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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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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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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26-06-16
Updated: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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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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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존] Rex Mundi

Summary:

1199년 4월, 사자심왕은 기적적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같은 시간, 영국에서는 왕세제 존이 쓰러진다.
- 형님이 살아남고 동생이 죽는 어긋난 시간선의 이야기.
- 커플링 표기는 있지만, 로맨스 요소는 희박합니다. 조금 진한 형제애의 경계에 있습니다.

Notes:

(See the end of the work for notes.)

Chapter 1: A. D. 1199

Chapter Text

 

“존 래클랜드. 만약에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주는 만능의 원망기(願望器)가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소원을 빌겠어?”

 

제법 독특한 화두가 던져졌다. 빈속에 거침없이 독주를 쏟아붓던 왕족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평소라면 이런 하잘것없는 장난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다 쏘아붙이고 자리를 떠도 이상하지 않을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거나하게 취한 채로는 잠시 시간을 할애해 고민해 볼 여흥 정도는 되는 이야기다.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진다면 과연 어떤 소원을 비는 게 현명할까. 술잔을 손 안에서 굴리며 골똘히 고민하던 술꾼은 불현듯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곤 흐릿하게 조소했다.

 

“소원을 빌기에 앞서 몇 개까지 빌 수 있는지, 어떤 제약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다. 그 ‘만능’의 한계는 어디지? 만약에 내가 소원을 백 개까지 늘려 달라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소원으로 셈하는 건가? 마지막 소원에 이르러 또다시 소원을 늘려 달라고 청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역시 꼼꼼하구나, 당신은. 그래, 백 개로 소원을 늘려 달라는 요청까지는 들어줄 수 없겠어. 반칙이니까, 그런 건. 하지만 당신은 꽤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세 개까지는 허락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당신을 지켜보고 있으면 즐거워지거든.”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 나오자, 존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불쾌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를 지켜본다고. 그대는 누구인데 그런 불경한 말을 함부로 늘어놓는가? 나는 광대가 아니라 플랜태저넷 왕가의 일원이며 그 사자심왕의 왕제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대를 왕실 모독죄로 처형하라고 할 수도 있어. 그 점은 이해하고 있는 건가?”

 

허세 섞인 으름장을 늘어놓은 존은 눈에 힘을 주고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그 얼굴을 확인하려고 시도했다. 이미 몇 년째 본토에 발도 들인 적 없는 왕의 권위에 기대어 호가호위하는 게 우스꽝스럽다는 자각 정도는 있으나, 대다수의 인간은 사자심왕 리처드의 이름 앞에서만큼은 꼼짝하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상대방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를 부드럽게 응시하고 있었고, 취기 때문에 눈앞이 흐릿해져서인지는 몰라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깜빡이던 존은 어깨만 으쓱이곤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대작하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눌 벗을 구한 기억은 없지만, 술에 취한 자의 경솔한 말실수 따위로 괜한 트집을 잡을 기분은 아니었다. 존 래클랜드의 위신 따위야 어차피 왕실 광대와 크게 다를 것도 없을 테고,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것이었다. 재차 술로 입술을 축인 존은 조금은 누그러진 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 개의 소원이라……. 흥미로운 주제긴 하군. 세 개의 소원……. 좋아, 그렇다면 당연히 첫 번째는 불멸이다! 젊은 시절의 강인한 신체를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죽고 싶어진다면 내가 언제든 해제할 수 있고, 병마와 부상이 침범할 수 없는 건강함이 수반되는 그런 형태의 불멸!” 상세한 조건을 줄줄이 늘어놓던 존은 허무맹랑한 화두를 던진 술친구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정도도 허용되는 ‘만능’인가? 그 원망기라는 것은.”

 

“재미있는 조건이구나. 원망기 자체의 제한에 따른 가불가만을 논한다면 가능해. 그렇지만 소원 하나로 쳐줄 수 있는가를 판단한다면 조금 빠듯할 수도 있겠네. 따지자면 그거, 여러 개의 소원을 하나로 묶어서 빈 것이나 다름없잖아?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꽤 마음에 들었으니, 이번만큼은 특별히 허락되는 걸로 해 두자. 그래, 그 소원은 이루어질 거야. 당신은 불멸을 얻었어, 존 래클랜드.” 술주정뱅이끼리 떠들어대는 헛소리가 마치 실현되었다는 듯 태연하게 떠드는 말에 코웃음을 친 존은 빈 잔에 술을 채우고, 상대방의 잔에도 넘실거리도록 가득 채워주었다.

 

본래 존의 성정대로라면 아무리 취할 목적으로 무작정 퍼붓는 싸구려 독주라고 해도 벌레 같은 놈들에게 조금의 은혜도 베풀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플랜태저넷 왕가라는 배경을 제외하면 상대할 가치도 없을 자신 같은 이가 마음에 든다고 당당하게 나서는 이는 드물었다. 이용하려는 의도로 아첨하는 이들은 많아도, 어차피 그런 치들의 얕은 속내는 바로 간파할 수 있고. 그리고 존은 어쩐지 이자가 그런 흑심을 품고 접근한 게 아니라는 직감을 느꼈다. 괜한 친분을 내세워 그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쪽도 그런 괴짜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쓸데없이 잔이 크군. 얼마나 쏟아줘야 하는 건지, 원. 이 한 잔만 따라주고 그만둬야겠다.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며 빈 술병을 옆으로 대충 밀어둔 존은 다시 세 가지 소원으로 사고를 전환했다.

 

“좋아, 첫 번째 소원은 정했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개가 남았군……. 그리고 첫 소원처럼 조건을 상세하게 지정할 수 없다고 했으니, 소원을 빌기 전에 신중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을 테지.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풍요로운 삶이 수반되지 않는 불멸 따위는 고통일 뿐이니 감가상각이 크게 발생하지 않을 만한 금은보화? 그게 아니라면 나를 보호해 줄, 나를 절대로 배반하지 않고 유지비나 제약 등이 없이 언제든지 기용할 수 있는 무한한 군대? 아니……. 아니지.” 존은 즐거운 듯 낄낄거렸다.

 

“열다섯 살의 어린애라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소원이라는 건 그 소망을 품은 자의 인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법이다. 연못에 담길 수 있는 물고기와 바다에 담길 수 있는 물고기의 크기는 다를 수밖에 없지. 가장 효율적으로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안겨줄 정답을 파악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즉 제대로 된 소원을 비는 데 필요한 것은— 정보겠군, 그렇지? 그러니까 두 번째 소원은 미래를 보는 것이다! 내게 어떤 미래가 예정되어 있는지, 내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그 흐름만 알 수 있다면 내게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을 테지. 결국 권력이니 부귀영화니 하는 것은 운명을 읽을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수반되기 마련인 부수적인 요소! 나는—”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해줄게.” 취기에 들떠 주절거리던 존의 말을 중간에 끊은 말동무가 짐짓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미래를 볼 거야, 존 래클랜드.”

