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브리즈 백작령.
브리타니아의 옛 수도이자 오랫동안 가장 살기 좋은 영지로 불렸던 그 곳에 첫 발을 내딛는 모든 사람들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구름을 쪼갤 듯 하늘 높이 서 있는 거대한 탑의 아름다움에 하나같이 압도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탑을 숭배하듯 둘러싸고 있는 높고 낮은 건물들이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면 그 건물들이 모두 1년이 채 되지 않은 새 건축물이라는 것에 다시 놀라고 마는 것이다.
한 때 굳건히 닫혔던 탑의 문이 한 떠돌이의 손에 열린 뒤로 백작령의 중심, 탑의 도시는 오랜 겨울을 지나 맘껏 자라나는 새싹처럼 소란스럽다. 온 브리타니아의 물류가 이 도시를 지나고, 시장에는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웅성거림을 만들며, 탑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바치려 모인 사람들로 여관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나 갓 싹을 틔운 식물이 거목을 가릴 수 없듯, 활기찬 도시의 재잘거림은 탑의 새하얀 벽을 결코 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 제국을 떠나온 한 기사가 새로이 자라나는 탑에 몸을 의탁한 채 탑이 주는 고요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올리버 경. 조금 쉬는 건 어때요?”
“예… 잠시만… 이것만 조금 더 읽고요…”
“올리버 경.”
활자 하나하나를 씹어삼킬 듯 책을 읽어내려가던 피곤한 안색의 남자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벽처럼 쌓인 책더미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군가 그에게 퍽 맛있는 냄새가 나는 샌드위치를 들이밀었다. 남자에게 접시를 건네준 기사는 어깨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식물 덩굴을 추어올리면서도 그닥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책만 읽고 있으신데 괜찮으신가요?”
“’아침부터’ 라고요? 지금이 몇 시인데 그러십니까? 아, 샌드위치 감사합니다.”
올리버라 불린 남자는 치즈가 잘 녹아내린 바삭한 파니니를 한 입 베어물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짭짤한 감칠맛에 미처 알아채지 못한 허기가 몰려왔다. 그가 허겁지겁 빵을 먹어치우는 사이 다른 기사는 탁자 한 쪽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전하께서 기사들을 원탁으로 소집하실 거예요. 그러고보니 여기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급하게 먹느라 음식이 목에 걸렸는지 고개를 돌려 켁켁거리던 남자는 기침을 멈춘 뒤에야 대답을 건넸다.
“콜록… 죄송합니다. 아, 저 이번 주기는 휴가입니다.”
“휴가라고요?”
단발머리의 기사는 아연한 표정으로 올리버와 그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족히 손가락 두 마디는 되어 보이는 두툼한 양장본 서적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마법진이며 수식을 그렸다 지웠다 난리도 아닌 노트에, 뭐에 쓰려는지 모를 다양한 허브가 가지런히 분류된 모습은 휴식 장소라기보다는 마법사의 연구실에 더 가까웠다. 아무래도 이 남자의 머릿속에 있는 휴가는 일반적인 상식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요?”
기사의 목소리에 가득 담긴 의아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남자의 대답에는 여상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예. 수준 높은 마법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건 모든 마법사가 꿈에 그리는 휴식입니다. 실험 보고서를 안 써도 되잖아요. 레이디 안젤리카, 이 도서관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품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 니오?”
올리버는 그닥 대답을 바라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아까까지 읽던 책을 집어들고는 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도서관의 모든 장서를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면 문베일의 몇몇 대마법사들은 탑에 공격을 퍼붓는 것도 불사할 겁니다. 세상에. 이 모든 지식이 무너져가는 탑에 한 세기 넘게 갇혀 있었다니. 왕국의 크나큰 손실이란 말입니다.”
“어… 그렇군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겠네요.”
“어쨌든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끝내주는 휴가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곧 원탁으로 가실 거라면 사장님… 아니, 전하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럴게요, 경. 하지만 책도 쉬어가면서 읽으셔야 해요.”
