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야구선수 미유키 카즈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큰 부상을 입었다. 어린이를 밀쳐내고 대신 차에 치인 것이다. 추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운전자는 심장마비가 온 할아버지였다. 지병도 없고 정정했으나 갑자기 발작이 와 가속했는데, 하필 그때 어린이가 차가 질주하는 그 도로를 걷고 있었으며 미유키가 그 현장에 있었다. 그 순간 미유키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도움을 청하기? 지구를 1초에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다는 슈퍼맨이라고 해도 제때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만히 있기? 어쩌면 대부분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몸이 굳었을 테니. 하지만 미유키는 야구선수였고 그것도 꽤나 훌륭한 선수였으며 반사신경이 매우 뛰어났다. 압박 상황에서 홈런을 날리는 클러치 히터로 유명했던 미유키는 절체절명의 그 순간 얼어붙지 않았다. 그의 몸은 유연하고 기민했으며 정신은 명료했다.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미유키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등이 떠밀렸다거나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았다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뛰어든 것이다.
운전자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결국 사망했고 미유키가 구한 어린이는 찰과상은 입었으나 사지가 멀쩡했으며 미유키 카즈야는 목숨은 건졌으나 다리 한쪽을 못 쓰게 되었다.
미유키는 이제 20대 중반이었다. 운동선수로서 전성기를 누려야 할 나이에 닥친 부상이었다. 이전의 몸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미유키를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주변인들은 그의 쾌유를 빌었다.
의료진은 확률은 아주 희박하지만 열심히 재활하면 다리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면 운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쭈그려앉아야 하는 포수는 어려울지 몰라도 포지션을 전향한다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미유키는 타자로서 성적이 좋기 때문에 포지션을 갑자기 바꾼다고 해도 그를 원하는 구단은 있을 것이라고.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미유키에게 괜찮은지,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면 미유키는 “열심히 재활해야지”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래, 너라면 재활에 성공할 수 있어.” 다들 그렇게 말했고 생각했다. 그라운드 위에서의 미유키는 으스러진 다리로 다시 일어나 걷는 것보다 말도 안 되고 미친 짓을 얼마든지 해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3개월쯤 지났다. 다들 미유키가 열심히 재활에 집중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사와무라는 세이도 단체 메신저방에 뜬 쿠라모치의 메시지를 보고 놀랐다.
미유키가 야구를 그만둔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와무라가 아는 미유키는 인생에서 야구가 없으면 죽어버릴 남자였다. 그의 기억에 존재하는 미유키는 야구를 하는 미유키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유키는 야구를 하고 있었다. 야구를 하지 않는 미유키는 만나본 적 없었다. 야구에 미친 놈들만 모인 세이도 야구부에서도 미유키는 미친놈 중 미친놈이었다. 그야말로 ‘진짜’였다. 세이도에서만이 아니라 고교 야구를 통틀어서도 미유키보다 야구에 미친 사람은 찾기 드물었다. 야구를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미유키 본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미유키 카즈야는 모든 욕망을 거세하고 오로지 야구만 욕망하고 탐욕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야구를 그만둔다고?
왜?
사와무라는 화가 났다. 미유키 카즈야가 야구를 그만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제멋대로 굴겠다고? 용납할 수 없었다.
사와무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프로에 들어갔다. 미유키 카즈야의 미트에 공을 다시 던지는 건 둘째치고 투수 대 타자로서 만난 적도 없었다. 아직 다시 같이 야구를 하지도 못했는데 그만둔다고?
사와무라는 당장 미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하는 안내 음성만 들렸다. 계속 꺼둔 것을 이제 와서 켤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와무라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10번쯤 전화한 이후에 더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미유키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나서 따지고 화낼 생각이었다. 왜 야구를 그만두는 겁니까?
이유야 짐작할 수 있기는 했다. 부상 때문이겠지.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몸의 고장 때문이 아니고서는 미유키 카즈야가 스스로 그라운드에서 나온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분명 나을 수 있다고 했잖아.
열심히 재활을 한다고 했잖아.
사와무라는 전지훈련으로 호주에 와 있었다. 비행기만으로 일본과 9시간의 거리였다. 거리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가족의 일도 아니고 고교 선배의 일로 신인 선수가 멋대로 훈련에 빠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와무라는 기다렸다. 귀국만 하면 당장 찾아가야지 하고 다짐했다. 꼭 가서 따지고야 말리라.
