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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in the dark

Summary:

해양생물학자 샹크스 X 페이퍼 아티스트 버기 / 현대 AU

A modern AU retelling of what led to chapter 1082. Shanks as a marine biologist, Buggy as an origami artist. From childhood to twenty years of silence, and the reunion that followed.

Notes:

This fic started from two questions that wouldn't leave me alone:
Why did Buggy declare himself Pirate King in chapter 1082 — and what carried him to that moment?
And if the current events of the story reach their end, how would Shanks choose to live afterward?
This is my first attempt to explore both through a modern AU lens.
Btw, the main story is posted here, but the side stories and epilogue are only available in the physical edition.

Chapter 1: Beneath the Water

Chapter Text

허나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 심연에서 살아 돌아간 적이 없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수치심 없이 대답하겠네. 

단테 『신곡, 지옥편』 (제 27부, 61-66행)

 

 

1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버기는 해변마을 내 수족관 앞에 서 있었다.

수족관의 창 너머로 해달 여럿이 손을 포갠 채 잠에 들어 있었다. 두런거리는 목소리조차 그 수가 늘어나면 시끄러울 법한데도 그들은 계속 잠을 잤다. 그러던 중, 한 마리의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겹친 손을 내뺀 것으로 보아, 바닷속 전복을 캐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빈손이 다른 손을 찾아 쥐었다.

반동은 배 위의 새끼에게로 전해졌다. 어린 해달이 잇따라 몸을 뒤척였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사랑스럽지 않아?” 그들은 어린 해달의 행동을 흡사 어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으로 해석했다. 버기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런 애틋함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수영하지 못하는 생명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몸부림을 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물론, 아크릴 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매번 위험이 도사리는 바다가 아니었고, 오래전 그가 겪었던 사건의 결말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했다.

해수 알레르기가 생긴 이래, 버기에게 바다란 줄곧 공포의 대상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유리 바닥을 서슴지 않고 건너다가 이듬해가 되면 지레 겁부터 먹듯, 그것은 친구의 손에 이끌려 바다로 놀러 갔던 오후에 소리 없이 찾아왔다. 그 당시 여름방학을 맞은 열한 살 버기에겐 아무런 계획이 없었고 초록빛 바다를 보러 가자는 샹크스의 제안은 꽤 솔깃했다. 투명한 유리처럼 바닷속이 훤히 보인다는 묘사 외에도 물고기와 함께 헤엄칠 수 있다는 말이 결정타였다. 바다 수영 실력을 뽐낼 생각에 한껏 부풀었던 기대는 그러나, 갑자기 몸이 뒤집히고 기도가 부어 숨이 차는 순간 끝을 보았다. 바닷물에 온몸이 격렬하게 반응하리라곤 감히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렇듯 해수 알레르기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운데,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뚜렷한 치료법마저 없다는 현실에, 한 마디로 버기는 미칠 노릇이었다. 비록 살아온 햇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시간의 축이 저만치 후퇴한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절망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가며 속으로 있는 힘껏 저주하는 동안, 항히스타민제 주사를 놓아주던 로저는 부드러우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물 알레르기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라.” 

물 대신 뜨거운 차나 차가운 우유를 마셔야만 하고, 목욕하기 전 의약품을 갖추는 것은 기본, 비가 내리면 향수에 젖기보다 당장 비를 피해야 하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냐며 로저는 이야기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는 눈물조차 사치일 거다.” 

로저의 말은 오래도록 버기의 뇌리에 남았는데, 때마침 로저가 문을 열었고 샹크스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침대로 달려왔기 때문일 거라고, 그는 짐작했다. 당시 샹크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있었다. 채 마르지 않고 짠 내가 나는 그것이 눈물인지, 조금 전까지 몸을 담그고 있었던 바닷물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버기는 부어오른 손의 감촉으로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의 머리카락만큼 벌게진 눈 또한 젖어 있었는데, 단순히 바닷물 때문에 그런 거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

감격에 겨운 재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샹크스는 로저에 의해 목덜미가 잡힌 채 밖으로 내쳐졌기 때문이었다. 닫힌 문 너머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목소리는 버기의 상태를 진즉 일러주지 않았느냐며,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느냐는 질타와 더불어 바닷물에 조금이라도 젖은 채 만나선 안 된다는 당부로 이어졌다.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에 이어 짙은 한숨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버기를 구하느라 고생했다는 말도 오갔다. 로저는 만약 몇 분이라도 늦었더라면, 이라고 말을 흐리기까지 했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어쩐 일인지, 버기는 맥이 풀리고 말았다. 다른 부문은 뒤처질지언정 수영만은 그의 재능이 샹크스의 노력을 앞선다고 굳게 믿었는데, 오히려 배워본 적 없는 사람보다 못한 처지가 되자 가혹한 운명의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리하여 먼바다까지 나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샹크스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해 보다 버기는 고개를 저었다. 로저의 말대로, 알레르기는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친구이자 라이벌인 샹크스의 등만 보고 살라는 계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열한 살 버기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벌써 그게 몇 년 전이야.”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원래대로라면 버기는 전화를 받지 않을 계획이었다. 소용없었다. 발신자는 생각보다 집요했고, 인내심 또한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연이어 울리는 진동에 주변을 살피던 버기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는 고요히 잠든 해달 무리를 한 차례 더 둘러보고 난 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2

 

“안녕.”

“뭐야, 무슨 일이야?”

“언제는 허울뿐인 대표에게도 예의를 차리라며 다그치더니만, 웃기는 자식일세.”

“용건만 말해.”

“너, 수족관에 갔었다며.”

별안간 버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수도꼭지를 황급히 잠그고 가장 가까운 화장실 빈칸으로 들어갔다. 문까지 걸어 잠근 다음, 사방에 귀를 기울여 이곳에 혼자 남겨졌다고 확신하게 되자 버기가 말했다.

“왜, 나는 가면 안 돼?”

“누군가 널 봤다는 제보를 받아서 말이야. 분명히, 집에 틀어박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몸뚱이가 여러 개인가 봐? 아니면, 숨통이 여러 개인가.”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대꾸했다.

빌어먹을 악어 자식. 시원하게 욕이라고 날려주고 싶었지만, 버기는 제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핑곗거리를 만들어서라도 이 상황을 모면해야만 했다. 한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어설픈 연기력이라도 발휘해야만 했다. 그는 동정심을 구걸하는, 뒷이야기가 있는 사람처럼 숨을 일부러 느릿하게 내쉬었다. 

“미안해. 그 시간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고.”

버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짧은 침묵 끝에 찾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무얼 웅얼거리는지 모르겠다며,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남자가 요구했다. 목소리가 누그러진 것을 보아, 남자는 조금 전에 비하면 이 순간이 그다지 짜증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버기는 남자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미안해.” 그는 재차 사과했다.

“그런데 나인 줄 어떻게 알았대? 마스크도 끼고 모자도 썼는데? 옷도 평범하고.”

“한심하긴. 그게 가려진다고 가려지겠냐.”

“오늘은 화장도 안 했다고!”

“그런다고 그 웃긴 모양새가 가려지겠냐고.”

비록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지만, 버기는 그 말에서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렸다. ‘웃기는 빨간 코.’ 버기는 기막히게 타인의 의중을 잘 알아차렸다. 그는 실제로도 능숙하게 받아치곤 했지만, 단어가 하나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가볍게 내뱉는 말을 내면의 콤플렉스와 결부 짓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광대라는 별칭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릴 줄 알면서도 ‘우습다’, ‘빨간’, ‘코’가 얼굴 없이 그를 건드릴 때면, 바로 지금처럼 뇌가 곧 작동을 멈추곤 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고안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실전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전부 헛짓이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아주 짧게 반박하고선 입을 다무는 때가 간혹 있다는 거였다. 지금의 경우는 후자였다. 의외로 수긍하는 버기에게 남자는 더 할 말이 없는듯했다. 그는 시답잖은 목소리로 일과 관련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직접 막대한 빚의 무게를 상기시켜 주었고, 인사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버기는 제자리에서 무감각하게 서 있었다. 문득, 부채를 온전히 갚아야만 끝날 수 있는 관계라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얼마 안 되는 빚이었다.

그리고 소소했던 빚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당장 갚을 수 없다는 말에 폭력과 협박으로 점철된 관계는 결국 사업 파트너란 그럴싸한 형태로 포장되었다. 외부에 알려진 대로라면 진행 중인 사업의 우두머리는 버기이고 하수인이 여럿이어야 했다. 한데 실은 그 반대였다. 최초 등록 시, 잘못 기재된 양식을 외부인의 검토 없이 제출한 것이 화근이었다. 둘러대기론 그저 실수였을 뿐이라며, 정정할 기회가 여러 차례 오기도 했으나 누구도 저질러진 잘못을 고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업이란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어떠한 운명을 마주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배와 같았고, 문제가 생긴다면 모두 버기에게 뒤집어씌울 심산이었다. 꽤 불합리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정작 버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대학 중퇴 후, 인재 파견 업체에 이름을 올리고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며 뚜렷한 신분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다. 그 시절의 그를 표현하자면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산다는 말이 정확했다. 제대로 된 일을 해보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감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첫인상이 걸림돌이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밤거리에서 호객하던 날에도 그러했다. 한번은 누군가 집요한 눈길로 버기의 얼굴을 훑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얼굴로 호객이라니. 다 도망가게 생겼는데, 면상에 빨간 건 떼고 오던가.” 연이은 거절에 힘이 다 빠져버린 그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버기는 보다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너도 손가락 뜯기고 싶냐?” 

코웃음을 치든 말든,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정말이야. 혹시 못 들어봤나? 아주 작고 예쁜 사과 한 알을 얹은 것 같다, 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 즉시 손가락을 깨물려서 영영 못 쓰게 된 이야기. 내가 살던 동네에선 아주 유명하거든.” 

이렇듯 십중팔구 상대를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버기의 이야기는 몇몇 사람에겐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샹크스도 그중 하나였다. 무엇이든 웃어넘기는 그가 꼴 보기 싫은 나머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대낮에 충격을 주고자 도발적인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샹크스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우, 아팠겠다.”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짓고선, 그가 버기에게 말했다. 

그 말에 묘한 패배감을 느낀 버기는 순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충동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그는 물러나는 대신 적당히 얼버무렸다. 심지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샹크스가 특별히 주어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버기는 마치 제 손가락이 동강 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끔찍한 농담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겪었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고 버기는 차마 제 입으로 고백할 수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커다란 코가 지목당할 때마다, 버기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이 우스운 빨간 코를 제거해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은밀한 열망은 그의 인생관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쳐, 학업을 마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잠적하여 모두의 기억에서 안개처럼 증발해 버리겠다는 계획을 포함하여 돈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하기 위해선, 막연하게나마 많은 돈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악착같이 모아야만 했다. 그것은 때론 계산적이거나 기회주의적 태도로 둔갑하곤 했는데,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에 취해 그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한편, 억제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주머니가 점차 채워질수록, 어떻게든 고쳐보겠다는 열망은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여전히 ‘코’와 비슷한 단어를 듣기만 해도 불쾌감이 바로 밀려오지만 정작 그것을 고쳐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버기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흘러,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굉장히 당연해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무관심이라고 단정 지었던 태도는 실로 우월감 같은 거였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도 살 수 있는 돈. 부족함 없이 반짝이는 보석. 그것을 버리기 위해 모으는 행위. 미치광이의 지독한 낭만으로도 느껴지는 여유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지도 못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손에 쥐고 길들일 수 있는 무언가 필요했다. 

샹크스와 헤어지고 난 뒤로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3

 

버기가 보는 세상이란, 알고 있다면 아는 것이고 모른다면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투성이였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서 신비로운 여명의 순간을 재현하는 조명과 같았다. 언제든 태양을 방 안으로 들이고, 천장에 달을 띄우고, 별빛 속을 거니는 체험과 매우 유사했다. 광대의 분장처럼 정말로 실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짜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해도 이상해할 것이 없었다.

수족관도 그런 곳이었다. 바다 깊숙이 뛰어들지 않았는데도, 머리 위를 지나가는 가오리를 보면 해저 한가운데를 걸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바다 수영이 금지되었던 시절, 그때는 달랐다. 유리창 너머로 생생하게 펼쳐지는 세계는 진짜였다.

흡사 바다의 단면을 잘라놓아 눈앞에 가져다 둔 듯한 풍경은 실로 황홀했다. 형형색색의 열대어가 무리를 지어 다니고 상어가 느릿하게 물속을 가로지르던 때였다. 번쩍이는 붉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불현듯 버기의 눈에 들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물고기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요리조리 눈길을 피해 가듯 헤엄치던 물고기가 산호 너머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가 시야에 잡혔다. 하얀 태양 아래서라면 아마도 무시했겠지만, 그가 있는 곳은 푸른 빛에 갇힌 해저터널이었다. 빨간 머리도 저만큼이나 넋이 나간 듯, 아주 공손하게 밀짚모자를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을 곁눈질하는 행동은 실례라고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것과 별개로, 버기는 어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 후,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놀라 얼어붙은 가슴으로 눈을 돌리자 밀짚모자를 쓴 빨간 머리가 보였다. 문득 그는 힐끔거리던 게 비단 자신만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도무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버기는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그는 황급히 코를 가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웃기는 빨간 코’로 가득했다. 그 코가 진짜냐고 묻는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그를 이런 꼴로 낳아준 부모가 미워졌다. 그러나 빨간 머리는 버기가 답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버기는 모르는 사람에게 시비부터 걸고 보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넌 이게 웃겨?” 

“뭐가? 네 파란 머리가?” 

잠자코 바라보던 빨간 머리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아, 하고선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왜?” 

“왜라니.” 

“그럼 넌 내 머리카락이 웃기니? 태어날 때부터 빨갰거든. 네 논리대로라면 이것도 웃겨야 하는 거 아냐?” 

“멍청아, 그건 머리카락이고! 나는 아니고!”

상대가 펄펄 뛰든 말든 빨간 머리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그는 버기에게 다가와 물고기와 상어에 대해 이것저것을 말했다. 그러나 급히 사레에 들린 사람처럼 내리 기침하는 통에 버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4

 

빨간 머리 샹크스는 외아들이었다. 그는 대형병원을 운영하는 로저의 양아들이기도 했다.

세상에 나온 지 석 달을 채우자마자 타지에서 부모를 잃은 그는 아무도 없이 홀로 남았다. 가까스로 영아원에 위탁되었으나 그곳의 형편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친부 손에 내쳐진 버기가 그러했듯, 정에 굶주린 유년기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구원의 손길은 그를 빗나가지 않았다. 의료 봉사단의 예기치 못한 방문이 아기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 놓은 것이다. 

몇 년 후, 로저에게서 입양 경위를 듣게 된 버기는 샹크스에게 ‘이 시대 최고의 행운아’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샹크스는 강하게 반박했다. “네가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더 많은 게 달라졌을걸.”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수족관에서의 만남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성을 내며 아무도 언급한 적 없는 빨간 코에 대해 횡설수설하다 제풀에 꺾이는 모양새에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샹크스는 집으로 오는 내내 파란 머리에 관해 이야기했다.

수소문 끝에 버기가 지내는 위탁 가정을 찾은 로저는 소장에게 입양 의사를 밝혔다. 그에겐 양아들이 하나 있었고, 형제를 만들어 줄지 고민하던 찰나, 때마침 나타난 버기보다 적합한 상대는 없다고 여긴 셈이다. 또래인 점도 마음에 들어 했다. 로저의 의지는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소장의 제안대로 매주 토요일, 샹크스와 함께 버기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조롭게 흘러가던 입양 절차는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종잡을 수도, 설득하기도 어려운 버기의 변덕이 문제였다. 샹크스와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편안해하면서도, 형제가 되길 단호히 거부하는 아이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자니 걸리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돌고 돌아 버기의 법적 보호인 자격은 로저의 대학 동기인 레일리에게 돌아갔고, 전학 시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맞물린 끝에 일 년이 더 소요되고 나서야 마침내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샹크스와 한 지붕 아래 살지 않겠다는 버기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듯했다. 솔직히 말해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주장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도박이 성공한 셈이었다. 제가 생각해 보아도 무리하게 고집을 피운 덕에 일찌감치 체념했던 버기는 너무나 놀랐다. 동시에 너무도 신기해했다. 그러나 로저의 의지는 아이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강했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평판이 극과 극을 달린 데다, 전공의 시절 병원을 여러 차례 뒤집어 놓았던 로저의 과거를 떠올려 본다면 이전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편이었지만, 고작 아홉 살 된 아이가 알 턱이 만무했다. 

온전한 가족의 일원이 된 날, 술에 취한 로저에게 버기가 다가가 물었다. 가족이 아닌데도 다짜고짜 발언권부터 요구한 자신을 무슨 이유로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아이는 진심으로 알고 싶어했다. 한데, 대답이랍시고 로저가 내뱉은 말은 엉뚱하기 그지없었다. “정해준 대로만 따르는 놈이 바보인 거지.” 그는 커다란 손으로 버기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샹크스가 느닷없이 전학을 결심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5

 

모든 일에 명분이란 내세우기 마련이다. 샹크스가 멀쩡히 다니던 사립학교를 그만두고 버기가 다니는 공립학교로 옮겨간 것에 대해서 표면적인 이유는 이러했다. 그러니까, 학년이 올라갈수록 엄격해지는 규율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학교 근처에 바다를 낀 대형수족관이 있어 종종 그곳으로 현장학습을 간다는 점도 그럴싸한 구실 중 하나였다. 지옥에서 온 흡혈오징어를 맨눈으로 볼 수 있던 유일한 장소였다.

“저것 봐, 버기! 오징어가 새빨개! 눈은 파랗고! 진짜 이쁘다.”

“뭐?”

“색이 진짜 빨간데 눈이-”

“-누가 빨간 코라고 했어?”

“나는 아냐! 맹세코 그런 말 안 했어!”