대답 없이 책의 성벽 너머로 손을 흔든 남자는 다시 활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주변 일은 안중에도 없는 그 모습에 안젤리카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 밖의 해가 탑보다도 높이 떠오르고 다시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동안, 책에 코를 박고 앉아 있는 남자는 가끔 페이지를 넘기거나, 무언가 중얼거리며 작은 노트에 정신없이 글을 적어내려가는 것 말고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옛 기사들에 대한 책을 찾으러 온 아론 경이 보다 못해 그의 앞에 촛불을 켜 주었을 때도 책에서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고작 감사 인사 하나를 웅얼거렸을 뿐이었다. 마침내 두꺼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뒷표지를 탁 덮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미 창 밖에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벌써 이 시간이라고?
고단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자 온 몸의 관절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우두둑 소리가 났다. 피로한 시선이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불빛이 간당간당하던 촛불은 책을 덮을 때 버티지 못했는지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올렸고, 오랜 손길로 반들반들한 나무 테이블 위에는 자신이 떨궜을 것이 분명한 잉크 방울이 지저분하게 튀어 있었다.
알웨나 경이 알면 날 훈련장에서 얼마나 굴릴지 감도 안 오는군.
올리버는 손을 돌리며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에 맞춰 잉크 방울이 천에 닦여나간 듯 사라지자 그는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만족스런 시선이 책상 위를 향하자 그의 얼굴에선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 어쩐다.
올리버는 자신이 아침부터 정성 들여 쌓아 뒀던 수많은 책더미를 골치아프다는 듯 바라보았다. 브룬힐다의 도움으로 이 거대한 도서관의 먼지 자욱한 구석을 뒤져가며 -올리버는 먼저 시종들에게 청소를 부탁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겨우 겨우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찾아냈건만, 오늘 하루를 꼬박 써서 읽은 건 그 중 1/5이 될까말까했다. 이번 주기 전체를 써서 도서관의 마법서들을 탈탈 털어보겠다는 계획은 과하게 야심찼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골치아픈 듯 머리를 벅벅 긁던 그는 숙소에 돌아가서 마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품에 한가득 책을 안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남자의 머릿속에 문득 친절한 목소리가 스쳤다.
‘올리버 경. 조금 쉬는 건 어때요?’
… 뭐, 이렇게 된 거 상관없나.
올리버는 두꺼운 책더미를 다시 내려놓았다. 어두운 도서관 안에서 턱, 하는 묵직한 소리가 서가를 맴돌다 내려앉는 책먼지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자신도 탑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물든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꺼내뒀던 모든 책을 책꽂이에 돌려놓은 올리버는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도서관을 나섰다.
한밤의 탑은 고요했다. 청각적인 면에서도, 시각적인 면에서도.
창문 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달빛이 새하얀 벽을 비추자 어슴푸레한 빛이 복도를 흐릿하게 물들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탑의 도시는 그저 희미한 은빛 지붕들만이 드문 드문 솟아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깊은 어둠 속에 고요히 잠겨 있었다. 이 고요를 방해하는 건 복도를 걷는 발소리, 그리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쫓아가는 스스로의 그림자뿐이었다. 이런 밤이면 올리버는 이 세상에 오직 자신만이 남아 있다는 꽤 안온한 착각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몽상을 깨우듯 저 앞쪽 문 아래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탑의 군주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이 시간까지 깨어 계신다고?
그 셍각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까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은 채, 올리버는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노크를 하려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온화하게 내려앉은 밤의 고요를 제 손으로 깬다는 것이 자못 맘에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결국 그는 꽤나 실례인 방식이었지만 노크를 하는 대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하얀 가면을 쓴 형체가 미동도 없이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올리버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가면을 쓰고 의자에 늘어지듯 누워 있는 형체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살아 있었다. 두근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그는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장님?”
대답은 없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올리버는 집무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좋게 말해도 단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 널브러진 서류, 알 수 없는 수식 사이 사이에 갈겨쓴 짤막한 메모들, 책상 위에 점점이 흩어진 잉크 방울, 손에서 놓친 듯 바닥에 떨어진 깃펜.
