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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로 사랑은 폭력과도 유사했다. 그것은 원치 않는 시간대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같았다. 불쾌함과 충격과 당황스러움이 와닿을 때 남는 얼얼한 감각. 이윽고 찾아오는 고통까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나루호도는 현장에서 보지 못했던 증거품을 보고 싶다고 했고, 미츠루기는 청 외 반출이 어렵다고 말하며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증거품을 찍은 사진을 서류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를 부른 이유는 사건의 진실을 함께 찾고 싶어서였기도 했고, 열중하는 나루호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기도 했어서였다.
진작 미츠루기가 분석을 마친 물건들이었다. 내심 나루호도가 어떤 진실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고,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도 흥미가 있었다.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지작거린 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추측을 내놓고는 했었다. 이것저것 묻지 않아도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 묘한 쾌감을 주어, 침묵 속에서 무언의 대화라도 나눈 것처럼 기분이 좋았던 것을 미츠루기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날도 비슷한 의견의 일치를 기대하고, 검사는 증거품을 먼저 꺼내어 보였다. 나루호도는 비닐 팩에 봉해져 있는 칼날의 끝이 살짝 부러진 흉기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물건이 아닌 미츠루기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멋있네.”
“……추가로 줄 정보는 없다만.”
“아니, 진심으로. 좋아서 그래.”
싱글싱글 웃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나루호도의 시선에, 미츠루기는 이상하게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변호사가 전략을 바꿨나 생각도 했다.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이상한 기색은 없었다.
“……?”
“좋아한다니까.”
미츠루기는 의아한 얼굴로 나루호도를 바라보았다. 나루호도의 얼굴에는 여전히 일말의 거짓도 가장도 아부도 없었다. 말끔하게 평소의 기세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미츠루기는 굉장히 창피해졌다. 대체 왜 업무 협조를 위해 부른 오랜 친구로부터 낯 뜨거운 말이나 듣고 있어야 할까? 정교한 괴롭힘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미츠루기의 마음은 들썩였다. 감정을 정리할 새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집무실에 일순간 찾아온 정적이 불편했다. 방금 들은 말이 장난인가 싶어 생각이 자꾸만 꼬였다. 그는 결국 들고 있던 펜을 탁 내려놓았다. 잡념을 끊어내듯 말을 토했다.
“…나가게.”
“…왜? 아직 덜 봤는데.”
“그런 말이나 듣자고 부른 게 아냐.”
그의 눈썹 사이가 찌푸려졌다.
“칭찬도 못해?”
미츠루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자네는 아무에게나 그런 칭찬을 하고 다니나?”
말을 끝낸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나루호도를 향했다. 나루호도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잔뜩 쪼그라들어 풀이 죽어서는 말했다.
“아니, 아무에게나 하진 않지만… 입 다물고 보면 될까?”
그제야 미츠루기는 마음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의 눈치를 살피며 증거품을 검토했다.
하지만 나루호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멋있고… 사실은 귀여워서 좋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는 그 말을 참았다.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나는. 솔직한 것도 죄인가? 여전히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내심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워 올리며 증거품을 만지작거렸다.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집무실을 울렸다. 미츠루기는 그날따라 뒤돌아선 채로 연신 헛기침을 하며 책장의 문서를 뒤적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나루호도를 지켜보다 대화라도 나누거나, 적당히 연하게 우린 차라도 가지고 왔을 일이었다.
물도 한 잔 주지 않는 것은 좀 너무하네.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의 냉랭한 모습에서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일에는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들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은 싫어했다. 백 번을 말해도 백 번 모두 진심이었다.
한 번 더 보러 와도 될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미츠루기는 깊게 후회했다. 다시 찾아온 나루호도는 영 속이 시원하지 않은 듯 현장에서 발견된 흉기를 들여다보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고 잠시 흠칫했다가, 부검 결과서를 다시 들춰보는 등 산만하게 오락가락했다. 미츠루기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명백한 사건인데 결론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영 이상했다.
“아직 더 볼 게 남았나?”
“…사실 굳이 오늘 오지 않아도 됐어.”
“못 본 동안 머리가 나빠졌나 했다.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군.”