 샹크스는 억울했다. 책으로만 접했던, 살아있는 화석을 보고 감탄했을 뿐인데 가장 친한 친구가 동조해 주기는커녕 멱살이나 잡히는 신세라니! 질 수 없어 그는 버기의 양어깨를 힘껏 쥐었다. 그대로 움츠러들 줄 알았건만 웬걸, 착각이었다. 버기는 한술 더 떠,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냐며 숨을 씩씩거렸다. 

두 사람 다 그만하거나 나가거나, 하나를 택하라는 교사의 엄중한 경고가 떨어진 뒤에야 다툼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도 버기의 얼굴은 내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샹크스는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면 지금과 같은 어색한 공기는 풀어지겠지만, 어쩐 일인지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 오해로 시작된 도발에 넘어갔을 뿐, 애초에 그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는 말을 거는 대신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차갑고 고요한 물속, 빨간 오징어 한 마리가 서서히 유영하고 있었다. 몸통에 비해 다소 커다란 눈은 시리도록 푸른 빛을 띠었다.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바다의 색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이라고, 도감에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했다. 수억 년간 바다에 내리는 하얀 눈을 먹고 사는, 이 기이한 원시 생명체는 어린 시절을 바쳐 사랑했던 공룡과 같았다. 보통 아이들이 티렉스와 트리케라톱스에 열광하는 동안 샹크스는 해양생물, 그중에서도 심해생물에 빠져들었다. 따지고 보면 오래전 죽은 공룡이나 캄캄한 심해를 떠도는 생명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는 점에선 같았다.

어디선가 바닷속 생물들은 하늘을 날아오르듯 자유롭게 헤엄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사실이었다. 지느러미를 날개 삼아 푸른 공간을 쉼 없이 떠도는 모습에서 샹크스는 새를 떠올렸다. 파란 하늘을 달리는 빨간 새. 다소 비현실적인 광경에 사로잡힌 건 비단 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새 버기조차 유리창에 코를 박고선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빨간 코가 더 빨개진 채로 버기는 수족관을 나와야 했다. 이어지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에 샹크스 옆에 나란히 선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필 네 머리카락이 빨개서 더 빨개 보이잖아.”

도대체 머리카락과 코의 색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었지만, 샹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곁에 머무는 그의 행동에서 샹크스는 확신했다. 틀림없이, 버기는 샹크스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코로 주목받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빨간 머리 소년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4시에 가반 씨가 데리러 온대. 입구에서 기다리자.”

“응.”

“그나저나 레일리 씨는 어떠셔? 오실 수 있대?”

“몰라. 일찍 올 수 있으면 온댔는데. 연락주신댔어.”

“그럼, 오늘 저녁도 같이 먹는 거지?”

“···모른다니까?”

버기의 보호자인 레일리는 소아신경외과 의사였다. 직업 특성상, 대여섯 시간이 넘는 수술이 흔한 데다 야근과 주말 근무 또한 잦았기에, 얼굴 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함께 외출하던 중일지라도 전화가 오면 불려 가는 탓에 버기는 거의 로저의 집에 머물곤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입양 과정에서 근 일 년 넘게 주변을 괴롭히며 억지를 부려야 할 필요도, 의미도 사라졌다. 어쩌면 로저는 처음부터 이 모든 사태를 예견했을지도 모른다고, 버기는 종종 생각했다.

레일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응급수술이 잡혀 약속대로 일찍 귀가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버기는 수화기를 든 채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분명 레일리를 안심시키려 하는 말일 텐데도, 샹크스는 그가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날 저녁, 버기는 바닥에 엎드린 채 커다란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매우 빽빽하게 그려진 그림은 페이지마다 비슷한 옷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중에서 표지에 그려진 주인공 단 한 명을 찾아내는 것이 책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는 이십 분째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못해 샹크스가 버기에게 다가갔다.

“도와줘?”

“됐어.”

눈알이 빠질 것 같다며, 버기는 재빨리 책을 덮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쉽게 토라지고 금세 풀리는 만큼, 버기는 감정의 변화도 빨랐고 그만큼 뒤끝도 없었다. 샹크스는 그가 좋아하리라 믿고 당당하게 자기 왼손을 내밀었다.

“이거 봐.”

“뭔데.”

“오늘 본 거 만들어봤어. 어때?”

버기는 꼼짝하지 않고 손바닥 위의 작은 형체를 바라보았다. 빨간 종이로 만들어진 그것은 한눈에도 서툴고 못났기 그지없었다. 오늘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종이를 일부러 구겨 동그란 쓰레기를 만들어 놓았냐고 물었을 거였다. 볼이 절로 씰룩이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버기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종이로 뭘 한 거야? 물고기 똥이야? 아니다, 솔직히 안 닮은 건 문제가 아냐.” 그는 에둘러 덧붙였다. 

“못생겼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상크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지만 내면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버기는 온몸으로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적당히 하라는 호소에도, 들은 척 만 척이었다. 실로 처음이었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는데, 저 완벽해 보이는 빨간 머리도 지독하게 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목격한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밀한 쾌감이 솟아올랐다. 더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이것으로도 족했다. 버기는 다시금 표정을 고쳐 지었다.

그는 샹크스에게서 꼬깃꼬깃해진 조각을 빼앗았다. 그대로 쫙 펼친 다음, 바쁘게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안쪽 혹은 바깥쪽으로 접었다 피길 반복하며, 접힌 선을 토대로 종이를 부풀리고,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데 온 신경을 다해 몰두했다. 마지막으로 종이를 연필로 감아 여덟 차례 굴곡을 주고 나서야 십여 분에 걸친 종이접기는 끝이 났다. 버기는 종이 오징어의 다리를 잡고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공중으로 내던졌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종이 오징어는 가까스로 샹크스의 손바닥에 착지했다.

“다 봤지? 내놔. 버릴 거니까.”

“이 귀한 걸 버린다고? 말도 안 돼! 그럴 거면 나 줘.”

“안돼. 싫어.”

“왜? 버린다며. 나한테 버려.”

“절대 안 돼.”

“그러니까 왜냐고.”

“안 보여? 처음에 네가 잘못 접어서 매끈해야 할 여기가 울퉁불퉁하잖아. 볼수록 거슬리는걸 왜 가지고 있어. 차라리 새로 만들면 몰라도.”

직접 부위를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들, 무용지물이었다. 샹크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난 잘 모르겠거든? 그렇지만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새로 만들어 주면 되겠다!”

“뭐가 어째?”

“아니면 이걸 주던가.”

“멍청아!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

“와, 진짜 너무하네. 주는 것도 안 된다, 새로 만드는 것도 안 된다, 그럼 못생겼다고 하지나 말던가.”

그 말이 결정타였다. 순간, 버기는 본능적으로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아무리 마음에 새기며 이를 갈고 준비해 본들 전혀 소용이 없었다. 흐름의 종착지는 매번 샹크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곤 했다. 그 시절 버기에겐 이 흐름을 뒤집을 만한 재간도, 자신도 없었다. 아주 간단하게, 그의 완벽한 패배였다.

“···주면 되잖아. 해주면 되잖아!”

“어?”

“하면 되잖아! 진짜 이게 뭐라고!”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그지? 아무튼, 약속한 거다?”

마음이 바뀔세라 샹크스는 서둘러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 나머지, 버기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받아냈다. 이를테면 새로 접을 종이를 포함하여, 여분의 간식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결과물도 없을 거라고, 버기는 재차 강조했다. 그런데도 상대의 의지에 멋대로 휘말렸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정확했다. 

이튿날, 샹크스는 족히 열댓 마리는 접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종이를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약속이 다르지 않냐고 펄쩍 뛰어봤자 한 마리로 국한된 적 없지 않냐는 대답이 돌아왔고, 버기는 할말을 잃었다. 심지어 자료로 쓰라며, 그는 태연하게 도감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조건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은 버기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근데 샹크스.”

“응.”

“거짓말 안 하고 넌 이게 이쁘다고 생각해?”

“그건 왜?”

“특이한 거 같아서. 보통 이런 걸 이쁘다고 하진 않잖아.”

흡혈오징어를 참고하라고 가져다 둔 도감에는 이름 모를 해양생물이 가득했다. 개중에는 탁구공나무해면처럼 물풍선이 달린 막대기를 연상시키는, 재미난 생명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딘가 기괴하고 묘하게 극단적이며 한편으론 표독스러웠다.

“그래? 뭐, 사람마다 다 다를 테니까. 그래도, 좋아하는데 유행은 없잖아.”

그는 버기를 쳐다보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천장의 불이 한 번, 이어서 한 번 더 깜빡였다.

이내 방 안은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캄캄해진 시야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떠한 색도 순식간에 힘을 잃어버리는 공간에서, 금방 돌아올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샹크스의 차분한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남았다. 그의 말대로 곧 불이 켜졌다. 

바닥에는 접다만 빨간 오징어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6

 

누구라도 빨간 머리 소년을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애의 서글서글한 미소에 전염될 것이다. 오뚝한 코와 시원한 눈매가 인상적인 외모는 그다음이었다. 어른에게 예의 바르고 저보다 어린아이에게 다정한 소년을 싫어할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그와 만남을 전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정말로 그의 존재가 상대의 안쪽으로 침범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면의 모든 것이 변화하여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껏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들이 갑자기 중요해지기 시작하고, 초조한 마음에 시답잖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시들었던 말초신경이 되살아난다는 의미였다. 새로 전학하게 된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온통 그를 위한 내면의 방을 하나씩 만들어 놓은 듯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그들은 빨간 머리 소년더러 가식적인 척, 순해 빠진 척하며 언제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직접 대면할 자신은 없었기에 그들은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빨간 코, 듣기론 네가 그 빨간 머리랑 형제라던데, 진짜야?”

소문은 소문일 뿐, 버기가 아무리 정정해 주어도 그들은 귀담아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다. 샹크스와 있을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한동안 버기는 샹크스와 시간차를 두고 등하교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샹크스의 미적지근한 대처도 한몫했다. 그는 버기를 향한 조롱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형제라는 단어만은 시큰둥하게 넘겨짚곤 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샹크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거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어느 여름날이었다.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왼 볼이 긁히고 셔츠 옷깃에 검붉은 자국을 묻힌 채 샹크스가 로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소소한 말다툼이 몸싸움으로 번졌고 샹크스를 포함하여 싸움에 가담한 사람들은 일주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로저만큼이나 샹크스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스스로 사고뭉치가 되길 자처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번 돌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었다. 얼룩진 핏자국은 씻어내면 될 일이고, 보일 듯 말 듯 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거였다.

버기는 아니었다. 샹크스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이래서 너와 가족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내뱉은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다음부터 넌 나서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샹크스는 눈도 깜짝 않으며 대꾸했다.

“그래?”

늘 하던 식으로 모든 말을 탁구공 튕기듯 받아치는 그가 왠지 얄미워졌다. 버기는 집어 들었던 연고를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둘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처지를 한탄했다.

“버기. 약 발라줘.”

“로저에게 해달라 해. 의사잖아.”

“레일리도 의사야.”

“간호엔 소질 없어.”

“그야 두고 볼 일이지.”

일주일간, 버기 없이 집에서 무얼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며 샹크스는 넉살 좋은 소리를 해댔다. “그나저나 그 애들은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내 주먹이 조금 매워야 말이지.”

버기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이래선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물러 터져선.”

그는 여전히 샹크스를 외면한 채 말했다.

“내가 감히 충고하는데, 그런 식으로 남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다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게 되는 거다. 한 마디로 손해만 보고 산다고.”

“···손해만 본다고?”

“그래.”

은박지가 벗겨질 때까지 껌종이로 종이접기를 하며 위탁 가정을 전전하던 시절, 놀림을 받아도 말로만 시끄러웠지 제대로 반격조차 못 하는 버기에게 대여섯 살 많은 누군가 해주었던 말이었다. 순순히 응할 줄 알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눈에 든 표정이 가관이었다. 망언이라도 들은 마냥, 샹크스는 연신 피식거리다 조용히 웃었다. 

“네가 아니고, 내가? 버기, 말 잘못한 거 아니지?”

빨간 머리 소년이 놀려댔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망상 주의자의 농담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예리함이 배어 있었다. 더 이상 버기가 말하지 않자, 샹크스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웃어서 미안. 근데 솔직히 말해서 감동했어. 네가 날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 너무 좋다.”

“미친놈, 착각하지 마! 누가 누굴 생각해 준대?”

버기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멋대로 남의 손 잡지 마!”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는 재빨리 샹크스 이마에 정면으로 딱밤을 먹였다. 제 기분을 상하게 한 대가라며, 버기는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반면 무방비하게 누워있던 샹크스는 짧게 신음을 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워, 환자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다 그만, 후드 앞주머니에 욱여넣은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꼴 좋다, 새끼야. 네가 이래서 물러 터졌다는 거야.”

샹크스는 부어오른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뭐, 네 말이 맞는 것도 같아. 항상은 아니지만.”

바닥에는 초콜릿이 산산조각이 나 널브러져 있었다. 로저가 해외 학회에 갔을 때 사다 준 것으로, 조금씩 아껴 먹느라 다 먹지도 못했다며 그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며칠 후, 샹크스의 얼굴에 검붉은 피딱지가 눌러앉았다. 나중에는 표도 나지 않을 상처가 난다고 해서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은 버기를 제외하곤 없었다. 조각난 초콜릿 같은 딱지를 볼 때마다 버기는 용돈을 털어 초콜릿을 하나 사다 샹크스의 가방에 넣어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실제로도 그는 가게 앞을 가끔 서성였지만, 불면증이 일상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는 아니라며 끝내 상상으로 내버려두었다.

 

 

7

 

지하 보존서고에 잠든 책의 양장을 벗겨 종이를 나란히 펼쳐놓으면 대륙 서쪽의 섬을 덮을 수 있다는 일화는, 일곱 살 버기에게 공간에 대한 최초의 개념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흡사 안쪽에 머물던 새 한 마리가 알을 뒤엎는 과정과 유사했고, 저 드넓은 바다조차 한 권의 책으로 접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러주었다. 물론, 마흔두 번 접은 종이다리로 달에 도달하고 거기에 아홉 번을 더해 태양에 도착하기 위해선 지구를 덮고도 남을 만한 아주 얇은 종이가 필요했으나, 정작 필요조건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버기는 무언가를 펼치는 행위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모으고, 접고, 포개고, 부풀리는 방법에만 흥미를 보였다. 한 번의 접기만으로도 위와 아래가 생기고 앞면과 뒷면이 생겼으며 안과 밖이 구분되어 거리가 생겼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손으로 다독이듯, 부드럽게 눌러주면 되었다. 그러면 가장 각진 공간에서도 몸을 접어 뉜 고양이처럼 어느 한 단면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드러난 단면은 세상 무엇보다도 반짝이고 아름다워야 했다. 깊이는 다음 문제였다. 따라서 그는 종종 자신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면적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곤 했다.

첫 종이접기는 버려진 껌종이에서 시작했다.

제 성에 못 이겨 종이를 구겨본 적은 있어도 경계선에 맞추어 반듯하게 접어보는 경험은 매우 생경했다. 여러 차례 접기를 반복하던 끝에 장력을 견디지 못한 껌종이는 찢어지고야 말았지만, 버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종이는 길 위에서, 안쪽이 뒤죽박죽인 책가방에서, 어디에서나 구하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 그러니까 평면이 그보다 더 작은 입체적 공간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백악기를 지배했던 공룡이든 심해를 떠도는 물고기이든 시작점은 늘 같았다.

목이 길고 꼬리가 뾰족했으며 구부정한 날개를 가진 새를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은박의 껌종이새가 맘에 든 버기는 항상 그것을 지니고 싶어 했다. 잠들기 전 그는 머리맡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계속 쥐고 있기엔 손은 믿을 것이 못 되어 베갯머리에 올려두기를 안전한 선택으로 여겼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이튿날, 새는 사라졌고 별처럼 흩뿌려진 가루만이 남았다. 되살리기엔 종이는 너덜거렸고 심지어 은색으로 빛나지도 않았다. 버기는 속이 상해 울었다. 껌종이새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의 일부였고, 언젠가 그만의 방이 생긴다면 침대 밑에 숨겨둘 계획이었다.

계획은 레일리에게 정식 입양이 되었을 때도 유효했다. 마지막 위탁 가정을 떠나며 그는 여분의 옷과 책 외에 상자 하나만 가지고 갔다. 종이로 만든 새, 물고기와 사자가 들어있는 파란색 상자는 버기만의 작은 섬이었다.

그토록 비밀스러운 그만의 세계에 양팔을 둘러 가슴 속에 소중히 품고 왔건만, 생각지도 못한 또래의 호기심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자리를 비운 새, 상자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주먹다짐을 했고, 결국 각자의 방에 갇혀 반성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샹크스는 결백을 주장했다. 허락 없이 상자를 만진 것은 잘못이지만 절대 열어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버기는 즉시 반문했다. 그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했다. 이에 샹크스가 입을 다물자 버기는 그럴 줄 알았다며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쳐들고는 내내 빈정댔다. 설사 샹크스가 옳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버기는 그에게 사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쩐 일인지, 그럴수록 그는 빨간 머리의 말을 더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방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버기는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샹크스 때문이었다. 그는 제 방을 드나들듯 문턱을 넘어서곤 했다. “버기, 들어가도 돼?” 허락을 구하는 다정한 말투는 묘하게 고집스러웠고 버기는 늘 그랬듯이, 굴복하고 말았다. 문을 넘어온 이상, 빨간 머리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이란 없었다. 버기의 이불 텐트도 마찬가지였다. 레일리의 서재에서 꺼내온 책으로 성벽을 쌓은 다음, 이불을 늘어뜨리면 어느샌가 틈을 비집고 다가와 배를 깔고 엎드렸다. 침대는 잠드는 공간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그곳은 세상과 단절된 오두막이 되었다. 때론 바다 위를 떠도는 해적선이 되고 왕국에 저항하는 혁명군의 요새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저마다의 투명한 경계선을 긋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 제풀에 지쳐 잠들기도 했다.

