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11월도 어느덧 절반을 넘었다. 병원에서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옆구리 부상 회복은 순조로웠다. 처음 며칠은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으면 병원까지 가기가 힘들었지만 이제는 혼자서 다닐 수 있었다. 진통제의 양도 줄었다. 의사도 회복이 순조롭다고 했다. 몇 주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미유키는 잘 먹고, 잘 쉬어서 3일 만에 낫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택시를 타고 평소 내리던 세이도 고교 정문 앞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걷고 싶었다. 죽을병도 아닌데 과보호하는 팀원들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갇혀 사느라 몸이 찌뿌둥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자기 전까지 거의 종일 몸을 움직이다가 꼼짝도 안 하려니 좀이 쑤셨다. 가볍게 걷는 것 정도는 재활에도 도움이 되리라. 어차피 일찍 들어간다고 해서 훈련에 참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유키는 일방통행 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다시피 했지만 차가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너구리 한 마리가 도로에 있었다. 먹이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누군가 버린 비닐봉지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괜히 놀라게 하지 않게 조심하며 지나가는데, 저 앞에서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오고 있었다. 너구리는 비닐봉지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점점 도로 한복판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너구리가 도로에서 벗어나는 속도보다 차가 오는 속도가 더 빨라 보였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격한 움직임은 자제하라는 의사의 말이 떠오르는 것보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몸을 낮추며 너구리의 엉덩이를 밀치고 그대로 손으로 땅을 짚은 다음 몸을 굴려 어깨부터 착지하며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충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옆구리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집중할 새 없이 미유키는 내리막길을 데굴데굴 굴렀다.
‘너구리는 무사하겠지.’
복슬복슬한 꼬리 같은 게 휙 지나가는 걸 본 듯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쳤다는 것을 깨다는 순간, 도움을 요청할 새 없이 눈앞이 컴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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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미유키는 낯선 남자에게 입술이 틀어막히고 있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입맞춤도 뭣도 아니라, 이것은 입술이 삼켜지고 있는 것이었다.
미유키가 의도했다거나 계획한 일일 리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미유키는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병원 밖을 나왔고, 택시를 타고 세이도로 돌아가다가 중간에서 내렸다. 걷다가 너구리를 발견했고, 차에 치일 뻔한 녀석을 구하려고 몸을 날렸다가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바위 같은 데 머리를 부딪혀 기절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낯선 천장이었다. 병원도 아니었고 기숙사도 아니었다. 당황한 미유키가 일어나려는 찰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에게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가장 반응이 빠른 감각은 청각이라고 한다. 그다음은 촉각, 시각, 후각 순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몸이 긴장하는 순간 뜨거운 힘에 끌어안겼다. 술냄새를 맡았을 때는 남자의 몸이 미유키 위에 올라탄 후였다.
미유키는 몸을 팽팽히 긴장했다. 얻어맞을 것을 예상했다. 남자의 팔에 눌려 자신의 팔을 들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얼굴을 맞는다. 과연 얼굴에 무언가 다가왔기 때문에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며 눈을 감았다. 예상대로 얼굴에 무언가가 거칠게 부딪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먹이 아니었다.
미유키의 고함과 호흡은 모두 상대의 입속에 삼켜졌다.
남자의 체중이 미유키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어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남자의 팔꿈치인지 무릎인지 무언가가 옆구리 근처를 찔러 통증 때문에 몸에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남자의 입술에서 벗어나려고 해봤지만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턱 언저리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굳은살이라도 있는지 뺨에 닿는 감촉이 거칠었다. 뜨거운 살덩어리는 집요하게 미유키의 입안을 침범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무거웠다. 너무 뜨거웠다. 호흡 곤란에 통증까지 더해져 정신이 몽롱해졌다. 남자에게서 나는 술냄새에 덩달아 취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미유키는 술에 취한 이 남자에게 애인으로 착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초면에 다짜고짜 다른 남자의 입에 혀를 집어넣는 것이 술버릇이라면 참 고약했다. 얼마나 단단히 취했으면 사람을 착각하는 것일까? 심지어 성별을. 귀엽지 않은 남고생을 여자로 착각하려면 술을 몇 병이나 마셔야 하는 것일까.
시야가 흐려졌다.
‘이건 지독한 꿈인가?’
여러 폭력을 겪어봤지만 이런 폭력은 익숙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참을 멋대로 미유키의 입을 휘젓던 남자가 마침내 입을 뗐다. 떨어진 것은 입술뿐으로 남자의 몸은 여전히 미유키의 몸 위에 밀착해 있었다.
미유키는 숨을 헐떡거리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자 고개가 힘 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생리적으로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너무해……”
남자는 놀라울 정도로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너무한 짓을 한 사람은 그쪽이라고 미유키는 생각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직도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자극해 봤자 좋을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손이 그 물자국을 훔치듯이 미유키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남자의 눈은 총기를 잃고 흐려져 있었다. 잠이든 술이든 완전히 깨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
남자는 미유키를 보고 말했지만 미유키는 그것이 남자가 착각한 상대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날 이후로 어떻게 한 번도 나타나 주지 않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이 사와무라 에이준은, 줄곧 기다렸단 말이야. 한참을 기다리게 한 주제에 막상 와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를 벌 주려는 건가? 그렇게나 나를 원망하는 거야? 뭐, 상관없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만족할 수 있어.”
까칠까칠한 감촉이 입술을 문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었다. 나이테를 더듬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남자는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피하지 마.”
남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예고까지 했는데 미유키가 피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얼굴이 잡힌 상태라 고개를 완전히 돌릴 수는 없었지만 남자의 입술이 미유키의 입꼬리로 빗나가는 것 정도는 되었다.
남자의 짜증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미유키의 입술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당신답긴 해. 쉽게 잡히지도 않고, 잡아도 잡힌 것 같지 않고…….”
이윽고 남자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남자의 체중이 완전히 미유키의 몸 위에 쏟아졌다. 갈비뼈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미유키는 헉 숨을 삼켰다. 남자의 머리가 미유키의 귀 옆에 떨어졌다.
“이젠 가지 마. 제발…….”
남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는 흐느낌 같았다. 미안해, 잘못했어, 그런 말들을 한참 속삭이던 남자의 호흡이 점차 느려졌다.
