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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피곤해."
아직 저녁 7시였지만 11시에 퇴근한 것보다 힘들었다. 캐롤이 실종된 뒤로 출퇴근 시간이 앞당겨졌다. 일찍 출근한 만큼 일찍 퇴근하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몸은 아직도 적응 중인지 퇴근 시간만 되면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졌다. 나는 밥부터 먹을까, 샤워부터 할까 같은 시답잖은 고민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냄새 좋다..."
문을 열자마자 알싸한 마늘 향과 함께 기름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집안은 온통 환하고 따스했다. 자취한 뒤로 이런 풍경을 가끔 그리워했다. 환하게 켜진 집으로 돌아오면 허기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와 정겨운 대화 소리, 나를 반기는 가족들.
그렇지만 혼자 사는 사람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일어나서도 안 되고. 하지만 나는 당황하거나 놀라는 대신 익숙하게 부엌으로 갔다. 그곳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간색 광대 차림을 한 남자가 몸을 처량맞게 구겨가며 요리 중이었다. 내가 할 땐 꼭 맞아서 불편한 줄 몰랐는데. 새삼 우리집 부엌이 작긴 작다는 걸 실감했다.
'오늘은 알리오 올리오구나…. 어, 우리집에 파스타 면 남은 게 있었나? 마지막으로 해먹은 게 언제였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어느 새 요리를 마친 피에로가 날 보고 있었다. 그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세팅이 끝난 테이블로 날 이끌었다. 내 예상대로 오늘 요리는 알리오 올리오였다. 나더러 앉으라는 듯 피에로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자, 여기서 문제.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초대한 적도 없는 방문객이 먼저 와 있다. 참고로 집주인은 이 방문객에게 스페어 키 위치를 알려주거나, 넘긴 적이 없다. 이때 집주인이 취해야 할 적절한 반응은?
1. 비명을 지른다
2. 도망친다
3. 경찰에 신고한다
4. 헛것을 봤다고 애써 외면한다
5. 우리집엔 어떻게 들어왔냐고 따진다
내 선택지는 보기에 없는 '의자에 앉는다'는 것이었다. 의자는 미끄러지듯 조용히 밀렸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이렇게 정중한 대접은 잠깐 만났던 다른 남자들에게도 받은 적 없는데. 이럴 때마다 마치 공주님 내지 귀족 영애라도 된 기분이다.
"고마워요."
그저 겉치레에 가까운 인사말임에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밀어를 들은 사람처럼 피에로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테이블 위에 장식된 장미꽃보다 훨씬 더 붉게 피어난 웃음이었다.
"잘 먹을게요."
초대 받지 않은 방문객이 만든 음식을 나는 망설임 없이 입에 집어넣었다. 맞은편에 앉은 광대는 초조함 반 기대감 반으로 내 반응을 기다렸다.
"정말 맛있어요! 지금껏 먹은 파스타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칭찬을 들은 피에로는 몸 둘 바를 모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당신은... 오늘도 안 먹어요?"
나와 달리 피에로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접시도, 포크도 없었다. 그는 괜찮다는 듯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걸까?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이렇게 체격이 크면 먹는 양도 많을 텐데. 분명 똑같은 의자임에도 그가 앉은 의자가 훨씬 작아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눈앞의 남자는 정말 키가 컸다. 걱정이 된 나는 결국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식사 잘 챙겨야 해요. 당신처럼 체격도 크고 활동량도 많은 사람은 제때 잘 먹어야 된다고요. 괜찮다고 대충 때우거나 거르면 안 돼요."
피에로는 잠깐 놀랐다가 이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환하다 못해 녹아내려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꺼림칙해지는 미소였다. 나는 꺼림칙한 기분을 숨기고자 음식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내 식사 챙겨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 번 더 못할 망정 잔소리라니.
'아니, 아니지. 무작정 고맙게 여기기엔 수상쩍은 게 너무 많잖아.'
언제부턴가 피에로는 오늘처럼 우리집에 와서 요리를 만들어 내게 대접하기 시작했다. 매일은 아니고 이삼일에 한 번씩? 초대한 적도, 스페어 키를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아무리 캐물어도 그건 비밀이라는 뜻으로 집게손가락을 입에 갖다 댈 뿐.
당연히 처음엔 그의 요리를 거부했다. 노상 판매점에서 이상한 약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잘못될 뻔한 일이 지금도 선명한데.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하든 피에로는 몇 번이고 찾아와 내게 요리를 대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했더라. 하루는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결국 허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태껏 걱정했던 일이 무색하게 그가 내놓은 음식은 정말 평범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약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평범하니 맛있는 음식이었다.
한 번 입을 대니 두 번은 쉬웠다. 정신을 차려보면 피에로가 만든 요리를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젠 그가 집에 있어도 전혀 놀랍지가 않다.
'웬 우렁각시가 생긴 기분이야.'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피에로는 조금씩 집안일을 건드렸으니까. 청소든, 빨래든, 그 외의 것이든. 이걸 보고 누군가는 묻겠지. 당사자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놔두지 그래? 편하고 좋잖아.
그래, 편하고 좋지. 그래서 문제라고. 지금처럼 식사를 만들어주는 것도 이렇게 편한데. 배가 차면 찰수록 알 수 없는 거북함도 차오른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내가 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가 만들어 내게 먹인 것이 곧 내가 된다면. 그게 100%가 된다면.
지금과 같은 일상 또한 180도 바뀔 거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포크질을 망설이게 한다. 그러다가도 피에로가 내놓은 가토 오 쇼콜라를 먹으면 디저트의 달콤함이 내 안의 불안을 흐물흐물 녹여버렸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앉아 있어요."