아주 점진적으로, 각자의 집에 있는 그들의 방은 자신만의 것이 아닌 물건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외투, 셔츠, 바지, 양말, 모자, 가방, 책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사적이어야 할 물건은 형태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짝을 잃은 신발처럼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곤 했다.

버기는 이러한 현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다 못해 로저에게 빨간 머리의 만행을 고발하며 하소연을 해본들 돌아온 건 호탕한 웃음이었다. 아끼느라 몇 번 입지도 못한 외투를 빌려주었다 잃어버린 날, 복수 삼아 샹크스의 겉옷을 세 벌 더 훔쳐보아도 타격도 없을뿐더러, 반성도 그때뿐이었다. 당장 필요하다면 누가 어떻게 쓰든 그만이라는 샹크스와 달리, 버기에겐 함께 나누어도 되는 것이 있는 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이 엄연히 존재했다. 버기는 그만의 꼼꼼한 기준을 적용하여 그의 것과 아닌 것을 나누고 물건을 제자리에 가져다 보았다. 하지만 경계선이 흐트러지는 속도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했고 그 역시 정리정돈을 그만두었다. 대신 절대 내어주지 않을 것을 지키는 데 집중하기로 스스로와 타협했다.

그래도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빨간 머리의 만행은 차츰 줄어들었다. 어느 순간 샹크스는 버기의 옷을 빌려 입길 그만두었다. 

이에 버기는 몹시 기뻐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비로소 그가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키를 비롯하여 빨간 머리의 거의 모든 것이 파란 머리를 앞서 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돌이켜보면 변한 것은 없었다. 샹크스는 여전히 소유에 대한 그만의 확고한 정의를 따르고 있었다. 툭하면 비니를 가져갔다 돌려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간 숱하게 겪어왔는데도 매번 결말의 형태는 같았다. 그랬기에 놀이동산으로 체험학습을 떠난 어느 오후에도 버기는 벤치에 앉아 비니를 수시로 고쳐 쓰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샹크스가 자신을 찾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혼자서 뭔 생각하냐?”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버기는 소스라쳐 놀랐다. 하마터면 음료수를 엎을 뻔했다며 역정을 냈지만, 샹크스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아이구, 미안해라.”

진심인지 되물을 새도 없이, 샹크스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화장실 다녀온다고 하고선 안 와서 다들 얼마나 찾은 줄 알아? 빨리 가자. 곧 우리 차례야.”

“우리 차례라니?”

“우리가 탈 차례라고. 그럼 놀이동산에 놀이기구 타러 왔지, 여기 앉아만 있을 거야? 엄청 지루할 텐데.”

버기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샹크스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버기. 혹시 고소공포증 있어서 못 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러고는 귀에 대고 말했다. 

“정 무서우면야 내 손 잡으면 돼. 그럼 하나도 안 무서울걸?”

“내가 애냐!”

버기가 핏대를 올렸다. 샹크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직접 대화를 끝맺었다.

“까짓것, 타! 화끈하게 맨 앞에 타자고! 그래서 어디라고?”

그날, 오기가 생긴 나머지 다짜고짜 큰소리부터 쳤던 일을 버기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자존심을 굽히지 못한 탓에 약 이분간 수직낙하의 공포에 떨어야 했고, 급기야 모자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추락할 것 같은 두려움을 극복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자신감에 한껏 벅차 있었다. 그러나 대기 줄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까이에서 본 롤러코스터 트랙은 아주 거대했고 그 아찔한 높이를 제하더라도 연이은 비명에 심장이 떨어질 듯했다. 탑승 직전까지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버기. 정말 탈 수 있겠어?”

무리하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버기는 완강했다. 그는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고 샹크스는 더 매달리지 않았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지.”

착석을 마지자 안전대를 꽉 잡으라는 안내가 떨어졌다. 지시대로 안전대에 양손을 올린 버기는 눈을 꼭 감았다.

한번 탑승한 이상 중간에 내리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버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렇듯 예견된 미래에 모든 사고가 정지될 것만 같던 순간, 차가워진 손 위로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자 동시에 열차가 움직였다.

 

 

8

 

다행히도, 내리자마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토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버기의 반응은 격했다. 그는 샹크스의 멱살을 잡지 않을 수 없었고, 아이들은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야! 내 모자 어떡할 거야!”

대기 표지판에서 소지품 분실을 주의하라는 문구를 보고 난 버기는 고민에 빠졌다. 큰맘 먹고 산 한정 수량의 비니였던만큼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체험학습만 손꼽아 기다렸던 그였다. 가방에 넣어두자니 좀도둑이 염려되었고 안전요원은 앵무새처럼 개인 물품을 보관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퍼가 달린 겉옷을 걸쳐야 했다며 주의를 한번 둘러보던 차, 샹크스의 차림새가 눈에 들었다. 

칠부바지에 샌들, 소매가 긴 후드 점퍼의 조합은 계절을 가늠하기 어려웠고, 묘하게 촌스럽기까지 했다. 분명한 것은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버기는 샹크스에게 비니를 맡아줄 수 있냐며, 기왕이면 후드 점퍼의 안쪽 주머니에 넣어주었으면 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전에 빌려주었던 외투의 운명을 떠올렸더라면 기어코 하지 않았을 행동도, 습관 같은 망각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 무력함에 어찌나 흥분했는지 버기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도 같이 흔들렸다.

“분명히 잘 넣어두었는데···. 이상하다.”

“잘 넣어두긴! 또 바보같이 대충 쑤셔넣었겠지!”

“모자 필요하면 내 꺼라도 쓸래? 가방에 있긴 한데.”

“됐어! 그딴 건 줘도 안 가져!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앞으로 너한테 뭘 맡기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길길이 날뛰어도 샹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파란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자 버기가 사납게 째려보았다. 샹크스는 그 시선에 멈칫하더니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다시 한번 찾아보자. 그리고 이번 주말에 핫도그 사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 먹어도 돼.”

“됐거든?”

버기는 진이 다 빠져있었다. 실속 없는 화풀이에 힘을 쏟은 탓이었다. 그는 속이 울렁인다며 교사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현장학습은 한 시간 뒤에 정리될 터였다. 옆자리에 가방을 올리고선 버기는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고작 핫도그 따위로 타협하려 들었고, 레일리도 안 쓸 것 같은 모자를 권해주던 빨간 머리의 용기는 가상하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더 우스워 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말에 수긍하고만 자기 자신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두 번 다시 속지 않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잊혀졌고 외투 사건을 포함하여 딱히 해결된 것도, 고쳐지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샹크스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사람이 비단 그만이 아니라는 점, 그것이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도 명백한 결점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예술에 대해선 샹크스는 지독할 정도로 재능이 없었다. 그림도 못 그리고 노래는 더욱 못 불렀다. 우연하게도 심각한 음치라는 것이 알려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오히려 그런 부족한 면으로 인해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가 샹크스를 보석으로 비유해 보라면 그는 틀림없이 루비일 거라고, 버기는 대답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의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에 빗대어서가 아니었다. 새파랗게 젊고, 활동적이며, 모든 것의 가능성을 지닌 그야말로 강렬하면서도 찬란한 보석의 왕에 걸맞다고 믿었고, 실로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황색 다이아몬드와 초록빛 사파이어는 존재하지만, 샛노란 루비와 보라색 루비는 없듯, 오직 피처럼 붉은 것만을 루비라 명명하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루비가 되지 못한 그 밖의 것은 죄다 푸른 보석의 대명사로 불렸다.

진가를 알아보고 탐내는 사람은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도 샹크스는 집을 떠나기 싫어 결국 사립 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의 말인즉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벌어질 일을 일찍이 겪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시절 버기는 샹크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 이유에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또래들과 한창 어울리다가도 문득 눈으로 저 자신을 쫓을 때마다 버기는 마음을 졸이곤 했다. 

사실 지금도 그러했다. 버기는 소란스러워진 버스 내에서 그를 보았다. 자리를 맡아놨다는 친구들의 말에도 샹크스는 웃으며, 몇 가지 말 - 아니, 미안, 오늘은 안돼, 다음에 기회가 되면 - 만을 반복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 자세를 낮춘 버기와 눈이 마주쳐 걸어왔다. 그러고는 버기가 일부러 옆자리에 올려둔 가방을 안더니만 제 궁둥이부터 붙였다.

“누가 너 여기 앉으래? 저 뒤에 자리 많잖아.”

갈 때만큼은 편하게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샹크스는 돌아보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나 아직 약속 안 지켰는데.”

“하! 너 지금 핫도그로 나 협박하는 거야? 그건 네가 잘못한 거니까 당연히 사줘야 하는 거고, 이거랑 상관없잖아! 당장 꺼져.”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진짜로?” 

예상과는 달리 샹크스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채비했다. “나 정말 뒤로 가?”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버기는 진짜 그러지는 못했다. 그저 한숨을 내리 쉬더니 이어폰을 끼고선 창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게 다였다. 재미있었다며, 끝까지 같이 했으면 좋았겠다는 샹크스의 푸념도 등 너머로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넌 다 써서 냈어?”

버기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부모 상담을 마치고 온 레일리에게 거하게 잔소리를 들은 이후, 성적은 둘째치고 과제만은 제때 제출하곤 했다. 계속되는 당혹스러운 표정에 샹크스는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렇게 놀래. 진로 상담 제출하는 거 내일까지잖아.”

“···하, 넌 뭐라고 썼는데?”

“나? 일단 해양생물학자로 쓰긴 했는데, 모르겠어. 상담 선생님은 의사도 잘 맞을 거 같다며 고민해 보라는데, 글쎄. 버기, 너는?”

“아직.”

“그럼 나랑 같은 거 써.”

“제정신이냐? 내가 왜? 죽어도 너랑 같은 데 안 갈 거야.”

버기는 눈을 감은 채 그 말을 하더니 자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샹크스는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옆자리의 친구를 깨우지는 않았다. 헤드폰을 끼고 책을 읽는 그를 흘겨보며 버기는 생각했다. 조금 전 내뱉은 말은 잘못되었고, 이렇게 정정되어야 했다. 죽었다 깨어난들 버기가 그와 같은 곳에 가기란 불가능했다. 간절히 원한 적도 없었지만, 의사니 학자니, 전부 다 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였다. 생물학과는커녕, 낮은 성적을 토대로 그를 받아줄 곳이 있을지 모르겠는 판국에, 짐짓 상대를 무시하는 듯 얼렁뚱땅 헛소리만 늘어놓는 샹크스가 얄밉다 못해 이젠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 또한 버기인지라 피차일반으로 느껴지는 동안, 샹크스는 저 때문에 버기가 지나친 긍정주의자를 경계하게 된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느 팔월의 밤 버기를 불쑥 찾아갔다. 이전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로 족히 이십 분이 걸리던 거리가 레일리의 이사로 도보 삼 분으로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더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

버기에게는 최악의 수였다. 한밤중에 돌멩이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신경질을 냈다. “미리 축하해 주는 건 고마운데 굳이 이 시간에? 그리고 너 창이라도 깨면 어쩔 뻔했어!” 온종일 짐을 정리해도 여태 반의반도 끝내지 못해 녹초가 된 버기가 샹크스에게 말했다. 짧은 사과로 시작된 변명은, 그렇지만 너도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거라는 말로 맺어졌다.

“내일 보면 안 되는 거야?”

샹크스는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확신에 넘쳐 말했다.

“그렇지만 생일은 자정부터 시작인걸.”

버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별거 아니기만 해봐. 가만 안 둬.”

그들은 샹크스네 뒷마당으로 이어진 문을 통해 뜰 안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잔디밭을 가로질러 제멋대로 자라난 수풀 사이로 난 돌길을 거쳐 다다른 곳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이 거대한 나무 밑에는 덩굴로 뒤덮인 작은 요트식 오두막이 비스듬하게 정박해 있었다. 원래 창고로 사용하던 곳인데 별채로 써도 좋다는 로저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 빨간 머리의 설명이었다. 단열재를 알아보고 무쇠 난로를 구하느라 지난 몇 주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고 샹크스는 덧붙였다.

“뭐 해. 들어오지 않고.”

집 안은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기괴한 물고기 도감, 천체 망원경, 휴대용 플라네타리움, 고장 난 나침반, 얼룩진 구리 주전자, 액자에 끼운 윌리엄 터너의 복제화, 핼러윈 파티용 해적 모자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낡은 요트 운전대에 이르기까지, 다섯 평의 공간은 그만의 세계로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무엇보다 버기의 눈을 사로잡은 건 커다란 창문이었다. 커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종이로 만든 파란 물고기와 빨간 오징어, 그리고 그 밖의 바다 생물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었다. 

전부 버기가 실패작이자 쓰레기라고 치부했던 것들이었다. 

잠시 후, 샹크스가 창문을 열었다.

그는 버기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었다. 상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빨간 머리 소년이 선수를 쳤다. “선물이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그에 따르면 이곳으로 연결되는 열쇠는 단 두 개뿐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때마다 창가를 수놓은 종이 생물들은 흐름에 맞추어 유려하게 몸을 움직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야경은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의 밤바다와 같았고, 그보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도 동시에 닿는 빛이라곤 달빛이 유일했다. 그 흐릿한 빛을 등대 삼아, 종이로 만든 바다 생물들이 밤새 하늘을 헤엄쳤다. 이제 막 열 네살된 버기의 첫 번째 기억이었다.

 

 

9

 

눈을 뜨자 온통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에 이어 방 안의 불이 환하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무어라 반박할 새도 없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기껏 침대가 필요하대서 사줬더니만, 바닥에서 처자고 있었나.”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정중했는데, 언뜻 듣기에도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순간 버기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긴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사과부터 해야 했다. 

“미, 미안해. 그나저나 어, 언제 온 거야?”

“네 놈이 하도 연락이 안 되길래 직접 왔다. 이번엔 어디로 튀었나 했더니만, 애들이나 할 법한 이불 텐트나 치고 꿈나라행이라니, 구질구질하게 팔자도 좋군.”

남자는 버기가 몸을 뉘었던 이불 텐트를 발로 걷어찼다. 행여 머리를 때리지나 않을까, 버기는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싸고는 갓 태어난 벌레처럼 웅크렸다. 크로커다일이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버기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앞에서 몸이 마비된 듯 행동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깔끔한 옷맵시를 자랑하는 그가 역설적으로 풍기는 시가 냄새만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하겐, 종이에 냄새가 배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겨우 용기를 낸 버기가 목소리를 짜내었다. “작품에 냄새가 배면 곤란해.”

그 말에 크로커다일은 폭소를 터트렸다. 

“광대 주제에 까다롭긴.” 그는 다 피운 시가를 탁자 위 재떨이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만기일은 아직이잖아. 돈···. 내라고 해서 잘 냈는데, 왜지.”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자는 제때 지급했으며, 작품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오늘 새벽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제하면 근래 트집 잡힐 일이라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버기가 난처해하는 것을 은밀하게 즐긴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즈음에야, 크로커다일은 자기가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버기 앞으로 초대장 하나가 날아왔다는 것이었다. 종이접기 영상으로 시작하여, 끊이지 않는 입소문을 계기로 순식간에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떠오른 버기에게 새로 부임하는 관장이 취임식을 앞두고 부탁이 있다는 얘기였다. 부탁은 사적이기보다 공적일 확률이 높았고 일만 잘 풀린다면 이후는 보장받을 수 있으므로, 사업가라면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발치에는 빨간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애초부터 거부할 권리란 없었다. 그렇지만 일정에 대해 한번은 이야기해 볼법 했고, 일정 상 의뢰를 받을 수 있겠냐며 버기가 반론을 펼치기도 전에 크로커다일이 말했다.

“네 녀석 카드값을 내느라고 등골이 휠 거 같다. 작작 좀 써라.” 

버기는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미, 미안. 이달은 아껴 쓸게. 진짜로.”

마주 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전히 기분 탓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버기가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더욱 침묵을 지키곤 했다.

“그러면 나 혼자 가는 건가?”

“누가 널 혼자 보낸다고 했나?”

뒤이은 잔소리에 버기는 귀를 막고 싶어졌다. 네 놈이 허풍을 떠는 탓에 뒤치다꺼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느냐며, 그는 거듭 강조했다. 이러나저러나 귀찮은 일투성이라며 으름장을 놓더니만, 날짜는 일러주고는 아침에 M이 그를 데리러 올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매듭지었다.

그가 떠나고 빈방이 되어 혼자 남겨진 버기는 초대장을 주웠다.

어른이 된 이후, 버기가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점이 있다면, 그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충동을 연료 삼아 정신없이 흘러가는 삶에 좌지우지되고 있고 그것을 꽤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연스레 흥을 돋울 줄 알았으며, 화려한 것에 이끌리는 성향으로 보아, 순간적인 쾌락에 약하다는 건, 필시 로저와 레일리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의 하루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그 안에 타인이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평생을 가더라도 그들은 가늠하지 못할 거였다.

빨간 봉투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버기는 무엇을 입을지 궁리했다. 조용한 옷차림은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반 푼어치 예술가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기행을 용서해 주는 문화에 익숙했고, 따라서 그에게 경악할지언정 여느 때 저지른 실수처럼 곧 잊힐 거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타인의 감정을 호기롭게 들썩여 주면 그만이었다. 한 가지 덧붙여 본다면, 버기는 칠흑처럼 캄캄한 클럽에서 여는 파티를 가장 좋아했다. 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가로막힌 시야도, 고막이 터질 듯 시끄러운 소리도 이튿날 기억에서 새하얗게 잊히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는 이번 파티의 장소가 클럽이 아닌 점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말아 올려 집게핀으로 고정했다. 여전히 작업실에서는 시가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조금 춥더라도 창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러자 열어둔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창틀에 매달아 둔 종이 해파리 한 마리가 헤엄치기 시작했다.