빈정거리는 말에 나루호도는 미츠루기를 올려다보았다. 씩 올라간 입꼬리와 지긋이 내리 깔아 속눈썹 그림자가 우아하게 드리운 두 눈가가 보였다. 그를 처음 법정에서 마주했을 때는 어쩌다 저렇게 변했을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한 척을 하고 있어도 결국 본질은 학급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해주던 그 미츠루기였다. 나루호도의 앞에서 고개를 돌리며 ‘너에게만큼은 변호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고 토해내듯이 창살 너머에서 고백하던 친구. 그런데도 다시 살아 돌아와 어떻게든 나루호도의 소중한 조력자를 살려내고자 함께 협력해주었던 동료.
“그러게. 사실 어제의 계속을 하고 싶어서 온 거라서.”
“…또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
“정말 좋아하는데.”
미츠루기는 시선을 피했다. 똑바로 보는 동그란 두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또 얼굴이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귀가 뜨끈해지고 빨라진 혈류가 두 볼을 데웠다. 어째서 이렇게 면역 없이 열이 피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미츠루기는 뜨거워진 귓가를 손으로 감싸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던 나루호도를 직접 두 팔로 일으켜 세운 후 집무실 문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완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나루호도는 그대로 끌려 나가 문밖에 세워졌고, 미츠루기는 일부러 그의 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잠금장치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쾅쾅 났지만 아랑곳 않고 흐트러진 탁자 위를 정리했다.
여전히 두 볼이 따뜻하게 열을 내고 있었다. 그는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뭐라도 마시면서 진정해야 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집중력이 좀 떨어질 것 같아 머리를 흔들었다.
우정인지 친애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법정 밖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미츠루기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증거물 중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그걸 몰래 챙겨갈 정신이 있었구나, 변호인…
항의 전화를 걸자 “어? 그런 걸 실수로 가져왔던가?” 하는 느물거리는 대답만 들려왔다. 말하는 어투에 장난기와 웃음기가 섞여 있어 미츠루기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그는 예상했을 것이다. 미츠루기가 또 대화를 피하려 할 것임을. 그리고 강경 수단을 쓰지도 못할 것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나루호도를 집무실로 부른 것은 미츠루기였기 때문이다.
“사무소로 오면 줄게. 지금 바빠서…”
“……바쁜 거 맞나?”
“응, 바빠. 으악, 서류가 다 쏟아졌네… 끊을게! 올 때 연락해!”
우당탕탕 소리가 나고 순식간에 뚝 끊어진 전화를 미츠루기는 괜히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알아채기 쉬운 연극이었지만 더 추궁하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외근용 가방을 챙겨 나루호도의 사무소로 향했다. 더 이상 피할 수는 없었다.
“진짜 왔네.”
“불러 놓고 무슨 소린가.”
“그렇지… 편하게 앉아. 어제 급하게 네가 나를 쫓아내는 바람에…”
“말해두지만, 또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바로 돌아가겠네.”
“왜? 나는 진심인데. 설마 너, 호텔 최상층 레스토랑이 아니라 화가 난 거야?”
“……”
미츠루기는 잠시 끓어오르는 화를 참았다. 대체 이 남자는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속물적인 이벤트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트 장식이나 양초나 풍선이나, 반짝거리는 조명도 필요 없었다. 다만 청 내에서 증거물 따위를 뒤적거리다 고백을 받는 게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나루호도만큼 법정 안과 밖의 모습이 달라지는 사람도 없었다. 의심스러운 증인을 끈질기게 몰아붙이다가도 판결이 내려진 후에는 내가 그렇게 심했어? 하며 나사 빠진 얼굴로 헤실헤실했다. 법정 밖에서의 그의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웃는 나루호도의 말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기분에 따라 한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자네는 법정에서 내가 갑자기 고백한다면 어떤가?”
“기쁘긴 한데, 여기에선 좀… 아니지 않나? 라고 말할 거 같은데.”
“그게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나루호도.”
“그거랑 다르지. 법정은 공적인 자리고, 네 집무실은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업무 장소라는 점에서 같다. 청 내에서 시시덕거릴 만큼 한가하지 않아.”
“융통성 없어. 정말로… 손톱도 안 깎아?”