잠시 기다리자 남자에게서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미유키는 그제야 그가 완전히 잠들었다고 확신하고 남자의 몸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남자의 몸이 마침내 옆으로 굴러 미유키의 몸 위에서 내려갔다. 자세가 바뀌었는데도 남자가 깨지 않은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미유키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잠든 이 순간이 탈출할 절호의 기회란 건 알았지만, 미유키는 침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은 채 몸을 옆으로 말고 잠든 남자를 쳐다보았다.
앞머리가 흐트러져 눈을 가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앞머리를 넘기자 감긴 눈이 드러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분명 말했다. 미유키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모를 수 없었다. 당장 오늘까지만 해도 얼굴을 마주했던 사이였으니까. 느낌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분명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쓸어올렸던 앞머리에서 손을 뗐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그대로 몸이 아래로 당겨졌다. 어색한 자세로 남자의 몸 위에 쓰러졌다. 뜨거운 팔이 강한 힘으로 허리를 안아왔다. 미유키가 그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남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미유키는 당황했고 남자는 몸을 돌려 미유키를 제 옆에 눕히는 데 성공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그것이 싫은 듯 남자는 미유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미유키가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턱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꼴이 너무 앳되고 어린애 같아서 미유키는 오히려 확신할 수 있었다.
팔에 힘을 뺐다. 젖은 얼굴을 가슴에 파묻는 것을 미유키는 밀어내지 않았다.
미유키의 허리를 끌어안고 잠이 든 남자의 검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미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사와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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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고 낯선 환경이라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줄 알았는데, 피로 때문에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꿈을 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기숙사실에서 보내는 하루였다. 특별할 것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훈련하러 갔다가 교실에 가고, 쿠라모치와 잡담하고, 점심 먹고, 졸음을 참아가며 수업을 듣다가 하교하고, 훈련하고.
서로 내 공을 받으라고 조르는 후루야와 사와무라의 사이에 낀 채로 미유키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래, 술 취한 아저씨한테 입맞춤당한 일 같은 건 역시 꿈이지.’
하지만 평범하고 정상적이었던 그쪽이 꿈이었고 비현실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이쪽이 현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미유키는 여전히 낯선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사와무라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가 아는 후배라기보다는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야구부에서도 사와무라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먼저 일어나 있을 줄 알았는데, 숨소리를 듣자 하니 아직 자는 것 같았다.
미유키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무의식 상태여서 그런지 사와무라의 팔은 순순히 풀렸다.
세수를 하며 거울을 봤다. 분명 풀밭에서 굴렀는데 옷은 깨끗했다. 뒤통수를 만져보니 살짝 혹이 생겼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사라진 것은 휴대폰과 신발 한쪽뿐이었다. 자신의 얼굴도 기억하는 생김새 그대로였다.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몇십 년이 지나 있었다는 가설은 버렸다. 사와무라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곳이 미유키가 있던 시점보다 미래라는 얘기인데, 그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세수를 마친 미유키는 욕실에서 바로 나가지 않고 욕조 끝에 걸터앉았다.
문을 열면 사와무라가 있었다. 어젯밤의 일도.
미유키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서 왔다. 그리고 너는 술에 취해서 나를 애인으로 착각해 껴안고 키스했다.’
애인으로 착각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입을 맞추고 껴안고 몸을 더듬고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리고……. 모두 여자친구에게나 할 법한 일이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곱씹고 싶지도 않았다.
사와무라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유키가 먼저 일어난 것이 다행이었다. 사와무라가 먼저 일어났다면 품에 미유키가 안겨 있는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유키가 먼저 일어난 덕에 설명해야 할 일이 하나 줄어들었다.
문득 발소리가 들렸다. 사와무라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더는 회피할 수 없었다. 미유키는 조용히 화장실에서 나왔다.
사와무라는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까치집을 지은 뒤통수가 보였다.
이 상황을 잘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없었다. 거짓말을 할까? 뭐라고 한단 말인가?
사와무라는 얼마나 기억하는 것일까? 사람을 착각할 정도면 상당히 과음했다는 뜻인데, 그래도 운이 없다면 필름이 끊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미유키는 미성년자고 미유키가 아는 사와무라 역시 당연히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성인 사와무라의 주량이나 술버릇은 알지 못했다.
“사와무라.”
미유키는 일단 사와무라를 부르고 보았다. 사와무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 이름에 반응한다는 것은 본인이 맞는다는 뜻이었다.
사와무라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의 움직임은 여든 노인처럼 굼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사와무라의 얼굴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질리고, 그의 입이 벌어지고, 그가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은 찰나였다.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슬로모션을 깼다. 사와무라는 허둥지둥 파편을 치웠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사와무라는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미유키는 서로에게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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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무라는 크게 놀란 것치고 갑자기 나타난 미유키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왔냐는 둥 성질을 낼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계속 관자놀이나 이마를 문지르는 걸 보면 아직도 숙취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유리 파편을 치우고 제일 먼저 할 일이 물도 없이 약을 삼키는 것이었던 걸 보면.
“물이라도 좀 마셔.”
미유키가 페트병에 담긴 물을 건네자 사와무라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미유키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거리를 좁히자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 사라지지 않는 거지? 왜 안 없어지는 건데?”
미유키를 노려보는 눈이 번들거렸다. 미유키는 숙취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삼켰는데 약효가 벌써 나타나겠어? 물 좀 마시라니까. 식도에 걸려서 안 내려가겠어.”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주저앉아 있는 바닥에 물병을 내려놨다. 잠시 후 사와무라가 손을 덜덜 떨며 물병을 집어 들었다.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의심이 많아 보였다. 상대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미유키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알아챈 것처럼 사와무라 역시 미유키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눈치챘을까?
사와무라는 물 한 병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식탁에 가서 앉아보라고 했다. 사와무라가 또다시 주저앉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사와무라는 별다른 말 없이 미유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두 사람은 식탁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정오 무렵의 태양은 온 세상에 공평하게 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 빛은 한밤중의 자비로움은 없어서 숨을 어둠 따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밝은 곳에서 보는 사와무라는 확실히 나이가 들어 보였다. 기억하는 것보다 선이 굵어지고 뺨이 갸름해지긴 했지만, 늙어 보인다기보다는 성숙해 보였다. 피부는 주름 없이 팽팽했고 탄력적이었다. 20대 후반, 많아 봤자 30대 초반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짊어지고 있는 분위기가 그를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실제로 몇 살일까? 나는 몇 년 후의 미래로 온 것일까?’
여러 궁금증이 들었지만 미유키는 모두 삼켰다. 대신 사와무라에게 전한 말은 간단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과거에서 왔어.”