 

 

10

 

샹크스와 이웃이 된 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고, 절반의 호감과 나머지 반감을 순종적으로 쫓던 나날이 이제는 평범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다름 가운데서도 어쨌든 버기는 샹크스와의 공통 분모를 찾아낼 수 있었고, 적인지 친구인지 모를 기묘한 우정은 지속되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만큼이나 동일한 관심사를 대하는 태도는 설득할 수도, 함부로 좁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를테면 졸업 전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아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샹크스는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해양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버기는 집 근처 수족관에서 시간제로 일하길 택했다. 해수 알레르기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일부였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출근 전날에야 그는 레일리에게 면접에 합격했다고 알렸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도 두 달 후면 열일곱이에요.” 아주 태연한 척하며 이야기했지만, 속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통보에 앞서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레일리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는 정말로 그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버기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샹크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외지에 있던 터라 가장 늦게 소식을 접하게 된 그는 통화 내내 툴툴거렸다. 

“지원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버기는 거짓말을 했다. 

“8주간 강제 합숙한다며. 미쳤냐? 그런 감옥은 돈 줘도 안 가.”

대걸레질을 하던 버기는 수족관 유리창을 통해 짙푸른 어둠 속 적적해진 바다를 응시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그를 둘러싼 이 상황이 마냥 답답했다. 샹크스가 이름을 올린 프로그램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선별된 팔십여 명의 학생만이 현직 연구원과 함께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한편, 그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이 매우 치열할 터였다. 흡사 별들의 전쟁에 속한 제 모습을 떠올려 보아도, 버기의 상상은 매번 그즈음에서 끝나곤 했다. 그가 가진 지식이 한계에 부딪힌 셈이다. 그러니까, 누구와 만나 어떤 명석한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그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세계의 언어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버기는 상상하길 멈추지 않았다. 

상상력은 미지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교차점에 만약이라는 조건을 붙여보았고, 애초에 벌어질 수 없는 일을 생생하게 그려보기도 했다.

빨갛고 둥근 코가 돋보이는 얼굴도 그 대상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똑같이 독특한 외양과 색을 지닌 흡혈오징어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모자라 줄을 서야 겨우 볼 수 있는 데다, 경탄과 찬사는 덤이었다. 어떤 면에선 인간도 비슷했다. 다만 그 모습 그대로는 안 되었다. 인간의 외형도 입맛대로 고칠 수 있다는 개념을 깨달았을 무렵, 버기는 당장 내일이라도 진료대에 올라가는 사람처럼 온종일 관련 정보를 검색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 또한 현실에 근거하여 접어둔 무수한 꿈의 일부가 되었지만, 홀로 상상해 보는 달콤함을 포기하기엔 일렀다. 예컨대, 신데렐라가 반나절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타인의 행세를 하듯, 은연중에 그도 그럴 수 있길 바랐고, 갈망은 잊을만하면 되살아났다.

샹크스는 정반대였다. 그는 그런 바람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듯했다. 비록 입학 때마다 코피를 흘리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피딱지가 져 잘생긴 면상이 엉망이 되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뒤뜰 오두막으로 버기를 끌어들이고선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유는 불 보듯 뻔했기에 버기는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샹크스와의 말다툼에서 남는 것이라곤 이해받길 기대한 마음이 상하는 것뿐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샹크스에게 말했다. 

“네가 이러면 나만 곤란해져. 놀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누구랑 친구 하라고. 네가 무서워서 다가오겠어?”

버기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자 애썼다.

“뭐, 네가 정의의 사도라도 돼? 왜 자꾸 오지랖이야? 누가 날 대변 해달래? 해달랬냐고, 이 바보야.”

“···버기.”

“차라리 너랑 형제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더 나았어.”

할 말을 마친 버기는 샹크스가 곧장 쏘아 붙여주길 바랐지만, 단 한마디의 대답밖에 듣지 못했다. 오래전 흥분이 가라앉았는데도, 등 너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낯설었다. 그는 “헛소릴 지껄이는 새낀 맞아도 싸.”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날따라 빨간 뒤통수가 그리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화풀이 대상이 절실했던 버기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확실히 느꼈지만, 그대로 두었다. 그는 알코올에 적신 솜을 상처에 짓이겼고, 통증을 호소하는 연이은 신음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참다못해 샹크스의 얼굴을 향해 솜덩이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럼 네가 하던가! 엄살 부리지 마!” 그러자 이왕 시작한 사람이 끝내야 하는 것이 도리라며, 샹크스는 일어서려는 버기의 허리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나서야 버기는 샹크스에게 제대로 된 분풀이를 할 명분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까스로 소란이 잦아들 무렵, 창 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려고?”

“응.”

“우산 있어?”

“대충 옷으로 걸치려고. 어차피 이 앞이잖아. 뛰어가면 돼.”

“금방 그칠 거 같은데, 그치면 가지 그래.”

버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 끈을 고쳐 묶을 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입술을 말며 머뭇거리던 샹크스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올해 생일 때 받았던 게임기들, 그거 다 너 줄게.”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갖고 싶어 했잖아.”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샹크스가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버기는 꿍꿍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퍼뜩 떠오르던 의심을 잠재웠다. 어김없이, 그런 시시한 수작에 넘어갈 거 같냐며 반박할 기회를 잃었지만,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도, 손해 볼 일도 없었다. 학업 부진을 이유로 게임기를 들이길 반대한 레일리에게는 샹크스의 선물이라고 둘러대면 될 터였다. 어찌 되었든 호시탐탐 노리던 것을 거저 준다는 말에 버기는 몹시 기뻐했다. 원한다면, 밤새도록 머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동시에 명석한 그가 이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한 계기가 궁금해졌다. 

이는 또한 버기를 시험에 들게 했는데, 그의 제안을 듣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샹크스가 즉시 알아채서는 안 되었다. 그는 최대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조금 이따 갈게. 정확히 한 시간 뒤에 갈 거야.”

약속한 시각이 지나도 비는 멎지 않았다. 되레 거세졌다.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에 챙겨온 짐도 없었지만, 버기는 걱정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이 다섯 평 남짓한 오두막에서 사나흘도 머물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오두막에는 과자를 포함한 간단한 먹을거리와 물, 이불을 비롯하여 편히 걸칠 여분의 옷도 있다는 소리였다. 자신만의 것에 대한 경계선을 지키느라 급급했던, 막 입양되었을 적 버기를 떠올려 본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 밤이기까지 했다. 더 늦어지기 전, 그는 레일리에게 샹크스네에서 자고 간다고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저녁은 먹다 남은 피자였다. 식어서 퍽퍽해진 조각을 씹으며 버기는 투덜거리며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입맛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매콤한 소스가 흥건히 묻어 있던 피자는 전적으로 샹크스의 취향이었다. 다음에는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시키자고 결심하려던 차, 샹크스가 말문을 열었다.

“수족관 일은 어땠어?”

“이미 말했잖아. 나쁘지 않았어.”

“그게 다야?” 샹크스가 말했다.

“난 가서 있던 일 다 얘기해줬는데.”

정 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된다며 응수했지만, 흘러가는 말투에서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버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수질 관리나 어류 사육은 전문가의 영역이었고, 시간제 근무와 해수 알레르기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본적 경험과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여름 내내 유리창과 바닥 닦기만 했다. 연구원과 함께 뜨거운 바다를 누볐던 너와는 다르다고 해야 할지, 그럼에도 너조차 내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는 것 같다고 대꾸하려다 버기는 포기했다. 그는 점점 넓어져 가는 샹크스의 세계가 알고 싶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알고 싶지 않은 척, 모르는 척하는 횟수도 나이만큼 늘어만 갔다.

그러니까, 궁금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절박함이 부족할 뿐이다.

저번 학기의 마지막 학부모 참관 행사가 열렸을 때였다. 졸업반 과정을 앞둔 학생들은 행사 날, 진로 상담이 필수였기에 적성과 꿈과 미래의 직업을 구체화하는 고루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버기는 쩔쩔맸고, 막막했다. 눈앞의 백지가 그의 현재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꿈이 없다면야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듣던 대로 지구 표면의 7할이 바다라면, 그만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기회도 많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선 거쳐야 할 과정이 왜 이리 복잡한 것인지, 버기에게는 수학 공식처럼 멀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해수 알레르기도 장벽이었다. 그 때문에 좋아했던 바다 수영도 그만둬야 했다. 바닷물에 닿지도 못하면서 바닷속을 탐구한다는 말처럼 모순적인 것이 존재할까? 샹크스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버기는 그와 달랐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한다면 강렬한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했고, 근간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때로는 우스꽝스럽더라도 내면의 우주를 뒤흔들 만한 간절함도, 애초부터 닿고자 하는 대상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거였다. 축축한 밑바닥에서 허둥대는 야생 하루살이의 날개 한 쌍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버기는 샹크스를 부러워했다. 동시에 그를 질투했다.

고군분투할 뿐, 바깥의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기에 찾아오는 고독한 괴리감을 열등감이라 명명한다면, 십 대의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내내 괴로워했다. 버기는 친구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늘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척 연기하는 사이에도,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부러움과 질투심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인 채 이 모든 것의 근원인 샹크스의 존재를 접어도 보고 다시금 세워보기도 했다. 

종이를 접듯 그의 존재를 무수히 접고 펼치는 사이, 문득 버기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다. 바로 제 옆의 빨간 머리의 꿈을 보조하는 일이었다. 버기의 도움을 받아,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내는 장면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마치 스스로 이뤄낼 수 없다면 타인이라도 해내길 바라며 염원을 투영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으로 느껴졌고, 실현 가능성도 제법 있어 보였다. 종종 샹크스더러 로저를 따라 의사가 되길 권유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지만, 버기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얀 가운을 걸친 채 소독약 냄새가 나는 그를 상상하기보다 하얗게 빛나는 태양 아래 바닷내음을 풍기는 모습이 훨씬 더 그럴싸했다. 그러한 상상에 어찌나 심히 매료되었는지,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못난 자신을 지우고 새로운 모습으로 대면하고 싶은 욕망조차 약해질 정도였다. 어깨를 나란히 견주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안목을 가진 선구자이자 보조자 역할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한층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는 종이접기 이외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어릴 적부터 그려왔던 삶이 반사된 수면의 그림자처럼 일렁이곤 했지만, 지금의 버기에게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바다에 대한 모호한 열망만은 그대로인지라, 그는 이를 파란 상자 안에 차곡차곡 모아두기로 했다. 

가족의 일원이 될 때 가지고 왔던 파란 상자는 어느덧 종이로 만든 바다 생물로 넘쳐났다.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가 되자 그는 더 큰 상자로 바꿔야만 했다. 유리로 둘러싸인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이왕이면 더 많이 가둬놓고 싶은 까닭이었다. 해수 알레르기로 인해 영원히 만져볼 수 없다면, 그만의 상자 안에 두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상자는 바다가 될 거였다.

한번은 누군가 수족관에 시간제로 근무했던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용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물고기가 보고 싶어서냐고 물었다. 버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11

 

휴대용 플라네타리움을 키자, 오두막 천장에 북극성이 떴다.

정중앙 새하얗게 빛나는 형상을 올려다보던 버기는 불현듯 북극에서 보이는 별의 색이 궁금해졌다. 얼핏 듣기론, 별의 온도가 낮을수록 붉은빛을 띠고, 활활 타오를수록 오히려 푸르게 빛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반짝임은 어떠한 온도를 띠고 있을까. 극지방에서라면 이런 인위적인 색이 아닌 본래의 빛깔을 확인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하나둘 떠오를 즈음, 샹크스가 버기를 불렀다.

“그거 알아, 버기? 북극성은 그 자리에 영원히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렇지 않대.”

그는 속도 조절 버튼을 누른 참이었고, 오두막의 밤하늘이 느릿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일강 동쪽에 신전을 건축할 때도, 신항로 개척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도, 다들 북극성이라 불렀지만, 정작 별은 계속 바뀌어 왔어. 사람들은 각기 다른 별을 보아오면서 같은 별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만 이천 년 전에는 베가, 삼천 년 전에는 투반, 오백 년 전에는 코카브, 지금은 폴라리스인데 시간이 흐르면 알라이, 데네브가 북극성으로 불리다가, 만 사천 년이 더 지나면 다시 베가로 돌아올 거래.”

두 번 더 버튼을 누르자, 이번에는 별들의 일주가 멈추었다.

“세차운동 때문에 그렇다지만, 신기하지 않아? 비록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국 그 자리로 돌아올 거라는 게.”

“그걸 용케도 다 기억하네.”

“그야, 언젠가는 직접 보러 갈 거니까?”

돌아보며 눈을 맞추자, 샹크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순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 것만 같아 버기는 재빨리 머리를 저었다.

“난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는데.”

버기는 정확히 이유를 지칭하지 않았다. 내가 알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살려면 그래야 한다고, 차마 샹크스 면전에 대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요령 있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건성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샹크스가 교묘하게 질문을 바꾸었다. 그는 그 돈으로 무얼 하고 싶냐며 보다 명확한 대답을 유도했고, 버기는 그제야 적당히 둘러댈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보냐? 그야 풍족하게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그렇지만 꼭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어야만 하는 거야?”

버기의 안색이 변했다.

“너 자식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될지 말지를 떠나서 기회를 살 수 있는 거잖아! 조건을 살 수 있는 거라고!”

너 같은 사람은 평생 모르겠지만, 이라고 버기는 속으로 덧붙였다. 열변을 토한 그는 샹크스를 쳐다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샹크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언가 보장하진 않아도, 조건은 살 수 있다, 라. 뭐, 그 말도 일리는 있네.”

인공의 별이 쏟아지는 가짜 밤하늘을 띄워놓은 채 그들은 이불 텐트를 쳤다. 다섯 평의 공간이 열일곱 살의 소년들에게 넉넉하다고 볼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그보다 더 좁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몸을 접어 넣었다. 이전보다 몸집이 커져 있었고 팔다리도 길어진 터라 무릎 아래가 훤히 드러났는데도 그들은 계속 머물렀다. 벽에 걸어둔 백열등까지 키고 나니, 마치 사납게 출렁이는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촛불 하나에 의지하던 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샹크스는 책 한 권을 손에 쥐었다. 새까만 배경 속 푸른 등의 물고기가 인상적으로 그려진 책의 제목은 『빛이 닿는 거리』였다. 그는 읽던 책을 마저 끝내고자 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심해저대 부분까지 읽었던가?”

“그건 모르겠고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끊었잖아.”

“뭐야, 다 듣고 있었네?”

샹크스가 속삭였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버기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커다란 쿠션을 끌어안았고, 샹크스는 즉각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나지막하지만 다소 또렷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번 주부터 시작된 해저로의 여정은, 태양 빛이 닿는 중심해수층을 지나 독사물고기와 풍선뱀장어, 그리고 한때 세상에서 가장 못난 동물로 불렸던 블롭피쉬가 살고 있는 심해중층에 머물렀다. 샹크스는 이 생물에게 붙여진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외형이 주관적인 산물이라면, 이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환경이 급격히 바뀌니 몸이 손상되어서 그렇지, 원래 살던 곳에서는 멀쩡한 물고기일 뿐인걸.” 여정은 시력이 본격적으로 퇴화하는 심해저대로 이어졌다. 늑대덫 아귀를 포함하여 눈먼 생물들은 사체를 뜯어 그것을 양분 삼아 생을 이어갔다. 그래도 6,000미터 아래로 뻗어 내린 세계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 초심대해라고 불리는 하달존은 하데스의 구역이라는 유래만큼이나 죽음을 연상케 했다. 빛이 들지 않는 데다 몸이 동강 날 정도로 압력은 거대했고 온도는 얼어붙을 정도로 낮아 유속마저 느려진다고 했다. 이토록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고, 알려진 생명체만 육백 종이 넘는다고 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도 이름 모를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거였다.

“-그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십 년 전이었다, 그러나 해저의 화산이라고 불리는 열수구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바닷물과 극지방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바닷물의 만남을 발견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연, 납, 칼륨, 규소 등 내뿜는 물질에 따라 때로는 검은 연기를, 때로는 하얀 연기를 피우는 그곳은 태양을 벗어난 독립된 생태계이자 빅뱅 우주론의 축소판으로 하나의 작은 우주인 셈이다,”

이어서 그는 몸이 녹아내린 것처럼 수분을 가득 머금은, 하얀 천사 물고기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버기의 관심사는 온통 바닷속 작은 우주에 쏠려 있었다. 균형을 중시하는 우주는 군데군데 뜨겁고 차갑고 붉고 푸르기보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아도 정확히 같은 온도와 색감을 지니길 바랐다. 따라서 삶의 의지를 어떻게든 꺾어보려 한들 죽음에 반하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곤 했다. 무엇보다 맨몸으로 도달할 수 없는 구역인 이상, 누구라도 기계의 힘을 빌어야만 했고, 그 지점에서 버기는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어야 완성되는 공간이라면, 무덤을 파헤치듯 구태여 빛으로 들쑤셔야만 할까? 실재하지 않는 척하며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빛이 없다면 무엇 하나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방법조차 전무했다. 애석하게도 독극물을 풀고 나서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었다. 

버기는 이 이상 생각하길 멈추었다. 심해라는 공간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곳을 둘러싼 과학적 지식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샹크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도 한몫했다. 소리가 부드럽게 울릴 때마다 목젖이 움직였고 마침표를 찍을 때면 숨소리가 생생했다.

마음 같아서는 너한테 생물학 강의를 들으러 온 줄 아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친 기색에 아랑곳하지 않고 초롱초롱해진 눈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버기는 하품을 최대한 참고자 했다. 미신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생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빨간 머리는 틀림없이 방랑하는 모험가였을 거라 확신하던 중이었다. 샹크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버기, 너 지금 엄청 졸리지.”

“누, 누가 그래? 나 하나도 안 졸리거든?”

버기가 어정쩡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샹크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버기와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어느새 해구를 탐험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들의 용기가 얼마나 대범하고도 가상했는지, 버기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비가 그쳤다. 긴 낭독도 더불어 끝을 맺었다.

“아무튼 재밌을 거 같지 않아? 나중에 꼭 가보자.”

“네가 가자는데 다 가려면 평생 돌아다녀도 모자랄 거 같은데.”

그러고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근데 샹크스.”

“응.”

“2인이 가능하긴 해? 높이가 1미터짜리 구 형태여서 내내 앉아 있어야 하면, 한 명도 우겨넣기 어려운 거 아냐? 엄청 위험해 보이는데.”

