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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Language:
한국어
Series:
Part 2 of 해피엔딩 이후
Stats:
Published:
2023-04-13
Completed:
2023-04-14
Words:
9,189
Chapters:
7/7
Kudos:
13
Hits:
192

석유왕인데 빨갱이다

Summary:

경영 좀 양심적으로 했다고 빨갱이 취급받는 로제. 외전 [상상도 못 한 결혼 준비] 스포일러.

Chapter Text

사과나무 저택 고용인의 일과는 보통의 대저택 고용인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단 근무 시간이 짧다. 급료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일이 적으니 푹 쉬고 힘을 내서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다.
고용주에게 그렇게까지 헌신하는 건 구시대적이고 비굴하기까지 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요즘은 많지만, 여기서 며칠만 일해봐도 깨닫게 된다. 이런 직장은 다른 어디서도 구할 수 없으니 여기서 열심히 일해 경력을 쌓고 승진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녕하세요, 앤. 그게 오늘 저녁 우편물인가요?”
저택의 주인인 젊은 마님 로제 오베르는 활달하고 붙임성 좋은 데다 느긋한 성격이라 비위 맞추기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사교활동에 관심이 없어 손님맞이로 일이 늘어나지도 않는다.
높은 봉급, 짧은 근무 시간, 착하고 관대한 주인, 규칙적인 일상, 적은 손님.
저택 고용인에게는 꿈과 같은 직장이다.
오늘도 마님은 은쟁반에 수북한 초대장과 편지들을 물 흐르듯 대충 훑어보고 치워버렸다.
그리고 석간신문으로 손을 뻗었을 때 앤은 퍼뜩 긴장했다. 오늘 경제지 석간엔 마님이 보기 불쾌할 기사가 있었다.
가져오는 동안 헤드라인 위주로 대충 읽은 것뿐이지만, 마님을 ‘물정 모르고 착하기만 해서 머지않아 사기꾼들에게 속아 재계의 물만 흐리고 파산할 풋내기’라고 매도하는 의도가 그처럼 명백한 글이었다.
게다가 이미 마님의 돈을 노리고 접근해 들러붙은 사기꾼이라며 지목된 사람은 마님의 사랑하는 남편 유진 나리였다.
마님이 평소 신문을 꼼꼼히 읽는 편도 아니건만 그 기사는 파티장에서 찍힌 두 분의 사진까지 있어 더 눈에 띄었다. 과연 마님도 그 기사를 지나치지 못하고 읽었다.
고용주의 심기가 상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재난을 머릿속으로 꼽아보는 사이 마님이 신문을 내려놓고 앤을 불렀다.
“혹시 이거 유진도 읽었어요?”
“예?”
고용인이 이렇게 되물으면 눈치 없다고 화내는 고용주도 있지만 로제 마님은 이번에도 신경쓰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저야 뭐 이런 기사 언젠가 나올 줄 알았다는 쪽인데, 이렇게 유진까지 중상모략하는 건 맘에 걸려서요. 유진이 은근히 자낮, 그러니까 맘이 여려서 상처라도 받지 않을지......”
‘사, 상처? 마음에 사앙처어? 유진 나리가??? 마음이 여려어??????’
앤이 할 말을 못 찾고 뻐끔거리는 사이 로제 마님의 시선이 그에게서 등 뒤로 옮겨갔다. 그리고 악마가 속삭이듯 달콤하면서도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분명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을 텐데 이번에도 앤은 문소리, 발소리 어느 것도 듣지 못했다.
긴장으로 빳빳이 굳은 앤의 곁을 지나쳐서 유진 나리, 이 믿을 수 없는 꿀직장의 믿을 수 없는 단점이 마님에게 다가갔다.
“그 신문이라면 이미 읽었습니다만 로제께서 저를 믿어주시는데 고작 그런 삼류 기사로 상처받지는 않습니다.”
“정말요?”
마님은 여전히 걱정과 애정이 담긴 눈으로 곁에 바짝 붙어 앉는 나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보다 로제의 선량함을 이 따위로 곡해하는 신문사가 존재한다는 쪽이 더 거슬립니다.”
허락만 떨어지면 기자도 신문사도 존재까지 지워버릴 것 같은 선명한 악의에 앤은 떨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계속 굳어 있었으나 마님은 태연히 웃을 뿐이었다.
“에이, 이 정도는 제가 옳게 했다는 확인이나 다름없죠. 기레기란 어디에나 있구나, 싶고. 아, 기레기란 건 말이죠...”
마님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앤을 바라보았다. 곧 떨어질 명령을 깨닫고 앤은 억지로 긴장을 풀었다.
“우리 저녁 먹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때 되면 불러주세요.”
“예.”
안도하는 티를 능숙하게 감추며 뒷걸음질로 물러나 서재를 빠져나왔다. 유진 나리는 평소에도 무섭지만 마님과 셋이 있을 때는 특히 더 무서웠다.

