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무사히 집에 돌아오고 거짓말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누가 어떻게 입막음을 하고 있는지 TV도 신문도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카이바의 결석이 이어지는 것도 늘 있던 일이라서 신경쓰는 사람은 유우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잘 해나가고 있을 거야.
또 하나의 유우기가 말을 걸어왔다.
-곁에 모쿠바도 있잖아.
‘그렇겠지.’
배 위에서도 두 사람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건 봤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세토하고도 모쿠바하고도 따로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카이바는 거기서 이미 위성 통신으로 온갖 지시를 내리느라 바빴고 모쿠바는 한사코 형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유우기가 끼려고 해봤자 일에든 형제 사이에든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나 정말 카이바군하고 애인이 되긴 된 걸까.’
“무토 군!”
선생님이 교탁을 치는 소리에 순순히 일어났다.
원래도 교사들 사이에선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이렇게 수업중이고 뭐고 교실 뒤쪽만 쳐다보고 있어서야 새삼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인은 교칙으로 금하고 있는 교내 이성 교제......아니, 이성이 아니잖아. 동성 교제에 대해서도 규정이 있던가?’
일어서서도 꿋꿋이 딴청을 피우는 유우기와 지시봉을 채찍처럼 쥐고 기세를 올리는 선생 사이의 긴장감을 핸드폰 벨소리가 깨버렸다.
‘아, 진동으로 해두는 거 잊었어!’
핸드폰이 압수당한 뒤의 일상생활에 대해 온갖 암울한 상상을 하며 폰을 꺼냈다가 경직했다.
[카이바군]
교사고 교칙이고 순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카이바군! 웬일이야?”
-오늘 저녁 7시.
평소나 다름없는 카이바의 목소리가 폰에서 흘러나왔다.
-나하고 모쿠바하고 네놈 집에 저녁 먹으러 간다.
“응?”
-네놈이 먼저 말 꺼냈잖아?
카이바의 목소리가 노기를 띠었기 때문에 유우기는 허겁지겁 상황을 파악했다.
“응! 좋아! 기다릴게! 뭐 먹고 싶어?”
이미 카이바가 전화를 끊었다고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의 얼굴이 시뻘개져 있다고 깨닫는 데는 그보다 더 걸렸다.
“무.........토...............유우기............군.”
“죄송합니다, 선생님.”
유우기는 일단 공손히 핸드폰을 선생님께 받쳐올렸다.
그러나 빨개진 얼굴은 그렇다쳐도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채로 죄송하다는 말이 통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교무실에서 진지한 상담이 필요할 것 같군. 문제 학생인 줄은 알았지만 선생님 앞에서 당당히 전화를 받을 정도였다니. 어디 무슨 전화를 받고 그렇게 웃는지 선생님과 친구들도 다 같이 웃게 들려주겠나?”
“저, 이건 그러니까.....”
유우기는 필사적으로 머릴 굴렸다. 그러나 이미 선생님은 반성의 기미가 없는 문제아를 이참에 박살낼 생각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수업 끝나고 나면 부모님 오시라고 해서 반성의 기미가 보일 때까지 지도를 해줘야겠다.”
“넷?”
오늘은 수업이 6교시까지 있었다. 잔소리 길기로 유명한 이 선생이 부모님까지 불러서 작정하고 덤빈다면 7시는 고사하고 학교에 뼈를 묻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뼈는 다른 곳에 묻힐 것이다. 카이바 세토 상대로 데이트, 그것도 첫 데이트를 바람맞히게 되었으니 이제 유우기의 무덤은 KC 뒷산이나 도미노 부두.......
“죄송하지만 선생님.”
엉뚱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카이바군이 회사 일 때문에 수업중에 전화를 받거나 나가버릴 때는 봐주시잖아요?”
“응?”
바쿠라가 붙임성 있게 한 말에 선생은 잠깐 반론하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유우기도 지금 마찬가지거든요. 전화로 카이바군 부르는 거 들으셨죠?”
선생은 조금 생각하는 눈치가 되었다.
“하지만 무토 군이 언제부터 거기 일에 관여했는데?”
“공식 듀얼 킹이잖아요. 얼마 전부터 게임 베타 테스트랑 CPU 전술 고문을 하고 있어요.”