“음, 이전 기록에 의하면 두 사람이 딱 한 번 다녀온 적은 있긴 해. 아니면 우리가 최초로 기록을 세워보는 거지!”

“탈출 못 하면 그 자리에서 흔적 없이 즉사하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화려하게 뒤질 거면 제발 혼자 뒤져.”

그 상태로 버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계에 다다른 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며 졸린다고 말했다. 샹크스도 기지개를 켜며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그러더니 작게 웃었다.

틀림없었다. 그는 분명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따라 하지 마!”

제아무리 눈을 치켜떠보아도 졸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머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에 누우려고 했는데 딱딱한 바닥이 아닌 어깨가 뒤통수에 닿았다. 어찌 되었든 기댈 것이 생긴 버기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주말을 맞아 실컷 늦잠을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착오였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들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어째서 이 시간에 가반이 찾아왔는지 묻기도 전에 그는 로저의 입원을 언급했고, 얼른 차에 탈 것을 종용했다. 그 길로 세 사람은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12

 

작업실 소파에 앉아 버기는 갤디노를 기다렸다. 그들은 남은 하반기 전시 계획을 점검하고 내년 상반기 일정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종일 커피만 들이켰기에 버기는 속쓰림과 더불어 심한 허기를 느꼈고, 책장에 쌓아둔 잡동사니를 정리하며 잠시 긴장을 풀고자 했다. 꼼꼼하게 정리하기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우선 가져갈 것과 버려둘 것을 나눌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대한 양에 압도된 그는 곧 싫증을 내고 말았다. 대신 오래된 스크랩 모음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지면에는 그의 첫 전시회에 관한 혹평 기사가 실려 있었다. 『소음밖에 없는 종이의 민낯』이라는 제목에 이어, 비평가는 다음 문장으로 조롱의 끝을 보았다. “한 마디로, 당신의 조카가 유치원에서 반짝이 풀을 사용하여 접어온 것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기사는 칠 년 전에 쓰인 것으로, 저급하고 품위가 없으며 껍질만이 번지르르한, 견디기 어려운 가벼움이란 수식어가 붙던 시절이었다. 그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시회는 세 번이 더 열렸고, 모두에게 호감을 얻지 못해도 그가 선보인 개성적인 표현에 열광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문득 그를 파티에 초대한 관장은 어느 작품의 어떤 면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인지, 직접 질문을 던져 얕은 속내를 가늠해 보고 싶어졌다. 

다음 장을 넘기던 그는 몹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보았다.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황량한 난민촌, 전염병에 속수무책인 사람들, 질식할 것 같은 소독약 냄새, 먼지를 날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들을 지켜주는 구호 단체의 일원들, 무리에 새로 합류한 서른 살의 감염내과 의사. 사진 속 빨간 머리 남자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버기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도 다트판으로 쓰겠다고 손수 잡지 기사를 잘랐을 터, 아무 데나 처박아 놓는 습관 덕분에 막상 필요할 때 자취를 감추더니만 별안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맹세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얼굴을 기준 삼아 반으로 찢어버릴 수도, 커터칼로 긁어내며 빈 얼굴을 만들어낼 수도, 내친김에 불투명하게 칠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버기는 그 어느 것도 행하지 않았다. 개수대로 향한 그는 사진에 갓 내린 뜨거운 커피를 부었다.

사진 속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래도 화상은 입지 않을 거였다.

불이 꺼져 헐벗은 백열등처럼 잔상이 아른거릴 뿐이다.

오후 두 시가 되도록 갤디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크로커다일과의 선약을 마치고 점심때까지 돌아오겠다며 호언장담했지만, 버기는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경매 회사 홍보팀 출신으로 인맥이 남달랐던 만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파티에 관한 사전 조사도 갤디노의 몫이 될 터였다. 크로커다일, 통칭 악어에게 참석자 명단을 넘기고 주요 인물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크로커다일의 성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모든 유형의 옷차림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공식 석상부터, 일상 집무용, 칵테일파티 등 모임의 성격에 따라 반지의 종류와 개수가 달라지곤 했다. 동행인에게도 예외란 없었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취향대로 맞추어 맵시를 한껏 살려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버기는 그와의 동행이 좋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평소보다 한층 화려해지는 것은 좋았으나 그 외 나머지는 피곤했다. 심지어 그는 이번 파티 때 일전에 사주었던 특정 액세서리를 착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에 만난 점쟁이가 그렇게 일러줬나 보지?” 버기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이 앞에서 입 뻥끗도 하지 못한 채 잃어버린 피어싱의 행방을 되새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버기는 악어가 무서웠다. 그래서 조수를 시켜 피어싱을 찾아보라고 일렀거늘, 나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왼쪽 귀에만 세 개를 뚫었는데 그중 하나가 막혀 두 개만이 남았다. 겁쟁이 주제에 어떻게 귀를 뚫을 수 있었냐며, 주변에서 물을 때마다 버기는 빈정거렸다. “내가 고작 이런 거에 기죽을 거 같아?” 엄연히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샹크스의 말에 힘입어서라도 그는 그때 찰나의 용기를 쥐어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번 막힌 구멍을 다시금 뚫을 자신은 없었다. 버기는 혹시 모를 염증의 가능성을 앞세워 제 행동이 합리적임을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맹점이 있었으니, 자기 증명의 역사란 반복되기 마련이라 십수 년 전의 자신은 어떤 논리를 들먹이며 귀를 뚫게 되었는지, 그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졸업반 시절, 대학 진학을 앞두고 가해지는 심적 압박은 상상을 초월했다. 원체 느긋한 성격의 샹크스도 그때만은 달랐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밀물처럼 쓸려오는 과제를 해치우고 마감 기한에 맞춰 원서를 제출하고 보니 시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달에 걸친 대학 입시 준비에 지친 버기는 눈앞 현실을 회피하는데 강하게 매료되었다. 그는 학업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은 채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를 대며 도피를 일삼았다. 더 많은 종이접기를 하는 한편, 몸에 구멍을 내 반짝이는 것을 넣어 막히지 않게 유지하는 행위에 관심을 가졌다. 졸업 후 막연하게 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나날이 선명해졌고, 마침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되자 급히 예약을 잡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버기는 충동적 행동으로 간주하길 거부했으나, 무언가 대단한 척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샹크스가 동행 의사를 밝혔을 적에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이 되었다.

그날은 유독 이상한 날이기도 했다. 서점에서 페이지를 넘기며 읽는 체하는 동안 버기의 눈이 출입문 쪽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샹크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그는 서점에 왔다.

다른 때라면 성을 내며 펄펄 뛰었겠지만 그러기엔 샹크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불쑥 레일리의 말이 버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에 따르면 로저의 예후는 좋지 않았다. 병원에 머무르는 이상 최소한의 치료를 받아야 함에도 정반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고, 내년 봄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솟구치던 열망이 조금 가라앉았다. 피어싱에 대한 강렬했던 관심도 희미해진 것 같았다. 다음에 받아도 될 듯싶어 버기는 일정을 미루고 샹크스에게 수족관에 가자고 말했다. 헛수고였다. 샹크스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강경했다.

“신경 쓰지 말래도. 하고 싶어 했잖아.” 그러더니 이내 고쳐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가자고.” 샹크스가 말하는 동안, 버기는 줄곧 그의 젖은 두 눈을 쳐다보았다. 어렸을 적 야생의 사자를 보고 겁에 질렸거나, 또는 모욕감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긴 했어도 지금과 같은 친밀함을 느껴보긴 실로 처음이었다. 단지 그 친밀함이 너무나 인상적인 나머지,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물고기처럼 버기의 내밀한 곳까지 침입하여 그 안에 오래 남았다.

신경 쓰지 말라는 점도, 부채감을 얹기 위해 악의로 말한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샹크스는 웃고 있었다. 일종의 연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가벼운 종류의 웃음이었다. 동시에 그가 로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길 주저할 뿐이었다. 

계속 걸어가면서도 버기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13

 

도착까지는 이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모처럼 낸 용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샹크스가 『잠시 외출 중』이라 적힌 메모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애꿎은 시술자에게 전화를 걸어 마구 화풀이했을 거였다. 그들은 시술자가 오길 기다리며 근처 매장에서 열대어를 구경하기로 했다. 

입구에 걸린 할인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매장은 한산했다. 계산대 너머 의자에 앉은 직원은 무미건조한 인사를 건넸고, 이후로 한 번도 그들 쪽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화려한 색상을 뽐내며 열대어들이 수조 안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샹크스는 수조에 가까이 다가서서 지느러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버기에게 물었다. “이 물고기들은 전부 어디에서 왔을까?”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버기는 아마 이 수조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빨간 머리는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댔다. 썩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은 그에게 수족관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들었던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건 쇼였다. 곧바로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기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사람의 손을 타며 먹는 훈련을 한다고 했다.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에 걸쳐 종의 본능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하면, 그제야 전시용으로 옮겨지더랬다. 바로 옆에 헤엄치는 다른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기 위해서 먹이고 또 먹여 살을 찌우는 것이 개체들의 생존 비결이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몸에 각인된 경쟁심리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 그들만의 격한 다툼으로 이어져 상처를 입곤 했다. 그러나 갇힌 공간에서 도망치려야 갈 수 있는 곳은 뻔했다. 수조 안의 삶은 모든 것이 계획하에 안락할지언정, 바다에서처럼 저 멀리 달아나는 것은 불가했다. 각양각색의 습성을 미리 파악하여 조율해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얼마 못 가 수족관은 피비린내를 머금을 거였다.

샹크스는 수조 안 물고기들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도심 속 바다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갇혀 있는 셈이라며, 알고는 있지만 직접 봐야만 확신할 수 있는 인간의 빌어먹을 호기심이 문제였다. 최초로 옮겨진 물고기가 그랬듯이,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물고기도 같은 물고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빨간 머리가 지닌, 바다에 대한 애착에 비해 그는 뭐라도 키우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버기는 그의 말을 반박했다. 무슨 헛소릴 지껄이느냐며, 그렇다고 저것들을 당장 고향인 바다로 돌려보낼 거냐고 말했다. 

“쟤들은 저기에서 태어난 거야, 샹크스. 고향에 가본 기억조차 없다고. 더 낯설 거야.”

다소 신랄한 어조로 버기가 계속 말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지.”

샹크스는 죽음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는 버기의 말을 되받았다.

“죽을지도 모른다, 라. 그렇지만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

“하, 물고기에게 그런 게 어딨어. 쟤네한테는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그래도 알고 죽는 게 낫지 않나.”

아니려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며, 샹크스는 다소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어쨌든 버기가 그에게 해줄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척, 모르는 척 묻어두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내뱉은 것은 이러했다.

“알면 더 괴로워질걸.”

버기는 자신이 내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데 서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최대한 자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샹크스 앞에서는 특히 더했다. 단 한 조각만 비어도 퍼즐이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겨지듯이, 관계 또한 비슷했다. 적당히 넘어가도 될 것을 어쭙잖게 반박한 것이 아닌지,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런가. 아무튼 뭐, 몰랐던 세계가 보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버기가 예약자명을 말하고 시술 전 간단한 상담을 진행할 때도 샹크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버기는 귓불에 하나, 귓바퀴에 하나, 그리고 귀 입구 쪽 단단한 연골에 하나, 이렇게 총 세 개를 뚫기로 했다. 귓불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보라는 권유에도 그는 화끈하게 한 번으로 끝내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고, 시술자는 준비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연골 부위는 부을 수도 있고, 딱지가 질 수도 있고, 피가 귓구멍으로 들어가서 간지러울 수도 있으나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예상은 했었다. 마취 크림을 발라도 일시적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피가 귀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조금 뜻밖이었다. 상상만으로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세 번째 시술을 앞두고 몸을 떨면서 버기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는 시술자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까지만 하고 더는 안 할까 봐.”

“왜?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녔어? 아무 데서나 잘 안 해준다며.”

빨간 머리가 물었다.

“멍청아, 계획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거거든? 아니, 수정되라고 있는 게 계획인 거 모르냐?”

샹크스는 놀라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버기는 더 나쁜 뜻으로 이해하여 목젖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다시 안쪽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러는 새에 샹크스는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더니 버기의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에 얹었다.

“내가 애냐.”

조롱기 따위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샹크스는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금방이야. 금방 끝날걸. 염증도 안 생길 거고.”

“···진짜지.”

“그럼. 결코 이런 거에 기죽지 않아.”

샹크스가 옳았다. 비록 출혈을 피할 수 없었지만, 통증은 참을 만했다. 시술이 끝나자 그들은 계산대로 갔다. 분명히 심사숙고하여 골랐는데도 버기는 계산대 옆 반짝이는 피어싱으로 가득 찬 진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향후 바꿔 낄 것을 지금 고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며, 시술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못하더라도, 천천히 아물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느껴보라는 의미였다. 

제안은 꽤 솔깃했다. 버기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을 제 귀에 대보았다. 잠자코 지켜보던 샹크스까지 가세하여 나름대로 의견을 내놓기는 했지만, 버기는 감동받지 않았다. “네 미적 감각 안 믿어. 아저씨 취향인 주제에 뭘 믿고 맡겨.” 사실 몇 개는 눈여겨볼 만했지만 절대 그것만은 고르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속내를 일찍이 간파한 것인지, 샹크스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다 계산대에 먼저 현금을 내밀었다. “오늘 시술한 거랑 전부 다 합해서 계산해 주세요.” 그러고는 새빨간 색이 돋보이는 네모난 피어싱을 가리켰다. “이것도 같이 할게요.”

버기가 눈을 치켜떴다.

“뭐냐.”

“곧 크리스마스잖아. 미리 주는 선물.”

보통이라면 고맙다는 말부터 건네는 것이 상식이었다. 버기 또한 그 점에 대해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샹크스에게만은 쉬이 그러지 못했는데 실은 여러 해에 걸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 그를 두고 털털하고도 포용적이며 정직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면, 샹크스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착실히 실행에 옮기곤 했다. 설령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정도는 용인할 줄 알았다.

빨간 머리 샹크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 하여 버기가 그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카펫처럼 복잡한 마음 읽기란 딱 질색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이 따위로 은근슬쩍 무마하려 든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샹크스에게 윽박지르는 게 고작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순수하게 놀란 눈을 하고서 버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누가 그것만 준댔어?”

할 말을 찾는 동안, 막 포장이 마친 시술자가 중얼거렸다. 

“한창 좋을 때네요, 별거 아닌 걸로 입씨름할 힘도 남아있고.”

그 말을 하고 난 직후 버기가 강하게 쏘아붙였다.

“우리, 그런 거 아니거든요?”

“힘이 남아돈다고 했지, 그 외엔 딱히 뭐라고 한 적은 없는데.”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버기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굳어졌고, 샹크스는 기어코 웃음을 참는 데 실패했다. 타인에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분노와 수치심이 한데 들끓는 사이, 시술자는 샹크스에게 온 김에 뚫을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보통 기념 삼아 같이 한다는 말에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괜찮아요.”

부을 수도, 피딱지가 내려앉을 수도, 가려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전부 사실이었다. 밤이 되자마자 정말 그랬다. 가벼운 불편함에 그쳐야만 했는데, 간지러움, 추위, 쓰라림 외에도 타는 듯하고 쑤시며 짓누르는 감각이 번갈아 가며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약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뿐인데도 비둘기의 목을 비트는 것처럼 그리 아플 수가 없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고통은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이어졌다.

이튿날, 버기는 레일리와 함께 로저의 집으로 갔다. 다 같이 크리스마스 선물도 풀어 보고 늦은 아침을 들던 중, 레일리는 로저와 긴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방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샹크스도 매한가지인 듯했다.

그는 작은 냉장고에서 음료수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버기 앞에 내려놓았다.

“뭔데, 말해봐.”

버기는 덧난 부분을 소독하고 있었다.

“그거 알아? 이번 주말이 올해의 마지막 주말이야.”

“그래서?”

“버기.”

샹크스가 나직이 말했다.

“해 뜨는 거, 보러 가자.”

 

 

14

 

샹크스에게 “원서 마감이 일주일 후야.”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이었다. 같은 수험생으로서 이해해 주기는커녕 그는 놀라울 만큼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 난 당장 이번 주말까지인데.” 그러고는 버기에게 다가가, 선심 쓰는 척 연고를 건네주었고 캔 뚜껑도 따주었다.

“잘났다, 새끼야.” 버기는 마치 제안을 애초부터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버기, 잘 생각해 봐.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다면서, 지금까지도 안 하는 걸 그때 가서 더 할 거 같아?”

“야, 나도 할 땐 하거든? 아직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샹크스는 처량하게 한숨을 쉬었다.

“거절한 건 너였어. 지금이라도,”

그랬다. 그의 말대로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샹크스는 언제든 기꺼이 나설 거였다.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정말로 난처한 점은 손을 내미는 순간, 이미 비스듬한 관계의 추가 더욱 무거워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무게의 다른 말은 부채감이었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된 관계를, 바래지는 추억과 일종의 부채감으로 연명하기엔 그들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각기 다른 말을 했다. 엄밀히 말해서 샹크스가 아녔다면, 대학 입시는 시도조차 안 했을 거였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경험은 시종일관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가까스로 잠재운 열망을 또다시 들쑤시기엔 가진 것은 턱없이 부족했고 상황도 여의찮았다. 

물론 버기는 말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들었으며, 제 대답이 가져올 여파가 어떠한지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전혀 모르는 체하며 무신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혼자 할 수 있어.”

눈앞의 빨간 머리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샹크스는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맨얼굴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매서운 눈초리로 훑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또 뭐야?” 버기는 화가 치밀었다.

“얼굴 빨개졌어, 버기.”

