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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Summary: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시씨가 죽음을 외면하려 애쓴다.

Notes:

(See the end of the work for notes.)

Work Text:

어린 예비 황후는 곁을 맴도는 죽음을 모르는 체했다. 벌써 나흘째였다.

시작은 뮌헨 레지덴츠 궁전에서 열린 성대한 환송식이었다. 공들인 자수와 오밀조밀한 레이스로 장식되고 끝단이 녹색으로 물든 드레스를 차려입은 엘리자베트는 단연 그날의 주인공이었다. 다른 혼수와 마찬가지로 그 드레스 역시 예비 황후에게 요구되는 의례를 위해 새로이 장만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예비 황후가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후 페스트잘바우에서는 왕실 환송 만찬이 이어졌다. 다만 막스 공작의 둘째 딸은 궁정 예복이 익숙지 않아 열세 가지 코스 요리를 전부 남기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만찬의 끝에서 막시밀리안 2세 국왕이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미래의 황후 엘리자베트를 기리는 공식 축배를 제의했다. 그러나 정작 그 주인공은 축배를 즐기질 못했다. 차라리 남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이길 바랐다. 모든 순간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너무나 생경한 탓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들 보는 거야? 내가 뭐라고?’

포센호펜에서 뛰놀 적에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것, 그건 타인의 기대였다. 포도주잔을 든 손이 어쩔 수 없이 떨려왔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순간 엘리자베트의 시선 끝에는 죽음이 자리했다. 평소와 달리 너무 멀었다. 그 낯을 더 샅샅이 보고 싶었는데, 거리 탓에 가물거리기만 하였다. 미소 짓는지, 잔뜩 찡그렸는지, 그도 아니면 울 것만 같은지⋯.

“세상에, 시씨!”

루도비카가 가리키는 새하얀 식탁보에는 어느새 붉은 와인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쑥덕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건지, 이렇게 어설퍼서야 빈으로 보내어도 황후 노릇을 하겠나. 아니다, 저렇게 천진하니 황제를 사로잡은 거겠지. 그 사랑스러운 헬레네가 퇴짜 맞았다잖아.

두 뺨이 화끈거렸다.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직감이 스쳤다.

‘그에게 시선을 두어서는 안 되는구나.’

엘리자베트가 그날 포기해야 마땅했던 건 바이에른 왕위 계승권 따위가 아니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내밀었던 손을 맞잡은 대가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제국의 황후에게는 젊고 근사한 황제로 충분해야 했다. 검은 왕자님과 작별할 때였다. 

이후로 엘리자베트는 전처럼 그에게 정신을 팔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이튿날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거나, 친지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환송식 이후로 죽음이 유난히 자주 곁을 맴도는 탓이었다.

바이에른을 떠나기 전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트는 홀로 침대에서 아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열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건만 잠에 취해 감각이 무뎌지기는커녕, 어둠 속에서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아 오는 손길이 생생했다.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차마 뿌리치지 못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자문할 따름이었다.

“이곳에 널 떼어놓고 갈 수 있을까?”

죽음은 등허리에 더 바싹 다가와 소녀를 품에 가두었다.

“그럴 리가.”

다음 날 아침, 6두 마차 행렬이 막스 공작의 시내 저택을 떠났다. 마차가 뮌헨 시내를 벗어날 때는 시내 모든 성당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 엘리자베트가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이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귀를 막으며 결심했다. 이제 정말 더는 안 된다고.

마차의 한구석을 보란 듯이 차지한 죽음을 외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황실 신부를 구경한답시고 마차 행렬 근처로 모여든 군중의 시선을 견디며 애써 웃어준 후에는 더욱 그랬다. 모든 산 자들이 환호하고 꽃을 던지는 가운데 오도카니 존재하는 것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 결혼 사절은 말과 마차 대신 슈타트 레겐스부르크 호에 올라 도나우 강을 따라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예비 황후의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대로변의 군중이 강가의 군중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는 걸까? 몰려든 인파는 뭉개진 물감 덩어리로만 보였다. 온종일 미소 짓고 손 흔든다고 해서 제대로 보이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모든 게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여태껏 잘만 걸고 다녔던 사슬 목걸이마저 목을 죄는 듯 답답했다.

황혼이 되어서야 마침내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엘리자베트는 그나마 인적이 드문 배의 후미에서 시끄러운 머릿속을 비워 내려 애썼다.

약속이나 한 듯이 시선 한구석에 죽음이 자리했다. 강바람이 거세게 부는데도 갑판의 난간에 서 있는 이의 결 좋은 금발은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를 위한 배경이라도 되는 양 저물어가는 해가 점점 더 붉게 타올랐다.