 

그리고 존은 ‘보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지더니 존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돌바닥을 뒹굴었다. 왕자는 그 사실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는 녹색 눈동자에 계시의 빛이 깃들며 오로라처럼 비현실적인 색채가 어룽거리다가 다시 페리도트 같은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존 래클랜드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눈으로 ‘본’ 이상, 이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이게 뭐— 뭐— 무슨—”

 

그는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서리치다가 겁에 질린 눈으로 눈앞에 있는 자를 응시했다. 분명히 보고 있는데도 그 얼굴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또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자신이 왜 이자와 함께 있었는지, 언제부터 함께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존은 상대방이 웃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손에 들린 잔이 황금빛으로 요요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그 잔에 담긴 술은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주의 보혈을 담았다는 신성한 잔의 전설처럼.

 

“당신, 누— 누— 누구야. 왜 나를……. 어떻게……. 대체 나한테 뭘 보여준 거— 거야. 왜——”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당신이 소원을 빌었잖아, 존. 당신은 두 번째 소원으로 미래를 보여달라고 ‘바랐어.’ 그러니까 그 소원이 이루어진 거야. 그것뿐이야.”

 

“근위— 근위병! 게 아무도 없는가! 이자를 끌어내라! 이자는 마술사……. 마녀……. 요정, 악마……. 여기 괴물이……. 신이시여…….”

 

존이 횡설수설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존은 이곳이 성이 맞는지, 현실이 맞기나 한 것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존이 흠칫거리면서 조금씩 몸을 뒤로 빼자, 금빛의 잔을 든 존재는 조금은 슬픈 듯한 어투로 말했다.

 

“소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그건 조금 유감이네. 그렇지만 한 번 들어준 소원을 무를 수는 없어. 당신도 말했잖아? 소원을 빌기 전에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마지막 소원을 빌 차례야, 존 래클랜드. 당신의 마지막 소원은 뭐야? 무엇을 원해?”

 

“아— 아아——”

 

존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저리 꺼지라고 매도하거나 상대방이 대체 누구인지 물을 여유 따윈 더 이상 없었다. 그런 것도 ‘소원’이라고 친다면 최악으로 굴러가고야 말 테니까. 미래를 보았던 순간의 감각을 바탕으로 기억을 쥐어짜 파편 같은 정보를 필사적으로 짜맞추던 것도 잠시, 존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을 응시했다.

 

“미래라고, 이게? 리처드 형님이……. 죽는다고?”

 

“그래, 그 미래를 보았잖아. 맞아. 사자심왕 리처드는 닷새 후에 죽어. 그리고 존 당신은 그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새로운 왕이 되겠지.”

 

회피하고만 싶은 미래를 확정하듯 무심한 대답이 돌아오자, 존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깨물었다. 피가 비치기 시작했지만, 존에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왕이 된다고. 리처드 형님이 죽고 내가……. 나 같은 게 왕이 되어 선친과 형님이 반석을 다진 이 나라를……. 그런 치욕을…….”

 

두서가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존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정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에게 보인 것이 광인의 착란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미래라고 한다면, 가문과 왕국, 존 본인의 삶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그런 불운을 떨쳐낼 방법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걸 위해 남겨진 소원일 테니까. 그런 운명으로부터의 구제책일 테니까. 그 소원만이— 그 소원으로——

 

하지만.

 

하지만 존은 아무리 해도 냉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사자심왕이— 리처드 형님이 죽는다. 형이 죽는다! 그 미래를 관측한 순간부터, 존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모든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그런 걸 보고도 멀쩡하게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리처드 형님이 죽는다고? 영원히 살 것만 같은 그 강인한 사내, 세상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찬란한 그 남자가— 죽는다고? 그것도 어떤 위대한 숙명에 맞서 싸우다가 영웅답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개미만도 못한 평민 따위의 눈먼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고. 필부와 다를 바 없는 꼴로, 그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는다고…….

 

투둑,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 사이로 액체가 흘러내린다. 존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렇다. 미래의 운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형님이 죽는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사람을 죽게 둘 수는 없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전부 내어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 모두는 왕국을 파먹는 벌레나 다를 바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들과 형님을 맞바꿀 수 있을 리가 없지. 제 미래는 물론이고 세상을 전부 내준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그러니까 리처드 형님만큼은 안 돼. 존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수척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존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형님을 뵈었던 것은 오 년 전이다. 왕의 위광에만 기대어 살 수 있는 무능한 왕제인 내가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형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셨다. 그 은혜에 나는, 참담하게도, 저주와 분노로 보답했지.”

 

하하, 차가운 웃음소리가 바닥을 두드렸다. 소원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것처럼, 존은 한탄에 가까운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최후에는 내가 형님을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의미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렇지만 그날 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나 따위로는 형님을 멈출 수 없다는 걸, 잡아 세울 수 없다는 걸, 그 사람이 악덕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걸. 형님께서 바라셨던 것처럼 최후의 순간 그분을 멈춰 세우는 것만이 나의 존재 의의였을진대, 실상 나는 그런 일조차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던 반편이였던 게지. 나는 그 사람을 막을 수 없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 그러니까 쓸모없었던 거다, 나는. 이 삶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존은 고해했고, 잔을 든 이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이 무덤까지 가져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심정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무능함을 형님께서는 용서했다. 나는 소임을 다하지도 못하고, 그 부족함을 질책받지도 못하고, 그저 그 사람의 짐이 되어 살아갈 뿐인 운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싫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반역을 저지르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무엇을 해도 아이의 실수로 용서받고야 만다. 그게 끔찍했다.” 존은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운 속삭임을 이어 나갔다. 고해소의 사제조차도 들은 적 없는 진심을 토했다.

 

“어렸을 적 나는……. 그 사람이 영웅 따위가 되어 멀리 가버리는 대신 나와 함께 이 삶에,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그런 게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그 사람을 내 곁에 묶어둬서라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을 막을 수 없을 운명이라는 걸 이제 알게 된 거였지. 그게 화가 났다. 그래서 화를 냈어. 형님에게 화풀이를 했지. 내 말도 듣지 않고, 내게 잡혀주지도 않고 영원히 그 심장의 부름을 따라 무작정 달려 나갈 거라면 차라리 그 소원대로 영웅이라도 되라고, 당신 좋을 대로 하라고, 나는 이제 당신이 어떻게 되든 모르겠다고……. 마음대로 하라고, 원망의 화살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렸다. 정말 그릇된 것은 그런 일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이었을 텐데도.” 리처드에게는 절대 밝힐 수 없었던 진심이, 얼굴조차 인식할 수 없는 이에게는 너무나 쉽게 나왔다. 바보 같은 노릇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화를 냈다. 웃지 않았다. 계속 원망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상처를 주기 위해 행동했다. 내 바람을 저버리고 형님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으니까 이 정도 화풀이는 받아줘야 한다는 유아적인 투정이었지. 내가 마지막으로 형님께 보여드린 얼굴은 그런 모습이었다. 당신의 인생 따위는 이제 내가 아랑곳할 바가 아니라는 듯 형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 사람이 가장 괴로워할 만한 모습만을 보여주었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런 게 마지막, 이었다고. 나는 형님이 베푼 자비를 원수로 갚았고, 형님께 상처만 남겼다.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없어.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어깨를 웅크리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로 왕자는 흐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초라한 꼴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는다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토록 다정했던 형님이, 미움과 원망으로 얼룩진 추악한 기억만을 마지막으로 떠올릴 거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 사람이 아니다. 형님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존의 귀로, 무정한 속삭임이 들렸다.