“그야 자꾸 쳐다보니까 그렇지! 멋대로 보지 마!”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도 조금 전과 다르게 어색한 공기는 사라졌다. 버기는 샹크스가 말한 해돋이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적갈색 나무의 숲을 지나 내내 달려야만 하는 북쪽의 끝, 초승달 모양의 모래 해변으로 둘러싸인 마을, 매서운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외딴섬,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하얀 등대. 무려 19세기에 완공되었다는 등대는 몇 차례 몰아친 대규모 해일에도 살아남았으며, 반세기 전 마지막 등대지기를 떠나보냈다고 했다. 어때, 사진을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냐며, 올해 대미를 장식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계획이 아니냐고 샹크스가 말했다. 아마도 버기의 속마음을 읽었던 것 같았다. 그러자 버기는 아직 간다고 한 적 없다며, 어째서 혼자 들떠 있냐고 비꼬더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두 시간 이상 운전해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수로 700킬로미터를 횡단할 생각이냐고 했다. 더구나 두 번의 실기 시험에서 떨어진 버기는 면허증도 없는 상태였다. 버스라도 타고 가면 되지, 아니면 우리 거기까지 걸어가 볼래, 라고 샹크스는 장난삼아 대답했다. 버기는 얼굴을 붉혔다. 제발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말라며, 미쳤냐고 그는 두 번을 연거푸 외쳤다.

이대로 논의가 종결되길 버기는 간절히 원했지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누가 태워주면 모를까, 라고 반박하자, 그렇다면 히치하이크는 어떠냐고 샹크스가 물었다. 히치하이크로 찾아가는 북쪽 끝 바다라니, 이런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그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역시 그게 좋겠어, 하고 능글맞게 덧붙였다.

“네 멋대로 정하지 마!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어보아도, 샹크스는 교묘하게 피해 갔다. 그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왜 그래, 버기, 왜 이리 화가 났어, 화 풀어. 그러더니 버기가 낌새를 알아차리기 직전, 샹크스는 옷깃을 향해 엇나가는 손을 붙잡았다.

도망칠 핑계는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무언가를 강렬히 바라는 눈빛 앞에선, 특유의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도 맥을 못 추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려본들, 그의 성격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타고나길 잘난 사람일수록 타인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부류의 진짜 문제는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사는 줄 굳게 믿고 있어서, 불행히도 누구 하나 잘못된 환상을 일깨워 줄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버기는 내내 씩씩거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예감했던 대로, 결국 알아보는 일은 버기의 몫이었다. 밀린 자기소개서를 쓰기는커녕 갑작스레 맞닥뜨린 여행 목적지에 대해 찾아보느라 그는 새벽까지 깨어있어야만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꼬박 하루가 걸리고, 걸어가면 이주 넘게 소요되는 해변 마을은 첩첩산중이었다. 운이 좋아 제때 도착하더라도, 등대로 연결되는 유일한 다리가 순식간에 물에 잠겨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샹크스는 단호했다. 너무도 완강한 태도에 버기는 기겁하여, 도대체 어쩌려는 거냐고 묻자, 그는 특별히 생각해 둔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운을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도 맥 빠지는 대답에 버기는 허탈하다 못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쩜 그리 병신같이 매번 긍정적일 수 있어, 바보 자식아.”

 

 

15

 

곧게 뻗은 침엽수가 빼곡히 들어선 숲은 붉은 기둥으로 세워진 초록빛 바다였다. 높이만 100미터를 웃돌아, 고대의 유물처럼 과거로부터 이어진 적갈색 나무의 시간은 공룡이 지배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반구에 보금자리를 튼 이래, 끝없는 생존을 목표로 뿌리와 뿌리가 얽매이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하였다.

차창 너머 젖은 흙냄새가 가득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공기도, 나무도 온통 물을 머금고 있는 것이 마치 숲의 바다로 뛰어든 것만 같았다. 간간이 보이는 적갈색 줄기는 더운 피가 흐르는 체내 속 관을 연상시켰고, 이는 언젠가 들었던 바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 말인즉 몸 안의 액체와 바닷물의 성분이 분석해 보았더니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단세포 생물이 바닷물에 몸을 맡기듯 몸 안의 세포가 체액이라는 바다를 떠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최초의 생명은 바다 밑바닥에서 태어났을 거였고, 일련의 발생과정도 모두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곤 했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굽이친 숲의 바다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바다를 낀 도로가 펼쳐졌다. “곧 도착할 거니까 내릴 준비를 하렴.” 나이 든 운전자가 미리 일러주었다. 백미러를 조정하자, 빨간 머리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옆에 있던 다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빨간 머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잠에 취해 있었다.

듣던 바로는 그들의 여정은 새벽 다섯 시에 시작했더랬다.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내려서 간단히 요기하며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십 분 간격으로 기차만 세 번을 갈아탄 다음, 버스로 여섯 시간 넘게 달렸다고 했다. 그마저도 간신히 올라탄지라 점심은 들지도 못한 게 당연했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네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 거냐고 운전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우린 어떻게든 갔을 거라고 빨간 머리가 대꾸했다. “시간이 더 걸려서라도요.” 피곤해 보이는 안색에도 그의 눈은 연신 반짝였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그들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막 잠에서 깨어난 버기는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릴 지경이었다. 주린 배부터 채우기로 합의한 두 사람은 늦게까지 영업하는 패스트푸드 가게로 들어갔다. 버기가 손으로 허겁지겁 주워 먹는 동안 샹크스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보다 못해 버기가 말문을 열었다.

“왜, 입맛이 없어?”

“아니.”

“난 다 먹었는데.”

버기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샹크스는 손으로 감자튀김을 쥐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중에 배고프다고 개수작 부리지 말라며 엄포를 늘어놓아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저편을 꿈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턱을 괸 채 하릴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은 나머지 버기는 집게손가락으로 샹크스의 팔을 쿡쿡 찔러댔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대로 꼬집을 심산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그길로 식당을 빠져나와 장을 보고는 둘은 바닷가로 향했다. 그리고 벤치에 걸터앉아 해면이 낮아지길 기다렸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바람이 불었다. 똑바로 걷기 힘들 정도로 거센 겨울바람이었다. 해수 알레르기가 생기고 나서부터 버기는 바닷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면 실내에 머물곤 했다. 행여 바람에 떠밀려 바다가 그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이 바깥쪽으로 걸을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샹크스의 말은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언덕길 끝에 이르자 하얀 등대가 나타났다. 자갈과 바위로 뒤덮인 섬에서 홀로 솟아 있는 건물로,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는 하나뿐이었는데, 운 좋게도 파도가 높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는 데 성공한 그들은 등대 입구 쪽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찾아온 적막 속, 등대의 환한 불빛만이 칠흑 같은 어둠을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다.

앞으로 일곱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밤의 시간을 찬찬히 세보는 것 외에 그들에겐 이렇다 할 계획이 없었다. 새벽 한 시경, 버기는 지금이라도 돌아가 숙소를 잡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샹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석하게도 일출 시각에 맞춰 되돌아올 때면 해면이 높아져서 그건 어렵다고 말했다.

대신 그가 재미 삼아 하얀 등대의 유래를 말하며, 흔히 알려진 대로 길잡이로써가 아닌, 근방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물로써 존재 의의가 있는 거라고 밝혔을 때 버기는 진심으로 분개했다.

“뭐야, 이 사기꾼아! 괜찮을 거라며!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처음에는 멱살을 잡고 흔들다, 나중에는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도 샹크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는 말은 버기를 더욱 자극했다. 그는 어느 누가 등대의 진짜 역할에 대해 찾아보겠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샹크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먼 훗날 있을 극지방 여행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여기자고 했다. 물론 버기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말이었다. 소란은 한참 뒤에야 끝이 났다.

달이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었고, 세상은 통째로 캄캄한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담요에 둘러싸여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마다 시린 바람이 얼굴을 정신없이 구타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샹크스가 가방 안을 뒤적이고 있었다. 추위에는 이만한 게 없다며 그가 꺼내 든 것은 술이었다. 전부 얇은 담요로 둘둘 말려 있었는데, 싸구려라기엔 진열장 안쪽에서 볼 법한 것들이었다.

“미쳤어? 한 병도 아니고 세 병씩이나? 그걸 어떻게,”

“훔친 거 아냐! 그 정도로 나 생각 없지 않거든? 집에서 가져온 거야.” 

샹크스는 몇 번이고 자기 행동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럴수록 의심은 짙어져 갔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내민 병 앞에선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안 마실 거야?”

아예 짐작도 못 한 일은 아니다. 나름 엄격한 레일리도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종종 버기에게 두어 잔을 따라주곤 했다. 그렇다면 로저와 한 식구로 살아온 샹크스는 어땠을지,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봄이 오면 샹크스는 어른이 될 거였고, 이른 생일 선물을 준답시고 순순히 허락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진실은 영원한 비밀로 남겨질 거였다. 새삼 모든 병을 비우겠다는 의지를 선보이며 오프너도 종류별로 챙겨온, 빨간 머리의 소름 끼치는 대범함에 버기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멍청아, 나 귀 뚫은 지 며칠 안 지났거든?”

버기가 보기에 샹크스에겐 ‘두 번’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는 듯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며 그는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하마터면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한 모금 들 뻔했으나 그러기엔 왼쪽 귀의 통증이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음주의 부작용으로 십중팔구 구멍에서 피고름이 흐른다는 말에 버기는 지레 겁부터 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생경하고도 얼떨떨한 감각은 그가 방금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은 담요마저 내놓으라며 멋대로 남의 가방을 뒤지던 그는 무언가 발견했다. 콘돔이었다.

심지어 한 개도 아니었다. 총 다섯 개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버기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장을 보는 내내 둘은 함께 있었다. 샌드위치와 우유를 샀고, 과자도 몇 봉 샀다. 계산대에 올리기 전 샹크스는 깜빡 잊은 것이 있다며 버기더러 먼저 나가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때였을까? 딸기우유부터 계산해 준 배려는 실로 배려가 아니었던 것일까? 덕분에 무언가 더 담아도 버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원래부터 가지고 다녔다는 것일까? 버기는 도통 연애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고, 피가 쏠려 성기와 심장이 동시에 부푸는 듯한 경험은 수업 도중 글귀로 접한 게 다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샹크스는 달랐다. 빨간 머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중에는 데면데면해진 사이도 있고 어른의 열정을 흉내 내는 사이도 있을 거였다.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잘 기능하는 나이인 만큼 당연히 그럴 수 있었고, 고쳐야 할 점은 없었다. 그런데도, 비참할 정도로 멀찍이 떨어진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버기는 몹시 불쾌해졌다. 마치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그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버기.”

샹크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또렷해야 할 발음이 흐려져서 다소 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단박에 이리 마셔도 되냐며 그의 손에서 병을 뺏어가자, 샹크스는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 괜찮아. 로저가 그랬어. 몸이 후끈 달아올라 덮을 것이 필요 없다고.” 술이 들어간 로저는 유쾌한 목소리로 레일리와 함께 의료 봉사를 다니던 시절을 크게 떠벌리곤 했다. 여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생과 사가 오가는 현장도 어둠에 덮이고 나면 그리 고요할 수 없다며, 텅 빈 하늘에 무수한 점이 하얗게 빛나는 풍경은 잊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로저에게 낭만이란 가까이서 피비린내가 맡아지는, 높게 뜬 사막의 신기루였다. 지금 막 바다 위로 떠오른 별과 북극에서 바라보는 별과 그가 경험한 별의 색은 얼마나 다를는지, 버기는 한 번도 보러 간 적이 없는데도 기억 한구석에 자리한 것처럼 눈에 선했다.

이대로 별이 질 때까지 조용히 각자의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고 버기는 생각했다. 하지만 희망사항일뿐,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샹크스가 버기의 귀를 만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만하라며, 가뜩이나 마시지 못해 억울해 죽겠다고 주먹질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샹크스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과감해졌다. 그는 귓바퀴를 그리는 것으로 모자라 피어싱이 달랑이는 귓불을 매만지더니 기어코 덧난 부분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손끝이 스치듯 거니는 자리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염증 생기면 다 네놈 탓이야.”

말은 이리 해도 버기가 샹크스를 부추겼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남은 두 병을 다 비운다면 이번 여행 경비는 죄다 자신이 내겠다고 선언해서는 안 되었다. 정말이냐고 몇 번을 반문하다 “무르기 없기다?”라는 말을 끝으로, 빨간 머리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돌이켜 보면 술꾼의 징조라 해도 무방했다. 어쩌면 승부사적 기질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샹크스를 대면할 자신이 없던 버기는 그가 자리를 비운 새에 소소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볼일을 보러 등대 뒤편으로 사라지자, 버기는 샹크스의 가방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뒤집어도 보았다. 그러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발견하기는커녕, 손에 잡힌 거라곤 구겨진 종이 한 장과 콘돔 다섯 개였다. 그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젠장!”

어딘가 서늘한 분노가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원인 모를 화가 솟구치는 것이, 마른 건초를 태우는 불길처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였을까?

버기는 알고 있는 모든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다. 반짝이는 머리를 예쁘게 땋았던 얼굴일까? 아닌 척 예민하며 속눈썹이 긴 얼굴일까? 하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모든 건 버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고, 그는 그 자체에 넌더리가 났다. 그는 손으로 쥐고 있던 것들을 죄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그런데도 분을 삭이지 못해 발길질까지 했다. 아마 샹크스가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쓰레기 더미를 뒤엎고도 남았을 거였다. 왜 그래, 버기, 너 왜 이리 몸을 떨어. 샹크스가 뒤에서 버기를 껴안자, 반작용으로 그도 몸부림을 쳐댔다.

버기는 빨간 머리 소년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거 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온몸을 둘러싼 팔에 힘이 더해갔다. 머리끈이 풀렸다고 외쳐도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그러고는 버기의 머리카락에 제 얼굴을 묻었다.

목뒤가 간지러웠다.

그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절로 낯이 뜨거워졌다. 이런 식의 접촉에는 면역이 생기려야 생길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버기는 말리지 않았다. 남의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샹크스는 버기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는 몸을 웅크렸다. 하늘이 환해지기 전까지 단둘인 세상에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보냈다.

아침이 가까워진 새벽이었다. 여명이 희미한 수평선을 밝히기 시작했다.

 

 

16

 

뺨을 비벼대는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저리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코에 무언가 닿는 느낌에 버기는 입을 다물었다. 둥근 코가 날렵한 콧대와 마주 닿았고, 문득 버기는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샹크스를 밀어내기엔 곁에 너무도 바짝 붙어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샹크스가 돌연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버기를 보고는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뺨을 꼬집었다. “똑같이 당하기 싫으면 그만해라, 이 주정뱅이야.” 으름장을 놓는 한편, 버기는 샹크스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볼때기를 잡아 늘이는 행동이 계속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고 버기는 고스란히 되갚아 주었다. 샹크스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다른 쪽도 내밀었다. 난데없이 오기가 생긴 버기는 두 손을 뻗어 샹크스의 얼굴에 감쌌다. 있는 대로 잡아당겨 못난이가 되어보란 심산이었다. 하지만 차디찬 뺨에 더운 숨이 닿자, 손에 힘이 빠졌다. 자연스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반쯤은 장난으로, 반쯤은 진지하게, 샹크스는 버기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달랠 길 없는 욕망이라기보다 갓 태어난 새끼를 핥아주는 동정심에 가까웠다. 이 중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닐 수 있었지만, 동시에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마치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경계처럼, 어둠에 잠식되면 일시적으로 함몰되다가도 빛이 스며들면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었다.

“저길 봐, 버기!”

시간이 흘러 붉은 고리가 수평선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어느새 어둠은 저만치 성큼 달아나 있었고, 말간 태양이 서서히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럴수록 빛이 닿는 거리도 조금씩 길어졌다. 버기의 푸른 머리카락도 주홍빛으로 적셔졌다. 그림자가 진 부분은 더할 나위 없이 짙푸르지만, 빛을 받으면 더욱 붉게 빛났다.

시야에 빨갛고 파랗게 물든 세상이 담긴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샹크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도 아름답다며, 여명의 빛깔에 감탄하는 목소리는 제법 흥분에 겨워 있었다.

버기도 이어 소리쳤다.

낮과 밤이 조우하는, 이토록 비현실적인 순간에도 바다는 끊임없이 다가왔고, 바람은 차고 거셌다. 어찌나 매섭게 불어오던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머리카락만은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바닷바람을 타고 정처 없이 흩날렸다. 

샹크스가 왼손으로 버기의 턱을 잡았다.

왠지 눈을 감고 있을 법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했던 버기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해를 등져 그늘진 얼굴은 한 마디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웠다. 

숨을 참으며 찬찬히 그를 뜯어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부드러웠다. 무르고 연하다 못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 눈은 사람을 얼빠지게 했다.

슬프기도 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대신 버기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다가오려는 얼굴을 제 손으로 막았다. 별안간 입이 막혀버린 샹크스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그 틈을 타 버기는 샹크스의 코끝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악!” 빨간 머리가 코를 잡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버기는 그 모습에 큰 소리로 웃었다. 복수다, 개자식아. 그러나 복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샹크스도 버기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코끝이 온통 새빨개진 채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샹크스가 입을 열었다. “머리, 묶어줄까.”

버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손을 어떻게 믿어.”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올랐다. 그들은 하얗게 빛나는 등대를 뒤로 한 채 다리를 건너 나란히 걸어갔다.

 

 

17

 

악어가 선물해 준 피어싱은 끝끝내 찾지 못했다.

버기는 망연자실 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조수를 닦달해도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물건이 하루아침에 나타날 리 없었다. 조수는 소원을 들어주는 연금술사가 아니었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우려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른 아침부터 방 안을 돌아다니며 적당히 둘러댈 구실을 머릿속으로 나열했다.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가 울릴 때까지 그렇게 했다. 정확히 아홉 시가 되자 진동이 느껴졌다. 적막을 뒤흔드는 진동이 어찌나 끔찍하게 느껴지던지 그는 애써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날 버기는 크로커다일에게 피어싱의 묘연한 행방을 실토했고, 그는 칠칠치 못한 죄로 물집 잡힌 손을 얻었다. 그래도 온 마음을 다해 빌었던 효과가 유효했는지, 이만하면 최악은 벗어난 셈이다. 멍을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까닭에 차마 얼굴을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크로커다일은 불만을 토로했다. “연신 사고나 치는 주제에 네 놈의 운은 도통 당해낼 재간이 없군.” 

