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s

Work Header

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Relationship:
Characters:
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6-06-09
Words:
497
Chapters:
1/1
Kudos:
5
Hits:
42

날갯조각

Summary:

경우에 따라 볼품없어 보인다.

Work Text:

  명단에 적힌 이름 하나는 기억의 어딘가 처박힌 것들 중 하나였지만, 그는 이번 연구의 목적이 아니다. 그저 지루했던 시기에 생각한 대로 흘러갔던 초기 실험이라 부를 수 있었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살랑이며 날아가 준 덕분에 혼돈 에너지를 증명해 준 인물이라는 사실이 계속해서 그를 가치 있게 만드는가? 로렌츠 버터플라이는 '우연히' 전 제노 동료였던 라리사를 다시 마주쳤을 때, 이와 어울리는 방정식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상대방이 다 떠들기를 기다렸다.

  그는 어엿한 재건의 손 일원으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소매 끝이나 군데군데 해진 제노 군복을 입고 있었다. 검정 액체의 가면이라도 쓰고 있었으면 재료 수급이라는 면에서 좀 더 눈여겨볼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상황으로 진행된 연구는 오차 범위 내로 무사히 종료되어 특수한 도료와 결괏값을 얻은 마르그리트에게 라리사와의 재회는 발목을 붙들린 것과 같았다.

 

  "무슨 생각해, 마르그리트?"

 

  언제든 눈웃음을 지어줄 것만 같은 선한 인상과 그와 어울리는 밝은 빛의 머리칼 밑으로, 작은 크기의 화기 하나가 그의 손에 붙들려 있었고, 언제든지 발포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려 있었다. 주위는 이 둘만을 위한 무대처럼 고요했다. 라플라스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재건의 손 졸개와 조우했지만 스치듯 피해 갈 수 없는 이유가 끼어든 것이다. 로렌츠 버터플라이는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에 흥미로워하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냥. 네 선택이 궁금해지네. 아직도 갈림길에 서서 고민하는 거야?"

 

  상관을 쏜 뒤로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해오며 여기까지 왔는지, 나비가 일으킨 바람으로 어떤 수렁에 빠졌는지 지켜봐 주겠다는 아량 넓은 도발에 결국 과거의 탈영병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접한 거리의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거나 쏘는 행위에 라리사는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순간적인 충동에서 벗어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총구는 여전히 단단하게 고정되어 망설임 따위 보이지 않았다.

 

  "기억해? 그날 있었던 모든 일…. 나는 후회하지 않아.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야, 마도학자 동포들을 그렇게 갈아 넣는 곳의 실상을 알게 됐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망설이지 않아."

  "그래? 그때처럼 같은 상황에 날 친히 밀어 넣는 걸로, 나에게 은혜라도 갚으려고?"

 

  여기서 총구나 눈동자가 흔들린다면 실망스러웠겠지만, 라리사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앤이나 레이첼이 으레 짓던 작은 근육의 집합체는, 감정이라는 추상적인 변수와 결합해 보는 이로 하여금 긍정적인 기호를 준다.

  그럴 리가. 대화로 인해 일이 분 지연되었던 일은 예정대로 이뤄졌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약실이 한 칸 회전한다. 탕! 또르르, 탄피가 힘없이 돌바닥 위를 소리 내며 뒹굴었다. 그 뒤로 더 묵직한 소리, 사람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라리사는 쓰러진 시체에도 남은 탄환을 부지런히 쏴댔다.

  고루고루 옛 전우의 이마나, 어깨, 가슴팍 등등 여섯 개의 구멍이 새겨지고 울컥 흐르는 붉은 액체와 무정한 표정은 퍽 어울렸다. 틱틱거리는 소리로 알 수 있듯 더 쏠 수 없게 되자 라리사는 마르그리트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나도 너처럼 이런 짓을 해서 생기는 일이 뭐가 될지 궁금해졌거든."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모든 걸 뿌리 뽑고 제노를 떠났다. 탈영병의 신세로 그는 뭘 하려고 했을까. 깊은 진창 속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와중에도 라리사는 마르그리트의 행적을 알음알음 좇았다. 나비가 일으킨 폭풍우 속에서 보통 휩쓸려 죽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운 좋아 살아남는 경우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흉터만 남은 아이에게 알려주듯, 활기찬 알림음이 터져 나온다. 좌표 추적 완료! 위치 변환 완료! 그저 길가에 쓰레기처럼 방치된 상자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고 픽 꺼졌다. 그러자 라리사의 눈앞에는 총알을 제외한 모든 게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 돌바닥 위에는 액체의 음영만이 보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라리사 너는, 과학자보다 군인이 더 어울려. 그리고 너의 밑바닥은 이게 전부인 듯해서 실망이야."

 

  로렌츠 버터플라이는 그저 멍하니 서 있는 재건의 손 일원을 지나쳐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