그렇게 한 달이 지나서 사와무라는 일본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한 달은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미유키 카즈야의 은퇴 소식은 이미 열도를 휩쓸고 지나간 이후였다. 아무리 미유키 카즈야가 대단한 선수라고 하더라도, 미유키 카즈야가 야구를 하지 않아도 지구는 돌아갔다. 놀랍고 충격적이고 슬프고 무섭고 따분한 일은 매일 일어났다. 매일 사건사고가 터지고 잊혔다.
사와무라는 잊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사와무라보다 앞서 미유키를 찾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쿠라모치는 미유키가 은퇴한 이유는 역시 부상 때문이라고 했다. 재활을 해도 다리가 예전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고 했다. 미유키를 찾아가거나 전화해 본 사람들이 저마다 후기를 전했다. 부상 때문이라고 하니 더 뭐라고 설득하거나 말을 얹을 수 없었다고 했다.
미유키의 병문안을 갈 정도로 미유키와 가까운 지인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야구선수였다. 같은 운동선수로서 가장 두려워하고 꺼리는 문제가 부상이라는 것을 피차 잘 알고 있었다. 미유키는 안 그래도 사적인 얘기를 하기에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벽 같은 남자를 상대로 날달걀을 손에 쥔 듯 조심스러운 대화밖에는 하지 못한 것이다.
사와무라는 자신도 미유키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쿠라모치는 말렸다. “네가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말이었고 사와무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유키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는 미유키가 조금 달라졌다고 했다.
“달라지다니 어떻게요?”
“보면 알게 될 거야.”
미유키를 당장 찾아갈 것처럼 선언하긴 했지만 실제로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도 몇 달이 더 지나서였다.
미유키는 여전히 도쿄에서 살고 있었다. 쿠라모치의 말로는 어릴 때부터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고 했다. 사와무라는 첫 방문이었다.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근처 마트에 들러 과일 바구니를 샀다. 무거웠다. 땀을 흠뻑 흘리며 도착한 곳은 미유키 스틸이라고 적힌 공장이었다.
캡 모자에 안경을 쓰고 작업복을 입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젊은 남자가 사와무라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실례합니다. 저기, 미유키 카즈야… 선수를 만나러 왔는데요….”
“뭘 그렇게 격식을 차리고 그래? 무엇보다 이제 선수도 아니고.”
남자가 갑자기 친근하게 말하며 팔뚝을 찰싹 쳤다. 사와무라가 화들짝 놀라 남자를 쳐다봤다. 계속 보고 있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본 기분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캡모자 그늘에 가린 얼굴을 뜯어 보려 하니 남자가 편하게 보라는 듯 캡모자를 벗었다. 익숙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사와무라가 찾아온 바로 그 대상이었다.
“미유키 카즈야! 당신…!”
“그래, 이제 너답네. 들어와.”
미유키가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뒤통수가 동그랬다. 크리스는 ‘조금’ 달라졌다고 했다. 늘 목덜미를 덮었던 미유키의 갈색머리는 죄다 잘려나가고 빡빡 밀려 있었다. 이게 ‘조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앞서가는 미유키는 한쪽 다리를 절었다. 목발은 짚지 않았다.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안내한 곳은 2층의 방이었다. 미유키가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르는 걸음이 느렸다. 뒤따르는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몸이 기우뚱거리는 것, 각각의 발에 힘이 불균형하게 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2층에 다 오르고서야 사와무라는 과일 바구니를 미유키에게 건넸다. 미유키는 “혼자 먹기엔 많은데? 그래도 고마워” 하고 인사치레를 하며 식탁에 올려놓으라고 말했다. 사와무라가 시킨 대로 하자 과일 바구니를 뒤적거리더니 “사과 좋아해?” 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부엌 싱크대로 가져가서 사과를 씻기 시작했다.
“아무 데나 편한 데 앉아 있어.”
그런 곳은 없습니다만…. 사와무라는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편하게 앉을까 하다가 핀잔 주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눈치가 보여서 그냥 식탁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식탁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반질반질했다. 새것 같지는 않았다. 각도를 맞춰서 보면 흠집이나 기스 같은 것이 보였다. 오랜 세월 손때를 탄 가구였다.
미유키가 사과를 깎은 접시를 포크와 함께 사와무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
“잘먹겠슴다….”