 

“경제지가 자본가 친화적일 거야 예상했으니까, 이런 건 저도 신경 안 써요.”
신문을 대충 팽개치고 나는 유진의 품에 기대 미남의 턱선을 감상했다. 찌라시를 읽었으니 눈을 정화하자.
발단은 두 달 전, 내 소유는 아니고 다른 유전에서 난 인명 사고였다.
그걸 계기로 노동 조건에 불만이 많았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 여파가 베른 전체에 번졌다. 오베르 가의 유전에도.
경영권 상속 후 허용해줬던 노조에서 먼저 이것저것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나는 그걸 가지고 유진과 공장장과 의논 후 합리적이고 당장 수용 가능한 것들을 추려 협상안을 만들었다. 공장장의 표정이 볼 만하게 찌그러지는 걸 보고 내가 적정선을 잘 지켰다는 확신을 얻었다.
노조가 그 협상안을 받아들이면서 파업은 않기로 결정되었고 유전은 계속 가동되었다. 나는 협상안만큼 임금을 올리고 공장에 설치할 안전 설비 연구도 지시했다.
결과가 좋으면 이 경험을 살려 승용차 안전 설비 연구도 시킬 작정이다. 나는 발명왕이 아니지만 남의 발명을 살 돈은 있다. 잘하면 에어백 있는 차도 탈 수 있겠지. 음하하.
그런데 다른 유전들은 다 협상이 결렬되어 파업이 시작되었고, 조합원들과 파업 가담자들을 대폭 해고했고, 그 타이밍에 나는 약속대로 근무시간도 조정하기 위해 신규고용을 대폭 늘렸고......그렇게 되었다.
“뭐 다들 저한테 이를 갈고 있겠지만 제가 그 사람들과 친구 안 하면 깡통 찰 것도 아니고요.”
“제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유진이 내 어깨를 든든히 잡고 속삭였다.
“그러니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로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이게 바로 로판남주와의 결혼 생활이지. 오늘도 남주가 이렇게 심장을 폭행한다. 크.
“이번 추수절 기념행사도 안 가도 됩니다.”
아, 베른의 지사가 초대한 그거.
지사님 초대기도 하고 시빌도 간다고 해서 무심코 간다고 해버렸는데, 이렇게 됐으니 파티 분위기가 어떨지는 벌써 다녀온 것처럼 짐작이 간다. 유진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시빌은 가고 싶어하던데, 제가 안 가면 혼자 많이 곤란할 거예요. 이번에 바넘 가 유전의 대처는 저 하는 거 보고 따라한 거고.”
시빌은 거머리 사건 이후 건강을 되찾았고 가문과 재산도 무사히 상속받았다. 그리고 날 졸졸 따른다.
바넘 가의 유전도 물론 이번 사태에 같이 휘말렸는데, 시빌은 빨간 맛 사상에 관심 갖던 사람답게 내 대처가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거의 그대로 따라했다.
나랑은 다르게 인싸 기질도 있는 아가씨가 혼자 양심 없는 자본주의 돼지들 사이에서 고생하게 두고 싶진 않다. 남들 입방아 따위 신경 안 쓰기는 해도, 유진 외에도 내가 잘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고마웠고.
유진이야 당연히 시빌이 보기 껄끄럽겠지만 이번만 참아달라고 하자. 이제까지도 두 사람 대면시키지 않으려고 내가 신경 많이 썼다고.

