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낮은 산맥 하나만 넘으면 사막과 인접하는 곳 치곤 케일란 백작령은 한여름에도 그렇게까지 덥지 않았다.
그 낮은 산맥이 델로레인 바람을 막아주고 산맥과 더불어 좁은 삼각형의 다른 긴 변을 이루는 렌츠 강이 영지를 따라 쭉 흐르는 덕이었다. 쐐기처럼 좁고 긴 영지라도 강 때문에 교통은 편리했다. 백작령의 중심지인 케일란 성은 하지제를 앞두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새 용사들이 다시 마왕을 퇴치한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날짜는 아직 일주일도 더 남은 지금도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로 흥청거렸다. 축제를 맞아 선 큰 장터 덕분에 영주성 내부까지 소란이 들려 시끄러웠다.
“집중을 할 수가 없네.”
케일란 성의 음유시인인 알렉시스 혼은 쓰고 있던 서사시를 접어두고 일어났다.
“잘 생각했어! 이런 날 컴컴한 굴속 같은 방에서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지금까지 알렉시스 옆에서 외부의 소음을 증폭해 전달해주고 있던 아가씨가 표정이 환해지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아비게일 아가씨, 저는 나간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만.”
“그치만 그만 쓰고 일어났잖아?”
검은 색에 가까운 진갈색인 알렉시스의 눈과는 다른 연파랑 눈동자가 생글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시스는 한숨을 내쉬고 아비게일의 ‘적갈색이라고 본인은 힘써 주장하는’ 밤색 머리카락을 슥 쓰다듬었다.
“네에, 갑시다. 여기 있어도 시끄럽고 저기 있어도 시끄러울 거라면 아가씨 응석 정도 못 받아줄 것도 아니긴 하죠.”
“응석이라니, 난 애가 아냐!”
“아가씨도 스물 세 살이 되어보세요. 열 여섯은 아주 애로 보인답니다.”
“치이, 다 알렉시스를 위해서 데리러 온 건데.”
말은 그렇게 해도 아비게일이 신이 나서 그를 잡아끌었다.
“잠깐만요, 뭐 좀 걸치고.”
알렉시스가 검은색 짧은 케이프를 꺼냈다.
“그거 안 어울려.”
“아무리 그러셔도 갈색 로브 같은 건 안 입을 겁니다.”
두 사람이 알렉시스의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아비게일은 귀족 아가씨 답지 않게 짧은 튜닉에 바지를 입고 가죽으로 만든 가슴 보호대까지 하고 있었다. 궁수의 복장을 흉내낸 것이지만 활은 들고 있지 않았다.
“장에서 온갖 신기한 걸 판다고. 알렉시스에게도 재미있을 거야. 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줄게. 하지제잖아, 하지제. 이럴 땐 먹고 놀고 즐겨야지 그런 텁텁한 서사시나 쓰고 있고...”
“아가씨도 새 용사들에 대한 서사시는 좋아하시잖아요.”
“그야 미테가 활약하니까!”
아비게일이 자기 일처럼 가슴을 폈다.
“아, 맞아 콘라드 아저씨가 극단도 불렀다고 했어. 배우도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래. 오늘부터 축제날까지 공연한댔어. 새 영웅 이야기로.”
“네?”
알렉시스가 발을 멈췄다.
“그런 이야긴 못 들었는데요.”
“그야 알렉시스는 밤이나 낮이나 방에만 틀어박혀서...”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일단은 제가 이 성의 음유시인이라고요? 여기서 공연을 하려면 당연히 제가 사전에 극본을 심사해야 한다고요.”
“어차피 알렉시스가 하는 일은 그 서사시 쓰기 밖에 없잖아.”
아비게일은 별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
“자, 자. 빨리 나가자.”
이들은 이미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고개를 돌려 성을 흘끔 바라보았다.
‘콘라드가 초청했다고? 무슨 꿍꿍이지?’
지금 당장 쫓아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대답해줄 리도 없고 아비게일은 팔이 빠져라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백작이 되실 아가씨가 그렇게 품위 없이 서두르시면 안됩니다.”
팔이 뽑히기 전에 따라가며 알렉시스가 잔소리를 했다.
“열여섯이나 되셨으니 보다 기품 있는 태도를 취하셔야지요.”
“아, 재미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재미없는 소리가 아니라 충언입니다. 아가씨께서 빨리 하셔야 할 일은 장터에 가서 노는 게 아니라 철이 들고 어른스러워지시는 겁니다.”
“치이, 또 그 소리.”
아비게일이 알렉시스에게 눈을 흘겼다.
“예절 같은 거 허례허식에 불과해. 미테가..”