미유키는 먹지 않았다. 사와무라가 사과를 씹는 소리가 아삭아삭 퍼졌다.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몇 입 먹고 포크를 내려놨다. 사와무라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미유키의 어깨 너머였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시선을 눈치채고 히죽 웃었다. 모자를 벗어서 의자 모서리에 걸쳤다. 밤톨처럼 짧게 깎은 머리가 드러났다. 낯설고 어색했다. 사와무라가 눈을 꿈적꿈적 떴다. “머리….” 하고 기어이 입밖으로 생각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 머리 자른 거 넌 처음 보나?”
사와무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은퇴한 미유키가 머리를 잘랐을까 길렀을까 맞혀 보라고 한다면 오히려 길렀을 줄 알았다. 갑자기 은퇴를 한다길래 혹시 폐인처럼 지내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은 폐인 생활이라고 하면 흔히 그려지는 이미지였다. 미유키가 차라리 허리까지 머리를 길렀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스포츠인일 때는 머리가 덥수룩하더니 정작 스포츠인에서 은퇴하자 스포츠 머리를 한 것이 미유키답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냥 잘라봤어.”
미유키가 자신의 머리를 쓸었다. 본인도 짧아진 머리가 어색한 듯했다. 사와무라가 사과에 더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미유키가 일어났다. 의자가 끼익 소리를 냈다.
“둘러봐도 돼, 궁금하면.”
“인사드려도 될까요.”
미유키가 허락하는 듯 손짓했다. 사와무라는 불단 앞에 섰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낀 중년의 남자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이었다. 사와무라가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아버지야.”
미유키가 작은 접시에 담은 사과를 아버지의 사진 앞에 내려놓았다.
“닮았슴다.”
“그래?”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안경에 가리지 않아서 눈가가 붉어지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없어서 얼굴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이는 듯했다.
“실은 아버지 머리 따라 한 거거든. 근데 머리도 똑같고 둘 다 안경인데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러고 보니 미유키의 안경테도 바뀐 것 같았다. 학생 때는 테가 좀 더 두꺼운 것 같았는데… 사진 속 남자가 쓴 안경과 비슷해 보였다. 어쩌면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디자인을 찾은 것이거나.
“입모양이 닮았슴다. 사진 찍을 때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입꼬리가….”
“정말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와무라.”
말투는 비꼬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상냥했다. 사와무라는 뒷목을 문질렀다.
두 사람은 다시 식탁에 앉았다. 미유키는 한쪽 다리를 뻗고 무릎을 문질렀다.
“그래서 왜 온 거야? 은퇴를 말리려고? 그러기엔 좀 많이 늦었지?”
사와무라도 동감했다.
“왜죠?”
“계속 보고 있지? 이유.”
사와무라의 시선이 미유키의 무릎을 향했다.
“하지만… 열심히 재활하면.”
“그런다고 해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야.”
“그 정도면 충분하잖슴까.”
“‘그 정도’?”
미유키는 코웃음만 한번 쳤다. 사와무라도 더 말할 수는 없었다. 평지를 걸을 때도 절뚝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프로로 밥을 벌어먹고 살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지금 프로 선수로 뛰고 있는 사와무라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잖아요. 이렇게 포기하는 건 당신답지 않슴다. 포지션 변경 같은 것도 있고… 다리를 많이 쓰지 않는 포지션으로… 재활을 다시 시작하면 지금보다는 분명….”
“왜?”
“…?”
“왜 그래야 해?”
“왜냐니, 야구 진짜로 그만할 겁니까?”
“그래.”
선선한 대답에 사와무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쉽게 포기가 되는 거였어? 그 정도였어?”
“화내지 마, 사와무라.”
미유키는 알까? 그렇게 맥 빠진 얼굴로 웃으면서 말하면 오히려 화내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알고 그러는 것이라고 사와무라는 확신했다. 그래서 화를 참았다. 말려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자각도 있었다. 미유키와 함께한 고교 2년, 옆에서 지켜봤다. 얼마나 야구에 기꺼이 전부를 쏟아부었는지를.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랐어.”
미유키가 말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네가 제일 먼저 쳐들어올 줄 알았지. ‘미유키 카즈야! 왜 그만둔 거야! 당장 취소해!’ 하고 버럭버럭 외치며 따질 줄 알았는데 네가 마지막에 오다니.”
“그때 전지 훈련 중이었어요.”
“어디서?”
“호주요.”
“호주 좋지.”
“가봤슴까?”
“아니, 난 미국으로 갔어. 가보고 싶네, 언젠가.”
