려 하지 않고 그냥 철퍽철퍽 밟고 걷는다.

습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비 냄새다. 공원을 지나는데 공기 중 습도가 높아졌는지 안개가 낀 듯 앞이 부옇다. 헤어 제품을 발라 넘겼던 앞머리가 흘러내려 이마에 가닥가닥 들러붙는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차가운 빗물로도 술기운이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미미하게 올라오는 구토감. 미즈키는 차라리 토할 생각으로 전봇대를 짚고 서지만, 막상 멈추니 구역질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대로 서서 숨을 고른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다. 주저앉아 버리면 드러눕고 싶을 것이다. 드러누우면 그대로 잠들고 싶겠지. 도로 한복판에서 술에 취해 잠드는 그런 추태 만큼은 막아야 한다. 이미 비에 젖은 생쥐 꼴인 것부터 추태지만... 어차피 집에 가도 이런 꼴을 볼 사람 하나 없으니 괜찮으려나.

키타로와 눈알 아버지는 떠났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미즈키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선.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미즈키와 눈알 아버지는 키타로의 양육에 매우 공을 들였고, 공동 양육자로서 대화를 매우 자주 나눴다. 키타로와 관련해서 서로가 모르는 일이란 없었다. 눈알 아버지는 키타로의 유령족 정체성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 어쨌거나 유령족의 마지막 후예였으니, 한 종족의 유산을 짊어지는 것이 아이의 사명이라면 사명이리라. 키타로도 이제 어느 정도 컸다. 미즈키의 품에 안겨 젖을 달라 보채 울던 아기는 어느덧 걸음마를 떼고,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키타로의 독립은 이미 상의한 일이었다. 언제 떠날 것인지도 날짜도 함께 얘기해 정해둔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즈키는 상실을 느꼈다. 울컥 치민 배신감은 곧 밀려온 자괴감에 쓸려내려갔다.

그렇게 된 일이다. 미즈키는 다시 숨을 고른다. 구토감이 좀 가라앉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더니 술기운에 뜨거웠던 체온이 식어가는 게 느껴진다. 얼른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다음 날 분명 감기에 걸릴 것이 뻔하다. 미즈키는 걸음을 재촉한다. 철벅철벅. 바짓단이 흠뻑 젖었다. 푹 젖은 셔츠가 불쾌하게 몸에 달라붙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미즈키는 갑자기 발이 쑥 빠지는 기분에 바닥을 내려다본다. 여전히 한쪽 눈은 감은 채.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흉터가 박동한다.

어두운 골목길. 빛이라곤 굵은 빗줄기 사이로 뿌얘진 가로등 불빛뿐. 웅덩이를 들여다봐도 무엇이 보일 리가 없다. 고개를 숙인 미즈키 본인의 얼굴을 제외한다면. 미즈키는 한쪽 눈을 감은 채 그 얼굴을 마주한다. 마주보는 얼굴. 허옇게 빛나는 눈알 하나. 비와 술에 시야와 판단력이 흐려진 미즈키로선 마주보는 눈알이 자신과 다른 박자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홍채가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도 간과한다.

좀 깊은 웅덩이였나. 빗방울이 계속 웅덩이에 파동을 만든다. 작은 물결, 보다 큰 물결. 미즈키는 발을 빼려고 한다. 물결이 하나로 합쳐진다. 소용돌이를 만든다. 미즈키의 발은 빠지지 않는다.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선다. 커진다. 미즈키의 구두를, 양말을, 종아리를 삼킨다. 발이 더욱 깊이 빨려들어간다. 미즈키는 당황하여 허우적거린다. 손톱으로 아스팔트를 긁는다. 팔뚝이 쓸린다. 손목시계의 알에 금이 간다. 헐거워진 팔찌가 손에서 벗어난다. 외마디 비명. 세찬 빗소리.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곳에는 웅덩이와 팔찌 하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

 

