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도시에서 비교적 중산층에 속하는, 3~4인 가구 대상의 아파트 단지 안을 한 여성이 걷고 있었다.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는 복장에 긴 머리로 얼굴을 내리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손질에 실패해 부스스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보이도록 고급 미용실에서 세심하게 세팅한 것이었다.
현관에서 마주친 경비에게 인사를 건네고 카드키로 현관문을 열었다. 정작 필요할 때 저 경비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사 정도로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집안에 들어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 혼자 산다고 생각하기 힘든 큰 아파트로, 그것도 몰래 이사하느라 적금도 깨야 했다. 앞날을 생각해 겨우 남긴 약간의 저축을 빼면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
‘앞날이라.’
원소는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전설의 대가수를 진지하게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공원에서 모자 놓고 연주하다가 아이돌 스타가 되었는데 조금쯤 더 동화 같은 꿈을 꿔서 안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다.
재능이 있었으면 진작 공원보다는 나은 환경에서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클럽이나 카페에 고용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중에도 자신보다 재능있는 가수는 널리고 널렸다.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한 번 연예계의 단맛 쓴맛을 다 보고 나니 이젠 모든 게 지겹기만 했다. 노래고 뭐고, 조용하고 평범한 삶 속에 숨고 싶었다.
노래가 좋아 돈도 못 벌면서 기타에 매달렸던 시절도 톱가수가 되어 정상을 지키려고 용쓰던 시절도 이젠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마치 그때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찬바람을 맞은 듯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원소는 부엌으로 가 전기 포트의 전원을 켰다. 물이 끓는 동안 컵에 인스턴트 아메리카노를 넣고 설탕도 넣었다.
넣은 듯 안 넣은 듯 약간만 넣은 설탕의 맛이 요즘 어째서인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이돌 시절 다이어트에 매달리느라 생수나 블랙커피만 마시던 반동인 모양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기운을 차린 원소는 안방에 들어갔다. 여기 이사온 지 꽤 지났는데도 풀지도 않은 이삿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품과 귀금속을 헌 이불채처럼 싸놓은 짐이었다.
아이돌로 성공했을 때는 명품도 제법 살 수 있었다. 인생역전에 성공한 증거 같아서 마음먹고 모은 적도 있었다.
처분하면 비상금 정도는 나올 것이다. 자칫 또 기자들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또 이사가야 할지도 모르니 잠시나마 조용할 때 수중에 현금을 쥐어야 했다. 짐을 뜯고 팔 만한 것들을 골라보았다.
한때는 마음에 쏙 든 나머지 어딜 가나 차고 다녔던 보석 팔찌를 제값 받고 팔기 위해 보증서와 함께 잘 포장했다. 그리고 흰색 핸드백을 꺼냈다.
‘이런 걸 잘도 비싼 돈 주고 샀었네.’
상표로는 다른 것들에 꿀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취향엔 지나치게 점잖은 디자인이었다. 시험삼아 어깨에 걸고 거울을 보니 역시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듯 어색했다.
잠시 거울 속의 핸드백을 노려보다가, 끈 길이가 자신의 체형보다 길게 조절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걸 샀을 때를 떠올려보려 했으나 기억나지 않았다. 한때의 변덕으로 덜컥 샀다가 한 번 갖고 다니지도 않고 처박아둔 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미련없이 팔아버릴 물건이었다.
원소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막상 팔려고 하니 보면 볼수록 아까웠다. 어차피 취향대로 화려하게 꾸미고 다닐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저런 심플한 백이라면 도리어 요즘 위장복처럼 입는 수수한 베이지색 옷에도 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인지 디자인도 처음 인상처럼 나쁘게만 보이지 않았다. 간결하고 점잖아서 더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백은 옷장에 넣었다. 끈만 조절해서, 이런 백을 하고 나가기에 적당한 자리가 생기면 하고 나가기로 했다.
역시 언젠가는 취직도 하고 새 친구들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백은 옷장에 보관하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외출할 마음이 들었다. 신변보호나 콘서트장 사건 수습을 위해 억지로 나가 사람들 보는 게 아닌 그냥 외출.
의욕이 나서 남은 명품과 보석들을 마저 정리했다. 화려했던 시기를 그리워하며 우울해지지도 않고 허망한 일에 돈 썼다고 자책하지도 않은 채 끝마칠 수 있었다.
이 기분 그대로 나가서 보석상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새 날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좋았던 기분이 도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녁도 먹고 청소도 하고 온갖 일로 도피해봐야, 시곗바늘은 돌아갈 것이고 결국에는 잠을 자야 했다.
인간이 잠을 안 자고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꿈이라도 꾸지 않을 수 있다면.