사와무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는지는 몰라. 학교에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잠깐 기절했는데, 눈 떠보니 여기였어. 이렇게 큰 집에서 살고 있고 술도 퍼마신 걸 보니 넌 성인인 게 분명하겠지. 그래서 여기가 미래란 걸 알게 된 거야. 네가 사와무라라는 건, 뭐, 딱 보니 알겠더라.”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커먼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미래로 오는 게 가능하다면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겠지. 내가 불청객이란 건 알아. 오래 있을 생각 없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알게 되면 바로 돌아갈 거야.”
사와무라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피식 웃은 것이다.
“돌아가겠다고?”
“그래.”
“언제는 허락받고 돌아갔나?”
“뭐?”
사와무라는 이런 괴상한 일을 몇 번이고 겪어본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사라질 거잖아?”
“난 어젯밤부터 있었어. 사라질 거였으면 진작 사라져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게, 왜 안 사라졌어?”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나도 모르지. 왜 다른 데로 안 갔냐고 묻는 거라면, 네가 여기 있으라고 했잖아.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빌고 매달리고.”
발끈하라고 던진 말이었지만 사와무라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실 뿐이었다.
“그런 말 해도 들어준 적 없었는데.”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언젠가를 회상하는 듯 시선이 미유키가 아닌 허공으로 옮겨갔다.
사와무라의 애인은 그랬던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와무라의 애인의 환각은.
추측건대 사와무라는 애인과 이별하고 환각에 제법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 이별이라는 것이 단순한 헤어짐을 뜻하는 것인지 죽음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사와무라의 반응을 봐서는 후자일 것 같았지만, 사와무라는 매사에 표현이 열렬한 사람이었으니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넌 이삼일이면 사라질 거야. 약을 먹었으니 잘하면 두세 시간 뒤에라도 사라지겠지. 가장 길게 있었을 때가 일주일인데 하루쯤이야.”
숙취해소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다른 용도의 약이었던 모양이었다.
“사와무라.”
미유키가 한숨을 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사와무라는 상체를 뒤로 빼며 팔짱을 꼈다. 다시 한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난 환각이 아니야. 두세 시간 뒤에 사라지지 않을 거고, 약을 또 먹어 봤자 안 사라질 거야.”
“모든 환각이 그렇게 말하지.”
사와무라의 말에 대답한 것은 미유키의 입이 아닌 배였다.
꼬르륵 소리에 미유키는 멋쩍게 웃었다.
“환각도 배가 고파지나?”
“내가 얼마나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은지에 달렸겠지.”
사와무라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천천히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 냉장고는 제법 알차게 차 있었다. 레토르트나 인스턴트 식품이 꽤 있기는 했지만 상한 반찬도 없었고 채소도 시든 것이 없었다.
사와무라는 계란프라이를 네 장 부쳐서 접시에 두 장씩 담았다.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여 인스턴트 된장국을 담은 그릇에 부었다.
그렇게 간단한 점심상이 차려졌다.
“환각한테도 밥을 주는 거야?”
“뭐라도 먹고 있으면 조용해지겠지.”
미유키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사와무라는 몇 입 깨작거리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음주의 여파로 입맛이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 식사량이 줄어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 하려다가 미유키는 밥알과 함께 잔소리를 삼켰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미유키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사와무라에게 빈 그릇을 보여주었다.
“환각이 밥그릇을 비울 수 있어?”
“인간의 상상력은 놀라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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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소파에 앉아 있는데 딱딱한 것이 발에 부딪혔다. 발을 들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그랗고 납작한 기계가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에 머리카락이나 먼지 같은 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면 청소기의 일종 같았다.
이곳이 미래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눈앞의 벽에 걸린 커다란 텔레비전도 그것이 미래의 물건임을 외형으로 외치고 있었다. 사와무라가 자기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심심하면 보고 있으라고 틀어주지 않았더라면 텔레비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카맣고 커다랬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매끈하고 판판했다. 뒤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라기보다는 검은 유리판 같았다. 전원을 켤 때 소리가 나지도 않았고 화질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뉴스가 나오길래 바로 텔레비전을 껐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거실이 고요해졌다.
머지않은 미래는 이 낯선 기계들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사와무라가 축축한 손을 하고 다가와 옆에 앉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소파치고 널찍해서, 둘이 앉았는데도 허벅지가 닿지 않았다. 오히려 사와무라는 그와 미유키 사이에 사람 한 명은 더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왜 껐어?”
“텔레비전이 스스로 꺼지다니 신기하지 않아?”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농담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재미가 없어져 순순히 답을 주었다.
“미래를 알고 싶지 않아.”
“안 궁금해?”
“궁금하긴 해.”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근데 왜 안 봐?”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사와무라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표정이 바뀌었다. 안심한 듯한 기색이었다.
“너답네.”
진동이 울렸다. 사와무라는 인상을 쓰며 휴대폰을 꺼냈다.
미래의 휴대폰은 텔레비전처럼 크고 얇았다. 미유키의 휴대폰은 폴더폰이었고, 그마저도 미래로 넘어오면서 잃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면 위로 사와무라의 손가락이 날아다니는가 싶더니, 사와무라는 그 기이한 기계를 이내 한쪽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구에게 무슨 연락을 받은 것일까? 물어본다고 해도 미유키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유키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양말을 신은 두 발. 운동화는 현관의 신발장 빈자리에 넣어두었다. 왼쪽만. 오른쪽 신발은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신발은 왼쪽뿐이었다. 휴대폰과 마찬가지로 시간 여행을 하며 잃어버린 것인지, 넘어져 구를 때 벗겨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돌아가야 해.”
“왜 또 그 소리야.”
“네가 들어주지 않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해.”
사와무라가 자리를 피하려는 듯 일어섰다. 미유키가 따라 일어났다. 팔을 잡으려고 하자 사와무라가 몸을 돌려 피했다. 미유키는 그대로 허공을 쥔 손을 말아 제 옆에 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만해?”
“그만하라고.”
사와무라가 이마를 짚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돌아갈 거면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냥 돌아가. 왜 나한테 선택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 물어보고 들쑤시는 거야? 기어코 내 입으로 꺼지란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래?”
“난 환각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었다면 진작 돌아갔을 거야.”
“여기 있기 싫다고?”
“네가 싫어서는 아니야. 그냥 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뿐이야.”
“정말?”
마주한 사와무라는 입술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가 번들거렸다.
“무슨 땀을 그렇게…….”