“청결을 유지하는 일은 집에서 해도 충분하지 않나? 설마 자네는 사무실에서 그런 일을 하나?”
핵심을 찔러오는 말에 나루호도는 입을 다물었다. 툭툭 손톱을 깎는 소리에 마요이에게 나루호도 군! 제발 그런 건 집에서 하고 와! 라며 잔뜩 혼났다는 것을 실토할 수 없었다.
나루호도는 만일 미츠루기와 같은 집무실을 가지고 있다면 책상 위에 구둣발부터 먼저 올려놓았을 것이다. 뒤로 쏟아지는 햇살에 등을 데우며 스르르 졸기도 하며 시간을 죽였겠지.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서 묵묵히 일만 한다니,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한편으로는 질 좋은 원목 책상 아래의 드넓은 공간, 사람 하나 정도는 충분히 숨길 수 있을 법한 자리를 보자마자 나루호도는 미츠루기를 거기에 구기어 넣고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을 시작하는 상상을 했었다. 절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잠시 망상의 세계로 떠난 나루호도를 미츠루기가 턱 붙잡았다.
“설마, 정말로 진심인가?”
“그렇다니까. 좋아한다고. 여태 뭘 들은 거야?”
“……자리를 마련해주면 되나?”
“자리? 마련? 그런 게 필요해? 지금 여기서도 되는데?”
미츠루기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TPO라는 말도 모르나?”
“옷이 맘에 안 들어서 그래…?”
“아니. 슈트는 어느 때나 정중한 복장이야. 다만…”
나는 일하다가 고백을 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미츠루기는 그 말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리하여 나루호도는 또 반도 호텔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양식당 구석에 위치한 야외 테라스 자리였다. 테이블은 단 하나뿐이었다. 하얗게 깔린 테이블 매트 위에 있는 것은 간단한 핑거 푸드와 화이트 와인부터 레드 와인까지 색깔과 포도 종류를 달리하여 놓인 테이스팅용 잔들이었다. 조금씩 마시면 적절히 취기가 돌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둘만의 파티용 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생맥주 없어?”
나루호도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병이라도 좋으면 주문하겠지만.”
미츠루기는 탄산 방울이 아래로부터 톡톡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비우며 말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아무 말도 못 하겠어.”
“…그거나 이거나 같은 알코올이야. 집무실보다 이쪽이 더 무드는 좋지 않나?”
무드야 물론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테라스 주위로 따뜻한 빛의 LED 등이 반짝거리고, 밤하늘은 드넓었으며, 좋아하는 분위기를 세팅해놓고 눈을 반짝거리며 와인을 마시는 미츠루기도 여전히 멋있었다.
그렇지만 나루호도는 이렇게, 마치 미츠루기 자체를 넓게 펼쳐 놓은 듯한 곳에 오면 굳어버리는 자신의 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상 바깥의 공간이라 그런지 낯섦 그 자체에 압도되는 것 같았다.
위축되는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고자 고급스러운 테이스팅 잔을 맛도 모르면서 쭉쭉 목구멍 너머로 부어 넣었지만, 역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츠루기는 주량이 그렇게 세지도 않으면서 괜히 술만 마셔 없애는 나루호도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테이블 아래서 꺼내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뭐야 이거?”
“고백을 하려면 꽃다발과 반지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나?”
“영화를 너무 본 거 아냐?”
“그런가…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증거품을 던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우리 사이에 언제 예의를 챙겼다고…”
“보통은 이런 걸 준비한다던데. 나도 한 번쯤은 해보려고.”
“……너 설마 여기서 먼저 말할 거야?”
“네가 안 하면, 나라도 해야지.”
나루호도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는 미츠루기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나치게 멋있어서 또 짜증이 났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나타나는 녀석이었다. 그러면서 담당 검사가 아니라며 정보를 줄 수 있다고 선심을 쓰기도 했다.
마요이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데 결정적으로 미츠루기의 도움을 받았다. 콤비 플레이가 훌륭했던 덕분에 그녀의 목숨도 지킬 수 있었다. 그 사건을 생각하면 발끝부터 머리까지 저릿하게 전율이 올라왔다. 믿을 수 있는 파트너가 같은 법정에 선다는 말의 의미를 뼛속까지 실감하게 되었던 일이었다. 미츠루기에 대한 수상한 소문과 언론 기사를 접하고 변호사가 되기를 결심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꽃과 반지는 좀 부담스러웠다.