또 그 콘서트장이었다.
사방에 구불텅한 뿌리들이 뻗어갔다. 사람들은 비명지르며 이리저리 떠밀렸다. 뿌리에 목이 졸려 컥컥거렸다. 화산이라도 폭발한 듯 불덩이가 날았다.
괴상한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각기 무기를 휘둘렀다. 무슨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그들의 무기는 진짜 불을 뿜고 예리한 칼날을 빛냈다.
그들이 증오와 적의를 담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무대 위에 선 또 다른 전사를.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원소를.
“아냐!”
소리지르고 억지로 눈을 떴다.
불 꺼진 방과 침대를 확인하고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앉아 얼굴을 감싸쥐었다.
“꿈이야. 꿈일 뿐이야.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정식으로 데뷔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톱가수가 된 뒤엔 이 인기를 지키기 위해서 역시 악마 아니라 무엇과도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생각은 가수라면 누구나 해.”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그렇게 되뇌었다.
“콘서트장 화재는 정체불명의 스토커가 한 짓이야. 경찰도 그렇게 말했어.”
무대 위의 가수가 괴물로 변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그 많던 피해자들 가운데 한 손에 꼽힐 정도였고 진지하게 귀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인을 밝히진 못했다. CCTV뿐 아니라 녹화용 장비들까지 전부 불타고 부서졌다. 데이터 복원도 실패해 범인은 끝내 불명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그게 원소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원소는 어디까지나 피해자로 대우받았다.
그런데 왜 계속 이런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
“피해자 맞잖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는데?”
그런 테러로 가수가 얻을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자신이 은퇴하겠다고 말했을 때 매니저는 한 번 말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라는 자막이 그 얼굴 아래 진짜로 떠오른 것 같았다.
기자들도 시청자들도, 빨리 저들의 기억에서 리나라는 가수가 사라져 줬으면 싶은 반응만 보였다. 그런 참사가 있었는데 치장에나 힘쓰는 골빈 애라고 욕먹을까봐 앞머리 두텁게 내리고 노출을 피했더니 다쳐서 징그러운 흉터가 남은 게 틀림없다고 자기네끼리 멋대로 떠들었다.
가수 활동에 시들해진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내서 활동을 계속할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도 그런 소리들을 면전에서 듣고 있었을 것이다. 자숙해야 한다느니 자숙할 땐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오지랖도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 그런 반응들을 예견해서 시들해진 게 분명했다.
역시 바로 은퇴선언하고 잠적한 지금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그런데 왜 꿈속에선 자신이 모든 일의 주범이라고 공격받고 비난받아야 하는가. 왜 그런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가.
식은땀에 젖어 이불을 말고 웅크렸다. 그저 시간이 약이라는 옛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악몽과 불면의 나날을 보내면서 아침도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보석상에 처분할 금품들을 다시 확인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초라해 보이면 후려쳐질 테니 번듯하게 차려입고 가야 했다.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 남겨두기로 한 고급 정장을 꺼내 입었다. 오가는 길에 눈에 띌까봐 자신이 가진 중 가장 심플한 것으로 골라두었다.
거울을 보고 살짝 미소지었다. 미모 하나로 정점을 찍었던 톱가수 리나의 모습은 다 사라지지 않았다. 어제의 그 핸드백도 심플한 패션엔 잘 어울렸다.
만족해서 핸드백을 주목한 순간, 그걸 걸친 자신의 재킷이 새하얗게 보였다.
“......!!”
잠깐 휘청였다가 다시 거울을 보았다. 자신이 입은 건 분명 로즈골드였다. 흰색이 아니었다.
‘잘못 본 거야.’
머리를 세게 젓고 보석을 챙긴 다음 집을 나섰다.
요즘 정말 피곤한 모양이었다. 정신과 진료를 권유받을 때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냐, 난 그냥 잠이 부족해서 헛것을 본 것뿐이야. 리나가 정신과에 드나든다, 조현병 걸렸다, 같은 기사는 보고 싶지 않아.’
그냥 이 핸드백엔 흰색 정장이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이다. 칼같이 다린 순백의 팬츠 슈트를 빼 입은 차가운 미모의 커리어우먼이 이걸 든다면 그보다 완벽한 코디는 없을 테니까.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는 걸 보니 어디서 그런 화보라도 본 모양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목적한 보석상으로 차를 몰면서 의도적으로 생각을 돌렸다. 한창 활동할 때 그런 모델이든 화보든 본 게 뻔한데, 어쩌다 스쳐간 사진 한 장 떠올리자고 그 시절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공연히 우울해질 뿐이었다.
