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필명으로 써낸 책이 성공했고, 결혼도 했다.
결정적으로 올해 5월 14일, 그러니까 로제 오베르의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법적 성년이 되었다.
이것은 석유왕이자 땅부자로서 내가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자면 지역의 다른 명사들과 친목을 다지는 사교활동도 필요하다.
결혼식도 5월의 생일 파티도 아는 사람들만 최소한으로 불러서 했기에 이번에 로만타운의 호텔에서 열리는 무슨 기념 행사라던가가 내 첫 사교계 데뷔무대가 되었다.
보통 로판의 데뷔던트는 막 왕도 알현하고 일 년에 한 번 전국의 아가씨들이 모이고 하는 고풍스러운 행사던데 여기는 그보다는 근대풍이라 그런지 그렇게 거창한 격식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건 적당히 사업 굴리기에 문제 없을 정도로만 눈도장 찍은 다음 맛있는 파티 음식과 미인 남편의 화려한 파티복 맵시를 즐기는 것뿐이니까. 이미 로판의 해피엔딩을 본 나다. 새삼 사교계 암투 같은 고구마는 필요 없다 이거야.
“괜찮을 겁니다.”
이젠 루카스 무어가 아닌, 오베르 가의 데릴사위 유진 오베르가 된 내 남편은 여전히 끝내주는 운전 실력으로 호텔까지 차를 몰고 있다.
“오베르 가의 재력이면 굳이 사교활동에 열 올리지 않아도 사업에 지장 생길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느긋한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겁니다.”
거기다 무어 가의 만만치 않은 부도 고스란히 오베르와 합쳐졌다. 나름 유서 깊은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졸부 석유왕 가문에 성도 버리고 들어온 그림인데 남주의 짠내나는 과거사를 생각하면 또 놀랍지가 않아서 말리지도 못했다.
무어 가의 남은 부동산과 현물 재산도 전부 결혼식 전에 처분했다고 말할 때 유진의 표정은 그 정도로 후련해서, 대체 과거가 어느 정도로 피폐 서사였던 거냐는 질문마저 나오려다 쏙 들어갔을 정도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아픈 과거를 막 들쑤시다니 난 그런 사패가 아니다. 암.
크...남편, 남편!
이 절세미남 로판남주가 내 남편이에요!
호텔에 빨리 도착해 이 남자의 얼굴을 막 자랑하고 싶어진다. 아직 저 멀리 보이는 호텔의 불빛을 보며 가슴을 두근거리다못해 그만 본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거 혹시 유진의 눈부신 미모가 파티장 모든 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버리는 거 아냐? 물론 얘는 이미...”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왓, 교통사고인가? 요즘 차는 에어백도 없는데!
“유진?”
“죄송합니다. 신호, 신호가 바뀌는 걸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유진의 운전대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까지 지레 겁먹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호는 빨간불이고 유진은 정지선을 정확히 지켰다. 뒷차가 와서 받은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으셨나요.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감지했는지 유진이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다, 다른 여자들이 제게 눈독 들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이 걱정되신다면 전 호텔까지 바래다만 드리고 곧바로 저택에 돌아가겠습니다. 시간 맞춰 모시러 올 테니...”
아니, 급정거 다음에 왜 또 급발진이세요.
생각을 무심코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일단 남주를 둥기둥기 해주기로 했다. 계략 남주에서 후회 루트를 타서인지 과거사 때문인지 유진의 자낮 속성은 결혼 후로도 거의 나아진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며 이렇게 그때그때 다독여주는 수밖에.
“그럴 필요 없어요. 눈길 좀 끌면 어때요. 다 유진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건데. 내가 오늘 유진하고 춤 추려고 얼마나 연습했는지 알아요?”
1층에 악기 등이 구비된 교습실이 있었던 복선을 이렇게 회수했다.
엠마 씨에게 부탁해 섭외해온 가정교사는 이런 쪽의 전문가여서 춤과 사교계 예절, 불문율 등을 빡세게 가르쳤다. 그 막대한 재산을 양심적으로 관리해온 것도 그렇고, 드래곤 악령만 아니었어도 엠마 씨는 꽤 훌륭한 양어머니가 되었을 텐데 이제 와서 아쉽다.
