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케일란 백작가는 어엿한 상위 귀족이고 영지는 살기 좋은 곳이지만 현금 자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산물은 풍부하지만 내다 팔 곳이 마땅치 않은 덕분이었다.
그래서 아비게일의 사교계 데뷔를 맞아 벨렘으로 올라가는 일행의 규모를 얼마나 잡아야 할지 알렉시스도 나겔도 고민이 많았다. 적게 잡자니 낮잡혀보일 것 같고, 많이 잡자니 비용이 걱정되고.
결국은 알렉시스의 주장대로 적은 쪽으로 했다. 어차피 정식 백작도 없이 후계자와 영주 대리 뿐인 일행인데다 레너 남작의 반역 건으로 벨레즈 귀족 사회가 떠들썩했던 후로 이 년도 지나지 않았다. 수행원 규모 늘린다고 안 얕잡혀 보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 상황이 안 좋아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생기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에브너 후작이나 리온 전하에게 비빌 각오를 하고, 별로 화려하지 않은 일행이 마찬가지로 별로 화려하지 않은 케일란 백작가의 수도 저택에 도착했다.
“큰일 났어요.”
알렉시스가 아비게일과 헤어져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를 따라 들어온 플로라가 말했다.
“무슨 일인데?”
알렉시스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적당한 드레스를 맞추기 어렵게 됐어요.”
“뭐?”
알렉시스가 돌아섰다.
“그야 우리가 좀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그래서 분명히 예약을 걸어두라고...”
“그랬는데, 드레스 유행이 갑자기 바뀌어서요.”
큰일을 전하는 것 치곤 침착한 태도로 플로라가 말했다.
“젊은 귀족 영애에게 어울릴 만한 소담하고 청초한 드레스는 이미 세 벌 확보했습니다만, 지난달부터 소문이 퍼지면서 다들 화려하고 기품 있는 드레스를 새로 맞추는 추세랍니다.”
“소문? 무슨 소문?”
알렉시스가 묻자 플로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이번 달에 보낸 보고서 안 보셨나요?”
“아, 그거 올라오는 일행이랑 길이 엇갈려서. 지금 다시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걸.”
애써 조사해 작성해 보낸 보고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말에 플로라의 기색이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수도 저택에도 마법사 한 사람 쯤 고용해달라니까요!”
“마법사를 상주시킬 돈이 없다고!”
수도 저택은커녕 케일란 본성에도, 인장 마법사는 백작가의 주치의인 발레리아경 한 명 뿐이었다. 단지 수도 소식을 빨리 받아보기 위한 목적으로 수도 저택에 마법 전서구를 쓸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를 고용하는 건 아주 부유한 영지에서나 할 돈지랄이었다.
안 그래도 케일란은 마법사가 부족했다. 큰 영지에는 흔히 마법 감시관이 상주하는 마탑의 출장소가 있지만 케일란은 범죄율이 낮고 마법 범죄는 더욱 없어서 그나마도 없었다. 범죄율이 낮은 건 좋지만 덕분에 케일란은 단순 주문 사용자도 다른 영지보다 턱없이 적었다. 마법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을 알아보고 가르칠 마법사가 없으니까.
“벨렘에서 너무 멀어서 그래.”
알렉시스가 푸념했다.
“여기 바로 옆이었으면 똑같은 영지라도 훨씬 부유했을 텐데.”
“훨씬이 뭐에요, 승작도 노릴 수 있을 걸요. 벨렘에선 봄엔 밀 한부대가 10세크도 간답니다.”
알렉시스가 컥 소리를 내었다.
“그거 완전...”
“이번 데뷔탄트는 리오넬 전하께서 주관하시게 되었어요.”
플로라가 말했다.
“위치는 애매하지만 서열 높은 미혼 왕족이고 오래 나라를 떠나있던 분이니 그것만으로도 연회가 성황이겠지만, 거기에 더해 사석에서 그 분이 이번에 왕후감을 물색하겠다고 말했다나봐요. 그래서 올해 데뷔하는 사람들 말고도 귀족들이 엄청나게 몰릴 거에요.”
“백 년 넘게 혼자 살아놓고 왜 새삼?”
알렉시스가 묻자 플로라가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건 대공비. 이번에 뽑으려는 건 왕후. 막시밀리안 폐하께서 상처하신 지 2년이 넘었으니까 슬슬 재혼을 생각하실 때가 되었잖아요.”
“아.....”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래서 청초하고 발랄해보이기보다 위엄 있고 기품 있어 보이는 드레스가 주류가 되었단 말이지? 그거라면 걱정 없네, 아비게일은 이제 열여덟 겨우 되어서 서른도 훨씬 넘은 국왕 폐하의 짝으론 안 맞아. 백작위를 달리 계승할 사람이 없는 건 물론이고.”