 

“하지만 아직 당신에게는 세 번째 소원이 남아 있지. 그러니까 마지막 소원을 빌어, 존 래클랜드. 당신은 닷새 후에 영국의 새로운 왕이 될 거야. 당신이 원하는 건 뭐야?”

 

“닷새. 닷새 후에……. 닷새 후에 리처드 형님은 죽는다.” 허망하게 중얼거리던 존의 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 미래를 바꿔! 형님을 살려! 그 화살이 비켜 나가게 하든, 상처를 치료하든, 형님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방법은 상관없다. 형님을—”

 

조급하게 중얼거리는 존에게, 창백한 손이 붉은 액체가 담긴 금빛의 잔을 내밀었다. 리처드 형님의 눈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형님이 전장에서 흘렸을 피도 그런 색이었으리라. 존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잔을 든 자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게. 하지만 당신은 그걸로 괜찮겠어, 존?” 형님을 살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존이 그렇게 대답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그의 입술 위로 검지를 올렸다.

 

“말했잖아,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니까. 있지, 이해하겠어? 당신의 형님은 무적이 아니야. 그 강력한 사자심왕의 육체조차도, 일개 평민의 눈먼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어. 물론 지금 한 번은 소원을 빌어 그 운명을 뒤틀 수 있겠지. 하지만 마지막 소원을 빈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이번 화살은 피했지만, 다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멈추지 않고 전장을 달리는 사자에게 얼마나 많은 화살이 빗발치고, 그 심장을 노리는 검은 얼마나 많을까? 한 번의 불행을 피한 사자는 얼마나 멀리 달리게 될까?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형님을 지켜볼 수 있을까?”

 

“그래, 그렇지. 아아, 그건 너무 위험해. 그 사람을 지키려면 더 확실한 방안이 필요해. 형님을, 형님에게…….” 더듬거리던 존이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렇지, 첫 번째 소원. 그 소원을 형님에게도 적용해! 병마도 부상도 위해를 끼칠 수 없는 불멸을 형님께—”

 

“그건 불가능해, 존.” 냉정한 대답에 존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일견 냉정하고 잔혹하게 느껴지다가도 어떻게 보면 자애롭고 너그러워 보이는 미소가 존에게 향해 있었다. 하얀 손이 가볍게 잔을 흔들면, 보혈과 같은 액체가 미약하게나마 파문을 일으킨다.

 

“말했잖아, 그 소원은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이번에만’ 들어준 거라고. 그러니까 그건 존 래클랜드에게만 허락된 소원이야. 당신의 형님은, 당신이 아니지. 예외는 한 번뿐이라고 이미 말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약속이라는 건 함부로 어길 수 없는 법이니까.”

 

잔을 든 이는 그렇게 속삭이곤 술과 눈물로 젖은 존의 손을 끌어다 황금빛 잔을 쥐게 했다. 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그 잔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격려하듯 그 손등을 두들겨 주며 잔을 넘겨준 자가 다정한 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소원을 말해. 당신은 무엇을 원해, 존 래클랜드?”

 

그 잔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존은 입술을 달싹이고,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차가운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 불안함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두려움과 공포, 회의와 번민으로 얼룩져 있던 얼굴에는 어느새 후련함과 결의가 어려 있었다. 뺨이 눈물투성이가 된 탓에 분명 초라한 몰골일 테지만, 떨리는 손에 금빛 잔을 쥔 남자는 침착한 투로 입을 열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의 첫 번째 소원은 이루어졌나? 두 번째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래, 맞아.”

 

“그렇다면 이 소원을 형님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조건 자체는 이미 내게 적용되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뒤집을 수 없는 게 맞나? 나는— 나는 정말로— 불멸을 얻었나?” 재차 질문하자, 그 이목구비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은 상대방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한 그 불멸은 영원히 유지될 거야. 죽음은 차마 당신을 범접하지 못하고, 어떤 질병과 상처도 그 육체를 해할 수 없겠지. 그게 당신의 소원이었으니까.”

 

“좋다. 좋다! 그렇다면 세 번째 소원을 빌겠다! 나는——” 양손으로 잔을 움켜쥔 존 래클랜드는 눈물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으며 선언했다.

 

“——나는 리처드 형님과 내 죽음의 운명을 맞바꾸겠다. 불멸의 축복을 형님께 바치겠다!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고통은 나에게로 오고, 그 사람은 내가 살아갔을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그게 나의 세 번째 소원이다.”

 

단호한 선언도 잠시, 상대방이 침묵하자 존은 초조하게 눈치를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떨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움켜쥔 잔을 놓지는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형님을 살리게 해줘. 내가 그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해 줘…….”

 

“——확인했다. 잔을 들어라, 존 래클랜드. 원망기에 채워진 보혈을 마셔. 그 잔을 비우는 순간, 당신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그 지시가 내려진 순간, 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잔에 든 액체를 끝까지 마셨다. 금속의 비릿한 내음이 풍기는 그 액체는 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흐르는 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말단까지 열기가 퍼지는 듯하였지만, 존은 눈을 꽉 감은 채로 잔을 완전히 비웠다. 그러자 한쪽 어깨로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통과 함께 취기로 인한 것과는 다른 어지러움이 밀려왔으나, 빈 잔을 쥔 사내는 눈물로 얼룩진 낯을 한 채로도 후련하게 웃어 보이고선 잔을 건넨 이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귀공이 누구인지, 왜 저를 찾아왔는지, 왜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끝까지 이해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크나큰 빚을 졌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결국 그 소원은 내가 아닌 당신의 선택이었는걸. 당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운명을 극복할 만한 방도를 추구할 수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형님을 위해 그 소원을 쓰겠다고 결정했지. 원망기는 그 소원을 이루어줬을 뿐이야. 그렇지만 당신은 그걸로 괜찮아? 마지막 소원을 그렇게 써 버렸다는 데 아쉬움은 없어? 원하는 것은?”