“어차피 훈련하느라 관광도 제대로 못 했어요.”
“아직 신인이지? 힘내. 짬 좀 먹는다고 해서 여유 생기는 건 아니지만….”
“….”
“후루야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왔어. 난 이제 야구를 안 하는데 말이지. 너희는 정말 매번 내 예상을 깬단 말이지. 그 녀석,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싫다는 오라를 막 내뿜으면서… 나를 노려보더라고. 걔가 날 찾아왔을 땐 다리 상태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았으니까… 못 하는 거 납득이 더 잘됐을 텐데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어.”
“….”
“나더러 이기적이라고 하더라. 그건 좀 신선했다. 영웅이니 뭐니 그런 얘기만 듣다가… 욕심 부리는 거래… 어째서? 오히려 욕심이 없다고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다 놔버렸는데….”
미유키가 즐거운 듯 웃었다. 사와무라는 웃지 않았다. 즐거운 기분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과 그만 먹을 거야?”
미유키가 접시를 가리켰다. 미색이 돌던 사과는 끝부분이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유키가 일어나려고 했다.
“앉아 있어요. 내가 할게요. 냉장고에 넣으려는 거죠?”
“랩은 천장 첫 번째 서랍에 있어.”
사와무라는 접시에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었다. 텅텅 비어있을 줄 알았는데 냉장고는 제법 차 있었다. 시들지 않은 채소도 보였다. 주기적으로 요리를 해먹는다는 뜻이었다.
식탁 옆에 텔레비전이 있었다. 낡고 작았지만 작동할 것 같았다. 정적이 어색해서 사와무라는 텔레비전을 켜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사와무라는 집에서 보통 스포츠 전문 채널을 백색소음처럼 틀어놓고는 했다.
“아니, 낡아서 안 나와.”
“알겠슴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사와무라는 어쩐지 거짓말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야구는 안 하는 겁니까.”
“그래.”
“그러면… 그러면 나는… 뭐죠.”
“갑자기 철학적인 질문?”
“우리 아직 대결도 못 해봤는데… 이제 당신의 미트에 공을 던지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겁니까?”
“나 말고도 포수는 많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괜히 화가 났다. 창밖을 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여러 의문에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 채 사와무라는 일어났다. 어째서 여기 온 것인지… 사와무라 본인이 가장 궁금했다. 이렇게 갈 것이었으면서 나는 대체 왜… 미유키에게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은퇴를 취소하겠다는 말? 애초에 들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도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여기 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미유키를 마주 보고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가자.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미유키가 대문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사와무라는 골목길을 걸어갔다. 중간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미유키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건데 어쩐지 허전해졌다. 미유키는 다리를 절며 또다시 삐걱삐걱거리는 2층 계단을 올라가겠지….
미유키의 때묻은 작업복을 떠올렸다. 캡모자에는 미유키 스틸이라고 쓰여 있었다. 은퇴하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하던 공장을 물려받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다…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사와무라는 왜 후루야가 미유키에게 이기적이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후루야와 자신을 남겨두고 훌쩍 앞서가던 고등학교 시절의 미유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번에는 우리를 전력질주시켜 놓고 본인은 정지. 후루야와 자신이 남겨지는 것은, 그와 멀어지는 것은 어느 쪽이든 같다. 당신은 늘 우리를 따돌리죠… 이번에도 기어이… 그래,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사와무라는 역까지 걸어갔다가 근처 상가에서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 나와서 역으로 가지 않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중간에 길을 헤매기도 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미유키의 공장이 나왔다. 사와무라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서 걸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역시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미유키는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아버지의 안경을 쓰고 아버지와 비슷한 머리를 하고 아버지의 공장을 물려받았다. 미유키는 텔레비전을 틀어놓지 않는다. 미유키의 집에서 야구에 관한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야구 소식을 차단했다. 야구를 하지도 않는다. 야구를 거세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굳이 2층을 고집하면서. 미유키의 몸은 단련되어 있었다. 배가 나오지 않았고 팔이 탄탄했다. 매일 어떻게든 운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냉장고의 음식은 건강한 식재료로 가득했고 조리도구는 잘 길이 들고 깨끗했다. 지금도 식단에 신경 쓰고 있었다. 요리를 해서 먹고 있었다. 정말로 전부 놔버렸다면 몸을 단련하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아무리 습관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와무라는 초인종을 눌렀다. 기다리자 미유키가 나왔다. 좀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이해는 하지만 좀 상처네요.