다행히 보석 값은 잘 쳐 받았다. 감정인은 친절하고 정중했고 오는 길에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 웬일로 운이 따라주는 날 같아 현관에 들어설 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콧노래가 뚝 끊겼다.
누군가 집 안에 있다. 거실 소파에 앉은 검은 옷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원소는 바로 다시 현관문을 열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문고리가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이 아냐.”
소파의 남자가 일어나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뒷짐 지고 있던 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칼이라도 들이대는 줄 알고 움츠리던 리나는 그가 내민 것을 보고 멈칫했다.
칼도, 스토커다운 괴상한 ‘선물’도 아니었다. 괴상하긴 괴상했지만 예상했던 건 전부 빗나갔다.
손바닥만 한 육각형의 장난감이었다. 플라스틱 로봇 장난감.
납작해서 로봇 맞는지도 의심스럽고 붉고 칙칙한 디자인이 악당 로봇 같았다. 어쨌든 갓 은퇴해 혼자 사는 여자 가수의 집에 침입한 남자가 들이댈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황당함에 그렇게 살펴보고 있었더니 장난감이 폴짝 움직여 원소를 마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주군.”
쉬어빠진 듯 탁한 여자 목소리. 플라스틱이어야 할 입술과 눈의 부드러운 움직임.
만화에나 나올 광경이 이상하게도 헛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것에 손을 내밀었다. 장난감이 다시 폴짝 뛰어 앞발을 내미는 귀여운 강아지처럼 원소의 손에 올라왔다.
“저 기억하세요?”
은퇴 전 재수없는 라이벌이던 어느 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포로 일그러진 채 피 흐르는 다리를 부여잡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스토커에게 습격당한 바로 그때의 광경이, 마치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숨을 들이키고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은퇴 후 칩거하던 집의 현관이었다. 손바닥 위에선 괴상한 말하는 장난감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군, 접니다. 문추.”
낯익은 이름이었다. 한 번 입속으로 불러보았다.
“......안량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질문을 해버렸다. 그 답은 검은 옷의 남자가 했다.
“안타깝게도 그쪽은 되살리지 못했어. 문추는 이미 내가 손댄 영웅패라서 가능했고. 하지만.”
남자가 아직도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반대쪽 손을 또 샥 내밀었다. 그쪽에도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생긴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체인저. 그 이름이 원소의 뇌리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렇게 탈락해버려서 아깝지 않았어?”
남자의 간드러진 목소리, 분홍빛 파마 머리 역시 지금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원소는 문추패를 쥔 채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매일 밤 쫓아온 악몽이 꿈이 아니었다.
“내가......”
‘내가 연쇄 습격범이자 콘서트장의 테러리스트였다고?’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 리나를 더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 은퇴한 사람 계속 쫓아다니지 맙시다.
- 아이돌도 사생활이 있어요.
경찰이건 의료진이건, 그나마 온건한 축의 팬들이건,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든 근거가 있었다.
- 리나가 가장 큰 피해자예요.
“주군. 왜 그러세요?”
문추가 원소의 눈치를 보았다. 손을 타고 올라가 어깨 위에서 톡톡 튀었다.
기억났다. 지쳐 떨어질 때까지 춤을 추고 뻗어있을 때 안량과 문추가 이렇게 팔짝팔짝 뛰며 마사지를 해줬었다. 그러고 있다 보면 너희한테는 무리라면서 전풍이 다가와 제대로 주물러 줬었다.
“......전풍은?”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흰 정장에 노란 브릿지를 한 신선이 근처에 있을 것 같았다. 있어야 했다.
“서두르지 말고 이거 받아.”
장각이 체인저를 흔들자 원소는 빼앗듯이 받아 쥐었다. 그리고 문추를 체인저에 끼웠다.
“군신일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전부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당장 다 기억나지는 않을 거야.”
장각이 사근사근하게 설명했다.
“이미 탈락하고 꿈을 잃었으니까. 배틀에 복귀하면 조금씩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것도 서둘러야 할걸. 아니면 안량과 전풍을 영영 잊게 될 거야.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그럴 순 없었다. 원소는 영웅심을 끌어올렸다.
드림배틀이 무엇인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는 떠올랐다. 그렇다면 싸울 수 있었다.
가수로서 성공하는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안량, 문추, 전풍은 자신만을 진심으로 편들어주는 존재였다. 유명해진 뒤로 친구라 할 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셋뿐이었다.
꿈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공격하던 다른 전사들이 떠올랐다.
“날 탈락시킨 적들이 있지?”
문추의 쇠채찍을 움켜쥐고 원소가 이를 갈았다.
“안량과 전풍이 소멸한 것도 그들 때문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