미유키가 손을 뻗자 사와무라는 다시 몸을 피했다.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미유키?”
“무슨 생각?”
“네가 여기 온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
“…….”
“네가 여기 온 데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네가 돌아가지 못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봤어?”
“그럼 그 이유가 뭔데? 너? 너 하나 때문에 내가 미래로 왔다고? 뭘 위해서? 자의식 과잉 아니야?”
“그래! 나도 알아. 이기적이라고 하든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든 뭐든, 나도 안다고.”
사와무라가 헐떡거렸다. 땀에 젖은 앞머리에 반쯤 가린 눈은 초점을 쉽게 맞추지 못하고 사방으로 헤엄쳤다.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하루도 안 지났어. 하루 정도는 부정하고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거잖아. 네가 여기 없다는 거, 이게 다 꿈이란 거…… 알고 있다고. 하지만 네가 아니라며. 계속 있을 거라며. 그런데 왜 자꾸 또 떠나겠다는 소릴 하는 거야. 이제 돌아왔잖아. 오자마자 이런 얘기 할 필요는 없잖아.”
“사와무라, 내가 한 말이 널 헷갈리게 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말한 사라지지 않겠다고 한 건, 난 환각이 아니라는 뜻을 전하려는 것뿐이었어. 너한테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어.”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비틀거렸다.
“상처? 그래. 넌 이유가 있어서 나한테 온 거야. 그래, 그거야. 나한테 고통을 주려고…… 벌을 내리려고…….”
“뭐? 아까부터 뭔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온 게 무슨 별일이라고 그렇게 의미 부여를 하는 거야? 미래의 나랑 사이가 멀어지기라도 한 거야?”
사와무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미유키에게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컨디션이 나빠져서 미유키에게서 전 애인을 또 겹쳐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와무라가 크게 휘청거렸다.
“사와무라!”
“왜냐하면 당신은…….”
미유키가 팔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사와무라는 끈이 잘린 인형처럼 바닥에 픽 쓰러졌다.
-
쓰러진 사와무라는 뜨거웠다. 단순한 숙취가 아니라 컨디션 불량이 겹친 것 같았다. 집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열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약은 보이지 않았다. 흔한 감기약 하나 없었다.
집 열쇠도 없고 돈도 없고 길도 모르니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미유키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수건을 찬물에 적셔 얼굴과 몸을 닦아주는 정도뿐이었다.
사와무라가 태아처럼 몸을 옆으로 말아 누웠다.
“똑바로 누워. 수건이 떨어지잖아.”
“잘 거야.”
고집스러운 말투. 미유키는 찬물에 적신 수건을 목덜미에 대주었다.
“그래, 좀 자.”
“자고 일어나면 네가 사라지겠지.”
“내가 사라지면 좋겠어?”
“아니.”
“근데 왜 자려고 해?”
“네가 사라질 테니까.”
사와무라는 괴로워 보였다.
“자고 일어나도 난 여기 있을 거야.”
사와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유키의 말을 믿는 것 같지도 않았다.
미유키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던 그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미유키는 그가 잠든 틈을 타 다시 집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다. 해열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 사와무라는 문 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미유키는 침대 옆에 눈을 감고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잠의 안식에 안겨 있어야 할 텐데 얼굴은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바보.”
‘왜 갑자기 또 욕인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상상이 되어 미유키는 큭큭 소리내어 웃었다. 그 작은 웃음 소리는 사와무라의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짓눌려 뭉개졌다.
‘뭘 해야 하지?’
미유키는 괜히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픈 사와무라는 정말 생소한 개념이었다. 미유키가 아는 사와무라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는 말이 맞나 보다는 놀림을 들을 정도였다. 이렇게 다 큰 어른이 되어서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사와무라는, 사와무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와무라의 희미한 숨소리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창밖으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참새가 우는 소리,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 이렇게 많은 소리가 정적을 채우고 있는데도 미유키는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와무라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달력에 적힌 생경한 숫자도, 생전 처음 보는 기계도, 얇아진 텔레비전도 아니었다. 이 세계가 미유키가 아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큰 소리로 알려주는 것은 사와무라의 이 침묵이었다.
이곳의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아는 사와무라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자기 공을 받으라고 쩌렁쩌렁 외치며 미유키를 깨우는 그 후배가 아니었다. 목소리도 미소도 크고, 미유키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고,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남의 일에 간섭하고, 쉽게 호언장담을 하는 주제에 포기란 건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소년이 아니었다.
잘 웃지도 않고 무기력하며 쉽게 발끈하지 않고 허약했다.
단순히 철이 든 것일까? 아니면 한 인간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버릴 정도로 거대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크나큰 슬픔 앞에서 한없이 낙천적이고 유쾌한 성격을 유지하긴 힘들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이 본연의 성격이 작은 슬픔과 괴로움에 조금씩 깎여나가는 것이라면 사와무라는 커다란 한 번의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 단번에 철이 들게 된 것이다. 미유키는 감히 그렇게 짐작했다.
사와무라가 또다시 뒤척거렸다.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안 좋은 꿈에 시달리는 듯했다. 웅얼거리는 말은 발음이 불분명했다. 하지만 세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돌아와.
벌써 몇 번이고 들은 말이었다.
손 하나가 툭 하고 침대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미유키는 텅 빈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넌 이유가 있어서 나한테 온 거야. 나한테 고통을 주려고…… 벌을 내리려고…….’
꿈에서조차 나올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리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미유키가 아는 천진한 고등학생이 그런 죄를 저지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반말하기, 멱살 잡기, 마운드에서 미유키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미유키가 아는 사와무라가 하는 짓이라곤 전부 용서할 수 있는 것뿐이었다. 한두 번 놀리거나 공을 받아주지 않겠다 으름장을 놓는 것으로 그의 잘못을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사와무라의 문제도 그렇게 미유키가 간단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유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지금 상태를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었다. 어쨌거나 사와무라는 어른인 것이다. 미유키의 후배조차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미유키는 돌아갈 사람이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면서 어중간하게 챙기려고 들다가 버리고 가는 것이 더 무책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감정도 필요 없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
사와무라는 오랜만에 달콤한 꿈을 꿨다. 죽었던 미유키가 다시 돌아오는 꿈이었다. 사람 속을 살살 긁는 말을 하고, 너구리처럼 능글맞게 웃고, 잔소리를 했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걸어 다녔고 그림자가 있었고 밥을 먹었다.