눈도 깜박 안하고 술술 거짓말하는 바쿠라를 선생 뿐 아니라 유우기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도적왕이 튀어나온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한 해명은 나중에 카이바군에게 요구하시는 게 어때요?”
유우기는 입을 딱 벌리고 바쿠라를 바라보았다. 바쿠라는 해맑게 웃으며 윙크를 보냈다.
결국 유우기는 핸드폰도 무사히 사수한 채로 수업 끝나자마자 집까지 뛰어갈 수 있었다. 바쿠라에게 뭘로 답례를 해야 할지는 아직 못 들었지만 밥값이든 티켓이든 얼마를 떼이더라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카이바 세토가 ‘놀러’ 찾아온다는 말엔 할아버지도 엄마도 기겁했지만 가족들을 진정시키기엔 유우기 본인이 너무 흥분해 있었다. 뭘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는 사이 7시가 되었다.
“유우기. 단순히 놀러 오는 거라고 하지 않았니?”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말을 건넸다.
“예. 모쿠바 군이랑 와서 저녁 먹고 제 방에서 놀다 갈 거예요.”
그 말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인 것처럼 유우기는 아까부터 해온 말을 정확히 반복했다.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하는 게냐?”
사실은 데이트이기 때문입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언젠가는 전부 털어놓고 인정도 받고 싶지만.
“옛날 일 때문이라면 이 할아버지는 신경쓸 것 없다.”
손자의 침묵을 뭐라 받아들인 건지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네 판단을 믿고 있으니까. 그러니 친구 기다리는 녀석답게 좀 웃어봐라.”
억지로 이를 드러내는 순간 밖에 차 세우는 소리가 났다. 유우기는 펄쩍 뛰어 그대로 가게 밖까지 날아갔다.
“카이바군!”
언제나처럼 새카만 리무진에서 카이바 형제가 내렸다. 유우기는 그 앞에 간신히 멈춰서서 카이바를 올려다보았다. 모쿠바는 평소의 청바지 차림이었고 세토는 비즈니스 슈트 차림이었다.
“회사에서 바로 온 거야?”
“아니. 만나볼 놈들이 있어서 여기저기 다녀왔다.”
“난 집에 있다가 형님 만나서 같이 온 거고.”
모쿠바는 여전히 형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유우기는 카이바에게 살짝 손을 내밀어보았다.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들어와.”
카이바는 자기도 손을 내밀어 유우기의 손을 잡고 게임점으로 들어갔다.
식사 자리는 뜻밖에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대화는 거의 모쿠바와 할아버지의 몫이었지만 유우기도 점차 긴장이 풀려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고 카이바도 입다물고 가만 있으면 어른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특히 유우기 엄마 눈에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모범생 정도로 비친 것 같았다.
‘카이바군이 조용히 있을 때는 뜻밖에 여려 보인다고는 나도 생각했지만......’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된 유우기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카이바 형제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며 속으로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승리다.”
카이바의 카드가 유우기의 카드 위에 덮였다. M&W가 아닌 그날 얘기했던 할아버지가 만든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유우기는 어깨를 움츠렸다.
“우, 역시 카이바군은 너무 강해.”
“첫 두 판을 내리 이겨놓은 놈이 그렇게 말할 수 있냐?”
다시 카드를 섞으며 카이바가 노려보았다.
“그야 난 할아버지하고 다른 친구들하고도 많이 해봤고 카이바군은 지금 규칙 배워서 처음 하는 거잖아.”
“결과가 전부다. 이런 단순한 룰의 카드 게임에서 그런 건 페널티라고도 할 수 없어.”
자기가 더 많이 이기기 전엔 성이 차지 않을 듯 카이바는 유우기와 자신과 모쿠바 앞에 다시 카드를 배분했다.
“이거 그렇게 단순해?”
“게임으로서 열등하단 뜻이 아니야. 단순함이 몰입감을 높여주고 있어 보드게임장 같은 곳에서 인기를 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카드 디자인은 더 비싼 디자이너한테 맡기는 편이 나았겠군. 대체 범골은 이 카드의 어디가 무섭다는 거냐?”
퇴마를 소재로 한 게임이라 카드엔 음산한 귀신이나 귀신 퇴치용 은 부적, 무기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유우기나 친구들은 충분히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지만 게임 회사 사장 눈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게임 자체는 마음에 드나 보네.’
