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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Language:
한국어
Series:
Part 2 of 중부대륙 수난기
Stats:
Published:
2023-04-05
Completed:
2023-04-05
Words:
3,510
Chapters:
2/2
Kudos:
1
Hits:
30

체자렛의 육아일기

Chapter Text

체자렛 알티온의 성공작이라는 평에 걸맞게, 조슈아 레비턴스는 실험체들 중에서도 영리한 편에 속했다.
그가 실험실을 나와 황궁과 그 바깥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도, 체자렛 님의 저택에 그의 ‘방’을 갖게 된 것도, 초능력 실험과 군사 훈련 외의 다른 교육들을 받게 된 것도 모두 그가 가장 훌륭한 실력을 보인 덕분이라는 걸 아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수많은 실험체들 중 한 명일 뿐이며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까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저택엔 실험실과 달리 알록달록 예쁜 것도 있고 푹신한 것도 있고 식사 일정과 무관하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들에 손대는 것 역시도 훈련이고 시험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확인시켜 주는 시간이 바로 티타임이었다. 예쁜 다기들의 이름과 쓰임새, 찻잎의 종류, 각각의 특성과 주의점 모두 조금도 틀려서는 안 되었다. 물의 온도와 종류까지도 저마다 다 달랐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배운 걸 틀린 적도 잊은 적도 없었다. 훈련에서 요구된 수준에 미달된 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훌륭해요.”
조슈아가 우린 차를 맛보고 체자렛이 빙긋 웃었다.
“정말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아이라니까요.”
“감사합니다.”
조슈아도 마주 웃었다. 이 정도 반응은 이제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보여도 괜찮았다.
“그러니 당분간 집에 혼자 둬도 괜찮겠죠?”
“예?”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들은 그대로예요.”
체자렛이 다시 빙긋이 웃었다.
“대제 폐하께서 내려주신 임무가 있어서, 나는 이제 곧 다른 대륙까지 다녀와야 해요. 조슈아에겐 그동안 과제를 몇 가지 내줄 테니까, 돌아올 때까지 끝마쳐 놔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 외엔 달라지는 건 없어요. 보는 사람 없이도 일상을 규칙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죠. 이제까지 하던 대로 일정 지켜 생활하고, 공부시간이나 훈련 시간, 티타임 모두 내가 있을 때와 똑같이 해요. 알아들었죠?”
“예.”
겉으로는 이제까지처럼 얌전히 답했다.
전술 공부나 초능력 훈련은 제국과 대제 폐하를 위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차를 잘 우리고 티푸드를 적절하게 고르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해내면 체자렛 님의 기분이 좋아지고, 그 편이 자신에게도 좋지만 자신이 이 시간을 좋아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한 달이 지나도록 체자렛 님은 저택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실험실에 있을 때는 두 달이 지나도 보기 힘든 분이었지만 저택으로 옮겨진 뒤엔 매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변화는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킨 대로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하며 과제를 해나갔다. 언제나 그랬듯 양과 난이도 둘 다 하다 죽을 것 같은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체자렛 님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고개를 들고 과제물을 내밀 수 있었다.
“역시 제대로 해냈군요.”
체자렛 님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과제물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대신 금속제 차 캔을 내밀었다.
“사이런딜 산 홍차예요. 일이 잘 풀린 기념이에요.”
체자렛 님이 이런 식으로 알 필요 없는 것까지 말씀하시는 일은 드물었다. 임무가 정말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서부 대륙 산 홍차는 우릴 때의 요령이 평소 마시던 동부 대륙산과 미묘하게 달라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 천만 다행으로 체자렛 님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 그게 티타임에 올라온 것은 두 번뿐이었다.
“이제 또 한 달 정도 집을 비울 거예요.”
“알겠습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번에도 조슈아가 할 일은 똑같아요. 집에서 얌전히, 내가 내준 과제를 하는 것.”
역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지난번처럼만 하면 될 것이므로 조슈아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한 달이 아닌 고작 일주일 만에, 찌푸린 얼굴로 돌아온 체자렛을 봤을 때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약간 문제가 있었어요.”
잘 다녀오셨냐고 인사를 해야 할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야 할지 그 밖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꼼짝도 하지 못하는 사이 체자렛은 그를 지나쳐 갔다.
“쉬고 싶으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조슈아는 시계를 보았다. 평소라면 한 시간 뒤에 티타임이었다.
“내가 부를 때까지 방에 있어요.”
“예.”