 

“정말 나타났네.”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지사의 추수절 파티엔 베른의 내노라 하는 명사들이 가득했다. 거의 모두가 석유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인물들이었다.
즉 로제 오베르와 시빌 바넘은 적진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장소에 제발로 걸어들어온 셈이었다.
마담 오베르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한 미소를 입에 걸고 나타났다. 곁에는 역시 그 소름 끼치는 인상의 남편을 대동한 채였다.
시빌 바넘도 용케 파트너를 구했다. 전부터 교류가 있던 집안의 안면 있는 또래 청년인데 이번에 시빌의 파트너를 하기 위해 양친과 싸웠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기만 벼르던 사람들이 접근하려는 순간, 유진 오베르가 먼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가볍게.
“걱정했던 것보다는 분위기가 좀 낫네요.”
시빌이 작게 중얼거렸다.
두 쌍의 남녀에게 모두가 몰려들어 피라니아처럼 물어뜯을 것을 각오했는데, 다들 먼발치서 흘끔거리기만 하고 다가오지는 못했다.
시빌도 오늘 다른 손님들과 친목을 다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파티에 불참해서 움츠러든 인상을 주는 것보다는 남들이 뭐라 하든 무시하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참석한 것뿐이었다.
안 그래도 자신과 로제는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어리고 인맥도 없다시피 했다. 바넘 가는 갓 진출한 후발주자인 데다 일가족이 흉흉한 사건으로 급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로제도 오래 전 아버지가 죽은 뒤 저택에 칩거하며 살아왔다. 양어머니 엠마 자우어와의 관계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결정적으로 누구나 한 번쯤 노려보고 싶었을 로제의 남편 자리를 시작부터 차지하고 나타난 남자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배경이니 출신이니 다 떠나서 그저 마주보기만 해도 어쩐지 마주해서는 안 될 존재를 보고 있는 듯 소름이 돋게 하는 남자였다.
사실은 시빌 역시 로제가 저 남자를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마저도 동화 속 왕자님보다는 공포 영화의 흡혈귀 백작을 떠올리게 했다.
지난 사건 때는 자신에게 씐 악마가 저 남자를 해칠 뻔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죄책감이나 저 남자의 정당한 경계심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지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역시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지사님의 판에 박은 축사와 인사말이 끝나자 로제는 곧장 칠면조와 각종 요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시빌은 그 배포에 감탄하는 마음으로 자기 파트너와 함께 따라갔다.
그래도 지사의 추수절 파티는 근사했다. 넓은 정원 전체가 꽃과 리본, 풍선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게 고풍스러운 정원 조각상들과 어색한 구석 하나 없이 잘 어울렸다. 초청된 악단의 연주도 훌륭하고 음식도 맛이 좋았다. 날씨가 적당히 화창한 건 물론이었다.
로제는 칠면조를 포식하고 시간이 남자 볕 좋은 벤치에 기대 앉아 유진과 시간을 죽였다. 남들의 화기애애한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러다 당연한 수순으로 로제의 눈꺼풀이 감겼다.
유진은 부인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약간 고치고, 로제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부채를 받아서는 펼쳐들고 그늘까지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벤치의 일부가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저런 음산하고 수상한 남자와 결혼하다니 로제 오베르의 앞날도 뻔하다고 수군대던 사람들도 그 모양을 주목했다.
원래 본색을 드러내기 전엔 다 저런다고 꿋꿋이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은근히 자기 남편의 얼굴을 보며 기색이 달라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남자들은 점차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그 중 어느 중년 남자가 앞장서서 그 벤치로 다가갔다. 포도주를 너무 마셨는지 얼굴이 벌겠다.
유진은 그 자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먼저 나직이 말했다.
“부인은 잡니다. 사업상 이야기라면 나중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겠다는 태도에 그 자의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착하기만 한 어린 멍청이 꼬드겨서 한 몫 잡아보려는 주제에...”
유진은 여전히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그 자와 눈을 마주쳤다.
“로제가 너무 착하긴 하죠. 아니었으면 날벌레 따위 자는 옆에서 윙윙대기도 전에 당장 눌러 죽여버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