할아버지가 만든 게임이 인정받으니 꼭 자기가 인정받은 것처럼 으쓱해졌다. 그래서 방심한 건지 아무튼 네 번째 판도 유우기가 졌다.
“난 잠깐 나갔다 오겠다. 둘이 놀고 있어라.”
카이바가 일어나자 유우기는 깜짝 놀랐다.
“어디 가는데?”
“일 얘기다. 오래 안 걸릴 거다.”
말하면서 카이바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닫힌 문을 유우기는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지난 사건의 뒤처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아직도 묻지 못했다.
“너무 걱정 마, 유우기. 아마 지금은 유우기네 할아버지하고 얘기하러 간 걸 테니까.”
모쿠바가 카드를 정리하며 웃었다.
“우리 할아버지하고?”
“응. 이 카드 게임의 상품화에 대해 협상할 생각일걸. 뭐든 형님이 칭찬하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이라고 생각해?”
카이바의 성격을 생각하고 유우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끼리 놀면서 기다리면 돼.”
모쿠바는 기지개를 켜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예쁜 방이네. 부러워라.”
유우기는 쑥스럽게 웃었다.
“모쿠바네 방이 훨씬 근사할걸. 그렇게 큰 저택에 살잖아.”
“진심이야. 이런 방에서 살고 싶다고 꽤 자주 생각했어.
좀 작고 소박해도 좋으니 형님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그런 집에서 말이야.”
모쿠바의 시선이 천년 퍼즐을 향했다.
“이젠 형님도 알고, 유우기니까 특별히 말해줄게. 실은 나 알고 있었어.”
모쿠바의 표정과 일변한 분위기로 유우기는 ‘무엇을?’ 이라고 되묻지 않을 수 있었다.
“그자가 죽기 며칠 전이었어. 입양된 뒤 거의 처음으로 날 따로 불러서는 전부 말해줬지. 난 형님의 동생이 아니라고. 카이바 세토는 내 원수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형님도 다 안다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어.”
모쿠바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바보같지? 제일 먼저 형님한테 말해줬을 게 당연하잖아. 그런데도 난 형님이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날 여전히 동생으로 생각하고 날 위해 그를 증오하는 거라고.”
유우기는 입만 딱 벌렸다.
“형님은 그랬지. 카이바 코퍼레이션을 빼앗은 건 날 위해서라고. 그러니까 더 이상 주눅들지 말고 웃으라고.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서인지 잘 안 되더라. 그자만 없어지면 형님을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어. 이러다 형님도 그 인간처럼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형님마저 날 두고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모쿠바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형님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어리석었던 건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유우기는 생각했다. 카이바 형제에게 드리워 있던 증오의 그늘은 새로 깨달을 때마다 유우기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과연 나 정도가 그 원념을 다 씻어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유우기는 모쿠바를 위로해줄 말조차 찾지 못했다.
“그자는 형님을 저주한 거야. 나한테 알린 것도, 형님 앞에서 목숨을 끊은 것도. 형님이 영영 행복해지지 못하고 자기의 그림자 밑에서 미쳐버리길 바란 거야.”
모쿠바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린 역시 그자를 용서할 수 없어. 이미 죽었다는 것만으론 부족해. 복수나 원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몰랐더라면......”
모쿠바는 다시 유우기를 바라보았다.
“형님한테 다 들었어. 그 섬에서 누구 덕에 살아남을 용기를 얻었는지.”
모쿠바의 시선에 유우기는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카이바에게 그 정도라는 것도 모쿠바에게 그걸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는 것도 어느 쪽이나 믿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특별히 봐줄게.”
“응?”
모쿠바가 다시 씩 웃었다.
“형님하고 사귀는 거.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안 봐줬을 거야. 유우기니까 봐주는 거라고.”
“..........”
안 봐줬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냐고 유우기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내 앞길은 아직도 험난할 것 같아.....기분 탓 아니겠지.’
카이바가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은 건 어쩌면 허락 받기 위해 유우기의 장점 및 공로(?)를 역설해야 했던 걸지도 몰랐다. 카이바가 자기랑 사귀려고 그렇게나 애썼다면 기뻐해도 좋을 일일 텐데 기쁘지가 않았다.