교습은 생각보다 받을 만 했다. 가정교사가 유능하기도 했고, 걱정했던 예절과 관습도 의외로 고리타분하지 않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하기야 이미 미성년 여성이 운전기사만 달고 혼자 돌아다니며 돈을 펑펑 써대도 괜찮은 세상이었지.
그치만 방금 사고 날 뻔하고 나서인지 과학 기술은 좀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이제 막 시작한 미남과의 석유왕 라이프가 에어백 없는 자동차 때문에 어이없이 끝나버릴 순 없잖아.
문제는 내가 문과에다 잡학 상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빙의자가 현대 과학기술을 막 재현해 발명왕 되는 클리셰는 무리라는 거다. 음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신호가 바뀌고 유진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운전해서 아무 사고 없이 호텔까지 도착했다.
“로제, 여기 머리카락이.”
파티장에 입장하기 직전 유진이 내 등에서 긴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냈다. 눈도 좋다.
“흰 드레스인데 미용사가 부주의한 사람이었군요. 다음엔 다른 미용사를 불러야겠습니다.”
“예? 아니 한 가닥 정도 오는 길에 빠졌을 수도 있죠.”
갑부가 되었다고 갑질까지 할 생각은 없다. 열심히 손사래 치는 내게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진이 말했다.
“사교계는 첫인상이 중요합니다. 저는 잠시 기다릴 테니 입장하기 전 파우더룸에서 매무새를 점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죠.”
가정교사 쌤도 같은 말을 했던 게 생각나 별 생각 없이 파티장 입구 근처에 있는 파우더룸에 들어갔다.
와, 그냥 좀 고급스러운 화장실 정도를 생각했는데 이건 고급 미용실에 더 가깝잖아. 단정하게 차려입은 호텔 직원들이, 내가 입도 열기 전에 다가와 커다란 거울 앞에 세우고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익숙하게 가다듬는다. 우와...
애초 온갖 꽃단장이 신부 화장할 때만큼이나 완벽하게 되어 있어서 새삼 손댈 일은 많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되돌아 나온 나를 보고 유진이 웃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들어갈까요.”
결혼식 때처럼 곧은 자세와 번쩍이는 정장. 그보다 더 빛나는 얼굴.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그의 손에 내 손을 얹고 파티장에 들어섰다.
‘맛있다아...’
얇게 썰어 튀기듯 구운 쇠고기를 얹은 작은 타르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소하다.
먹기 좋게 껍질을 벗겨놓은 바닷가재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저택의 식사가 충분히 호화롭고 수준 높아서 그동안 외식을 해도 빙의 전처럼 특식을 먹는다는 기분은 느끼기 힘들었는데, 그 기분을 오랜만에 맛보니 황홀하기까지 하다.
거기다 고개를 들면.
“연어는 어떻습니까? 저쪽에서 주문 즉시 구워주고 있군요.”
파티장 샹들리에가 유진의 얼굴에만 그 찬란한 빛을 뿌려주고 있다. 아아, 오늘도 로판 남주의 얼굴은 절경이구나......
오늘을 위해 내가 디자인을 골라준 맞춤 정장이 그의 늘씬하고도 탄탄한 몸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다. 내게 받은 건데 밀봉해서 보관하는 대신 입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에 유진은 당황했지만, 파티장에서 이걸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고 분명히 말하자 결국 입고 오염과 훼손을 감당하기로 했다. 거참, 저런 고급 옷이 어차피 금방 해질 리도 없는데.
얼굴 감상하느라 대답은 했나 안 했나도 모르겠는데 유진은 어느새 연어를 주문하러 갔다. 음, 5초 전의 내가 알아서 잘 대답했나보군. 걸어가는 뒷모습도 훤칠한 체격과 거침없는 걸음걸이, 근사한 의상의 쓰리콤보로 눈을 못 떼게 만든다.