애써 가라앉힌 구토감이 소용없다. 미즈키는 멀미가 심하게 와서 엎어진 채로 토한다. 한참 쏟아내고 정신이 어느 정도 들자 몸을 스스로 일으키기 전에 팔뚝이 붙잡혀 번쩍 들린다. 강한 힘이다. 갑자기 일어서자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미즈키를 잠식한다. 미즈키는 눈을 감다시피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팔뚝을 잡고 일으켜세운 손을 치우려고 하지만, 손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거 놔." 내뱉고 고개를 들자 보이는 얼굴. 남자는 미즈키의 시선보다 얼굴이 위에 있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다. 말랐다.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 밝은 색의 머리카락. 어두운 골목길에서 허옇게 빛나는 눈알. 동그랗다. 익숙한 듯하기도 하고... 미즈키는 두통 때문에 신음을 겨우 삼킨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취기가 조금 가셨지만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누기엔 역부족이다. 남자는 미즈키의 저항을 무시하며 그의 얼굴을 붙들더니 이쪽 저쪽 돌려본다.

"비슷하네." 남자가 중얼거린다. 숨에서 담배 냄새가 느껴진다. "이번엔 성공인가." 알 수 없는 말을 무어라무어라 중얼거리는 남자를 미즈키가 힘을 주어 밀어낸다. 겨우 떨쳤나 싶었더니 남자가 다시 손을 뻗는다. 미즈키가 재빨리 그 손을 쳐냈지만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너덜너덜한 귀를 스친다.

"하자가 있군."

미즈키는 조소하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불량한 눈매, 불량한 말투. 이것만 아니었다면 키타로의 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 저렇게 호리호리한 주제에 단단한 체격의 성인 남성인 미즈키를 한 손으로 들 정도의 완력을 가진 인간은 별로 없다.

"넌 뭐야."

가시 돋힌 말에도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온다. 미즈키는 그 손을 또 쳐낸다.

"뭐긴."

히죽 웃는 웃음이 불쾌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젖은 셔츠가 마르며 몸을 빠르게 식힌다. 추위에 몸이 가늘게 떨린다. 하얀 얼굴의 남자는 연민도 동정도 애정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말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지."

"뭐라고?"

방심하는 틈에 팔이 불쑥 들어오더니 허리를 감싼다. 식은 몸에 닿는 미지근한 체온. 미즈키의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된다. 미즈키가 밀어내자 순순히 밀려나는 듯하더니 손으로 미즈키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리고 또 히죽 웃는 얼굴. 역시 아니다. 저 불손한 미소는, 방자한 태도는 절대로...

"살은 좀 쪘군."

결국 미즈키는 주먹을 날렸다.

 

-

 

한 대 맞을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남자는 턱을 감싸쥐고 나가떨어졌다. 미즈키는 잠시 반성했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면 안 된다고 얼마 전에 키타로를 가르쳤는데. 미즈키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골목길은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설었다. 눈앞의 남자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찾아온 고향처럼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느낌이었다. 유령족의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을 이따금 겪고는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납치인가? 하지만 미즈키를 잡아온 건 저 남자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소용돌이였다. 그러나 저 남자가 주장대로 키타로가 맞다면, 유령족의 능력으로 이 정도 소용돌이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미즈키가 아는 키타로는 이제 9살이라는 사실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어린 티가 난다지만 아무리 어리게 잡아도 갓 성인을 넘긴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령족의 성장은 인간과 다르다고 하니 껍데기는 이래도 알맹이는 몇 살을 먹었는지 알 수 없다만, 굳이 알고 싶진 않았다. 남자의 나이는 미즈키가 이곳을 벗어나는 데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여긴 어디야?"

"일본."

"난 왜 데려왔어?"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하지.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말자고."

꽤 상식적인 발언이라 미즈키는 얼결에 수긍했다. 하지만 키타로라고 주장한 남자는 출발하지 않았고, 따라서 미즈키도 가만히 서 있었다.

"안 가, 아저씨?"

"길을 알아야지."

"집에 가면 되잖아."

"네 집이 어딘데?"

"당신 집."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거참 귀찮게 하네."

남자가 미즈키의 팔뚝을 붙들었다. 미즈키가 쳐냈다.

"건들지 마."

"안 그러면 따라올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지금 이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너밖에 없어."

"흠."