모쿠바와 2인 대전 게임을 몇 차례 했을 때 세토가 다시 들어왔다. 모쿠바는 들고 있던 카드를 엎어놓고 바로 형님에게 매달렸다.
“게임을 하다 눈을 돌리면 안 되지.”
말과는 달리 세토는 모쿠바를 쓸어안고 다정하게 토닥였다.
“나간 일은 어떻게 됐어요?”
“잘 됐다.”
카이바는 여전히 동생의 어깨에 손을 짚은 채 유우기를 쳐다보았다.
“네 할아버지가 만든 게임이라기에 가서 얘길 해봤다. 카드 디자인을 샘플 중에서 본인이 고르는 조건으로 판권을 따냈으니 내일 당장 상품화 관련 논의에 들어간다.”
“내일?”
모쿠바가 눈을 크게 떴다.
“내일.”
거기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 세토는 유우기와 모쿠바의 눈길을 피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하던 승부 마저 내라.”
유우기도 일단 카드를 다시 들었지만 생각하니 이상했다. 카이바 성미에 아무리 구두로 계약했다고 해도 당장 절차를 밟고 싶을 텐데.
입버릇처럼 또 하나의 자신을 부르려다 간신히 제때 그만두었다. 카이바의 전화를 받고 나서 또 하나의 자신은 ‘예전에 너도 그랬잖아.’라며 마음속 깊이 들어가버렸다.
‘그때 난 또 하나의 나를 잘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안즈와 나간 덕분에 배틀 시티에 출전할 결심을 했다고는 나중에 들었지만, 그런 것치곤 배려에 기뻐한다는 기색은 없는 게 기억을 되찾는 싸움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조차 몰랐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우울한 생각을 하면서도 게임은 이겼다. 모쿠바는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전적은?”
카이바가 묻자 모쿠바는 고개를 푹 숙였다.
“.....2대 1이요.”
“그럼 결정났군.”
약간 즐거운 표정이 된 카이바를 유우기가 쳐다보았다.
“뭐가 결정났는데?”
“오늘의 남은 일정. 너와 모쿠바가 종류에 상관없이 2인 게임을 해서 결과에 따라 10시 반에 저택으로 돌아갈지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지 정하기로 했었거든.”
누가 어느 쪽에 걸었는지는 모쿠바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유우기가 얼굴 약간만 붉혀도 당장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정 보통 저렇게 정하나?’
안될 건 없지만, 설령 저 둘을 자기 침대에 재우고 자긴 복도에서 자야 한다 해도 대환영이긴 하지만 역시 저 형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응. 그럼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올게.”
유우기는 방을 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 카이바군이랑 모쿠바군이랑 여기서 자고 간대요.”
카운터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빙긋 웃었다.
“오, 그러냐? 알겠다.”
유우기는 슬쩍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카이바군한테 게임 얘기 들었어요?”
“그래. 녀석이 아무 말 안 하든? 계약하기로 했다. 조건도 괜찮았고.”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깨를 짚었다.
“그놈 옛날 같지 않다는 건 잘 봤으니 내 눈치 보지 말고 친구든 뭐든 해봐. 네 녀석이 언제 내 눈치 보느라 하고 싶은 걸 못했냐? 천년퍼즐도 뺏어다가 기어이 완성까지 한 놈이.”
“네.”
오늘 입다물고 조용하게 군 게 그렇게나 인상 깊었던 걸까 생각하며 유우기는 2층으로 돌아갔다. 무토 스고로쿠는 웃으면서 그 뒷모습을 전송했다.
그가 카이바에게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카드 디자인 컨셉은 이대로 유지하고 최종 심사를 자기가 하게 해달라는 것, 둘째는 이 게임점에 지금은 ‘놀러’ 찾아왔으니 다시 나갈 때까지는 거기 충실히 행동해서 유우기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 즉 구두로 계약 의사를 확인하는 이상의 모든 절차를 여길 나갈 때까지 미뤄달라는 거였다.
‘표정은 볼만하게 구기면서 억지로 수긍해놓고 도리어 나가는 시간을 늦춰버렸단 말이지. 믿기는 힘들지만 그놈도 결국 유우기하고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군.’
“그래서 어떻게 됐어?”