“아니, 내가 할 거야. 하게 해줘.”
“그럼 가져가서 네가 준비한 것처럼 허세를 부려 봐.”
“……”
나루호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못하겠으면, 내가 하지.”
“……안 하면 안 돼?”
“도망가는 건가?”
“오늘 말해버리면, 이걸로 끝이야?”
잠시 두 사람 간에 침묵이 흘렀다. 나루호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츠루기는 한숨을 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자네는 대체 나에게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할 생각이었나? 한 번이면 됐지.”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큰 차이였다. 미츠루기는 한 번의 무거운 고백을 주거나 받고 싶었다. 일상생활 중에 속삭이는 가벼운 고백에는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심성의껏 장소를 찾고 적절한 분위기를 마련했다.
거기서 한 번, 인생의 거사를 치르듯 끝내고 나면 충분하리라고 여겼다. 도장을 찍듯이 확인한 후에는, 향후 마음이 변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계속되는 1차원적인 단계라 보았다. 그에게 진심은 한 번만 확인해도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한편 나루호도는, 좋아하는 마음은 한 번의 점이 아니라 쭉 이어지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의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어지는 것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된다. 심지어 미츠루기는 언젠가, 모든 연결을 끊어내려 서류 상으로 죽음을 택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나루호도는 한 번의 고백보다는 열 마디의 애정 표현 쪽을 선호했다. 계속해서 믿음과 애정을 말하고 아낌없이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거짓 하나 없이 떳떳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비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흘러넘치는 말들을 참지 않고 토해냈을 뿐이었다. 좋아한다고, 멋있다고. 화를 낼까 눈치를 보고 있지만, 사실은 꽤 귀엽다고.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않아?”
“충분하다.”
“정말?”
나는… 부족한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한 듯 눈썹 사이를 좁히며 애절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미츠루기는 과거 집에서 키우던 대형견을 떠올렸다. 산책을 가지 못하는 날이면 똑같이 애절한 눈빛을 보냈었던 솔직한 아이. 그 모습이 맞은편의 오랜 친구와 겹쳐, 미츠루기는 순간 그를 쓰다듬을 뻔했다. 필살의 자제심으로 참았지만.
“…으, 역시 못 하겠어. 여기서는 무리야.”
“그럼 내가 하지. 나루호도, 나는 너를…”
“아니… 싫다니까. 내일 내가 할게!”
“내가 오늘 받고 싶다고 말하잖아.”
자네는 말을 귓등으로 듣나? 일순 차가워진 미츠루기의 분위기와 특유의 날 선 표정에 나루호도는 흠칫 놀랐다. 확 당겨진 넥타이에 손쓸 틈도 없이 미츠루기와 거리감이 좁혀졌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고. 검사는 코 앞에서 잔뜩 당황해 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나루호도를 보며 생각했다.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어쩌자는 건지 짜증이 치밀었다.
“역시, 자네는 나를 놀리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니라니까. 그냥… 나는 언제든지 네게 전하고 싶은 거야.”
“굳이?”
“응, 굳이.”
조금 취기가 올라 붉어진 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루호도에게서는 거짓이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아, 미츠루기는 쥐고 있던 그의 넥타이를 그제야 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호의와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 반박할 수 없는 진심이 보였다. 반짝반짝 빛이 흩어지는 것 같은 미소와 함께.
“왜?”
“왜, 라니. 내일도 좋아할 건데, 거기서 이유를 찾아?”
“……언제든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지 않나.”
“적어도 내가 계속 이렇게 말하는 한,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에는 분명히 힘이 담겨 있었다. 한 점의 거짓도 없으며 나루호도는 전심전력을 다해 미츠루기에게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말에서 전해져 왔다. 예상치 못했던 증거를 마주했을 때처럼 온 몸이 떨렸다. 수많은 ‘좋아해’가 모여 하나의 진실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고급 호텔의 분위기와 레스토랑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설령 거기가 살인 사건의 현장이더라도 늦은 오후의 상급검사 집무실이라도 느슨한 변호사의 사무실이더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츠루기는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면, 규칙을 정하자.”