 

그 질문에, 존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거짓말처럼 열기가 가라앉고 나면 얼음장 같은 추위가 찾아왔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들었다.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으며, 그는 조용하게 반문했다.

 

“은인께서는 이미 소원을 세 개나 허락해 주시고도 제게 또다시 소원을 물어보시나이까. 저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말했잖아, 나는 당신이 꽤 마음에 들었다고. 당신은 보고 있기에 즐거운 사람이었거든. 그러니까 내게만 말해줘, 그 소원. 물론 이 잔에 대고 빈 것처럼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노라 선뜻 약속할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 소망을 알려줘서 나쁠 것도 없잖아? 남겨진 아쉬움 같은 건 없을지 알고 싶어. 그렇지, 내 개인적인 흥미로 물어보는 거라고 해 두자.”

 

“세 번째 소원이 진실로 이루어진다면, 제가 더 이상 바랄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존은 빈 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빈 잔처럼, 그의 육신조차도 순식간에 비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로부터 전해져 오는 통증조차도 그 공허한 감각에는 둔하게 날이 꺾이고야 말았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한, 불모의 삶이었다. 그 텅 빈 감각을 잊을 수 있었던 건 짐승의 본성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만은 자비로웠던 이, 존과 같은 이조차도 좋은 형제라고 불러준 상냥한 사람의 곁에 있던 순간뿐이었다. 그 순간만이 존을 지금까지 살려둔 것이나 다름없고, 이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삶이 의미를 가지려고 한다. 빈 잔을 쥐고 쓸쓸하게 침묵하던 사내가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형님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군요. 형님을 마지막으로 뵌 이후로 오 년이 지났습니다. 아무래도 그때 상처만 드린 점이 조금은 마음에 걸려서.”

 

“으음, 그건 곤란하겠네. 미안하지만 사자심왕과 당신은 다시 만나지 못할 거야. 본디 사자심왕은 닷새 후에 죽을 운명이었고, 이제 그 운명은 당신의 것이 되었지. 당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프랑스에 발을 들였을 즈음, 당신에게 허용된 시간은 이미 끝나게 돼. 사자심왕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이미 장례를 마치고 납관된 지 오래일 테지. 원망기에 빌 수 있는 소원은 모두 동났으니까, 사자심왕과 당신은 살아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어. 기껏 물어봤는데 이런 대답밖에 들려줄 수 없는 점은 유감이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존은 조용하게 대답하고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

 

세 번의 소원을 허락받고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얼마나 주제넘은 행위인지는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얼마나 대단한 특혜가 주어진 것인지도. 하지만 존이 금빛 잔을 쥔 채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자, 잔을 건넨 이가 그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초췌한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툭툭 빈 잔에 고여 얕게나마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핏빛 액체 대신 투명한 눈물로 밑바닥이 잠긴 잔을 맞잡은 채로,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래, 역시 이야기를 나눌 순 없어. 원망기에 소원을 빌어 운명을 비틀지 않는 한, 그건 당신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운명이야.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마지막으로 형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게. 당신은 나를 즐겁게 해 주었으니까, 그 정도라면.”

 

“아,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존 래클랜드는 얕게 차오른 잔을 움켜쥔 채로 하염없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신도가 그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듯이.

 

 

✦ ✦ ✦

 

 

 

 

아프다. 전신을 태우는 듯한 열기로 사경을 헤매는 동안 리처드가 생각할 수 있는 단어라곤 그것뿐이었다.

 

하늘이 리처드에게 허용한 시간은 빠르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리처드는 그 점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장군들은 어의를 들볶아대면서도 그가 이전처럼 병마를 떨치고 회복될 수 있을 거라 희망찬 말을 늘어놓았지만, 리처드는 이번이 끝이라는 걸 알았다.

 

사자심왕은 죽는다. 생제르맹은 그의 여정이 여기에서 끝날 거라고 말했다. 궁정마술사는 태연하게 무례하고 불쾌한 언사를 툭툭 내뱉곤 했어도 아예 틀린 답변을 내놓은 적만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리처드는 죽을 것이다. 비단 생제르맹이 한 말이 아니더라도, 제 몸은 리처드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그렇지만 리처드는 소리를 지르지도, 울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를 도륙하고 그 생명을 무참하게 앗아갔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가 그의 여정을 따라 달려 나가며 그 목숨을 바쳤던가? 그렇게나 많은 사람의 생사를 좌지우지했던 리처드가 이제 와서 죽고 싶지 않다느니, 아프다느니 약한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왕은 담담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청컨대 이 영혼이 영원토록 연옥에서 불타, 그 죽어간 생명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속죄할 수 있기를. 이제 와서 그런 기도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리처드는 진심으로 소망했다. 그것만을 바랐다. 그토록 무도하고 잔학했던 짐승의 삶치고는 괜찮은 끝이었다.

 

아아, 마지막으로 모후를 뵐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본토에 있을 막냇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만은 끝끝내 아쉬움으로 남겠구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프다. 몽롱한 열기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고통에 휩싸인 채로, 리처드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두운 막사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병상에 못 박히듯 누운 리처드뿐이었다. 분명히 뽑아냈을 터인 화살이 어깨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으므로, 리처드는 간신히 그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손을 들어 그 화살을 뽑고 싶었지만,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죽어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리처드는 그렇게 납득했다.

 

막사에 한 줄기의 바람이 들더니 누군가가 발소리 없이 조용하게 들어왔다. 이내 전쟁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몰약과 침향의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그 이질적인 향기와 함께 나타난 자는 새하얀 튜닉을 몸에 걸치고, 금사로 십자가와 사자, 금작화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화려한 검은 천을 망토처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베일처럼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은 낯이 익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더니 돌처럼 차가운 손이 리처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호메로스조차도 때로는 존다더니.” 낮고 부드럽게 야유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처럼 빠른 형님조차도 이런 눈먼 화살을 피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는군요!”

 

아, 존이다.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착하게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 리처드의 뺨을 메마른 엄지손가락이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목과 쇄골을 거쳐 다친 어깨로 향했다.

 

“이게 다 뭡니까. 꼴사납기는!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도 언젠가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올 거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제 말을 자꾸 무시하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형님.”

 

조롱하는 투는 여전했지만, 리처드에게는 그 놀리는 듯한 말투가 오히려 반갑게 들렸다.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이제 무의미하다는 듯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벽처럼 묵묵부답이었던 마지막 순간들을 생각하면, 존이 이런 방식으로라도 그에게 다가오는 건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물며 이를 통해 행복했던 유년기를 추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아아, 꼴 좋다, 정말로. 그러니까 내 말 들었어야지.”

 

존이 웃고 있다. 그 표정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 존.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살이 박혀 고정된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돌처럼 굳어진 입술은 벌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리처드의 뜻대로 움직였던 육신이 처음으로 그의 뜻을 거부했다. 리처드는 결국 단념하고 어떻게든 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기억에 담아 두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그 모습을 새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존이 가까이 다가온다.