유우기가 사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며 바쿠라가 이야기를 재촉했다.
“카이바군이랑 모쿠바군이랑 내 침대 위에서 자고 난 바닥에 이불 펴놓고 잤어.”
바쿠라가 피식 웃었다.
“웃지 마! 첫 데이트였다고. 거기다 모쿠바군까지 있는데 그 이상 뭘 더 해?”
“동생 데리고 나온 시점에서 이미 데이트가 아닌 거 아냐?”
정곡을 찔리고 유우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카이바군 사정이 워낙 특별하니까.”
선생님으로부터 구해준 답례로 근처의 비싼 카페에 데려가 달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커피랑 과자 값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일을 빠짐없이 털어놓는 쪽이 진짜 답례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아픈 곳을 찔려가면서.
“그래도, 덕분에 카이바군 자는 모습은 봤어.”
그걸 떠올리고 유우기는 기운을 되찾았다.
“굉장히 피곤했나봐. 금방 잠들더라고. 모쿠바군이랑 폭 기댄 채 눈 감고 힘 빼고 있는데......”
말을 맺지 못하고 유우기는 얼굴을 붉혔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일생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유우기의 표정을 보며 바쿠라 뒤에서 도적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왕의 그릇씨는 참 욕심도 없지. 명색 애인이 딴 남자 품에서 자는 걸 보고 저리 좋아해?
‘동생이잖아.’
여관 주인님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피도 안 섞였구만.
‘그러니까 둘 다 더 형제라는 쪽에 집착할걸. ‘애인’ 쪽은 유우기가 사수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기뻐, 여관 주인님?
‘덕분에 난 가끔 이렇게 놀려줄 수 있고.’
바쿠라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아침까지 잘 잤어?”
“응. 카이바군 엄청 일찍 일어나더라.”
유우기는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마셨다.
“나 일어났을 땐 이미 화장실도 다녀오고 쌩쌩한 모습으로 노트북 켜고 일하고 있었어. 근데 나 일어나니까 정리하고 끄더라.”
유우기는 다시 행복 오라에 휩싸였다.
자기 때문에 무려 일을 중단하는 모습에 감격한 나머지 덥석 끌어안았는데도 밀어내거나 싫은 소릴 하거나 하지 않았다. 섬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처럼 등이랑 어깨랑 쓰다듬기까지 했는데 가만히 있었다.
“그만 땅으로 내려와, 유우기.”
핫 초콜릿 잔을 들고 분홍빛 기운에 휩싸여 공중부양을 시전하는 유우기를 보며 바쿠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 역시 좀 더 놀려주고 싶어지네. 어디 다음 데이트 장소라도 미리 알아내서 골려줄까나.’
-다음 데이트? 그게 대체 언젠데? 사장 같은 일벌레가 시간을 내봤자지.
‘다음은 아마 학교 아닐까? 이제까지 큰 건 하나 끝나고 나면 하루쯤 얼굴 비추는 식이었으니 지난 사건 뒷수습 끝나면 또 오겠지. 이번엔 유우기 신발이라도 몰래 감춰볼까나......’
-데이트라는 말의 정의가 흔들리고 있잖아. 아니 그 전에 여관 주인님은 그 둘 인정해주기로 한 거야, 고춧가루 뿌리고 싶은 거야? 내가 확 사장 침실로 쳐들어가려고 했을 때는 링을 도어벨로 만들어서 현관문 밖에 걸어버렸잖아? 바쿠라 료라고 쓴 문패랑 분홍 리본까지 달아서!
‘앞집 아주머니가 그러시더라. 그 특이한 현관문 장식 괜찮았는데 계속 달아두지 그랬냐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겠습니다.
바쿠라가 자기 여관 투숙객을 눌러놓는 동안 유우기는 여전히 하늘에 동동 떠 있었다.
“하여간 진짜 귀여웠어. 같이 아침밥도 먹었고. 학교까지 같이 갈 수 있었으면 딱 완벽했을 텐데 카이바군은 일해야 된대서.”
게임점을 나와 가방 메고 학교로 향하는 유우기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바로 뒤돌아서 게임점 문을 열고 들어가던 카이바를 생각하고 유우기는 다시 웃었다. 역시 누가 뭐래도 어제 저녁은 기념할 만한 첫 데이트 다운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