“그래, 뭐… 너답다면 너답네.”
결국 미유키는 문을 열어주었다. 사와무라는 다시 미유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떠났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였지만 미유키도 식사를 했는지 개수대의 식기세척기에 쌓인 그릇에 물기가 남아 있었고 수세미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밥은?”
“먹었슴다.”
“어디서?”
“역 근처 시내에서….”
“뭐 먹었는데?”
“우동… 미유키는요?”
“알아서 뭐 하게?”
“그냥 물어볼 수도 있지, 까칠하게.”
“뭐라고?”
“아님다. 재워줘요.”
“뻔뻔하네.”
“계속 걸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택시 불러줄게.”
사와무라는 맨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베개만 빌려주십쇼.”
미유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와무라는 자신이 승리했음을 알고 웃었다.
“일어나. 이불 깔아줄 테니까.”
“넵.”
미유키는 갈아입을 옷도 주었다. 사와무라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미유키는 공책 같은 것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옆에 계산기도 놓여 있었다. 뭔가 공장 일 같은 것을 하나 보다 생각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미유키가 깔아준 이불에 누웠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미유키가 할 일을 끝냈는지 사와무라에게 말을 붙였다.
프로 생활은 할 만하냐 그런 이야기였다. 사실 미유키와는 세이도 동창회에서나 가끔 봤을 뿐이었다. 바쁘면 미유키가 빠지거나 사와무라가 빠질 때도 있어서 2년에 한 번 볼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바닥에 누워서 의자에 앉아 있는 미유키를 보니 둘 사이에 아무런 시간도 흐르지 않은 듯, 고등학교 기숙사실에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던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시간이 좀 흐르고 미유키가 침대에 누웠다. 잘 자라고 서로 인사를 하고 불을 껐다.
잠은 오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미유키.” 하고 불렀다. 미유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도 야구를 하고 나도 야구를 하니까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슴다. 하지만 당신이 야구를 그만두면….”
“우리 집 주소는 알았잖아.”
“또 찾아가면 환영해 주기는 하고요?”
“지금 내가 문전박대하고 있나? 물론 다음에 올 때는 시간 잡고 와. 일해야 해서. 내일 갈 때 사인도 해줘. 공장에 걸게. 다들 사인하고 갔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문젠데?”
“나… 당신 미트에 공을 던졌을 때 그 소리를 못 잊어서 세이도에 왔어요. 그리고 당신 때문에… 벽을 느꼈고… 그 벽을 넘어서고 싶다고 생각하게 돼서… 프로에 가게 됐어요. 당신이 매번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니까… 나는 당신의 등을 보며 계속 달렸는데… 계속 뒤를 쫓았는데… 갑자기 당신이 멈추면 난… 어디로 가야 하죠? 뭘 보고 달려야 하죠?”
“간단해.”
“간단하다고?”
“그냥 계속 달려.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을 봐. 네가 보고 달리면 그게 곧 길이지. 딱히 내가 길을 만든 것도 뭣도 아니고… 네가 바라본 곳에 내가 있었을 뿐이야.”
미유키는 몸을 말고 잤다. 깊게 잠을 못 자는 듯했다.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는 건지 악몽을 꾸는 건지 자면서 머리를 움직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희미하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사와무라는 몸을 일으켜서 미유키의 손을 치웠다. 미유키의 손은 식은땀에 젖어 축축하고 차가웠다.
사와무라는 대신 미유키의 다리를 문지르고 주물렀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지 몇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다치지 않은 쪽 다리와 차이가 조금 보이는 듯했다.