시간이 흘러 파티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크로커다일은 비서를 통해 새로운 액세서리를 보내주었는데, 상자를 열자마자 버기는 아연실색했다. 

“언제 적 빨간색이야. 촌스러워.”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는 비서와 눈이 마주쳤고, 바로 후회했다. 크로커다일의 충실한 수하는 버기의 말을 곧이곧대로 일러바칠 거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크로커다일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직접 전화를 걸어 색깔에 숨겨진 의도를 전했다. 갤디노에 따르면 관장이 그 색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사업에는 다 암묵적 의미가 있는 법이야, 한낱 광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버기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팔자 주름처럼 그에게 강요된 것은 없었다. 광대답게 왕의 시중을 들며 위로를 해주는 한편, 어엿한 사자 노릇을 한답시고 정작 사지로 내몰리는 것인지 아닌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악어가 전부 결정해 주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버기는 현재 사업을 이끄는 조직의 수뇌부에 속해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크로커다일과 M, 두 사람에 대해서 버기는 속수무책이었다. 명색이 대표라지만, 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다른 모든 사람의 죗값을 대신 치를 인질에 불과했다. 저마다의 용도가 있는 위성의 무리더러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고 하지 않듯,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에게 공통점이랄게 없었다. 따라서 진심을 담아 좋아할 수도, 증오할 수도 없었다. 버기가 크로커다일의 말에 고분고분할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고 매 순간 타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예측불허한 행동을 저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버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는 치밀하고도 확실한 계획하에 움직이는 악어에게 치명타나 다름없었고, 대부분 제때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에 서둘러 수습하는 데 집중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유명세가 광대를 따랐다. 주기적으로 홍역을 치르는 대신 그는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만한 대가를 받았다. 언제든지 원하는 보석을 살 수 있고, 선상 파티를 열고, 값비싼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랫동안 버기의 조수로 지내던 알비다가 물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나락이라도 가면 그땐 어쩔 생각이야?”

제법 훌륭한 조수이자 동료인 그녀와는 다른 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묘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생계를 우려하는 듯한 말의 등뼈에는 세심하게 감춰진 가시가 돋아 있다는 소리였다. 겉으로는 그를 위해주는 척하지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그녀는 마지못해 버기의 등에 칼을 꽂을 것이다. 권력자에게 무릎을 꿇고 상대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작품을 비롯하여 그와의 모든 것은 엉터리였다고 중얼거릴 것이다. 버기는 등장만큼 화려한 퇴장을 외치고 싶었으나 실상은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딱히 더 해줄 말이 없었다. 

어깨를 펴고 과장된 몸짓을 하기보다 버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거야말로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틀림없이 까맣게 잊고 말았겠지만, 그는 이십여 년 전에도 샹크스에게도 같은 대답을 반복했었다. 귀를 뚫은 지 두 달째 되던 날 마침내 붓고 곪은 상처가 아물자, 버기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 귀가 감당 못 할 무게의 피어싱을 달곤 했다. 귀가 찢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에도 막무가내였다. 유일하게 샹크스만이 버기를 말리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그만큼 버기의 귀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못 보던 건데, 또 바꿨네.”

그들이 빨대 구멍의 개수에 대해 격렬히 논쟁하던 중 샹크스가 말했다. “내일도 같은 거 하려고? 다른 색은 없어?”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도 당시 그 말을 듣고 버기는 탐탁지 않아 했다. 빙그레 웃는 얼굴 너머로 자신이 사주었던 물건의 행방을 묻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버기는 그에게 알릴 의무가 없었다. 새빨간 피어싱을 외출 전마다 귀에 대본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서는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샹크스의 심미안을 부정하고 어떤 때는 정당화하느라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그 앞에선 착용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거야말로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그야 돈을 낸 사람은 나니까?”

“헹, 그러게, 누가 멋대로 그러래? 아무도 너한테 생돈 쓰라고 한 적 없거든?”

혀를 내밀며 약 올려 보아도 샹크스는 한결같이 웃어 보였다. 그 여유로움에 휩쓸리다 못해 무심결에 진심이 튀어나올까 봐 버기는 내심 두려웠다.

 

 

18

 

해돋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연이은 히치하이크의 실패에 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고, 이제 막 두 번째로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배차 간격이 짧은 편이라 오늘 안으로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샹크스가 느닷없이 손목을 잡으면서 처음의 계획은 전부 일그러지고 말았다. 무언가에 매달리듯이 그는 버기의 이름을 불렀고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또 뭔데.”

“나 속이 안 좋아. 머리도 아프고, 메스꺼워.”

“뭐?”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지! 이번 버스를 놓치면 장장 세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다음 종착지인 버스 정류장까지 멀지 않을 터이니 초인 같은 의지력을 발휘해 보라고 할 참이었다. 하지만 파리해진 안색을 마주하자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식은땀까지 흘리는 그를 데리고 버스에 탑승한다는 것은 미친 행위처럼 여겨졌다. 그걸로도 모자라, 약속대로 세 병을 깨끗이 비웠으니 자기가 이긴 거냐고 묻는 그의 모습을 보고 버기는 기가 막혔다.

“너는 지금 내기가 중요하냐! 어쩐지 미련하게 처마시더니만 잘났다!”라고 버기가 소리쳤다. 그리고 덧붙였다. “잘 들어. 내 옷이나 가방에 토했다간 두 번 다시 나랑 말 걸 생각하지 마!”

협박성 어조로 그를 몰아세운들, 그것이 마땅한 해결책이 될 순 없었다. 벌어질 일은 결국 벌어지고 마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면 이를 늦추는 것이 최선이었다. 

두 사람은 술이 깰 때까지 걸었다.

대낮의 공터를 네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샹크스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더니 본격적으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이따금 목구멍에서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버기는 당황했다. 이상하게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났다. 샹크스는 버기의 신발 위에 구토했다. 걸쭉하고 노란 물이 땅바닥으로 흘렀다.

“···야!”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한참을 게워 내고 나서야 샹크스는 죽을 것 같다는 말을 그만두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공중화장실에서 얌전히 기다렸어야 했다고, 버기는 생각했다. 냄새만은 어찌할 수 없던지라 신발째로 버려야 했고, 토사물을 닦았던 담요도 같은 운명이었다. 버기는 비누로 손을 빡빡 문질렀다. 그런 다음, 근처 가게에서 할인 중인 여름 신발 중 가장 저렴한 샌들을 골라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그는 조용히 물만 들이켜고 있는 샹크스 쪽을 힐끗 보았다. 버기에게 신발을 빼앗긴 그는 두 쪽 다 맨발이었다.

“여행 경비는 네가 내. 신발값도 포함해서, 백 배는 갚아.”

버기는 샌들을 샹크스에게 내밀었다. 둘 다 이것이 일종의 복수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한겨울에 샌들을 신고 간다면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질 거였다. 그래도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샹크스는 샌들을 신고 버기를 뒤따라갔다.

늦은 밤이 가까워지자, 비가 내렸다. 물에 신발이 적셔졌다. 

예상 도착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버스는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아직 한 시간을 더 가야 하는 그들로서는 당장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레일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이곳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 나을까?

버기가 빠르게 답을 주었다. “주말 내내 당직이랬어. 월요일에 돌아올 거야.”

가반에게 연락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모텔이라도 잡아 외박하는 것이 나을까? 전자는 후폭풍이 두려웠다. 레일리뿐만이 아니라 가반에게도 야단맞을 것이다.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지?” 둘 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자는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버기는 동의할 수 없었다. 좁은 방, 하나뿐인 침대에 샹크스와 나란히 누워 아무 일도 없이 잠에 들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럴 자신도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버려진 콘돔 다섯 개, 그리고 제 턱을 잡은 커다란 손이 떠올랐다. 콘돔을 쓰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을 거라면 왜 갖고 있던 것인지, 그는 감히 더 물을 수 없었다. 번거롭기도 했고, 그보다 제 안에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질문도 수두룩했다. 타인인 샹크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버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레일리에 대해 알지 않느냐며, 허락받지 않은 외박까지 했다간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샹크스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야.”

버기는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샹크스가 조금 더 보챌 거로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순순히 포기하리라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치미는 화에 그는 당장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조금 걸어가면 야간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이 있다니까, 거기로 가자.”

잠시 후 그들은 대로변을 따라 걸어갔다. 새로 표를 끊기 위해 가방 안쪽을 뒤적이던 샹크스의 얼굴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지갑 잃어버렸어?”라고 버기가 물었다.

“···아니.” 

샹크스가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같이 찾아줘?”

“아냐. 괜찮아.”

“괜찮다는 녀석 얼굴이 그 모양이야? 뭔지는 몰라도, 뭣하면 새로 사던가.”

야간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비가 거세진 뒤에야 대화가 비로소 물꼬를 텄다.

자정 무렵,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자 추위에 약한 버기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이를 눈치챈 샹크스가 겉옷 지퍼를 내렸다. 그러나 버기의 말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럼 넌 뭐 입으라고, 안에 반팔 입은 게 다잖아!”

“괜찮아. 술 때문에 그런가, 나는 조금 더운 거 같은데.”

헛웃음이 났다. 버기는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쟁이, 토한 주제에 뭐라 지껄이는 거야, 라고. 그때였다. 샹크스가 버기 앞에 마주 섰다. 목도리를 둘러주고 그의 손을 잡더니만 제 겉옷 앞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버기가 손을 뺐다.

“싫어.”

샹크스는 버기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럼 벗어주는 걸 입고 있던가, 아니면 이대로 있던가. 둘 중 하나로 해.”

말 자체가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어찌 되었든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버기는 겉옷 앞주머니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그는 어깨에서 무언가 툭하고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빨간 머리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도 바짝 붙어서 상대를 꿈쩍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바다 냄새도 났다.

추위로 인해 겨우 원래의 색을 되찾은 뺨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목도, 귀도 새빨갛게 달궈지는 것 같았다. 

숨이 닿는 부위가 뜨거웠다.

“그러고 보니, 너 원서는?”

“그게 뭐?”

“주말까지 아녔어?”

“오기 전에 내고 왔지.”

“언제?”

“우리 나오기 전에. 진즉에 다 써서 올려놨지. 지원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거였거든.”

버기는 다시 한번 분개했다. “개자식! 난 한 자도 못 썼는데!” 평소였다면 등이라도 한 대 때렸겠지만, 그래서는 도무지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물리적으로 보복할 기력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하루 종일 담아두었던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책 없는 새끼야, 앞으로 이렇게 여행 오자고 할 거면 너 혼자 가, 네 이런 점이 진짜 싫어, 짜증나, 이런 일생일대의 순간에 나 감기라도 걸리면 다 네 놈 탓이야, 경비에 신발에 병원비까지 나오면 이자도 붙여서 전부 받아낼 거야, 절대로 용서 안 해. 그러나 마지막에 내뱉은 한마디만큼 강력한 것도 없었다.

“너 따위 다시 만나주나 봐라.”

알았어, 미안해, 에이, 버기, 정말 미안해, 라고 사과하던 목소리가 이내 잠잠해졌다. 잠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캐물었다.

“평생?”

버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빨간 머리가 얼굴을 묻은 어깨가 간지러웠다. 웃는 것인지, 흐느끼는 것인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무덤처럼 침묵하던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조금 곤란한데.”

그는 여전히 버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열 내지 마.”라고도 했다.

새벽 2시를 넘겨서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위층의 침실까지 가기엔 녹초가 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실 바닥에서 잠을 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직 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레일리가 두 사람을 깨웠다.

예상대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남은 원서 접수 기간에 외출 금지는 덤이었다. 그들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 조금 이따 보자는 인사 외엔 둘 다 말을 아꼈다. 점심도 들지 않고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들은 계속 잠을 잤다.

그날 저녁, 버기의 몸에서 열이 났다.

 

 

19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 로저가 레일리와 함께 의료 봉사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삼월의 봄, 나라 전역에 걸쳐 대규모 폭동이 예고되었다. 시내는 초비상사태였다. 첫날부터 화염병이 날아다녔고 밤새도록 거리가 불바다가 되었다. 곳곳에서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도심과 떨어진 난민촌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지긴 했었지만, 이번은 심상치 않다며, 몸을 사리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권유는 언제까지나 선택에 불과했다. 즉, 구속력이 없었다. 두 사람을 포함하여, 가장 마지막에 빠져나오는 것으로 합의한 사람들은 늘 하던 행동을 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진료소를 열어 환자를 진단하고 수술을 집행하거나 처방을 내렸다. 이따금 강도가 들이닥치긴 했으나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끝까지 남고자 했던 그들이 도망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밤중에 떨어진 폭탄 때문이었다.

시작은 쿵, 하는 소리였다. 이내 지반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날렸다. 귀도 먹먹했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대피소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고, 새벽이 되어 겨우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사이렌이 울렸다. 조용한 거리를 채운, 유일한 소음이었다. 새삼스레 그 소리가 낯설어 로저와 레일리는 잠을 뒤척였다. 몇 차례에 걸쳐 대피소로 도망친 끝에 그들은 깨달았다.

탈출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었다.

삼월 구일, 사이렌이 잠시 해제되었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대피소에서 튀어나온 그들은 주인 없는 빈 차를 찾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공항이었다. 반나절 후에 있을 마지막 비행편을 놓치면, 그대로 생죽음을 당할 게 뻔했다.

다행히도 행운의 신은 그들의 편이었다. 그늘진 건물에서 검은색 차량을 발견한 로저는 쾌재를 불렀고, 레일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겨우 차량을 구해서 시동을 걸기 직전, 어디선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주변을 살펴야 했는데, 정체불명의 칭얼거림은 갈수록 더욱 대담해졌다. 그것은 곧 커다란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살고 싶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아기는 트렁크 안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옷가지에 싸여 있었다. 몸도 제대로 감싸지 못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금방이라도 벗고 간 것 같았다. 아기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붉은 캐시미어 코트는 어딘가 헤져 있었고, 무엇보다 건조한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을 제외하면 가방 안에 든 것이라곤 귀금속과 약간의 돈이 전부였다.

레일리가 말문을 열었다. 또다시 폭탄이 날아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던졌다.

아기를 안아 든 로저가 대꾸했다. “그 전에 어떻게든 공항까지 달려가야지, 별 수 있겠어?”

그들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가방 속 버려진 아기와 함께였다.

 

 

20

 

봄이 오기 전, 로저는 세상을 떠났다. 불치병 환자인 그는 죽기 전 몇 달간 치료를 거부하다시피 했다. 외인사나 불상이 아니었기에 그는 병원에서 죽음을 허락받아야 했는데, 원래 병원이란 살리고자 안간힘을 쓰는 곳이다. 수많은 검사와 치료를 통해 죽음을 선언하는 일을 최대한 미루고자 했다.

그 점이 가장 문제였다. 그는 기계에 숨 쉬는 일을 맡기길 거부했다. 하루빨리 쇠약해져 탈수가 발생하고 피가 산성화되길 바랐다. 오히려 그것이 공포에 몸부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평온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치료를 하건 안 하건 후회만이 정해진 결말이라면 로저는 하지 않고 후회할 사람이었다. 레일리도 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그가 수시로 의료진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고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러나 로저는 그 자체를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그가 바란 대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무척이나 화창한 겨울날 아침, 그의 동공이 무한히 확장된 채 맥박과 호흡이 자연스럽게 멈추었던 것이다.

유언대로 바다에 묻히려면 사망진단서가 필요했고, 부검을 마친 의사는 사망을 선고했다. 서류상 죽음의 종류는 다섯 가지였다. 그는 명목상 자연사였다.

선박 의사 출신이자 이웃으로 지냈던 크로커스가 장례식을 책임졌다. 그는 부고란을 내고 장의사를 선임하고 꽃을 주문했다. 자신이 도울 일이 없냐는 버기의 질문에 크로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수장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로저를 추억할 물건을 한데 모아 둘러볼 예정이라며, 너도 하나 가지고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아가 된 친구를 잘 다독여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크로커스가 하라는 대로 했다. 입양될 적 가지고 왔던 파란 상자에서 그는 종이로 만든 새 한 마리를 꺼냈다. 금빛 꼬리를 늘어뜨린 붉은 새였다. 상자에 한 번 들어온 이상 좀처럼 빠져나가기란 불가했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버기는 긴 꼬리의 종이 새를 소중히 안아 들었다. 그리고 식장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식장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어찌나 잠잠한지, 하마터면 인기척도 느끼지 못 할 뻔했다. 희미한 술 냄새가 우두커니 서 있던 빨간 머리의 존재를 고발했다. 그는 관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샹크스.”

낡은 밀짚모자가 관 위에 얹혀 있었다. 내일 여기서 한참은 떨어진 바다에서 작별 인사를 하게 될 것이다.

“뭐 하는 거야?”라고 버기가 뒷말을 이어갔다. 샹크스는 화들짝 놀라며 무언가 등 뒤로 숨겼다. 버기는 그가 휴대용 물통처럼 보이는 것을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

오랜만이었다. 금주 기간을 가져야 할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로저가 종종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술 마셨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버기는 짜증이 났다. 그가 언성을 높였다. “바보 자식.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숨긴다고 숨겨져? 냄새가 숨겨지겠냐고!”

그는 샹크스를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관 옆에 종이 새를 올려놓은 다음, 그는 황급히 식장을 빠져나갔다.

주위에 어둠이 짙어 갔다. 밤도 낮도 아닌 하늘에는 빠져나간 손톱 같은 달이 걸려 있었다. 

이튿날, 장례식이 예정대로 거행됐다. 먼저 요트를 타고 수장 장소에 도착하자, 곧이어 관이 다른 배에 실려 왔다. 시신을 바다로 밀어 넣기 전, 그들은 짧은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눈시울을 적신 채 추도사를 낭독하는 샹크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도리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은 버기였다.

장의사의 지시에 따라 선원들이 관을 바다에 빠뜨렸다. 관이 몇 분간 파도에 휩쓸리더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거품이 잦아드는 것을 확인한 선장이 배를 선회했다. 그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다 위를 세 번 돌았다. 꽃을 던지며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를 준 셈이다.

