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같은 꿈을 꾸었다. 어쩌면 가위에 눌리는 건 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있지만 사위가 한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각의 푸르스름한 잿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지고, 멀리서부터 느리고 음험하게 굴러들어오는 천둥 소리와, 얇은 창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를 등지고, 올가가 서 있다. 그는 담요 하나로 차가운 밤을 견디고 있다. 싸구려 매트리스를 뚫고 올라오는 바닥의 싸늘한 냉기에도 그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머리칼을 길에 늘어뜨린 채 그의 발치에 우두커니 선 올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개를 숙여 그를 내려다볼 뿐이다. 얼굴은 항상 그늘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텐카는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증오와 원망과 원통함으로 일그러진 얼굴일 것이다.
시간의 끝과 끝은 누군가가 잡아당긴 실처럼 길게 늘어나고 가늘어지며 팽팽해진다. 텐카는 올가를 쫓으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의 몫의 그림자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악몽을 견뎌내고 있으면, 어느 샌가 그녀의 옆에 또 다른 그림자가 일어선다. 몸을 꼿꼿이 일으킨 그도 올가와 같이 고개를 숙여 그를 내려다본다. 그의 얼굴 또한 보이지 않는다. 텐카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동시에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면 그가 제 손으로 뭉개 놓았기 때문이다. 그 때 피가 얼만큼 흥건히 고였는지는 기억나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림자는 하나 둘 늘어나 그의 발치를 가득 메우고 소리 없이 그를 내려다본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숨을 쉬기 어려워지고, 그는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대다가 비명과 함께 깨어나곤 했다.
그러니까, 예전엔 그랬다는 말이다. 이제는 그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시문은 잠귀가 밝았고, 그가 뒤척이는 소리에서 잠에서 깨어나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잠들었다. 단지 악몽을 꾸는 것 만으로 시문이 그 내용까지 알 수야 없겠지만, 그 악몽은 비만 오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잦은 악몽과 함께 깨어나는 사람은 역사가 깨끗하지 못한 이 뿐이란 걸 시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저 같은 자를 숱하게 잡아 심판대로 끌고 간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텐카는 턱에 힘을 주고 이빨을 앙다문 채 홉뜬 눈으로 일어나 앉아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고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불을 틀어쥔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펴지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발치를 살피고, 옆을 돌아보았다.
시문의 자리에는 이불뿐이었다. 온 몸이 곤두서는 불길함이 엄습함과 동시에 텐카는 참고 있던 가쁜 숨을 놓았다. 쉼 없이 헐떡거려 산소가 통하자 그제야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시문. 이시문은 어디 갔지?
화장실에 갔나 싶어 귀를 곤두세웠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문씨?"
대답이 없다.
텐카는 이불을 걷어내고 옆에 둔 은염도를 쥐었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소파만 환하게 빛을 받고 있었다. 탁자에 빈 맥주 캔 두어 개가 나뒹굴고 있고 소리가 죽은 텔레비전 화면에는 백색 노이즈만 가득했다. 잠들기 전과 다른 상황이었다. 텐카는 조금 남은 미지근한 맥주를 단번에 들이키고 베란다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다. 화장실에도 들어가 보고 부엌으로도 시선을 돌려 보고 창고로 쓰이는 작은 골방 문도 열어 보았지만 시문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현관에 시문의 슬리퍼가 없는 걸 발견했다.
등 뒤에서 시허연 섬광이 번쩍 일어나 그의 앞으로 긴 그림자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텐카가 칼을 고쳐 쥐고 뒤를 돌자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끔찍한 천둥 소리가 들이닥쳤다. 여전히 비가 쏟아 붓고 있다.
공기가 서늘하다. 텐카는 칼을 옆구리에 끼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그제야 그는 울컥 짜증이 일었다. 잠이 안 와서 혼자 맥주나 마셨으면 얌전히 다시 누울 것이지, 이 시간에 대체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현관문을 벌컥 열자 그 바로 앞에 누군가가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순간 악몽의 올가가 떠올라 텐카는 몸이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움직임을 감지한 복도등이 노란 빛을 뿌렸다. 이시문의 동그란 뒷머리와 구부정히 수그린 등이 나타났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는데 나온 사람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굳은 게 이상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합니까?"
정신이 번뜩 들었다. 텐카는 바짝 굳었던 어깨를 풀고 시문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늘게 숨을 토해냈다. 부글부글 일어났던 짜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고, 그는 제가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졌다.
"누가 할 소리를. 지굼이 몇 신 줄 암니카?"