예비 황후는 정말로 그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선실로 들어간다고 해서 그가 사라지지 않으리란 것 역시 잘 알았다. 보지 못한 척 난간을 짚고 노을빛이 어른거리는 강물을 응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느새 죽음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에게 숨결이 있었더라면 귓가가 간질거렸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제 날 원하지 않아, 시씨?"

이토록 가까이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지친 탓일지도 몰랐다. 대신 소녀는 짧고 단호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만 떠나."

"하지만 난 여기 있는걸. 바로 여기에, 네 곁에, 누구보다 가까이."

오늘도 실패였다. 눈길을 주고 말을 섞은 순간부터 이미 늦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순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짓씹고는 다짐하듯이 내뱉었다.

"난 네가 필요하지 않아. 죽음이여, 이만 내 곁을 떠나! 여기 머물 이유가 없잖아."

"질문에 답하지를 않는구나."

"⋯널 원하지도 않을 거야. 앞으로는 절대로.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해야 해. 사랑할 만한 삶이라고 생각해."

"시씨, 무엇을 사랑하게 될지 선택할 수는 없어. 누구에게나 그래."

죽음은 레이스 장갑 낀 손을 가져가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니, 엘리자베트"

이어지는 말이 애원일 수도 유혹일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못 견디게 달콤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결심이 무색하게 넘어가고 말 것이 뻔했다. 

"그만! 소용없어. 난 황후로서의 삶을⋯."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말을 끝맺는 것도, 손끝을 거두는 것도 잊은 채 상대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이 죽음은 눈물짓고 있었다. 부드러운 노을빛이 눈 속에서 일렁이다 방울지며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물기가 지나간 속눈썹은 반짝임을 머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영원히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순간 시야가 흐릿했다. 웬일인지 가슴이 먹먹하고 눈가가 아리기도 했다.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

소녀는 감정을 삼켜 내려 애쓰며 죽음의 낯에서 눈물 자국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한참을 응시했다. 그러고 나서야 손을 내치며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내가 누리는 것, 수행하는 일, 짊어지는 의무까지도 내 몫이 아녔다는 생각만 들어. 헬레네 언니의 치수에 맞춰 놓은 수많은 예물용 옷가지를 수선하며 매일 그걸 느꼈어."

시야 한구석에서 죽음이 무언가 마음이 들지 않는 듯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었지만, 엘리자베트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오는 탓이었다.

"그 옷 기억나? 환송식 때 그 드레스 말이야. 그건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이 달려들어 제작해야 했대.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원래 내 몫이 아녔으니까, 날 위해 준비되어야 했을 드레스는 그렇게나 근사한 게 아녔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자매의 '행운'을 훔친 거라고들 떠들어대지. 아, 당연하고말고!"

“황제가 너의 행운인가.”

“그래,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그 행운을 대신 뒤집어쓴 나도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하면 좋아?"

죽음은 손을 내밀며 당연한 사실을 읊듯이 말했다.

“내게 와.”

엘리자베트는 그 말에 따르지 않으려 얼굴을 장갑 낀 손에 묻었다. 피부에 닿는 레이스가 따끔거렸다. 목소리마저 뭉개져 나왔다. 

"어째서 행복은 이리도 어려울까? 모두가 내게 여자아이로 태어나 바랄 수 있는 건 이제 전부, 전부 가졌다고들 하는데 어째서? 어딜 가서 무얼 하든, 사람들이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나를 바라봐. 그 시선에 잡아먹히는 것만 같아.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온종일 손 흔들고 있노라면 사실⋯"

네가 너무 그리워. 

소녀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며 끝내 매달리려는 찰나, 유난히도 긴 기적이 울렸다. 배가 그날의 기착지인 린츠에 닿았다는 신호였다.

강둑을 따라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부옇게나마 보였다. 시야 가장자리에서는 노란색과 검은색 바탕의 쌍두독수리 깃발이 어른어른 휘날렸다. 젊은 황제가 신부를 맞으러 수도를 벗어나 머나먼 이곳까지 친히 걸음 했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저도 모르게 사슬 목걸이가 걸려 있는 자리로 손을 가져갔다.

닻을 내린다는 기적이 다시금 울리자 배는 더할 나위 없이 부산스러워졌다.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예비 황후는 여전히 눈가가 발갛게 부은 채 자신의 선실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죽음은, 적어도 이 순간은, 제 연인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초대받으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Notes:

Sehnsucht의 번역어로는 항상 '갈망'과 '그리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