 

“고작해야 이런 화살이 용맹한 리처드 형님을 잡아둘 수 있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도 이제야 형님이 제 손이 닿는 곳까지 오셨네요. 그러니 이 화살에 감사해야 할까요? …이제는 더 이상 나만 남겨두고 갈 수 없겠지.”

 

그 창백한 얼굴은 온통 젖어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존은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리처드가 오래도록 본 적이 없던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본국에서 떠나왔던 순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랫동안 존이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채로 웃는 그 얼굴은, 십수 년 전 존이 어린아이였을 적에나 보여주었던 천진한 기쁨, 후련한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처드는 고통조차도 잊고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활짝 웃어 보인 존은 리처드의 이마 위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떨어트리고는 말뚝처럼 박힌 화살 위로 손을 뻗었다.

 

그만둬, 존. 그건 뽑아낼 수 없—

 

“하, 정말 이깟 화살이 다 뭐라고.”

 

쐐기처럼 리처드를 고정해 두었던 그 화살은 존의 손길이 닿자, 거짓말처럼 쉽게 뽑혔다. 존은 그 화살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그 독화살이 마치 보물이라도 된다는 양, 리처드에게 받은 선물이나 되는 것처럼 품에 꼭 쥐고 있던 존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이 조금은 우쭐거리고, 조금은 멋쩍은 표정을 지은 채로 리처드의 이마를 어루만지더니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형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자, 형님. 이젠 아무것도 당신을 막아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달리세요. 그 심장이 시키는 대로, 원하는 곳으로 가세요. 기왕이면 세상의 끝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해. 영웅이든 뭐든…….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뭐든지. 이제 형님을 묶어두는 족쇄 같은 건 어디에도 없겠죠? 그러니까 마음껏 달려요, 형님. 제 몫까지, 힘껏.”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존? 리처드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리처드가 아는 존은 절대로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화살이 뽑히고도 리처드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존은, 자기 좋을 대로 원하는 말만 마음껏 떠들어댄 존은, 무훈담에 흥분한 리처드가 주절거리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기만 했던 그 어린 시절을 보복하듯 홀로 이야기하던 존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리처드를 조롱하듯 느릿하게 그 화살을 자기 어깨에 박았다.

 

멈춰, 그만둬. 리처드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화살촉이 존의 어깨로 파고들더니 하얀 튜닉 위로 핏물이 번졌다. 아니, 그건 과연 튜닉이 맞기나 했을까. 존의 몸을 가린 하얀 천은 마치 무언가로 굳힌 것처럼, 대리석 조각상처럼 단단하게 굳어 그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존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대신 그는 십자가와 사자가 그려진 검은 망토로 그 피투성이 어깨를 가리더니 리처드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해 보였다. 형제라기보다는 주종 사이에나 오갈 만한 예법이었다. 어느덧 그 갸름하고 단정한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삭막한 표정으로 리처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존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 폐하,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못난 아우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뭘 하는 거야, 존? 멈춰, 나만 두고 가지 마, 잠깐만, 존, 나와 조금만 더 이야기를—

 

허상을 움켜쥐려는 듯, 억센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린다.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며 어두운 밤의 기억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꿈의 끝에서, 어느덧 뻗어진 손을 리처드는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가쁘게 헐떡거리던 리처드는 순식간에 달아나는 꿈의 기억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였지? 분명히 무언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존이— 존을, 보았던가? 그런데, 무슨 내용이었지? 뭔가 좋은 것을 봤던 건 틀림없는데 이상하게 슬픈 기분이 들어…….

 

멍하니 제 손끝을 응시하던 리처드는 불현듯 위화감을 깨달았다. 다친 팔은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움직일 수 없이 고통스러웠거늘, 약간의 묵직함을 제외하곤 이제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순간, 꿈의 여운이 가시며 리처드가 눈을 크게 떴다.

 

리처드는 몸을 일으켜 환부를 살폈다가, 화살이 맞은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깨의 가동 범위를 확인하고 몸에 다른 이상이 없는지를 살핀 리처드는 마침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신이 들자 웃옷조차 걸치지 않고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리처드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침통하게 주변에 서 있던 군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왕이 손을 들어 보이자, 사람들이 허둥지둥 다가와 그의 용태를 살폈다.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의 인도하심입니다!” 꼼꼼하게 상처를 확인한 의원의 전언에, 사방에 있던 사람이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성호를 그으며 환호했다. 사자심왕 만세! 신께서는 우리의 왕을 축복하셨노라!

 

리처드는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의 역량이 얼마나 돌아왔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글쎄, 이 악마 같은 집안을 과연 신께서 달가워하실지는 모르겠어도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게 행운이 웃어주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것이 신의 가호라고 한다면 그런 걸로 해 두자! 리처드는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배가 고프군. 식사를 대령하고,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허기를 달래고 나서 장병들의 준비가 끝나면 바로 출진하겠다.”

 

“출진이라니요? 폐하, 상처가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며칠 정도 정양하시면서 용태를 살펴야—”

 

“아니, 그럴 시간은 없다. 내가 위독하다는 소문이 필리프의 첩자들에게도 전해졌겠지? 그 교활한 사내는 틀림없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그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려라. 사자심왕이 죽었다고 확신한 역도들이 움직이면 풀숲에서 고개를 든 뱀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다.” 살기등등하게 선언한 리처드가 이윽고 개구쟁이 소년처럼 씩 웃었다. “예기치 않게 이런 작은 성 따위에 발목이 잡혔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모두를 걱정하게 했으니, 이걸 어떻게든 이득으로 변환하여 보답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낯부끄럽단 말이야. 그러니 그만한 성과를 내지 않으면 곤란해!”

 

사자심왕의 식사가 길게 이어졌다. 며칠 내내 제대로 먹지 못한 걸 보상받으려는 듯 정신없이 음식을 입에 욱여넣던 리처드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곤 입꼬리를 죽 당겨 웃었다.

 

며칠 전과는 달리, 생제르맹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행을 다닐 때나 입는 의복을 완전히 갖춰 입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기합이 들었군. 이 태평한 사내조차도 제 주군의 위기에 긴장하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죽는다고 했겠다? 이 제멋대로인 남자도 다 틀리는 날이 있구나! 스튜에 찍은 빵을 뜯어 먹다가 키득거리던 리처드는 생제르맹에게 장난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생제르맹! 이번에는 네가 틀렸다. 나는 안 죽어!”

 

“……리처드.”

 

“신께서는 이 사자가 더 달리도록 허락하실 모양이다! 하핫—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잖아, 이 사기꾼아!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네가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믿어버리고 만다고? 너, 다음에도 그런 장난을 하면 진짜 베어버린다!”