“미테렌시드가 그 말을 한 건 거만한 중앙 귀족이 포트덤 사람들이 차린 예의를 무시했을 때였죠. 본인이 궁정에 머무를 때는 책잡히지 않을 만큼은 예의범절을 제대로 지켰습니다. 미테렌시드는 용사지만 학자이기도 하고요. 유물 발굴 체계를 정비하고 고대사를 연구한 업적도 좀 본받으시면 어떻습니까.”
“잔소리쟁이, 축제날까지 꼭 이래야겠어?”
“아직 축제날 아닌데요.”
“아무튼!”
아비게일이 알렉시스의 팔을 놓고 획 돌아섰다.
“그렇게 싫으면 마음대로 해. 나 혼자 갈거야.”
말로는 그렇게 해도 아비게일은 먼저 마구 달려가 버리지는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곧 알렉시스가 걸음을 재촉해 옆에 와 붙었다.
“혼자는 못 보냅니다.”
“왜, 본성 코앞이 위험하기라도 해서?”
“축제 기간이라 타지에서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몰려드는데요. 당연히 조심을 해야지요.”
“누가 감히 날 건드린다고.”
“지나가던 외부인이 아가씨가 백작 영애인줄 어떻게 알겠어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도 가문의 휘장을 두른 것도 아닌데.”
“난 축제에 맞게 차려입은 거야.”
아비게일이 주장했다.
“네, 그렇다고 합시다.”
이 건으로 싸워봐야 소용 없어 알렉시스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겉모습만 보면 아비게일은 조금도 귀족다워보이지 않았다. 빈말로도 기품 있다고는 할 수 없는 태도도 그렇지만 부스스한 다갈색 머리와 햇볕에 탄 얼굴 때문이었다.
활쏘기나 승마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다. 누가 갈색머리를 햇볕에 쪼이면 빨간머리가 된다고 한 말을 곧이듣고 공연히 햇빛에 나가 서 있다가 피부도 머릿결도 왕창 상해버린 것이다. 뒤늦게 아가씨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된 알렉시스가 머리카락을 햇빛으로 탈색시키려면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쬐어도 몇 달이 걸리며 그 동안은 얼굴과 손이 타지 않도록 두껍고 검은 천으로 가린 채 창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참을성 부족한 아비게일은 하루 시도하고 포기했고 앞으로는 무슨 말을 들으면 시행하기 전에 꼭 알렉시스와 의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약속을 받아낸 건 다행이었지만 이미 상한 머리카락과 피부는 겨울이나 되어야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보고 있으면 속이 상해 알렉시스는 아비게일에게 모자나 베일을 쓰고 다니라고 잔소리했지만 오늘도 그는 맨얼굴로 당당하게 장터를 활보했다.
“내가 아가씨 때문에 늙지, 늙어.”
“정말로 이건 축제에 맞춰서 꾸민 거라니까?”
알렉시스가 혼자 한탄한 건 어찌 밝히 듣고 아비게일이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켰다.
“봐, 저 사람도 갈색 로브를 입었잖아.”
“제 눈엔 먼지가 많이 묻은 회색으로 보이는데요.”
“어때, 영웅들도 길 돌아다니고 고생하다보면 옷에 먼지가 많이 묻었을 거야. 설마 리온이 정말로 완전 갈색을 통으로 입었겠어. 낡고 먼지 묻은 옷을 그렇게 표현했을지도....”
“저기요, 아가씨. 그 분은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설의 영웅이기 이전에 우리 나라의 왕족이십니다. 함부로 이름을 불러제끼다니요.”
“하지만 미테는 리온이라고 불렀는데.”
“두 분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우셨으니까요. 아가씨는 아니고요.”
아비게일의 입이 댓발은 나왔다. 저대로 또 떼를 쓰게 할 수도 없어 알렉시스가 서둘러 시장 좌판을 둘러보는 척 했다.
축제의 장터에서 장사를 하려면 꽤 높은 수수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벌여놓은 상품들은 대체로 비싸고 질이 좋은 것들이었다. 혹 눈길을 끄는 물건이라도 있을까 알렉시스가 죽 상품들을 둘러보았다. 아직은 시장 입구라 외부에서 온 상인이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이 소위 특산물을 판매하고 있었다. 일종의 특혜이지만 케일란 영지는 살기는 좋아도 딱히 타지역에는 없는 가치 있는 뭔가가 나는 건 없어서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버리곤 했다.
알렉시스 역시 축제가 끝나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물건들은 무심히 넘기며 지나쳤다. 그러다 과자를 튀겨 파는 노점 앞에서 둘 다 발걸음이 멎었다.