플로라가 알렉시스를 빤히 보았지만 알렉시스는 못 본 척 했다.
“그러니까 젊은 취항 드레스로 충분하다고요?”
플로라가 원래 화제로 돌아왔다.
“아비게일에게 우단과 보석을 잔뜩 붙인다고 생각해봐. 어울리지도 않을 거고 답답하다고 싫어할 거라고. 어차피 우리 목적은 케일란으로 데려가서 안주인을 시킬 만한 영식을 낚는 거지 왕후 자리 같은 건 거저 준대도 곤란해.”
“소박하네요.”
플로라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후보로라도 이름을 올려서 케일란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런 건 아비게일이 하고 싶으면 결혼하고 정식 백작이 된 다음에 할 거야. 난 아비게일이 죽거나 케일란이 망하지만 않으면 돼.”
“왜 그렇게 야망이 없는 척 굴어요?”
플로라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동생의 자리를 뺏으려 든다고 견제 받을 까봐?”
“아니, 내가 게을러서.”
알렉시스가 하품을 했다.
“며칠째 마차를 타서 좀 쓰러질 것 같거든. 시비 다 걸었으면 나가주지 않겠어?”
“알현 신청서나 잊지 말아요. 리온 전하는 공식 행사에 거의 참석을 안 하니까, 제대로 국왕을 알현하지 않으면 데뷔탄트 무도회에 참석할 방법이 없다고요.”
“.....알았어.”
플로라가 나가자 알렉시스는 침대에 푹 쓰러졌다. 몇날 며칠을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걸어서 이동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몹시 힘든 일이었다.
‘요새 새로 나오는 마차 중엔 훨씬 빠르고 거의 안 흔들리는 마차도 있다던데.’
플로라 말처럼 영지를 번영시킬 계획을 짜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번영까지는 아니어도 계속 이렇게 돈도 마법사도 없이 살다 보면 시대에 뒤처지는 시골뜨기가 되는 건 순식간일 것 같았다.
‘모르겠다. 그건 아비게일하고 말해봐서.... 내일.......’
아침 해가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비게일이 눈을 떴다.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건 별로 귀족다운 일이 아니라지만 잠이 안 오는데 억지로 누워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시녀를 깨우는 것도 좀 미안했기 때문에 아비게일은 손수 실내용 가운을 걸치고 살금살금 방 밖으로 나갔다.
아비게일은 수도 저택에 온 게 처음이었다. 케일란 성에 비하면 아담한 4층집에 불과한 곳이지만 아비게일 눈에는 전인미답의 모험지로 보였다.
‘여긴 내 집이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두는 건 당연하잖아?’
그가 지금 아는 건 자기가 잔 곳이 집주인 방이고 옆방인 안주인 방에 아마 알렉시스가 들어있을 거란 정도였다.
들어오는 홀은 별로 넓지 않았고 정원이라 할 만한 곳도 보잘것이 없었다. 오래 주인이 집을 비웠으니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나무라도 더 갖다 심고 싶었다.
그냥 산에서 보기 좋은 어린 나무를 캐다 심으면 되는 케일란과는 달리 벨렘에서는 나무도 큰돈을 주고 사야 한다지만.
‘항상 수도에서 지낸다는 궁정 귀족들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그럼....’
알렉시스의 게으름에 맞춰주려는 건 아니지만 아비게일도 별로 출세욕은 없었다. 기왕이면 물려받은 것보다 더 부유한 영지를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 정도는 있지만 모략과 배신이 판치는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정적을 무찌르고 권력을 움켜쥐는 것 같은 사건은 이야기책에서만 보고 싶었다. 자기가 그럴 깜냥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꼭 그래야 할 만한 동기도 없었다. 게다가 알렉시스가 울상을 할 거다.
‘알렉시스는 게으른 것 치고는 성실하니까, 내가 하잔다면 싫어도 울며 쫓아올 것 같단 말이지...’
잔소리가 쫓아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복도를 지나가며 아비게일은 알렉시스의 방을 흘끔거렸다. 그는 늦잠꾸러기니까 혼자 돌아다니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
발목에 뭐가 탁 걸렸다.
와당탕!
그리 푹신하진 않아도 복도엔 카펫이 깔려 있으니 갑자기 넘어졌다 해도 아비게일이 어디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만은 죽은 사람도 깨울 수 있을 만큼 요란했다.
당연하게도, 알렉시스의 방에서도 우당탕 소리가 났다. 아비게일이 벌떡 일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비게일!”
“아, 안녕, 알렉시스. 좋은 아침....”