 

이런, 네 칼에 베이면 나는 살 수 없으니까 봐 줘. 생제르맹이 그렇게 받아주면 끝나는 농담이었다. 두 사람이 무언으로 약속한 익숙한 주고받기. 그러나 마술사는 평소처럼 너스레를 떠는 대신, 그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새파란 눈동자로 리처드를 물끄러미 훑어보다가 묘하게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렇구나, 너는 안 죽어. 적어도 이 세계선에서만큼은.”

 

“응?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부터 특이점으로 전환된 걸까? 그래도 나, 꽤나 성실하게 관측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포기해 버린 줄로만 알았지만, 그 사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지독한 각오를 품었구나……. 솔직히 말해서, 너무 얕봤다고밖에 못 하겠네.”

 

생제르맹이 하는 말은 어쩐지 리처드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그 사기꾼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리처드는 묘하게 이번에는 그 말투가 거슬린다고 느꼈다. 눈앞에 있는 이가 몇 년씩 생사고락을 한 동료가 아니었다면 당장 베어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은 불쾌함이 느껴졌다. 리처드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봤을 텐데도, 생제르맹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 리처드. 지금까지 네 여정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그러면 이 부족한 잔재주꾼은 여기에서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죽을 뻔했다고 잘못 판단한 게 민망해서 그래? 네가 헛소리한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용서할 테니까, 그냥 잊어 버려.”

 

“그런 게 아니야. 지금까지 나는 여기까지 이어지는 네 여정을 지켜볼 예정이었지만……. 이 이후의 여정은 기록되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거기부터는 내가 따라갈 수 없어. 너와 함께 달려왔던 내 여정은, 여기까지야.” 리처드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노려보았으나, 마술사는 담담하게 뜻을 전했다. “그러니 사직을 청합니다, 폐하.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나를 떠나겠다고? 이제 와서? 왜…….” 리처드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곤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친우에게도 그런 감정을 돌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일단 알겠다. 하지만 청한다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니까, 잠시 휴식하면서 다시 생각해 봐. 그대의 자리는 비워놓고 있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고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전 궁정마술사이자, 친구로서 드리고 싶은 조언입니다.”

 

“허한다.” 리처드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새파란 눈동자가 리처드의 피처럼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화려하게 날뛰도록 해, 리처드. 그래야만 저쪽에서도 조금이라도 이 특이점을 빨리 발견해서 수정하러 올 수밖에 없을 테고,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상황이 수습될 테니. 그래야 괴로움도 길지 않을 거야.”

 

마술사는 끝까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떠났다. 생제르맹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마치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처럼 홀연히 가 버렸다. 그 기이한 기계 전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리처드는 생제르맹이 떠나고도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지만, 불쾌한 심기를 떨쳐낼 수가 없어 신경질적으로 식기를 집어 던졌다. 좋았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인들이 눈치를 보며 흩어진 그릇을 주워 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리처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차가운 광소를 터뜨렸다.

 

아, 서둘러 전장으로 가야겠다. 이 끔찍한 기분을 하루라도 더 빨리 씻어낼 방법이라곤 그것뿐이겠지. 사자는 살기등등하게 웃었다.

 

 

✦ ✦ ✦

 

 

리처드의 의도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사자심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파다해지자, 필리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역자들과 접선했다. 당연하게도, 리처드는 이를 역이용하여 또다시 성 하나를 떨어트렸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더 큰 놈을 낚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필리프의 기대가 절망이 되는 순간을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아, 정말이지 직접 그 얼굴을 봤다면 좋았을 텐데. 새롭게 점령한 성에서 장병들에게 연회를 허락한 리처드는 다음 전선을 고심했다. 이번 작전이야 기습이라는 이점을 살려 빠르게 허를 찌를 수 있었지만, 필리프도 꽤 독이 올랐으니 군사도 재정비하고 다음 행보를 신중하게 결정해야만 할 터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사자는 가장 적합한 시점을 추리며, 다음에 날뛸 전장의 기대에 부풀었다.

 

그래야만 했을 터였다.

 

본토로부터 전해진 급보는 승리로 들떠 있던 진영에 찬물을 끼얹었다. 왕세제 존이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어도 짐 덩어리에 불과한 왕제의 운명 따위야 사자심왕의 수하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고, 왕국의 국민 대부분에게는 비보라기보다는 희소식에 가까웠겠지만, 그 전언은 적어도 왕에게만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때마침 사자심왕이 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방향이 엇갈려 소식을 전달하는 게 늦어졌다고, 전령은 변명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초조해진 사자의 발을 붙잡아 두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닷새의 차이를 두고 본토에서 출발한 전령이 사자심왕의 막사로 도달했다.

 

모르탱 백작 존, 훙서(薨逝). 사자심왕은 그 전서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헛소리.”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리처드는 단호하게 일축했다. “오보겠지. 그 전령을 누가 보냈는지 확인해라.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필리프의 역공작일 수도 있어. 첩자로 밝혀진다면 정보를 캐낸 다음 참수하겠다.”

 

“……폐하, 자세한 정보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말끝을 흐리긴 했어도, 부관이 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리처드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양피지를 와락 구겨 버리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헛소리다, 헛소리야! 겨우 닷새 사이에 존이 죽었다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말이냐! 그 애는 전선에 나간 것도 아니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존이 죽었을 리가 없잖느냐!” 역정을 내던 리처드는 문득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 생각을 바꿨다.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기마부대를 대기시켜라. 런던으로 가겠다!”

 

기마병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만을 끌고 출발한 사자심왕은 채 2주일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수백 마일을 주파하고 해협을 넘었다. 따라오지 못하는 이는 그대로 두고 가는 강행군 덕분에 가능했던 기록적인 속도의 진격이었다. 5월이 되기도 전에 본토의 땅을 밟은 친위대는 빗발치는 소나기를 뚫고 런던을 향해 내달렸다. 우레와 같이 지축을 울리며 질주하는 군마들의 발굽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랏빛 블루벨 꽃잎이 엉망으로 짓밟혔다.

 

4월이 끝나는 날, 왕은 의관을 정제할 새도 없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가문의 수장이자 주군인 리처드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에 매장되지 않고 미사와 보존 절차만을 거친 관이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여전히 리처드는 그게 잘못된 이야기라고 확신했지만, 그런 의심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어둠이 내려앉은 성당에 사자가 들이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진흙투성이 군화가 신성한 성당의 석조 바닥을 더럽혔다.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잘못 전해진 게 틀림없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해…….”

 

쩔쩔매며 따라붙은 동행인들을 무시한 채로, 리처드는 비틀거리며 관을 향해 다가갔다. 이전에 왔을 때는 없던 관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그 관을 덮은 검은 관보(棺褓)에는 금사로 십자가와 함께 플랜태저넷 가문을 상징하는 세 마리 사자와 금작화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장들이 배치된 짜임새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핏대 선 눈으로 낯선 관을 노려보던 리처드가 관보를 잡아채고는 동행한 이들에게 명했다.