“또 일하다 잠드셨군…”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로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느릿한 숨을 내쉬는 탑의 군주는 가면조차 벗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여윈 어깨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던 올리버의 손이 순간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깨워야 하나?
그의 군주는, 비록 탑의 마법이 병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딱딱한 의자에 쓰러진 듯 누워 있는 불편한 자세를 보면서 걱정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올리버는 문베일 아카데미를 떠올렸다. 속성 과정이라고 해서 봐 주는 법이 없던 교수들의 수많은 과제를 쳐내며 도서관에 앉아 있던 그 때, 불편한 의자에서 청하는 잠도 그렇게 달가웠더랬다.
허공에 가만히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올리버는 대신 의자 곁에 조심스레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몸을 감싼 치렁치렁한 천옷은 자그마한 촛불이 그림을 그려내는 커다란 화폭이 된다. 바닥까지 탄 촛불에 매달린 미약한 불빛이 고요한 방 안을 소리 없이 뒤흔들자 하얀 도자기 가면 위로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일렁인다. 명민함으로 빛나던 두 눈을 엿볼 수 있던 가면의 눈구멍 너머에는 어둠만이 보인다. 올리버는 그 어둠을 들여다본다.
그는 어둠 뒤편의 눈이 자신을 알아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을 발가벗기듯 낱낱이 드러내던 눈빛과 목소리를 기억한다. 가면 뒤에 감춰둔 모호함으로 자신에게 내린 두 번째 기회들을 기억한다.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곁을 내준 다정함을, 정원에서의 그 덧없던 기쁨을 기억한다.
올리버는 입을 맞춘다.
얇은 입술 너머로 열기를 앗아가는 도자기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깨끗한 천자락의 향기, 희미한 약초 향기가 느껴진다. 조금씩 빨라지는 숨소리가 느껴진다. 누구의 숨소리인가? 올리버는 이 숨소리가 연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길 빈다. 이 짧은 밤이 영원하길 빈다. 어둠이 눈을 뜬다. 미소짓는다.
“올리버 경.”
“사… 사장님?”
쿠당탕!
돌바닥에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가면 뒤 두 눈동자가 그 소음에 잠깐 눈살을 찌푸린 건 덤이다. 올리버는 마치 군주와의 첫 만남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갑옷에 부딪힌 엉덩이에 멍이 제대로 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피곤한 머릿속에서 애써 변명을 길어올렸다.
“어, 그게 말이죠. 제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뺨을 감싼다. 올리버는 말을 멈춘다. 건조한 종이와 날카로운 잉크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수염으로 까끌까끌한 뺨에 와닿는 천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매혹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문베일에서는… 모시는 주군의 입술을 훔치는 법도 가르치던가?”
아.
올리버의 움직임이 멈춘다. 이 상냥한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손길에는, 차마 저항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그리한단 말인가? 뺨을 부빈다. 연약한 손이 내어주는 자그마한 평온함을 온 힘으로 탐닉한다. 손을 뻗어본다. 감히 건드리지 말라는 듯 단단하고 매끄럽고 차가운 촉감이 손 끝에 닿는다. 하지만 그는 안다. 그 가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자신만은 그곳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예. 그리고…”
희미한 웃음기가 번진 창백한 눈동자를 마주본다. 그의 눈동자도 따라 미소짓는다. 달뜬 목소리가 속삭임으로 가라앉는다.
“더 많은 걸 배워왔습니다.”
가면의 턱을 감싸쥔다. 가볍게 들어올린다. 이제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듯 명멸하는 불빛에 가면 아래의 짙은 그늘이 간신히 드러난다.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붕대로 가려진 얼굴, 그리고 그 녹아내리는 듯한 한숨이-
“올리버.”
불이 꺼진다. 세이지 향과 종이 향기가 뒤섞인다. 열기 어린 달큰한 호흡을 폐부 깊이 들이마신다. 가느다란 연기가 연인들의 밀회를 감추듯 휘감아돈다.
아, 달콤한 한숨과 더 달콤한 입맞춤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