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연속 세 번째 세팅인데도 티 세트는 앞의 세트와 겹치는 것 없이 독창적이고 훌륭했다. 차갑고 말랑한 과일 젤리는 체자렛의 까다로운 기준으로도 티푸드로 안 어울린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벌써 나가떨어질 순 없었다. 여기 온 목적을 생각하면 더욱.
“저한테도 그런 귀여운 모자가 있었거든요. 뾰족하고 챙도 넓고, 반짝거리는 벨벳이었어요. 색깔은 깊은 감청색이었지만요. 물론 제 머리카락엔 체자렛 씨 모자의 그런 자주색보다 감청색이 더 어울린다고 하겠지만요. 때론 그런 정석적인 배색을 벗어나 모험을 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지금 그 모자 한 번 써 보고 싶다고 하면 실례인가요?”
“설마요, 써 보세요.”
망설임은 짧았다. 언제나 접근의 시작은 체자렛 쪽에서 적당히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었으니. 그는 순순히 자신의 모자를 벗어서 내밀었다.
문레이크의 수호자, 신수를 봉인한 혈족의 전승자. 루미에 미라티사는 다가올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 필히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들여야 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마법을 걸어 하는 세뇌도 그 인물을 깊이 이해할수록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고, 수다스런 성격이라 들었으니 그 수다 속에서 힘 안 들이고 건질 정보가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체자렛은 일단 우호적으로 접근했다.
모자를 쓴 루미에의 곁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둥그런 거울이 나타났다. 거기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루미에가 하하 웃었다.
“아, 역시 제겐 좀 촌스럽게 보이네요.”
즉석에서 공중에 얼음을 맺어 거울을 만드는 건 체자렛 기준엔 그저 그런 잔재주에 불과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눈앞에서 문레이크의 수호자가 그만한 힘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는 점에 감탄할 수 있었을 텐데 체자렛은 아무런 감동도 재미도 없이 무의미한 수다의 직격탄을 맞았다.
“체자렛 씨의 패션이 촌스럽다는 게 아니에요. 알죠? 그 갈색 머리엔 정말 잘 어울리는걸요. 어쩌면 얼굴만이 아니라 머릿결도 그렇게 고울까. 특별한 비결이 있으세요?”
“아, 네. 비결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머릿결따위 알 게 뭐냐고 하고 싶은걸 참고 적당히 몇 가지 주워섬겼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위기감에서였다.
그러나 대충 고급 빗이나 향유 몇을 열거하고 나니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화술로 어디 가서 꿀려본 적 없음에도, 이렇게 일상적이고 마법이나 세계의 운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빗 이야기와 문레이크의 신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지으려면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에, 겨우 그 정도만 하는데 이렇게 곱다니.”
루미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저는 그 배는 정성을 들여요. 우선 머리를 감을 때부터...”
“저, 잠시만요.”
이제 중부 대륙 거의 모든 모발 관리법을 듣게 될 위기를 예감한 체자렛이 필사적으로 말을 끊었다.
“그렇게까지 온 정성 다 들여 관리할 필요 있어요? 그냥 머리카락인데. 더 중요한 일도 많이 있잖아요?”
“물론 그렇죠.”
루미에는 말을 끊었다고 불쾌해 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 신난 것 같았다.
“제 사명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저 자신에게 시간을 쏟아야 해요. 제가 무너져서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는 일 같은 건 벌어져선 안 되니까. 제가 비어버려선 안 되니까. 머리카락처럼 사소한 것에도 온 정성을 쏟고, 일상의 작은 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거예요. 사명이 아닌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거죠. 보세요, 덕분에 체자렛 씨처럼 견문이 넓은 사람 앞에서도 말할 거리가 떨어지지 않죠?”
사명으로 인한 중압감과 고독은 체자렛이 익히 아는 감정이었고 루미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예상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은, 그러니 익숙하고 쉬운 일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렇게 즐거운 날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새로 찾아온 손님과 벌써 여섯 시간째 수다만 떨다니. 덕분에 요즘 새로 만든 티푸드도 선보일 수 있었고 말이죠. 체자렛 씨는 홍차에도 조예가 깊어서 더 이야기할 맛이 나요. 실은 지난번에 블렌딩하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른 적 있거든요. 들으면 웃길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 요즘 홍차를 가르치는 중인 조슈아더러 대신 들으라고 여기 앉혀놓고 도망가는 상상을 해버렸다. 체자렛은 더욱 당황했다.
‘도망? 내가? 고작 수다에 밀려서?’
“......역시 듣기에도 말이 안 될 정도죠?”