 

“관을 열어라. 여기 있는 게 존이 맞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아니,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믿지 않겠다. 나는 봐야 한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미사를 마치고 납관한 망자의 관을 열었다간 교황청에서—”

 

“열어!”

 

위압적인 명령에, 수행원들이 떨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사자와 같은 심장을 가졌다는 왕의 진노를 살 위험을 감수하려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신과 교황청은 저 멀리에 있고, 분노하는 사자는 바로 여기에 있었으므로.

 

누군가가 망치와 칼을 가져오고, 납으로 밀봉한 인장을 뜯어 육중한 석관을 열었다. 굳게 닫힌 관이 다시 열리는 순간 리처드는 왈칵 쏟아져 나온 서늘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왕족의 시신을 준비할 때 으레 사용되곤 하는 침향과 몰약의 향기가 관 안에 온통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밀랍에 적셔 굳힌 희멀건 납포(蠟布)가 시신을 뒤덮은 것이 보였다.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망자의 안식을 방해하여 천벌이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떨고 있는 수행인 중 누구도 선뜻 그 납포를 들어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불호령을 내릴 여유도 없을 정도로 마음이 급해진 리처드는 직접 밀랍에 적신 천을 뜯어냈다. 그 아래로, 눈을 감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파르라니 핏기가 사라진 입술과 새하얗게 질린 안색만 아니었어도 자는 중이라고 착각할 만큼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납포로 보존하긴 했어도 한 달 가까이 관에 안치되어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은 생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였다. 존은 그렇게 관에 누워 있었다. 제 주군이자 형제인 리처드의 호출조차도 무시하고, 무엄하게도.

 

“하지만……. 왜? 어떻게……?” 리처드는 조용하게 중얼거리면서 망자의 뺨을 만졌다. 리처드의 손이 닿을 때면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그 피부는 이제 나무껍질처럼 뻣뻣하게 굳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일부러 손을 뻗어 어루만질 때면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반기던 살가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보이는 그 얼굴은 더 이상 리처드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았다.

 

“쓰러지신 이후로 고열을 앓으시기 시작했습니다.” 궁성에서 온 수행인 중 하나가 말했다. 더듬거리면서 설명하는 그 목소리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치료사들을 불러 진단하고 열을 내리려고 했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차도가 없어서 닷새 만에…….”

 

“그렇지만 이상하잖아. 이상하다고……. 봐, 이렇게……. 이렇게 보면 그냥 자는 것처럼 보여. 지금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다고. 그런데 존이 죽었다니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존, 일어나라. 형을 놀리는 것도 작작 해. 이런 건 즐겁지 않아. 알겠느냐? 재미없단 말이다.” 잠든 이를 깨우려는 것처럼 리처드는 그 어깨를 흔들었지만, 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이에게서는 돌아올 리가 없는 그 둔하고 뻣뻣한 움직임에 리처드는 움찔거렸다.

 

“……장난이 과해. 과하다고. 알고 있느냐, 존? 이건 대역죄야. 네가 아무리 내 동생이어도, 아무리 어린애라도 봐줄 수 없는 일이 있어.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말한다면 감히 군주를 농락한 죄라도 특별히 용서해 주마. 그러니까 이제 슬슬 일어나, 응?” 리처드는 현실을 부정하듯 억지로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지만, 존은 그 유치한 상상에 찬동해 주지 않았다. 그래, 존은 언제나 그랬다.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할 거냐고 발끈하기라도 해 준다면 좋았을 텐데. 초췌하게 핏기가 사라진 뺨을 톡톡 두드리던 리처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기, 존.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와서 화났어? 알아, 알아. 형이 너무 늦었지. 일이 년이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길어져 버렸지 뭐야. 필리프 그 녀석이 자꾸 성가시게 굴더라고. 네가 화난 것도 당연해.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 돌아왔는걸. 그러니까 형한테 대답 좀 해 주면 안 될까. 화내도 되니까, 응? 늦어서 미안해.” 리처드가 존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였다. 대답은 없었다. 리처드는 흉터투성이 손을 뻗어 그 다물린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제발 뭐라고 좀 해봐…….”

 

“폐하, 시신에 함부로 접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왕제 전하께서 쓰러지신 원인이 온전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전염병이기라도 할 경우, 이 나라의 지존이신 폐하의 옥체에도 그 참혹한 질병이 침범하기라도 하면…….”

 

침범이라는 표현에 불현듯, 계시에 가까운 어떤 예감이 찾아들었다. 아니, 그건 기억이었을까. 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슬프게 물들고야 말았던 어떤 불길한 꿈. 리처드는 수하들의 조언에 불경하다 역정을 내는 대신 홀린 듯이 존의 어깨를 감싼 수의를 끌어 내렸다. 혼비백산하는 주변인들의 만류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존의 왼쪽 어깨에는 마치 화살에 맞은 자국처럼 보이는 울혈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리처드는 그 자국을 알았다. 한 달 전, 리처드의 어깨에 그런 상처가 있었다. 그 썩어가는 상처가 리처드를 연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상처가 사인(死因)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하룻밤 만에 거짓말처럼 사라진 그 상흔이 존의 어깨에, 남아 있었다.

 

“……4월 6일이라고 했지.” 리처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쓰러지고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다고. 그렇다면 4월 1일에……. 내가 일어난 날에 존은…….”

 

두서 없이 중얼거리던 리처드는 갑자기 망토를 팽개치고 견갑을 뜯어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갑옷 아래 받쳐 입은 내의를 맨손으로 찢어냈다. 왕이 맨몸을 드러내자 궁인들이 탄식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어깨를 매만졌다. 오래된 흉터들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뼈까지 파고든 상처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신의 가호를, 기적을 감히 입에 올렸다. 리처드와 같은 이를 신께서 기꺼워하실 리가 없는데, 그의 이름을 칭송하는 이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리처드는 제 어깨에서 손을 떼어, 사라진 자상이 그대로 옮겨간 것만 같은 울혈 자국 위로 얹었다. 실제로 화살촉이 파고든 상처가 아님에도 누르면 왈칵 피를 쏟아낼 것처럼 생생한 그 상흔은, 기이하게도, 그 자리만큼은 어쩐지 살아있는 이의 상처처럼 따뜻했다. 그 피멍이 맺힌 자리에 투명한 액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어느덧 사원 내부까지 이 지독한 소나기가 들이쳤던가. 사자의 심장까지 한기가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그래, 신의 가호 같은 형편 좋은 게 내게 주어질 리가 없지. 당연히 그랬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해야 했는데.” 넋을 잃고 읊조리던 리처드가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붙들었다. 마른 꽃잎이 바스러지지나 않을까 조심스러운 손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메마른 뺨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너였구나. 너였어. 하지만……. 하지만 왜?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리처드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요구했느냐, 나를 살려 달라고? 내가 부탁했느냐, 나 대신 네 목숨을 바쳐 달라고? 왜 그런 거냐, 존. 똑똑한 네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왜…….”