 

방에 돌아온 체자렛은 짐을 테이블 위에 팽개치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중부 대륙에서 문레이크를 첫 목적지로 삼은 것은 루미에 미라티사가 수다쟁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2백 년 넘게 산 종신 통령을 상대하기 전에 정보를 더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비 조사 보고서만 읽어도 아저씨 땀내가 훅훅 끼치는 용병왕은 좀 나중에 접촉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창피해서 어디다 말도 못할 일이었다.
일곱 시간 넘게 붙잡혀 있었으면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다. 대화 상대에 굶주려 있던 수호자는 음험한 의도를 감추고 찾아간 현자를 정말로 건전하고 무해한 대화상대로만 알차게 써먹었다.
라플라스를 상대할 땐 이러지 않았다. 그는 수다쟁이도 아니고 남에게 내면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었으나 일단 내면의 공포와 고민을 짚어내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쉬울 줄 알았다고!’
쿠션을 쥐어뜯다가 테이블의 짐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미에는 오랜만에 만난 귀한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를 선물했다.
집어던질까. 지금은 사라진 어느 왕가에서 1차 마도대전 승리를 기념하며 제작했다는 보물이지만, 호화롭고 아름다워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이지만 그냥 박살내 버릴까.
이걸 내밀 때 루미에는 해맑게 미소짓고 있었다.
아이처럼 동글동글한 얼굴로, 최상급 루비 같은 눈동자를 휘어진 눈매 안에 감추며.
‘정말 비둘기 같은 미인이었지.’
그쪽에서 자신의 의도를 눈치 챈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니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답게 받아온 거고. 두 번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으......”
역시 집어던질 수는 없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이런 보물을 없애는 건 아깝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했다.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야.”
체자렛이 혼자 끙 소리를 냈다.
“너무 예상 못한 패턴이었어. 로잔나 데 메디치 통령은 합리적이고 보수적인 노인이니 그보다는 예측 가능할 거야.”
도리어 정석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거기까지 입 밖에 내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루미에를 찾아갈 때도 평범하게 쉬운 일이 될 거라고 장담했었다.
‘라플라스가 너무 쉬웠던 건가?’
카를 3세는 애초 왕이라는 지위를 빼면 평범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고 쉬운 게 당연했다.
그에 비하면 라플라스 셀케나는 긴 시간 동안 지식과 연륜을 쌓아온 엘더엘프였다. 정신계 마법에 대항하는 정신 방벽은 그에겐 갑옷이라기보다 피부나 다름없었고 논리나 감성에 의지한 설득도 한두 해 겪어본 게 아니었다. 체자렛도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찾아갔을 정도였다.
“...역시 라플라스가 특이한 케이스였나......”
다시 한 번 끙 소리를 내고 몸을 일으켰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조슈아는 이제 일일이 지켜보고 다듬을 필요 없을 만큼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라플라스에게 얻어낸 것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연구소에 가서 배양 상태를 보고 될성부른 실험체를 가려내야 했다.

 

-9호 실험체, 기준치 충족. 목표 달성.
꿈만 같은 선언이었지만 전투 타입 9호 호문클루스의 안색은 펴지지 않았다.
“역시 이쪽도 충분한 잠재력이...”
“하지만 여전히 0호 실험체에 미치지 못합니다.”
“프로토 타입보다 개량형이 나아야 정상인데...”
“......비용 문제는...”
그의 능력치를 다 알고 있으니 자기들이 하는 말이 다 들린다는 것도 알 텐데 연구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고 있었다. 다 들어야 되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0호 실험체만 못하니 폐기해야 할지, 그래도 일정 수준에는 도달했으니 계속 지켜봐야 할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다 그가 0호보다 약하기 때문이었다.
‘난 약하지 않아!’
가서 그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갑자기 그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경보 소리가 울렸다.
연구원들의 당황하는 반응이 잇따랐다. 경보는 듣기 싫은 음향과 암호로 이루어져 있어 9호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9호도 달아나지 않게 똑바로 감시해!”

 