미유키는 살아 있었다. 너무나 달콤한 꿈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깨고 싶었다. 모순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동물인 것이다.
귀여운 아기나 동물을 보면 깨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귀여움 공격성이라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긍정적 감정이 지나치면 뇌가 조절해서 항상성을 회복하려는 감정 조절 기제라고 한다.
너무 행복하니까, 행복함이 더 높이 높이 고조되기 전에 여기서 멈추고 싶은 것이다. 꿈이란 깨기 때문에 꿈인 것이고 시간을 지체할수록 사와무라는 더 높은 곳에서 추락하게 되니까.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잠으로 도피하며 눈을 떴을 때 미유키가 제발 사라졌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미유키였다.
사와무라는 지금 느끼는 여러 감정 중에 실망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몇 시간 전에 약을 먹었으니 분명 약효가 돌고 있을 텐데도 왜 아직도 미유키가 보이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약이 부족했던 것일까?
협탁 위에는 약통이 쓰러져 있었고 흰색 약 몇 알이 튀어나와 있었다. 사와무라는 그 약을 집어 들었다.
미유키가 유리컵을 건넸다.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물을 마시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떨어뜨려서 깨뜨리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리라.
과연 “조심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잠들기 전의 미유키와 똑같은 미유키라는 의미였다. 앳된 얼굴을 한, 과거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미유키.
이번 환각은 여러 면에서 특이했다. 환각인 것만 해도 이미 정상 범주를 넘어섰는데 과거에서 왔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미친놈이 아닌가? 그런 미친놈을 머릿속으로 만들어 낸 사와무라는 그러면 얼마나 미친놈이란 말인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지?”
미유키가 화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미쳐야만 미유키를 볼 수 있다면…….
사와무라는 손바닥을 기울여 그 위에 있던 작고 동그랗고 하얀 것들을 약통에 집어넣었다.
“안 먹어도 돼?”
“응.”
미유키는 더 묻지 않았다.
-
사와무라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다행히 단순 피로 누적이었는지 열이 조금 내렸다. 미유키는 미음이라도 끓일까 싶어서 부엌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사와무라가 소파에 던져둔 휴대폰이었다.
그대로 울리게 놔두려던 미유키는 멈칫했다.
‘환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기회다.’
서둘러 소파 앞으로 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발신인의 이름이 번쩍였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반가울 수 없는 이름이었다. 미유키는 확신했다. 이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뭔가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다. 쿠라모치 요이치라는 남자는 분명 미유키가 아는 그 남자 그대로일 것이라고.
‘어떻게 해야 전화를 받을 수 있지?’
미유키는 녹색 수화기 그림을 눌렀지만 통화가 연결되지는 않았다. 미유키를 재촉하듯 휴대폰은 연신 진동했다.
미유키가 당황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낭패하기도 전에 다시 울렸다. 미유키는 다시 수화기 그림을 연신 눌렀다. 누르는 게 아닌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손가락이 화면에서 미끄러졌다. 그게 답이었는지 화면의 모습이 바뀌더니 목소리가 나왔다.
“야, 이 새끼야! 왜 전화를 이제 받아!”
“여보세요?”
“네가 덜 맞았구나, 병원에 내 연락까지 씹……”
버럭버럭 외치는 소리는 무시하고 미유키는 말허리를 잘랐다.
“쿠라모치 맞지?”
“너 누구야?”
“나 미유키!”
그리고 바로 전화가 끊겼다. 기껏 연결된 건데. 미유키는 꺼진 화면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잘못 걸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미래의 사와무라와 자신이 연을 끊고 산 것도 아닐 텐데,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전화 좀 대신 받은 게 놀라운 일인가?
과연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는 동작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안녕, 모치 군. 애석하게도 잘못 건 게 아니야.”
“너 누구야? 장난치는 거면 죽여버린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며 울렸다.
“차라리 장난이면 좋겠네.”
“헛소리 그만하고 널 고용한 정신 나간 놈이나 바꿔. 이게 진짜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아예 가짜를 데려다가 끼고 사는구나.”
“설마 사와무라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사와무라!”
고막을 찢을 듯 큰 목소리에 미유키는 휴대폰을 잠깐 귀에서 뗐다. 사와무라가 옆에서 같이 듣고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했다.
“사와무라는 됐고, 나 좀 도와줘.”
“네가 누군지 알고?”
“알잖아? 누군지.”
“내가 아는 건 네가 연기하는 놈이고. 그래, 인정할게. 그 자식을 흉내 내던 인간 중에 네가 가장 비슷하긴 해. 그 짜증 나는 말투까지. AI는 아니겠지? 이거 보이스피싱이냐?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지만 설마.”
“에이, 에, 뭐?”
쿠라모치가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투성이였다. 보통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 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왜 사칭범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야, 이 새끼야, 부끄럽지도 않냐?”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쿠라모치는 답지 않게 상당히 흥분하고 있었다. 미유키가 원하는 방향이 절대 아니었다.
“일단 내 얘기 좀 들어봐.”
“경찰에 신고한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이 세상에 미유키 카즈야가 두 명이 존재한다는 게 들켜서 좋을 일은 없었다. 미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10분 내로 경찰차가 들이닥칠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야쿠시와의 가을 대회 결승전.”
“뭐?”
“부상을 숨기고 있던 내게 네가 말했지. 캡틴으로서의 책임감이냐고 선수로서의 자부심이냐고.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이긴 다음에 쓰러지라고.”
그때의 대화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쿠라모치 본인에게도. 쿠라모치도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고 둘만 아는 일이었다.
전화기 너머는 한동안 조용했다. 숨소리만이 들렸다. 쿠라모치의 것인지 미유키 본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끊었냐?”
미유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유키?”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또 누가 있는데?”
“그래, 너 같은 놈이 또 있기도 힘들지. 왜 하필…… 아니, 대체 어떻게……”
혼란스러운 말투였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건 미유키 쪽이었다.
“뭐야, 쿠라모치? 사람을 다짜고짜 사칭범 취급 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이럴 게 아니라 직접 얼굴 보고 들어야겠어. 너 어디야?”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사와무라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귀신 같은 형상을 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유키는 재빨리 “사와무라 집”이라고 말했다. 통화를 종료하기도 전에 사와무라가 휴대폰을 낚아챘다.
하지만 사와무라의 손에 휴대폰이 넘어갔을 땐 이미 통화가 종료되어 있었다. 쿠라모치 쪽에서 바로 전화를 끊은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야?”