 

귀곡성 같은 흐느낌이 본당을 가득 메웠다. 누구도 감히 오열하는 왕의 옥체에 손을 대지 못했으므로, 사자는 오래도록 울부짖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비탄에 찬 통곡은 광인의 발작적인 웃음소리로 변했다. 사람의 소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소리였다. 수행원들이 공포에 찬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낄낄거리며 웃던 왕은 석관 안으로 손을 뻗어 시신을 움켜쥐었다.

 

아, 동생이 이 형의 품에 있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제 어깨에 기대도록 안은 리처드는 유쾌하게 파안대소했다. 그의 귀에는 궁인들의 애원도, 사제들의 만류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사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는 동생의 몸을 타고 전해지는 제 심장 소리뿐이었다.

 

“밤공기가 차구나. 긴 여정에 피곤해졌다! 이젠 성으로 돌아가 몸을 덥히고 좀 쉬어야겠어. 가자, 존.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이 형과 회포를 풀자꾸나.” 

 

 

✦ ✦ ✦

 

 

사자심왕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플랜태저넷의 일족이 그 핏줄에 흐르는 악마성을 의심받은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왕실의 필사적인 은폐에도,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임시 안치되었던 석관이 비었다는 소문은 날개를 단 듯이 은밀하게 영국 전역에 퍼졌다.

 

모르탱 백작이 이미 위령 성무일도와 장례 미사까지 치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공식적으로 망자를 안치할 장소도 정하지 않고, 죽은 왕세제의 작위를 물려받을 후임도 지명하지 않았다. 호사가들은 결지왕(欠地王)이라는 별명이 죽어 묻힐 땅조차도 없게 될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였을지도 모른다며 떠들어대곤 했다. 누군가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혈육의 죽음조차도 이용하는 권력의 비정함에 몸서리를 쳤다. 누군가는 군주의 자비로움을 보여주려고 용서하긴 했어도 역시 배신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 추측했다. 그중 무엇이 사실이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용맹하고 변덕스러운 왕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만 사자심왕이 궁정에 둔 시체를 산 사람 대하듯 한다는 이야기만큼은 어떤 소문이든 빠짐없이 일치했다.

 

자극적인 상상력이 덧칠된 소문에서는 궁정에 시체 썩는 악취가 진동한다느니, 썩어가는 시체를 본 이들이 혼절했다가 사자심왕의 진노를 샀다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실제로 궁정에 다녀온 이들의 증언은 정반대였다. 종부성사 전에 자신이 죽으면 그 시신에 칼을 대지 말라고 요청했다던 겁쟁이 왕자의 시신이 금방 썩어들어갈 거라는 예측이 파다했지만, 뜻밖에도 궁정에서 시취를 맡았다는 이는 드물었다. 몰약이나 침향 냄새라면 모를까, 썩어가는 부패의 냄새는 궁성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고들 했다.

 

성호를 긋고, 엿듣는 사람이 없을까 두려워하며 고백했다던 어느 하인의 증언은 더더욱 기이했다. 왕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손님인가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몇 달 전에 숨을 거둔 모르탱 백작이었고 끔찍하게도 그 얼굴은 조금도 썩지 않고 생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는 말이었다…….

 

악마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왕실에서 그 소문을 제압하려고 해도 넘실거리는 두려움은 도버 해협을 건너 대륙까지 전해지고야 말았다.

 

갑작스러운 대적의 귀국과 이어지는 침묵의 연유를 파악하려 애쓰던 프랑스의 필리프가 그 소문의 진위를 가리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으리라. 썩지 않는다는 시체가 실재한다면, 무시무시한 사자심왕과 플랜태저넷 혈족의 악마성을 입증하고 교황청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 테니.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응당 신의 가호가 필요할 터이니, 현명한 왕은 분별력 있는 군주라면 누구라도 할 만한 선택을 내렸다.

 

다만, 지혜로운 인간은 상처 입은 짐승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뿐이었다.

 

이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다져진 고깃덩어리에 가까운 형태였음에도, 리처드는 분이 풀리지 않은 것처럼 거칠게 그 몸뚱이를 걷어찼다. 궁정까지 필리프의 첩자가 들어온 것도 모자라, 그 마수가 동생에게 닿을 뻔했다는 두려움은 오래도록 칩거했던 사자의 분노와 불안감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필리프의 첩자가 궁성의 심장부까지 들어오도록 놔둘 수 있느냐는 고성이 오가고 보복이 이어졌음에도, 리처드의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 간교한 자가 존에게 불어넣은 교활한 속삭임에 5년의 시간을 빼앗겼거늘, 이제는 그 육체마저도 탈취할 속셈인가! 아아, 풀숲에 숨은 그 독사의 머리를 베어 버려야 했다! 진작에 그 뱀 같은 자를 처리했다면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것을! 당장이라도 해협을 넘어 후환을 끊어야만 한다. 내가 가야 한다! 다른 이들은 그 교활한 능구렁이를 막지 못할 테니! 그렇지만 내가 떠난다면 존은 어떻게 되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삿된 것들이 이 아이의 몸에 손을 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윌리엄을 두고 갈까? 하지만 윌리엄이 항상 여기에 있어 주지는 못할 텐데. 다른 사람은? 아니, 필리프의 첩자가 다가오는 것도 막지 못한 무능한 이들을 믿을 수는 없어.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번민하던 왕은 대답을 구하듯 동생을 바라보았다가, 무언가 응답을 들은 것처럼 부드럽게 웃더니 잠든 형제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아, 그렇군. 함께 가면 되겠구나. 그래, 존. 같이 가자. 이번에야말로 우리 형제가 함께 전장을 달리는 거다.”

 

기대된다. 너와 함께 싸우는 건 정말 재미있을 테지. 잔잔한 웃음이 차가운 궁성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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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204 등하쟁투연옥(灯下爭鬪煉獄) 아키텐

1204년, 인리수복의 사명을 짊어진 영웅들이 도달한 곳은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의 치세에 융성했어야 할 풍요로운 대지는 압제자의 유린 하에 타오르는 인세의 연옥으로 변해 있었다.

사납고도 슬픈 짐승이 질주하는 땅,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사라진 성배를 찾는 이들이 맞부딪힌다———

Notes:

동생이 먼저 죽어서 미치는 형님에게는 각별한 맛이 있습니다. 플랜태저넷 형제들의 생전 이야기에는 비슷한 전개들이 종종 보여서 기뻐요. 나중에 여유가 되면 이 설정을 기반으로 특이점 이야기를 이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