그제야 남자가 앞서 걸었다. 미즈키는 천천히 그 뒤를 따르며 남자를 관찰했다. 자세도 구부정하고 발도 질질 끌었다. 걸음걸이마저 불량했다. 영 탐탁지 않았다. 얼굴 빼면 어딜 봐도 미즈키가 아는 키타로가 아니었다. 남자는 가는 중간마다 힐끔거리며 미즈키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미즈키가 걸어가는 길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은 한편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남자를 보지 않아도 집을 간다고 생각하고 의식하지 않고 그냥 걸으니 익숙한 주택이 나왔다. 남자는 계속 갔지만 미즈키는 그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 더 갔던 남자는 그런 미즈키를 보고 또 히죽 웃었다.

"기억하네."

갔던 길을 되돌아온 남자가 미즈키를 지나쳐 현관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기 전, 미즈키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미즈키는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

 

미즈키는 닫힌 문으로 거칠게밀쳐졌다. 젖은 몸에 차가운 현관문이 닿자 열이 식으며 몸이 떨렸다.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바짝 밀착했다. 미즈키의 다친 귀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미즈키는 그게 뭔지 알았지만 인지하기를 거부했다. "어서 와." 남자의 숨결이 미즈키의 목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미즈키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곧 알게 될 거야."

남자가 하체를 밀착해 왔다. 단단한 것이 둔부에 닿자 미즈키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취기마저 단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미즈키는 평정을 잃고 저항했지만, 팔이 자유롭지 못해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와 하체가 자꾸 부딪치기만 했다. 남자는 하반신을 미즈키에게 비비며 혀로 미즈키의 귀를 연신 핥았다. 숨결이 더욱 뜨겁고 습해졌다. 미즈키도 숨을 헐떡거렸다. 정신적 충격에 눈앞이 빙빙 돌았다.

"너... 너 이 자식. 네가 키타로일 리 없어."

"하나뿐인 유령족의 후예인 내가 키타로가 아니면 누구지?"

남자가 키득키득 웃었다.

"왜? 아들은 아버지에게 욕정할 리 없어서?"

"이건 정상이 아니야."

"괜찮아."

남자가 앞니로 미즈키의 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미즈키는 남자가 이대로 자신의 귀를 이로 물어 뜯는 상상을 했다. "난 당신을 아버지로 여긴 적 없어." 그 말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듯 상쾌하기까지 한 말투. 미즈키는 저항을 멈췄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슬픈가?"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남자가 속삭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즐거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남자는 기쁘게 말한다. "우는 얼굴을 보여줘." 그가 미즈키의 얼굴을 잡아 돌리려고 허점을 보인 순간, 미즈키는 있는 힘껏 남자의 발을 밟는다. 악 비명과 함께 남자가 떨어진다. 발을 부여잡고 노려보는 남자를 미즈키는 세게 밀친다.

"비켜."

 

-

 

"나가, 이 자식아!"

"알면서 냉큼 들어가 놓곤."

"나가라고!"

미즈키는 욕실 문을 쾅 닫았다. 남자를 통해서 뭔가 정보를 캐보려던 계획은 허사로 돌아갔다. 걱정해 주는 척 몸이 더 식기 전에 목욕하라며 욕실로 떠밀더니 미즈키가 옷을 다 벗자마자 기가 막히게 욕실에 따라 들어와 덮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미즈키가 샤워기를 던지고서야 두개골의 안전이 걱정됐는지 겨우 나갔다. 남자가 남자를 상대로 욕정한다는 사실은 놀랄 거리도 못 됐다. 귀여운 수준이었다. 키타로가 나를? 이건 말도 안 된다. 미즈키는 얼른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까 하다가 미즈키는 마음을 바꾸고 샤워를 했다. 애초에 탕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은 눈알 아버지의 취향이지, 뭐든 빨리 해치워야 하는 미즈키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뜨거운 물을 맞으니 한기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몸을 닦고 수건으로 하체에 두른 후 미즈키는 문을 열었다. 상식적으로 갈아입을 옷가지가 문앞에 있을 줄 알았다.

"옷은?"

"빌어봐."

하지만 상대는 상식인이 아니었다. 미즈키는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바닥에 거만하게 드러누워 자신의 알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옷은 어디 갔어?"

"빨래통."

남자가 발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바구니에 처박힌 미즈키의 정장이 있었다. 분명 엉망진창으로 구겨졌을 것이다. 땀과 빗물에 젖은 축축한 옷을 다시 입고 싶지는 않았다. 미즈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럼."