루미에는 체자렛의 눈매가 찌그러진 게 정말 찻잎 다룰 때의 초보적인 실수 때문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쑥스럽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고 너무 비웃지 말아요.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안 그래요? 체자렛 씨도 살면서 실수 한 번을 안 하고 살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부정할 수 없었다. 가장 최근에 한 실수로는 루미에 미라티사와 티타임을 갖기로 한 것도 꼽아야 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손님을 비웃으려는 게 아니니까. 저는요, 제가 한 실수는 마음껏 떠들어도 남의 이야기는 절대 옮기지 않는답니다. 세상에 해서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잖아요? 제 취미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되죠. 안심하셔도 돼요.”
“예.”
“그리고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음번엔 정말 훌륭한 결과를 내었으니까요. 오늘 마시는 이것도 말이죠......”
체자렛은 이미 반쯤 날아간 정신을 도로 불러오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섯 시간을 붙잡혀 있던 대가로 아무 것도 못 건질 수는 없었다.
“체자렛 씨는 이렇게 쉬는 게 얼마만이에요? 요즘 보면 다들 이거저거 바쁜 일에 쫓겨 사는 거 같더라고요. 덕분에 이야깃거리를 잔뜩 얻는 건 좋지만요, 전 사람들이 보다 느긋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더 보기 좋거든요. 체자렛 씨도 많이 피곤해 보여요.”
“피곤하긴요. 다 사명을 맡은 자의 책무인걸요. 저는...”
“아아, 안 돼요. 사명감도 좋지만 자신의 스트레스는 자신이 돌봐야죠!”
큰일 날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루미에가 두 손을 마구 파닥거렸다. 이러고 또 자기 얘기만 할 게 뻔해 체자렛도 그만 울컥 했다.
“그러지 말고 체자렛 씨도 인생을 즐겨요. 자, 봐요. 이 찻잔 예쁘지 않아요?”
...울컥했다. 분명히. 깊은 자주색 무늬에 금빛 포인트 들어간 앤티크 찻잔을 들고 방긋 웃는 얼굴이 너무 해맑아서 잠깐 감상하느라 타이밍을 놓쳤을 뿐.
아까 모자는 정말 안 어울렸는데 저 찻잔은 비슷한 배색임에도 루미에의 흐드러진 물빛 머리칼과 잘 어울렸다. 같은 색 벨벳이나 새틴으로 감싸 포장한 찻잔을 보는 것 같았다.
“잔 둘과 티 포트 세트예요. 아끼던 거긴 한데 체자렛 씨와 이걸로 함께 마시고 싶어요.”
“그러죠.”
“그럼 차 새로 내올게요!”
체자렛은 입을 매우 치고 싶었다. 루미에가 아닌 자신의 입을.
예쁜 찻잔과 그걸 든 예쁜 손, 배경으로 깔린 머리카락이 좀 예쁘다고 해서 그런 대답을 해버리다니.
예쁜 걸 좋아하긴 해도 그게 발목을 잡을 정도로 방만하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자부해 왔었다.
체자렛이 얼어붙어 있는 동안 루미에는 정말로 티 세트를 새로 차리고 물을 끓였다. 방실방실 웃는 입은 들어오는 길에 있던 늙은 수양버들과, 그 잎사귀만큼이나 무수히 얽힌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부 대륙에서 체자렛이 돌아왔다. 문레이크와 사르디나, 다케온 정찰을 다 끝내고 돌아왔다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무심코 이렇게 물었다.
“벌써 끝났나?”
그리고 보았다. 어지간한 일은 다 겪었고 겪을 것이며 예상이 빗나가본 적도 없는 그가 보리라 예상한 적 없는 것.
바로 체자렛이 진심으로 당황하고 질색하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었나?”
“없었사옵니다. 아무 일도...”
체자렛은 금방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로 되돌아왔으나 황제도 그 정도 동요를 못 읽어낼 정도로 체자렛을 모르지는 않았다.
“숨기는 일 없이 낱낱이 보고해야 한다고 일렀거늘, 누가 네게 그 정도의 곤란을 안길 수 있었단 말이냐?”
얼버무리려고 해봐야 더한 진노를 살 뿐이었다. 체자렛도 할 수 없이 솔직하게 보고했다.
“문레이크의 루미에 미라티사이옵니다. 신수의 정보를 수집하고 싶었지만 시간만 낭비했사옵니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만 하면서 정보는 주지 않았사옵니다.”
일곱 시간이나 붙잡혀 수다를 들으며 좋은 차와 미모로 인공호흡을 했다고까지 자세히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없어야 했다.
긴장해서 황제의 기색을 살피던 체자렛은, 황제 역시 눈 어딘가 텅 빈 채 먼 곳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이해했다. 물러가도 좋다.”
“혹시...”
“물러가라.”
황제도 처음 몇 번은 평화롭게 협력하는 방도를 추구했었다.
문레이크의 협조를 구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