사와무라가 다시 물었다. 잇새로 튀어나오는 분노를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보면 몰라? 통화했지.”
“누구랑?”
“쿠라모치.”
“왜?”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을 뿐이야.”
그 말에 사와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전화를 왜 네가 받아? 속셈이 뭐지?”
불륜 상대와 통화라도 한 것처럼 예민한 반응이었다. 지금 상황이 다소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쿠라모치의 전화를 좀 받았다고 이렇게 날을 세우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건 추후의 문제였다. 미유키는 일단 이 통화의 목적을 상기했다.
“신기하지 않아?”
“뭐?”
“내가 네 말대로 네 뇌가 만들어낸 상상물이라면, 방금 쿠라모치는 누구랑 통화를 한 걸까?”
“너 또 궤변을…….”
“쿠라모치는 아마 여기로 오고 있을 거야. 그 녀석이 오면 이제 알 수 있겠네. 이 모든 게 너의 대단한 환각인지 아닌지.”
사와무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호흡이 얕다는 뜻이었다.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을 텐데 흥분하면 좋지 않았다. 미유키가 침대로 돌아가라고 하자 사와무라는 의외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말을 들었다. 방금 전까지 미유키에게 화를 내놓고 고분고분했을 때부터 속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했다.
“씻고 싶어.”
“욕실에서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
“아니.”
“새 수건이랑 물을 가져올게.”
“그래.”
미유키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바람이라도 불었나 싶어서 돌아보니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뭐야?”
“내가 열어주기 전까지 나오지 마.”
“사와무라!”
미유키가 문을 두드렸지만 사와무라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두어 번 두드리다가 포기했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일에 괜히 힘 써봤자 시간과 에너지만 허비하는 것이었다.
미유키는 팔짱을 끼고 욕조에 걸터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쿠라모치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빨리 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쿠라모치가 버럭 외쳤다.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갑자기 찾아와선.”
사와무라가 시치미를 뗐다. 미유키의 전화를 받고 쿠라모치가 달려왔는데도 아직도 미유키가 환각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단한 고집이었다.
미유키는 이쯤 해서 쿠라모치를 부를지 잠시 고민했다. 쿠라모치가 나서면 사와무라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주긴 할 것이다.
하지만 미유키는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쿠라모치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었고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 집에 뭘 부르는 거야?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뭘 했다고 그래요?”
“네가 꾸민 짓이 아니라고? 그러면 당했냐? 뭘 달라고 하던? 배우 지망생이라던? 얼마나 줬어?”
“갑자기 남의 집에 찾아와서 왜 이래요?”
“이제 걔 좀 놔줘. 걔가 불쌍하지도 않냐?”
“누굴 말하는 건데요?”
“시치미 떼지 마, 알잖아!”
“이 집엔 나 말고 아무도 없어요.”
“내가 통화한 사람은 누군데?”
“통화?”
“녹음했거든? 들려줘?”
“들렸다고요?”
“누굴 만나서 뭘 하든 간섭 안 하겠는데 이러는 거 건강하지 않다는 건 알아둬라.”
“목소리가 들렸어요?”
쿠라모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혔거나 한숨이라도 쉬는 것이리라. 일단 미유키는 한숨이 나왔다. 과연 이어지는 쿠라모치의 목소리는 차분해져 있었다.
“일단 좀 앉아. 네 안색이 말이 아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는지 발소리가 들렸다. 사와무라가 자신을 환각 취급 하고 있었고 쿠라모치도 자신을 여전히 사칭범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답답한 일이었다.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병원엔 왜 안 갔어? 오늘 예약 있었잖아.”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서요.”
“괜찮아지긴. 네 지금 상태를 봐, 괜찮은지. 약은 먹었어?”
“자고 일어나면 나아요.”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어디 숨겼어?”
“뭘요?”
“‘누구’겠지.”
쿠라모치의 말에 사와무라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누구를요?”
“알잖아, 이 자식아. 이제 빙빙 돌리는 거 그만해. 너답지 않게.”
“난 숨기는 거 없어요.”
그래, 숨겼다기보다는 가둔 거지. 미유키는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과연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풀리며 문이 열렸다.
사와무라는 문을 잠갔다고 생각했겠지만 열에 들떠서인지 흥분해서인지, 안에서도 열리는 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허술한 놈.
좀 더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대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을 것 같았다.
쿠라모치와 사와무라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된 지는 이틀 정도 된 것 같은데…….”
무어라 말을 하던 사와무라의 입이 멈췄다. 멋대로 나왔다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더니 그냥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자 쿠라모치의 시선이 사와무라의 눈길을 쫓았다.
“넌…….”
쿠라모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보는 사와무라 외의 인간. 이 세계의 쿠라모치 역시 어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와무라처럼 키가 크고 체격이 좀 더 다부져졌으며 젖살이 빠졌다. 하지만 바짝 세운 헤어스타일과 성질 나빠 보이는 눈매는 그대로였다.
쿠라모치도 지금도 야구를 하고 있을까?
쿠라모치는 관찰하는 눈으로 미유키를 뜯어보고 있었다. 하나라도 오답이 있으면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유키는 뺨을 긁었다.
“안녕, 쿠라모치.”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쿠라모치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리고 미유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미유키의 악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미유키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은 것이다. 사와무라의 눈이 조금 커진 것을 보아 사와무라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쿠라모치의 포옹은 금방 풀렸다. 미유키는 괜히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키가 비슷해졌네. 기분 나빠.”
“시끄러워, 이 미친놈아.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쿠라모치의 시선이 다시 미유키를 훑었다. 그리고 갑자기 미유키의 코를 꼬집고 비틀었다.
“뭐야?”
“말랑하네.”
“왜 이래?”
미유키가 매몰차게 손등을 후려쳤지만 쿠라모치는 잽싸게 피했다. 그리고 사와무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성형한 건가?”
쿠라모치의 등에 가려 미유키에게는 앉아 있는 사와무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쿠라모치가 이어서 물었다.
“그럼 닮은 사람?”
“본인이다.”
미유키가 친히 대답해 주었지만 쿠라모치는 여전히 사와무라를 보고 있었다.
“진짜 미유키 카즈야라고?”
사와무라가 마침내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미유키에게 드러나며, 서로 눈이 마주쳤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가 아닌 미유키를 보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미유키가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
기껏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사와무라는 다시 쓰러졌다. 쿠라모치가 해열제를 사러 갔다.