막 도주하려던 자세 그대로 아비게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오빠라고 알게 된 지도 일년 반이 넘었지만 오빠라고 부르자니 영 쑥스러워서 그냥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알렉시스도 오라버니라고 부르면 히이익 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아비게일은 매우 화났거나 놀릴 때만 그를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일찍 일어났네?”
“누구 덕분에.”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아니 난 그냥 복도를 지나갔을 뿐인데....”
아비게일이 자기가 넘어진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옆에 웬 옷걸이가 넘어져 있는 걸 보았다.
“....응?”
알렉시스가 가서 태연히 옷걸이를 일으켜 세우고 그 아래쪽에 매둔 가늘고 반투명한 실을 풀어냈다.
“함정이었어?!”
“혼자 돌아다니지 말랬잖아.”
알렉시스가 설교를 시작했다.
“케일란에서는 그래도 널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위험할 만한 것도 별로 없지만 여긴 벨렘이라고. 시녀도 보호자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어떡해.”
“누가 밖으로 나가기라도 할까봐. 집안만 둘러보려고 햇어. 아니 그래서, 날 잡으려고 덫을 놨단 말이야?”
“널 잡으려던 건 아니고 벨렘은 위험하다고 하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자.”
케일란에서야 둘이 좀 싸워도 다들 그러려니 하지만 여기선 어떻게 소문이 퍼질지 모른다. 아비게일도 그 생각을 안하는 건 아니어서 방에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날 잡으려는 덫 맞잖아. 설마 암살자 같은 게 저기에 잡히겠어? 애초에 날 암살해서 득되는 사람도 이제 없잖아.”
아비게일이 팔짱을 끼고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널 잡으려던 거 맞긴 한데 세상에 위험이 암살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알렉시스가 변명하며 자기도 실내복을 걸쳐 입었다.
“저택 안이라고 해도, 오래 방치했던 곳이니 낡아서 위험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고. 플로라 일행을 미리 올려 보내길 잘했지, 우리 오는 내내 여기 수리했다잖아.”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아비게일이 물었다.
“그렇게 항상 사방을 경계해대면 애인들이 뭐라고 안 해?”
“애, 애인들이라니 그런 거 없어! 게다가 왜 복수야, 내가 무슨 난봉꾼이야?”
“그렇지만 이전에 어윈이.”
“자,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우리 아비게일 아가씨가 늠름한 어른이 되기 전에는 연애 안 하니까 이번 알현부터 제대로 하자. 알았지?”
알렉시스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알현...”
그 말해는 아비게일도 긴장했다.
국왕을 알현하고 왕실 주최 무도회에 모습을 선보여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는다. 간단해 보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비게일처럼 이미 그 사회에 뿌리박은 보호자가 없는 경우에는 더욱. 명목상 보호자인 알렉시스는 귀족이 아니고 백작 대리로 일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기사작위를 받았을 뿐이라 본인이 알현 가능한 신분이 아니었다. 이 귀족의 통과 의례에서 아비게일은 혼자 집안을 대표해야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 어차피 수도에 뿌리박고 궁정 귀족이 되려고 온 거 아니고, 최악의 경우라도 케일란으로 돌아가 다신 안 오면 되는 문제니까.”
알렉시스가 위로했다.
“그리고 2, 30년 뒤에 내 아이가 또 이럴 거잖아.”
“아니지, 그 때는 원숙한 백작님이 옆에 있을텐데.”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오늘 알현 신청서 내러 갈 거야? 아니, 시종을 보내야 하나?”
아비게일이 물었다.
“솔직히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알렉시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귀족이 직접 서류 들고 왔다갔다 할 것 같지 않기는 한데 또 형식상 국왕께 올리는 내용이니 시종을 시켜 전달하는 건 불경할 것도 같고.... 데뷔탄트 참고 도서에는 예법에 대한 것만 잔뜩 다루지 이런 건 대충 넘어간단 말이야. 귀족이면 당연히 알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어떻게 할 거야? 틀렸다간 큰일날텐데.”
“뭐 내가 가면 되긴 해.”
아비게일의 걱정섞인 물음에 알렉시스가 가볍게 대답했다.
“가봐서 귀족이 직접 와야 했던 거면 내가 영주 대리이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시종이 가야 했던 거면 가문의 주인은 너고 나는 케일란 백작의 비귀족 방계에 불과하니 시종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면 되지.”
“....박쥐같아.”
아비게일이 말했다가 시무룩해졌다.
“그럼 난 같이 못 가?”
“왜... 왕궁 구경이 하고 싶어서 그래?”
아비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시스가 조금 고민했다.
처음 와보는 수도와 왕궁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막고 싶지 않았다.
“...뭐 괜찮겠지. 그래도 도착하면 두 발짝 떨어져서 고고한 척 하고 있어야 해. 알았지?”