사와무라는 열이 많은 편이었고 피부와 피부가 마찰하니 더욱 열이 오르는 듯했다. 얼얼한 손바닥을 찜질하듯 무릎에 얹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원을 그리듯 문질렀다. 미유키의 얼굴이 편안해지고 숨소리가 깊어졌다. 사와무라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참이고 다리를 문질렀다. 이 얼굴은 사와무라가 만들어낸 것이다… 끙끙 앓던 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미유키를 다시 만나고 처음으로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해냈다. 뿌듯했다. 애틋해졌다. 이렇게 조금만 주물러주면 편안해지는데… 그동안 혼자서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얼마나 되었을까? 혼자 자게 하고 싶지 않다… 매일 이렇게 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별로 나이를 먹지 않은 듯도 했다. 달라진 것은 머리 스타일뿐이었다. 고등학생 때 미유키에게 아침 훈련 전 따로 공을 받아달라고 조르느라 그의 기숙사실에 처들어가던 때가 떠올랐다. 자던 사람을 흔들어 깨우고 베개를 빼앗으면 비몽사몽한 얼굴로 안대를 벗는 둥 마는 둥 했다. 하품을 하고 피곤한 티를 내면서도 미유키는 매번 공을 받아주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사와무라가 공을 던지면 미유키가 받는다… 그것은 그 당시 사와무라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미유키는 프로로 자신은 대학으로 가며 진로가 잠시 찢어졌어도, 자신도 프로로 진출해도 구단이 달라졌어도, 언젠가 미유키의 미트에 공을 던지고자 한다면 미유키는 받아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이고 당연한 일은 없었다. 이제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공을 받아주지 못한다. 더는 야구 선수를 하지 못한다. 사와무라는 후자보다 전자가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화가 난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답답했던 것일까….
아침이 밝았다. 미유키가 택시를 불러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역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미유키가 배웅하겠다고 했다.
“그럼 택시 부를게요.”
“늦었어.”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미유키는 조금 절뚝거렸지만 나란히 걷고 있으면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키가 크고 기본 보폭이 넓기 때문에 걸음도 평소보다는 느려졌지만 아주 느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공원이 보였다 방학인지 어린애들 몇명이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고무공을 던지며 놀고는 있는데 야구도 아니고 농구도 아니고 자기들만의 룰이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도 재밌는지 웃음꽃이 만발했다.
사와무라는 공원 반대편을 가리켰다.
“잠깐 공 좀 받아주세요.”
“뭐?”
미유키의 손목을 잡았다. 힘주어 당기자 미유키가 끌려왔다.
“캐치볼하자구요.”
“어이… 야….”
사와무라는 막무가내로 미유키를 공원 한쪽에 끌어다 세워뒀다. 가방에서 글러브와 공을 꺼냈다. 글러브 하나를 미유키의 손에 끼워주었다.
“제대로 못 받아주는데.”
미유키가 엉거주춤하게 서서 말했다. 제대로 쭈그려앉지 못한다는 걸 어필하는 듯했다.
“미유키, 캐치볼 안 해봤슴까? 서서 받으면 되잖아요.”
몇달 전만 해도 프로 포수였던 남자에게 사와무라가 시비를 걸었다. “장난하냐?” 미유키의 눈썹이 꿈틀하자 후다닥 뛰어서 거리를 넓혔다.
“자, 던집니다!”
미유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어깨만 대충 몇 번 돌리고 던졌다. 전력투구는 아니었지만 힘을 완전히 빼지도 않았다. 바람을 가르고 공이 날아갔다.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공을 잡았다.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나이스 캐치!”
“뭐 하자는 거야?”
“공 나한테 다시 줘야죠.”
미유키가 공을 손에 든 채 걸어서 다가오려고 했다.
“스톱, 던져서 줘야지, 던져서!”
“사와무라.”
“다리를 다쳤지 팔을 다친 거 아니잖아요.”
거리가 있어 미유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미유키가 공을 던졌다 미유키는 몇달을 쉬었다. 수년 수십년을 노력했어도 며칠만 쉬면 그 수배 수십배로 후퇴하는 것이 운동이고 스포츠였다. 하지만 미유키의 공은 사와무라의 글러브에 안착했다. 묵직한 소리가 났다.
사와무라는 다시 공을 던졌다. 그러면 미유키가 받았다. 그리고 사와무라에게 공을 던졌다. 그러면 사와무라가 그 공을 다시 던졌다. 사와무라가 공을 놓칠 때도 미유키가 공을 놓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공에서 가까운 사람이 주우러 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미유키가 손을 들었다.
“좀 앉아야겠어.”
두 사람은 벤치에 가서 앉았다. 사와무라가 근처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왔다.
“오랜만이었네요. 당신에게 공을 던진 거.”
“이 정도로 만족해?”
“만족함다. 근데 타자가 없는 게 아쉽네요. 외야수도, 내야수도… 심판도… 1루수도….”
“만족한 거 맞아?”
“아~ 재밌었다!”
사와무라가 벤치에 기대며 하늘을 보면서 버럭 외쳤다.
“소원풀이했냐?”
“이 정도로 만족 못 하죠.”
“거봐.”
“당했다….”