“응. 못 지킬 내용만 아니라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미츠루기는 나루호도의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네 퇴근 시간을 기다려야 해? 일 중독 같으니.”
변호사는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앉아 있던 의자를 자신도 모르게 덜컥거렸다. 그제야 검사는 그를 조금 먼 곳을 보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어려운 말을 자아내듯이 망설이면서.
“나라고 업무 시간 내내 집중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엉망진창이 되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나루호도는 미츠루기가 고개를 돌리며 귀 끝을 불긋하게 물들인 채 부끄러운 듯 내뱉은 말에 역시 네가 멋있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귀여워서 좋아한다고 말할 뻔했던 것을 겨우 참았다.
미츠루기가 말을 끝내고 옆에 있던 물잔을 급히 들이켜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고 있었다. 나루호도는 슬쩍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뒤로 둘은 나름의 합의를 보았다. 나루호도는 미츠루기를 볼 때마다, 덜컥 심장이 요동칠 때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물론 최대한 업무 시간을 피해서였다. 미츠루기의 출국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다음 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덜컥 엄습했다. 더더욱 안달이 나 몇 번이나 표현을 거듭했다.
미츠루기는 나루호도의 표현을 참다가 참다가 결국 참을 수 없어진 날이 되면 이런 저런 경로로 알게 된 좋은 곳으로 그를 불렀다. 고심 끝에 고른 레스토랑, 공원, 천문대, 수족관 등이었다. 대체로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노렸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도 없을 수 있어? 이러다 너에게 살해당하는 것 아냐? 하며 나루호도가 농담을 하면 미츠루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정색을 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미츠루기는 누구에게도 과시하고 싶지 않았다. 은밀하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완전 범죄를 꿰뚫어 일말의 증거를 찾아내어 불완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누구보다도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미츠루기였다.
손과 손을 잡을 듯 말 듯 스치고, 속삭이며 자네가 좋다고, 일부러 귓가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CCTV의 사각을 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번 만날 때마다 결정적인 곳에서 딱 한 번의 고백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나루호도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너어는 진짜,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불의의 공격을 당해 발을 동동 구르는 변호사를 남겨두고 미츠루기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루호도를 향해 고개를 돌려 따라오지 않으면 두고 가겠다만? 하고 말하며 미츠루기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보였다. 어두컴컴한 공원의 가로등 아래서도, 수족관의 새파란 배경 아래서도, 천문대의 찬란한 별빛 아래서도 오롯이 둘 뿐이었다. 완전 범죄였다.
며칠 뒤의 나루호도 법률 사무소였다. 변호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외근 준비를 했다.
“어디 가?”
사무실 구석에서 TV를 보던 마요이가 나루호도에게 물었다.
“데이트.”
“검사국 가는 거 아냐?”
대수롭지 않게 돌아온 마요이의 말에 나루호도는 멈칫했다. 감이 너무 좋은 것도 때로는 무섭다. 생각 없이 해본 말인데 지나치게 핵심을 꿰뚫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어쩐지 나루호도는 꽤 부끄러웠다. 짐짓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그는 마요이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발걸음이 가볍잖아. 친구 만나러 가는구나 싶어서.”
“……”
“나루호도 군, 진짜 데이트야?”
그러면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혼잣말에 뒤이어 당황하는 마요이의 눈동자를 앞에 두고 나루호도는 고개를 저었다. 깜짝 놀란 마음을 쓸어내렸다. 들킨 줄 알았네. 뒤돌아 사무소를 떠나는 나루호도의 동작이 지나치게 민첩했다. 마요이는 그 모양새가 도망가는 것 같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던 TV로 시선을 돌렸다.
나루호도는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삐 걸어 검사국에 도착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12층에 도착하자 벌렁거리던 심장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데이트, 가 맞기는 한데 또 아니고… 여기서는 안 하기로 했는데… 또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나루호도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뭐 하나?”
귀에 익은 중저음이 뒤에서 들렸다.