둘만 남자 사와무라가 쉰 목소리로 불렀다.
“이리 와.”
미유키는 순순히 그 앞에 서되 일부러 닿지 않는 거리에서 멈췄다.
“몸이 안 좋으면서 왜 무리해?”
“안심해서 긴장이 풀려서 그래. 이리 가까이 오라고.”
사와무라가 상체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미유키는 팔짱을 꼈다.
“다짜고짜 난 왜 가둔 거야?”
“숨긴 거지.”
“왜?”
“남이 보면 사라질 줄 알았어.”
“뭔 소리야, 그게.”
“환각인 줄 알았으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맞아, 미안.”
미유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사와무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사와무라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전처럼 미유키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어쩐지 짐작이 갔다.
“난 비눗방울이 아니야. 건드린다고 터져서 사라지지 않아.”
사와무라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말해봐, 사와무라.”
사와무라는 상기된 뺨과 확장된 동공으로 미유키를 쳐다보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짝 집중한 얼굴이었다. 초침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저 소리와 비슷하게 미유키의 심장 역시 사와무라의 손바닥 아래에서 힘차게 뛰고 있을 것이다. 미유키가 쥐고 있는 사와무라의 손목에서 그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처럼.
“심장이 뛰는 환각이 있을까?”
미유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와무라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타인의 눈에도 보이고 만져진다면, 허구가 아니었다. 사와무라의 머리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잡힌 손을 뒤집어 그의 손을 잡았다. 한겨울에 포근한 털장갑을 낀 듯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은 그 온기를 힘껏 온몸으로 퍼트렸다. 얼었던 몸에 피가 돌고 몸이 데워지며 이제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환각이 아니라면, 실존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면, 잡을 수 있다.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을 놓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
쿠라모치가 레토르트 죽과 해열제를 사 왔다.
미유키가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권했지만 쿠라모치는 사양하며 곧바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었는데 의외였다.
“스케줄이 있었는데 급하게 미루고 온 거라 가봐야 해. 지금 이것저것 궁금한 거 물어봐 봤자 별 대답도 못 들을 것 같고. 너희끼리도 아직 대화가 별로 안 된 것 같은데, 맞지?”
눈치가 빠른 것 역시 여전한 듯했다.
사와무라가 일어나려고 하자 쿠라모치가 그의 어깨를 눌러서 제지했다.
“됐어. 그냥 쉬고 있어. 잘 챙겨 먹는 거 잊지 마. 약이든 밥이든.”
“알아서 할게요.”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말고. 쟨 돌아갈 사람이야. 잊지 마. 지금 괜찮아진 것 같고 다 나은 것 같아도, 멋대로 중단했다가 쟤 떠나게 되면 더 심해지는 거야.”
“떠난다면 말이죠.”
“너…….”
“떠날 거야.”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흘겼다.
“간다. 배웅 안 해도 돼.”
환자를 내버려두고 미유키만 배웅하러 현관으로 따라나왔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
“놀라긴 했어. 사와무라에게 대강 듣긴 했는데, 과거에서 왔다고?”
“그래.”
“솔직히 믿어지지 않아. 이렇게 눈으로 보고 만져보기까지 했는데도.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이잖냐, 상식적으로.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네가 이렇게 있는 걸 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기적을 믿는 거야, 쿠라모치?”
“내가 믿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네.”
쿠라모치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열고 나갈 줄 알았던 그는 멈춰섰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미유키를 돌아봤다.
“왔다는 건 갈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난 솔직히 안 갔으면 좋겠다.”
“…….”
“하지만 넌 가려고 하겠지. 나한테 널 붙잡을 권리도 말릴 권리도 없기는 하지만, 남는 사람 생각을 좀 해주면 좋겠어.”
“…….”
“아직 1년밖에 안 됐거든.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어. 그 사건은.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고 사와무라가 가장 힘들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흔들릴 줄은 몰랐어. 한 번이어도 이러는데 두 번의 이별을 걔가 감당할 수 있을지…… 난 모르겠다. 물론 강한 녀석이니까 언젠가 회복하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무엇을 얼마나 희생해야 할지.”
“쿠라모치.”
“너한테 이런 부탁 하는 거 염치 없는 거 알아. 너한테는 아무 의무도 없다는 것도. 결국 사람은 이기적이니까 사람이든 세상이든 내 사정대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거지. 그래도…….”
쿠라모치가 고개를 숙였다.
“사와무라를 부탁한다. 여기서 지내는 시간만큼이라도…… 그 녀석을 잘 부탁해. 네 말이라면 들을 테니까. 너라면 저 녀석을 분명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미유키는 어떠한 확답도 약속도 하지 않았다. 쿠라모치는 떠났다. 기적도 믿지 않는다는 녀석이 미유키는 믿는다고 말했다.
-
약을 먹어서인지 내리 잠을 자서 그런지 다음 날 사와무라는 언제 아팠냐는 듯 말끔히 나았다.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부엌에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뭐 해?”
“벌써 일어났어? 더 자. 시끄러우면 방에 들어가서 자도 돼.”
미유키는 소파에서 지내고 있었다. 집주인에 환자이기까지 한 사람의 침대를 빼앗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자 봤자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물 한 컵을 손에 쥐고 멍하니 서서 사와무라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무기력하게 소파에 늘어져 있던 어제의 사와무라는 꿈 같았다. 아침부터 온갖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눈은 빛나고 뺨에는 혈색이 돌았다.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5시.”
“지금 7시인데?”
“조깅도 하고 왔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전혀.”
과연 사와무라는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물 먹은 솜처럼 처져 있는 것보다는 이쪽이 익숙하기는 했다. 하지만 미유키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너무 순식간에 나은 거 아냐? 그렇게 골골거렸으면서. 쿠라모치가 뭘 준 거야? 도핑 테스트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아프게 하던 원인이 사라졌으니 더 아플 이유가 없지.”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그릇을 식탁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미유키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나르는데 수저를 챙기던 사와무라와 동선이 겹쳤다.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팔꿈치를 잡았다. 불을 다뤄 뜨거워진 손이 도드라진 뼈를 문질렀다. 미유키의 팔이 움찔 튀었다.
“미안.”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귓불을 스쳤다. 미유키는 어쩐지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두 사람은 아침으로는 호화로운 식사를 했다.
“미유키, 할 말 있어.”
“뭔데?”
“내가 연상인데 왜 반말 해?”
“내가 선배니까?”
“하지만 이제 내가 연상이잖아?”