그제서야 텐카는 시문의 입술 사이에 담배가 물려 있는 걸 발견했다. 비바람 탓에 연기가 쉴 새 없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시문은 텐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로 담배를 물고 아래위로 조금씩 까딱거리다가 한번 깊게 빨아들였고, 내뿜는 숨에 담배를 손으로 옮겨 쥐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잠이 안 와서."
텐카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그는 현관 옆에 은염도를 내려놓고 슬리퍼를 끌며 시문의 뒤로 다가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가슴을 그의 등에 남김없이 맞붙이자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코로 헤집은 머리칼에서는 옅은 샴푸 냄새와 비 냄새, 그리고 그가 달고 사는, 달착지근한 바닐라 향을 입힌 담배 냄새가 났다.
"왜 이래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 시간에 누가 나옴니카. 비도 이러케 오는데."
쏘아붙이는 말과는 달리 시문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느슨하게 두른 팔로 전해지는 미지근한 몸의 열기. 습기를 머금은 피부. 텐카는 그에게 몸을 기댄 채 머리에 뺨을 기댔다.
"...없어진 줄 아랐잖아."
텐카가 속삭였다. 시문은 말 없이 담배 연기를 마시고 내뿜었다.
"내가 어딜 간다고 그래요."
저 아래 가로등 빛 아래로 쏟아지는 빗방울 그림자를 느리게 눈으로 세며 그는 시문의 숨소리를 가만 세었다.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안 그러더니 오늘따라 어리광이 심하네."
시문이 나직이 말했다. 텐카는 그의 손이 그의 허리를 감은 팔을 가볍게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글쎄, 왜일까. 하루 이틀 꾸는 악몽도 아니었고 이젠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이미 다 지나온 이들이었고, 올가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그가 죽인 그 누구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그냥 꿈일 뿐이다. 끈적거리는 식은땀처럼 기분만 나쁠 뿐인.
"초금 기분 나쁜 꿈을 꿔서."
시문이 픽 웃으며 몸이 들썩였다.
"어린애 같긴."
텐카도 그를 따라 키들키들 웃었다. 그래, 어린애 같지. 시문은 꿈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의 몫의 악몽이 한아름 안겨 있을 것이고, 텐카는 그것들이 무엇일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묻어 둔 뼈들을 괜히 파 내서 뭘 하겠나. 이미 다 한 번씩 죽고 또 죽은 것들인데. 그에 비해 그들은 한 번 죽고 다시 생을 얻은 아이들이었다. 죽음을 속이고 살아남은 이들이 악몽을 매달고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제 몫의 악몽이 다른 이에게 건넬 만한 선물이 되지 못함을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담배 연기 한 자락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시문은 꽁초를 비벼 끄고 난간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담배갑과 라이터를 뒤로 내밀었다.
"한 대 할래요?"
마치 제 것을 권하는 사람처럼 당당한 태도에 텐카는 실웃음이 났다. 그거 원래 내 건데.
"됐슴니다."
"싱겁기는."
재미 없다는 듯 중얼거린 시문이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텐카는 팔을 풀고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들어가 잡시다. 내일도 늦게 일어나면 이 집에 두고 가 버릴 거예요."
선전포고라도 하듯 말한 시문이 텐카를 지나쳐 찰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철제 문이 무겁게 탕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텐카는 난간 위에 남은 담배갑과 라이터를 집어 들었고,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온 몸의 피가 식었다. 목 뒤가 뻣뻣이 일어서고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에 텐카는 몸을 홱 돌렸다. 왜 발소리에서 찰박거리는 물 소리가 났지? 이 집?
빗소리로 가득한 주위는 아직 어두웠다. 텐카가 움직이자마자 복도등이 번쩍 켜졌다. 현관문 앞에 마치 들어가면 안 된다는 듯 은염도가 쓰러져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방금 그건 이시문이 아니었다.
서둘러 칼을 집어 든 텐카가 문을 잡아당겼다. 안쪽은 믿을 수 없이 컴컴했고, 그가 발을 들이자마자 등 뒤로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아무 인기척도 없는데 저절로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높은 천장과 러그가 깔린 마룻바닥과 오래 되고 비싼 가구들, 손도 닿지 않는 곳에 난 창문. 그 집. 그 집이었다.
바깥에선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 사이로 물에 젖은 맨발이 찰박찰박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위였다.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던 텐카는 어슴푸레한 빛 바깥에서 흔들거리며 움직이는 치맛자락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시문은 아직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테다. 찾아서 데리고 나가야 했다.
쿵쾅거리며 달려 올라간 2층은 더 컴컴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방마다 문을 열어젖혔다.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으며 앞서 나갔다. 서재. 테오의 방. 올가의 방. 큰 안방을 지나 복도 가장 끝 구석에 있던 옛날 하인리히의 방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안쪽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시문!"