“어라, 이제 왔네…”
“공판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미츠루기를 따라 나루호도도 들어갔다. 창문 너머로 환하게 내리 꽂히는 햇살과 여느 때와 같이 가득 쌓인 서류들이 보였다. 미츠루기는 팔 사이로 끼고 있던 서류 묶음을 먼저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난 후, 몸을 돌려 나루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절했지? 상대측 변호사가 바뀌었던데.”
“응. 증거품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사이코 록이 명백하게 보이지 뭐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알아챘다니 다행이군. 근데 왜 문 앞에서 그러고 있었나?”
“……오기 전에, 마요이에게 데이트 간다고 말했거든.”
“…제정신인가?”
“응. 그야 틀린 말은 아니고…”
마요이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뜻을 짧게 줄여 말한 수준으로 알아차려 주었으니까, 라고 덧붙였지만, 미츠루기는 당황한 속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업무 시간 외 표현을 자제하라는 규칙에는 단서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가급적 주변인에게 알리지 말 것. 법정에서 싸울 때 약속 대련으로 의심받기 좋으니까.
“너는 표현을 조금 더 생각해서 할 필요가 있어, 나루호도.”
“그러게. 이번엔 내가 경솔했던 것 같아.”
“웬일로 산뜻하게 인정하네. 이상한데?”
“그야 나도 놀랐으니까…”
이상한 관계였다. 서로 고백을 일삼으면서도 교제한다고 공표하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교제에 가까운 정도를 유지하며 감정을 저울질했다. 이건 비밀 연애인가 싶다가도 그런가? 하고 물어보면 서로 대답을 못했다.
표현 방식이 상호 간에 다른 것은 인정하면서도 막상 한쪽에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답을 피했다. 상대를 쫓아가는 것은 바라던 바이지만 정작 쫓기는 쪽이 되면 무서워졌다.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처럼 좋아한다는 말로 한없이 핑퐁을 했다.
우정이라기엔 지나치고, 사랑이라기엔 아직은 가벼웠다.
“미츠루기.”
“응?”
“아직 일을 시작하기 전이지?”
“……내일 공판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잠시만.”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에게 다가가 한쪽 손을 지긋이 잡았다. 관절은 딱딱했지만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없이 잡고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어서 아쉽다는 듯 손톱을 세워 손바닥을 조심스레 긁다가 간지러워, 하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놓았다.
“응, 오늘의 데이트 끝.”
“……이 정도로?”
“일하는 시간엔 안 된다며.”
“그야 갑자기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걸 자제하라는 거였지.”
“계속 잡고 있으면 제대로 집중 못 할걸.”
“……”
그건 그렇지만. 미츠루기는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얼마 남지 않은 출국일을 생각하면 역시 아쉬웠다. 해외로 나가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망설일 수도 없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인수인계의 순간까지 매듭을 지어야 했다. 책임감도 없이 하던 일을 방치하고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시간.”
“응?”
“생각해보면, 바쁘든 안 바쁘든, 늦든 빠르든, 항상 만나주고 있잖아.”
“소중한 친구니까.”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해.”
시간을 준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삶의 일부를, 순간의 모든 것을 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고 나루호도는 생각했다. 바쁘기 짝이 없는 분초를 쪼개어 애틋하게 나눈다. 어디든 함께 있다면 충분한 자신과 달리 정성과 시간을 기울여 장소와 무드를 연출한다.
그러므로 나루호도는 다시 한번, 법조계와는 백만 광년의 거리가 있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예술의 이론과 실제를 배우고 지난한 연습 끝에 외운 대사와 몸과 얼굴에 익힌 연기를 관객들 앞에서 상연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천직으로 삼으려고도 했었다. 다만,
지금 그와 대등하게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법시험 공부에 매진했던 기나긴 나날들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겨졌다. 틀리지 않았다. 그때의 ‘미츠루기 군’도, 지금의 미츠루기도 사랑스러웠다.
멀리 떠나도 곧 돌아올 것이리라. 나루호도는 근거 없이 확신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 동안, 무한히 표현할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값싼 말이라도 좋다면 아낌없이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장소는 어디서든 좋았다. 때는 조금 가려야겠지만. 나루호도는 내심 흐뭇해졌다.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 특별한 관계였다.
그러니, 마음껏 '좋아해'를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