샹크스가 제일 마지막에 꽃을 던졌다. 꽃은 천천히 나선을 그리다 파도에 부딪혔다. 그것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본연의 형태를 잃은 채 바다 위를 헤맸다.

순간 버기 내면의 무언가 끊어진 것 같았다.

아래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너무도 눈물을 참았던 탓에 그는 두통을 호소했다. 그는 레일리의 도움을 받아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엉엉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샹크스가 운전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두 사람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집 근처에 다다라서야 버기가 입을 열었다. “오는 주에 학교는 못 나오지?” 샹크스는 머리를 넘기며 “아마도.”라고 말했다. 향후 며칠간, 그는 보험을 청구하고 상속 문제를 해결하느라 이래저래 바쁠 예정이었다. 오늘 오후에 레일리와 함께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래도 저녁엔 시간이 날 거 같은데, 잠깐 올래?”

샹크스가 버기의 무릎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뒤뜰 오두막으로 가서 기다리라는 것으로 버기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샹크스의 손을 쳐냈다.

집 안에 그는 혼자였다. 미성년자인 샹크스를 대신하여 후속 절차를 밟느라 어른들은 한동안 버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였다. 그는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일 게 필요했고, 서랍에서 접다 만 종이뭉치를 꺼냈다. 한 쌍의 해달을 만들려던 종이도 다시 펼쳤다.

그는 구겨진 종이로 꽃을 접기 시작했다. 

원서 제출은 오래전 끝이 났고, 하루하루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그를 받아줄 대학이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놀랍게도 벌써 두 군데나 보류 중이었다. 버기는 새삼스레 샹크스의 대학 선택이 궁금해졌다. 가까운 대학이 아니라 해양 생물학으로 유명한 학교를 노리고 있다면, 그때는 정말로 이 동네를 떠나야 할 거였다. 비록 같은 곳에 갈 수 없겠지만, 그리고 제가 무얼 할 수 있는지도 확인된 바 없지만, 어떻게든 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만은 여전히 유효했다.

버기는 파도에 의해 해체된 꽃에 대해 생각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로저를 보내주었다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로저는 바다 밑바닥에 누워 있을까? 바다를 사랑했던 그는 죽어서도 흙의 무게를 견디고 싶지 않아 했다. 남들처럼 매장된다면, 물살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기보다 돌에 둘러싸여 한평생을 갇혀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육지를 떠나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뭍을 떠나 살기란 산 자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빛도 공기도 사라진 밑바닥에서 사람은 잠시도 머물지 못한다. 그렇기에 십칠 년 전, 흙먼지로 뒤덮인 땅에서 제가 데려온 아기가 어떠한 어른이 되어갈지 그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21

 

일출 보기의 여파는 제법 오래갔다. 밤부터 몸이 펄펄 끓기 시작했고, 버기는 일주일을 통으로 앓았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의 원인은 바이러스성 감염이었다. 다행히 통원 치료가 가능하여 샹크스가 간호를 자청했다. 그는 버기를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진료를 마칠 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었는데, 도움을 한사코 거절한 게 무색할 정도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일어났어?”

시야가 흐릿한데도 목소리가 아주 선명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 위였다. 물을 마셔도 마른기침이 지속되자 샹크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열은 아직 그대로네.” 그는 마스크를 낀 채 능숙하게 온도를 재는 한편 버기의 양 무릎 밑에 베개를 넣어주었다. 크로커스에게 전화를 걸어 처방 약의 성분에 관해 묻기도 하고, 가습기도 틀어 주었다. 땀에 젖은 몸을 가볍게 닦아주는 것도 샹크스의 몫이었다.

급작스레 속이 울렁였다. 평소에 바보라 불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에 띄게 힘들어하며 안절부절못하지 않고 되레 침착함을 유지하는 그를 보며 버기의 머릿속에는 상담교사가 떠올랐다. 당시 상담교사는 샹크스에게 의대 진학을 권했었고, 처음으로 버기는 그 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을 수용하기란 또 다른 영역이었다.

간호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레일리의 전화를 받을 때를 제외하면 샹크스는 거의 하루 종일 버기 곁에 머물렀다. 늦은 밤에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머저리는 불편하게 왜 저러고 있대. 버기는 무어라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나오는 거라곤 갈라진 음성뿐이었다. 그나마 두통이 사라졌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버기는 샹크스 쪽으로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근래 들어서 무방비한 상태의 샹크스를 볼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 이 기회를 빌려 털이라도 뽑아버릴 심산으로 버기는 팔을 뻗어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닿기도 전에 근육통이 엄습했고, 터져 나온 새된 소리는 샹크스를 깨우고 말았다. “버기!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샹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새 깊게 잠들었던 것인지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아직은 무리하면 안 돼. 그래도 열이 많이 내려서 다행이다.”

샹크스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출장 중인 레일리의 근황을 전해 주었다. 약을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먹되, 비타민 용량을 더 늘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계속 이야기했다. 이리 약하면 어떡해, 버기, 나랑 나중에 탐사는 어떻게 하려고, 직접 가서 보기로 했잖아, 우리 남극도 가고 북극도 가야 하는데. 괜스레 핀잔을 주는 어투는 다정했다.

버기가 말했다. “네가 일정을 병신같이 잡아서 그런 거잖아.”

다시 대화가 끊겼다. “미안해.”라고 샹크스가 말했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극지방 탐험은 포기하기엔 어려웠는지 샹크스는 거듭 캐물었다. “어쨌든 같이 간다는 이야기지?”라고 묻자 버기는 너 하는 거 보고, 라고 얼버무렸다.

“아무튼 나 잘 거니까 말 걸지 마.”

굳어진 얼굴이 점차 풀어지는 광경을 보며 버기는 생각했다. 제 말에 일희일비하는 샹크스의 모습은 낯설었고, 그 점이 버기는 우습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저를 간호하느라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방학이 끝나 있었다. 그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지나친 처사라 여긴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라리 얼빠진 얼굴이라도 하고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편이 보기에도 훨씬 더 좋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버기 자신도 놀랐다. 하지만 그에게 차마 할 얘기는 아니었다.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버기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까스로 몸을 회복하고 나니 쌓인 일이 산더미였다. 접수 기한을 놓친 대학도 수두룩했고, 당장 자정까지 지원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큰소리는 쳐놨다만 이러다 아예 아무 데도 못 가는 것이 아닌지, 버기는 진땀을 흘렸다. 전부 샹크스 탓으로 돌리기엔 일찍이 준비하지 않은 저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렇게, 혹독한 회피의 대가를 치르는 동안에도 로저의 병문안은 꼬박꼬박 가곤 했다. 

“할 일이 많다면서 매번 이렇게 찾아와도 되는 거냐.” 레일리가 말했다. 

“옆집의 누구처럼 25군데 쓰는 게 아니라서요.” 버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병문안을 마치면 구내식당으로 내려오는 것이 당연해질 무렵이었다. 모처럼 세 사람이 같이 점심을 드는데, 대학 입시 준비가 화젯거리로 올라왔다. 대화 주제가 내심 불편했던 버기는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헛짓이었다. 레일리와 샹크스 사이에 몇 마디가 오고 간 후, 버기는 바닥에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버기는 샹크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학교 확정된 거 아녔어?”

“응?” 샹크스는 짐짓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버기를 쳐다보았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말했다. “아, 그게 말이야.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긴 안 가기로 했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어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통지하는 걸 깜빡하기도 했고.”라는 말만큼 버기의 화를 돋우는 것도 없었다. 

“언제까지였는데?”

“어?”

“언제까지였냐고.”

샹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솟던 분노가 잠잠해지자 이내 불안감으로 변했다. 간호에 열중하느라 깜빡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조기 전형을 통한 입학을 포기한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죽도록 후회하며 재수라도 하게 되면 어찌할 거냐는 우려에도 그는 덤덤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사람이 죽을 정도로 큰일도 아니잖아? 정말로 가야 한다면야, 뭐,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참으로 묘한 말이었다. 만약 말에도 밑그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다시금 기회가 주어질 거란 믿음이었다. 이토록 터무니없는 긍정적 사고만큼 명백히 과장된 것이 있을까? 기회가 오더라도 그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흔히 특정한 사건을 회자하며 그것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연쇄작용으로 인해 어떻게든 구체화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도, 바로잡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당장 눈앞의 선택에 집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거였다.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도대체 무엇을 염두에 뒀길래 이리 대범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버기는 의구심을 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가지 못한 길을 들먹이며 누굴 원망하려는 것이 아닌지, 행여 제게 비난이 돌아올까 봐 그는 조금 겁이 났다.

그리고 샹크스는 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쨌든, 우리가 직접 가서 볼 수만 있으면 돼.”라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사람분의 음료수를 더 사 오겠다고 했다. 마침내 둘만 남겨지자, 버기가 레일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레일리는 각기 다른 사정으로 인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로저조차 재입학을 했었다고 버기에게 털어놓았다.

“바보 샹크스.”

애석하게도 버기는 이 말 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창밖을 보니 날씨가 우중충했다.

집을 나서기 전, 버기는 샹크스가 빌려준 목도리를 챙겼다. 지난 해돋이 여행에서 빌렸던 것으로 돌려줘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바보 녀석은 제가 무얼 빌려주었는지 겨우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진열장에서 술도 한 병 꺼냈다. 샹크스가 했던 것처럼, 그는 술병을 목도리로 둘둘 싸맸다.

밖에서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가 제일 먼저 반응했고, 문을 여는 손이 다음이었다. 긴장으로 움츠러든 심장이 가장 늦었다. 어느샌가 그는 뒷마당으로 이어진 문을 지나 오두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22

 

버기는 애도의 시간을 가질 겸 술만 몇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위로의 말을 건넬 틈도 없이 샹크스는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며 빠른 속도로 빈 잔을 채우고 있었다. 이쯤 되니 아예 작정했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족한 것은 술뿐이었다.

병이 막 바닥을 드러낼 즈음, 버기는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그들은 플라네타리움 전원을 켜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천장에서 무수한 별이 쏟아졌고, 그들은 십여 분간 오두막 속 우주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버기는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슬쩍 떠보았다. 샹크스는 사망 신고며 상속 전문 변호사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학기 중에는 빈집이 되는 셈인데.”

“그렇지.”

잠시 후 샹크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 집을 팔까, 생각 중이야.”

“여길 팔겠다고?”

샹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행동에 버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버기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깐 망설이다가 샹크스가 입을 열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뒤이어 내뱉어진 말에 버기는 경악했다. 그는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이유를 짚어보다가 놀라서 되물었다. “의사가 되겠다고? 누가 시킨 거야?” 

“그건 아냐. 레일리 씨도 그렇고 가반 씨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래. 내가 어딜 가든 신경도 안 쓰실걸.” 

“너, 해양생물학자가 되려던 게 아녔어? 물론 둘 다 못하리란 법은 없지만, 아니다, 둘은 너무 다르잖아.” 

“다르지.”

“네가 그랬잖아, 샹크스. 언젠가 직접 가서 볼 거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래.”

대답은 명확했다. 끝맺음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버기는 지금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샹크스라는 것을 확신했다. 다만 그가 방금 한 “그래.”라는 말은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는 사람처럼 애써 무언가 회피하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거야? 쭉 돌아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냥, 갑자기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지금은 딱히 그럴 마음이 없달까. 안 그래도 1년 정도 쉬려고.”

“뭐?”

“입학을 미룰까 해.”

이미 계획은 세워져 있었다. 일 년 동안 정처 없이 떠돌며 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고자 했다. 설령 북극과 남극에 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대륙의 최남단 섬은 가볼 법했고, 너머의 세상을 알기 위해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앞으로 몇 년은 공부만 해야 할 텐데, 미리 추억이라도 쌓아놔야 덜 억울할 것 같아서.” 그는 말을 멈추고 나서 버기의 안색을 살폈다.

“돈 내고 고문을 자처하냐, 병신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조차도 쉬이 말하기 어려웠다. 대신 버기는 “안 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그러자 샹크스가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버기, 괜찮다면 너도 같이했으면 하는데.”

“내가?”

“그래. 이 세상에 내가 아는 버기는 단 한 명뿐인걸. 아니면 내가 모르는 버기라도 있는 거야?”

이어 샹크스가 말했다. “나와 함께 가자, 버기. 아주 흥미진진할 거야.”

“난 안 가.”

“어?”

“난 안 간다고.”

‘지금은 딱히 그럴 마음이 없다’는 말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버기는 문득 샹크스가 겁쟁이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인 간에 자신만만했던 그였기에 오랜 꿈을 버리고 간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굴한 사람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버기는 이내 생각을 고치고 말았는데, 샹크스가 제 입으로 꿈을 포기하겠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꿈을 버린다는 표현보다는 유보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가 가진 꿈들의 무게에 대해 익히 들은 바는 없었으나 그것 중 몇 개를 미루고 연기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셈이다.

버기는 그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그가 생각하는,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용기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샹크스의 용기 또한 그러했다. 그에 걸맞은 재주와 노력이야말로 모든 것의 가능성을 대변하고 있었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지 결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반면 저 자신은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그 어느 것도 견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친구를 축하해줘야 마땅했다. 게다가 옛정을 생각해서 제게도 의사를 물어본 것에 대해서 마냥 기뻐해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버기는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곁에 있던 네가 너무도 유망해서, 나는 진즉에 꿈 같은 건 버린 채였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는데. 수차례 되뇌본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와의 거리감이 사라지긴커녕 극복하기 어려워질 뿐이다. 그 순간 버기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 마디로 꿈에서 내쳐진 것이었다. 

꿈에서 내쳐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샹크스와의 격차는 바로 그 지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눈부신 재능도, 명석한 두뇌도, 근사한 외모도 아니었다. 여러 가지를 대보아 꿈조차 재고할 수 있는 여유. 여유로움은 오래 준비해 온 자를 위한 보상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버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샹크스의 그런 점을 동경했고, 한편으론 시기했다.

불현듯 버기는 제게 닿는 긴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 속에서 버기는 득달같이 쏘아붙이고 싶어졌다.

‘샹크스. 이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에서 말이야. 나는 네가 평범한 사람과는 남다른 길을 걷게 될 거라 생각했어. 안타깝게도 나는 너처럼 특출나지는 못하지만, 상황이 허락해 준다면 네가 나아갈 길을 지켜보고 싶었거든? 쥐뿔도 없는 나와 다르게, 너는 모든 게 다 주어졌으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할 수 있는데 왜 당장은 아니라는 거야?

함께 가자고? 좋아! 그렇다면 그다음은 뭐야? 일 년 후, 너는 의사가 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겠지. 운 좋게도 네게는 몇 년의 시간이 주어질 거야. 네 선택을 망설이다 뒤바꿀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될 거야.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구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의 궤도가 다르다는 것이 극명히 드러난 시점에서 더 이상의 소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버기는 찢긴 종이로 만든 새의 모습을 상상했다. 목이 꺾이고, 꼬리가 부러지고, 날개는 구부정한 데다, 안쪽 겨드랑이까지 살점이 뜯겨 뼈가 드러난 새. 은박의 껌종이새가 그러했듯이, 정성껏 접어보아도 이튿날 가루만 남긴 채 사라질 운명이라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추잡해 보일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새빨갛게 칠해진 N극이 실은 덧칠된 환상에 불과하다면, 고장난 나침반 같은 새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무참해지는 셈이다. 

수년 전이라면 아마 그는 침울해져 울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버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너랑 안 간다고. 왜, 쫄았냐? 멍청아?”라고 외쳤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네게 대체 뭐였던 걸까? 내가 잘못 본 거야? 다른 것은 제치더라도 너를 알아본 내 안목만은 남들에게 자부하고 싶었는데, 너도 결국 그 정도뿐인 인간인 거야?”

돌이켜보면, 그는 샹크스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어찌나 진심이었는지, 보이는 마음의 단면보다 더 많은 감정의 공간이 빼곡히 접혀 있다는 것을 매 순간 잊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바치려 든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버기는 그것이 두려웠다. 서로가 아니어도 되는 삶을 감히 제가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돌연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분노에 몸이 떨렸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기는 문 앞으로 걸어갔고, 샹크스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우산을 건네주려고 했다. 그러나 버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발 끈을 동여맨 즉시 그는 밖으로 나갔다. 샹크스도 따라나섰다.

그렇다, 조금 전의 말을 번복한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샹크스는 버기의 말을 한낱 변덕으로 받아들일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어야 했다. 이제는 어긋난 생각의 실타래가 풀려야 할 때였다.

처량하게 침묵하던 두 눈에 푸른 불꽃이 일었다.

“너 잊지 않았겠지? 옛날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것도, 이번에 더럽게 아팠던 것도, 죄다 너 때문이잖아!”

“···버기.”

“이젠 진짜 지겹다. 지긋지긋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버기. 일단 들어가서,”

“나 아직 용서 안 했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 나 만나게 된대도 아는 척하지 마. 나도 모르는 척할 테니까.”

정도를 넘어선 고통은 뇌를 포함하여 온 신경을 마비시킨다는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다. 즉, 감정에 불이 붙어 영혼마저 압도당하게 되면, 도리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와 유사해진다는 의미였다. 정확한 묘사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다 못해 버기는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대로 목이 메어 말문이 막혔다.

고장난 나침반은 빙글빙글 제자리만 돌았고, 그에게 우뚝 설 공간이란 없었다. 높은 곳에 난생처음 디딘 발처럼 그는 연신 비틀거렸다.

그는 등을 돌려 달아났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그는 계속 달려갔다.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는 그를 둘러싼 주변의 것들을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어느 것도 온전히 그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주변에는 빨간 머리 소년을 비롯하여 난도질당한 기억도 포함되어 있었다. 때늦은 후회도 일부였다.

그러므로 버기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선물로 받았던 열쇠를 멀리 떨어진 도랑에 버릴 수 있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바닷가 산책도 하지 않았다. 수족관에도 가지 않았다.

더 이상 종이접기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