하얗게 질린 텐카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거기 그들이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워 담요를 덮어쓰고 악몽을 견디는 시문과, 그의 발치에 우두커니 선 올가의 악령이. 창 바로 앞으로 벼락이 내리 꽂히며 방 안이 창백하게 밝아졌다. 그 순간 올가는 텐카를 돌아보고 있었다.
"꺼져! 넌 이미 죽었어! 내가 죽였다고!"
그가 악을 토해내며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올가는 저항하지 않았다. 악령의 팔뚝을 붙들자 손 아래로 썩어 문드러진 살갗의 물컹거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텐카는 주저 없이 칼을 휘둘러 목을 베어냈다. 이미 삭아버린 머리는 너무도 쉽게 잘려나가 저 멀리 바닥에 데구르르 굴렀다. 다시 한 번 번개가 치며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비추었다. 시문의 얼굴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박힌 푸른 두 눈이 텐카를 쏘아보고 있었다.
텐카는 미친듯한 비명과 함께 몸부림치며 이불을 차내고 일어났다. 그가 잠결에 손에 쥔 은염도를 방 저편으로 팽개치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며 칼이 검집에서 빠져 나왔다.
소란에 놀란 시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불을 켰다.
그가 돌아보니 텐카가 허리를 구부정히 숙이고 일어나 않아 눈을 부릅뜨고 숨을 씩씩대고 있었다. 이불을 움켜쥔 손이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머리칼이 거미줄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있고, 땅에 묻힌 사람처럼 파리하게 질린 입술은 벌어진 채 가는 숨을 뱉어냈다. 시문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입을 벌렸다가 다시 천천히 다물었다. 텐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문을 마주보았다. 겁에 질린 눈이었다.
바깥에선 천둥이 쉼 없이 울었다. 시문은 조심스럽게 마른침을 삼키고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인 채 느린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방 저쪽에 나뒹구는 칼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고 바닥에 내려놓은 그는 다시 천천히 텐카를 향해 몸을 낮춘 자세로 돌아섰다.
"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무릎으로 기어가 그의 앞에 앉은 시문은 손을 뻗어 가볍게 팔을 잡았다. 그의 몸이 펄쩍 뛰어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손아귀 힘을 푼 채 단호하게 무게를 실어 내리누르자 텐카의 눈이 점점 빛을 찾았다. 공포가 지나간 자리에 당혹감이 들어찼다. 그는 아직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어깨와 등이 앞으로 둥글게 굽었다. 곧 그의 몸이 들썩거리며 바람소리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요?"
"미안함니다." 한참을 웃던 텐카가 힘없이 말했다. "별 거 아님니다. 이상한 꿈을 꿨어."
그러나 그는 시문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텐카가 다시 이불을 덮고 눕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문은 일자로 입을 다물고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일어나 방 불을 껐고,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제게서 등을 돌리고 누운 텐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깨어 있는 게 느껴졌지만 시문은 어둠을 응시하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텐카는 아주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이불을 붙들고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불안이 멎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리면 저기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시문의 머리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로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그가 죽인 숱한 사람들처럼 이시문 또한...
안간힘을 써 가위에 눌린 듯 굳은 몸을 돌려 누운 텐카는 이불을 걷어내고 시문의 옆으로 기어갔다. 시문은 말 없이 옆으로 비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꿈에서 그러했듯이 텐카는 시문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뉘였다. 익숙한 비누와 샴푸의 향 밑으로 올라오는 따스한 살내음, 규칙적인 심장소리, 따뜻한 손이 차가워진 이마를 감쌌다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감촉.
입을 열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죄다 고해바칠 것만 같아 텐카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시문은 들어도 그게 무슨 개꿈이냐 핀잔만 줄 테지만, 그는 알았다. 언젠가는 이시문 또한 그의 악몽이 될 것이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 밤이면 몸을 뉘인 그의 발치에 말없이 늘어설 수 없이 많은 그림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얼굴마저 지워져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웃을 때는 어떠하였고 화를 낼 때는 어떠하였는지조차 잊혀지고, 단지 꿈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원망하는 검은 눈구멍 두 개만 남겨질 것이다. 그리 될 것이라 텐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의 곁으로 왔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때로는 그 전의 자신이던 이들조차 죽여 땅 속 깊은 곳에 묻고, 손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새 피로 덧칠하며 단 한번도 씻어낼 생각은 않고.
"자요. 사람 놀래키지 말고."
시문이 피곤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텐카의 귀에 들린 건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암말의 울음소리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