“아니지, 내가 먼저 태어난 건 변함없잖아?”
“지금 시점을 봐야지.”
“그렇게까지 고등학생을 이겨 먹고 싶어? 어른이 되어서는.”
“인정했네, 넌 고등학생, 난 어른.”
“난 어른한테도 반말해.”
“할 말이 없네.”
사와무라는 아주 명랑해졌다. 깨작거리던 어제와 달리 밥도 잘 먹었다.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네가 진짜라면, 너랑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아.”
“‘진짜라면’이 아니고 진짜라고.”
“그랬지.”
사와무라의 발가락이 미유키의 발등을 건드렸다. 미유키가 발을 치우자 이번에는 발목을 건드렸다. 그만하라고 다리로 발을 툭 쳐냈지만 사와무라는 계속 건드려 왔다. 발을 아예 밟아서 못 움직이게 했다. 아프다고 금방 뺄 줄 알았더니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발을 치워줄 때까지 가만히 밟힌 채 있었다.
“뭘 하고 싶은데?”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잖아.”
“프로 선수들 공 받아보고 싶지 않아? 내가 이제 어떤 공을 던지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해.”
“그렇지?”
“하지만 몇 년 기다리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야.”
미유키가 빈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잘 먹었어.”
사와무라가 손을 뻗어 미유키의 손등 위에 얹었다. 사와무라의 왼손이었다. 그의 손은 크고 길쭉했다. 여리던 뼈마디는 성장을 마쳐 굵직해졌다. 미유키가 눈짓하자 사와무라는 오히려 그의 손을 쥐었다.
“미유키, 지금 바로 할 수 있는데 왜 몇 년을 기다려?”
“놔.”
“싫어.”
“어린애처럼 굴지 마.”
“어떻게 다시 찾았는데 놔주라고? 내 손으로 보내주라고? 안 되지.”
사와무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유키는 몇 번 손을 당겨 빼내려고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왼손으로 반쯤 남은 물잔을 잡아 그대로 사와무라의 손에 뿌렸다. 찬물이 끼얹져지자 사와무라는 순간 놀라서 힘이 빠졌고 미유키는 손을 뺐다.
“네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난 돌아갈 거야.”
사와무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어이 돌아가겠다고?”
“진구대회에도 출전 못 했어. 봄 선발 경기에는 꼭 내가 있어야 해.”
사와무라는 야구는 팀 스포츠라 너 하나 없어도 팀은 굴러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만을 말하는 것일 뿐이었다. 4번 타자에 캡틴, 포수…… 그것도 동시대 최강 초고교급 포수라고 일컬어지는 미유키가 빠지면 채워야 할 빈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사와무라가 알 바 아니었다.
“그래, 어디 돌아가 봐. 어떻게 돌아갈 건데?”
“그걸 이제 알아내야지. 처음으로 거슬러 가 본다면 답이 있을 거야.”
“돌아갈 수 있는 거였으면 네가 왜 아직도 여기 있을까?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돌아갈 수 있다면 진작 돌아갔을 거라고. 여기 오게 됐으면 여기 있으란 말이야. 넌 그저 떠날 생각뿐이지. 어째서 그러는 거야? 왜 매번 나를 떠나는 거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있다고 해도 그건 내 선택이고 내 마음이야.”
“그럼 내 마음은?”
“네 마음은 네 마음이지. 너, 너무 과하다고 생각 안 해? 내가 뭐라고 이러는 건데? 네가 뭔데? 전에 누가 널 떠나서 얼마나 상처를 받았길래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지는 몰라도,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네가 뭘 안다고 이래?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 아무것도 모르지. 아무것도 안 알려줬으니까.”
“네가 알 바 아니야.”
“그럼 감히 추측해 볼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은 죽었고 넌 괴로웠어. 너무 괴로워서 환각까지 봤겠지. 그러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나도 또 다른 환각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애인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거고 그게 너한테 큰 충격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떠나는 일에 두려움이 생긴 거지.”
“멋대로 넘겨짚지 마.”
“애인이 죽은 지 1년쯤 됐다고 했나? 아직 얼마 안 돼서 이러는 거겠지. 이 괴로움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이제 1년이야. 2년, 3년 지나면 결국 잊게 될 거야.”
“어떻게 잊는다고 말할 수 있어! 난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잊을 수 없어. 잊어선 안 된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누군가 널 떠나는 게 싫어졌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 그래, 난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네가 애인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지. 나랑 있었던 일이 아니잖아. 나한테 잘못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난 네 애인이 아니니까. 날 붙잡고 있는다고 그 사람도 돌아오지는 않아.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넌 돌아왔잖아.”
“난 안 죽었으니까.”
“하지만 넌…….”
“나는 뭐?”
“…….”
“죽었다고?”
미유키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숨길 생각이 없나 싶을 정도로 사와무라는 티를 내고 있었다. 다만 짐작이었던 것은 어제 쿠라모치와의 대화를 통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미래의 내가 죽고 나서 과거의 모습으로 부활한 게 아니야. 난 그냥 나야. 가까운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하면 네가 이렇게 크게 충격받은 것도 이해해. 나도 죽은 거라면 네가 이렇게 나한테 간절히 매달리는 것도 납득이 가. 죽은 내가 돌아올 수 있다면 네 애인도 돌아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날 보낼 수 없는 거야. 내가 떠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이겠지. 그러면 네 애인 역시 돌아와도 다시 보내줘야 한다는 소리니까.”
“그래, 너 죽었어. 그것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죽었어. 살아날 희망이고 뭐고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 그게 네 미래야. 어차피 돌아가 봤자 십몇년밖에 더 못 살고 죽는다는 소리야.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있다고? 봄 선발, 고시엔, 어차피 죽을 건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
“돌아갈 방법을 찾을 거라고 했지? 다시 묻자, 어떻게 찾을 건데? 어디에 방법이 나와 있는데? 책? 인터넷? 집에만 있어서는 찾기 어렵겠지. 그걸 아니까 너도 자꾸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걸 테고. 하지만 너 혼자서라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야. 넌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죽은 사람이라고. 그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넌 신분도 없고 돈도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넌 아무것도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과거에서 미래로 왔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거라고? 양방향인 줄 아나 본데 그 길은 일방통행이야. 여기 이렇게 처박혀서 못 돌아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넌 못 돌아가. 못 죽어. 이건 내 의지도 네 의지도 아니야. 이게 섭리야. 그렇게 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