“자아, 어서오세요. 갓 튀겨서 맛있어요. 크림도 발라드릴게.”
두 사람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밀가루 반죽을 튀겼을 뿐인 과자지만 장터에서 먹으니 맛있는 것 같았다. 과자를 시작으로 고기 꼬치도 사먹고 물 탄 포도주에 과일을 넣어 끓인 걸 시원하게 해서 파는 걸 보고 그것도 사마셨다.
“아예 고기 파이도 사먹을까?”
아비게일이 제안했다.
“그건 뭐하러요, 오늘 저녁에 나올텐데.”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몰랐어요? 로렌츠씨는 큰 행사 앞두고 열흘에서 일주일 정도 전에 예행연습 삼아 축제 요리를 간소하게 해서 내놓잖아요.”
아비게일이 멈춰섰다.
“전혀 몰랐어.”
“아가씨는 관찰력이 없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눈이 얼마나 좋은데.”
“그거랑은 좀 다르답니다.”
그러다 알렉시스가 멈춰섰다. 아비게일도 그를 따라 멈췄다. 그가 뭘 보고 그러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아까 아비게일이 가리켰던 먼지투성이 로브를 입은 사람이었다. 산에서 캔 약초나 산짐승의 뼈와 가죽, 색과 모양이 특이한 돌 같은 게 진열된 가게였다. 별로 유망한 손님은 아닌지 가게 주인은 천막 그늘 안에서 말로만 상대하고 있었다.
곧 그가 약초 한 묶음은 사가지고 가버렸다.
“마법사인가?”
아비게일이 말했다.
“어떤 점이 그래보이는데요?”
“일단 로브를 입었고.”
“도보 여행 중에 몸을 보호하려고 로브나 망토를 두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지팡이를 들었고.”
“마법 지팡이라면 보석 같은 게 달려있거나 적어도 장식이 되어있겠죠, 저렇게 그냥 긴 나무 막대기가 아니라.”
“약초를 샀잖아!”
“그래서 마법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법사라면 이런 아무 산에서나 뜯는 약초 같은 거 필요 없겠지요.”
아비게일이 그를 째려보곤 가게로 달려갔다. 알렉시스가 쫓아갔을 땐 이미 가게 주인에게 그 손님에 대해 캐물은 뒤였다.
“랑 버섯? 그건 왜 찾는대?”
아비게일이 물었다.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요. 스튜나 국수라도 끓여먹고 싶은가보지요.”
상인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건 가격이 안 맞아서 이쪽 장에는 안 내놓는다고, 정 구하고 싶으면 북문 근처 장터를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냥 먹어보고 싶은 것 뿐이라면 저 쪽에 국수 하는 데 있으니 가보라고도 알려줬고요.”
“그렇게 친절하게 알려준 답례로 비싼 걸 사갔고?”
알렉시스가 물었다.
“아까 보니 반짝이는 게 은화 같았는데.”
“타라곤이라고요. 비싸긴 해도 지금 한창 제철이라 질도 좋은 건데, 바가지 아닙니다.”
상인이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타라곤이 뭐야?”
아비게일이 물었다.
“요리에 사용하는 비싼 허브에요. 마법사가 아니라 요리사였나보네요.”
“....치이.”
아비게일이 시무룩해졌다.
“하프엘프라서 기대했는데.”
“네? 그랬어요?”
알렉시스가 놀랐다.
“말했잖아. 나 눈은 좋다고.”
흥미를 잃은 아비게일은 또 먹을 거 안 파나 두리번거렸다.
“귀 끝이 조금 뾰족했어. 머리카락에 덮여있긴 했어도. 다음에 보게 되면 뭐냐고 물어볼까.”
알렉시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가씨 보기에 갈색인 로브를 입은 갈색머리 하프엘프 청년이라니, 절대 다시 만날 일 없기를 빌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저, 아가씨. 시장도 좋지만 아직 일주일이나 전이라 빈 천막도 많은데 여기보다는 광장쪽으로 가보는 게 어때요? 신전에서도 뭔가 할텐데.”
“에이, 신전에서 행사 해봤자 뭐가 재미있겠어.”
“그래도 키멘의 선지자가 영웅 중 한명이잖아요. 영웅들의 여정 자체가 키멘의 계시에 의해....”
“일행을 이끈 건 미테야!”
“...네, 키멘의 계시가 미테렌시드를 용사로 선택했죠.”
“응.”
아비게일이 뿌듯해했다.
“그러니까 키멘 신전에선 당연히 용사들을 칭송하고 그 위업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을 거에요. 뭘 할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건..... 그래. 가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