“….”
“야구… 그만두지 마십쇼.”
“이 얘기는 이미 끝난 거로 아는데.”
“안 끝났슴다. 들어보세요.”
사와무라는 괜히 목이 타서 음료수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남은 음료수를 전부 마셨다. 그래도 목이 타는 듯했다. 이건 갈증이 아니라 음료수를 한 병 더 다 마신다고 해도 가시지 않을 것이다. 이건 토해내야 낫는 증상이었다. 그래서 사와무라는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선수는 그만두더라도… 야구… 그건 그만두지 마요. 재밌었잖아요, 오늘… 그동안….”
“….”
“야구공과 글러브가 있고 던지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야구 아닌가요? 즐거우면 그만 아닌가요? 결국 즐거우니까 우리, 야구를 시작한 거 아님까… 당신과의 야구… 나는 포기 못 하겠어요. 당신이 하는 야구도….”
사와무라가 자세를 고쳤다. 다 마시고 옆에 둔 병을 실수로 쳐서 떨어트렸다. 플라스틱 페트병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사와무라가 일어나서 주웠다. 가볍게 뛰어 가로등 옆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시 뛰어서 돌아왔다. 미유키는 그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옆에 다시 앉았다.
“그래서 그만둔다고 했을 때 화가 난 겁니다. 왜냐하면 야구… 좋아했잖아요. 야구를 할 때 가장 즐거워했고 재밌어했잖아요… 그걸 포기하게 두고 싶지 않슴다, 나는….”
“……그게 야구라고….”
“아닐 이유 없잖아요.”
“….”
“….”
미유키는 고개를 숙였다.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짧아진 머리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지나도 역시 이 머리는 어색했다.
“재활… 원래 그만둘 생각 없었어. 근데 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지셔서… 곁을 지키고 싶어졌어. 100% 회복할 가능성은 0%지만 아버지가 3개월 뒤 돌아가실 확률은 99%니까….”
“….”
“아버지가… 응원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야구를 못 했을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를 선택한 거야. 야구는 이제 기회가 없지만 아버지와는 마지막이라도 함께할 기회가 있으니까….”
“….”
“핑계라고 해도 할 말은 없어. 가망 없는 희망에 아득바득 매달리며 애쓰지 않고 쉽게 놓아버릴 핑계… 그게 맞을지도 몰라.”
“….”
“재활에 성공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야구는 못 해. 그렇다면 차라리 주어진 시간을 헛된 일에 낭비하지 말고 아버지와 보내자… 그런 거야. 계산적이지?”
미유키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안경을 벗었다. 옷자락으로 안경알을 문질러 닦았다. 사와무라는 순간 드러난 미유키의 맨얼굴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런 얼굴은 당장 그만두라고 화를 내고 싶기도 했고 그 얼굴이 더는 눈에 안 보이게 확 끌어안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미유키가 다시 안경을 썼다. 사와무라를 보고 씩 웃었다.
“일어나자.”
두 사람은 마저 역까지 걸어갔다. 사와무라는 돌아갈 때도 걸어갈 거냐고 미유키에게 물었다. 택시를 잡아주겠다고 했다. 미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택시를 잡더라도 내가 알아서 잡을게.” 그 말에 사와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귀염성 없는 건 여전하군요… 그런 생각을 했다.
“얼른 들어가요.”
“사와무라.”
“왜요.”
“오늘… 재밌었어.”
“역시… 그쵸.”
“또 놀러와라. 프로 선수라 바쁘시겠지만.”
“꼭 갈게요. 내 사인 어디에 걸어놨는지 보러 갈 검다. 잘 걸어놔요. 젤 잘 보이는 곳에! 정중앙에!!”
“선배들 다 제치고 네 사인을 정중앙에 걸라고?”
미유키가 즐거운 듯 웃었다. 사와무라도 함께 웃었다.
사와무라가 타야 할 전철이 곧 온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래.”
“….”
지하철이 들어오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미유키가 말했다. 사와무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서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다음에 오면 또 하자, 야구.”
미유키가 손을 흔들었다. 사와무라도 손을 흔들었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며 풍경이 스쳐지나가도록 미유키가 서 있는 그곳이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리고 계속 사와무라는 야구를 할 것이다. 미유키도 야구를 할 것이다. 야구를 한다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 무엇이든 어떻게라도 될 수 있다… 사와무라는 앞을 바라봤다. 가고자 하는 곳이 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