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밤 11시 38분. 온지란은 연왕수에게 11번째의 전화를 걸기 전에 도어락 누르는 소리를 듣고 휴대전화를 버리듯 현관문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왕수네 팀은 오늘 회식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온지란의 불안에 불이 켜졌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한 사회생활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2차에 안 가고 곧장 집에 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답이나 연락이 없이 1시간이나 흐른 일은, 온지란의 유리 같은 깨지기 쉬운 성정을 달궜다.
현관문이 닫히고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장치는 이상 없다는 뜻으로 삑삑 소리를 냈다. 그대로 신발장과 등 뒤의 현관문이 마치 침대인 것처럼 연왕수는 주저앉아 누워 늘어지게 말했다. 언니이, 나 왔어요오.
술에 취하다 못해 알콜에 절여지고 또 연락이 끊긴 채로 귀가한 연인을 내려다본 온지란은 굳은 표정을 곧장 웃음으로 바꿨다. 지금 당장은 못난 연하 연인에게 다가가면서도 오랜만에 날 선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연왕수는 왜 이러는 걸까? 주마등보다 못한 최근의 행적을 간략하게 훑어봐도 그럴듯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연왕수는 셔츠나 블라우스가 구겨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와 일으키려 하는 온지란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거나하게 취한 사람답게 꼬인 혀로 내뱉는 말들은 분명 뇌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것만큼 진심인 말이 연왕수에게 더 있진 않았다.
"언니이, 우리 지이란 어언니이, 내가, 너무너무, 사랑해요!"
"…수야,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왜 이제 왔어?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연락도 안 받고."
붉게 빛날 정도로 열이 잘 받은 마음을 집게로 잡고 늘려 이리저리 모양을 만드는 공예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온지란은 늘 깨부수기만 하는 자신의 마음속 유리 공예를 그만둔 지 오래였다. 대화해 봤자,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을 거고, 온갖 응어리진 마음은 어찌 됐든 다음날에 풀 수 있었다. 지금은 빨리 재워야지. 온지란은 이런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그대로 물에 담그는 쪽을 택했고, 이건 곧 연왕수의 방식이기도 했다.
일어나 봐, 우리 후배, 빨리 가서 자자, 일단은. 연왕수는 대뜸 온지란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고 걱정하듯 멋쩍게 웃고 있는 온지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툭 말했다. 나 지금 화났다고, 왜 말 안 해요? 온지란은 취하긴 했어도 늘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연왕수에게 곧장 그 마음을 드러냈다. 이건 연왕수가 온지란을 사랑하면서 체득한 소통 방식이었다. 숨기고 참기보다 그대로 들이받으면, 싸우는 과정이 있을지 몰라도 상대방에게 닿을 수 있었다. 이제 온지란은 웃지 않은 채로 말을 쏟아냈다.
"그럼, 뭐 때문에, 왜 이렇게 날 불안하게 해? 지금 돌아가고 있다고, 메시지 하나라도 못 할 정도였어? 혹시 회식이 아니라 다른 데 갔던 거니?"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더 조용한 탓에 잘 정돈된 실타래에서 탈출한 실이 계속해서 길게 늘어지고, 너무 멀리 나온 걸 깨달아 다시 원상태의 실타래로 돌아가려 해도 엉키고 꼬인 탓에 돌아갈 수 없는 얇은 실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일 테다. 연왕수는 웃으며 참는 온지란도 좋았지만, 자신에게 솔직하게 화를 내는 온지란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 기나긴 응어리를 마주한 것에 미안해하면서도 오해를 풀기 위해 말없이 어깨에 메고 온 자신의 토트백을 빼내곤 거꾸로 쏟아내 털어냈다.
연왕수의 기본적인 소지품은 온지란이 기억하는 것 그대로였다. 지갑, 립스틱, 손수건, 휴대전화, 업무용 수첩 따위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소지품만큼의 수량으로 토트백에서 쏟아진 어떤…성인 여성의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인형들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주먹 사이즈 정도의, 촉감이 보들보들한 푸른 눈의 흰 고양이 인형이었다.
"회식한 식당 앞에…언니 닮은 고양이 인형 뽑기가 있어서, 언니 잔뜩 주려고 뽑느라 늦었답니다아."
"…."
"딱 하나만 뽑으려고 했는데, 언니가 잔뜩 뽑아달라고, 인형뽑기 기계 안에서 말했잖아…그래서…."
"………."
조금만 밟으면 금방 퍼석 소리와 함께 깨질 게 뻔한 얼음판 같은 온지란의 표정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붉으락푸르락 변해가자, 연왕수는 손뼉을 짝 치고 좋아라 웃었다. 흔치 않은 표정에, 흔치 않은 말을 곧 내뱉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고 또 어물쩍 넘기기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일상은 누군가의 취중 귀가 하나 때문에 끝나지 않는다. 그럴 위험은 더 없었다.
"온 선배, 화 잔뜩 났네에! 미안해!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느저써요…."
"연왕수!!"
온지란은 결국 목소리를 높여 화를 냈고, 연왕수는 한동안 온지란 대신 온지란과 닮았다고 주장하는 고양이 인형 8개와 함께 잘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