흐뭇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저런 인간 등대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주변의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그랬다. 이런 파티의 주역으로 떠받들리는 건 처음이라 긴장해서 눈치 못 챌 뻔했는데, 내게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애쓰던 사람들도 내 곁의 유진에겐 간단한 인사만 건넬 뿐 그 이상 눈길도 주지 않았다. 또래 여자들마저도.
역시 그건가? 부인이 바로 옆에 딱 붙어있는데 남편한테 수작을 부릴 정도로 개념도 상식도 없는 그런 삼류 악녀는 없는 평탄하고 평화로운 사교계?
하기야 본편도 외전도 꽉 닫힌 해피엔딩에 딱 과하지 않을 정도로만 사이다 서사였는데 이제 와서 그런 고구마, 그것도 너무 뻔해서 쉰내나는 고구마가 등장할 리 없지. 등장한다 해도 내 남주의 트루 러브를 흔들림 없이 믿어주면 그만이다.
느긋하게 연어를 기다리며 남은 큐브 스테이크를 입 안에 털어넣었을 때였다.
“남의 입 속에서 꺼내간 고기를 포식하는 기분이 아주 각별하신 모양이군요.”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영롱하기까지 한 여자 목소리. 거기 어울리지 않게 내용은 밑도 끝도 없는 시비.
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굽이치는 금발이 내 또래로 보이는 화사한 얼굴을 감싸고 흘러내린다. ‘로제 오베르’는 병약 컨셉 때문인지 아무리 먹어도 가냘픈 몸매에 키도 별로 크지 않은데, 이쪽은 당당한 표정에 어울리게 키도 후리후리하게 크고 몸매도 저렇게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를 문제없이 소화할 정도로 풍만하다.
여주와 대조적인 타입의 미모를 가지고 남의 스테이크에 침이나 뱉어놓는 인성질이라니, 너무 전형적인 로판 악녀의 등장에 그만 짜게 식고 말았다.
“예, 너무 맛이 좋아서 그만 침 뱉어 놓은 줄도 몰랐네요.”
보통 이럴 땐 뭔가 더 촌철살인이 될 만한 근사한 일침을 놓던데, 방금 먹은 고기에 그런 수준낮은 테러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되는 대로 답해버렸다. 저 얼굴에 토해주면 만화 같고 딱 어울리겠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그게 만화처럼 쉽지 않다.
“어머나.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인가요?”
악녀가 고개를 갸웃 하며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그런데 저건 무슨 소리지? 설마 내가 침 뱉은 거 알면서도 먹을 만큼 강철 같은 비위의 소유자로 보이나?
“꼬리표 좀 갈아붙였다고 처음부터 정당한 당신 것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스테이크 얘기가 아니었나보다. 테러 당한 고기가 아니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비로소 이 추정 악녀가 하려는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금술잔에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는, 이전에 읽은 사상계몽 수필과도 통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치곤 이 악녀 씨의 옷차림도 만만치 않게 화려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사람이 부모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뜻밖에 어린 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태어나기도 전부터 가문이 부를 쌓아온 과정이 의식되어서 더 날카롭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엄한 남을 붙들고 화풀이를 하면 못 쓴단다.
“인사가 늦었군요.”
이 풋내나는 급진주의자를 뭐라고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악녀가 우아하게 절했다.
“제 이름은 시빌. 바넘 가문의 외동딸입니다.”
“아, 예. 로제 오베르입니다.”
적당히 대답하는 티를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나는 석유왕이라서 네 질풍노도의 사상에 맞춰주기가 힘들단다. 뭐, 이젠 내가 경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으니 노동 환경이 어떤지 살펴서 노조를 허용하고 임금을 올려주는 정도는 할 거지만.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빌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인맥을 어필했다.
“바넘 가는 최근 무어 가와도 교분이 있었답니다.”
“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던 이야기를 허겁지겁 도로 잡아챘다. 지금 무어 가라고 했니?
시빌은 낚시에 성공한 사람의 미소를 짓더니 시선을 내 뒤쪽으로 던졌다. 나도 무심코 같이 돌린 시선의 끝에는 유진이 연어 스테이크 접시를 들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