피에로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릇을 내 손에서 뺏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지난번에 내게서 그릇을 뺏으려다 실수로 깨버리는 바람에 내가 발을 다쳤기 때문이다. 결국 아웅다웅하다 함께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우렁각시는 무슨…. 누가 보면 신혼부부인 줄 알겠다.'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됐는지 안다. 천장 모서리에 스며든 곰팡이처럼. 소리 없이 무너진 벽돌담 끄트머리처럼. 볕 들지 않는 벽에 드리워진 거미줄처럼. 피에로는 조금씩 '상식'이라는 경계선을 흐릿하니 불분명하게 만든 다음, 내가 아차 하는 사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온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말려들지 말아야지 항상 다짐하면서도 어느샌가 침입을 눈감아주는 내가 있다. 닥터와 할리퀸의 말처럼 나는 아슬아슬한 위험을 즐기는 다소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디라고 했어, 엄마?"
[어디지. 방금 꽃집 지나쳤어.]
"거의 다 왔다는 소리잖아. 왜 온다는 말도 없이 그냥 와?"
[그래서 지금 전화했잖아.]
"그래도 그렇지 다 와서 전화하는 법이 어딨어."
[왜 화를 내고 그래. 엄마가 딸 집에 놀러도 못 가니?]
"화내는 게 아니라…. 나 지금 출근해서 집에 없는데..."
[스페어 키 있을 거 아냐. 어디다 뒀어? 현관 옆 화분 밑에?]
"응, 아니, 응..."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니, 거기 둔 건 맞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연신 번쩍이는 레드 라이트를 애써 무시한 나는 엄마를 설득했다.
"저기, 엄마. 다음에 오면 안 될까? 나 요즘 바쁘고..."
[너 아까부터 이상해. 너 혹시...]
"호, 혹시 뭐?"
[나 몰래 애인이랑 동거하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문제 없지? 이따가 보자. 퇴근하면 전화해.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엄마! 여보세요, 여보세요?!"
원망스러운 눈길로 통화 종료된 스마트폰을 노려봐야 바뀌는 건 없었다. 길어도 10분이면 우리집에 엄마가 온다. 문제는 아무도 없어야 할 집에 이미 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엄마와 피에로가 마주치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엄마는 어떻게 반응할까?
1. 비명을 지른다
2. 도망친다
3. 경찰에 신고한다
4. 헛것을 봤다고 애써 외면한다
5. 우리딸 집엔 어떻게 들어왔냐고 따진다
정답은 전부 다! 나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돌아버리겠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출근 시간이 코앞이다. 피에로에게 연락하고 싶어도 번호를 모른다. 지금쯤 성실히 근무 중일지도 모르지. 어딘가에서 전단지를 돌리거나 공연하며 극단 홍보 중일까?
아예 서커스로 들어가서 직접 찾아? 아니다, 티켓이 없으니 입장 불가다. 몇 번 봤다고 단원들이 날 아는 눈치긴 했으나 무전 입장을 허락할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는 가운데 내 뒤로 잘게 방울 소리가 났다.
"아가씨, 내 사랑."
피에로가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누가 당신을 이토록 곤란하게 만들었나요?"
"피에로!"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보았다. 별안간 그가 흠칫하며 몸이 굳어졌다. 하지만 안도감에 취한 나는 눈치 못 채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당신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걱정했어요."
"저, 저를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쁨에 흠뻑 젖은 피에로는 감격에 겨워 나를 껴안았다. 냉정히 보자면 날 품 안으로 파묻은 쪽에 가까웠다. 2m 가까이 되는 그와 있으면 난 영락없이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였다.
고목나무가 속삭였다.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댄 탓에 그가 말할 때마다 귓바퀴가 뜨겁고 간지러웠다.
"저를 찾으셨다니. 너무 기뻐요. 제게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을 무한히 반복하고 싶어요. 가끔 상상하곤 했죠. 제 이름을 부르고, 저를 쫓아, 저만을 찾기 위해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당신을요. 아,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달콤하군요."
청산유수 같은 밀어였다.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이젠 익숙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피에로, 이제 우리집에 오지 말아요."
날 껴안은 팔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나는 서둘러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했다.
"아, 엄마가 오셨어요. 당분간 우리집에 머무실 예정이에요. 아직 당신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서 갑자기 마주치면 서로 많이 놀랄 거예요."
젠장, 말하면 말할수록 정말 엄마 몰래 애인과 동거하는 불속성 효녀가 된 기분이다.
"피에로, 기억해요? 당신이 그랬죠. 내가 위험해지거나, 난처해질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요."
그는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끄덕였다.
"나 역시 피에로가 난처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해... 하죠?"
방금 전까지 시무룩하던 얼굴이 서서히 피어났다. 저렇게 표정 변화가 빠른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물론이죠, 아가씨. 전부 이해해요."
"정말 고마워요!"
좋아, 이걸로 한시름 놨다. 나는 피에로와 헤어진 뒤 곧장 카페로 출근했다. 얼마 전 캐롤 대신 들어온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했다.
"아까 그 광대, 남자 친구예요?"
"네?"
"아니,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가 우연히 봤는데 서로 껴안고 있길래요."
나는 얼버무렸다.
"그건 아니고... 그냥... 친구 사이에요."
"아, 네..."
되지도 않는 변명임을 알지만 어쩌겠어. 사실 친구라 하기에도 뭣한 관계지만. 남몰래 한숨을 푹 쉬며 근무를 시작했다.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다. 원래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들 하지만 유랑 서커스가 나타난 뒤로 더더욱 그런 거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