같은 사내자식끼리 뭐 어떠냐 싶었다. 군대에서는 열악한 샤워 공간에서 다 같이 씻었으니, 남자들끼리 알몸을 보여주는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미즈키가 수건 한 장 차림으로 돌아다닌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뻔뻔하긴."

"누가 할 소리."

미즈키는 남자가 던진 옷가지를 공중에서 낚아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보든 말든 신경 안 쓰고 갈아입었겠지만 저런 변태 자식 좋은 일은 해주고 싶지 않았다. 미즈키가 옷을 들고 화장실에 다시 들어가려는 틈을 타 남자가 또다시 밀착해 왔다. 수건이 스르륵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방심할 수 없군. 남자가 어찌 해 보기도 전에 미즈키는 그의 명치를 가격했다.

 

-

 

잠자리에 들기까지 남자의 헛짓거리는 멈추지 않았다. 키타로라고 주장하는 남자를 방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서야 미즈키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유령족이 맞다면 문손잡이의 걸쇠 하나쯤이야 아무런 장애물도 안 되겠지만. 미즈키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진이 쭉 빠졌다. 이 키타로는 키타로가 이렇게 크지 않았으면 바라는 어른의 전형이었다. 미즈키는 정말로 자신이 아는 키타로는 이렇게 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키타로... 키타로는 뭘 하고 있을까? 눈알 아버지와 무사히 숲에 도착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굶지는 않고 있을까? 다치지는 않았을까? 눈알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으니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 퇴근길이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미지의 장소에 온 데다가 자기만 보면 발정난 개처럼 들러붙는 놈을 방어까지 하느라 이를 데 없이 고단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출근을 몇 번이고 또 해도 좋았다. 오늘 하루가, 지난 며칠이 통째로 꿈이기를. 자고 일어나면 키타로와 눈알 아버지가 있는 나의 방이기를. 기도하는 미즈키에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녀석이 키타로가 맞다면 이곳의 눈알 아버지는 어디 있는 것일까? 붙어있는 내내 보이질 않았다. 눈알 아버지의 부재가 키타로의 비행의 원인인 것인지 결과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어떻게 해야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생각할 일이 많았다. 좀 더 고민하고 싶었지만... 미즈키는 어떤 의문에 대한 답도 찾지 못하고 수마에 빠졌다.

 

-

 

미즈키가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겨 있던 방문의 걸쇠가 소리 없이 풀렸다. 문을 열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미즈키는 미동도 없이 깊게 잠든 채였다. 키타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슬몃 지었다. 만났을 때 술 냄새가 난 걸 보면 평소보다도 깊게 잘 것이다. 키타로가 알던 미즈키는 그랬다.

하지만 이 남자는 키타로가 아는 미즈키가 아니다. 생김새는 닮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다른 구석이 있다. 키도 조금 작고, 체격은 좀 더 있고. 눈과 귀만 아니라 가슴에도 커다란 흉터를 달고 있다. 누가 낸 흠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살집이 있으니까. 키타로는 늘 미즈키가 볼품없이 말랐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살집이 있는 편이 좋지.

성격도 키타로가 아는 미즈키와는 완전히 달랐다. 고분고분하지를 않고 키타로가 뭐라고 말하고 행동하든 의심부터 했다. 까칠하고 손도 매웠다. 키타로에게 회초리를 들기는커녕 손찌검 한 번 하지 않았던 그의 미즈키와 달리 이 미즈키는 키타로를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키타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인가. 아무렴 어때. 키타로는 나지막하게 웃는다. 미즈키는 미즈키. 드디어 찾아냈다. 많은 것이 다르지만 같은 것도 있다. 생김새가 그렇다면 성격도 그럴 것이다. 어느 세계의 미즈키든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면, 분명 자신과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키타로는 자신한다. 키타로가 알던 미즈키의 세계는 키타로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므로. 미즈키라면 키타로에게 약할 것이다. 이 남자가 아무리 들개처럼 까칠하게 굴고 이빨을 드러내도 결국 키타로에게 굽히게 되고 말 것이다. 키타로가 알던 미즈키처럼 발톱이고 이빨이고 다 빠진 늙은 개처럼 유순하게 굴게 될 것이다.

키타로는 얕게 코를 고는 미즈키의 이불을 들추고 조금 달라진 체격을 느껴볼까 하다가 접었다. 이제 손에 쥐었으니 급할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