루미에 미라티사와 로잔나 데 메디치는 전부터 친구로 알려져 있었다. 만약 루미에가 일곱 시간의 대화로 손님의 수상한 점을 짚어냈다면 사르디나는 시작할 여지도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래서 체자렛은 더욱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사르디나의 종신 통령은 아무나 상대해주지 않았다.
“난 마도사란 족속들을 믿지 않아.”
첫 인사부터 참 살갑기도 했다.
“친구네 집에 다녀오는 사적인 시간을 방해해놓고 할 말이 뭐냐? 난 바쁜 사람이니 용건만 간단히. 알지?”
그래도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체자렛은 느긋하게 로잔나와 걷는 속도를 맞추며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로잔나는 이 마도사가 능력깨나 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발터는 혼자 산책하는 자신이 진짜 보이는 그대로의 아이만큼 연약한 줄 알지만 호위 하나 없어도 로잔나 데 메디치는 사르디나의 가장 무거운 닻이며 인어의 노래, 대지를 뒤덮는 해일이었다. 귀찮은 일이 없도록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일이나, 그 반대로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다니는 일이나 숨쉬듯 간단했다.
오늘은 눈에 띌 마음이 없었다.
“날씨가 참 좋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곁에 다가와서 나란히 걷고 있지만 이 마도사는 분명 위험할 정도로 강력한 인물이었다.
“난 마도사란 족속들을 믿지 않아.”
어린 것이 대뜸 힘부터 과시하며 접근하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하여간 애송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노인 공경할 줄을 모른다.
“그러신가요.”
이 마도사는 여유로워 보였다. 초반에 이런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하면 보통은 종신 통령님께 시작부터 밉보였다고 쫄아들게 마련인데, 이 마도사는 거짓으로 여유를 꾸며내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래서 예의를 갖춰 방문할 기회 잡기도 그렇게 힘들었군요. 저는 그저 통령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뿐인데요.”
“그런 잡담으로 내가 뭘 얻을 수 있지?”
“잠시간의 휴식과 여유, 그리고... 사르디나라는 거대한 배의 밑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지요.”
로잔나는 적당히 흘려들을 생각이었다. 도발적인 화술로 자신을 현혹하려드는 협잡꾼이라면 많이 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마도사가 하는 말은 다르게 들렸다.
안 그래도 요즘 동부 대륙의 기류가 수상해서 고민이었다. 저 구석에 처박힌 소국에 불과하던 갈루스에서 셋째 왕자가 갑자기 재능을 발휘하더니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존재감 없던 옛 제국은 신흥 강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셋째 왕자는 동기들을 누르고 왕이 되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경계할 만한 일인데, 왕이 된 3왕자 카르티스는 노골적으로 군비를 늘리고 사람들에게 제국이었던 과거의 역사를 강조하며 팽창 정책을 예고했다.
동부 대륙은 곧 전쟁터가 된다.
수단 방법 안 가린다는 소문과는 달리 로잔나도 전쟁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했다. 아직까지도 전쟁 후유증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발터만 생각해도 차마 못할 짓이었다.
다만 갈루스가 원하는 것이 그저 과거의 갈루스 제국 - 동부 대륙 유일의 황제와 제국만이 아니라, 중부와 서부 대륙까지 쥐락펴락하는 세 대륙 전체의 패권일 수도 있었다. 그런 거라면 일찍 싹을 잘라버리는 편이 더 큰 전쟁을 예방하는 길이었다.
‘사르디나를 남의 명령을 듣는 땅으로 만들 순 없지.’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발터뿐 아니라 헬가와 파도 기사단 모두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사르디나 본토를 전쟁터로 만들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르디나의 부강함은 평화 위에 쌓아올린 것이었다. 고심해서 만든 매끈한 포장 도로와 직교형 계획도시에 적군의 포화가 쏟아지고, 손주들처럼 아끼는 시민들이 적과 싸우다 죽어나가는 꼴이 문득 코앞에 닥친 것처럼 펼쳐졌다.
-로잔나!
“베로니카!”
순식간에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악몽들은 근 백 년간의 평화에도 다 사라지지 않은 오랜 공포들이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지 않았다. 심해에서 온 인어의 심장은 공포로 날뛰는 두뇌에 차분하게 피를 흘려넣으며 진정시켰다.
“너무 우습게 봤구나...”
이를 바드득 갈며 자신을 잠깐이나마 이런 공포에 빠뜨린 마도사를 노려보았다.
손으로는 마력을 휘몰아 상대를 감싸며. 잔재주를 더 부리지 못하도록 묶을 작정이었다.
“내 쪽에서 할 말인데요, 그건.”
마도사는 주문을 외우는 기색도 없이 로잔나의 마력을 벗어나 웃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심장에 내 손이 닿지 않을 줄이야. 여기 있는 것은 그럼...”
매끄러운 장갑 낀 손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기 전에 로잔나가 바다의 정령들을 소환했다. 돌고래의 형태로 소환된 정령이 마도사를 공격했다.
마도사는 허리를 꺾으며 물러났다. 전성기의 발터라도 나가떨어질 공격이었으나 그걸 날린 로잔나는 뱀을 보고 무작정 뿌리치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2차 마도대전 이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 없었다.
“누구냐, 넌.”
“제게 한 방 먹인 상인 셈 쳐서 가르쳐 드리고도 싶지만...”
마도사가 자세를 반듯하게 가다듬고 빙긋 웃었다. 여유가 넘치는 미소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저도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다시 뵐 날을 기다리지요.”
장거리 이동 마법이 발동하려는 걸 느끼고 로잔나는 서둘러 그를 다시 잡으려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가속한 신체로도 마도사가 사라지기 전에 잡을 수 없었다.
“...뭐야? 저건?”
다시 한 번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를 만큼 당황하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로잔나는 베네토 의사당을 향해 뛰었다.
동부의 수상한 움직임에 공세 아닌 수세를 택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